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 아이야, 가라 1 밀리언셀러 클럽 46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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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지가 실종 아동을 발견하고 우는 순간 나의 마음도 함께 무너졌다. 일곱 살 남자아이. 새뮤얼 피에트로. 실종된 후 2주 동안 그 아이가 먹은 것이라곤 감자칩과 고구마칩, 맥주가 전부였다. 오른손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수갑에 묶여 있었고 등과 엉덩이에 채찍질을 당했다. 아동 성범죄자 전과가 있는 놈들의 짓이었다. 켄지는 네 살 된 아만다 맥크레디를 찾다가 포기한 후였다. 아만다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친구 부바에게 동일 전과가 있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줬다. 부바는 시간이 흐른 뒤 응답해 왔다. 켄지가 보여준 세 사람의 거처를 찾은 것 같다고 했다. 그곳에서 켄지는 새뮤얼의 모자를 쓰고 있는 레온을 본다. 아이는 켄지가 찾아가기 45분 전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 『가라, 아이야, 가라』는 아동 실종을 다루고 있다. 아이들은 한 해에 몇만 명씩 사라지며 대부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아무도 아이들의 행방을 모른다. 전작 『신성한 관계』에서 처단한 게리 글린은 사람 좋은 전직 경찰의 얼굴을 하고 아이들을 죽였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몇 명의 아이들을 사라지게 했는지 정확한 통계치를 알 수 없다. 『가라, 아이야, 가라』는 게리 글린들의 의해 사라지는 아이들을 찾기 위한 켄지와 제나로의 고군분투를 그리고 있다. 


  약쟁이로 의심되는 헬렌은(실제 그녀는 대단한 마약 중독자였다. 물론 알코올 중독까지도 포함한다.) 네 살 된 딸 아만다를 두고 심지어 문도 잠그지 않고 친구 집에 텔레비전을 보러 갔다. 그 사이 아이는 증발하듯 사라졌다. 아이가 반항한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아이를 본 이웃도 없다. 골든 타임을 넘기고 있었다. 납치의 경우 하루를 넘기면 생존율은 반으로 줄어든다. 3일이 흘렀고 헬렌의 오빠와 새언니 베아트리체가 켄지와 제나로를 찾아왔다. 이미 경찰이 수사력을 모으고 있음에도 그들은 조카를 찾기 위해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찾아온 것이다. 


  헬렌은 다정한 엄마는 아니었다. 그녀는 아만다를 방치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녀는 마약 거래 현장에 아만다를 데리고 갔다. 심지어 헬렌은 경찰에게 거짓말까지 했다. 아만다가 사라진 시각 그녀는 친구 집이 아닌 필모어라는 술집에 그녀 애인과 함께 있었다. 실마리조차 없던 아만다의 실종 사건은 헬렌이 애인과 저지른 현금 강탈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단서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제 겨우 네 살. 무관심이 익숙한 어린아이. 아만다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신성한 관계'까지 나아갔던 켄지와 제나로의 관계는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파탄이 나고 만다. 켄지의 선택에 제나로가 반대를 표하면서 사이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소설은 아동 학대와 방임, 폭력을 다루면서 우리가 매 순간하는 선택의 문제가 옳은지 묻는다. 아만다 실종 사건 배후에는 법을 초월한 선택을 하려는 어른들의 욕심이 있었다. 아동을 학대하고 방임해도 친권을 가져올 수 없다. 심지어 아이를 죽여도 단기형을 살고 다시 아이를 키울 수 있었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 어른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행동을 할 것인가 『가라, 아이야, 가라』는 집요하게 물어 온다. 


