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국의 글쓰기 - 남과 다른 글은 어떻게 쓰는가
강원국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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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글쓰기 책을 읽는 건 그래도 하나는 건지겠지라는 마음 때문이다. 읽기는 많이 읽었다. 만화책, 소설, 역사, 가끔 인문학을 읽는 수준이지만.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읽다 보면 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이 정도는 내가 발로 써도 되겠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다. 써볼까. 하다가 쓰고 있었다. 쓰다 보니 잘 쓰고 싶었다. 아, 인간의 욕심이란 한도 끝도 없다.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어느 순간 발목을 붙잡았다. 완벽한 문장과 글을 쓰고 싶어 과하게 멋을 부리고 나름 창작의 고통으로 괴롭기도 했다. 

  글쓰기 책은 많다. 책은 원래 많다. 관심이 없을 뿐이지 다양한 분야의 서적이 서점에 즐비하게 꽂혀 있다. 글쓰기 책만 따로 꽂혀 있을 정도로 글쓰기 책은 많다. 어느 날 내가 쓰고 있는 문장이 이상하게 느껴질 때 글쓰기 책을 한 권씩 읽는다. 글을 쓰고자 하는 방법과 요령도 좋고 공책과 펜은 무얼 쓰는지 알면 더 신난다. 당장 펜과 연필을 주문하기도 한다. 한심해 보일 수도 있지만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노력의 일부이다. 


  『강원국의 글쓰기』의 저자 강원국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을 지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전에 대우 그룹 회장의 연설을 쓰기도 했다. 회장과 대통령의 말을 글로 담아낸 자의 내공은 상당하다. 대기업에서 홍보실 일을 하며 글을 쓰고 대통령의 손이 되어 연설문을 작성한 이력은 누구도 훔쳐 갈 수 없다. 그가 쓴 두 번째 책 『대통령의 글쓰기』가 화제가 된 건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최순실이 빨간펜 선생님이 되어 쓰고 고쳤다. 대한민국이 분노했다. 그에 맞물려 강원국이 쓴 『대통령의 글쓰기』는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대통령의 글쓰기』는 저자가 두 대통령의 글쓰기 습관과 삶을 대하는 방식을 쉽고 간결한 언어로 다루고 있다. 메모하고 다독하는 두 분 곁에서 저자는 글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다. 이번에 나온 『강원국의 글쓰기』는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 무엇 때문에 글을 쓰고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자신감으로 써야 한다는 글의 시작으로 글을 쓰는 습관을 만들고 동기 부여를 하는 방법이 나와 있다.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는 행동은 뇌에게 내가 지금부터 글을 쓰겠다는 선언을 하는 일이라고 밝힌다. 글 쓰는 습관 만들기는 어렵지 않다. 자신만의 글쓰기 전 행동을 만들어 쓰면 된다. 뇌에게 신호를 준다. 이불을 개고 라디오를 틀고 방을 한 번 닦는 일은 글을 쓰기 전에 하는 일이야 그러니 이제부터 글을 쓸 거야. 습관을 만들어 두면 그때부터 뇌는 그래 너 알아서 해, 그 글 꼭 써라라는 명령을 내려준다. 


  글을 쓰기 전이 힘들다. 써야 하는데 마음만 앞선 채 쓰지 않을 온갖 핑계를 생각하는 단계. 글쓰기 전 단계를 극복하고 책상에 앉으면 그때부터는 쉽다. 일단 쓴다. 쓰고 고친다. 완벽한 글을 상상하지 말고 얼기설기 구멍이 뻥뻥 뚫린 글이라도 쓴다. 생각이 안 나면 잠깐 놀다 와도 된다.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듣다 보면 글의 실마리가 보인다. 다시 돌아와 쓴다. 글쓰기 책을 읽는 이유는 글을 쓰고 싶어서이다. 강원국은 『강원국의 글쓰기』를 읽다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다고 밝히고 있다. 


