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고 싶은 아이 - 2021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 죽이고 싶은 아이 (무선) 1
이꽃님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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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교복 입고 학교 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그때가 그립지 않냐고 물어 온다면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한 편 생각은 해볼 것이다.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어떤 순간은 그립다고. 빈 방에 누워 책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던 시간들. 가방에 만화책을 넣고 집으로 가던 저녁.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반복해서 듣던 새벽. 주로 혼자 있던 풍경 속으로 한 번쯤 가서 말해주고 싶다. 그때의 나에게. 괜찮아, 버텨봐. 학교 밖의 시간들에서는 자유로웠다. 


이꽃님의 소설 『죽이고 싶은 아이』는 고등학교 1학년 박서은과 지주연을 둘러싼 소문과 사건의 실체를 밝혀 나간다. 박서은이 쓰레기 소각장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서은이 죽기 전날 주연과 함께 있었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이어진다. 주연이 서은을 죽였을 거라는 이야기가 퍼져 나간다. 서은의 곁에 주연의 지문이 찍힌 벽돌 조각이 나왔기 때문이다. 


서은과 주연의 주변인들의 인터뷰로 소설은 채워진다. 주연은 그날 서은과 쓰레기 소각장에 함께 있었던 것 까지는 기억한다. 이후의 일들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주연은 혼란에 빠진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서은을 죽였다고 한다. 모든 정황이 서은을 죽인 용의자로 자신을 가리킨다. 과연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 『죽이고 싶은 아이』는 진실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때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건 관계 맺음이었다. 다들 단짝 친구가 있었다. 소풍이나 수학여행 때 옆자리에 앉을 누군가가 있었다. 내밀한 사연을 주고받아도 소문으로 이어지지 않을 친구가 있었다. 친구를 사귀고 유지하는 일이 버거웠다. 서은과 주연은 친구가 되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친구였다. 서은이 죽고 주변인들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그들 관계의 불온함이 드러난다. 


친구가 되어도 서열은 나뉜다. 그들 안으로 들어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돈이 없었던 나로서는 친구 맺기는 포기해야 했다. 『죽이고 싶은 아이』의 주인공 서은은 엄마와 둘이 산다. 엄마는 고깃집에서 일한다. 친구 주연은 그런 서은에게 자신이 쓰지 않는 물건들을 준다. 서은은 주연에게 받기만 하는 자신이 싫어 편의점에서 일을 한다. 돈이 좀 생기면 자신도 주연에게 무언갈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다소 과격한 제목의 소설 『죽이고 싶은 아이』를 읽고 나면 제목의 의미를 곱씹게 된다. 죽이고 싶은 아이는 누구였을까. 주연에게 내일이란 있을 것인가. 진심이 닿지 못한 관계는 파국으로 끝난다.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슬픈 내용증명 같은 소설 『죽이고 싶은 아이』. 이곳이 끝이 아니야. 서늘한 예언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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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염기원 지음 / 문학세계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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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근이 책 리뷰를 블로그에 올리고 있다. 재미도 감동도 없는 지루한 글을 누가 읽을까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록하고 글쓰기 감을 잃지 않으려는 용도이다. 감만 잃지 않고 있다. 실력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조차도 책이 아닌 화면으로 긴 글을 읽는 게 귀찮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지 리뷰글에 달리는 댓글이란 협업 제안, 포스팅 알바, 건 당 5만 원, 당일 지급, 오픈 채팅 링크 등 이런 단어들로 채워진다. 


카톡으로 대뜸 사업자등록증을 보내오기도 한다. 믿을만한 업체라는 뜻이리라. 오는 대로 차단하고 있다. 댓글도 예전에는 지우곤 했지만 지금은 귀찮아서 안 지우고 있다. 방금 만든듯한 아이디(뜻을 알 수 없는 영어와 숫자 조합으로)로 잘 읽었습니다, 감동적입니다, 좋아요 누르고 갑니다 영혼 없는 댓글도 수시로 달린다. 최적화를 하기 위해서이리라. 정보를 알고 싶어 검색창에 단어를 넣으면 업체에서 제공한 사진과 멘트가 있는 바이럴 마케팅 글들이 잔뜩 뜬다. 


이런 방식이 유튜브로 넘어갔다. 염기원의 장편소설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는 과거 투포환 선수 지금은 공장에서 조장으로 일하는 채하나와 그의 대졸 백수 오빠 채강천 남매의 좌충우돌 살벌한 현생 이야기를 다룬다. 한심하고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는 아빠와 그런 아빠 뒤치다꺼리 끝에 화병을 얻은 엄마, 하나의 가족 구성원은 그러하다. 어느 날 심장이 멈춘 엄마의 장례식을 끝으로 오빠 채강천은 연락 두절. 우연히 유튜브 영상에서 오빠를 발견한다. 


