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네치를 위하여 - 제2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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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디아 코마네치. 체조 역사상 10점 만점을 받은 전무후무한 체조 선수. 점수 표시판에 10점을 표시할 수 없어 1점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었던 기록적인 선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 세 개와 은메달, 동메달 하나를 각각 따냈다. 


  자신이 코마네치의 환생이라고 믿는 소녀가 있다. 이름 고마니. 처음 들은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의심이 들어 몇 번씩 다시 묻는 이름 고마니. 멀쩡히 살아있는 코마네치를 죽은 것으로 착각해 친구들에게 고마네치로 다시 태어난 것이라 말하는 고마니. 


  조남주의 소설 『고마네치를 위하여』를 읽다 보면 우습고 진지하고 우습고 진지해서 뻔한 성장소설이라는 클리셰가 사라진다. 소설은 서울에서도 가장 낙후된 동네에 살고 있는 고마니네 가족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민낯을 활짝 드러낸다. 재개발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마니의 엄마는 조합원장이 오면 아버지의 인감을 팡팡 찍어준다. 마니는 그런 엄마를 도장 페티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좁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옆집 앞집 구분할 것 없이 모두 한 집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고마니는 서울 올림픽에서 굴렁쇠를 굴리던 소년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날 이후로 동네 친구들과 올림픽에 나가리라 다짐하며 체조 연습을 한다. 집 안의 사물들을 깨 먹고 급기야 마니는 친구의 발뒤꿈치에 맞아 코피가 난다. 그래도 체조 연습을 게을리할 수 없어 학교 뒤뜰에서 모이기로 한다. 날은 추워지고 옷은 두껍게 입어 체조 연습이 쉽지 않아 친구들은 하나둘씩 떠나간다. 


  동네 체조 모임이 없어진 후에도 마니는 계속 체조를 배운다. 아버지 표현에 의하면 나사 하나가 살짝 풀린 엄마 덕분이다. 엄마는 수백 개의 나사 중 하나가 빠진 게 아니라 살짝 풀린 정도의 정신 상태를 가졌다. 그 엄마가 마니가 혼자 놀고 있으면서 한 짓을 오해하여 마니의 꿈에 대해 묻고 마니는 체조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열 살의 마니는 엄마 손에 이끌려 체조 학원에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학원은 체조 학원이 아니라 에어로빅 학원이었다. 원생이 끊길까 두려운 원장이 코마네치의 영상을 보여주고 코마네치와 고마니의 이름의 연관성을 들려준다. 


  사실 고마니라는 이름은 외할아버지가 작명소에 가서 지어온 이름이었다. 엄마는 무슨 뜻인지 잊어버렸지만 아무튼 좋은 뜻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충남 공주에 '고마니 고개'가 있었다. 나당 연합군과 백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아들 다섯 가진 집의 아들들이 전쟁에 차출되었다. 다섯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부모는 아들들이 넘어간 고개를 고마니 고개라고 불렀다. '넘어가면 고만이다'라는 뜻의.


  십 년간 일해온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고마니는. 미스 고에서 고대리로 직함이 바뀐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회사는 총무부의 고대리를 간단히 잘랐다. 과장으로 결혼으로 이름대로 넘어가는 게 쉽지 않은 마니는 엄마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하고 지하철 순례 여행을 떠난다. 그러다가 옛 추억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은 이제 막 아파트가 밀고 들어올 것처럼 생각하며 흥분한 엄마가 도장 찍을 준비를 하고 있다. 아버지의 인감을 들고 증명서를 떼서 조합에 가져다준 엄마. 마니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아버지는 떡볶이 저을 때 쓰는 큰 국자를 들고 재개발 사무실로 찾아가 서류를 다시 받아온다. 


  마니는 결국 체조를 끝까지 하지 못했다. 체조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그곳은 마니의 집이나 가게를 팔아서 등록금을 마련할 정도로 비싼 학교였다. 애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대회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엉덩이에 붉은 하트라는 기상천외한 이미지만 남긴 채 마니는 전학을 간다. 그럭저럭 학교를 마치고 여러 일터를 짧게 짧게 전전한다. 


