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마음만 먹으면 트리플 5
장진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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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울기 좋은 밤이 또 어디 있었을까.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 날도 있었지. 울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에 순종한 적도 있었지. 오늘이 울기 좋은 날이면 울어야지. 참으려고 하지 않고. 그렇게 울어 버려서 코가 막히고 축농증이 찾아오고 향기와 악취를 구분하지 못했다. 좋았던 건 음식물 수거차가 지나가도 인상을 쓰지 않은 것. 싫었던 건 책상 위에 놓아둔 디퓨저의 향기를 상상만 해야 했던 것. 


장진영의 소설집 『마음만 먹으면』을 읽고 제목을 가져와 나에 대해 말해본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음 음. 아차. 나는 마음을 먹기까지의 과정이 긴 사람이지. 마음을 먹으면 실천하고 행동하는 적극적인 면모를 보여야 하는데. 나는 웬만해선 마음을 먹지 않는 사람이야. 그래 그런 사람이야. 계속 오래 생각만 한다. 그래도 한 번 마음만 먹으면 빠르게 움직이죠? 물어도 마음을 먹어도 그 마음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는 대답을 들려줄 뿐이다. 


『마음만 먹으면』에는 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곤희」와 「마음만 먹으면」, 「새끼돼지」. 세 편의 분위기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렇게 말하는 거 무책임한 거 아는데 읽어보면 느낄 수 있다. 우울의 무드 안에서 이상한 발칙함이 소설 곳곳에 깔려 있다. 자신의 불행을 전시하기를 즐기는 곤희를 잠깐 보살피며 나를 돌아보는 이야기 「곤희」를 통과하면 섭식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정신 병동에서 지내는 일상을 그리는 「마음만 먹으면」이 손을 흔든다. 어서 와 이런 불편한 바이브는 처음이지?


「새끼돼지」까지 읽고 나면 더 마음이 답답해진다. 친척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느끼는 어색함과 불안함까지. 장진영의 특기는 어색함, 불편함, 고단함, 냉소의 마음, 비꼬고 싶은데 참아내는 숨 막힘의 정서를 표현해낸다는 것이다. 일단 책을 많이 사서 쟁여 놓는 이유는 책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한 권씩 읽어내며 어디 내 마음을 표현해 놓은 문장이 없나 찾기 위해서이다. 


책을 펼쳐볼 힘조차 없을 때는 울 준비를 한다. 어제의 분노는 사라지지도 않고 오늘로 적립되었고 치사하게 구는 내가 싫은데 그대로 놔둔다. 나의 부족함과 미성숙함은 미래에도 계속될 것 같아서 속상하다. 『마음만 먹으면』에는 소설 말고 에세이가 한 편 더 실려 있다. 소설이 끝나버려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 없는 없는 독자를 향한 애교 같은 에세이. 모두 아파도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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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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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괜찮을까.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낸다거나 극복해낸다거나 하는 마음 없이도. 문미순의 장편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소설 속 인물인 명주와 준성이 처한 현실이 가혹해서 빛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어서 과연 그들이 오늘을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가슴이 아파서 끝내는 눈물이 터져 나와서 힘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니다. 매 순간 힘들다. 매 순간 지친다. 가끔 괜찮고 가끔 힘이 난다. 가끔의 순간이 매 순간을 버티게 해준다. 나만 힘든 건 아닐 거야. 그러다 나만 힘든 거 아니야?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으려고 하지만 기분은 기분이니까. 기분에 충실해지기도 한다. 이런 나의 감정의 상태를 '짜친다'는 말로 표현한다. 


짜쳐 있는 나는 문미순의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을 읽으면서 반성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기대어서 말이다. 비겁한 방식으로 나의 힘듦을 털어낸 것이다. 명주와 준성이 처한 현실에 비하면 나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말한다. 치매에 걸린 엄마가 죽었다. 죽은 엄마를 발견한 명주는 간신히 생각을 부여잡는다.


