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맥도날드
한은형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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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의 장편소설 『레이디 맥도날드』는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서 취재한 실존 인물을 다룬다. 할 이야기들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 상황을 제보하거나 누군가 제보한 사건을 다루는 프로그램이다. 기억이 난다. 맥도날드에서 밤을 지새우는 할머니였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쇼핑백에는 영자 신문이 가득했다. 말 중간중간에 영어를 섞어 썼다. 내가 몰랐을 뿐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니까. 할머니의 삶도 그러한 방식의 하나이겠지 하고 기억에서 사라졌다. 


'운을 쌓지 못했다. 그래서 패배했다.' 『레이디 맥도날드』의 첫 문장이다. 그 시절에 대학을 나오고 취업에 성공했지만 노년에는 집이 없어 맥도날드, 스타벅스, 교회를 전전하며 살아야 했던 김윤자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정의한다. 운을 쌓지 못했다고.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세상은 원망할 법도 한데 김윤자는 그러지 않는다. 열망하지 않아도 운이 쌓이는 사람이 있다. 평범한 삶이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는 걸 김윤자는 뒤늦게 깨닫는다. 


너무 열심히 살았다. 김윤자는. 열심히 살기만 한 게 김윤자의 삶이었다. 원하지 않아도 따라오는 운 같은 게 김윤자에게는 없었다. 소설은 일명 맥도날도 할머니라고 불렸던 한 사람의 인생을 새롭게 보여준다. 일회성으로 보여준 방송에서의 모습이 아닌 소설적 허구로 가공한 한 사람의 생애가 펼쳐진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가 나중에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를 진지하게 따져 묻는다. 묻지만 대답과 정답은 없다. 


한국 사회가 나이 든 여성에게 드러내는 고집과 편견을 『레이디 맥도날드』는 서글프게 꼬집는다. 관리자급에는 죄다 남자들뿐인 사회. 이상하게도 사무나 사무보조에는 여자가 대부분이다. 하대와 멸시는 기본이고 사람을 가려가면서 대한다. 김윤자는 퇴직 후에도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어학 실력이 출중하고 전 직장에서 해본 업무가 있으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빠에 의해 살던 집이 정리된 김윤자의 노년은 길에서 길로 이어진다. 


자신이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했던 김윤자에게서 경이를 느꼈다. 최신양 집사에게서 한 달에 이십만 원을 받았고 그 돈으로 길에서 생활했다. 이삼일에 한 번씩 스타벅스에서 오늘의 커피와 이지니 버터를 사 먹는다. 맥도날드 커피는 마시지 않는다. 커피와 버터 하나가 김윤자의 유일한 음식이었다. 그럼에도 처음 만난 이에게 블루베리 치즈 케이크를 사준다. 가장 믿을만한 사람은 처음 만난 사람이라고 한 김윤자의 말은 그녀의 인생이 얼마나 외로운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려왔다. 


너무 열심히 사는 것도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 대단한 성공을 바라며 사는 게 아닌데도 힘이 든다. 가을 없이 겨울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슬픔과 추위가 한꺼번에 찾아들었다. 다들 어떻게 슬픔을 감당하며 지내고 있는지.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 울고 다치고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난다. 할머니가 되겠다는 꿈은 접어두고 오늘이 내일이 울음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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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지 마라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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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무실에서 근무하다 물을 마시러 갔다. 일을 시작하기 전 정수기 앞에서 창문 밖을 본다. 물을 받으면서 잠깐의 멍을 때린다. 어떤 날은 생각 없이 연속을 눌러 놓고 멈추지를 못해 다시 바닥을 닫는다. 사무실에서 내 유일한 휴식처는 정수기 앞이다. 정수기는 말이 없다. 메모! 이러면서 급하게 해야 할 일과 숫자를 부르지도 않고 영악함을 드러내며 성실한 척을 하지도 않는다. 터치만 하면 조건 없이 냉수와 온수와 얼음을 내 컵에 부어준다. 


