빛의 집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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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그시 미소를 짓는다. 그녀가 아무리 의심해도 나의 확신은 더욱 굳건해져만 간다. 마그리트가 옳았다. '환상은 우리가 믿는 곳에 있는 게 아니다.' 마르타 베크만의 진정한 삶은 말기 환자를 위한 침상이 아니라, 그림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산산조각 난 존재, 덧없기 짝이 없는 운명에게 비상탈출구를 열어주고 또 다른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들의 역할이 아닌가.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빛의 집』 中에서)


  예술은 죽어가는 자를 위한 선물이다. 예술가란 삶의 빛이 꺼져가는 이들을 저세상으로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육체는 왜소해지고 정신은 흐릿해져 갈 때 우리 삶의 남은 힘을 모아 예술에 투사한다. 뇌의 착각 말고 과학적인 증명으로 밝힐 수 없는 지점에 예술이 침투해 들어간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상태의 영혼은 그림과 문학, 음악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시공간을 파괴한다.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의 소설 『빛의 집』을 읽고 든 생각이다. 


  제레미 렉스. 네 살부터 열두 살까지 잘 나가는 인기 아역 배우였다. 스물다섯인 지금은 일한 지 삼 일 만에 해고되었고 제빵사 자격증이 전부인 청년이다. 퀴즈 프로그램에서 우승해 2인 여행권을 얻었다. 사랑하는 여인 캉디스와 함께 그녀가 좋아하는 그림인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보러 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사소한 다툼으로 결국 킹사이즈 침대 하나를 차지한 채 그녀에게 보낼 편지나 쓰고 있는 처지다. 곤돌라끼리 부딪쳐 필리프 네케르라는 남자를 만났고 그도 최근에 연인과 안 좋은 일을 당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제레미는 그에게 레스토랑 디너 이용권을 함께 사용하자는 낯 뜨거운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같이 저녁을 먹는 대신 휴대 전화 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제레미는 혼자 '빛의 제국'을 보러 가서 이상한 경험을 한다. 그림 속에서 빛나고 있는 주황색 불이 그의 눈앞에서 꺼진 것이다. 이층에는 두 개의 창문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 창의 불 하나가 꺼졌다고 경비원에게 말했지만 곧 폐관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빈 집에 살고 있는 유령이나 영혼을 탐지하는 일을 하는 필리프 네케르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분명 창문에 불이 꺼졌다고. 다음날 미술관으로 다시 그림을 보러 간 제레미에게 놀라운 일이 펼쳐진다. 검은 머리의 젊은 여자가 그림 속 창문을 열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제레미는 같이 온 필리프 네케르를 찾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빛의 제국'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제레미는 그 순간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각몽 안에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감사해 하면서. 그는 르네가 싫어하니 창문으로 들어오라는 여자의 부탁에 응한다. 검은 머리 여자는 자신을 마르타라고 소개한다. 르네가 누드화를 그릴 때 모델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그림 안에서 멍하게 앉아 있는 남자를 보기도 한다. 마르타는 그가 오류 때문에 말을 듣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마르타는 그에게 감미로운 밤이 되길 바란다고 말하며 사라진다. 제레미는 캉디스를 처음 만나던 순간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처음 그녀를 만나던 장소의 질감으로 펼쳐져 있었다. 방금 만든 크루아상을 가지고 그녀 방으로 들어설 때의 느낌이 살아났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발현되어 사랑으로 이어진 순간으로 돌아간 것이다. 장면은 다시 이년 후의 시간으로 바뀌고 날선 공방과 서로를 향한 원망이 없는 시절로 제레미를 데리고 간다.

  

  사분 삼십 초 동안 제레미는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 시간동안 그는 완벽하게 죽어 있었다. 그림 속에서 캉디스와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고자 제레미는 기이한 실험실로 찾아가 머리에 뚜껑을 쓰고 전극을 붙인다. 식물로 환각을 일으키고 다른 세계를 넘나들 수 있다는 전력 공사의 직원의 집에 가서 궐련을 피우기도 한다. 


