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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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 『섬에 있는 서점』으로 책을 통한 소중한 인연을 그린 개브리얼 제빈이 신작을 들고 찾아왔다. 소설 『비바, 제인』은 깊은 밤 잠이 오지 않은 당신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초롱초롱한 눈으로 새벽을 맞이할 정도로 가독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찬란하게 뜨는 태양을 마주할 수 있다. 소설은 하나의 사건으로 얽힌 다섯 명의 인물의 삶을 세밀하게 표현해낸다. 인간을 향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투박한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소설은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다. 레이철, 제인, 루비, 엠베스, 아비바의 시선으로 쓰인 소설은 정치인의 불륜 스캔들과 얽혀 들어간다. 큰 사건의 얼개는 이렇다. 레이철은 딸 아비바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아비바는 한때 이웃사촌으로 지냈던 엠베스의 남편 레빈의 의원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엠베스의 남편은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아비바는 그와 사랑에 빠졌다. 레이철은 딸의 고백을 듣고 당장 레빈과의 관계를 끝나라고 말한다.


  자식이 부모의 말을 순순히 들으면 그게 자식일까. 아비바는 결국 레빈과의 관계를 서둘러 끝내지 못했다. 둘이 함께 타고 간 차에서 교통사고를 내는 바람에 관계가 순식간에 발각되고 말았다. 언론은 집요하게 아비바의 개인 신상을 물고 늘어졌다. 아비바는 인턴을 시작할 때 일에 대한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을 털어놓을 때가 없었다. 그녀는 블로그를 개설해 익명으로 의원 사무소에서 있었던 일을 올렸다. 익명이었지만 레빈과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쓴 블로그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블로그를 없앴지만 구글신은 아비바가 쓴 글을 무한 증식 시키기만 했다. 그녀는 미국 전역에 이력서를 냈지만 구글에 그녀 이름을 검색하기만 하면 딸려 나오는 스캔들의 기사 때문에 어느 곳에도 취직하지 못한 채 엄마 레이철의 수영장에 누워 해리 포터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지 한 장 만을 남겨 놓은 채 아비바는 잠적했다. 소설은 여성으로서 겪는 사회의 편견과 혐오의 시선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아비바가 말없이 나가버렸다 한들 내가 뭐라 탓할 수 있겠는가? 사우스 플로리다에서는 아이가 건질 게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재수 없는 온라인 미팅남 루이스처럼 생각한다. 몇몇 자극적인 문구만 기억한다. 자신이 한 사람의 인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자신이 누군가의 딸자식의 대해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바, 제인』中에서, 개브리얼 제빈)


  세상을 둘로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우리가 아닌 나와 너로 부르며 갈등으로 끌고 간다. 『비바, 제인』은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어 대립하지 않는다. 우린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인간이라고 외치는 소설이다. 소설의 문장은 유머가 넘치며 인물들은 암담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농담과 웃음이 우리 곁에 있는 한 타인을 향한 소외를 물리칠 수 있다. 우리를 외롭게 하는 건 우리가 가진 편협함이었다. 남을 인정하고 긍정하려는 노력 없이 좁은 세계에서 안주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려는 안일함이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개브리얼 제빈이 『비바, 제인』을 통해 던지는 이 질문에 이제 우리가 답해야 할 차례다. 레이철, 제인, 루비, 엠베스, 아비바는 소설을 통해 자신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우리의 이름은 VIVA! 서로에게 격려를 들려주며 아름다운 연대를 향하여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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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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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수아를 읽는다는 것. 경제를 가르치던 선생이 어느 날 교단 위에 한 권의 책을 따로 올려 두는 걸 유심히 봤다. 그녀의 수업은 정직했고 아이들은 자주 졸았다. 수업 이외의 말은 잘 하지 않았다. 교과서와 같이 들고 온 책은 배수아의 『이바나』였다. 딱딱하고 빨간 책. 내가 그 책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은 그즈음 나 역시 배수아를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와 『붉은 손 클럽 』같은 책을 한 권씩 사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을 읽어 갔다. 머리는 좋지 않았고 평범했다. 평범함을 문학적인 것으로 가리려고 했다. 내가 읽던 책들, 읽고 있는 책으로 말이다. 평범한 아이로 살고자 했으면서도 모두의 관심을 원하는 이중적인 시기였다. 