정수기가 갖고 싶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의 생각이었다. 집에도 이런 얼음 나오는 정수기가 있으면 좋겠다. 운명의 장난일까. 비데 필터를 교체 하러 온 매니저님이 내게 렌털 제품 소개가 담긴 팸플릿을 내밀었다. 호갱님의 전형인 나는 한 달 사용료와 설치비를 물었다. 영업에 능숙하신 매니저님은 내 이름과 직장명, 전화번호를 가져가셨다. 조만간 연락이 오려나. 한 달에 40,900원. 


이기호의 소설집 『눈감지마라』의 주인공 진만의 재산목록 1호는 오쿠 중탕기이다. 중고 마켓에서 10만 원 주고 산 그걸 진만은 애지중지한다. 그의 친구 정용은 진만 몰래 오쿠 중탕기에서 맥반석 달걀을 꺼내 먹기도 한다. 다른 애들은 돈이 있으면 컴퓨터나 핸드폰을 바꾸는데 얘는 오쿠 중탕기를 사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방 대학을 졸업하고 광역시로 보증금 없는 월세 30만 원짜리 집을 구해 이사를 가면서도 진만은 오쿠 중탕기를 챙겼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달걀을 꺼내 먹는데 할머니가 다가와 집에 들어가라며 오천 원을 주기도 했다. 


소설은 지방러 청춘 정용과 진만의 어느 한때를 그러니까 다시 돌아갈 수도 없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 청춘의 어느 한 시절을 그린다. 전라도 말로 짠하고 짠해서 소설을 읽다가 눈물이 나서 눈감지말라고 했는데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은 졸업했지만 스펙 이런 게 없어 등록금 내느라 그들 표현대로 학교만 다녔을 뿐인데 빚쟁이가 되어 아르바이트 생활에 뛰어든다. 죽도록 무거워서 죽통인가 싶을 정도로 무거운 죽통을 나르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삼계탕 집에서 설거지를 한다. 


정용과 진만이 쉬는 날 그들은 월동 준비를 하러 마트에 간다. 팬티스타킹과 라면을 사러 갔는데 진만의 눈에 롱패딩이 눈에 띈다. 35만 원. 진만은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좀 더 저렴한 패딩을 사 온다. 『눈감지마라』에 실린 각각의 이야기들은 어느 시절의 나를 너를 엿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돈이 없어서 치사해지고 만 어떤 날들의 기억. 그깟 돈이 뭐라고 그랬을까 하기엔 그깟 돈은 중요했다. 월세와 공과금 내는 날은 월급날보다 빠르게 찾아오고 이 정도 모았으니 전셋집을 구할 수 있겠지 했는데 그 사이에 집값이 뛰어 보증금도 되지 않았다. 


『눈감지마라』의 후반부는 서글펐다. 지방 대학에 나와서 그러고도 서울로 가지 못하고 지방에 살아서 겪었던 그들의 일이 그들의 일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이 많고 복잡하고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 숨이 가빠 오면 정수기 앞으로 간다. 쪼르르 물이 텀블러에 담기는 시간 동안 호흡의 리듬을 다시 찾는다. 들이 마시고 내쉬고. 들이 마시고 내쉬고. 정수기야 오늘 나 정시 퇴근했으면 좋겠다. 너랑 밤늦게까지 있고 싶지 않은데. 네가 얼음 만드느라 소리 낼 때 놀라고 싶지 않거든. 그래도 늘 고맙다. 우리 집에도 네가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나는 너랑 오래도록 있고 싶어서 야근을 하는지 모르겠다. 


만 명에게만 평등한 법. 『눈감지마라』의 존재가 소중한 이유는 지방에 사는 청춘의 이야기를 관심 가지고 있는 그대로 전해주는 이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여기 있다. 잊지 마라. 눈 감지 말고 똑똑히 봐라. 선거철에만 찾아오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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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의 마음 - 나를 잃지 않으면서 꾸준히 일하는 법에 대하여
이다혜 지음 / 빅피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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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으로 유튜브를 보려고 했다. 구독 중인 채널의 새로운 영상이 올라왔기에. 그러지 않아도 씻고 나면 자이언트 춘식이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 유튜브를 본다. 갓생. 그게 뭐냐. 이러면서. 지난달에는 자격증을 새로 딸 거라는 원대한 꿈을 꾸면서 책도 샀는데 책장에 얌전히 꽂혀 있다. 사천 원을 더 주고 제본서비스까지 신청해서 받은 책인데. 몇 장 넘겨 보고 무료 강의가 있나 살펴보고. 다시 책장으로. 


