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날씨와 얼굴
이슬아 지음 / 위고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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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러다 우리 다 죽겠다. 빙하가 녹다 못해 없어지고 겨울 가뭄 때문에 급수 제한을 하는 지역이 있다. 죽겠다 죽겠다 하는 사람들에게는 굳이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대지구 종말 시대가 눈앞에 펼쳐지겠다. 영화에서처럼 밥을 먹다가 누워 있다가 거대한 해일에 휩쓸려 떠내려갈 수도 있다는 가정은 사실이 될 날이 멀지 않으리.


인간에게 돌아가야 할 식량은 인간이 식용하는 가축을 위해 먹이고 그들이 내뿜는 탄소는 지구의 평균 기온을 높이는데 쓰이고 있다. 순전히 다이어트를 위해 내면이 아닌 외면의 아름다움에 미쳐 채식을 한 적이 있다. 동물을 구하고 환경 보호에 앞장은 아니지만 누군가 앞에 서면 뒤에 서겠다는 신념 따윈 없었다. 오직 숫자로만 나타나 나를 평가하는 몸무게를 위해서 채식. 


나중에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고는 공장식 축산 특히 닭을 사육하는 열악한 환경을 알고 나서는 한동안 닭은(닭만은, 돼지나 소까지는 힘든 육식 인간이라) 먹지 않겠다 선언하고 어설픈 실천을 했다. 닭을 좋아해서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시켜 먹던 시절의 일이었다. 일이 늦게 끝난 뒤 늦게 몰려든 허기를 잠재우느라 했던 쉬운 선택. 배달 닭 시켜 먹기. 


이슬아의 칼럼집 『날씨와 얼굴』은 대지구 종말 시대를 막기 위한 한 사람의 고요한 외침이 담긴 책이다. 망해 가는 지구를 위해서는 두 가지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선언이 있다. 기분만큼이나 열정 가득한 변화를 보이는 날씨와 인간의 허기와 즐거움을 위해 희생되는 동물의 얼굴을 응시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리고 우리가 자고 있을 때 전날 저녁에 구매한 물건을 새벽 문 앞에 배송하기 위해 에어컨과 난방 시설이 없는 곳에서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와 타국으로 결혼해 온 이주 여성들의 얼굴까지도.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을 가진 어린 시절을 지나 나조차도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눈 뜬 지금의 시절까지 세상은 갈수록 나빠지기만 하고 덩달아 나도 나빠지려는 미래를 가진 내가 지구를 구할 수 있을까. 『날씨와 얼굴』은 그래도 그래 우리 한 번 해보자 말한다. 양파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양파인데 닭이나 돼지, 소는 고기라는 명사를 따로 붙이는 수고를 하고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게 무엇인지 알려준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고찰이 담겨 있다.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그리고 물고기까지. 의심하지 않고 쓰는 단어에는 감추고 의도하고 그걸로 돈을 버는 사회의 부조리가 숨어 있었다. 마리라는 동물을 세는 수사 대신 명(목숨 명命)을 종평등한 언어에서는 쓰자는 변화의 물결이 찰랑이고 있다고도 알려준다. 닭 한 명, 돼지 한 명, 소 한 명. 물고기 말고 물살이. 매일 마주하는 얼굴을 보면 그들을 좁은 우리 안에 가두고 항생제 주사를 맞히고 도축장으로 끌고 갈 수 있겠는가. 『날씨와 얼굴』은 질문을 한다. 


인간을 위한 질문 역시 멈추지 않는다. 전국에 백 개 가까이 되는 쿠팡 물류센터 중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는 곳은 단 한 곳뿐이고 우리들은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고통을 헤아릴 능력이 있지 않냐고. 결혼을 해서 한국에 왔지만 빈번한 좌절 끝에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는 이주여성들의 얼굴을 알고 있지 않냐고. 책에 소개된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를 읽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응시해야 할 수많은 얼굴이 있다. 보이지 않음으로써 보이는 얼굴을 우리는 알고 있다. 태양이 폭발하고 그 영향이 지구까지 미치기 전까지 살아가기 위해서는 날씨의 얼굴을 얼굴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오래도록 자세히 보면서 예쁘다는 걸 서로가 서로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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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찬란 실패담 - 만사에 고장이 잦은 뚝딱이의 정신 수양록
정지음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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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러키 스타트업』을 읽고 재미와 감동, 위로, 공감 등 온갖 무해한 감정들을 선사받았기에 정지음의 책들을 무한 신뢰하기로 했으니 『오색 찬란 실패담』이라는 극강의 위로템 같은 제목을 달고 나온 신작 에세이를 사는 건 인지상정. 마침 평일 금요일 하루를 공휴일로 돌렸겠다. 책을 읽을 시간을 확보했으니 읽기 시작. 책을 읽을 시간이란 확보하는 게 아닌 그냥 있는 시간을 사용하면 되는데. 바쁘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는 바쁜 일들이 천지이기 때문에 어떡하든 시간을 쥐어 짜내야 한다. 