  대학에 오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고 쓰면 좋겠지만 사는 곳의 위치와 우울함의 강도가 높아진 것 외에는 변화가 없었다. 소설을 쓰고자 하는 마음은 주눅이 든지 오래였다. 도서관의 어두운 곳에서 숨어 있었다. 마음에 들어 한 이가 말해준 사실 하나. 배수아는 소설을 쓰기 전에 공항 입국 심사대에 앉아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주는 일을 했었다는 것. 처음으로 쓴 소설로 데뷔를 했다는 것. 그동안 읽어온 배수아의 이면에 그런 일들이 있었다니 지금까지 내가 읽은 건 무엇인가. 어쨌든 나는 그 이야기를 해준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수아를 더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 꿈을 꾼다. 어쩌면 꿈을 꾸기 위해 잠드는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꿈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뺨을 얻어 맞고 소리를 지르는 등의 난폭한 행동을 한다. 꿈에서도 이건 꿈이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라며 이상하게 군다. 꿈에서 나는 죽은 엄마와 대화를 하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에게 다가가 욕을 퍼붓기도 한다. 한동안 누운 엄마와 이야기를 했는데 말을 하는 도중에 엄마의 얼굴은 검게 썩어 들어가기도 했다. 깨고 나서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면 동생은 아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전에 엄마가 남긴 말 중에 기억이 나는 게 있다. 점쟁이가 그랬는데 네가 열세 살을 넘기면 살고 못 넘기면 죽는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열세 살에서 한참을 살고 있다. 대신 엄마가 떠났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中에서, 배수아.)


  교사인 '나'는 매일 아픈 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네 명의 소녀를 모아 매주 시골집에서 소풍을 갖게 해주고 싶은 나는 반 아이들 중 한 명인 키카 큰 소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 그 소녀는 주변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유독 키가 작은 아이인 리우진과만 만난다. 네 명의 소녀를 모으는 일은 키가 큰 소녀를 집에 초대하기 위함인데 아이는 네 명을 모으지 못한다. 전화를 건 나에게 동생은 어린 시절은 모두 망상의 형태임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배수아를 읽던 고등학생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랬을지도 모른다. 경제 선생에게 저도 배수아 좋아해요라고 말해 보았지만 선생은 못 들은 척 교실 밖을 나갔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해와 공감을 얻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가 배수아를 안다는 것을 함께 하고 싶었다. 배수아의 소설집 『뱀과 물』은 지독한 꿈과 불길한 환상을 연주한다. 인물들은 현실에서 이탈한 채 기차를 타고 침목 위에 누워 있거나 도시 밖으로의 탈출을 꿈꾼다. 유원지 안의 컨테이너 안에 '나'를 버리고 간 아버지를 찾는 여행은 꿈속으로 경로를 우회한다. 학교에 나오지 않은 친구의 소식은 죽음이라는 비밀 암호로 둘러싸인 편지로 수신된다. 


  전학을 간 학교에서 꿈을 꾸는 여교사를 만나 환상에 빠지고 유방암을 앓고 있는 자신이 나의 엄마라고 우기는 여자의 머리맡에 놓인 두 개의 썩은 달걀을 보기도 한다. 문장은 소설의 서사를 따라가기 위함이 아닌 인물의 내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대로 쓰인다. 자주 집을 잃고 책가방에 책과 옷가지를 싸는 일이 1분도 걸리지 않은 묘기를 부릴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나는 그 문장을 읽어간다. 살 곳을 찾아 기차와 버스를 타고 검은 바다 앞에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던 시절로 『뱀과 물』의 세계는 데려간다. 


산다는 것은 그냥 거울 속에서 영원히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 저절로 있다가, 언젠가 그레이하운드를 타러 가게 될 것이라고.

(「도둑 자매」中에서, 배수아)


  꿈과 현실의 서사는 뒤섞인다. 인과 관계를 따지는 것보다 문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따라가는 것이 좋다. 배수아를 읽을 때에는. 공항 입국 심사대에 앉아 사람들의 여권에 도장을 찍는 모습을 상상하면 배수아의 문장이 낯설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계를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한 때의 시원으로 첫 소설은 탄생한다. 배수아의 소설이 책장에 꽂히는 걸 볼 때마다 질투와 환희가 동시에 찾아왔다. 


  거울 밖으로 탈출한 소설 속 인물들은 반대편에서 우리에게 그 자신의 꿈을 들려준다.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이 들기 전 꿈을 꿀 수 있도록 비는 것이다. 나는 이제 어린 시절이 없다. 유년의 기억을 죽은 엄마가 전부 가져가 버렸다. 종종 꿈에서 우리는 만난다. 이곳의 고민을 이야기해보지만 죽기 직전의 고통스러운 얼굴만을 보여준다. 가혹한 세계에서 만나 비밀을 나눠 가지고도 오래 함께 할 수 없었다. 꿈의 자리를 더듬으며 현실로 돌아온 배수아의 인물들에게 나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조각들을 받아 든다. 


