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찰리 맥커시 지음, 이진경 옮김 / 상상의힘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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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마치 눈앞에 아무도 없이 건방지게 행동한다는 관용어인데 이제 슬슬 관용어가 아니게 되는 게 같아서 두려워진다. 모니터를 오래 보고 있는 탓일까. 눈앞이 자꾸 뿌옇고 흐릿해서 눈을 계속 깜빡이고 있다. 눈을 비벼봐도 흐릿하다. 주중에는 그리하여 책을 보는 일이 어렵다. 그러면서 유튜브는 잘도 보고 있네. 


책을 펼쳤을 때 들여쓰기 없는 문단이 가득하면 부담이 된다. 한 호흡에 다 읽을 수 있을까. 바닥난 집중력을 건져 올리지도 못한 채 다른 생각을 하면서 읽는 척만 하는 독서를 하고 있다.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마음에 남거나 내 생각을 대신 표현해 주는 몇 문장을 만나는 기쁨으로 송구스러움을 대체한다. 죄송해요. 다들 열심히 쓰셨는데.


쉬는 날 열심히 책을 읽느냐. 또 그런 것도 아님. 일어났지만 일어나지 못한 채 유튜브를 보고 겨우 씻고 밥을 챙겨 먹고 예능을 보면서 꾸벅꾸벅 존다. 낮잠으로 휴일을 보내는 게 아까워 잠을 참는다. 그러다 잠든다. 저녁 일곱시에 일어나면 화가 난다. 너 또 왜 그랬어. 너 왜 자버렸어. 벌떡 일어나지도 않고 누워 있다가 유튜브를 본다. 정말 게으르다.


그러다 이러면 안 돼 하면서. 겨우 책을 펼쳤다. 


찰리 맥 커 시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의 휴일이 생산적이지 않았다는 자책감을 덜어주었다. 누워서 한 번 읽었다가 일어나서 한 번 더 읽었다. 드물게 두 번 읽은 책이 된 셈이다. 페이지마다 눈이 편안한 일러스트와 손글씨로 쓴 듯한 간단한 문장이 있다. 자세히 보려고 눈을 크게 뜨지 않아도 되었다. 


작은 두더지를 만난 소년. 네가 있고 없고는 엄청난 차이라고 소년은 말해준다. 덫에 걸린 여우를 두더지가 구해주고 셋은 길을 떠난다. 날수 있다는 비밀을 감춰둔 말을 만나 넷은 다정한 친구가 된다. 찰리 맥커시의 말대로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아무 장을 펼쳐서 읽어도 된다,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은. 그 어느 장을 펼쳐서 읽을 때 나와 당신은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지금의 고민과 어려움이 있는 우리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을 만나는 순간 울 수 있다. 나의 곁에는 사랑이 있다는 걸 그들이 알려준다. 나와 당신이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쁘고 너의 모든 걸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된다는 그들의 친절한 말로 오늘과 임시 내일을 살 수 있게 해준다. 


책 읽는 걸 좋아하지만 때론 활자에 지칠 때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을 꺼내놓고 아무 데나 펼쳐서 읽으면 위안이 될 것 같다. 다시 힘을 내어 책을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누구에게라도 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책이다. 책 선물은 상대의 취향을 알아야 해서 쉽게 할 수 없는데 이 책은 받는 사람 모두가 좋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온기로 가득한 책이다. 


무턱대고 응원을 받고 싶은 순간이나 나의 슬픔에 공감해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을 때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미움 고통 슬픔 분노 외로움 질투 불안을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사랑이라는 말로 바꿔버린다. 사랑이 있다. 그걸 잊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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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반양장) - 제13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96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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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름을 불렀으니 어서 말을 이어가야 할 텐데. 너의 이름만 불러 놓고 나는 말을 잇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이 입속에 아니 가슴속에 가득 있는데 어떤 말부터 꺼내놓아야 할지 내 안의 검열관은 꼼꼼하게 언어를 고르고 있다. 


단어 하나라든지 말투라든지 그런 걸로 상처를 주고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더더욱 그러고 있는 것 같다. 며칠 전에 나는 사나운 말투에 마음이 상했지. 생각해 보면 사납지도 않았어. 단지 흘러가는 상황의 나쁨에 토로를 한 것인데 그걸 나는 공격으로 받아들였지. 다소 미안한 일이야. 상대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지. 오해를 한 내 잘못도 있는데 나는 괜찮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옹졸해지는 건 참 쉬워.