꼭 봐야 할 유튜브 영상을 밀어 놓은 채 『오색 찬란 실패담』을 읽었다. 실패담에 관한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오색 찬란하기 때문에 요란하고 명랑하기까지 한 이야기가 한 다발이다. 요즘 꽃값이 비싸다는데 비싼 꽃다발 대신 오색 찬란한 꽃 같은 이야기가 담긴 책을 선물하면 가성비 짱. 성공과 실패는 한 끗 차이라는데 한 끗이 뭐야 열 끗 아닌가 할 정도로 성공은 먼 무용담 같기만 하다. 요즘같이 물가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시대에는. 그래서 절약한다고 그게 돈이 됩니까.


『오색 찬란 실패담』에 나온 대로 에세이를 읽는 이유는 어디 나와 같은 사람이 없나 탐색하기 위해서다. 행동반경이 1Km도 되지 않은지라 주변인을 찾을 수 없는 상태에서라면 더더욱 책에 의존할 수밖에. 유튜브도 요즘엔 괜찮다. 신이 아닐까 사료되는 알고리즘이 나의 취향에 딱 맞은 영상을 추천해 주니까. 옆으로 누워서 나의 고민을 대신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소심한 목소리로 응원을 보낸다. 다들 파이팅. 


책의 시작부터 실패에 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요가 첫날 뚝딱이의 모습을 노출하고 익숙해지자 누군가의 뚝딱거리는 모습을 발견해 같이 넘어진다. 실패 선배님 다운 멋진 행동이다. 나의 실패로 너의 실패를 응원하는 가슴 뜨끈한 연대의 현장이다. 회사에서 정신이 고장 나지 않게 버티는 조언도 해준다. 남이 하는 말을 걸러듣고 일의 망침이 나의 망침이 아니라는 것. 회사에서 책임지고 벌받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고. 


월세를 살며 반려동물 맷돌이와 지내다가 주인이 전세로 돌리겠다고 하니 공인중개사에게 자신이 잘하는 싹싹 빌기를 시전한다. 제발 맷돌이와 살게 해주세요. 다른 건 바라지 않는답니다. 우울한 사람에게는 위로와 공감보다는 육아 서적을 선물하라고도 한다. 가장 쉬운 언어로 우울한 당신을 다독여준다고. 꼭 해봐야겠다. 마음이 어두울 땐 빛이 있다는 사실도 잊는다. 어두운 마음을 내려놓고 집으로 올라와야 하는데 친절한 친구처럼 집까지 데리고 온다. 


하루에 꼬박꼬박 하는 규칙적인 게 있다면 그건 실패에 대한 무용담 혼자 곱씹기이다. 무례를 밥 말아 먹은 그 사람에게는 한 마디 쏘아줬어야 하는데 가스라이팅 당한 것처럼 왜 죄송하다고 했지? 나의 미안함은 잘못을 해놓고도 사과하지 않은 당신이 미안해해줬으면 하는 건데 왜 그걸 모르지? 누워 있다가 얼굴이 뜨거워진다. 나의 실패는 오색 찬란하진 않고 그레이 색이다. 칙칙한 그레이 색. 그래 이 새끼야. 


『오색 찬란 실패담』의 실패담을 실패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나가는 오토바이가 아닌 서 있는 오토바이에 부딪혀 스스로 정형외과를 찾아가고 유튜브를 보다가 유튜브를 찍고 사이비에 당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실패일까. 실패를 가장한 어제와 오늘의 성공 스토리. 오색 찬란 성공담이라는 속편을 기다린다. 재수 없는 제목이라고 생각해서 안 팔릴 것 같지만 『오색 찬란 실패담』처럼 반어적인 컨셉으로 밀면 된다. 실패담은 성공담이고 성공담은 실패담. 각자의 자유대로 생각하게 놔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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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사 워크숍 오늘의 젊은 작가 36
박지영 지음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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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영의 소설 『고독사 워크숍』을 제목만 놓고 봤을 때는 고독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짐작했다. 맞다. 어느 정도는. 삶이라는 무게에 지친 사람들이 '심야코인세탁소'에서 보내온 '오늘부터 고독사를 시작하겠습니까?'라고 쓰인 초대장을 받는다. 큐알코드로 접속하면 채널에 가입할 수 있다. 그곳에서 매일 고독사로 가기 위한 행위가 담긴 영상을 올린다. 워크숍 최우수 수료자에게는 고독사 지원금과 함께 어디서든 고독사 할 수 있는 고독사 프리 티켓이 주어진다. 