  제레미는 '빛의 제국'의 그림 속으로 도피한다. 지금의 현실은 제빵사이긴 하지만 가끔 빵을 만들고 캉디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첼로 연주를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끝을 보지 못했다. 심장 전문의로 성장한 캉디스의 꿈을 위해 3만 달러를 투자했지만 그가 그림 앞에서 심장 이상으로 쓰러지자 골칫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돈을 돌려받는다. 어째, 점점 캉디스와의 관계는 멀어지고 이별할 것 같은 조바심이 춤을 춘다. 제레미는 마르타만이 그가 처한 현실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빛도 어둠도 완벽하게 지배하지 않는 시간. 지상에는 어둠이 깔려 있어 가로등에 불이 켜지고 이층의 방 두 개에도 주황색 불빛이 들어온다. 하늘은 아직 청명하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불온한 시간을 그린 그림 안에서 벌어지는 이상 야릇한 일을 그린 『빛의 집』은 시종일관 유쾌하다. 사랑에 빠진 자만이 벌일 수 있는 황당무계한 사건의 연속으로 결국 그림 속비밀을 밝혀가는 추리적인 재미까지 소설은 선사한다. 


  사랑에 빠진 자의 눈빛을 본 적이 있는가. 총명한 눈의 생기는 반쯤 흐려지고 그 혹은 그녀를 향한 집착으로 불이 꺼진다. 내가 이만큼 상대를 갈망하는데 반응이 없을 때 스스로 빛을 끄고 심연으로 들어간다.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는 자의 행동이다. 제레미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한 예술가가 남긴 그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한다. 누군가의 호출이든 구원의 외침이든 낮은 목소리에 반응한다. 


  완벽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무시와 냉대를 감내해야 한다. 『빛의 집』은 죽음으로 이르는 길에 예술이 있다면 고통과 절망에서 비껴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으로 쓰였다. 젊은 시절 화가의 뮤즈로 문학 속으로 침잠하는 시기로 완벽한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예술은 인간의 절망에 화답한다. 제레미가 그림 안에서 캉디스와 만났던 시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였다. 그는 좋았던 시절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미래의 행복한 순간을 미리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실존이고 현재로 기억된다. 과거는 흐릿해지고 미래만이 남는다. 마르타의 과거는 그녀 침실의 대형 거울 뒤에 숨겨진 채 보존된다. 현재는 죽음으로 건너가기 위한 단 하나의 장치로 발견되기를 기다린다. 절망과 사랑의 공통점은 그 끝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절망해서 죽거나 사랑해서 죽는다. 죽기 위해 절망하고 사랑한다. 완벽을 가장한 죽음이 우리 곁에 머물기를 바랄 때 예술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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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조경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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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자 세 개가 놓인 책의 표지를 열고 작가 약력을 들여다본다. 5년 만의 신작 소설집이라고 간결하게 적힌 띠지를 벗겨 낸다. 책을 읽을 때 그런 것은 신경이 쓰이므로. 전부 읽었구나. 조경란의 책들을 빠짐없이 읽었다니 새삼 감개가 무량하다. 『식빵 굽는 시간』은 두 권 사서 읽었다. 한 권을 사서 읽고 꽂아 두었는데 잃어버려서. 그런 때였다. 책이란 책은 모조리 나의 책장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살던.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에 실린 소설 「저수하樗樹下에서」의 주인공 '나'는 책장만 열일곱 개를 가졌다. 그 책장을 이고 이사 다닐 집을 구하고 있다. 


  책장 열일곱 개를 가진 마흔여섯의 소설가는 가까운 곳에 산이 있고 재래시장이 있는 이층 집을 마음에 들어 한다. 보증금 8천에 월세 80인데 모자란 보증금 생각은 하지 않고 월세 낼 걱정만 한다. 집을 옮길 때는 턱없이 모자란 집값 생각은 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 안을 꾸밀까 현실도피만 하기도 한다. 곧 그 집에 들어가 살 것처럼 굴기도 한다. 소설가의 모든 책을 사서 읽고 책장에 꽂아두는 것만으로 행복하던 시절에 조경란을 열심히 읽었다. 대화가 거의 없고 문단이 거의 나누어지지 않은 소설의 문장들을 따라갔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쓰인 소설을 묶자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다. 흘러가는 시간을 묶으면 책이 된다.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있기 때문에 소설을 쓴다. 조경란은 기억에 충실한 소설가이다. 서울 거리를 걷다가 외국의 낯선 곳으로 날아가 걷는다. 짐을 풀고 집의 상태를 확인하자 하는 일이 거리의 지형을 익히는 일이다. 야채가 싼 곳이 어디이고 서점과 화장실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 낯선 곳을 가고 걸을 때 필요한 건 물과 화장실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의 인물들은 로마의 거리를 충실히 걷는다. 지치지도 않은 채 일상을 살아온 이들이 내일을 포기하고 선택하는 일은 걷기와 그마저도 힘들어지면 버스를 타는 일이다. 받아올 것이 있다며 어머니의 부탁을 듣고 아들이 하는 첫 번째 일도 버스를 타는 일이다. 외국의 도시에서 유료 화장실을 찾아내는 일을 무리 없이 할 때까지 걷고 버스를 탄다. 