영상에서 채강천은 자신을 베스트셀러 작가, 스타트업 대표, 강사라는 타이틀로 소개하고 있었다. 딱 봐도 사기꾼의 냄새가 폴폴 풍기는 오빠 새끼를 잡으러 가면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는 속도감 있는 문체로 태백에서 서울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흙수저지만 명랑한 하나와 금수저지만 우울한 미주, 지금은 짜깁기 기사를 쓰지만 언젠가 조중동으로 갈 거라는 포부를 가진 하연까지 황지 꼴통스 멤버들도 오빠 새끼를 잡기 위해 동참한다. 


소설의 부제는 '사기꾼들 전성시대'이다. 리뷰글에 달리는 댓글이 사기라는 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를 읽고서야 확실히 알았다. 대사기꾼들이라는 걸. 책기꾼이라고 소설은 표현한다.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글을 짜깁기해서 책을 낸다. 자신의 이력에 책 제목을 넣고 멘토인 척하며 강의를 다닌다. 책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야 너도 책 낼 수 있어 부추긴다.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로 데리고 간다. 


책기꾼들에게 하연도 당했다. 거금 오백만 원을 내고 책을 출판했다. 다섯 권 팔렸고 그중에 한 권은 하연이 샀다. 하나는 오빠 새끼가 스타트업 대표라고는 하지만 바지 사장에 불과하고 책기꾼과 사기꾼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는 인물 설정이 현실적이다. 투포환 선수로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했을 정도로 운동을 잘했던 하나는 지금 태백에서 공장 노동자로 살아간다. 돈을 조금만 더 모으면 가스보일러가 있는 전셋집으로 이사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하나가 오빠가 아닌 오빠 새끼라고 부르는 강천은 서울에서 수상한 일을 하고 있다. 이 청춘이나 그 청춘이나 서글프긴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나는 강천에게 묻는다. 동시에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도 질문한다. 당신은 무엇으로 사는가. 희망이 버려진 시대에 사는 청춘들에게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는 사기꾼들 특히 쉽게 돈 벌 수 있다는 수익 보장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였다. 하나의 직업 설정이 그렇다. 


잠을 자면서도 일하는 꿈을 꾼다. 몇 주째 그러고 있다. 끔찍한 악몽이다. 잠이 오는데도 꿈을 꾸기 싫어서 일어난다. 이렇게 일해서 돈을 번다. 한 달에 200~300만 원 보장이라는 댓글이 웃긴다. 당일 지급이라는 건 인력사무소 시스템인데. 그나저나 주말에도 업무 카톡 오는 거 실화임? 이렇게 돈 번다. 사기꾼들 받고 예의 없는 것들 얹어서 저렇게도 사네 관망하면서 돈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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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절에 버리러 트리플 17
이서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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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애증의 역사도 엔트로피처럼 증가하고 있어. 우리는 앞으로 서로를 점점 더 버거워하게 될 거야. 극적인 화해, 영원한 화해는 없어. 끊임없이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싸우고, 다시 화해할 거야. 이 짓을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나, 지친다, 하면서도 계속 그렇게 할 거야. 그러다 보면 노인이 될 거고,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죽을 거고, 그때 비로소 영원한 그리움과 사랑이 탄생할 거야. 


(이서수, 『엄마를 절에 버리러』, 「있잖아요 비밀이에요」中에서)


그렇다. 사는 동안은 싸우고 그러다 화해하고 싸우고 화해하고의 반복이었다. 어느 날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굴다가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아무렇지 않게 연락을 하며 지냈다. 엄마와는. 내내 좋지도 내내 나쁘지도 않았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시간을 계속해서 살 줄 알았다. 멍청하고 한심한 착각이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가장 후회가 되는 일은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통화를 했는데도 통화 녹음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아. 그때 사용한 휴대전화에는 통화 중 녹음 기능이 없었지. 


두 번 다시 목소리를 들을 순 없지만 있는 힘껏 힘을 내 내 이름을 불렀던 순간은 기억에 남는다. 환청처럼 들려온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도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대곤 했었지. 엄마는 노인이 되지 못했고 이제 내가 노인이 되면 되는데 그것마저도 장담할 수 없다.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죽'으니 '비로소 영원한 그리움과 사랑이 탄생' 해버렸다. 죽음은 미움을 밀어내고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 할 그리움과 사랑을 던져주었다. 


이서수의 소설집 『엄마를 절에 버리러』에는 엄마의, 엄마에 의한, 엄마를 위한 세 편의 소설이 실려있다. 엄마를 주제로 한 테마 소설집이다. 아픈 아빠 대신 생계를 책임지는 엄마, 무협 애정 소설을 쓰는 엄마, 자식들에게 부양의무를 지우지 않기 위해 정신 장애인이 되려는 엄마. 세 엄마들과 더불어 후회를 자주 하는 엄마까지. 대체 엄마들의 사연은 어쩌자고 듣기만 해도 난감하고 가슴 답답하고 애달픈가. 남의 엄마 나의 엄마 가릴 것 없이 말이다. 


