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처럼 문지 스펙트럼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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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책을 받으면 화장실로 달려갔다. 쪼그리고 앉아서 이야기 부분만 찾아서 골라 읽었다. 다리가 저릴 때까지. 텅 빈 고요를 느끼며 활자를 읽어나가는 시간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삶은 심심하고 막막했을 것이다. 화장실 한편에 책의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얇고 가벼운 책으로. 그 안에 든 내용 역시 심각하지 않고 발랄한 이야기로 채워진 책으로. 한 면에 이야기 하나씩. 화장실 독서는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책과 물은 상극이라 책은 이내 우글거리고 구겨졌다. 물기에 젖은 종이를 넘기는 기분 역시 괜찮다. 글자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화장실 안에서 살고 있는 책의 운명은.


언제 책을 읽을 것인가?

이건 중차대한 사안일 뿐만 아니라,

누구나 떠안고 있는 만인의 고민이기도 하다. 

책 읽을 시간이 고민이라면 그만큼 책을 읽을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들도, 학생들도, 어른들도. 다들 살아가는 일에 치여 책 읽을 짬이 없다. 생활은 독서를 가로막는 끝없는 장애물이다.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中에서)


  다니엘 페나크의 에세이 『소설처럼』은 우리가 문학이라는 열병에 빠지게 된 순간으로 데리고 간다. 문학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갈구해 마지않던 최초의 시간으로 말이다. 언제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하는 과정인 『소설처럼』을 읽고 나면 책상에 앉아 글자에 눈을 박고 있던 어린 우리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책 읽기가 즐거워지는 순간에서 부모 혹은 어른의 강압에 의해 주입식으로 책을 읽었던 과정을 지나 오로지 책이 주는 환희에 젖는 흐름을 이야기한다. 


  글자를 모르던 아이에게 부모는 책을 읽어주는 것으로 세상과의 연결을 시도한다. 아이는 부모의 목소리에 의지에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과 우정, 배신, 괴물의 출현, 영웅의 모험담을 접한다. 하루 15분. 부모와 아이는 온기를 주고받으며 목소리에서 목소리로 이어지는 다정함을 교감한다. 그러다 아이가 글을 읽기 시작하면 부모는 잠시 떨어진다. 책을 사주고 추천해준다. 읽고 나서 책의 내용을 질문하고 다음 책을 읽으라고 말한다. 다니엘 페나크는 이 과정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강압적으로 책 읽기의 즐거움을 빼앗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우리 아이는 책을 사랑하는 책벌레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는 책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저 좋아할 수 있도록 놓아둘 것.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더한 책 읽기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대화라고는 거의 없는 4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한다. 책상에 앉아 그 책을 읽는 아이의 뒷모습은 우울해 보이기까지 한다. 『소설처럼』은 책 읽기를 의무나 압박이 아닌 소설을 읽을 때처럼(소설이란 이야기의 힘으로 쓰인다. 이야기란 힘이 세다.) 이야기를 따라 읽는 방식으로 해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서다. 부모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건 이야기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왕자와 공주, 거지, 마법에 걸린 사람들과 거짓말에 속는 소녀의 이야기로 아이는 책이라는 건 즐겁고 흥미로운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 있기 때문에 집을 짓는다. 그러나 죽을 것을 알고 있기에 글을 쓴다. 인간은 무리 짓는 습성이 있기에 모여서 산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독서는 인간에게 동반자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 자리는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자리도,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中에서)

  

  『소설처럼』에서 나는 내가 가진 책 읽기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는다. 소설을 좋아해서 소설만 편애하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순간들은 나를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 혼자이기 때문에 책을 읽고 혼자라는 사실을 잊기 위해 소설로 향해가는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는 이야기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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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발 짧아도 괜찮아 3
금희 외 지음 / 걷는사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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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는사람에서 나오는 '짧아도 괜찮아' 시리즈 세 번째 주제는 '추리소설'이다. 이 기획을 응원하고 있어서 책이 계속 나온다면 살 생각이었다. '추리소설'이라는 주제를 듣고는 바로 주문해서 읽어버렸다. 추리 소설의 좋은 점은 시간을 잊게 만든다는 것이다. 시간이 시간인지도 모르게 말이다.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을 쫓는다. 범인인 것 같은 사람을 보여주고 후반부에서는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준비한다. 작가는 독자와 심리 게임을 단단히 준비해 놓은 듯한 추리 소설을 읽으면 시간은 뭉텅이로 잘려 나간다.


