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발 짧아도 괜찮아 3
금희 외 지음 / 걷는사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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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는사람에서 나오는 '짧아도 괜찮아' 시리즈 세 번째 주제는 '추리소설'이다. 이 기획을 응원하고 있어서 책이 계속 나온다면 살 생각이었다. '추리소설'이라는 주제를 듣고는 바로 주문해서 읽어버렸다. 추리 소설의 좋은 점은 시간을 잊게 만든다는 것이다. 시간이 시간인지도 모르게 말이다.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을 쫓는다. 범인인 것 같은 사람을 보여주고 후반부에서는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준비한다. 작가는 독자와 심리 게임을 단단히 준비해 놓은 듯한 추리 소설을 읽으면 시간은 뭉텅이로 잘려 나간다.


  그간 한국 문학에서 추리는 장르문학이라는 틀에 묶여 자유로운 외출이 어려웠다. 물론 한국에도 훌륭한 추리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있다. 그럼에도 장르문학의 한계에 갇혀 독자들과 소통이 어려웠다. 『시린 발』은 순수 문학에서(이 말도 좀 웃긴다. 순수한 문학이 있고 안 순수한 문학이 있다는 말인가)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이 추리라는 주제에 맞추어 짧은 이야기를 모아 놓았다. 총 열두 편의 이야기는 실종, 살인, 비밀, 기억을 추적한다. 


  소설집의 첫 번째 이야기 금희의 「실종된 아이」는 행복 아파트에서 사라진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소외된 사람들의 현재를 건조한 문체로 그린다. 안보윤의 「공교로운 사람들」은 전형적인 추리 소설의 기법을 따른다. 사라진 기억을 찾는 한 남자의 기억 찾기를 통해 추악한 비밀을 세상 밖으로 드러낸다. 「검은 솥」에서 우승미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더러운 인간들의 욕망과 그들을 복수하는 한 여자의 신산한 삶을 보여준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유의 「시린 발」은 오래 생각에 잠기게 한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아이의 병원을 찾은 견인차 기사의 서술로 밝혀지는 그날의 비밀은 슬프고도 처연하다. 임승훈의 「너무 시끄러워서」는 생활 밀착형 호러 소설로 읽힌다. 수산 시장의 아나운서로 일하는 '나'는 벽이 얇은 원룸에서 여러 명의 남자친구를 바꿔가며 살아간다. 그때마다 너무 시끄러워서 일을 할 수 없다는 옆집 남자의 무시무시한 압박 때문에 도저히 이곳에서 살 수가 없다. 돈이 있어서 이사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최대한 숨을 죽이며 살아간다. 공포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머나먼 세계에 관상용으로 있는 것이 아닌 바로 옆에 도사리고 있다는 암시를 주는 소설이다. 


  면접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고 임원들의 회의의 결정에 따라 다시 합격한 이야기로 전율을 주는 주원규의 「네 남자 이야기」는 실제로 그런 일들이 벌어질 것 같아 무시무시하다. 추리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없는 삶이란 얼마나 황량한가. 우리 인간이란 욕심 덩어리라서 원하는 일에 있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족속들이다. 그런 인간들이 범행 현장을 목격하고 사건을 일으키고 진실을 찾아 범인을 밝혀 내는 이야기에서 무료한 시간은 저절로 연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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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선의 영역
최민우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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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민우의 소설 『점선의 영역』은 예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전쟁고아로 자수성가한 '나'의 할아버지가 까무룩 정신을 잃고 집안 식구들에게 들려주는 예언으로. 명절에 모인 식구들을 향해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들려주는 예언은 대개 불길하고 어두운 징조로 가득했다. '나'의 고종사촌에 관한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고 식구들은 무서워하면서도 섣불리 예언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수능을 보고 할아버지에게 인사하러 들른 '나'는 유과를 먹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예언을 듣는 사람이 되었다.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날 거다. 소중한 걸 잃게 된다. 힘들 거다. 용기를 잃지 마라. 도망치면 안 돼."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뜻 모를 소리를 들려주고 얼마 후 돌아가셨다. 취직을 하기 위한 대학 생활을 보내지만 졸업 후에 취직은 머나먼 행성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여겨졌다. 열한 번 취업에 실패하고 본 회사의 면접에서 '나'는 빨간 재킷을 입은 면접관에게 할아버지의 일화를 말한다. 앞날을 보는 할아버지를 둔 이상한 일을 겪은 자신은 운명 앞에 겸허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점선의 영역』은 단순히 면접에 실패하고 의지를 잃은 채 좌절하는 인물들이 나오는 소설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나'와 연인 관계인 '서진'이라는 인물은 취업 관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프니까 청춘인 암담한 인생이다. 그들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이어갈 줄 아는 사람들이다. 어차피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전언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중반부로 가면 서진이 면접에 실패한 그날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건으로 이야기의 분위기가 바뀐다. 인턴 자리에서 밀려난 서진의 행동이 돌고 돌아 면접관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된 서진은 취업에 실패한다. 