  구립 도서관까지 걸어가서 일을 하고 책을 반납한다. 시장에 들러 반찬거리를 사고 밤에 몰래 고무나무를 보기 위해 내려오는 아이를 만나 산책을 한다. 허리가 아파 다리를 꼬고 앉을 수 없을 때도 걷는 것으로 병증을 이겨낸다. 평지를 걷고 서서 글을 쓰는 일. 여름휴가 열흘 동안 비어 있다시피한 온천에서도 한낮 동안 미술관에 가기 위해 걷는다. 


  조경란 소설의 화자들이 움직이는 공간은 낯설지 않다. 집 주변과 시장 근처, 일로써 떠난 외국의 거리. 그 거리마저도 집의 풍경과 닮아 있다. 난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쓸쓸한 하루를 걱정하는 일도 돌아갈 집이 있다고 해서 덜어지지 않는다. 실 팔찌나 카펫을 사는 일은 쉽다. 외국에서라면 추억이 될 테지라는 감정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사지 않고 그 곁을 지키는 '나'는 조국을 떠나온 그와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시장 좌판에 놓인 양말, 가짜라서 더욱 반짝이는 반지, 빨아서 써도 좋을 에코백. 헐거운 지갑을 가진 이라도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물건이다. 서랍에 신지 않을 양말이 쌓인 모습을 보는 하루. 조경란이 그리는 인물은 하루치의 행복을 사서 서랍에 넣어두는 일로 내일을 기약하는 사람들이다. 서랍이 닫히지 않아도 양말과 천 가방, 손수건을 사서 넣어 둔다. 고민 없이 이층집을 계약하지는 못해도 찬이네 반찬에 가서 미역국을 교보 문고에 가서 『염상섭 문장 전집』을 살 수 있는 하루면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의자 세 개에 앉아 있다. 


  비어 있는 의자를 바라본다. 누구든 걷다가 지치면 앉을 수 있는 의자 세 개를 가진 사람으로 살고 싶은 이들을 그린 소설집을 5년 만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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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돼가? 무엇이든 -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이경미 첫 번째 에세이
이경미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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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소설가 위화가 라디오 방송에 나왔을 때의 일이다. 진행자가 당신의 성공 비결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단숨에 운이 좋아서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통역사도 진행자도 함께 웃었다. 열심히 했다, 좋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뻔한 말이 들려올 줄 알았다. 위화는 그저 운이 좋아서라며 담백하게 말했다. 진행자도 손뼉을 치면서 맞다,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내용은 다 믿을 수 없다. 성공하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며 크게 웃었다. 원래 좋아하던 작가였는데 그때 이후로 더 좋아져서 책을 찾아 읽었다. 


  원래는 치과 의사였다. 공산주의 국가라 수입은 시원치 않았다. 맨날 썩은 이를 들여다봐야 했다. 당에 속한 작가들은 놀러 다니면서 창작 활동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부러워서 글을 썼다. 계속 썼는데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진 못했다. 두 번째 장편 소설 『살아간다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후에 장이머우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유명세를 떨쳤다. 


  어쩌다가로 시작한다. 하늘의 기운, 우주가 도와줘서라는 허황된 소리 말고 운이 좋아, 어쩌다가 성공한다. 성공의 정의도 주관적이라서 그저 잘 데 있고 하루 세끼 따뜻한 밥 먹을 수 있을 정도여도 성공으로 여긴다. 더러 자기 계발서를 읽기도 한다. 성공하는 자의 습관이라고 읽어보면 나와는 거리가 멀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메모 열심히 하고 항상 긍정적인 사고를 하라고 한다. 반대다. 늦게 일어나고 일기도 겨우 쓰고 매사 부정적인 생각으로 하루를 보낸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고(7월에 쓴 전기의 양을 계산하면서 얼마 나올지 고민하고 의료보험은 왜 아직까지 안 나오나 연체되면 돈 더 내야 하는데 같은 비루한 걱정들) 타인의 표정을 살피며 나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건가 멍청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아랫집≫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이경미 감독의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을 읽으며 이거 내 얘기임? 내가 쓴 거 아니야?라는 공감이 마구 들었다. 이십 대 시절 첫 직장에서 겪은 일들이며 때려치우고 영화 학교에 들어가 안 되는 시나리오를 쓰기까지 어찌어찌 영화는 만들었는데 흥행이 안돼서 절망에 빠진 최근의 일까지 담담하고 솔직하게 그려 냈다. 영화를 보기만 했지 영화를 만드는 세계를 알지도 못하는 한국 영화 애호가인 나는 이런 이야기가 좋다. 짤막하게 쓰인 일기의 문구들이 마음에 와닿는다. 쓰레기를 쓰겠어라고 다짐하니 쓰레기가 써진다는 일기. 