자. 당신은 고독사 워크숍에 지원할 것인가. 고독사 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적고 브이로그 형식의 영상을 올린다. 다른 사람들의 고독사 영상을 보기도 해야 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깨닫게 된다. 고독이라는 단어 뒤에 붙는 사는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死(죽을 사)가 아닌 事(일사) 혹은 史(역사사)라는 것을. 사람들이 고독하게 죽어가는(死) 이야기가 아닌 그럼에도 고독하게 살아가는(事, 史) 이야기임을. 죽어간다는 것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의 유의어가 된다. 


무엇이 고독하게 죽어가고 살아가게 하는가. 자신의 성격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통장에 든 액수가? 읽고 싶지 않은 카톡이? 불친절한 누군가의 말들이? 『고독사 워크숍』은 포기나 실패에 대해 관대한 소설이다. 고독사 워크숍을 주체한 조부장은 아마추어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하던 걸 엎고 새로 시작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성실한 초보자이자 아마추어를 양성하기 위해 고독사 워크숍을 연다. 출발선은 결승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루에 한 가지씩 의미 있는 일을 할 것. 새해가 되면 새해가 아니더라도 어느 하루를 살다가 의미가 있다는 걸 나도 해보자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해볼까 하다가 나를 먼저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에 만보씩 걷거나 일기를 쓰고 영어 공부를 하는 등의 의미를 찾는 일. 『고독사 워크숍』은 세상은 이미 형편 없어진지 오래인지라 형편없는 사람이 되어도 괜찮다는 말을 들려준다. 형편없는 세상이니까 형편 없이 살 수밖에 없다. 


고독하게 살아가는 것으로도 생에 의무를 다하고 있다. 단종된 아이스크림에 부활 버튼을 누르고 의자를 뛰어넘고 연필을 깎는다. 죽음 예행연습을 하는 워크숍 참가자들의 행위들은 농담 같은 위로를 준다. 매일의 반복은 매일을 살아나가려는 힘이 될 수도 있음을 그들의 행위가 말해준다. 불안이 고독을 키운다. 실체가 없는 불안은 고독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한다. 오랫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고 연락이 닿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고독은 보인다. 


아무도 빌려 가지 않는 책에서 심야의 세탁소에서 의자 바닥에서 노란 포스트잇에 쓰인 '고독사를 시작하겠습니까?'라는 문장을 발견하는 당신에게 『고독사 워크숍』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일원이 될지도 모를 당신, 매일 죄송합니다를 이제는 슬픔 없이 말하고 있을 당신에게 말이다. 죽어가지만 살아가야 할 우리들의 망연한 얼굴을 기억에 가둔 채 고독사 워크숍 채널을 개설한다. 


고독사 워크숍 1일 차. 

춘식이 인형을 쓰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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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마치 비트코인
염기원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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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온 지 5년째가 다 되어가지만 나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 엘리베이터 안에 아무도 없으면 안도한다. 가끔 앞 집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겨우 -세요 라고 작은 목소리로 인사한다. 안녕하는 묵음 처리된다. 눈이 많이 오던 날 앞 집 아저씨를 문 앞에서 딱 마주치고 말았는데 스몰토크를 시도하셔서 횡설수설 하고는 후회했다. 


그래도 엘리베이터 안에 소식지들은 열심히 읽는다. 회의가 있었고 회의 결과는 어떠했고 하는 내용들. 자발적 아싸라고 하지만 가끔 무리 안이 어떤지 궁금해하는 소심한 관종이다. 어떤 배우의 말처럼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은둔하면서 살고 싶은 소망이 간절하다. 와이파이는 잘 터져야 하고 너무 놀면 어두워지니까 하루에 세 시간에서 네 시간 일주일에 이틀 정도 노동하는 걸로 사회성을 유지하면서.


염기원의 장편소설 『인생 마치 비트코인』은 쓸쓸하고 삭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설은 단 한 명의 인물에게도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대표, 사장, 여자, 남자, 어머니, 나 이런 식이다. 주인공인 '나'는 오피스텔 건물을 관리한다. 입주자들의 불편 사항을 접수해서 해결하고 월세와 관리비 납부 내역을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마흔이 곧 되어가고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친구는 없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아! '나'의 친구는 이름이 있다) 성진과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염기원은 서울과 지방의 경계를 인물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식으로 나눈다. 서울에서의 삶은 누구의 이름도 알고 싶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나'의 내면을 반영한다. 성진과 용산 전자 상가에서 일을 한다. 박봉에 업무 강도도 높았다. 성진은 더 버티지 못했고 '나'는 일을 바꿔가면서 서울에서 겨우 살아간다. 