광고는 이런 내레이션으로 끝맺는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어.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 믿으라는 말은 교회나 절에 가서 하세요. 믿는 건 마음이고 하는 건 몸이라고요. 나는 이런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거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거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라거나, 뭐 그런 말들.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는 나에게는 결국 네가 간절히 원하지 않았고, 노력이 부족했고, 의지가 없었다는 힐난으로 들렸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고마네치를 위하여 中에서, 조남주)


  올라가라는 아파트는 올라가지 않고 손에 쥔 게 없는 사람들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세상이다. 가진 게 없고 아는 게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믿음을 배신당한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쳐도 들어주지 않으니 높은 곳으로 올라가 소리친다. 우리를 쫓아내지 말라. 말하는데도 망루 일층에 불을 놓았다. 아파트 칠층 높이에서 뛰어내리고 그러다가 사람이 죽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삶은 넘어가면 고만인 세상이 아닌게 되어 버렸다. 집 하나 가지고 싶은 그들의 소망은 욕심으로 헛된 희망으로 남는다.


  코마네치의 뒤를 이을 체조선수를 꿈꾼 소녀 고마니는 서른여섯의 백수가 되었다. 엄마와 재개발 사무실을 따라다니고 무조건 1번 찍으라는 말에 생각없이 찍는다. 재개발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은근한 소문을 들은 아버지는 집을 팔고 이사 가자고 한다. 회사 다니며 땅을 사서 되팔며 차익을 얻는 파꽃을 보며 웃는 남자에게 집을 판다. 마니와 아버지는 갈등한다. 집 하나 얻자고 남을 속여도 되나. 재개발이 안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남자에게 말해야 하지 않겠나. 엄마는 부녀의 이야기를 듣다가 한 마디 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남을 속이며 살아가는 게 쉬어진 세상. 남을 속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 어렸을 때 간직한 꿈을 하나씩 버리고 낡은 옷장과 서랍장을 가지고 떠날 수밖에 없는 오늘. 조남주의 소설 『고마네치를 위하여』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요소로 무한 긍정과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헛소리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만가만히 위로하는 소설이다. 갈고리가 그려진 망치 가방을 살 수 없어 천 가방을 메고 다닌 마니에게 미래의 코마네치는 경쟁 브랜드의 시에프에서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해준다. 


  불가능이란 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만 마니는 그 동영상을 다운 받아 열심히 본다. 체조 선수를 꿈꾼 그 시간을 부끄럽게만 기억하는 어른이 된 마니는 우리에게 욕심으로 꿈꿀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루 세 번 부모님과 밥을 먹을 수 있는 식탁, 매일 온수를 틀어 목욕할 수 있는 목욕탕, 좌식 책상을 들여놓고 소설책을 읽을 수 있는 방, 커튼 없이 달빛이 쏟아지는 거실. 소중한 기억으로 뭉친 가족이 모여 내일을 희망할 수 있는 공간 하나를 가지는 것조차 버거운 세계에서 『고마네치를 위하여』는 우습고 서글픈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오늘을 살아갈 사소한 행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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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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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

(자기 앞의 생 中에서, 에밀 아자르)


  로자 아주머니는 거대하다. 그녀의 몸무게는 95kg이 넘는다. 한때 예뻤고 말랐다. 아주머니의 열다섯 살 때의  사진을 보지 않았다면 모모조차 믿기 힘들 정도였다. 지금은 머리가 빠져 서른두 가닥 밖에 남지 않았다. 열다섯 살의 그녀는 다갈색 머리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만 로자 아주머니의 과거는 화려했고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된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칠층 아파트에 살고 창녀들이 맡긴 아이를 보살피느라 하루 종일 정신이 없는 그녀에게 세상은 위조 증명 서류 같은 곳이다. 진짜는 없고 가짜만이 판을 치는 곳.


