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페퍼 -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패드라 패트릭 지음, 이진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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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어두운 내용의 책들로 애도의 시간을 보냈다. 상실의 아픔과 상처를 다룬 책들이란 다들 그렇게 무참한 내면을 다독이고 상처로 터진 마음을 달래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너무나 흔해서 어느 날에는 일상처럼 뻔한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다. 죽음을 보면서 겪으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에 안도하기 바빴다. 누군가의 존재가 지상에서 사라졌지만 그와 함께 했던 시간과 추억과 물건은 남는다. 시간과 추억은 남은 자들에게는 그와의 기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든 힘이 될 수 있지만 물건은 아니다. 물건들은 짐이기도 하고 죽은 자가 끝까지 살고자 했던 희망으로 생각되어 남아 있는 사람의 시간을 무겁게 짓누른다. 그들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던 물건들을 처분하면서 남아 있는 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와 결별할 수 있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영국 작가 패드라 패트릭의 첫 장편 『아서 페퍼: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의 주인공 아서는 죽은 부인의 유품들을 정리하기까지 일 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아내 미리엄이 급성 폐렴으로 갑자기 죽자 아서의 일상은 견고함을 가장한 채 무너져 내렸다. 아서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청소를 하고 화분에 물을 준다. 외출은 하지 않은 채 자식들과도 자주 연락하지 않는다. 마을에 사는 다정한 부인 버나뎃이 파이를 들고 찾아와도 집 안에 숨어서 없는 척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미리엄과 40년을 살면서 아서는 열쇠 수리공으로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고 아내 역시 훌륭하게 가정을 보살폈다. 밖에 나가 일을 하는 동안 미리엄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r그들의 사춘기를 지켜보았다.
  아서는 미리엄의 사망 절차를 처리하느라 제대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아내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그는 일 년 동안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다. 딸 루시와 아들 댄이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고 말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일상에 스며 있는 실패와 우울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아내의 옷들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참 팔찌에는 여덟 개의 참들이 달려 있었다. 코끼리, 꽃, 책, 팔레트, 호랑이, 골무, 하트, 반지가 달려 있었다. 아내는 살아 있는 동안 참 팔찌를 해본 적이 없었다. 화려한 금 팔찌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서는 대체 이 참 팔찌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에 빠진다.
  코끼리 참에서 전화번호를 발견해 전화를 거는 것으로 아서의 아내의 과거를 향한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미리엄이 인도에서 보모를 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내면서 아서는 세상 밖으로 나간다. 버나뎃의 제안으로 호랑이 참에 달린 아내의 과거를 추적하고자 여행 가방을 꾸린다. 40년을 함께 살아가는 동안 아서는 미리엄의 과거에 대해 묻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며 그녀와 함께 하는 삶에서 만족을 얻었다. 그녀가 떠나고 남겨진 팔찌에는 그녀의 과거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들이 있었다.
  아서는 규칙적인 일상이 자신을 옭아매고 슬픔에서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는 사실을 여행을 통해서 깨닫는다. 자신의 안락한 침실이 아닌 낯선 집에서 잠을 자고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처음 본 사람의 집에 따라가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팔찌에 달린 참들의 의미와 미리엄의 과거를 알아가면서 아서는 한 사람의 생애를 관통하는 기억과 과거를 마주 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미리엄이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시간은 자신과 함께 한 현재 속에서 충분히 안락함을 얻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딸 루시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오지 못한 이야기를 듣고 이웃집 여자 버나뎃과 그녀의 아들의 고민을 들으면서 자신의 현재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미리엄의 과거를 여행하면서 그녀의 과거의 시간들을 받아들인다.
  미리엄은 팔찌를 남겨 두었고 아서는 그것을 찾아냈다. 그가 슬픔과 절망의 바닷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더라면 결코 찾지 못했을 물건으로 아서의 시간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 소설은 한 사람의 죽음 뒤에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야 할지 위트 있는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소설은 무거운 주제를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로 표현해 낸다. 남편이 죽고 혼자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버나뎃, 그녀는 마을에 혼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하고 음식을 준다. 미리엄이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은 상처를 혼자 껴안고 슬퍼했던 사람들이었다. 미리엄은 그들에게 위로와 내일의 시간들을 들려준다. 아서는 죽은 미리엄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용기를 배운다.