  그간 한국 문학에서 추리는 장르문학이라는 틀에 묶여 자유로운 외출이 어려웠다. 물론 한국에도 훌륭한 추리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있다. 그럼에도 장르문학의 한계에 갇혀 독자들과 소통이 어려웠다. 『시린 발』은 순수 문학에서(이 말도 좀 웃긴다. 순수한 문학이 있고 안 순수한 문학이 있다는 말인가)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이 추리라는 주제에 맞추어 짧은 이야기를 모아 놓았다. 총 열두 편의 이야기는 실종, 살인, 비밀, 기억을 추적한다. 


  소설집의 첫 번째 이야기 금희의 「실종된 아이」는 행복 아파트에서 사라진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소외된 사람들의 현재를 건조한 문체로 그린다. 안보윤의 「공교로운 사람들」은 전형적인 추리 소설의 기법을 따른다. 사라진 기억을 찾는 한 남자의 기억 찾기를 통해 추악한 비밀을 세상 밖으로 드러낸다. 「검은 솥」에서 우승미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더러운 인간들의 욕망과 그들을 복수하는 한 여자의 신산한 삶을 보여준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유의 「시린 발」은 오래 생각에 잠기게 한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아이의 병원을 찾은 견인차 기사의 서술로 밝혀지는 그날의 비밀은 슬프고도 처연하다. 임승훈의 「너무 시끄러워서」는 생활 밀착형 호러 소설로 읽힌다. 수산 시장의 아나운서로 일하는 '나'는 벽이 얇은 원룸에서 여러 명의 남자친구를 바꿔가며 살아간다. 그때마다 너무 시끄러워서 일을 할 수 없다는 옆집 남자의 무시무시한 압박 때문에 도저히 이곳에서 살 수가 없다. 돈이 있어서 이사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최대한 숨을 죽이며 살아간다. 공포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머나먼 세계에 관상용으로 있는 것이 아닌 바로 옆에 도사리고 있다는 암시를 주는 소설이다. 


  면접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고 임원들의 회의의 결정에 따라 다시 합격한 이야기로 전율을 주는 주원규의 「네 남자 이야기」는 실제로 그런 일들이 벌어질 것 같아 무시무시하다. 추리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없는 삶이란 얼마나 황량한가. 우리 인간이란 욕심 덩어리라서 원하는 일에 있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족속들이다. 그런 인간들이 범행 현장을 목격하고 사건을 일으키고 진실을 찾아 범인을 밝혀 내는 이야기에서 무료한 시간은 저절로 연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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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선의 영역
최민우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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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민우의 소설 『점선의 영역』은 예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전쟁고아로 자수성가한 '나'의 할아버지가 까무룩 정신을 잃고 집안 식구들에게 들려주는 예언으로. 명절에 모인 식구들을 향해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들려주는 예언은 대개 불길하고 어두운 징조로 가득했다. '나'의 고종사촌에 관한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고 식구들은 무서워하면서도 섣불리 예언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수능을 보고 할아버지에게 인사하러 들른 '나'는 유과를 먹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예언을 듣는 사람이 되었다.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날 거다. 소중한 걸 잃게 된다. 힘들 거다. 용기를 잃지 마라. 도망치면 안 돼."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뜻 모를 소리를 들려주고 얼마 후 돌아가셨다. 취직을 하기 위한 대학 생활을 보내지만 졸업 후에 취직은 머나먼 행성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여겨졌다. 열한 번 취업에 실패하고 본 회사의 면접에서 '나'는 빨간 재킷을 입은 면접관에게 할아버지의 일화를 말한다. 앞날을 보는 할아버지를 둔 이상한 일을 겪은 자신은 운명 앞에 겸허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점선의 영역』은 단순히 면접에 실패하고 의지를 잃은 채 좌절하는 인물들이 나오는 소설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나'와 연인 관계인 '서진'이라는 인물은 취업 관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프니까 청춘인 암담한 인생이다. 그들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이어갈 줄 아는 사람들이다. 어차피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전언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중반부로 가면 서진이 면접에 실패한 그날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건으로 이야기의 분위기가 바뀐다. 인턴 자리에서 밀려난 서진의 행동이 돌고 돌아 면접관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된 서진은 취업에 실패한다. 