영상을 틀었을 때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영상의 내용이 끔찍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려 내렸다. 눈을 뜨고 있으면 다시 감기고. 눈이 시려서 화면을 볼 수 없다니. 왜 이러나. 죽을 때가 된 건가. 방정맞은 생각 끝에 사무실 천장에 전등이 너무 많구나. 눈에 안 좋다는 청색광 전등이 알알이 박혀 있구나 원인을 찾았다. 원인을 찾았으니 해결 방법은… ….


그건 좀 곤란하다는 결론. 아직 적금 기간이 30개월이나 남았거든. 그날 저녁에는 눈을 감고 소리만을 들었다. 그러고 있으니 사람들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그저 호들갑을 떠는지. 이다혜의 『퇴근길의 마음』을 읽으면 그러지 않아도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퇴근부터 잘해야 하는데. 요즘의 나는. 


정시 퇴근을 한 게 몇 번 되지 않는다. 어떤 주에는 내내 야근. 어떤 주에는 한 번 정도의 정시 퇴근. 내가 이러려고 힘들게 학원 다니고 자격증 따고 그랬나는 자괴감이. 『퇴근길의 마음』에서 강조하는 건 나를 잃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일을 할 때의 마음 실수했을 때의 대처 인간관계의 원칙. 내가 있어야 일이 있지 일이 있어야 내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메모를 하는 방법, 업무 메일을 쓰는 요령 실무적인 부분에서부터 일이 끝나고 난 뒤의 마음 챙김 지침까지 알려준다. 


갓생은 개뿔 현생조차 사는 게 쉽지 않다. 아침에 눈 뜨는 게 미라클 모닝. 대신 갓생 사는 이들이 부지런히 찍어서 올린 브이로그를 본다. 그마저도 보다가 빈정이 상해서 끈다. 사람이 어려우면 모든 걸 자기식대로 받아들인다. 책의 어느 문장이 자신의 상황에 부합하면 힘을 얻어 그대로 실천한다. 『퇴근길의 마음』에서는 '나를 해치면서까지 해야 할 일은 없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예전에는 버텼다. 지금 생각해 보면 버틴 게 아니었다. 버틸만해서 버틴 거다. 지금의 나는 퇴근부터 잘하자라고 계속 말해주어야 한다. 손이 포동포동한 친구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올라 달달한 음료를 마시며 동네 핵인싸 강아지를 부르는 퇴근길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 퇴근길의 내 마음은 눈을 뜨고 좋아하는 채널의 영상을 보고 싶다는 마음. 눈이 시린 청색광 밑에서는 여섯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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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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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나면 가슴 한 쪽이 뻐근해진다. 결코 살아 있을 때는 몰랐던 한 사람의 사정과 속내를 죽고 나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부모라는 존재는 내내 살아 있을 줄 알았다. 추임새처럼 내가 죽고나면이라는 말을 들어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저 늘 하는 말이겠거니 정도. 죽음 후에야 무심결에 흘려들었던 말이 떠오르고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장면이 펼쳐진다. 한참 말을 잊고 새삼 후회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곱씹게 된다. 다정하게 말 할 걸 그것도 못했다면 화는 내지 말 걸. 후회는 미련과 닮았다는 걸 깨닫는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고상욱 씨를 아버지를 둔 고아리의 서술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유쾌하고 짠하게 흘러간다. 


빨치산 출신으로 감옥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새농민』을 읽으며 농사를 짓는다. 그야말로 농사를 글로 배웠어요를 실천한다. 차가 끊겨 집에 가지 못하는 여인을 집에 재우는가 하면 동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혁명을 하는 바람에 공부를 잘하는 조카가 신분조회에 걸려 출세를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집안의 괄시를 받아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한다. 고상욱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기적처럼 딸 하나를 얻는다. 그 아이가 자라서 글을 쓰고 지방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평생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 없는 아버지. 빨갱이, 빨간물이라는 놀림과 무시를 당해도 어려운 일을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는 인맥, 없는 인맥 동원해서 도움을 주는 아버지. 왜 저렇게 살까 고상욱 씨 딸 고아리는 의아해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가 죽고 삼일장을 치르며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을 그린다. 가깝지만 멀고도 어려운 관계인 아버지와 딸은 죽음 앞에서야 화해의 악수를 나눈다. 한 사람은 바람에 날아가고 한 사람은 땅 위에 우뚝 선 채.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소설은 고상욱이라는 인물의 생애를 삽화 형식으로 들려준다. 사회주의자로서 평생 유물론을 외친 아버지의 생애는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여운을 남긴다. 