  로맹 가리가 이름을 숨기고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은 가짜 인생을 살기로 한 작가의 세상을 향한 펀치 같은 소설이다. 한 작가에게 두 번 주지 않는다는 콩쿠르 상을 받은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는 모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안의 숨어 있는 공포와 불안을 꺼내기를 부추긴다. 암사자가 와서 우리 볼을 핥아주고 광대가 놀러와 방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 해준다. 에밀 아자르라는 가짜 이름으로 로맹 가리는 모모와 로자 아주머니가 믿는 세상에 돌을 던진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지만 사랑의 다른 이름은 사랑한 순간 이라고 말한다.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냐고 묻는다. 돈과 차, 집, 은행 예금이 아닌 사랑 없이 살 수 있냐고 묻는 모모에게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만질 수 있게 해준다. 생일도 알 수 없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모모에게 생은 우산 친구를 선사해주고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단 한 사람 로자 아주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폴란드 태생 유태인인 로자 아주머니는 젊은 시절 모로코와 알제리에서 몸으로 벌어먹고 살았다. 애인이 로자 아주머니의 돈을 빼앗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녀는 독일인 유태인 수용소에 끌려갔다. 그녀는 한밤중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두려워했으며 소리를 지르면서 자다가 깨곤 했다. 그럴 땐 지하에 마련한 유태인 동굴에 들어가 쉬곤 했다. 모모가 그곳을 발견하면서 나중에 둘은 생의 마지막을 동굴에서 보낸다. 나이가 들어 일을 못하면서 창녀가 맡긴 아이를 맡아 키우는데 그중에 모모는 특별한 아이였다. 


  모모에게 나이를 알려주지 않은 건 모모가 자신의 곁을 떠날까 봐 두려워서였다. 모모는 자신만의 감각으로 비루한 생을 마주볼 수 눈을 가지고 있다. 로자 아주머니를 힘들게 하는 슬픔을 막아 내고 혼자서 세상의 엿 같음에 맞설 준비를 하는 아이였다. 아끼는 개를 오백 프랑에 팔고 돈을 하수구에 버리자 로자 아주머니는 그런 일은 아우슈비츠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며 카츠 선생님을 찾아가 모모의 정신이 괜찮은지 묻는다.

  


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게 한다.

(자기 앞의 생 中에서, 에밀 아자르)


  흑인, 창녀, 여장 남자, 아이, 노인. 소외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모를 돌본다. 자신이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찾아와 모모를 데려가려 하지만 잠깐 정신이 든 로자 아주머니는 괜찮은 거짓말로 모모를 지킨다. 남자가 찾아와서 좋은 점은 모모의 나이가 열 살이 아니라 열네 살로 네 살의 나이를 더 얻게 됐다는 것이다. 모모는 그걸로 만족한다. 이제 혼자서도 살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모모가 바라는 생은 혼자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는 것이다. 열네 살이라는 나이는 혼자서 글을 쓰고 기분이 내키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나이다. 혼자 살 수 없다면 로자 아주머니 같은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과 춤을 추고 지하 동굴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창녀라고 해서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로자 아주머니가 수용소에서 살아 남고 예순다섯이 될 때까지 뚱뚱한 몸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세상에는 진짜가 없다는 사실을 일찍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위조 증명 서류를 만들고 빈민구제소에서 나온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일이 그녀의 생을 살만하게 만들어 주었다. 가짜로 진짜를 지켜 나가는 일. 창녀들이 찾아와 계단에서 울면 로자 아주머니는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여준다. 아이들과 자신의 삶이 가짜로 인해 고통받지 않기를 바란다. 