  실종 아동을 찾는 추리 소설을 읽으며 가슴이 찢어지다니. 주인공이 울 때 같이 울어 버리다니. 독자의 마음을 이토록 아프게 만들다니. 데니스 루헤인은 소설이 무엇인지 아는 작가이다. 장면의 전환이 빠르고 이야기를 뒤집고 비틀면서 독자의 마음까지도 쥐락펴락하는 천재다. 『가라, 아이야, 가라』의 결말의 켄지가 헬렌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이 세계는 바뀌지 않을 것임을 그래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마음이 찢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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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관계 사립탐정 켄지&제나로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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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작은 단순했다. 연쇄 살인마를 처리한 이후에 켄지와 제나로는 사무소 문을 닫고 쉬고 있었다. 그들은 몸과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켄지는 왼손 신경이 죽고 얼굴에 흉터를 입었다. 제나로는 총에 맞고 사랑했던 한 사람을 잃어버렸다. 사건 의뢰를 맡지도 않고 지내는 그들의 뒤를 누군가 미행했다. '충고 한 마디. 이 동네에서 누군가를 미행하려면 절대 핑크색 옷을 입지 말 것'이라는 경쾌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신성한 관계』는 그들이 전보다 절대적인 믿음 안에서 움직이는 관계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범생이와 깐죽이라는 별명을 붙인 그들이 다가와 탐정 콤비를 납치해 간다.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풍모를 풍기는 곧 죽어가는 트레버 스톤이 그들을 기다린다. 트레버는 사건 의뢰를 한다. 납치 후 의뢰라. 켄지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상실을 경험한 제나로는 트레버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 차 사고가 나고 괴한이 트레버의 아내를 쏘아 죽인 후 자신에게도 총알을 박아 넣었다. 사건 이후 하나밖에 없는 딸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딸을 찾아 줄 것. 수임료로 현금 5만 달러를 준단다. 즉각 사건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켄지. 


에버렛 햄린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명예가 멸종되고 있어. 아니, 늘 이렇게 멸종의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더 심각한 건, 명예 자체가 처음부터 환각이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용의자야. 모두가 용의자.

문득 그 말이야말로 내 좌우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버의 딸 데지레를 찾기 위해 도시의 가장 유명한 탐정 제이가 먼저 수사를 하고 있었다. 트레버는 제이 역시 실종되었다고 말한다. 사립탐정이 되기 위해 켄지는 제이의 밑에서 일을 배웠다. 켄지에게 있어 제이는 제나로와 비슷한 존재였다. 사진으로 봐도 아름다운 데지레를 찾기 위해 그녀가 우울증에 빠져 거리에 앉아 있던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는 연인과 어머니를 잃었고 슬픔에 빠져 살았다. 데지레는 거리에서 발견한 진리와 계시 교회가 운영하는 슬픔 치유원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에 행적이 묘연했다. 제이 역시 거기까지 수사를 해 나갔다. 


  사이비 종교 집단에 빠진 딸을 구하기만 하는 되는 것으로 여긴 일은 점점 복잡해진다. 제나로는 사라진 제이와 데지레를 찾다가 의문과 예감에 빠진다. 켄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진실을 꽁꽁 숨긴 채 사지로 몰아넣는 사람들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사건은 묘한 국면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는 서로가 가진 아픔과 상실을 마주 본다. 사라진 딸 찾기 사건 의뢰를 맡으며 그들은 '신성한 관계'로 발전한다. 단순한 파트너, 제일 친한 친구, 애인도 아닌 전부로 향해 간다. 


  나쁜 놈 위에 나쁜 놈. 『신성한 관계』는 누가 더 나쁜 놈인지를 놓고 대결한다. 애초에 그들에게 현금과 함께 주어진 의뢰는 거짓에 불과했다. 돈과 욕심 앞에 사랑을 이용한다. 사랑에 배신당한 이는 죽어서까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비밀 암호를 보내온다. 사랑으로 한 사람을 아작 냈다고 생각했지만 탐정의 두뇌를 만만히 봐서는 안된다. 제이가 무덤에서 보내온 암호로 켄지는 이 판에서 누가 악역인지를 가려낸다.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데니스 루헤인의 문장은 아름답고 완벽하다.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실체를 드러내는 비밀의 반전 때문에 훌륭한 문장이 묻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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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밀리언셀러 클럽 10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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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두 번째 이야기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에서 그들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생기는 감정 이를테면 동료애, 연민, 슬픔을 서로에게서 느낀다. 추리 소설의 외피를 둘렀지만 알고 보면 로맨스 장르였던 『전쟁 전 한 잔』에서 켄지는 앤지를 향한 열렬한 구애를 보여주었다.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는 두 사람이 맞닥뜨린 추악한 진실 앞에서 총에 맞고 턱이 부러지고 얼굴에 상처를 입으며 서로를 남자와 여자가 아닌 존중 받아야 할 인간으로 여긴다. 