열심히 사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 몰라 헤맬 때, 고상욱 씨가 실천한 유물론적인 행동을 보면서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인생은 고통이야라고 해도 다정한 몇몇의 사람의 선의로 살아갈 수 있다. 아버지 고상욱 씨의 장례식장에 찾아온 사람들의 이력을 보고 있으면 말이다. 정치적 동료의 친구의 아들, 선생의 아들의 지인, 아들이나 다름없는 아들. 아리가 품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그들이 들려준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 일은 미안할 일이 아니다. 삼일의 시간은 그이를 추억하고 못되게 굴었던 일에 대해 사과하는 시간인가 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나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었던 그이를. 웃다가 울다가 한숨을 쉬다가 누군가의 등을 어루만지다가 전복죽을 나눠 먹다가.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의 성가심을 알고 한 걸음에 달려와 처리해 주는 걸 보면서 죽은 자의 삶을 추측해 본다. 외롭지 않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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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2
이주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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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처럼 쓰인 이주란의 소설을 읽다 보니 어떤 글이든 지금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의 나』의 첫 문장은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괜찮다, 말해주네'이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모임에서 만난 언니와 함께 사는 88년생의 유리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유리는 언니 방문 앞에 포스트잇에 쓰인 글을 보고 안심한다. '누군가 언니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었'다는 사실에. 


하루는 괜찮은 일과 괜찮지 않은 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괜찮은 일이 하나면 괜찮지 않은 일이 아홉이 되어 이상한 균형이 맞춰진다. 하나의 괜찮은 일이 힘을 발휘하여 아홉의 괜찮지 않은 일을 무찌르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어떤 하루는 괜찮고 어떤 하루는 힘이 든다. 『어느 날의 나』 속의 하루들은 그럭저럭의 힘으로 괜찮다. 


휴무에는 할머니랑 살았던 동네에 가는 유리. 두유와 과자를 사서 동네 할머니에게 주기도 하고 전기계량기 속 숫자를 보고 주인집 아줌마에게 알려준다. 문을 두드리는 게 예의 없는 것 같다고 무작정 기다리는 아줌마를 위해서. 그런 휴무를 지나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월세를 내고 밥을 사 먹는다. 동네 친구 재한 씨와는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쓰는 게 처음엔 살기 위해서였는데 이제는 좋아서 쓴다고 유리는 말한다. 어떤 마음이 되면 글을 쓸 수 있을까. 사는 걸 포기하는 게 쉬울 수도 있는데 유리는 어떤 마음을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쓴다. 심심한 소설이네. 아무 사건도 긴장도 없어 나의 하루를 그대로 적은 것 같은 이야기네. 주 5일이 아닌 주 4일만 일해도 적금 넣고 공과금 내고 고민 없이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면 좋겠다고 내내 생각하는 하루. 


어느 날의 나는 모욕을 당해놓고도 다른 사람의 기분이 좋지 않을까 염려하는 멍청한 짓을 했고 그대로 집에 돌아와 잠이 올 때까지 SF 요소가 살짝 가미된 드라마를 잠이 오기 전까지 보면서 진짜로 드라마 속 현실이 재현되면 아싸, 일 안 해도 되지 않을까 공상하는, 그런 시간 속의 나였다. 『어느 날의 나』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언니의 동생은 냉동실에 한참이나 있었을 음식을 선심 쓰듯 주고 간다. 언니는 미련 없이 음식을 버린다. 생각을 하지만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 했을 때 쾌감을 느끼지 않은가. 동네 산책을 위해 가벼운 운동화를 살 생각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하고 대학원 원서를 넣었다는 언니의 말에 오늘의 괜찮음이 내일로 연장된다. 모르는 사람이 아닌 아는 사람이 괜찮다고 말해주는 하루는 언제든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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