  자기 앞의 생을 살수 있는 자들은 가짜다. 진짜라고 우기는 자들은 믿을 수 없다. 그럴듯해 보이는 구석에는 음흉한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다. 반짝이고 휘황찬란한 겉모습에는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추악한 진실이 들어 있다. 모모와 로자 아주머니가 꾸며낸 인생 안에 그들이 살고 싶어 했던 진짜 삶이 있었다. 모모는 로자 아주머니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촛불과 향수로 그녀의 생을 감춘다. 병원에서 고통받지 않을 수 있도록 가짜 친척을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놀랄 정도로 진짜보다 가짜를 더 선호한다. 진실을 아는 것보다 거짓으로 안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주 못생긴 사람과 살다 보면 그가 못생겼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정말로 못생긴 사람들은 무언가 결핍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자기 앞의 생 中에서, 에밀 아자르)


  모모는 지금 생각해보면 로자 아주머니가 그렇게 못생긴 것도 아니라고 회상한다. 머리가 빠져 가발을 써야 하고 허리와 엉덩이가 구분되지 않는 몸. 거구의 몸으로 칠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힌 로자 아주머니. 아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창녀들을 위해 위조 서류를 만들고 글을 모르는 흑인 포주를 위해 대신 편지를 써준다.


  사랑의 이유를 찾으라고 말하는 당신은 어리석다. 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당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못생긴 로자 아주머니를 사랑하는 모모만이 사랑받을 줄 아는 생이다.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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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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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람과 헤어지고 잘 지내던 어느 순간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나온다. 잘 지내지 못했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모든 순간이 너와 행복했었다, 사실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갔을 뿐이다. 비가 오면 함께 손을 잡고 걷던 비 오는 거리가 화창한 날이면 공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풍경이 그립다. 연애의 시작에서 끝까지 잘해주지 못한 기억이 남는다. 


  관계는 어렵다. 연인이든 동료든 친구든. 가족과도 잘 지내기 힘든 시기가 있다.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수만 번 고민한다. 이런 주제는 불편하지 않을까. 상대가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그럼에도 눈을 맞추고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다. 어색하게 관계를 끝낸다 하더라도 먼저 용기를 내는 사람이 시작의 출발선 위에 설 수 있다.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는 일본 SNS에서 사랑과 이별에 관한 고민 상담으로 유명해진 디제이 아오이의 글을 담은 책이다. 2년 동안 사귀던 남자친구가 전화로 헤어지자는 일부터 불륜에 관한 고민 상담까지 현실적인 조언이 담겨 있다. 전화는 괜찮은 편이다, 어떤 이는 일방적으로 SNS나 문자로 이별을 통보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바람을 피울 때 조심해야 할 열 가지 사항도 알려준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친구와는 단호하게 결별할 것을 조언한다. 

 

  1년 뒤 각자 성장해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는 상대에게는 다른 의미로 구속하겠다는 뜻이므로 단호하게 헤어지라고 말한다. 관계를 마무리 짓는 과정에서 인격이 잘 드러나는 법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아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사랑이란 거리가 무너지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향한 갈망으로 거리 지키기를 할 수 없다. 적당히 선을 지키라는 조언을 듣기도 하지만 사랑이 끝난 뒤에야 한 걸음 물러날 수 있을 뿐이다.


  징징댈 바엔 울어버리라고 조언하는 책. 연인과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관계의 시작을 이어나가는 데 필요한 용기를 담은 책이다. 귀찮아, 졸려, 하기 싫어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지 않은지. 한밤중 자니라는 문자를 받고 마음이 어려워지지 않았는지. 얼굴 한 번 본적 없지만 삶의 의욕과 희망을 잃은 이들이 보내온 고민에 친절한 답을 해준 심야 디제이 같은 아오이 씨. 다정한 말투로 내 고민을 들어주고 때론 단호한 해결책을 말하는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다짐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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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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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죽고 나의 우울 지수는 그전보다 '약간 위험'의 칸으로 옮겨갔다. 간신히 중간을 유지하고 있던 감정선이 오른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굉장한 일인가라고 생각해보지만 또 그렇지도 않다. 대화를 하기 시작하면 주변인들 대부분이 엄마가 혹은 아빠가 없다. 그들이 주름살을 만들며 웃고 손을 흔들어 주는 일상적인 일을 살아가고 있어 위안을 받는다. 괜찮다고. 이야기를 나누며 부모의 부재를 걱정 밖으로 밀어내는 힘을 얻는다. 


