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녹는 온도
정이현 지음 / 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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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편의 소설과 열 편의 산문. 정이현의 『우리가 녹는 온도』는 독특한 구성 방식의 이야기책이다. 이야기 하나에 산문 하나가 실려 있다. 『우리가 녹는 온도』의 부제는 '그들은 나는 우리는'이다. '그들은'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허구다. 짧은 소설로 반려동물, 짧았던 첫사랑의 추억, 제주에서 만난 인연, 여행 계획의 온도차, 방 하나를 얻기 위한 가난한 연인의 하루, 우정과 사랑 사이, 커피의 취향,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훈련, 딸과 엄마, 일상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소재로 이야기를 꾸려 나간다. '나는'이라고 시작하는 산문은 소설가 정이현의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다. 소설 한 편을 쓰기까지의 과정, 이야기를 만드는 어려움, 삶의 고비를 넘기는 그만의 치유 방식이 들어 있다.


일요일 오전에 읽은 『우리가 녹는 온도』는 훌렁훌렁 잘도 넘어갔다. 암막 커튼을 치고 햇빛을 모른척하고 누워서 읽었다.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는데 좋은 책이었다. 따뜻한 이불과 좋아하는 인형들 사이에서 열 편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아니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 나이를 훌쩍 먹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장되지 않은 문장과 담담한 일상을 말하는 글에서 나의 하루를 위로받고 있었다.


사라진 것들은 한때 우리 곁에 있었다.

녹을 줄 알면서도, 아니 어쩌면 녹아버리기 때문에 사람은 눈으로 '사람'을 만든다. 언젠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사는 것처럼.

곧 녹아버릴 눈덩이에게 기어코 모자와 목도리를 씌워주는 그 마음에 대하여, 연민에 대하여 나는 다만 여기 작게 기록해둔다.

(정이현, 『우리가 녹는 온도』中에서)


바람만 불지 않는다면 완벽한 일요일. 나의 마음은 얼어 있다가 잠시 녹았다. 다시 얼겠지만 문장과 행간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소설가의 진심 어린 위로 덕분에 녹았다.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든 적이 있었다. 내일 아침 부신 햇빛에 다시 녹겠지만 긴 밤이 외롭지 말라고 장갑과 모자를 씌워 주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일은 그런 것이었다. 장갑을 끼워주고 목도리를 둘러 주는 일. 곧 죽을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저 내일 아침까지 견딜 수 있도록 지켜보아 주는 일.


익숙하지 않아 위로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소설가 정이현. 위로를 받기 보다 위로를 하는 쪽이 낫다고말한다. 그는 한 권의 책을 쓰는 것으로 얼어붙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위로의 방법을 택한다. 『우리가 녹는 온도』를 읽는 동안 반가운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왔고 얼른 위험한 이불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미세한 온기에도 녹아버리는 눈+사람. 다정한 한 마디를 들으면 눈물을 줄줄 흘리는 사람. 어차피 죽을 거란 걸 아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사라짐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요일 오전 위로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으로 시작하는 글을 쓰기 좋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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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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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그녀는 스무 살 생일을 보통날처럼 보냈다. 휴무를 바꿔줄 동료는 감기에 걸렸고 남자친구와는 사소한 다툼으로 연락을 하고 있지 않는 상태였다.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웨이트리스의 하루를 보냈다. 레스토랑 사장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은 없다.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것만 알았다. 매니저가 정확히 저녁 여덟시가 되면 치킨이 주요리가 되는 음식을 왜건에 실어 날랐다. 비가 오는 그녀의 생일날 매니저는 복통을 일으켰고 그녀가 대신 사장의 방에 음식을 전해주게 되었다.


벨을 누르고 기다렸다. 잠시 후 키가 작은 노인이 나왔다. 청결하고 주름 하나 없는 옷을 입은 백발의 노인. 오분 정도의 시간을 달라고 하면서 노인은 그녀에게 이야기를 청했다. 나이를 묻고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다는 그녀의 말에 사장은 선물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스무 살의 생일은 특별한 날이라면서. 어떤 소원이라도 상관없으니 한 가지를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한 가지 소원을 빌었다. 사장은 공중의 한 지점을 응시했다. 그 나이 또래가 원하는 소원의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줬노라고 했다.


스무 살 생일의 밤이 환상은 아닐까 생각하지만 그녀는 그 방의 가구와 장식물까지 기억날 정도로 생생하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의 일을 전하는 그녀에게 '나'는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소원이 실제 이루어졌는지와 소원으로 그것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냐는 것.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귓불을 긁적였다. 예쁜 모양의 귓불이다. "인간이란 어떤 것을 원하든, 어디까지 가든, 자신 이외의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구나,라는 것. 단지 그것뿐이야."