미움은 어디에서 시작하는 걸까. 사랑이었다가 사랑이 되지 못한 마음에서 미움은 생기는 것 같아. 여섯 살의 너 유원이가 겪어낸 시절에서부터 사랑과 미움은 같이 자란 것 같아. 담배꽁초로 인한 화재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을 거야. 고작 그런 일로 사람들이 죽고 다쳤잖아. 소중한 사람을 잃고 살아가는 일을 겪어야 했잖아. 너를 구하고 죽은 언니 예정이의 선택은. 


그 선택에 대해서 함부로 단정 지을 수도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을 것 같아. 그런 일들을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쉽게 말할 수 없는 거지. 그럼에도 나는 네가 부러워. 언니의 죽음이 있었지만 엄마와 아빠는 너의 곁을 떠나지 않았어. 어린 네가 상처를 받을까 봐 먼저 상처 앞으로 다가갔어. 화재 사고로 유명해진 네가 학교에서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지 않고 공부만 할 때도 가족은 없어지지 않았어. 


11층에서 떨어지는 너를 받아내고 다리 불구가 된 아저씨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지. 유원아. 드러내지 않는 마음은 마음이 아니야. 네가 용기를 가지도 않아도 괜찮았어. 나이가 들어갈수록 갖기 힘든 게 용기라는 걸 너는 아니. 미움과 사랑,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용기 말이야.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도 너는 알게 된 것 같구나. 대단해. 유원.


그토록 원하던 너 유원. 


추락은 죽음이 아닌 거였지. 다시 살기였던 거지. 오늘 잠들고 내일 아침을 맞을 용기를 너는 스스로 찾아냈어.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단단한 너를 갖게 된 걸 축하해. 엄마, 아빠와 늘 함께 했으면 좋겠고 수현과 정현이 와도 복닥복닥 지냈으면 해. 어른이 되었지만 확신의 말을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해.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어떤 단정도 지을 수 없단다. 


다만 사랑만이 정확하고 우리가 죽음이 아닌 삶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는 걸 기억해. 매일 말해줘야 해. 사랑한다고.


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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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이 온다 창비교육 성장소설 10
이지애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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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뀔 때쯤이면 꼭 비가 오더라. 어제와 오늘 내리는 비 때문에 빨래가 다 마르지 못했다. 방에서 다시 말리고 있다. 비가 그치면 추위는 가시고 온기를 머금은 봄이 오겠다. 어디서 들었지.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 1위인데 춥고 고달픈 겨울이 아니라 날이 따뜻해지는 봄에 사람들이 많이 죽는단다. 


겨울에 잘 이겨내놓고 왜 그런 거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잘 이겨낸 것이 아니라 버텨온 것이다. 그러다 봄이 되니 어쩔 수 없는 마음이 된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살아야지. 그것도 못 이겨내면 어떡해. 안타까워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알겠지만 당사자의 심정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으니 꼭 그 말이 하고 싶더라도 참아주기를. 이지애의 장편 소설 『완벽히 온다』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벼랑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벼랑에서 떨어진 줄도 모른 채 살아가는 아이들이 나온다. 


갈 데까지 갔다. 여기가 끝이라고 이제 끝내야지 했지만 우리는 떨어져서 상처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런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룹홈에서 만난 세 아이 민서, 해서, 솔의 오늘이 그랬다. 먼저 마음을 열었다가 돌아오는 건 기다림과 외면뿐이라는 걸 알게 된 민서. 동정은 필요 없다면서도 사랑이 그리운 해서. 혼자 남기 싫어 자신의 모든 걸 주고야 마는 솔. 


소설의 제목이 왜 『완벽이 온다』일까 궁금했다. 소설이 중반으로 흘러가면서 이 소설의 제목 『완벽이 온다』는 완벽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에 상처받고 버림받은 세 명의 아이에게 완벽이 찾아온다. 원가족의 따뜻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한 세 명의 아이들은 다치고 무너지면서도 가족을 찾아낸다. 만 18세가 되면 보호 종료가 되어 그룹홈에서 나와야 하는 자립 준비 청년의 실상을 『완벽이 온다』는 담담하게 그려낸다. 


우리는 왜 살아야 할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할까. 고통스러운 순간을 감내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생명은 소중하니까? 대책 없는 낙관과 대책 없는 비관 사이에서 어디로 걸어가야 하는지 방향을 잃어버리기 쉬운데 이대로 멈춰도 되지 않을까. 삶과 죽음을 놓고 저울질하면서 민서, 해서, 솔은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찾아낸다. 