  어쩌면 배수아를 좋아하고 소설책을 사서 모으던 사람과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대화는 내가 만들어낸 망상일지도 모르겠다. 여기 이 작은 세계에서 소설은 자주 왜곡된다. 나는 배수아의 소설을 오독하는 것으로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비좁은 입구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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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김신회 지음 / 놀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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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오른손의 통증을 느낀 작가 김신회는 일을 쉬기로 한다. 쉬지 않고 달려온 시간을 보상하기라도 하는 듯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통증의 원인을 찾기 위해 보낸 날의 기록은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왔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라는 제목을 달고서. 그런 시간과 날이 있다. 몸의 통증 혹은 정신의 아픔으로 그냥 그 자리에 멈춰 서야 할 때가. 각자의 방법으로 상처의 시간을 견딘다. 우리는 견디거나 이겨내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한 팩에 이만 원 하는 딸기를 사서 먹기도 하고 동네 맛 집을 스스로 찾아내어 매일 그곳에 들르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한다. 프리랜서로서의 불안한 삶은 잠깐 정지했다. 손이 아프니 자판을 두드릴 수 없었다. 하루를 겨우 보내면서 느낀 짤막한 감상을 두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 뿐이었다. 오래 만난 사람과 잦은 헤어짐이 일어났으며 사과하는 타이밍을 놓쳐 늦은 후회를 한다.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느끼는 어른으로서의 불안감을 겪어 냈으며 사람들의 무례한 질문에도 과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굉장한 일을 하지 않는다. 나로 인해 세계가 흔들리거나 바뀌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쁘고 지치고 피로하다. 나의 삶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어느 날 신은 다가와 잠깐 멈춤이라는 신호를 준다. 그동안 바쁘고 아팠으니 방구석에 드러누워 있기도 하고 오후가 되면 동네 산책을 가라고 해준다. 신호를 받은 이상 나는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 나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으니까. 


  타인과 사소한 신경전을 벌이고 들어온 날에는 상황의 이해보다는 나의 감정을 먼저 살피라고 조언한다. 상대에게 무심하게 했던 위로의 말을 다시 살펴 보기도 한다. 자신이 쓰는 에세이의 서평과 댓글을 일일이 확인한다는 솔직함을 보여준다. 요가를 다니고 영어 과외를 하며 몸을 추스르고 두려움을 벗어난다.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보내는 독서의 효용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쫓기듯 오늘을 보내며 내일을 맞이하는 하루하루에서 잠깐 이탈한 기록에 공감을 보낸다. 행복을 정의하지 않는다. 이렇게 살아야지 충고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는 멈춤의 순간에서 한 발 나아가기를 보여 주며 힘을 내보라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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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의 영원한 밤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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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숙의 소설집 『단 하루의 영원한 밤』을 관통하는 서사는 기억과 상실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기억에 매달리고 상실에 허덕인다. 깊은 밤 쌍둥이처럼 닮은 서로를 바라보는 자매가 있고(「델마와 루이스」) 이유 없는 폭력에 시달릴 때 구해달라는 외침을 모른 척 한 타인을 용서하고자 자신의 기억을 지운 여자가 있다(「넝쿨」). 표제작 「단 하루의 영원한 밤」은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노 교수의 삶을 통해 현재를 추적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을 필요가 있는가. 소설은 끊임없이 우리가 가진 단 하나의 기억이 정확한지 질문한다.


  살아가는 게 전쟁이라고 비유해도 어색하지 않은 시절이다. 단순한 즐거움이 사라진 시대, 소설은 어떤 이의 어깨를 토닥여야 하는가. 소설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이야기는 누구를 위해 만들어지는가. 김인숙의 『단 하루의 영원한 밤』의 이야기는 전쟁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이를 위로한다. 지겹게 반복되는 이별과 재회의 끝에서 여자는 홀로 여행을 떠난다. 여자는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지에서 여행자로서 충실하게 하루를 보내려고 계획한다. 사진을 찍어 준다는 남자의 말에 속아 휴대전화를 도둑맞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바쁜 여행 일정 속에 자신을 내 몰았을 것이다. 「아홉 번째 파도」의 인물들은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일탈을 꿈꾼다. 


  노년의 삶을 이야기하는 소설에게서 우리는 담담하지만 쓸쓸한 진실과 마주한다. 「델마와 루이스」속 두 자매의 기묘한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소용없을 것이라는 명제에 도달한다. 「토기박물관」은 영어 회화 학원에서 만난 두 여성의 이야기를 빌려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없음을 선언한다. 「아주 사소한 히어로의 특별한 씁쓸함」에서 만나는 아버지들은 지구를 지켜 나가는 임무를 망각하고 소시민이 되어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히어로의 다른 이름이다. 세계 평화를 위해 태어난 운명이었지만 가정의 평화조차 지켜 나가지 못해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아들을 울게 만드는 히어로들의 특별한 씁쓸함은 사소하다.