  여신 이영애가 처음으로 단편 영화에 출연한다는 기사를 봤는데 이경미 감독의 작품이었다. 영화 ≪아랫집≫의 모티브는 감독의 실제 이야기였다. 제발 베란다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의 글을 절절히 썼는데 아랫집 남자는 감독을 뻔뻔함으로 쩔쩔매게 만들었다. 여자 혼자 살면 다 그러진 않겠지만 무서운 일이다. 전화번호 알아내서 매일 금연 일지를 보내고 밥 먹자고 연락하다니. 세상 끔찍하다.


  홍조 띤 얼굴로 열연하던 공효진의 분신은 감독 이경미였다. 딸의 행방을 찾으며 가위를 손등에 쑤셔 박고 갈비뼈가 부러지면서도 뛰어다니던 손예진은 이경미 감독의 일부였다. 이영애가 헬스 기구를 타며 아랫집을 공격하는 장면은 윗집 여자 이경미의 소심한 복수를 영화화 한 것이었다. '방구석 1열'에 나와 자신의 영화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하던 감독 이경미는 불면증을 달고 살 때 엄마가 보내준 문자를 지우지 않고 아직도 읽는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비밀은 없다≫이야기를 했으니 ≪미쓰 홍당무≫를 한 번 더 소개해 달라며 웃는 이경미는 고기를 좋아한다. 


  성공했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8년 동안 쓰고 준비한 영화가 잘 안돼서 절망에 빠져 있었다. 집 안에 틀어박힌 감독을 임필성 감독이 데리고 나갔다. 고깃집에서 ≪비밀은 없다≫를 좋아한다던 영화 기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결혼도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이런 상투적인 고사성어까지는 안 쓰려고 했지만 딱히 비유할 말이 없다. 감독이 밝힌 대로 300만 명을 잃고 한 명을 얻었다. 나쁜 일 뒤엔 좋은 일. 좋은 일 뒤에는 좋은 일이 있으면 좋겠지만 고사의 이야기처럼은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인생이란 게. 


  몸에 좋다는 약을 때려 먹고 박찬욱 감독의 마늘 액기스도 훔쳐 먹는다. 전세 난민이 되어 우울해 있다가도 거금 4만 4천 원을 들여 장을 본다. 『잘돼가? 무엇이든』은 성공한 감독의 성공기가 아니다, 절대. 절대라는 부정은 이경미 감독이 성공을 안 했다는 것이 아니고(긁적긁적) 내가 이만큼 되기까지 이런 좌절을 겪고 이겨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되지도 않는 감정 과잉의 기록이 아니란 소리다. 오해하지 마시라. 


  이 책은 사회성이 떨어지고 영양제 폭식을 일삼고 내 테이블에만 물을 가져다주지 않아 분노가 나려다 이게 아닌가 다시 소심해지는 한 사람의 괴랄한 기록이다. 인생의 낭비가 있다면 지나온 시절을 함부로 쓰고 방치하고 내버려둔 청춘을 보낸 기억이다. 박민규의 수필 「푸를 청 봄 춘」에 나오는 구절처럼 아직 우리에게 청춘은 오지 않았다. 청춘을 허무맹랑하게 보낸 자들이 청춘을 살 준비가 되어 있다. 쓰레기라도 쓰고 싶은 심정으로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를 준비하는 청춘의 시절은 끝나지 않았다. 여기, 무엇이든 잘 돼가고 있는 청춘들에게 보내는 책이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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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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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질지 선택할 권리가 없거든."