미워했다가 그리워했다가 다시 미워하는 마음을 갖다가 여러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마음을 넓혀둔 채 살아가기로 한다. 희망과 용기를 가지라는 대책 없는 말로 『완벽이 온다』는 우리를 위로하지 않는다. 좁은 집에서 각자의 자리를 만들고 지금 오고 있을 완벽이를 위해 환영의 꽃을 놓아둔다. 우리를 살게 하는 건 그런 거다. 밝은 색깔의 꽃 한 송이. 달달한 초코 아이스크림. 조금 비싼 스테이크. 볼을 비빌 수 있는 푹신한 매트.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민서, 해서, 솔은 때론 화를 내고 다시 화해를 하면서 서로의 얼굴에 걱정이 드리워 있진 않을까 살펴보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완벽한 삶으로 가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에게 완벽이 오고 있으므로 삶으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자 내 손을 잡아.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어주는 『완벽이 온다』. 싸워도  괜찮아. 너희들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예쁘고 특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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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쓰면 죽는 병 위픽
이두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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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는 1,201,450원치 80권의 책이 담겨 있다. 다른 쇼핑앱에는 말해 뭐해. 오늘의집은 말할 것도 없지. 거기는 단위가 다르다. 오랜 쓴 핸드폰은 평소에는 느린데 결제창에만 가면 빠바박 초고속 제트기의 속도로 시원하게 결제를 해준다. 평소에 좀 잘해라. 영상 보는데 끊어지는 거 진짜 화난다. 삼십 초짜리 영상 보는데 왜 1분 넘게 멈춰 있느냔 말이다. 화면 중앙에 나오는 나오는 돌아가는 동그라미 현기증 난다아아앙.


올리브영 세일 기간이니까 크림이랑 세안제 쟁여 놔야 하고. 꼭 돈 없을 때 치약이랑 생리대 떨어지더라. 체험단 가격으로 준다길래 3,701원으로 생리대 한 팩 샀다. 무슨 알고리즘인지 모르겠는데(생리대 사서 그런가.) 우리나라 생리대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싸다고 그 대신 아기 기저귀를 사서 쓰면 값도 싸고 냄새도 안 나고 생리통도 줄어든다는 짧은 영상을 보는데 왜 또 핸드폰 버벅거리는데에에. (오늘 산 거랑 지금 있는 거 다 쓰면 추천 템으로 갈아 타야징. 생리대 가격 좀 내려달라. 싸지도 않으면서 질은 왜 안 좋은데?)


돈을 버는데도 돈이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소소한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유튜브 선생님들의 가르침이 있지만 돈을 쓰지 않고는 더러운 마음이 정화되지 않으므로 뭐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샀다. 제목만 들어도 굉장하다는 감탄사가 나오는 책을. 이두온의 『돈 안 쓰면 죽는 병』이다. 제목 듣고 심장이 마구 쿵쾅대면서 눈치 없이 나댔다. 


단편 소설 분량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위픽 시리즈 중의 한 권인 『돈 안 쓰면 죽는 병』의 줄거리를 원하시는지. 줄거리 요약은 서점 사이트에 가면 전문 인력들이 잘 정리해 놓았으니 한 번 읽어보시든가 말든가.(왜 이렇게 말투가 싸가지가 없냐면. 돈 안 쓰면 죽는 병은 아닌데 며칠 돈을 쓰지 못해서 비뚤어져서 그런 거임. 이해 안 해도 됨.)


남들 다 하는 당근 거래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심심찮게 들려오는 당근 거래 후기들을 알고 있는지라 『돈 안 쓰면 죽는 병』의 도입은 흥미롭다. 플람마라고 하는(나 왜 『돈 안 쓰면 죽는 병』의 줄거리를 설명하고 있는 건지. 언행불일치. 한입두말.) 돈을 쓰지 않으면 머리에 혹이 자라 터져 버리는 병에 걸린 주인공이 두둥 등장한다. 필요한 곳이 아닌 쓸데없는 데에 돈을 써야 병의 진행이 느려진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 백신도 없는 돈 안 쓰면 죽는 병에 걸린 주인공이라니. 죽음을 직업으로 삼는 미키만큼이나 불쌍.


이두온의 소설은 에둘러 설명하거나 분위기만 풍기면서 서사를 늘어뜨리지 않는다. 속전속결로 이야기를 냅다 진행시켜! 버린다. 플람마에 걸린 우리의 불쌍한 주인공은 어떤 시련을 겪으려나. 돈 못 써서 우울핑 되어 가고 있는 나의 도파민을 『돈 안 쓰면 죽는 병』이 분출 시켜 주었다. 진짜 이러다 투잡이라도 뛰어야 할 판. 주말에 누워 있지 말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하면 되지 않을까. 맨날 울면서 찡찡대고 있는 장바구니 비워줘야 하고 새로 나온 춘식이 텀블러 사서 물도 마셔줘야 하니까.