  다만 그림자가 없을 뿐이다. 그런데도 서진은 자신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가볍고 이내 행복하다고까지 느낀다.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다. 나는 서진의 그림자를 찾아 주려 하지만 실패한다. 할아버지의 예언대로 만나면 안 될 사람을 만났고 소중한 걸 잃어버린 채 도망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너무 푸르고 너무 작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점으로 기억될 우리는 그 안에서 아등바등 인생의 직선 하나 그리지 못하고 살고 있다. 이름이 있어도 숫자로 불리고 해고는 쉽고 취업은 다른 세계의 일이 되어버린 지구에서 운명이란 용기를 잃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세계에서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면 된다. 어긋나고 뒤틀린 채 살아가는 것보다 그림자를 찾아다니며 하루를 보내는 게 이상한 세계에서 통용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실패와 절망 때문에 어둠으로 도망쳐 그림자를 지우며 살아가는 우리를 꺼내 줄 수 있는 건 사랑이다. 소중한 걸 잃게 되더라도 지켜 주고 싶은 한 사람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그림자를 데리고 올 수 있다. 사랑을 쓸 수 있는 직선의 획은 그렇게 완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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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 어른인 척 말고 진짜 느낌 좋은 어른으로 살아가기
박산호 지음 / 북라이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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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가 박산호의 이름을 알게 된 건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 44』를 읽으면서부터였다. 책 자체도 재밌었지만 막힘없이 흘러가는 우리말로 옮긴 솜씨가 놀라웠다. 그 후에는 로렌스 블록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름을 외워 버렸다. 탐정 매튜 스커더 시리즈를 계속 읽고 싶은 마음에 번역이 되지는 않았는지 이름을 검색해서 살펴보기도 했다. 외국 소설의 경우 번역가가 누구냐에 따라 글의 흐름이 달라지기도 한다. 좋아하는 외국 작가의 경우 꾸준히 한 번역가가 우리말로 소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름만 알고 다른 것들은 모른 채 책을 읽어 나갔다. 이번에 나온 산문집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박산호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모습들도 알 수 있는 책이다. 번역가로서의 일상은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로 알 수 있을 것이다(이 책도 사 놔서 곧 읽을 예정이다). 산문집을 좋아하는데 작가의 일상을 곁에서 바라보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산문집을 읽으며 하루에 시작은 어떻게 하는지,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지, 글을 쓸 때 어떤 도구들을 사용하는지 등의 세세한 일상의 무늬를 헤아려 본다.


  서른에 아이를 낳고 홀로 아이와 영국 유학을 떠나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전문 번역가로서 느끼는 어려움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어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어른이 아니다. 나이를 더 먹었다고 어린 사람에게 충고 비슷한 말로 상처를 주는 어른은 제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막말을 듣지 않을 권리와 상처받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알려준다. 혼자 아이와 영국 유학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어려움에 대해서는 남에게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해도 좋다고 이야기한다. 


  좋은 직업 가지고 아파트와 차를 사고 아이 둘 이상을 낳아 기르는 삶의 끝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아등바등 살면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놓쳐 버리지 말라고 해준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상에서 느꼈던 어려움과 이해의 과정들이 편안한 어조로 담겨 있다. 놀랄 정도로 아이들은 강하며 어른 보다 위대한 감정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부분에서 감탄을 했다. 우리 역시 아이의 과정을 거쳐왔음에도 어른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재단하고 규정하려고 했다. 


  나이 듦을 두려워하지 말고 조금 더 살았다는 거만으로 타인을 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에서 들려주는 충고는 따뜻하고 그가 느낀 솔직함의 언어가 더해지면서 나의 불안함을 위로한다. 주름살이 늘고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하더라도 우리는 책을 읽고 낯선 곳을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지혜를 쌓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책 읽기.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음에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다. 우리에게는 책이라는 어른이 있어 이토록 자상한 실패와 노력의 경험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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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건너오다 - 다큐 피디 김현우의 출장 산문집
김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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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체의 위치를 나타날 때 필요한 것은 기준점이다. 기준점의 조건은 이렇다. 대화하는 사람이 모두 알아야 하고 위치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기준점을 가지고 있다. 불안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축조된 기준점이든 시시각각 변하는 위치를 가진 기준점이든, 각자의 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기준점을 당신과 나는 가지고 있다. 누구의 친구, 아내, 남편, 딸과 아들로서 말이다. 설명할 수 없어 빈칸에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채 골똘한 생각에 잠길지라도 이내 우리는 각자의 위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여행으로써. 