핼로런 씨가 내게 했던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맞는 말이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다. 충동이다. 이제는 알겠다. 하지만 가끔은 선택해야 하는 때가 있을지 모른다. 최소한 사랑에 빠지지 않는 쪽을 선택해야 하는 때가. 저항하고, 거기서 멀어져야 하는 때가. 핼로런 씨가 댄싱 걸을 사랑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C.J 튜더, 『초크맨』中에서)


  C.J 튜더의 데뷔작은 『초크맨』은 놀랍다. 여름을 맞이하여 영국에서 날아온 스릴러 한 편이 더위를 잊게 만든다. 잘 짜인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소설은 성장 소설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 뻔한 성장 소설이 아니어서 이야기를 주무르는 솜씨가 만만치 않아서 놀랍다. 신인 작가이지만 대가의 능수능란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야기를 많이 쓰고 읽은 자의 소설이다. 어느 지점에서 독자의 호흡을 멎게 하고 다시 숨을 쉬게 할지를 알고 있다. 


  소설은 앤더버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열두 살을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애드워드 애덤스이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에디라고 불리는 '나'와 뚱뚱이 개브, 메탈 미키(교정기를 끼고 있어서), 호포와 니키는 한동네에서 나고 자라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며 어울려 다닌다. 자전거를 타고 숲속 주변을 떠돌고 뚱뚱이 개브의 생일날이면 어떤 선물을 줘야 개브가 좋아하지를 고민하는 아이들이다. 


  축제 때 아름다운 댄싱 걸의 사고 현장을 에디는 바로 앞에서 목격한다. 댄싱 휠의 축에 달린 회전 링이 부러지면서 댄싱 걸의 얼굴과 다리를 자르고 지나갔다. 에디는 숨이 막혀 도망가려고 한다. 바로 옆에 쓰려진 댄싱 걸이 에디에게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때 얼굴이 하얀 남자가 나타나 다친 아가씨를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을 차리고 에디는 남자의 말대로 댄싱 걸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응급 처리를 잘한 덕분에 댄싱 걸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을 살리고 다리를 접합했다. 신문에서는 하얀 남자와 에디를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얼굴이 하얀 남자는 핼로런이라는 이름의 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는 마을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먼저 들어와 있다가 사고를 목격하고 댄싱 걸을 구했다. 그녀의 이름은 일라이저였다. 끔찍한 사고였지만 일라이저는 살았고 관심도 줄어들었다. 에디와 친구들의 열두 살의 시간을 천천히 흘러갔다. 뚱뚱이 개브의 생일날 누가 준지도 모를 분필 여러 통을 받기 전까지 아이들은 장난과 악의 섞인 농담을 반복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여러 색깔의 분필로 무얼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각자를 나타내는 색깔로 암호와 분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놀이터로 와, 숲속으로 라든지를 표시하는 기호와 초크맨을. 소설의 시간은 에디와 친구들이 열두 살인 1986년과 삼십 년이 흐른 2016년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초크맨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마을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먼저 에디가 메탈 미키의 형에 의해 폭행을 당했다. 에디는 메탈 미키의 형을 피해 다녔는데 초크맨을 보고 미키가 부른 줄 알고 놀이터에 갔다. 추잡한 짓을 당하고 있을 때 핼로런 선생님이 와서 구해 주었다. 


  자전거를 아끼던 메탈 미키의 형이 물속에 처박힌 자전거를 구하려다 사고를 당했다. 자전거가 너무 무거웠다. 미키의 형이 죽은 곳에 초크맨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니키의 아빠 마틴 목사가 폭행을 당했다. 그 옆에도 초크맨 그림이 잔뜩 있었다. 사고가 날 때마다 초크맨이 그 옆을 지켰다. 숲속에서 일라이저의 토막 난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이 있는 곳까지 초크맨이 안내했다. 


  2016년의 에디에게도 초크맨 그림과 분필이 날아왔다. 치매로 기억을 잃어 죽어간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단어와 싸우는 에디는 어른이 된 미키의 방문을 받는다. 미키는 삼십 년 전에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에디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다. 그리고 일라이저를 죽인 범인을 안다고도 말했다.