나의 엄마 이야기는 차마 마음이 아파서 할 수 없고 이서수가 들려주는 남의 엄마 사연은 남길 수 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왜 이러고들 사나 왜 이러면서도 살아가나 입술을 앙다물게 만든다. 살아지니까 살아간다. 살아가니까 살아진다. 동어 반복의 말장난 같은데 사는 게 진지할 수 있나. 매사에 심각하고 억울해하다 보니 죽게 되더라. 출근할 때마다 마주치는 할머니가 있는데 저이의 현재를 왜 가질 수 없었나 한탄스럽다. 


표제작이기도 한 첫 번째 소설  「엄마를 절에 버리러」는 제목만 놓고 보면 오해하기 좋다. 대체 엄마를 왜 버리러 가나, 패륜 소설 아닌가 하는. '나'를 임신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빠와 결혼한 엄마는 결국 병든 아빠를 위해 가장 역할을 하느라 마음에 병이 든다. '나'는 악착같이 일해 번 돈을 모두 아빠의 병원비로 쓴다. 오랜 투병 끝에 아빠는 눈을 감는다. 엄마와 나에게는 빚이 남는다. 


「암 늑대 김수련의 사랑」에는 일이 끝나고 난 뒤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쓰는 딸과 그 딸의 영향을 받아 무협 애정 소설을 습작하는 엄마가 나온다. 소설이라니. 대체 왜 이러나. 요즘 세상에 소설을 써서 돈을 벌 수 있나. 그래도 딸은 소설을 써서 첫 달에 28만원을 번다. 중졸 학력을 가진 엄마는 좋은 생각을 읽고 밑줄을 긋고 수필에 가까운 일기를 쓴다. 급기야 미용실을 배경으로 늑대로 변하는 주인공을 등장 시켜 소설을 쓴다. 


코로나 시대의 가족 일상을 그린 「있잖아요 비밀이에요」에는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그레고르 잠자가 자신 같다고 말하는 엄마와 그 말을 듣고 화가 나는 딸이 나온다. 사위가 코로나에 확진 되어 딸과 모텔에서 잠시 생활하는 엄마. 무엇을 해서 남은 생활을 이어갈까 고민하는 엄마는 귀신을 무서워한다. 이어서 이서수는 자신의 엄마와 과일을 사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을 「무지개떡처럼」에서 그린다.


엄마들의 가난과 노동 문제를 『엄마를 절에 버리러』에서는 다룬다. 하루에 3천원만 줘도 일을 하겠다는 엄마. 반려동물 장례 지도사가 되겠다는 엄마. 억울하게 도둑 누명을 썼지만 할 수 있는 게 요양보호사라서 마음이 진정되면 그 일을 다시 하겠다는 엄마. 엄마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노동을 갈망한다.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한다. 이제 나 역시 이력서를 내면 나이 때문에 서류에서 탈락하는 시기가 되었다. 


아무도 안 받아주고 불러주는 곳이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살아서 그럴 때가 오는 걸 축복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그나저나 그 애는 내가 아무도 없다는 걸 뻔히 아는데도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랩처럼 주절거리는데 왜 그럴까.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자기애 과잉 같은데 정말 궁금하지 않다. 타인의 가족사. 특히 엄마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 그저 읽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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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들이 신경 쓰입니다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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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 안을 들여다봤다. 특이하게 그 편의점에는 고양이들이 산다. 반려동물 입장이 가능하다는 안내판이 있는 곳. 통실통실하거나 마른, 침을 질질 흘리거나 한 쪽 눈이 감긴 고양이들이 그곳에 있다. 오늘은 그동안 못 보던 고양이가 문 앞에 있었다. 너 어디서 왔니? 그리고 유제품이 있는 곳을 봤다. 좋아하는 덴마크 드링킹 요구르트가 있나 없나. 인기 제품이라 2+1 행사를 자주 하는데 운이 좋아야 다른 맛으로 세 개를 골라올 수 있다. 


뉴페이스 고양이 한 번 보고 유제품 코너 한 번 보고 집으로 올라왔다.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 『사소한 것들이 신경 쓰입니다』를 읽고 나만 편의점 매대를 확인하는 게 아니었구나 안심했다. 제목답게 사소한 것들이 신경 쓰여 자꾸 확인한다. 하겐다즈 확인, 장바구니 확인, 밑반찬 확인, 텔레비전 편성표 확인 등 확인 시리즈가 연달아 펼쳐져 있는 사랑스러운 책이다. 