  하드보일드와 추리의 성격을 가져왔지만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는 상대를 향한 애틋함이 소설 전반에 가득하다. 의처증이 심한 남편 필에게서 벗어난 앤지 제나로는 켄지에게 들어온 사건을 함께 해결하면서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 성장한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필에게 자신을 아내가 아닌 전처라고 부르길 강요한다. 세상에서 앤지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모든 관심을 열어두는 패트릭 켄지는 도체스터의 과거에 묻힌 진실을 찾아 나선다. 


  범죄학 수업을 수강한 인연으로 알게 된 에릭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탐정 소설의 시작은 대부분 이렇다. 의뢰를 위해 전화가 걸려 오거나 누군가 사무소로 찾아온다. 에릭의 전화가 걸려 올 때 우리의 켄지와 앤지는 고장 난 에어컨을 수리하고 있었다. 데니스 루헤인의 장점은 대화가 간결하고 그 속에 웃음 폭탄을 장착해 두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식.


"에어컨 고칠 줄 아세요?"

"껐다 켠 다음에 다시 켜봤나?"

"예."

"그런데도 꿈쩍 안 해?"

"예."

"두 번 정도 패주지그래?"

"해봤어요."

"그럼 수리공 불러."

"기막힌 조언이네요."

 

하나 더.


"이 아이, 자네 고객의 아들인가?"

"제 아들은 아닙니다."

내가 대답했다. 프레디가 커다란 머리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러다 다친다, 꼬마. 아무한테나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냐, 응?"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두 눈은 이제 아이스피크만큼이나 불편해졌다.

갑자기 울스웨터를 삼킨 것처럼 입안이 껄끄러웠다. 

케빈이 숨을 죽이고는 조용히 키득거렸다. 


  약간만 보여주었다. 나머지는 책을 읽으며 웃으시길. 전자책 기준으로 500페이지 넘는 소설이 줄곧 무겁고 암울하고 잔인한 이야기만 흘러넘친다면 읽다가 지친다. 데니스 루헤인은 레이먼드 카버의 수업을 들은 사람이다. 간결하게 치고 빠질 줄 안다. 의뢰인에게 에어컨 고치는 조언을 듣고 의뢰인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만난 갱단 두목에게 말장난을 하는 탐정이 나오는 소설이라니 책을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유머는 앤지도 만만치 않다. 그녀는 사건을 정확히 꿰뚫어 보면서 핵심에 다가가는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캐릭터다. 


  소설에서 만난 아름답고 유머를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낸 데니스 루헤인에게는 경배를. 에릭은 학교에서 알게 된 정신과 의사 디안드라가 받고 있는 협박의 실체를 밝혀줄 것을 의뢰한다. 모이라 켄지라는 패트릭과 성이 같은 여자가 찾아와 자신이 애인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고 했다. 애인의 이름은 케빈 헐리히. 패트릭과 같은 수업을 받고 동네에서 함께 자란 지금은 살인 기계 비슷하게 전락한 그 케빈 헐리히였다. 그가 디안드라의 집에 새벽 4시에 전화를 걸어와 온갖 더러운 얘기를 했다. 단지 모이라 켄지를 상담해준 것 밖에는 없는데 케빈은 디안드라에게 무자비한 말을 쏟아 낸 것이다. 


  디안드라는 자신의 아들 사진이 담긴 편지를 받았고 아들 역시 누군가에게 스토킹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켄지에게 아들 제이슨의 안전을 부탁한다. 켄지는 협박 전화를 걸어온 케빈과 두목 잭 루스를 만나 의뢰인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해야 한다. 당연히 켄지는 앤지와 함께 사건 의뢰를 받아들인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동네 친구 부바에게 부탁을 한다. 보스턴 마피아 갱단의 대부 프레디를 만나게 해달라고. 뚱땡이 프레디를 통하면 케빈과 잭 루스도 얌전해질 것이다. 마피아 대부를 만나 켄지는 되지도 않는 말장난을 저렇게 뻔뻔하게 한 것이다. 