  「빈집」의 부인은 남편의 무난함을 참지 못한다. 남편은 이삿짐을 날라주는 일을 하면서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취미를 가져본 적이 없다. 단 한 번. 이삿짐에 딸려 온 강아지 한 마리를 애착을 가지고 키워 봤을 뿐이다. 그마저도 목줄이 풀려 진도에서 와서 진돗개라고 불린 그 개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내는 보통의 평범한 남편에게 비밀이 존재할까 의문이 들지만 그것마저도 없다고 단정 짓는다. 소설은 반전처럼 남편이 고모부가 물려준 유산인 폐허나 다름없는 빈집에 그가 숨겨 놓은 비밀을 보여준다.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소설집 『단 하루의 영원한 밤』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부모의 홍콩 여행에 따라간 나는 비행기 안에서 나를 반갑게 알은척하는 송민호라는 남자를 만난다. 기억에 없는 사람이지만 워낙 친하게 굴어 태풍이 몰아치는 아침에 만날 약속을 해버린다. 부모의 관계는 곧 허물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소설은 소설집 안에 담긴 이야기를 하나로 압축한다. 독자는 마지막 소설을 읽으며 그동안 만난 인물들을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김인숙의 소설은 나이 듦과 청춘, 위태로운 기억을 가진 이들의 어깨를 토닥인다. 그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썼을까를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집 안에 담긴 소설들은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 위로와 안녕을 말하는 소설의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한다. 영원히 반복되는 단 하루를 가진 우리는 예고된 불운의 내일을 맞이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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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보는 남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
김경욱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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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의 죽음 이후를 캐고 다니는 여자가 있다. 분명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었다. 보험사에서 찾아온 남자는 이상한 말을 한다. 보통 사고가 벌어지면 운전자는 살기 위해 운전대를 반대 방향으로 꺾는다. 남편은 누군가를 보호하려는 듯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조수석에 누군가 있었다는 말이다. 사고가 나고 남편은 혼자 병원에 실려갔다.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남편은 죽었고 여자에게 남겨진 건 비밀번호가 걸린 남편의 휴대전화였다. 0000부터 9999까지의 숫자의 조합을 거치면 만 가지의 경우의 수가 나온다. 남편의 휴대전화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여자는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의 휴대전화를 만진다. 


  김경욱의 소설 『거울 보는 남자』는 한 남자를 사랑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남편의 기일에 여자는 남편과 꼭 닮은 남자를 발견하고 그를 따라간다. 벼락같이 나타난 남자의 얼굴에서 여자는 남편을 마주한다. 남자는 미용사였다. 여자는 미용실로 따라 들어가 남자 앞에 앉았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가운을 입은 채 그대로 밖으로 나온다. 한 번만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남자를 찾아가 머리를 하고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어 멀리서 그를 관찰한다. 


  아홉 번 머리를 하면 한 번 커트가 무료라는 고객 카드에 얼굴을 그려 놓는 동안 남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묘한 우연이 남편의 얼굴을 한 남자와 여자를 마주 앉게 한다. 묘한 우연이라고 썼는데 그들이 자리에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과정에는 남편이라는 존재가 작용했다. 남편의 휴대 전화의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순간 여자는 자신의 인생에 남겨진 퍼즐 조각들을 맞춰간다. 


  남편은 결혼과 동시에 생명 보험에 가입했다. 남편은 결혼이 죽음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여겼다. 교통사고로 죽자 의사는 여자를 찾아와 얼굴 기증을 이야기한다. 안면 기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니 여자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여자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남편의 얼굴로 바뀌고 여자는 의사에게 동의하겠다고 말한다. 


  남자는 남편의 얼굴을 기증받은 사람이었다. 죽은 남편의 얼굴을 한 남자와 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소설은 사랑의 완성이란 죽음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말한다. 살아 있든 동안에 오해하고 불화한 사랑은 죽음의 문을 지나고 나서야 이해와 화해라는 말로 변경된다. 7년 동안 남편과 아내는 결혼 생활을 했지만 유지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아내는 남편을 오해하고 남편은 끝내 아내에게 자신을 이해받을 수 없었다. 


  『거울 보는 남자』의 인물들은 서로를 마주 보지 않는다. 남자와 아내는 거울을 통해 주고 받는 일방적인 시선을 견딘다. 어긋난 사랑의 상징을 보여준다. 거울 뒤에 숨겨진 진실을 마주할 때 그들은 남편의 얼굴을 지우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소설의 질문을 받아 답을 적어본다. 우리는 사랑한 적이 없다. 사랑을 했다고 착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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