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라, 내 얼굴 슬로북 Slow Book 4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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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다닐 때 김종광의 단편 소설을 읽고 합평하는 시간이 있었다. 시간이 많이 남아돌았기에 그동안 나온 김종광의 소설들을(다행히 그때는 신인 작가라 몇 권 없었다) 전부 읽었다. 수업 시간이 되어 다들 한 마디씩 할 시간이 주어졌을 때 눈치도 없이 오랜 시간 동안 주절거렸다. 최근에 나온 소설가 중 이야기를 신나게 잘 쓴다, 이문구 선생의 재림이다, 능청스럽고 뻔뻔하고 그러면서도 슬프다, 기대가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었다. 선생은 오랜 나의 주절거림을 들어주었다. 다른 학생들이 지루해하거나 말거나 수업 시간이 끝나거나 말거나 선생과 나는 김종광의 소설의 현재, 미래라는 거창한 주제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


  김종광은 충청도식 특유의 아 몰랑 화법, 속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핵심을 찌르는 어법, 다들 쓰지 않는 농촌 서사를 끌고 들어오는 새로운 소설 방식을 선보였다. 90년 대 한국 문학은 정적이고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의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답답한 면이 있었다. 불륜과 자의식 과잉의 인물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기말로 치달으면서 벌이는 난해한 행동이 한국 문학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 짜잔 하고 나타난 김종광은 새롭고 후졌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새로우면서도 후졌다니. 그의 초기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난데없이(난데없지는 않겠지. 소설가가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을 테니) 등장한 이 신예 소설가는 사라져가는 농촌, 그러니까 '전원 일기'에서나 보던 소 끌고 모내기하고 풀 뽑는 그런 현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 것이다. 


  산문도 그의 소설과 비슷할 줄 알았다. 뻔뻔하고 의뭉스럽고 웃기고 짠하고. 땡. 전부 틀렸다. 전부라고는 할 순 없지만 그의 산문집 『웃어라, 내 얼굴』은 지극히 정상적인 생계형 소설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뻔뻔하고 의뭉스럽고 웃기지 않다. 다만 짠할 뿐이다. 전업 소설가로서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고 무슨 날이 붙은 기념일 챙기는 걸 싫어한다. 아들의 일 년 유치원 학비를 계산하고 그에 반해 대학의 등록금은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생각을 한다. 대출이라는 말에 그와 아내는 각기 다른 생각을 한다. 소설가는 도서관 대출 반납 기한을 아내는 집을 사기 위한 은행 대출을 떠올리는 것이다. 


  주공 임대 아파트에서 집을 빼던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에서는 짠해서 잠시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어야 했다. 수첩만 한 크기의 벽지 훼손이 있었다. 관리 사무소 사람들은 벽지를 야멸차게 찢었다. 그리고 보증금에서 100만 원을 제하고 주었다. 집 없는 세입자의 서러운 이사 날의 풍경이었다.  『웃어라, 내 얼굴』은 네 개의 주제로 되어 있다. 가족에게 배우다, 괴력난신과 더불어, 무슨 날, 읽고 쓰고 생각하고.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은 '1박 2일'에 푹 빠져 있다. 그 아이가 자라 중학생이 되어 미래의 직업란에 공무원이라고 쓴다. 소설가인 아버지는 아이의 현실적인 희망 앞에 서글퍼진다. 아이의 꿈은 어른이 강요하는 것이라 그렇고 아들이 꿈이 소박해서 슬프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뻔뻔하고 웃기고 능청스러운 장면은 없다. 산문은 삶이라는 서글픔과 막막함을 담아내는 최적의 도구이다. 그 앞에서 눙치고 숨기면서까지 속을 드러내지 않을 수는 없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한국에서 소설만을 쓰며 살아가는 '20년 차 소설가' 김종광의 현실은 녹록하지 않음을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는 이제야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뭐라고 한 신인 작가의 현재와 미래를 논했단 말인가. 책날개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본다. 김종광은 부지런히 썼다. 소설가가 아닌 생활인 김종광 일상의 얼굴은 다행히 웃는 얼굴이었다. 스스로에게 웃어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미래의 얼굴 역시 다정한 얼굴로서 살고 있을 것이다. 『웃어라, 내 얼굴』을 읽는 것으로 다정하고 걱정 많은 소설가의 오늘에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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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은 채식주의자 짧아도 괜찮아 4
구병모 외 지음 / 걷는사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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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 가면 쥐덫에 잡힌 쥐를 보곤 했다. 짓궂은 남자애들이 죽은 쥐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 나를 비롯한 애들은 무서워서 구석에 숨었다. 쥐를 내 쪽으로 던졌다. 소리를 지르다 못해 울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쥐는 무섭다. 세 들어 살던 집에는 고양이들이 자주 출몰했다. 밤에 화장실에 갈 때 녀석들과 마주치곤 했는데 푸르게 빛나던 눈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여전히 고양이의 눈을 바로 보지 못한다. 동네에 사나운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어쩌다 그 개 앞을 뛰어갔는데 묶여 있는 줄로만 알았던 개가 뛰어와 내 엉덩이를 물었다. 산책 중인 강아지를 만나면 못 본 척 돌아가는 이유다. 