  스릴러의 겹을 쓴 성장 소설인 『초크맨』은 어른이 될 수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나이를 먹고 배가 나오고 머리가 벗어지고 기억력이 가물 해져도 어른이 될 수 없는 아이들이 나온다.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 결과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영원히 아이를 살고 있다. 함부로 예단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미화한다.  『초크맨』은 아이들의 세계는 명랑하고 밝은 기운으로 가득해야 한다는 관념을 집어넣는 어른에게 날리는 강력한 한 방이 담긴 소설이다. 우리는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의 악마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고민하면서 나이를 먹어간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 쪽을 선택한 사람만이 어른의 세계로 넘어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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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 : 태조 - 혁명의 대업을 이루다 조선왕조실록 1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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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역사를 어떻게 배웠느냐하면 노래 테이프로 시작했다. 그 테이프에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가 담겨 있었다. 1절부터 4절까지 따라 부르고 외웠다. 노래에는 태정태세문단세라는 구절이 있다. 이해력은 떨어지는 아이였는데 어찌 된 게 암기는 잘했다. 노래를 4절까지 외워 부르고 태정태세문단세 다음을 찾아서 외웠다. 후에 그것이 조선의 27명의 왕이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으로 산 책은 유관순. 학급 문고에서 위인전만 골라 읽었다. 이래서 중요하다. 어렸을 때의 교육이. 국사 시간이 되자 신이 났다. 그때는 교과서 종류가 하나였다. 흑백 교과서에 색깔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공부했다. 선생님은 필기를 좋아하시는 선생님이어서 괄호, 쉼표, 번호 같은 걸 일일이 불러주면서 공부 시켰다. 비변사, 대동법 같은 용어가 기억에 남았다. 


  진단 평가를 봤는데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고 원나라 말기에 개혁 정치를 한 왕을 쓰는 문제였다. 분명 작년에 배웠는데 기억이 안 났다. 철종이라고 간신히 썼다. 당연히 틀렸다. 답은 공민왕. 선생님은 애들이 쓴 답지를 가져와 해괴망측한 답을 불러주면서 웃었다. 어떤 아이는 그 답에 아수라 백작을 써서 다 같이 웃었다. 내가 쓴 답을 이야기하면서 철종은 한참 후에 나온다라고 웃으셨다. 


  국사를 좋아했는데 백 점을 맞지는 못했다. 한두 문제가 아니라 여러 문제를 어렵게 꼬아서 내셨다. 그래도 좋았다. 그때 당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이 인기였다. 책을 사서 밑줄을 치며 읽었다. 이번에 다산북스에서 나온 이덕일의 『조선왕조실록』은 총 열 권으로 기획되었다. 그중에 태조 편인 1권과 정종·태종 편인 2권이 먼저 나왔다. 


  고려 말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백성의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 나왔다. 정몽주, 이색은 고려의 틀 안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온건 개혁파였다. 그에 반해 정도전, 조준은 왕의 성을 바꾸자는 목소리를 내는 급진 개혁파로 신흥 무인 세력으로 성장한 이성계와 손을 잡는다. 최영과 우왕은 명나라 정벌을 주장했다. 이성계는 4불가지론을 들어 정벌을 반대한다. 최영과 우왕은 완강했다. 이성계는 군대를 끌고 요동 정벌에 나섰다. 압록강을 건너기 전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다. 이것이 유명한 사건 위화도 회군이다. 왕명을 어기겠다는 것은 반역자의 길로 들어서겠다는 결심이었다. 


  급진파와 손을 잡고 신진사대부의 기반으로 나라를 세웠다. 조선이라 이름 짓고 이성계는 태조가 되었다. 불교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다. 유교를 근본이념으로 삼고 큰 나라 주변 정세를 살피는 교린과 사대주의를 함께 가져갔다. 태조가 왕위에 올라 정사를 펼친 건 6년 남짓이었다. 왕의 대를 잇기 위해 싸우는 자식들의 난을 지켜봐야 했던 쓸쓸한 말년이 남았다. 


그렇게 태조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혁명적 토지 개혁을 단행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랑과 고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 짊어질 수 있는 극도의 증오를 동시에 받으면서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가는 저승에는 함께 이 왕국을 만들었으나 먼저 왕국을 떠난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래는 언제나 그랬듯 살아남은 사람들이 몫이었다.

(이덕일, 『조선왕조실록 1』中에서)


  이덕일의 『조선왕조실록 1』은 조선이 세워지기 이전부터의 시간부터 위화도 회군 이후 숨 가쁘게 진행된 개국의 시간을 다룬다. 충분한 사료와 간결한 문체로 구성된 이 책은 우리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바로 볼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역사라는 깜깜한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 밝히는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올 이 책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성찰할 수 있게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다.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길은 역사를 아는 것으로 행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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