  과거와 결별하기를 바랐지만 아서는 미리엄의 과거를 온전히 마주 보고 그녀가 살아가지 못한 오늘과 내일을 충실히 살아가기를 맹세한다. 우리는, 남아 있는 나는 그가 두고 간 물건들을 떠나보내는 대신 그가 보내온 미래의 시간을 선물로 받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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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그대 눈동자에 건배 :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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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째 미세 먼지가 창문 밖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요즘, 밖으로 나가기 싫

은 당신을 위해 한 권의 책을 추천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으로 구성된 『그대 눈동자에 건배』.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그 이름, 히가시노 게이고. 미스터리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라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늘 들어 있어 이름을 들어 봤을 그 이름,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 소설에 빠져 도서관에 열심히 다녔을 때 일본 문학에서 마지막 ㅎ 부분을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로 차지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책들은 대출이 많이 됐는지 겉표지가 너덜거리기까지 했다. 시간은 많고 할 일은 많지 않은 그때 최대 열 권까지 빌릴 수 있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을 부지런히 읽었다. 그의 추리 소설들은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이 작품 전반에 깔려 있다. 죄를 지은 인간을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죄와 죄의식의 물음을 독자에게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대 눈동자에 건배』는 무거운 주제 의식을 다루고 있지 않다. 인간 사회의 허위를 가벼운 필치로 그려내는 이번 단편집은 미세 먼지로 가득한 연말을 마음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아홉 편의 단편을 다 읽고 난 당신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 것임을 예상한다. 추리 소설이라 모든 이야기의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은 읽는 재미를 떨어뜨릴 수 있다. 이번 책은 단편 하나하나에 소소한 재미를 선사할 수 있는 반전들이 가득하다. 친절하게 독자를 추리의 세계로 끌고 가는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려운 지적 유희를 요구하는 트릭은 쓰지 않는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인물들이 주는 익살에 웃음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열심히 살았지만 주변인들에게 폐만 끼치는 것이 두려워 죽음을 택하려는 부부의 하루가 있고 미스터리 작가로서 성공을 누린 인기 작가의 긴장감 넘치는 저녁 식사 시간이 있다. 경마장에서 마권이나 사면서 동창에게 소개팅 자리를 주선 받는 젊은이의 연애 이야기에 빠지다 반전을 만나기도 하고 딸을 시집보내려는 아버지의 허전한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아기를 빌려주는 회사가 있어 부모의 삶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가능성과 고양이의 뇌를 이식해 새로운 종을 만들 수 있다는 설정으로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다. 크리스마스에는 죽음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의 죽음을 연기하고 아버지가 이루어낸 기적의 하루를 아들이 체험하는 이야기를 단편집에서 만날 수 있다.
  기발한 설정과 반전 끝에 인간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만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적 구성력은 놀랍다. 미래 사회의 어느 날을 살아도 우리는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마음을 주고받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내일도 그 다음날에도 유지해야 한다. 길 고양이와의 우연한 만남에서도 우리는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아버지의 유언장을 읽으며 마술 같은 어느 하루를 아버지에게 선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꿈을 향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인물을 통해 나의 꿈에 응원을 받을 수 있다. 이 모든 놀라운 일들은 독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대 꿈들에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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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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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토 쇼고의 『달의 영휴』 속 주인공 루리 씨는 그녀의 애인 미스미에게 자신은 시험 삼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2017년 나오키 상을 받은 『달의 영휴』는 흔하디흔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루리 씨는 자신이 죽을 때 유서를 남기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 소설은 루리 씨의 아름다운 유서 같은 소설이다. 영휴라는 말은 차고 기울다는 뜻이다. 생소한 단어이지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이 단어가 소설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죽음의 방식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나무처럼 씨를 뿌리고 자손을 남기고 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달처럼 죽었다가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고 죽는 것이다. 루리 씨는 책에서 본 죽음의 이야기를 미스미에게 들려준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그 순간들을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물들을 그리는 사토 쇼고는 전작 『 Y 』에서도 집요한 사랑의 방식을 이야기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것은 다른 세계에 살아 있는 내가 이루어낸 것이라는 기발한 발상을 보여주었다. 추리 소설인 줄 알고 읽었다가 추리 소설을 가장한 사랑 이야기를 풀어 놓는 소설적 구조에 놀랐다.