  고속버스에 앉아 잠을 청해 보려 하지만 오히려 정신만 말똥말똥하기도 하며 간발의 차이로 기차를 놓쳐 빈 역사 안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기만 할 때. 우리는 떠나온 기준점을 헤아린다. 출발 지점에 점을 찍어 방향을 가늠한다. 동쪽으로 40km, 북쪽으로 100km. 어떤 순간에는 방향을 놓쳐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 허망해지는 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문득 사는 게 그저 그렇지, 내가 돈을 버는 건지 돈이 나를 버는 건지 모를 때 이곳에서 '가장 멀리'에 해당하는 도착지로 가는 표를 끊는다. 


  김현우의 『멀어진다』는 특이한 여행 산문집이다. 책의 표지에는 '다큐 피디 김현우의 출장 산문집'이라는 표제가 박혀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알겠지만 그는 EBS에서 일하는 다큐 피디로서 이 책의 모든 여행지는 그가 회사의 업무로서 다녀간 곳이다. 책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사무엘 베케트의 묘지를 찾아간 것은 그가 유학을 했을 때의 기록이지만 나머지는 업무차 가서 일하고 보고 느끼고 쓴 기록이다. 사는 게 그저 그래서 어느 날 훌쩍 가방 하나 메고 떠난 여행의 기록이 아니다. 목적이 있으며 그의 기준점은대한민국 서울로서 절대 변하지 않는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변하지 않고 늘 같은 자리에 있는 무언가는 위로를 준다. 생각해보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대부분 변화다.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던 것이 새로 생길 때마다, 우리는 아쉬워한다. '길들여진 상태'가 편안한 만큼 의지와 달리 거기서 벗어나야만 하는 상황은 서운하고, 때론 아프다.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서 아프고, 흰머리가 늘어서 서운하고, 내일 해야 할 새로운 일은 어쩔 수 없이 두렵다. 

(김현우, 『건너오다』,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하늘엔 원래 별이 많다」中에서)


  『건너오다』는 변하지 않는 것들을 찾아가는 기록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그는 우리를 다정하게 위로하는 것이란 쏟아지는 별들, 지은 지 천오백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절 그리고 길 잃은 여행자를 위해 손짓 발짓 섞어가며 안내해주는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임을 이야기한다. 대학교 때 읽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무덤에서 그가 세상에 존재했음을 확인받고 존 버거의 현재를 만나기 위해 출판사에 찾아간다. 이 모든 행위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현재라는 순간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변하지 않고 여전히 그곳에 있는 실존을 마주하기 위함이다.


  여행자의 시간은 반복된다. 기준점에서 가장 멀리 가기를 희망한 방랑자의 시간은 돌고 돈다. 묘지 폐관 시간 때문에 오래 머물지 못해 아쉬웠던 순간을 나중의 만남으로 위로받고 존 버거를 만나지 못한 쓸쓸한 마음은 그의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환희로 바뀐다. 내가 살아온 기준점이 여전히 그곳에 잘 있는지 안도받기 위해 여행을 시작한다. 한 번 더 찾아가 익숙해진 여행지의 장소와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되짚어 보는 것으로 끝이 나기도 한다. 주소지는 그대로인데 사는 사람이 바뀌거나 건물이 사라지는 허탈감을 마주하는 것이 삶의 다른 얼굴임을 깨닫는다.


  유인원 연구소 촬영차 찾아간 오카야마에서 만난 침팬지 '잠바'의 일화가 유독 마음에 남는다. 침팬지 가족의 생활을 찍는 촬영에서 그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잠바에 주목한다. 여덟 명의(그곳에서는 침팬지의 수를 셀 때 마리라고 하지 않고 인격체의 의미를 담아 명으로 부른다) 침팬지 가족 중 알파 수컷이 아닌 잠바는 부상 중이었다. 잠바를 연구소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털은 갈색이다. 살집이 있고 우람한 몸집이다. 능란한 구애 방식은 로이에 버금갈 만큼 훌륭하다. 가끔 먼 곳을 바라보곤 한다.' 