  우울 지수는 다시 정상 범위로 들어선 듯하다. 집 정리를 하고 서류를 제출하면서 보내고 난 어느 오후의 일에서 나는 다시 세계의 평온으로 넘어왔다.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둔 날. 혈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나와 동생 밖에 남지 않아 다시 우울해지려고 할 때 친구가 한 마디를 던졌다. "너랑 EM은 선물 못 받아. 엉엉 울어서 산타가 선물 안 줘." 나는 우는 대신 웃었고 그렇게 세계의 절망 따위는 잊고 살기로 했다. 


  다비드 그로스만의 소설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농담의 집합체다. 성적인 농담, 이스라엘을 풍자하는 농담, 자기 비하 농담. 생일을 맞은 늙은 스탠드업 코미디언 도발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자신의 쇼에 관객으로 와 달라는 것이다. 친구라고는 하나 어렸을 때 수학 과외를 받고 끝나고 버스정류장을 함께 걸어갔던 기억 밖에는 없다. 오래전의 일이고 친구는 그 일 역시 잊어버렸다. 퇴직 판사로 개와 쓸쓸한 노년을 살아가는 친구는 도발레의 부탁에 응한다. 쇼에 와서 자신을 봐 달라는 것, 그리고 쇼에서 본 걸 말해달라는 것. 도발레는 간신히 그 말을 하고 전화를 끊는다. 


  쇼가 시작된다. 작은 키에 도발레가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관객들은 웃거나 야유를 퍼부을 준비가 되어 있다. 오늘 밤 스탠드 업 코미디 쇼에 참석한 그들은 단지 웃음거리와 즐길 거리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쉰일곱의 생일밤 도발레의 코미디 쇼에서 관객들은 어떤 웃음을 챙겨갈 것인가. 소설은 도발레의 쇼를 충실히 따라간다. 아슬아슬한 농담을 이어가고 이윽고 쇼는 도발레의 내밀한 이야기를 드러낸다.


  그렇다고는 해도 물론 그런 느낌 또한 나의 공격을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갑자기, 느닷없이, 나는 그가 인류의 모든 종류의 경솔함을 대표하는 사람 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나무랐기 때문이다. "사실 너 같은 사람들에게는," 나는 부글부글 끓었다. "모든 게 농담 거리지. 모든 사실 하나하나와 모든 사람 한 명 한 명이, 뭐든지, 왜 아니겠어. 순발력이 조금만 있고 머리가 빨리 돌아가기만 하면 뭘 가지고도 개그나 패러디나 희화화가 가능하잖아. 병이든 죽음이든 전쟁이든, 모두가 만만한 대상이지, 응?"


  도발레는 모든 이야기에 거침이 없다. 몇 초 안에 관객들을 웃겨야 한다. 웃음을 주지 못하는 개그는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퇴직 판사인 '나'는(소설은 도발레를 관찰하는 친구인 '나'를 서술자로 내세운다.) 쇼에 와달라는 도발레의 말에 너는 모든 게 농담거리라고 공격한다. 농담으로 우스운 말로 살아가는 도발레의 인생을 부정하는 말을 한다. 한참 후에 도발레는 '나'의 말에 답한다. 실은 자신은 전만큼 스탠드업에 흥미가 없다고. 단어 배치에 힘이 들고 목소리가 약간 높아지고 그러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차가워진다고. 그런데 "스탠드 업을 하다 보면 가끔 사람들을 진짜로 웃게 만드는데, 그건 작은 게 아냐."라고 말을 한다. 


  우리 안의 불안과 우울이 잠자고 있다. 언제 우리의 마음속에 잠식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것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우리는 농담을 만들어냈다. 우스운 이야기를 찾아 듣고 즐거운 말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느닷없이 건네오는 농담 한 마디에 삶의 화살표를 바꾼다. 그럼에도 살아갈 것이라는 방향으로.