주식 상한가 확인, 부동산 거래가 확인, 코인 시세 확인을 하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아니다. 그저 오늘을 살아낸 용사로서의 확인이다. 매일 나와의 싸움이다. 일어나기 싫은 나,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나머지 뭐부터 손대야 할지 몰라 모니터만 보고 있는 나, 하기 껄끄러운 말을 해야 하는데 망설이며 전화기만 보고 있는 나. 이런 나는 편의점 고양이 확인, 집 냉장고 확인, 앞에 가는 학생 가방에 달린 열쇠고리 확인을 한다. 


제일 자주 하는 확인은 단골 쇼핑몰에 들어가 할인 품목을 훑어보는 것. 필요가 아닌 필요를 만들어서 구매한다.  『사소한 것들이 신경 쓰입니다』는 책의 소개답게 읽고 나면 '일상이 조금 사랑스러워지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마트에 들러서 누군가의 장바구니를 보고 남의 집 현관에 있는 화분을 보는 그저 보기만 했을 뿐인데 마음이 포근해진다. 이상 기온으로 벚꽃이 일찍 피었더랬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피곤해지니까 꽃놀이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아침에 걸어가는 길에 공원에 핀 벚나무를 봤다. 우와와.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거야. 갓 지은 밥알 같은 꽃들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 있었다. 찰칵. 가까운 곳에서 벚꽃 확인. 멀리 가지 않아도 고개를 들면 꽃이 있다. 벚꽃 사진으로 이겨냈다, 피곤함을. 


주말에는 나가지 않는다. 평일에 주문한 책이 오기를 기다린다. 덜커덩 소리가 나면 현관문을 열어 상자를 들고 들어온다. 택배 상자 확인. 책이 구겨지지 말라고 비닐에 공기를 담아 보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사인본이었다. 책을 읽어야지 하다가 넷플릭스를 보고 있는 나. 넷플릭스 확인. 신작이 뭐가 나왔나. 나의 취향에 맞게 골라준 작품들 확인. 


사소한 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 건 나이가 들었다는 뜻일까. 대단한 일 말고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쓰는 하루.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머리 말리다가 새치 확인. 착실히 시간이 흐르고 있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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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겨울 2022 소설 보다
김채원.성혜령.현호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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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시리즈를 읽으면 적어도 한 편 정도는 마음에 드는 소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 편 중에 한 편 정도는. 취향이란 확고하지만 설명 불가의 영역이어서 왜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논리적으로 접근하기 힘들다. 그냥 그날 느꼈던 기분이 소설에 투사되고 나도 모르게 감정이 이입되어 괜찮네, 괜찮았어 한다. 소설보다를 읽는 방법은 소설의 첫 문단을 읽고 읽어도 되겠어 안심이 되는 부분을 만난 소설을 먼저 읽는다. 


『소설 보다: 겨울 2022』는 성혜령의 「버섯 농장」을 먼저 읽었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진화에게서 연락이 왔다.'로 시작되는 「버섯 농장」. 현실에서는 연락이 없던 이가 전화를 걸어오는 일의 사정이란 대부분 전화를 받자마자 거절을 해야 하는 경우다. 잠깐만 쓰고 돌려줄게. 우리 이모의 아는 누가 이번에 좋은 상품이 있다고 하는데 등. 아니나 다를까 소설 「버섯 농장」도 차라리 진화의 전화를 받지 않았으면 좋았을 기진의 이상한 하루를 보여준다. 


김채원의 「빛 가운데 걷기」는 딸을 잃은 노인이 딸이 남긴 아이를 돌보는 일상을 담는다. 걷고 잠깐 시야가 흐려지는 시간을 겪고 어디로 통하는지 모를 문을 여는 시간. 기억이 흐려지지 않기 위해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복기한다. 소설은 건조한 문체로 고여 있는 노인과 아이의 시간을 그린다. 「연필 샌드위치」에서 현호정은 꿈과 현실이 반복되는 서글픈 청춘을 이야기한다. 다이어트 중에 빵집에서 빵을 고르는 꿈을 꾸곤 하는데 소설에서는 복돼지 문구점으로 형상화한다. 


띄엄띄엄 붉은 등 아래에서 세 편의 소설을 읽었다. 소설의 문장을 길게 따라가지 못하고 집중력은 자꾸 흐트러져 갔다. 한 문장을 읽고 딴 생각. 대부분 나의 행동에 대한 자책과 모멸감을 되씹었다. 꿈과 환상, 추상 대신 현실적인 현실의 서사였다면 어땠을까. 소설을 읽는 3월의 밤은 길었고 끝나지 않는 엉망진창의 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었다. 나만 엉망진창이 아니구나. 모두 다 엉망진창이어서 다행이야. 


상실, 불신, 거식의 겨울을 빠져나온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낮잠을 자고 깨어난 봄에는 좀 더 나 같은 이야기가 도착해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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