  쓰고 싶다. 『강원국의 글쓰기』를 읽으면. 문법 공부를 하고 문장을 고치는 일을 포함해서 나만의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진부한 표현을 되도록 쓰지 말라고 했는데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속담 하나를 가져오자면 첫 술에 배부르랴, 주걱으로 한 술을 퍼서 입에 넣지 않은 이상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글쓰기 책 한 권 읽었다고 해서 남들이 칭찬하는 글을 쓸 순 없다. 책 한 권을 읽으면 한 가지를 취한다. 이것이 내가 글쓰기 책을 읽는 방법이다. 연필을 사고 유의어 사전을 들여다보고 왜 내가 글을 쓰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해 본다. 


  『강원국의 글쓰기』를 읽고 나의 글쓰기는 투명 인간 취급받은 나 자신을 위로하는 글쓰기였다는 걸 발견했다. 사람들 대화에 끼지 못하고 타인이 나 때문에 화가 났을까 눈치 보는 나를 위문하는 시간. 자판을 두드릴 때 나는 타닥타닥 소리는 나의 어깨를 주물러줄 때 나는 다정한 기척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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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로니아공화국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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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로니아 공화국이 있다. '한반도 최남단 마라톤에서 남쪽으로 365킬로미터, 중국 저장성 저우산에서 동쪽으로 433킬로미터, 일본 가고시마현 구마게에서 서쪽으로 343킬로미터, 일본 오키나와현 이헤야에서 북서쪽으로 326킬로미터 지점에 건국'된 국가 아로니아. 한일공동개발구역, 흔히 7광구라고 불리는 곳에 세워진 나라이다. 김대현의 장편소설 『나의 아로니아 공화국』의 배경인 아로니아는 허구의 공간이 아니다. 석유와 가스가 흑해 유전과 비슷한 72억 톤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되는 그곳은 10년 후인 2028년에 한일공동개발구역 협정이 만료된다. 


  소설은 아로니아 대통령 김강현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동구만화방에서 야구를 보다가 텔레비전을 깨 먹은 주인을 위해 삥을 듣는 김강현. 그와 동네 친구들의 아지트인 만화방의 주인이 실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컬러텔레비전을 마련해주고자 한 동네 친구들. 다들 말은 해 놓았지만 모금할 돈이 없었다. 김강현은 처음에는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적성을 찾은 듯 학교 애들을 상대로 돈을 뜯었다. 


  박민규라는 녀석이 김강현의 눈에 계속 보였다. 그러니 돈을 안 뺏고 베길 수 있나. 볼 때마다 돈을 받았다. 그날도 박민규를 때리고 있었다. 신나게 때리고 있는데 검은 정체가 다가왔다. 뒤이어 타격. 김강현은 정신을 잃었다. 아버지였다. 친구들 돈을 뺏고 있는 장면을 본 아버지는 김강현을 죽도록 팼다. 오죽했으면 맞고 있던 박민규가 김강현의 집으로 달려가 엄마를 불러왔을까. 김강현은 맞아서 퉁퉁 부은 얼굴로 그동안 삥을 뜯은 집에 돌아다니며 사과를 했다. 가슴에는 '나는 깡패 새끼입니다'라는 팻말을 달고서. 아버지와 엄마는 돈을 물어 주었다. 


  김강현의 청소년기는 삥과 합기도 그리고 성당의 세계였다. 아버지는 김강현을 합기도장으로 보냈다. 무술을 연마하고 호연지기를 기르라던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기가 막히게 예쁜 누나 강수영을 만나면서 김강현의 인생은 오로지 한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한 순애보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녀가 다니는 성당에 들어가 미카엘라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녀가 공부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 재능을 발견했다. 암기왕. 


  뭐든지 한 번에 모든 외워졌다. 외우고 또 외워서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들어갔다. 강수영을 따라 정치학과에 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누나가 싫어할까 봐 법학과를 지원했다. 돈 많은 사람들을 변호해 주는 변호사는 싫고 판결문으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판사도 싫었다. 사건을 수사하고 범인과 싸우는 검사가 되기로 했다. 검사로 잘 나가던 김강현은 유럽 간첩단 사건을 무죄로 구형했다. 그날 김강현은 부장 검사실에서 싸웠다.