  단순히 협박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는 패트릭 켄지의 과거, 즉 꺼내고 싶지 않은 소방관 영웅 아버지의 예전까지 거슬러 간다. 후반부로 갈수록 탄탄해지는 이야기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긴장감으로 무장한 소설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는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잔인하고 망가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환경에 지배당한 인간일수록 폭력성은 두드러진다. 켄지도 그럴 수 있었다. 두렵고 슬퍼서 어둠과 손을 잡을 수도 있었다. 앤지 제나로를 만나고 사랑하고 가슴에 그리움을 간직하며 어둠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드보일드를 읽다가 너무 애틋하고 설레서 심장이 아플 수도 있음을 미리 알려준다. 그리고 웃음은 덤이다.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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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 한 잔 밀리언셀러 클럽 4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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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에 이런 이야기를 봤나.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 『전쟁 전 한 잔』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시작은 평범했다. 소방관 영웅 아버지를 두었던 탐정 패트릭에게 사람을 한 명 찾아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탐정답게 그는 그 일을 수락한다. 성당 종루에 마련한 허름한 사무소에 가 일의 내용을 동료에게 들려준다. 패트릭은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신문을 읽고 있는 동료가 자신을 한 번이라도 쳐다봐 주었으면 한다. 그때부터 소설의 공기는 달라진다. 사립 탐정을 주인공으로 벌어지는 추리 소설에서 사랑하는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애정의 이야기로. 작가가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어차피 출간된 이야기는 독자들의 것이므로. 나는 마음대로 『전쟁 전 한 잔』의 장르를 바꾸기로 한다. 


"패트릭, 저 밖은 광기 어린 전쟁터야, 인마. 네놈은 해 저물 때까지도 살아남지 못해. 그리고 앤지, 이놈과 함께 다니면 너도 죽는다."

정말로 옛날 어머니 같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의자 뒤로 기대고는, 지쳤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두 눈을 내게로 향했다. 

"'내 총을 돌려주고 달아나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무도.'"

딱 「새벽의 7인」에 나오는 제임스 코번 목소리였다. 그 환한 얼굴로 만들어낸 미소는 정말로 가슴을 에고도 남았다. 그 순간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데니스 루헤인, 『전쟁 전 한 잔』中에서)


  상원 의원의 방에서 서류를 훔쳐 달아난 청소부 제나 안젤린을 찾아야 한다. 패트릭은 그의 동료와 함께 비밀로 가득한 임무를 수행한다. 패트릭의 동료로 말할 것 같으면 앤지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로 패트릭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자랐다. 패트릭은 그녀와 좋은 친구였지만 그녀는 필이라는 다른 좋은 친구를 남편으로 맞았다. 그 후부터 그녀는 좋은 친구이자 남편에게 맞았다. (이런 말장난 안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사업에 실패한 필은 앤지를 죽도록 팼고 이유는 항상 의처증 때문이었다. 패트릭은 생각한다. 왜 그녀 같은 아름답고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심지 굳은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여자가 필에게 얻어맞으며 산단 말인가. 


  제나를 찾아내고 그녀가 감춘 서류의 실체에 다가가는 두 사립 탐정은 추잡하고 거대한 비밀의 세계에 발을 담근다. 『전쟁 전 한 잔』은 데니스 루헤인의 대표 시리즈 '사립탐정 켄지&제나로'의 첫 번째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에는 순서대로 번역이 되지 않았지만 나는 데니스 루헤인을 늦게 안 행운의 대가로 차분히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부터 읽게 되었다. 탐정은 많다. 많은데 대개 이야기 안에서 그들은 혼자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만 일을 처리하는 주체는 단독이다. 상대를 향한 사랑을 숨기지도 않으며 아슬아슬한 연애의 긴장감까지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주인공이 있는 추리 소설이라니. 