  늙은 코미디언 도발레의 농담 인듯 농담 아닌 것 같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관객의 반응은 다양하다. 우리는 홀로코스트 쇼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고 계속해도 된다고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이 쇼에서 도발레를 위한 기록을 하기로 한다. 냅킨에 단어를 쓰기도 하고 사람의 표정을 관찰한다. 도발레와 '나'는 추억이라고 할 수도 없는 기억을 공유한다.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도발레는 물구나무를 서서 걷는다.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놀다가도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면 떠난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땅만 보며 걷는 엄마를 지켜주기 위해 그렇게 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기에 도발레는 물구나무를 서며 엄마 옆을 걷는다.


  이발소에서 일하는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엄마는 전쟁의 여섯 달을 열차 한 칸에서 보냈다. 도발레는 쇼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이야기하지만 이야기하지 않는 방법을 취한다. 스탠드업 쇼를 하는 자신이 되기까지 설명한다. 엄마와 함께 했던 하루 한 시간의 애틋한 시절부터 캠프에서 장례식에 가야 한다며 태워졌던 차 안에서 쉼 없이 개그를 들어야 했던 내력을 말한다. 중간중간 도발레의 이야기는 끊기고 이 쇼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아는 관객은 떠나간다.  도발레의 과거 어느 한 부분을 알고 있는 키가 작은 영매와 '나'가 남는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 차를 타고 갔어. 차 안은 오븐 속 같았어. 눈으로 땀이 흘러들었지. 저 사람한데 잘해줘, 엄마가 다시 내 귀에 대고 말했어. 모든 사람이 짧은 시간만 살다 간다는 걸 기억하고, 그 사람들이 그 시간을 유쾌하게 보낼 수 있게 해줘야 해. 


  인생이라는 한 편의 쇼에서 혼자 웃고 울고 넘어지고 구르는 우리는 과연 누구를 웃길 수 있을까. 도발레는 자신의 쇼에서 고독과 불안으로 죽음으로 향해가는 각자의 인생에게 농담을 시작한다. 세상의 빛이 꺼지고 암흑 속에서 장례식장으로 향해 가는 차 안이었다. 울지도 못하는 도발레를 위로한 건 있지도 않은 개그 경연 대회를 나간다고 떠들었던 한 병사의 우스운 말이었다. 엄마와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에 도발레는 일일 쇼를 기획했다. 엄마만을 위한 특별쇼. 아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할 수 있었던 짧은 쇼.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공포를 매 순간 느껴야 했던 도발레가 선택한 건 웃음이었다. 세상의 전부를 눈물 나게 웃길 수 있는 농담이었다. 


  농담이 죽음을 구원한다. 농담이 우리의 삶을 완성한다. 거리를 유지하고 서운함을 감출 수 있는 무기는 웃음이다.  도발레의 쇼가 지금 시작된다. 당신 눈가에 눈물을 맺히게 하면서 가장 환한 얼굴을 만들어 주는 웃음을 찾기 위한 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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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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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바타 겐야는 일본 여행 중에 갑자기 죽은 고모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다. 경찰서에 가서 유류품을 정리하던 중 고모의 수첩에서 '모리 앤드 스탠턴 법률사무소'의 전화번호를 발견한다. 고모인 기쿠에와 친했다던 변호사는 겐야가 지금 로스앤젤레스로 와주길 바란다. 고모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함을 들고 비행기에 오른다. 고모는 오래전 일본을 떠나 미국인 사업가와 결혼을 했다. 남편이 일 년 전에 암으로 죽고 일본 여행을 하던 중 협심증으로 사망. 고모 부부에게는 레일라라는 딸이 있었지만 여섯 살 때 백혈병으로 죽었다. 고모의 유산 상속인으로 조카 겐야가 지정되었다. 