  검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의 재능을 다시 한 번 발견하고 있을 때 송성철이 찾아왔다. 그는 '큰 놈 하나 작은 놈 하나' 보고서를 들고 왔다. 그때부터 김강현은 한국이 아닌 새로운 국가 아로니아를 건설할 계획에 동참한다. 


  한국이 싫어서 국가를 만드는 거냐? 아니다. 김강현과 친구들은 재밌고 신나는 국가의 땅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이유로 뭉쳤다. 한일공동개발구역 협정으로 대륙붕 탐사 중 발견한 봉우리 2개와 평평한 해저면을 발견한 송성철과 라파엘은 상부에 보고하지 않기로 한다. 나중에 그곳에 인공섬을 만들어 재밌고 신나게 놀자는 계획을 세운다. 결국 한국과 일본은 유전 개발에 손을 떼고 바닷속의 비밀은 그들만이 가져간다. 


  국가의 구성 요소는 국민, 주권, 영토. 소설은 한국, 중국, 일본의 분쟁 지역 동중국해인 수중 암초를 발견한 인물과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한 김강현을 만나게 하면서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제시한다. 영토를 완성하고 음료수 병을 보고 만든 이름인 아로니아를 건국하기까지 숨 가쁜 과정을 후반부에 보여준다. 부패하고 불법이 판을 치고 법보다 돈이 가까운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들쑤시는 것보다 의무만 잔뜩 진 국민이 아닌 의무와 권리가 조화롭게 부여받은 시민들이 살아갈 유토피아를 그린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고 떠들어 대지만 그 말을 믿는 국민은 없다. 『나의 아로니아 공화국』은 국가라는 이름 아래 국민으로 힘들고 의무만 강제된 채 살아가는 우리를 아름답고 평화로운 인공섬으로 초대한다. 


  과연 2028년 한국은 동중국해 대륙붕에 묻혀 있는 자원을 순조롭게 개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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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틀란티스야, 잘 가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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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시절, 나는 뚱뚱하고 우울한 소녀였다. 뚱뚱하다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싫어서 자주 구석진 곳에 숨어 있었다. 숨어 있다고 한들 뚱뚱한 나를 다 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숨길 수가 없어서 어디에 갔다가 누가 뚱보라고 놀리면 나는 집으로 돌아와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면 그렇게 싫었다. 세상이 나를 부르는 소리는 내 뚱뚱한 실존을 드러내라고 채근질을 하는 소리 같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놀림을 받아 마음이 쓰라릴 때면 나는 또 구석에 앉아서 단팥이 들어간 빵을 집어먹었다. 더 뚱뚱해질까봐 겁이 나는데도 먹었다. 빈속에 단맛이 들어가면 슬프고 외로웠다. 나는 그때마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그 천장을 올려다보던 마음이 내가 문학으로 가는 모퉁이였다. 나는 혼자였고 외롭고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놀림을 당하는 실존을 가졌다. 

그것이 내 문학의 시작이었다. 

(「우울했던 소녀」, 허수경 『길모퉁이의 중국식당』中에서)


  아직도 그때의 일기장을 가지고 있다. 열쇠가 달린 일기장을 사서 그날 일어난 일과 감정을 기록했다. 오늘은 엄마 집에 찾아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라든지 수학여행 가는 버스에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갔던 일을 적었다. 엄마라고 불러도 대답이 없는 빈 집을 서성이던 감정과 아무도 앉아주려 하지 않아 2박 3일 내내 선생님 옆에서 말없이 갔던 여행의 모욕감을. 이야기할 상대를 찾지 못한 나는 쓰고 또 썼다. 


  새 학기가 되면 애들은 짝꿍 만들기에 돌입했다. 그전 학년부터 친해진 애들끼리 패가 만들어지거나 번호대로 앉은 자리에서 바로 단짝이 되기도 했다. 나는 서툴고 어설펐다.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디 사니라고 물어보는 것도 자연스럽게 해내지 못했다. 말이 없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어쩌다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 집 사정을 훤히 알던 그 애들은 나를 무리에 끼어 주지 않았다. 