엄마의 사망신고를 하고 장례를 치르게 되면 엄마 앞으로 나오는 연금을 받지 못한다. 명주는 아마포와 나무관, 방습제를 사서 엄마의 시신을 작은방에 모신다. 엄마가 살아 있는 것처럼 꾸며서 연금을 계속 받으려고 말이다. 이혼하고 혼자 살면서 생계를 꾸려 가던 명주는 급식실에서 일하다 발에 화상을 입는다. 50대, 여자, 명주는 그 후에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 


명주 옆집에 사는 준성은 스물여섯. 고등학교 3학년에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아버지를 간호하느라 학교는 자퇴했고 검정고시로 겨우 대학에 진학한다. 물리치료학과를 나왔지만 돈을 버느라 시험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리기사로 일하면서 아버지가 받는 연금에 돈을 더해서 생활을 이어간다. 형이 있지만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라졌다. 


명주와 준성은 각자의 부모를 간병하느라 자신의 꿈과 희망을 유예한다. 꾸역꾸역 하루를 버틴다. 온전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말이다. 명주는 엄마의 시신을 작은방에 놓아두고 나온 연금으로 화장품을 산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사지 못하던 명주는 잠시나마 불온한 해방감을 맛본다.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명주와 준성의 기묘한 연대가 시작된다. 


소설의 제목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을 오래 되뇌어 보았다. 내가가 아닌 우리가.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이라니. 소설의 내용에 기대어 제목으로 독자를 울게 만든다. 빛이 없을 것 같은 긴 터널을 지나는 것만 같은 그들의 하루가 끝내는 미약한 불빛으로 밝아진다. 한참의 어둠 뒤에 나타난 빛은 오늘에 이어 내일을 살게 만든다. 그거면 됐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내일을 만들어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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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칵테일, 러브, 좀비 안전가옥 쇼-트 2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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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이 세계에는 어둠과 슬픔만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나의 기분마저도 내가 어쩌지 못할뿐더러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무느라 한여름인데도 입이 텄어요.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마다 양쪽 입가가 아파서 입을 다물게 됩니다. 조금씩 먹고 느리게 삼킵니다. 어떤 하루에는 밥을 먹지 않기도 해요. 귀찮죠. 귀찮아요. 내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내가 구해야 하다니. 차라리 안 먹고 말죠. 


그럼 이건 어떨까요? 말을 하지 않아도 나의 기분을 알아주는 이야기와 문장을 만나는 것. 참을 수 없는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 먹을 걸 사는 돈을 아껴 책을 사는 일로. 입가가 찢어지는 고통을 외면해 보는 일. 고통과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없는 것 같으니 그런 감정에 나를 놓아두고 허구의 세계로 도피하는 거죠. 그 세계에서 나는 관전자가 됩니다. 


가만히 조용히 말없이 먹지도 않고 인물의 고통을 지켜봅니다. 조예은의 소설집 『칵테일, 러브, 좀비』 속 세계로 나를 끌고 들어갑니다. 남자친구의 평가에 힘들어하는 여자가 있어요.(「초대」) 그녀는 이별을 준비 중입니다. 그렇죠? 안전 이별이 될 것 같진 않죠. 「초대」의 여성 주인공들은 다릅니다. 그녀들 스스로 악당이 되어 자신을 지켜냅니다. 응원합니다, 저는. 