"그런 스티커도 나쁘지 않겠네." 나는 말했다. "-인간이란 어디까지 가든 자기 자신 이외의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버스데이 걸』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버스데이 걸』에서 그녀는 스무 살 생일을 맞아 이상한 제안을 받아 든다. 일하는 사장의 방에 음식을 가져다주러 갔다가 소원 하나를 획득하는 것이다. 생일과 관련된 이야기로 앤솔러지를 만들기로 마음먹은 하루키는 '버스데이 스토리'를 수집해 번역을 한다. 분량이 부족해 자신이 생일 테마로 소설 한 편을 쓴다. 『버스데이 걸』이 그 소설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일. 단 하루. 그날은 특별할까 아니면 보통의 날로 의미를 주지 않고 흘러가는 것을 보는 날일까.


소설의 주인공인 그녀는 그날의 이야기를 하지만 나에게는 소원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소원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그녀가 생을 끝까지 살아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는 소원이다. 인생이 길게 남아 있으니 소원이 이루어졌는지는 지켜봐야 알 수 있는 노릇이다. 후회하지 않았는가. 후회하기에는 그녀의 말처럼 '인간이란 어디까지 가든 자기 자신 이외의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라 후회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생일이라고 해서 딱히 무언갈 바라지 않는 인간으로 그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어느 하루의 평범한 날로 보내며 살아가는 것. 생일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나는 왜 스무 살 생일을 맞은 그 하루가 기억나지 않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 보아도 떠오르는 것이 없는 걸로 보아 삶을 후회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좀 더 살아보면 알겠지.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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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시절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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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대강 살리기를 하겠다고 온 강바닥을 파헤쳐 놓던 시절이. 지나고 보니 사대강 살리기가 아닌 죽이기였음을 알게 되었지만 하여튼 온 나라를 건설 현장으로 만들어 놓고 살았던 어느 때가 있었다. 재개발이라는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유혹했다. 시설금과 권리금 없이 내쫓길 줄 몰랐던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러다 이주비만 받고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망루로 올라갔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소리쳤지만 무자비한 강제 진압으로 불속에서 아름다운 목숨이 사그라졌다. 시골이라고 해서 피해 갈 순 없었다. 깨 심고 고추 모종해 놓은 밭에 뿌연 먼지가 가라앉았다. 아침 밤낮 할 것 없이 돌 깨는 공장은 으드득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공선옥의 장편 소설 『꽃 같은 세상』속 이야기이다.


재개발된다고 해서 좋아하던 영희와 철수였다. 그런데 웬걸. 이사비 몇 푼 쥐여주고 나가란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해 한 번 끼칠 줄 모르던 영희와 철수는 어린 아들 복주를 데리고 나와야 했다. 세 식구 꿈이 자리 잡을 횟집이었다. 집을 구하지 못해 어린애는 친척 집에 맡겨 놓고 트럭에 이삿짐을 실은 채 떠돌아야 했다. 그때 복사꽃의 분홍빛이 번지는 집을 발견했다. 팔십 먹은 무수굴댁이 세상을 떠난 집이었다. 혼이 되어 저승에 가지 못하고 빈 집에 남아 있던 무수굴댁이 영희를 반겼다. 대뜸 꽃이 좋아서 살겠다고 하는데 내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큰 아들 만택이 영희와 철수의 입주를 허락했다. 돈도 받지 않고 빈 집 지켜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장이 영희를 찾아와 서류를 내밀었다. 동네 레미콘 공장이 업종을 몰래 바꿔 돌 깨는, 채석장으로 공장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앞집 아줌마가 찾아왔다. 동네 주민이니 같이 모여 공장 앞에서 데모를 하자고 했다. 영희는 어린 복주도 돌봐야 하고 한복 기술도 배워야 한다. 얼떨결에 공장 앞으로 갔다. 육십, 칠십이 넘은 할머니들이 당하는 수모를 고스란히 봐야 했다. 젊은 사람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해서 영희가 대책 위원장까지 맡았다. 시를 쓰는 게 꿈인 영희는 탄원서를 쓰고 감사원에 낼 서류를 작성한다. 남편 철수는 그런 영희를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도 싸우는 게 힘들어. 하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나는 건 우리를 더 힘들게 할 거야. 복주야, 엄마는 지금 순양석재하고 싸우는 게 아니고 그, 뭐야, 어, 그니까, 그래 맞아, 내 속의 패배주의하고 싸우는 거야. 긍게, 내 속의 패배주의와 싸운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냐 하며는, 이기든 지든 결과에 상관없이 나를 억압하는 것과 싸운다는 것이여. 말하자면 긍게,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서 산다는 것이여. 주체적으로 산다는 거라고, 알겠지?"