  다만 그림자가 없을 뿐이다. 그런데도 서진은 자신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가볍고 이내 행복하다고까지 느낀다.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다. 나는 서진의 그림자를 찾아 주려 하지만 실패한다. 할아버지의 예언대로 만나면 안 될 사람을 만났고 소중한 걸 잃어버린 채 도망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너무 푸르고 너무 작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점으로 기억될 우리는 그 안에서 아등바등 인생의 직선 하나 그리지 못하고 살고 있다. 이름이 있어도 숫자로 불리고 해고는 쉽고 취업은 다른 세계의 일이 되어버린 지구에서 운명이란 용기를 잃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세계에서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면 된다. 어긋나고 뒤틀린 채 살아가는 것보다 그림자를 찾아다니며 하루를 보내는 게 이상한 세계에서 통용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실패와 절망 때문에 어둠으로 도망쳐 그림자를 지우며 살아가는 우리를 꺼내 줄 수 있는 건 사랑이다. 소중한 걸 잃게 되더라도 지켜 주고 싶은 한 사람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그림자를 데리고 올 수 있다. 사랑을 쓸 수 있는 직선의 획은 그렇게 완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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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 어른인 척 말고 진짜 느낌 좋은 어른으로 살아가기
박산호 지음 / 북라이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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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가 박산호의 이름을 알게 된 건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 44』를 읽으면서부터였다. 책 자체도 재밌었지만 막힘없이 흘러가는 우리말로 옮긴 솜씨가 놀라웠다. 그 후에는 로렌스 블록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름을 외워 버렸다. 탐정 매튜 스커더 시리즈를 계속 읽고 싶은 마음에 번역이 되지는 않았는지 이름을 검색해서 살펴보기도 했다. 외국 소설의 경우 번역가가 누구냐에 따라 글의 흐름이 달라지기도 한다. 좋아하는 외국 작가의 경우 꾸준히 한 번역가가 우리말로 소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름만 알고 다른 것들은 모른 채 책을 읽어 나갔다. 이번에 나온 산문집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박산호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모습들도 알 수 있는 책이다. 번역가로서의 일상은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로 알 수 있을 것이다(이 책도 사 놔서 곧 읽을 예정이다). 산문집을 좋아하는데 작가의 일상을 곁에서 바라보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산문집을 읽으며 하루에 시작은 어떻게 하는지,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지, 글을 쓸 때 어떤 도구들을 사용하는지 등의 세세한 일상의 무늬를 헤아려 본다.


  서른에 아이를 낳고 홀로 아이와 영국 유학을 떠나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전문 번역가로서 느끼는 어려움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어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어른이 아니다. 나이를 더 먹었다고 어린 사람에게 충고 비슷한 말로 상처를 주는 어른은 제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막말을 듣지 않을 권리와 상처받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알려준다. 혼자 아이와 영국 유학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어려움에 대해서는 남에게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해도 좋다고 이야기한다. 


  좋은 직업 가지고 아파트와 차를 사고 아이 둘 이상을 낳아 기르는 삶의 끝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아등바등 살면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놓쳐 버리지 말라고 해준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상에서 느꼈던 어려움과 이해의 과정들이 편안한 어조로 담겨 있다. 놀랄 정도로 아이들은 강하며 어른 보다 위대한 감정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부분에서 감탄을 했다. 우리 역시 아이의 과정을 거쳐왔음에도 어른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재단하고 규정하려고 했다. 


  나이 듦을 두려워하지 말고 조금 더 살았다는 거만으로 타인을 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에서 들려주는 충고는 따뜻하고 그가 느낀 솔직함의 언어가 더해지면서 나의 불안함을 위로한다. 주름살이 늘고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하더라도 우리는 책을 읽고 낯선 곳을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지혜를 쌓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책 읽기.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음에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다. 우리에게는 책이라는 어른이 있어 이토록 자상한 실패와 노력의 경험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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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건너오다
김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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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체의 위치를 나타날 때 필요한 것은 기준점이다. 기준점의 조건은 이렇다. 대화하는 사람이 모두 알아야 하고 위치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기준점을 가지고 있다. 불안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축조된 기준점이든 시시각각 변하는 위치를 가진 기준점이든, 각자의 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기준점을 당신과 나는 가지고 있다. 누구의 친구, 아내, 남편, 딸과 아들로서 말이다. 설명할 수 없어 빈칸에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채 골똘한 생각에 잠길지라도 이내 우리는 각자의 위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여행으로써. 