  겨우 짝꿍이랑 대화를 이어갈 때쯤 무리의 대장 아이가 짝꿍에게 눈짓을 했다. 복도로 함께 나가 소곤거렸다. 재랑 놀지마라고 말하는 입모양을 볼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됐을까. 어떻게 우리 집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그걸 곧바로 일러주는 것일까. 새 학기 첫날, 친구 사귀기에 실패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분식집이 있었다. 그 집은 다른 집과는 다르게 닭을 팔았다. 조각낸 닭을 기름에 넣고 익는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천 원에 두 개를 살 수 있었다. 조금 더 몸집이 큰 닭 조각을 골라서 집으로 걸어갔다. 방금 튀긴 닭은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친구가 없다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여자는 하루에 이천 원을 주었다. 버스비와 군것질을 하라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학교에 걸어갔고 집에 올 때도 버스를 타지 않았다. 버스비를 아껴 장판에 넣어 두었다. 나중에 엄마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할 때 줄 계획이었다. 남은 돈은 그렇게 학교에서 수군거림을 들을 때 속상한 마음이 허기로 돌변할 때 튀김집에 가서 닭을 사면서 썼다. 교복을 얼른 벗고 인간극장 같은 것을 보며 닭을 먹었다. 천천히. 오랫동안. 


  일기장에 경실이라는 이름 대신 미미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소녀와 텔레비전 불빛만이 밝은 세계라고 믿었던 중학교 2학년의 나는 만난다. 허수경은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에서 자신을 '우울했던 소녀'라고 밝혔다. 뚱뚱하고 우울해 자꾸 숨으려 하던 소녀. 뚱뚱해질까 봐 겁이 나는데도 단팥빵을 먹던 소녀는 『아틀란티스야, 잘 가』의 경실이로 찾아왔다. 시청 건설부 부국장 아버지와 예쁘고 날씬한 엄마를 가진 경실이는 뚱뚱하다. 경실이 말대로 겁나게 뚱뚱하다. 새 학기가 되어도 애들이 말을 걸어주지 않고 매해 교복을 새로 맞춰야 한다. 


  그런 경실이는 별을 바라보는 것과 만수 씨네 가게에 가서 찐빵 먹는 것을 좋아한다. 발레 하는 소녀가 그려진 일기장을 사서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써 나가는 경실이. 엄마는 계모임에 나가느라 저녁은 늘 경실이 혼자 먹는다. 엄마는 경실이가 중학교에 올라가자 도시락 싸는 걸 그만두었다. 경실이가 먹을 수 있는 건 김치나 오징어채. 그도 없으면 엄마는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을 먹으라며 돈을 주었다. 


  혼자 밥을 먹으면 외로워지는 경실이. 외로움이 경실이를 뚱뚱하게 만들었다. 잘 움직이지 않았고 살은 점점 불어나고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게 싫어 방에만 있었다. 신체검사 날에는 저울에 올라서면서 울었다. 애들이 자꾸 몰려와 눈금을 보려 했다. 경실이 아버지는 공무원인데 돈을 받았다. 건축 허가를 내주고 받은 돈으로 건물을 샀다. 


  뚱뚱하고 못생긴 경실이는 남들에게는 하지 못하는 자신의 말을 일기장에 쏟아 낸다. 친구가 별로 없다고 만수 씨네 찐빵 가게에 가서 숙제를 하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아버지는 집안에서 손님처럼 군다고 써 내려간다. 이복 언니라고 밝힌 정우가 찾아와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에 사는 소녀 이야기를 짓자고 하면서 경실이는 새로운 이야기를 일기장에게 해준다. '아틀란티스에 살았던 멋진 소녀, 미미. 그 아이는 박경실, 바로 나.'