  변호사와 만난 겐야는 엄청난 돈의 유산이 상속 되었다는 것을 듣는다. 고모가 남긴 유언장에는 삭제된 다섯 줄이 있었다. 그 내용이란 레일라를 찾게 되면 겐야에게 물려준 모든 유산의 70퍼센트를 그녀에게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찾지 못하면 레일라 같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회 운동에 써 달라는 것이었다. 고모의 딸은 여섯 살에 백혈병으로 죽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찾게 되면이라니. 겐야는 혼란스러웠다. 변호사 수잔은 한 가지 감춰진 비밀을 털어놓는다. 


  레일라는 죽은 것이 아니다. 27년 전 대형마트 화장실에서 행방불명 되었다. 화장실이 가고 싶다는 레일라를 혼자 보내고 고모는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아 마트 직원에게 알리고 경찰에게도 신고했다. 결국 레일라는 찾지 못했다. 미국에서 한 해 실종되는 사람들의 수는 백만 명. 그중 85퍼센트가 아이들이다. 고모 부부는 오빠인 겐야의 아버지에게조차 이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다. 고모 부부는 그 후 레일라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나이가 든 레일라의 얼굴을 복원해서 전단지로 뿌렸다. 서른한 살의 얼굴까지 만들었다. 그러다 고모의 남편 이언은 췌장암에 걸려 죽었다. 고모 역시 갑작스러운 협심증 발작으로 죽었다. 


  그들이 남긴 유산 400억이 넘는 돈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에 빠진 겐야는 고모가 지운 유언의 다섯 문장을 계속 떠올린다. 레일라를 찾게 되면. 그때부터 겐야는 꽃과 나무로 가득한 정원으로 꾸며진 고모의 거대한 집에서 레일라를 찾을 단서를 모은다. 부촌에 지은 집답게 집은 넓고 고급 가구로 꾸며져 있다. 겐야는 집을 탐험하던 중에 비밀 상자를 발견한다. 퍼즐 박스라고 불리는 그 상자를 열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수십 개의 나무를 움직여야 열 수 있는 상자에서 발견한 열 통의 편지.


  보내온 주소는 일본이지만 편지의 내용은 멜리사라는 여자아이를 키우고 있는 캐나다 사람의 이야기였다. 멜리사를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는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내용의 알 수 없는 편지였다. 겐야는 비밀의 정원 같은 그 집에서 꽃들의 수군거림으로 인해 레일라를 찾기로 결심한다. 감이 좋고 운이 종은 사립 탐정 니콜라이에게 조사를 의뢰한다. 


  미야모토 테루의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는 사라진 레일라를 찾기 위한 겐야의 느린 여정을 담고 있다. 키쿠에는 오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인 사업가와 결혼했다. 사업이 잘 되어 고모는 부유한 삶을 살았다. 귀여운 딸을 낳았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이었다. 딸이 사라지기 전까지. 그 후에 고모의 생활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고모의 집이었다. 정원사가 따로 와서 관리를 할 만큼 꽃과 나무가 우거진 정원에서 겐야는 남겨진 고모의 외로움과 고독을 마주한다.


  사라진 레일라의 나이에 맞춰 심은 서른세 개의 거베라 화분 밑에서 펼쳐지는 비밀을 감당하기까지 독자들은 숨을 멈추고 다시 내쉬어야 한다. 이 책의 묘미는 풀꽃들이 숨겨 놓은 비밀에 접근하려는 겐야의 노력과 서정적인 묘사 뒤에 감추어진 슬픈 이야기의 균형이다. 추리 소설의 구조를 따라가지만 미야모토 테루는 순수 문학의 거장답게 인물의 심리와 배경 묘사의 탁월함을 펼친다. 기쿠에의 깊은 불안과 내면의 비밀을 감추어 둔 채 예쁜 얼굴로 피어나는 꽃들의 맹세에 독자는 안도한다. 


  그녀가 살고 나는 죽는다. 아름다운 정원에서 찾아낸 처절한 비밀을 풀꽃들은 또 조용히 끌어 안는다. 두 번 안심한 채 우리는 현재의 삶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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