치약, 샴푸, 생리대는 필수 생활용품이라 이걸 사면 병은 더 악화된다. 대신 요아정, 춘식이 조명, 봄 신상 셔츠 질러줘야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다. 2025년 최신 맞춤식 자본주의에 입각한다면 나의 쓸모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닌 쓰는 것에 있단다. 돈을 쓰려면 돈을 벌게 해주라. 이 헬조선아. 이 엉망진창인 현대 사회야.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는 거 귀찮아서 못 하니까 어떻게든 지구에서 살고 싶으니까 물가 좀 내려주라. 이상 월 초라 돈을 아껴 써야 하는 절약핑의 하소연이었씀다.


잠깐 소설의 제목을 뒤집어 볼까. 『돈 안 쓰면 죽는 병』을 『돈 쓰면 사는 병』으로. 아 그러면 제목이 주는 충격이 덜하겠구나. 돈 안 쓰면 죽는 병은 돈 쓰면 사는 병인데도. 역시 소설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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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함
예소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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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신작 영화 《미키 17》을 보고 나오면서는 마음이 어수선했다. 두 시간이 넘는 영화는 지루하지도 재미없지도 않았는데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알았다. 《미키 17》은 좋은 영화구나. 처음으로 봉 감독이 사랑 영화를 찍었구나. SF 장르를 빌려와서. 다시 보고 싶은 영화다. 그때는 못 느꼈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니 영화의 모든 장면이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2054년이 되어도 우리는 근로소득으로만 돈을 벌어야 하지만 사랑은 남아 있겠다. 


예소연의 『사랑과 결함』에 담긴 열 편의 소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읽고 나면 어딘가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인물들이 겪어내고 살아내는 이야기에 나의 시간을 대입해 보다가 쓸쓸하고 종내에는 지쳐 버렸다. 이불을 덮고 한참이나 천장을 보고 있다가 깨닫는다. 사랑을 그리고 있구나. 임신 중단 수술을 한다고 이백만 원을 빌려 가놓고 유럽 여행이나 가는 정선이를 찾으러 가는 이야기에도 사랑이 있구나.


「우리 철봉 하자」를 읽고 쉽게 다음 소설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책을 덮고 손을 가슴에 모은 채로 누워 있었다. 어서 힘을 내야 하는데 도저히 힘이 나지 않는다. 요즘에 나는 그렇다. 힘을 내라고 내가 나에게 계속 말한다. 일어나. 힘을 내. 걸어. 움직여. 전화를 걸거나 받아. 클릭하고 타자를 쳐. 명령조로 감정 없는 조교처럼 군다. 그러다 누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높이면 화를 내는 식.


『사랑과 결함』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화를 내보면 어떨까. 어차피 그 애들은 내 말을 들어주기만 할 거잖아. 맹지와 석주, 미정이, 해나, 수민이, 미리내, 정선이들에게 나의 고민을 듣게 하자. 감정 쓰레기통. 미안해. 그렇게 생각했어. 너희들을 나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생각했어. 어쩔 수 없다. 그래놓고 현실의 다른 이들에게 나의 쓸쓸함과 걱정과 후회를 늘어놓고 말았다. 


「그 개와 혁명」에서는 달라진다. 죽어가는 아빠를 태수 씨라고 이름으로 부르는 수민이는 다르다. 내가 이렇게 징징대면 태수 씨의 지령을 들려줄 것 같다. 동지, 우리는 혁명을 해야 해. 그만 울고 일어나서 돈 벌어.라면서. '죽음을 도모하면서 삶을 버티는 행위' 와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드'는 일은 죽음의 과정이다. 상갓집에서 난리를 치는 유자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태수 씨의 명복을 빈다. 


잠깐 놀다가 들어갈게. 삶은 그런 것이 아닐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어서 와, 죽음은 처음이지. 하나도 무섭지 않아. 그동안 고생 많았어. 대출 이자 꼬박꼬박 내고 세금도 밀리지 않느라. 우느라 힘들고 머리도 아팠겠지만 여기서는 그런 거 하나도 없다. 너의 사랑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남긴 거 없이 잘 정리하고 왔지?


예소연이 그려내는 2025년의 시간은 미키가 죽음을 직업으로 삼는 2054년이 다르지 않아서 속이 상한다. 몇 시간 후에는 다른 마음이 밀려오지만. 사랑이 남는데 그건 이상한 사랑이 남아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의 언어로 번역해 주는 번역기가 미래에는 개발될 테니 죽지 말고 오늘 말고 내일을 살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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