  

  '가끔 먼 곳을 바라보곤 한다'라는 문장을 쓰기까지 연구소의 사람들은 잠바를 관찰하고 그가 시선을 두는 곳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이곳이 아닌 먼 곳. 먼 곳에 가닿은 시선과 그 시선을 바라보는 애정. 사랑이란 내가 바라보는 풍경을 함께 보는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밖에 없는 '잠바'의 소개에서 삶의 무한한 긍정을 만난다. 멀어지고 건너왔지만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길 위의 기록은 쓰는 것보다 살아가는 것이 좀 더 나은 일임을 깨닫는 것으로 끝이 난다. 끝이라고 했지만 끝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삶은 사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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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락한 이유
데니스 루헤인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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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른다섯이 되던 어느 해 화요일 한 여자가 남편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소설 『우리가 추락한 이유』는 만만한 소설이 아니다. 첫 장면도 충격적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전개되는 사건 자체도 독자를 뒤로 넘어가게 할 정도로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저명한 교수이자 학자인 어머니를 둔 레이철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궁금해한다. 어머니는 우리를 버리고 떠난 사람이므로 알 필요 없다는 말로 때론 시간이 흐르면 알려준다는 핑계로 그의 존재를 감추려 든다. 결국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레이철은 아버지라는 비밀의 문을 열 열쇠를 받지 못한다. 


  연애. 결혼. 불화. 이유는 남편의 이중생활. 배신. 살인이라는 뻔한 전개를 상상했다면 큰코다친다. 현란한 이야기 구성과 반전의 대가, 데니스 루헤인은 결혼이라는 식상한 소재를 선택해 놓고도 구질구질하게 소설을 끌고 나가지 않는다. 『우리가 추락한 이유』는 독자를 이러 저리 끌고 다니면서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대충 이런 이야기겠군이라는 생각으로 읽어가다간 소설의 후반부에서 펼쳐지는 반전의 향연에서 숨이 넘어갈 수도 있다. 


  끝내 아버지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고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 레이철은 스스로 비밀을 밝히려고 한다. 사설 조사원 브라이언 델라크루아를 만난다. 그는 양심적인 조사원이었다. 레이철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너무 희박하고 돈을 더 써도 아버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조사원에게 맡긴다면 유산을 상속받은 여자의 돈 냄새를 맡고 바가지를 씌우고도 알 수 없음이라는 결과를 내놓을 것이라고 냉철하게 충고한다. 레이철은 어머니의 유품에서 단서를 찾으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그녀를 받은 산부인과 의사가 접근해 자신의 추문을 덮을 기사를 써준다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준다고 말한다. 레이철은 기사를 역으로 써서 결국 아버지의 이름을 알아내는데 성공한다. 


  소설은 레이철의 아버지 찾기와 그녀가 기자로서 성공을 하는 시점에 찾아온 공황발작으로 인해 망가지게 된 커리어를 다룬 1부. 우연히(정말 우연이었을까) 만난 브라이언과의 생활을 다룬 2부 그리고 레이철이 스스로의 둥지를 박차고 나와 활약을 펼치는 3부로 나뉜다. 단서도 없이 아버지를 찾느라 헛돈 쓰지 말라고 충고했던 조사원 브라이언과는 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결혼과 직장 생활에 실패한 그녀 앞에 나타난다. 추근대는 남자를 가볍게 물리쳐주는 백마 탄 왕자님 같은 장면을 배경으로 말이다. 


  비 오는 거리를 함께 걸으며 가까워진 그들은 곧장 결혼을 한다. 모든 것이 완벽한 남편이었다. 발작 증세로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레이철을 안쓰러워하고 그녀가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는 남편. 레이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언제나 사랑과 믿음이 가득한 그와의 결혼 생활은 끝까지 갈 줄 알았다. 지금쯤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 있어야 할 남편을 거리에서 마주친 그 시간 전까지!


  그때부터 남편 브라이언의 모든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를 사랑하지만 그의 전부를 알지 못한다. 그가 자신에 대해 말한 것들에 진실이 있었나. 소설은 사랑에 배신당한 한 여자의 복수극으로 후반부를 끌고 가지만 데니스 루헤인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작가가 아니다. 그들은 판을 깔아 놓고 서로가 덫에 걸리기를 기다린다.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거짓이 난무하는 가정 호러극인 『우리가 추락한 이유』는 놀랍게도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브라이언은 뻔뻔하게도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나서도 레이철에게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사랑, 사랑이라. 레이철은 자신에게 닥쳐온 우울한 비밀로 싸인 과거와 결별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걷어차 버린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남자의 입에서 말해지는 사랑에서 우리는 날개 없이 추락하는 이유의 단서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추락한 이유』를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면 이 소설의 첫 시작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다.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5월의 어느 화요일, 레이철은 남편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는 마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녀가 그럴 줄 늘 알았다는 듯이, 드디어 확인되었다는 것처럼 묘한 표정을 하고 뒤로 쓰러졌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있으나 믿음 없이는 버텨 나가지 못하는 결혼에 대한 이야기. 반전과 스릴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데니스 루헤인 식의 가정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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