맙소사. 귀신들의 사랑이라니.(「습지의 사랑」) 너무 애틋해서 나 죽어요. 물귀신과 숲귀신의 썸 그리고 연애 과정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려옵니다. 개설레기도 하고요. 숲귀신의 작업 멘트, "내일도 올게. 숨지 말고 인사해 줘. 알겠지?"를 듣는 순간 나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어요. 이를 어째. 숲귀신이 자신의 명찰을 물귀신에게 주는 장면에서는 기절인 거죠.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도 출근을 해야 한다니.(「칵테일, 러브, 좀비」) 현실에서 도망친 나를 무섭게 만드네요. 좀비로 변한 아버지 역시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갖고 행동합니다. 소름 끼치네요. 아니죠. 현실에서도 아침이면 좀비로 변신해 출근하는 내가 있었네요. 무섭고 소름 끼치는 게 아니라 일상의 일입니다. 엄마와 주연이 계속해서 행복의 빈도를 늘려가면서 지냈으면 해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말이죠.(「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어린 시절 그 밤들에 우리가 가장 먼저 했던 건 흉기가 되는 물건을 치우는 일이었어요. 기억나죠? 달리기가 빠르지 못해 도망가는 건 포기하고 담벼락 밑에 숨어 있었어요. 시간을 돌리는 일 따위는 상상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생각도 못 했죠. 어서 빨리 이 밤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정도였죠. 소설은 그런 밤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칵테일, 러브, 좀비』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내가 좋아요. 어둡고 축축하고 이상한 사랑을 말하는 『칵테일, 러브, 좀비』의 세계관을 나는 사랑할래요. 이 세계와 그 세계의 사랑이 다르지 않잖아요. 낡고 누덕누덕 기운 사랑의 옷을 입을래요. 술에 취해서 하는 말들을 농담으로 여기지 않아요. 사랑은 어디에도 없었고 어디에나 있어요. 인간의 기억을 읽은 좀비가 되어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소멸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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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싶은 아이 2 죽이고 싶은 아이 (무선) 2
이꽃님 지음 / 우리학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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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꽃님의 장편소설 『죽이고 싶은 아이』의 결말이 강렬하긴 했다. 이대로 이야기가 끝인가. 이런 환경과 상황 속에 인물을 그대로 놔두고 문을 닫고 작가는 나갈 것인가. 의문이 들긴 했다. 어쩔 수 없지. 작가가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데. 그럼에도 주연과 서은이가 마음에 걸렸다. 주연의 남은 날들이 궁금했다. 소설이라는 가상과 허구의 세계이지만 그대로 그들을 두고 온 것 같아 마음이 시렸다. 


서로 어울리고 웃고 늘 어디든지 함께 다니는 친구가 있었으면 했다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뒤로 괜찮아졌다. 괜찮아졌다고 믿는 게 아니라 정말 진짜 아주 괜찮았다. 관계에서 오는 불안과 집착이 없었기에 해방감마저 느꼈다. 『죽이고 싶은 아이』의 후속작 『죽이고 싶은 아이 2』는 한때 열렬하게 원했던 우정이 사라진 자리를 더듬어 나간다. 


서은이 벽돌에 맞아 죽고 범인으로 주연이 지목되었을 때 『죽이고 싶은 아이』의 마지막은 앞의 이야기와는 다는 반전을 제시했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다. 다행히 소설가 이꽃님은 주연과 서은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죽이고 싶은 아이 2』에서는 서은의 죽음 후에 남겨진 주연의 이야기를 담았다. 소설을 읽어야 하므로 큰 줄거리를 나열할 순 없지만 주연의 슬픔, 상처, 극복이  『죽이고 싶은 아이 2』에 있다. 


극복이라고 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알고 있을 것이다. 극복은 쉽지 않다. 극복은 없다. 상처와 슬픔이 있는 자리에 극복은 오지 않는다. 그저 아프고 힘든 채로 삶은 흘러간다. 내내 아프고 어렵고 버거운 얼굴로 살아간다. 아주 가끔 좋아지고 아주 자주 슬퍼진다. 주연이 밥을 먹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할 때 주연을 방치하지 않음으로써 주연은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예전에도 지금도 친구는 없어도 된다. 기대도 실망도 없이 살아가고 싶기에 관계 맺기는 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누군가 나를 괜찮게 봐줬으면 하는 이중적인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사소한 일상을 나누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대가가 따른다는 걸 알기에 지금처럼, 아무것도 없이 살아가고 싶다. 『죽이고 싶은 아이 2』는 평범을 말하면서 끝을 맺는다. 


그치. 남들처럼. 평범하게. 보통의 가족의 모습으로. 살아가야지. 아직 어린 날들에게 바치는 찬가 같은 소설, 『죽이고 싶은 아이 2』. 소설의 스포를 말해줄 순 없지만 인생의 스포는 해줄 수 있다. 나이만 먹은 어른의 말을 귀담아듣진 않아도 된다. 아이가 자라면 어른이 된다는 건 터무니없는 낙관이기도 하다. 다만 평범해지고 싶다는 소원은 쉽게 이룰 수 없으며 이룬다 해도 착각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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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누아르 달달북다 3
한정현 지음 / 북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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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합계 출생률이 0.78명이라고 했더니 미국의 법학자 조앤 윌리엄스는 와,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라고 말했다. 이 인터뷰는 유명해져서 조회 수가 100만을 넘겼다. 영상 밑에 달린 댓글도 화제가 되었다. EBS는 조앤 윌리엄스를 초청해 다양한 세대들과 만나 대한민국의 망해가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연하게 본 영상을 보면서 전통적인 성 역할과 왜 출생률이 낮을 수밖에 없는지에 생각해 보았다. 