  그리하여 쥐과인 햄스터를 키운다거나 고양이 발을 만져본다거나 개를 품에 안는다는 일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쫓기고 물리는 일이 없었더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털이 있든 없든 동물은 내게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다가온다. 중요하다, 유년의 기억들은. 가까이 가지는 못하지만 멀리서라면 가능하다. 뚱뚱한 엉덩이를 실룩이며 걷는 강아지를 보기도 하고 개와 비슷한 성질을 가진 개양이를 귀여워한다. 그것은 거리가 주는 안도감 때문이다. 무언갈 키운다는 것은 책임감이 필요한 일이다. 시간 되면 밥 주고 산책을 하고 아프면 돌봐주는 일들을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 물론 반려동물이 주는 위안과 다정함이 따라오지만 살아 있는 것을 돌봐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이길 수 없다. 


  걷는사람에서 나오는 '짧아도 괜찮아' 시리즈 네 번째 주제는 '동물권'이다. 인간에게 부여되는 인권이 있듯이 동물에게도 고통을 피하고 학대받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동물권이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고 한동안 닭을 먹지 않았다. 모든 고기를 끊을 수 없으니 좁은 닭장 안에서 학대받으며 도축되는 닭만은 먹지 말자고 결심한 것이었다. 닭과 소, 돼지 등 사람들이 먹는 육류의 공정 과정은 공정하지 않고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았다. 포어는 미국의 최대 닭 소비량을 자랑하는 KFC의 닭 도축장을 가려 했지만 실패했다. 본사가 포어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민은 채식주의자』에서 소설가들은 개, 고양이, 햄스터, 소, 고릴라의 이야기를 그린다. 전쟁에 쓰이는 개의 이야기를 다룬 구병모의 「날아라, 오딘」을 시작으로 키우던 주인이 아프자 맡겨지는 고양이의 미래를 그린 「미래의 일생」,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햄스터를 덜컥 사서 키우게 되는 「살아 있는 건 다 신기해」로 우리를 동물과 함께 하는 삶으로 데려간다. 떠난 연인이 채식주의자여서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어 이별 후에 고기에 기갈이 들려 무지막지하게 먹게 되는 이야기 「무민은 채식주의자」. 산란계가 아닌 육계의 운명으로 태어난 자신의 인생을 담담하게 말하는 닭의 목소리가 담긴 「오늘의 기원」. 동물권을 주제로 한 짧은 소설들을 읽다 보면 우리는 오래 다정한 것에 굶주려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하명희의 소설 「손을 흔들다」에서 장님 소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외로운 건 다른 걸로 채울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리운 건 다른 걸로 채워도,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절대로 채울 수 없는 거예요."