  이야기의 주인이 되면서 경실이의 현재는 다르게 변해간다. 독서클럽에 가입하면서 미숙이와 용식이라는 친구를 만난다. 우리 모두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현실의 주인공이 될 순 없을지라도. 자신만의 낙원 아틀란티스를 만들어 가는 서술자는 될 수 있다. 그 시절 내가 쓴 일기에는 혼자 닭튀김을 먹고 장판 밑에 돈을 모으던 나와 언젠가는 작가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소망하는 다른 나가 존재했다. 닭튀김을 먹다 보니 교복이 작아졌고 체육복을 입고 교실에 앉아 있었다. 경실이 엄마처럼 매해 교복을 맞춰주는 엄마는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선배의 교복을 물려 입고 학교에 간 첫날, 블라우스의 상표를 보여주며 어디 교복집에서 샀다며 자랑하는 아이들 곁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가 처음에 이 집으로 올 때 나는 고마 숨어버리고 싶었제. 어디로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용기를 내서 들어와봤더니 니가 있더라. 니가 없었시모 내는 이 집을 아주 오래전에 나갔을 끼라."

처음 듣는 이야기였어. 정우가 이 집에 머문 것이 나 때문이었다고?

"나 때문에?"

"니는 나처럼 외로운 아이 아이가. 척, 보고도 알아보겄더라. 안 그라모 별로 식탐도 없는 아가 와 그리 뚱뚱하겄노?"

(『아틀란티스야, 잘 가』中에서, 허수경)


  국이 있다고 했는데 냉장고에 넣어 놓지 않아서 쉬어 있었다. 밥통에 밥은 오래 두어 노랗게 말라 있고 냉장고에는 쉰 김치가 전부였다. 닭튀김을 먹고 숙제를 했다. 꼭 내 숙제를 베끼는 아이가 있었다. 글씨를 잘 쓰고 마르고 얼굴이 하얀 그 애는 내게 공책을 달라고 할 때만 말을 걸었다. 그 순간을 위해 교과서를 보면서 문제를 만들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었다. 그때부터였다. 아름다운 세계는 소설 안에서만 만나기로 결심했다. 쉰 국과 김치가 있는 현실에서 난장이 가족이 살고 있는 허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뚱뚱한 몸이 싫어서 혼자 우는 아이. 찐빵 다섯 개를 사서 혼자 먹는 아이. 경실이의 아틀란티스는 고대 전설로 남겠지만 나는 현재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시인의 산문은 그게 사실이라서 가슴이 저린다. 시인의 소설은 고백이 허구가 되어서 마음이 애린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급하게 음식을 먹지 말라던 잔소리를 듣고서야 유년의 허기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밥을 먹을 때는 그 한 끼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말도 없이 먹는다. 


얼마나 오래 

이 안을 걸어 다녀야

이 흰빛의 마라톤을 무심히 지켜보아야


나는 없어지고

시인은 탄생하는가

(「눈」, 허수경)


  뚱뚱한 실존을 가졌던 시인은 아프다. 겨우 눈 속을 헤치고 달려와 밤의 장막을 걷어내며 빛을 그러않았을 시인에게 오늘과 내일을 보낸다. 빛 안에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남쪽 도시의 강물 소리를 담아 보낸다. 강 아래에서 밤새 시를 읽고 시로 살아가리라 다짐한 뚱뚱한 마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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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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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병모는 단편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에서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의 세계를 묘사했다면 장편 『네 이웃의 식탁』은 공동체의 선한 힘으로 가장한 모욕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저출산으로 인구 절벽으로 나아가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전자에서 시골로 발령받은 젊은 부부는 아이를 낳기 위해 교통의 불편과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감내한다. 『네 이웃의 식탁』은 저출산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흥미로운 정책을 가져온다.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라는 제도를 시행하는 것이다. 자녀가 한 명 이상은 있어야 하는 가구를 대상으로 새로 지은 공동주택으로 주거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정책이다. 입주 조건은 까다로워서 챙겨야 할 서류가 한 뭉치이다. 서울의 치솟는 전세가를 감당하지 못한 조효내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신청서를 냈다가 당첨되었다. 공동주택에 들어가기 전 쓴 자필 서약서에는 자녀를 최소 셋 이상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 명시되었다. 