힘들게 공부해서 대학 가고 취업까지 했는데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경력단절. 결혼 하고 아이를 가지는 과정에서 남성은 승진을 여성은 퇴사를 고민한다. 회사 내규상 육아휴직을 사용하고 돌아오면 근무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오랫동안 승진의 문턱에서 좌절했다고 조앤 윌리엄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한 여성은 말했다.


여기 시간을 2024년에서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한정현의 소설 『러브 누아르』의 시간적 배경으로 말이다. 37년 전에 한국은 어땠을까. 어때긴 뭐 어때. 여전히 지옥이면서도 누군가에게만 천국이었지. 이름은 박선. 한양 물산 2층 사무실에서 미쓰 박으로 불리는 그녀. 9남 1녀 중에 다섯째. 직업 고등학교를 나왔고 나중에 뭐가 되고 싶냐는 미쓰 리의 질문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주판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지금은 미쓰 막걸리로 불리는 선.


같은 곳에서 일하지만 이름은 모른 채 미쓰 박, 미쓰 리, 미쓰 김, 미쓰 윤, 미쓰 최라고만 불리는 그녀들이 『러브 누아르』에 존재한다. 선은 경리 일을 하면서 노트에 무언갈 자꾸만 쓰고 있는 미쓰 리를 만난다. 미쓰 리는 선에게 조언한다. 여기에서는 웃지 말라고. 웃게 되면 임신 아니면 낙태를 하게 된다고. 살벌한 인생 조언이다. 


『러브 누아르』는 달달 북스에서 칙릿이라는 주제로 쓰인 소설이다. 작품을 읽어가다 보면 성공한 여자의 일과 사랑을 다룬다는 칙릿의 서사와는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소설이기도 하다. 주로 역사, 여성, 연구와 관련된 주제로 소설을 쓰는 한정현에게 칙릿이라는 장르를 쓰게 하다니. 대체 여성이 일과 사랑에 성공할 수 있는 게 지금 시대에 가능하기나 한 걸까. 


일을 하려면 사랑을 포기해야 하고 사랑을 하려면 일을 포기해야 한다. 합계 출생률 0.78명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어렸을 때 그땐 완전 어렸을 때 나도 결혼하고 애 낳아서 훌륭하게 키워야지 했더랬다. 지금은 책임감이라는 걸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현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조앤 윌리엄스는 말한다. 한국의 청년들이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낳을 수 없는 상태에 처한 것이라고. 


한정현의 칙릿은 1987년에 이름도 없이 미쓰로 불리는 여성들의 노동과 사랑, 현실을 반짝이 없는 흑백의 질감으로 그려낸다. 달달한 배경음악? 그런 거 없다. 화려한 입성의 여성들? 역시 없다. 가슴 설레는 로맨스? 당연히 없음. 남성이라고는 대통령 측근이라는 부장이 나올 뿐이고 그마저도 인성 쓰레기로 등장한다. 선은 남영동에 끌려가고 미쓰 리의 이름을 알지 못해 풀려나온다. 


우리에게 필요한 장르는 러브가 아닌 누아르라고 선은 말한다. 사랑하는 대신 싸우고 배신하고 쟁취하는 것. 사랑을 하게 된다면 살벌하게 해내는 것. 한정현의 칙릿은 환상 소설이 되었고 결코 여성은 현실에서 일과 사랑에 성공할 수 없고 그런 서사를 보고 싶다면 장르를 바꿔야 한다. 오로지 상상과 환상에 기반한. 미쓰들에게 사랑을 해서 결혼이라는 엔딩만 있어야 하고 누아르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기필코 살아남아야 한다고 『러브 누아르』는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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