  정치인의 어둡고 검은 비밀을 파헤치고 인간 본성에 숨어 있는 폭력성이라는 주제를 끌고 가는 압도적인 줄거리 안에는 진짜 사랑 이야기가 숨어 있다. 앤지 제나로는 패트릭 켄지가 끊임없이 보내오는 사랑의 신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앤지의 눈을 바라보고 그녀가 웃는 웃음을 바라보며 '그 순간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라며 사랑에 눈을 뜨는 패트릭은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힘으로써 정의를 짓밟는 비정한 세계에서 진정한 사랑이 꿈틀거리는 소설 『전쟁 전 한 잔』의 장르는 단언컨대 로맨스다. 그것도 그저 뻔하고 평범한 로맨스가 아닌 총탄이 날아오고 찌그러진 차를 타고 도주하는 속에서 서로를 챙기며 피어나는 사랑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하드보일드라고 생각하며 읽었다간 당신의 심장이 남아나질 못한다.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의 아프고 절절한 가슴 시린 진짜 사랑 이야기를 이 가을에 만끽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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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소설가의 사물 - 사소한 물건으로 그려보는 인생 지도
조경란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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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님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뜨거운 여름 지나고 가을에 받은 『소설가의 사물』은 작가 님 표현대로 한 편의 편지가 되어 제 가슴에 날아왔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은 무너지고 사라지고 다시 생겨납니다. 그 마음을 다 잡는 일이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오래전부터 저는 작가 님의 소설을 좋아해서 열심히 읽은 소리 없는 독자입니다. 스무 살이 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방 안에서 책만 읽었다던 작가 님의 내밀한 고백이 저를 더 소설의 세계로 이끌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방이 책으로 가득한 옥탑방에서 자매들과 부모님이 자는 사이에 책을 읽고 글을 쓴 기록을 읽으며 문학으로 향하는 길에 서 있곤 했습니다. 작가의 소개 말에 실린 열일곱 번째 책인 『소설가의 사물』을 방금 다 읽었습니다. 오전에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오후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쉬는 하루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이책을 좋아했는데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해 처분한 뒤로는 전자책을 읽고 있습니다. 『소설가의 사물』이 전자책으로 나오길 기다려 구매했습니다. 사자마자 읽어 버렸습니다.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하루에도 필요한 물건들은 많습니다. 어제저녁에는 이 가을과 겨울에 들기 좋은 텀블러를 덜컥 구매해버렸습니다. 작가 님도 텀블러 두 개를 번갈아 사용하신다는 부분을 읽고 사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취향이 같다는 건 놀라운 일이니까요. 헐거운 마음을 다잡고 일하러 갈 때는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텀블러에 물을 담고 역시 귀여운 캐릭터 필통과 수첩을 챙겨 가방에 넣습니다. 발걸음이 가벼워지길 기다립니다. 


  『소설가의 사물』에서 소개해주신 소설과 영화, 사물들의 이야기를 잘 기억해 놓겠습니다. 그중에 제가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작품은 록산 게이의 「언니가 가면 나도 갈래」입니다. 전자책으로는 없네요. 종이책으로 읽어보려고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저는 『소설가의 사물』을 읽고 작가 님의 일상과 표정을 조금은 알아버린 듯하여 친밀감이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를 읽고 같은 제목으로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한때는 문학이 전부였습니다. 문학이 아니면 안 된다는 철부지로 살았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고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줄 알고 상심한 일이 생겨도 웃어넘기는 처세가 생겼습니다. 그러니 문학이 아니면 어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라며 욕심을 버리고 있습니다. 욕심을 버린다고 썼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가끔은 마음이 아프고 입술을 깨물곤 합니다. 


  상대를 정해 놓고 편지를 써 본 적이 오래입니다. 다시 생각해 봅니다. 저는 오래도록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정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단 한 번도 답장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쓴 편지에 주된 내용은 '여기 있기에 문제없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편지의 수신인은 문학입니다. 새침하고 말이 없는 신경질적인 그에게 저는 구애의 문장을 쉴 새 없이 쓰고 있습니다. 나라는 사람이 여기 있기에 문제없이 살고 있다는 내용을 받은 그는 얼마나 우스울까요. 매번 좌절하고 혼자 실망하고 망설이는 제가 한심해 보일 텐데 그는 말없이 묵묵히 제 수다를 들어주고 있습니다. 


  『소설가의 사물』에 담긴 내용을 읽어가며 우리는 만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의 낯선 거리에서 움츠러드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문구점에 가서 연필, 엽서, 공책을 고르는 풍경이 떠오릅니다. 손수건은 늘 두 개씩. 티셔츠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입는 가족들의 등을 바라보는 일. 조카의 내면 일기를 읽으며 마음이 뜨거워지는 일. 우리의 일상이 닮아 있다고 느끼는 건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기에 소설을 읽고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책상에는 어제 도착한 신간 책들과 유리컵 두 개, 필통과 공책, 마스킹 테이프, 외출용 노트북이 있습니다. 사 놓고 먹지 않은 초콜릿 과자도 하나 있네요.


  우리를 꿈꾸게 하는 사물들 곁에서 느리지만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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