  조건은 대략 이렇다. 자녀가 1인 이상 있어야 하는 인구 생산 능력이 증명된 만 42세 미만의 한국인 이성 부부. 부부 둘 중 한 사람만 직장에 다녀야 한다. 아이를 낳고 기르기 위한 최적의 조건들로 제시된 공동주택의 입소 조건은 까다로운 듯 까다롭지 않다.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맞벌이로 해석하는 조항은 그렇다 치고 공동주택에 살면서 십 년 이내에 아이를 셋으로 만들어야 하는 조건에서는 고개를 흔들겠지만 신청률은 높았다. 무섭게 오르는 집값이 조항의 불합리함을 이겼다. 


  모두 열두 가구가 들어올 수 있는 공동주택에 이미 세 가구가 들어와 있다. 소설은 뒤뜰 식탁에 모여 새로운 부부 전은오, 서요진의 입주를 환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른 열여섯, 아이 예닐곱은 앉을 수 있는 거대한 식탁은 경비가 남아서 들인 게 아닌 목적이 분명한 것으로 보였다. 이미 입주해 들어와 있는 홍단희, 신재강 부부. 전날 그림 작업으로 빠진 조효내를 제외한 손상낙과 고여산, 강교원 부부가 새로 온 부부를 축하해 주고 있다. 


  준비하는 영화가 엎어지는 바람에 집에 있는 전은오. 사촌 언니의 약국에서 카운터 일을 봐주는 서요진. 사람들은 처음 만난 그들의 직업과 현재 사회적 포지션을 거리낌 없이 물어온다. 카운터에서 처방전을 입력하고 약을 찾아주는 일을 한다는 서요진의 일에 대해 자신들이 느끼는 생각을 이야기하는 그들에게서 서요진은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대체 내가 느끼지도 않은 감정을 어떻게 추출할 수 있단 말인가. 전은오와 서요진 부부는 '꿈미래실험공동주택'에서 꿈과 미래를 찾기 위한 실험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소설은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악의 없는 간섭과 희생을 조롱한다. 각자의 집에 살아가는 입주민인데 마치 한 집에 사는 가족처럼 대하는 홍단희. 쓰레기 분리수거 날에 내려와서 함께 하지 않는다고 초인종을 누르고 조효내를 찾아가는 대담성을 보이는 홍단희. 차가 고장 나 어쩌다 카풀을 함께 하는 것뿐인데 서요진에게 은근한 추파를 던지는 신재강. 우리가 남이 가라는 사상에 물든 그들은 아이를 모아 놓고 공동육아를 하자는 제안까지 하기에 이른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하는 요원한 사이인 친척보다 옆집, 앞집에 사는 이웃이 더 가깝다는 말인데 이웃이 가까워지는 순간 하우스 스릴러가 펼쳐진다. 부엌에 숟가락 몇 개까지 다 안다는 게 친밀함의 표현이긴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진다. 대체 싱크대 안에 넣어 두었던 숟가락을 언제 세고 있었단 말인가. 물론 밥 먹으러 커피 마시러 올 때 도와주려고 제 집처럼 부엌살림을 눈여겨봤을 수도 있지만 그 집 싱크대에 물 때 낀 거 보니 여자가 게을러 하는 소리를 듣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구병모의 단단한 문장과 함께 꿈과 미래를 위해 실험에 참가한 공동주택에 입주한 네 이웃의 일상을 촘촘하게 관찰할 수 있다. 사람들이 둘 이상 모이면 가질 수 있는 은근한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소설은 묘사한다. 직업이 뭐냐, 어디에서 일하냐. 애는 왜 하나냐 또는 왜 애는 없냐. 언제 낳을 거냐. 궁금하지도 않은 척 물어대는 질문의 끝에는 제멋대로 판단하고 정의 내리는 호기심으로 살아가는 홍단희들이 있다. 완장 하나를 차고서 자신이 만든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막무가내의 이웃들이. 