(공선옥, 『꽃 같은 세상』中에서)


어린 복주는 영희의 말을 듣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우리 엄마!"라고 추켜 세운다. 철수는 욕을 하고 지리산으로 떠나버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희는 언니들과(처음에는 할머니였다가 아줌마 그리고 언니로 연대하는 그들을 부르는 호칭이 바뀐다) 군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 밥을 지어먹고 지나가는 사람들 불러다가 숟가락 쥐여주고 서울서 소설 쓰러 왔다는 해정의 집에 찾아가 자신이 쓴 탄원서를 보여준다. 집 한 채 없이 남의 집 빌려 사는 영희는 그런 저런 패배감 없이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 불법인데도 그걸 묵인하며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이야기하는 세상을 향한 춤판을 벌인다.


소설은 망자와 산자를 불러 놓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밥을 먹인다. 꽃 같은 시절을 지내보지도 못하고 죽은 이는 그 시절이 억울해서 노래를 부르고 꽃 같은 시절을 살다 왔다고 자랑하는 이는 신이 나서 춤을 춘다. 공선옥의 생생한 언어는 우리가 살아 있는 시절을 아름답게 꾸며준다. 곧 죽을 운명인 우리의 내일을 토닥여준다. 재개발, 철거, 데모, 민원, 소송, 재판이라는 단어를 어린 복주는 엄마 곁에서 배운다. 아직 글도 모르는 그 아이에게 위로를 할 순 없었다. 다만 영희는 복주에게 우리는 함께 하는 연대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몸소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해정씨, 저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들을까? 이 세상에는 가만히 눈 감고 귀 열고 입 닫고 있어야만 나는 소리, 냄새, 몸짓들이 있다는 걸 알까? 모란꽃에 취해서 엄마 죽은 것도 잊어버린 아이가 있다는 걸 알까? 알면 야단을 칠까, 눈물을 흘릴까? 갑자기 그것이 궁금해지네."

(공선옥, 『꽃 같은 세상』中에서)


자기 말만 하느라 사업에 우정이라는 단어를 붙여 놓고 뻔뻔해지느라 지렁이가 저승새가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울고 우는 소리를 공장 돌리고 트럭 모느라 모른척한 세월이 있었다. 꽃이 피고 다시 꽃이 피고 울고 싶을 땐 그저 우는 사람들의 얼굴에 모욕을 주던 시절을 살았다. 공선옥의 문장은 그가 그려내는 소설의 시간은 과거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 슬픔에 겨워 남들 입에 밥이 들어가는지 배를 곯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때 공선옥은 우리에게 소설 밥을 먹이느라 꽃 같은 시절을 울며 살았다. 공선옥의 소설이 있어 꽃 같은 세상 시름 없이 살다 갈 수 있겠다. 가난해도 가난한 것을 모르며 웃는 소설이 있어 아름다운 것에 취해 꽃을 보며 살 수 있겠다. 신명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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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주파수 - 청소년 테마 소설 문학동네 청소년 41
구병모 외 지음, 유영진 엮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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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한다. 닥치지 않을 일 때문에 불안에 빠진다. 성격적 결함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나의 모습이 싫다. 대범하고 담대하지 못하고 소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과감한 결정을 내리지도 빠른 행동력을 보이지도 못한다. 누가 골라 주고 책임져 주기를 바란다. 행동보다 걱정을 먼저 하는 성격은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다. 환경을 탓하지는 않는다. 내가 이겨내지 못한 미성숙한 태도일 뿐. 살아있는 한 나는 끊임없이 실체 없는 불안에 시달릴 것이고 그게 힘이 될 수도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청소년 소설가들이 '불안'을 주제로 쓴 테마 소설집 『불안의 주파수』를 읽게 된 이유는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불안이 퍼져 나간다. 나와 비슷한 이들이 나의 불안에 응답한다. 고유의 주파수를 가진 우리가 만난다. 서로가 가진 불안의 크기를 가늠한다. 지구 밖에서 빅뱅 이전의 우주에서 우리는 충돌한다. 일곱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불안의 시기를 지나 온 것이 아닌 불안의 시간을 견디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숨죽인 채 울고 있는 나의 손을 잡아준 것은 이야기였음을 떠올린다.