잘못된 정보로 주식 투자에서 돈을 잃고 '나'는 경마장에서 만난 사장에게 전화를 건다. 사장은 오피스텔 관리를 맡아달라고 했다. 관리인으로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 부수입을 챙겨가면서 돈을 모으고 있다. 403호에서 일어난 일만 없었다면 오늘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모르는 채로 각성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을 것이다. 관리비 미납으로 403호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받지 않았다. 


문 앞에 다가가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걸 알아챘다. 현관 아래에서 파리 유충이 보였다. 사장의 동의를 얻어 문을 따고 들어갔다. 여자는 죽어 있었다. 특수청소 업체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스스로 청소를 하기로 한다. 그렇게 하면 돈을 중간에서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403호 여자는 죽기 전 집 안을 정리했고 일기장과 물건 하나만 남겼다. 


'나'는 여자의 일기장을 읽으며 여자의 고단한 삶을 알게 된다. 『인생 마치 비트코인』은 보통의 평범한 삶을 꿈꾸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은 현실을 꼬집는다. 대학을 가고 학자금 대출 없이 학교생활을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 기성세대의 삶의 방식은 이제는 전설이 되어 버렸다. 향수와 동경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건 선택 사항이 되어 버렸다. 무엇이 되고 싶다,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는 청춘들의 오늘이 『인생 마치 비트코인』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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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이 있어 - 은모든 짧은 소설집
은모든 지음 / 열린책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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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모든의 짧은 소설집 『선물이 있어』는 전작 『우주의 일곱 조각』과 연결된다. 성지, 은하, 민주가 다시 등장한다. 이야기라는 하나의 세계가 끝이 나면 그 안쪽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궁금했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서 인물들은 끝이라는 걸 운명처럼 받아들일까. 아니면 다른 세계로 가게 해달라고 시위를 벌일까. 그렇다면 이야기의 세계는 계속 열려 있었으면 좋겠다. 


작품이 끝나도 살아간다. 그러다 힘을 낸 작가가 다시 이야기 안으로 인물을 불러낸다. 하염없이 숫자를 보게 만드는 가스비 고지서를 던져두고 아싸 이번엔 어떤 설정이야 이러면서 뛰어나오는 상상을 한다. 은모든은 은모든 유니버스를 구축하려나 보다. 설정만 바꾸고 기존의 인물을 호출해 새롭게 살게 하는 것이다. 시련과 고난을 겪게 하고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도 해주면서. 


『선물이 있어』는 부담 없이 읽기에 좋은 소설집이다. 책을 읽다 보면 조금씩 지루해지기는 시기가 있다. 지금은 활자가 아니어도 재미난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하루 종일 누워만 있어도 심심할 틈이 없다. 핸드폰 하나만 있으면. 눕라벨을 실천하기에 좋은 시절이다. 나 대신 여행도 가주고 나 대신 하루도 열심히 산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건 어찌나 행복한 일인지. 『선물이 있어』는 심각하고 파괴스러운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흔한 일상의 어려움부터 도시 전설 같은 일까지 그래 그럴 수 있어 납득이 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라 몰입이 잘 된다. (여전히 읽기 어려운 SF 소설,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데 몇 백 년 후의 지구 상태를 상상하는 건 피곤한 일.)


소설 중에 흥미로웠던 건 「결말 닫는 사람들」이었다. 이 소설이야말로 앞으로의 은모든 문학 세계를 암시하는 중요한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열린 결말과 닫힌 결말 중 어느 쪽을 선호하시는지. 갑오개혁 이전에 쓰인 고대 소설이 꽉꽉 닫힌 결말을 보여줬다면 이후의 소설은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된 거야 죽은 거야 산 거야 하는 아리까리하고 의문스러운 결말로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는 걸로 승부를 봤다. 


이해 가능한 결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닫힌 결말의 소설을 읽으면 속이 후련해진다. 그래 해결됐고 다음 이야기 들어와 들어와. 「결말 닫는 사람들」의 설정은 흥미로웠다. 나 같은 사람을 소설가는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말 닫는 사람들을 피해 은모든은 모든 이야기의 끝을 살짝 열어둔다. 다른 행성에서 다른 차원에서 소설의 시간은 흘러가고 소설가인 내가 끝이라고 말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선물이 있어』에서 보여준다. 


길을 걷다가 커피를 마시러 가게에 들어갔다가 문이 보인다면 한 번쯤 열어보시라. 두통과 피곤을 그곳에 두고 언제든 다시 나오면 된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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