  네 이웃의 식탁에서 펼쳐지는 염탐 호기심 충만 스릴러의 세계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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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 - 최면 / 아내의 편지 / 라일락 / 데지레의 아기 / 바이유 너머 얼리퍼플오키드 1
케이트 쇼팽 지음, 이리나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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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트 쇼팽의 단편 「최면」에서 폴린의 묘사는 이렇다. '폴린은 까무잡잡하고 덩치가 작은 데다 머리는 복슬복슬하고 안경을 꼈다. 학구열이 상당했고 형이상학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다. 과학적 마인드로 연구했고 수학적인 도표로 얻을 수 있는 학문에 열중했다. 한마디로 폴린은 패버햄이 혐오하는 유형이었다.'


  문장을 읽다가 책날개를 다시 한 번 읽었다. 케이트 쇼팽이 소설을 쓴 시대는 1800년대 후반이다. 작가를 특정 범주에 넣는 일은 위험하다. 한 세계를 그리다 보면 틀에 갇히곤 하지만 작가란 본래 자유로운 주제를 다루려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케이트 쇼팽의 단편집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의 표지에는 '페미니스즘 소설의 선구자'라는 글이 적혀 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화두로 떠오르는 페미니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소설로써 대안을 찾아 보려 한다. 


  폴린은 여성이다. 안경을 썼고 학구열이 높다. 그레이엄의 여자친구이기도 하다. 그레이엄은 대학교수이면서 초능력 연구에 관심이 많고 최면술 학회 회원이다. 그레이엄의 친구 패버햄은 폴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친구도 애인도 소중한 그레이엄은 패버햄이 폴린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최면을 걸기로 한다. 결과는, 성공적이다. 성공이다 못해 둘의 관계는 예측 불가능의 상태로 나아간다.


  안경. 폴린은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여성이다. 매혹적이거나 여자다운 면을 찾아 볼 수 없다. 패버햄은 폴린을 만날 때마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무시한다. 많은 여성들이 안경을 쓴다. 매일 아침 렌즈를 끼우느라 눈과 싸우지 않아도 되고 안약을 넣으며 원치 않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므로. 주변에는 안경을 쓴 사람들이 많다. 


  대중매체에 노출되는 여성들이 안경을 쓰고 나온 적이 있던가. 최근에 한 아나운서는 안경을 쓰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화제가 되었다. 눈 화장을 하고 렌즈를 끼우고 피곤한데도 안약을 넣었던 수고스러운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한다. 화제가 될만한 일인가, 안경을 쓰는 일이. 주변에 안경을 쓴 여성들은 너무나 흔한데. 생각해보면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하거나 드라마에서 연기를 하는 여성의 얼굴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케이트 쇼팽의 단편들은 페미니즘의 주제로만 묶기엔 다양성이 많은 소설이다. 물론 그렇게 읽어도 좋다. 어떻게 읽든 독자의 자유와 판단에 맡기면 된다. 이야기는 짧지만 구조는 완벽하다. 몇 장 안 되는 소설에 기승전결이 뚜렷하다. 남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황망해하다가 이내 자유의 몸이라는 것을 깨닫고 웃어 대는 멜라드 부인이 나오는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을 시작으로 친한 친구에게 애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은 남자가 나오는 「최면」을 거쳐 죽은 아내가 남긴 편지를 어쩌지 못해 갈등하는 남편의 초조한 심리를 그린 「아내의 편지」는 단편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을 마음껏 발현하고 있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선거권을 가지지 못하고 사회 활동에 제약을 받는 사람들이. 점차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작가들은 글을 쓴다. 작가 케이트 쇼팽이 쓴 단편은 100편에 달한다. 한국으로 날아온 소설은 여섯 편에 불과하지만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매력은 상당하다. 반전과 유머 그리고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을 만날 수 있다. 


  「라일락」의 에드리언은 잠긴 예배당 앞에서 울겠지만 소설 이후의 삶은 다르게 펼쳐질 것이라 예감한다. 「데지레의 아기」는 모파상의 소설만큼이나 뛰어난 반전을 선사한다. 「바이유 너머」를 경험한 다정한 재클린은 새로운 삶으로 한 발 나아갈 것이다. 


  둘로 나누어 미워하고 비난하는 세계가 아닌 차이를 받아들이며 서로를 존중하는 현재를 꿈꾸며 소설을 써 나갔을 케이트 쇼팽의 일곱 번째 소설을 읽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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