  외로운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고 그립지 않기 위해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동물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한다. 어느 저녁, 지친 나의 뒤를 따르는 누군가에게 바쳐지는 소설 『무민은 채식주의자』를 통해 무섭고 두려웠던 유년의 기억의 색채가 옅어지기를 희망한다. 소설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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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방차 마르틴 베크 시리즈 5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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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 다섯 번째 이야기 『사라진 소방차』의 처음은 죽은 남자가 쓴 메모에 '마르틴 베크'라는 이름이 나오면서 시작한다. 남자는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 경찰은 현장을 둘러 보고 메모장에 적힌 그 이름을 발견했다. 경찰이 아는 이름이었다. 이야기는 한 남자의 자살에서 마르틴 베크가 양로원에 계신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을 무리 없이 연결한다. 죽음과 삶이라는 양면성을 보여주면서 사건의 시작을 알린다.  왜 죽은 남자는 일면식도 없는 마르틴 베크의 이름을 적어 두었던 것일까.


  『사라진 소방차』에는 마르틴 베크 이외에도 다양한 인물의 경찰이 등장한다.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경찰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단 멜란데르는 다르다. 그는 기억력이 비상하다. 사진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사건의 연도와 발생 시기, 특징들을 외운다.) 사건을 수사하고 휴일을 맞이하면 가족과 함께 보내거나 사소한 이유를 들어 혼자 보내기도 한다. 휴가 기간에는 휴가를 떠나고 다시 복귀해 사건을 파헤친다. 스웨덴은 지구 최고의 복지 국가라는 수식어를 가졌지만 각종 강력 범죄율이 높다는 이면을 가지고 있다. 잔인하게 여성이 살해당하고 수시로 권총 자살을 하며 마약 거래에 실패하면 죽임을 당한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경찰들, 그러니까 마르틴 베크와 동료 경찰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사건 하나를 맡으면 머리를 맞대고 국장이 비웃는 가설을 세운다. 그러다 자신들이 놓친 단서를 찾아간다. 군라드 라르손은 자동차 절도범인 말름의 집 주변을 신입과 함께 잠복 수사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추위 때문에 투덜거리는 신입을 잠깐 보내 놓고 집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작은 불꽃이 일어나더니 건물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건물에는 모두 열한 명이 있었다. 군라드는 사람들을 뛰어내리게 하고 아이는 손으로 받았다. 


  화재의 원인을 찾아가는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 이 과정에서 마르틴 베크의 활약보다는 멜란데르, 군라드 라르손, 꿈이 경찰 총장인 벤뉘 스카케, 콜베리, 몬손, 뢴이 사건의 핵심에 접근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화재 시 부른 소방차는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거리에 소방차가 있었고 군라드의 지시에 따라 한 번 더 신입이 신고를 해 소방차가 출동했다. 그들은 최초의 신고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놓쳤다. 사건은 말름이 자살을 하려고 가스 밸브를 열어 놓은 탓에 화재가 난 것으로 처리되었다. 


  현장을 둘러본 멜란데르는 사건이 단순한 자살이 아님을 알아내고 군라드 역시 방화에 의해 화재가 벌어졌음을 추측한다. 마르틴 베크는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주변을 살피며 사건의 원인을 찾는 경찰들에게 영감을 주는 역할을 맡는다, 『사라진 소방차』에서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혼자 휴가를 즐기기를 좋아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비상한 머리를 가진 마르틴 베크. 