누가 책임져 주지 않는 세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오토바이 헬멧을 쓰는 소년의 이야기 진형민의 「헬멧」. 새는 알을 깨고 나오듯 허물을 벗어야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암시를 가진 이야기 「단추인간 보고서」에서 나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주저앉아 있던 한 시기를 생각했다. 이 세계가 견고함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우화적으로 보여주는 구병모의 「유리의 세계」를 지나 지독한 자기애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오문세의 「거울 속에 있다」는 여드름투성이로 지낸 겨울 방학을 지내던 나를 불러내었다.


「어디에도 있는」에서 부모님과 떨어져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서 지내는 '나'는 함께 지내지만 한 번도 얼굴을 본적 없는 룸메이트의 정체를 궁금해한다. 그러다 정작 알아야 할 '나'란 존재는 어디에도 없는 것을 알아채고 세계를 이루는 것은 느낌표가 아닌 의문부호로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딸_상실한 구역」은 살인자의 딸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아이가 나온다. 송미경의 「마법이 필요한 순간」은 원하는 것을 이루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상징이 담겨 있다.


불안도 힘이 된다. 청소년이라고 부르는 시기를 지나 어른이라고 규정된 시간을 사는 나는 불안에 잠식 당하지 않기 위해 불안도 힘이 된다고 믿어 버린다. 이야기를 읽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야기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위로를 해주는 것이 아닌 지지와 격려를 받았다. 너만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괜찮아, 한 마디면 충분했다. 걱정마라고 말해주면 모든 슬픔이 사라졌다. 여전히 나는 약하고 상처받고 주눅 든 채 살아가고 있다. 다행이다. 강하고 상처 주고 허세를 부리는 것은 세계를 급속하게 파괴하는 일이므로. 내가 가진 불안의 주파수가 너의 불안에 가닿을 때 이야기는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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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
황승택 지음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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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의 결말이 '완치'라는 단어가 나오면서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황승택 기자는 2015년 갑작스러운 백혈병 진단으로 투병 생활에 들어간다. 한 달 동안 근육통과 피로 누적을 겪고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혈액암인 백혈병 진단이 내려졌다. 병원에 입원해 무균실에서 항암치료를 받았다. 2만 분의 1의 확률이라는 조혈 모세포 기증을 받았다. 퇴원 후 복직 한 달 전에 다시 재발. 응급실에서 3일을 기다린 끝에 재입원. 4만 분의 1의 확률이라는 타인의 조혈 모세포 기증을 다시 받았다. 다시 재발. 두 번의 재발을 겪고 그는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 3차 치료를 하고 있다며 『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는 끝난다.


이 책은 실체 없는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몸이 아파 검사하러 간 병원에서 병의 확인을 받고 치료를 받는 병원기가 담담하게 실려 있다. 문장으로 읽었을 때야 담담하지 병의 고통을 잊기 위해 써 내려간 당사자의 마음을 차마 짐작할 수가 없다.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왜 이런 고통을 나에게 주셨을까 원망도 했을 법하다. 평소에 건강 관리를 잘 하고 나름 몸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삼십 대 후반이면 회사, 가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나이이다. 황승택 기자는 어린 두 딸과 아내, 부모님을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글을 쓰는 것이다. 기자가 아닌 환자로서 겪은 병원의 일상을 SNS에 올린다. 공감이 된 부분은 면회에 대한 단상이다. 주말이면 환자의 가족들이 병원으로 몰려온다. 그러기 보다 문자나 카카오톡으로 마음을 전해달라고 한다. 바로 답변을 해야 할 것 같은 의문문보다는 평서체의 문장으로. 병원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이야기이다. 환자와 간병인이 편히 쉬어야 할 공간에 가족들이 몰려와 소란스럽게 하는 어느 장면에 나도 끼여 있었다. 무례하게도 면회객은 나의 환자를 구경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환자는 그 눈빛을 보고 모멸감을 느꼈다. 병이 죄인 것 마냥.


『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의 글은 수기로써 가치를 가진다. 병원의 시스템과 우리나라가 백혈병 환자를 대하는 시선을 바꾸어 나갈 것을 조심스럽게 말한다. 전공의가 아닌 수련의가 환자의 치료를 할 때 환자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부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병원 생활에서 만난 사람들의 기록까지 『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는 기자의 글답게 생생함을 자랑한다. 말기암을 진단받은 노인과 주고받은 대화. 국가의 정책으로 세계 각지에서 특실에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외국인의 간병인과 나눈 이야기.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몰랐을 주변의 사소한 풍경들이 주는 의미를 되새긴다.


3차 재발로 투병 중이라는 결말은 우리를 암담하게 하지만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배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부제를 이 책에 붙여 주고 싶다. 병에 걸린 것은 고통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닌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는 전한다.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 고통이 없다면 죽은 것이다. 그가 '완치'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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