  고속버스에 앉아 잠을 청해 보려 하지만 오히려 정신만 말똥말똥하기도 하며 간발의 차이로 기차를 놓쳐 빈 역사 안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기만 할 때. 우리는 떠나온 기준점을 헤아린다. 출발 지점에 점을 찍어 방향을 가늠한다. 동쪽으로 40km, 북쪽으로 100km. 어떤 순간에는 방향을 놓쳐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 허망해지는 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문득 사는 게 그저 그렇지, 내가 돈을 버는 건지 돈이 나를 버는 건지 모를 때 이곳에서 '가장 멀리'에 해당하는 도착지로 가는 표를 끊는다. 


  김현우의 『멀어진다』는 특이한 여행 산문집이다. 책의 표지에는 '다큐 피디 김현우의 출장 산문집'이라는 표제가 박혀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알겠지만 그는 EBS에서 일하는 다큐 피디로서 이 책의 모든 여행지는 그가 회사의 업무로서 다녀간 곳이다. 책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사무엘 베케트의 묘지를 찾아간 것은 그가 유학을 했을 때의 기록이지만 나머지는 업무차 가서 일하고 보고 느끼고 쓴 기록이다. 사는 게 그저 그래서 어느 날 훌쩍 가방 하나 메고 떠난 여행의 기록이 아니다. 목적이 있으며 그의 기준점은대한민국 서울로서 절대 변하지 않는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변하지 않고 늘 같은 자리에 있는 무언가는 위로를 준다. 생각해보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대부분 변화다.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던 것이 새로 생길 때마다, 우리는 아쉬워한다. '길들여진 상태'가 편안한 만큼 의지와 달리 거기서 벗어나야만 하는 상황은 서운하고, 때론 아프다.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서 아프고, 흰머리가 늘어서 서운하고, 내일 해야 할 새로운 일은 어쩔 수 없이 두렵다. 

(김현우, 『건너오다』,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하늘엔 원래 별이 많다」中에서)


  『건너오다』는 변하지 않는 것들을 찾아가는 기록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그는 우리를 다정하게 위로하는 것이란 쏟아지는 별들, 지은 지 천오백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절 그리고 길 잃은 여행자를 위해 손짓 발짓 섞어가며 안내해주는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임을 이야기한다. 대학교 때 읽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무덤에서 그가 세상에 존재했음을 확인받고 존 버거의 현재를 만나기 위해 출판사에 찾아간다. 이 모든 행위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현재라는 순간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변하지 않고 여전히 그곳에 있는 실존을 마주하기 위함이다.


  여행자의 시간은 반복된다. 기준점에서 가장 멀리 가기를 희망한 방랑자의 시간은 돌고 돈다. 묘지 폐관 시간 때문에 오래 머물지 못해 아쉬웠던 순간을 나중의 만남으로 위로받고 존 버거를 만나지 못한 쓸쓸한 마음은 그의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환희로 바뀐다. 내가 살아온 기준점이 여전히 그곳에 잘 있는지 안도받기 위해 여행을 시작한다. 한 번 더 찾아가 익숙해진 여행지의 장소와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되짚어 보는 것으로 끝이 나기도 한다. 주소지는 그대로인데 사는 사람이 바뀌거나 건물이 사라지는 허탈감을 마주하는 것이 삶의 다른 얼굴임을 깨닫는다.


  유인원 연구소 촬영차 찾아간 오카야마에서 만난 침팬지 '잠바'의 일화가 유독 마음에 남는다. 침팬지 가족의 생활을 찍는 촬영에서 그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잠바에 주목한다. 여덟 명의(그곳에서는 침팬지의 수를 셀 때 마리라고 하지 않고 인격체의 의미를 담아 명으로 부른다) 침팬지 가족 중 알파 수컷이 아닌 잠바는 부상 중이었다. 잠바를 연구소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털은 갈색이다. 살집이 있고 우람한 몸집이다. 능란한 구애 방식은 로이에 버금갈 만큼 훌륭하다. 가끔 먼 곳을 바라보곤 한다.' 

  

  '가끔 먼 곳을 바라보곤 한다'라는 문장을 쓰기까지 연구소의 사람들은 잠바를 관찰하고 그가 시선을 두는 곳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이곳이 아닌 먼 곳. 먼 곳에 가닿은 시선과 그 시선을 바라보는 애정. 사랑이란 내가 바라보는 풍경을 함께 보는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밖에 없는 '잠바'의 소개에서 삶의 무한한 긍정을 만난다. 멀어지고 건너왔지만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길 위의 기록은 쓰는 것보다 살아가는 것이 좀 더 나은 일임을 깨닫는 것으로 끝이 난다. 끝이라고 했지만 끝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삶은 사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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