  소설은 인과 관계를 따진다. 추리 소설은 앞뒤가 정확히 맞아야 하고 독자는 자신이 맞춘 퍼즐이 완벽하길 바란다. 『사라진 소방차』는 완벽한 추리를 기대한 독자의 허를 찌른다. 첫 장면에서 시작한 남자의 자살, 그가 쓴 메모 속 이름 마르틴 베크, 화재 현장에 남겨진 작은 폭발 장치, 범인이라고 단정했지만 시체로 떠오른 남자. 사건 현장은 완벽한 우연으로 맞물려 수사에 혼돈을 준다. 우연에서 실마리를 찾아가는 살인수사과의 경찰들. 『사라진 소방차』는 앞의 네 권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 보다 더 기발하다. 춥고 어두운 배경으로 펼쳐지는 경찰들의 좌충우돌 범인 찾기에 유머가 더해지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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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파도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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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킬로미터에 가까운 해안선을 갖고 있는 소도시, 척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소설 『아홉번째 파도』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스릴러의 구조를 충실히 따라간다. 척주시 보건소 예방의약에서 약무직으로 일하는 송인화는 그동안 묻어온 과거의 사건 하나를 파헤쳐야 한다. 척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척주를 끔찍해한 송인화는 실패한 자의 얼굴로 척주로 돌아온다. 모든 걸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그녀 앞에 서상화가 나타난다. 보건소에서 가장 인기 많은 공익 근무 요원, 서상화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지난한 세월의 상처가 사라짐을 느낀다. 


  최은미의 첫 장편 『아홉번째 파도』는 계간 『문학동네』에 '척주'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소설은 강원도 삼척에서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한다. 인구 7만의 삼척에서 벌어진 일을 소설로 끌어와 현실성을 높였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불안감이 높아진 시점에 삼척에 핵발전소를 지으려는 당국과 저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허구라는 세계에서 긴장감이 극대화된다. 여기에 시멘트 광산에서 벌어지는 비극, 약왕성도회라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라는 재료가 더해지면서 소설은 독자들의 손에 퍼즐 조각 하나씩을 쥐여준다. 소설을 읽게 하는 강력한 힘인 서사로 똘똘 뭉친다.


  『아홉번째 파도』는 척주에서 벌어지는 첨예한 사건의 비밀을 파헤치는 구조로 소설을 끌어가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사랑의 아픈 조각을 펼쳐 놓는다. 세찬 파도가 밀려왔다 사라진 자리에는 가장 고운 빛깔을 가진 사랑의 무늬가 남는다. 송인화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도시 척주에서 단 한 사람 서상화를 바라보고 그리워하고 곁에 두고 싶어 한다. 나는 그들의 사랑이 미약하게나마 살아있길 바랐다.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활활 타오르다가도 어느새 식어 버려 바람을 크게 불어야만 살릴 수 있는 불씨로 남게 되는 것이니까. 그들이 불씨라도 갖길 원했다. 최은미는 이런 기대를 배반한다. 


  척주를 버리고 서울에서 송인화는 윤태진을 만난다. 같은 척주 출신으로 어릴 때 사고를 당해 평생 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남자. 송인화는 윤태진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곧 아이가 무뇌아라는 판정을 받는다. 송인화의 사랑은 이렇게 한 번 실패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밝히고 척주에서 일어나는 비밀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송인화는 복약 상담을 다니면서 약에 의존하고 급기야 중독의 증세까지 보이는 노인들의 모습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의사의 처방 없이도 약을 살 수 있는 특수함을 이용해 누군가는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최은미의 최근 소설 『정선』도 인물이 겪었던 과거의 고통을 실제 도시를 배경으로 형상화한다. 과거에 붙들린 채 현재를 사랑하지 못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홉번째 파도』 역시 인물들은 그들이 나고 자란 도시에서 상처받고 버림받는다. 그러나 상실의 고통을 스스로 치유하고자 노력하는 『아홉번째 파도』 속 인물들은 어리석게도 사랑을 믿는 자들이다. 이토록 불길하고 어두운 사랑이라니. 누구도 믿을 수 없어서 누구나 믿고 싶은 도시 척주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연재될 당시의 제목 '척주'가 더 좋았다. 강렬한 제목의 '척주' 대신 『아홉번째 파도』라는 제목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인 사랑의 풍경을 돋보이게 하고 싶었을 거라는 짐작이다. 구름과 파도가 밀려오는 백사장의 느낌을 몽환적으로 표현한 표지도 세 인물이 나누고 싶어 한 사랑의 흔적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홉번째 파도』는 척주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의 음모와 비밀을 밝혀내면서 독자를 긴장으로 몰고 가는 러브 로망 액션 스릴러 소설이다. 왠지 영화로도 만들어질 것 같은 예감이다. 음악은 마지막 장면에 한 번만 쓰이고 기괴한 사람들의 모습을 훑는 건조한 카메라의 시선이 담긴 영화를 상상한다. 영화의 제목은 『척주』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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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 문지 스펙트럼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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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책을 받으면 화장실로 달려갔다. 쪼그리고 앉아서 이야기 부분만 찾아서 골라 읽었다. 다리가 저릴 때까지. 텅 빈 고요를 느끼며 활자를 읽어나가는 시간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삶은 심심하고 막막했을 것이다. 화장실 한편에 책의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얇고 가벼운 책으로. 그 안에 든 내용 역시 심각하지 않고 발랄한 이야기로 채워진 책으로. 한 면에 이야기 하나씩. 화장실 독서는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책과 물은 상극이라 책은 이내 우글거리고 구겨졌다. 물기에 젖은 종이를 넘기는 기분 역시 괜찮다. 글자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화장실 안에서 살고 있는 책의 운명은.


언제 책을 읽을 것인가?

이건 중차대한 사안일 뿐만 아니라,

누구나 떠안고 있는 만인의 고민이기도 하다. 

책 읽을 시간이 고민이라면 그만큼 책을 읽을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들도, 학생들도, 어른들도. 다들 살아가는 일에 치여 책 읽을 짬이 없다. 생활은 독서를 가로막는 끝없는 장애물이다.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中에서)


  다니엘 페나크의 에세이 『소설처럼』은 우리가 문학이라는 열병에 빠지게 된 순간으로 데리고 간다. 문학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갈구해 마지않던 최초의 시간으로 말이다. 언제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하는 과정인 『소설처럼』을 읽고 나면 책상에 앉아 글자에 눈을 박고 있던 어린 우리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책 읽기가 즐거워지는 순간에서 부모 혹은 어른의 강압에 의해 주입식으로 책을 읽었던 과정을 지나 오로지 책이 주는 환희에 젖는 흐름을 이야기한다. 


  글자를 모르던 아이에게 부모는 책을 읽어주는 것으로 세상과의 연결을 시도한다. 아이는 부모의 목소리에 의지에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과 우정, 배신, 괴물의 출현, 영웅의 모험담을 접한다. 하루 15분. 부모와 아이는 온기를 주고받으며 목소리에서 목소리로 이어지는 다정함을 교감한다. 그러다 아이가 글을 읽기 시작하면 부모는 잠시 떨어진다. 책을 사주고 추천해준다. 읽고 나서 책의 내용을 질문하고 다음 책을 읽으라고 말한다. 다니엘 페나크는 이 과정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강압적으로 책 읽기의 즐거움을 빼앗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우리 아이는 책을 사랑하는 책벌레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는 책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저 좋아할 수 있도록 놓아둘 것.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더한 책 읽기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대화라고는 거의 없는 4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한다. 책상에 앉아 그 책을 읽는 아이의 뒷모습은 우울해 보이기까지 한다. 『소설처럼』은 책 읽기를 의무나 압박이 아닌 소설을 읽을 때처럼(소설이란 이야기의 힘으로 쓰인다. 이야기란 힘이 세다.) 이야기를 따라 읽는 방식으로 해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서다. 부모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건 이야기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왕자와 공주, 거지, 마법에 걸린 사람들과 거짓말에 속는 소녀의 이야기로 아이는 책이라는 건 즐겁고 흥미로운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 있기 때문에 집을 짓는다. 그러나 죽을 것을 알고 있기에 글을 쓴다. 인간은 무리 짓는 습성이 있기에 모여서 산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독서는 인간에게 동반자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 자리는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자리도,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中에서)

  

  『소설처럼』에서 나는 내가 가진 책 읽기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는다. 소설을 좋아해서 소설만 편애하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순간들은 나를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 혼자이기 때문에 책을 읽고 혼자라는 사실을 잊기 위해 소설로 향해가는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는 이야기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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