  『달의 영휴』는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이어져 있다. 오사나이는 두 모녀를 만나기 위해 도쿄 스테이션 호텔로 향한다. 자신을 보고도 거리낌 없이 말을 걸어오는 루리라는 이름의 소녀와 그녀의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건네준다. 오사나이의 과거의 시간들이 펼쳐지면서 루리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들의 믿기 힘든 일들이 펼쳐진다.
  우리 모두는 죽어본 적이 없다. 죽어본 경험이 없는 우리는 죽은 후의 일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 소설은 죽은 다음에 인간은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으로 이야기들이 쌓여간다. 첫 번째 이야기의 시작은 미스미의 연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다. 비 오는 출근길 그는 가게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여자를 발견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티셔츠를 내밀어 머리를 닦게 해준다. 사랑은 이렇게 시작한다. 의미 없는 일들이 모든 의미로 다가온다. 미스미는 한 번 더 그녀를 만날 것을 기대한다. 영화관에서 재회한 그들은 이름을 주고받는다. 그녀의 이름은 루리. ‘루리(瑠璃)도 하리(瑠璃)도 빛을 비추면 빛난다’의 루리의, 한자를 쓴다. 이 말은 이후에 그들이 재회하는데 단서가 된다.
  그들은 이름을 알고 다시 한 번 만나서 영화를 보고 밤의 길을 걷는다. 사랑은 시작되지만 그들 앞에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놓여 있다. 루리 씨는 남편이 있는 유부녀이고 미스미는 대학 신입생이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진 않지만 미스미에게 그들이 가지는 만남의 어려움을 우회적으로 돌려 표현한다. 미스미가 자신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면 시험 삼아 죽어 볼 것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좀 더 젊은 미인으로 태어나 새로운 만남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 후 루리 씨는 지하철에서 사고에 휘말려 죽게 된다. 이후 미스미는 방황과 좌절의 시간을 보낸다.
  도쿄 호텔로 두 모녀를 만난 오사나이 씨는 오래전 자신의 아내와 딸을 사고로 잃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딸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갑작스러운 고열에 시달린다. 아내는 딸이 아프고 나서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오사나이 씨에게 말하지만 그는 흘려듣는다. 루리라는 이름을 가진 그 딸은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역에 가기도 한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자유롭게 여행을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루리에게 해준다. 터널에서 죽음을 맞은 두 모녀는 다른 지역으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오사나이 씨 앞에 시간이 흘러 미스미가 찾아오고 젊은 날 자신의 연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사나이 씨의 딸과 이름이 같은 연인의 이야기를. 루리 씨는 죽었지만 같은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여자아이로 태어나 환생했다는 믿기 힘들 이야기와 함께. 오사나이 씨의 딸 루리는 열병을 앓고 나서 인형에게 미스미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이의 눈빛이 아닌 어른의 눈으로 자신을 본다는 아내의 이야기로 떠올린다. 어린아이 답지 않은 행동들을 보였던 것들도 기억해 낸다. 오사나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아이의 이름도 루리. 전생의 기억들을 가지고 태어난 루리들은 병을 앓고 나서 젊은 날 만났던 미스미를 만나기 위해 가출을 감행한다. 삼대에 걸쳐 태어난 루리들은 모두 젊은 날 루리 씨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첫번째와 두번째의 루리는 죽었고 마지막일지 모르는 루리가 오사나이 씨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마지막으로 흘러 갈수록 이 소설의 핵심은 죽어서도 이루고 싶은 사랑의 집착을 달의 환생에 빗대어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것에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쌓여 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끄집어낼수록 진부한 주제와 소재를 치밀한 구조와 구성으로 풀어낸 소설이라는 것에 놀라움을 더한다. 읽은 재미를 선사하면서 사랑의 이면을, 우리는 결코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을, 『달의 영휴』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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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쓰여 있었다 - 어렸을 적이라는 말은 아직 쓰고 싶지 않아, 일기에는…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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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다 미리의 산문집 『그렇게 쓰여 있었다』의 서문은 '이 세상에는 자신을 닮은 사람이 최소한 세 명은 있다고 한다'로 시작한다. 과연 그럴까 하고 생각해보니 마스다 미리처럼 나와 닮은 사람으로는 엄마가 떠오른다. 말하는 것과 생활 방식이 똑같다. 그리고 카카오 프렌즈의 라이언이 생각난다. 안경 쓴 라이언은 나랑 정말 닮았다. 생각이 없을 것 같은 멍한 표정이 비슷하다고 친구가 말해주었다. 자세히 보니 닮았다! 오래 보고 자세히 봐야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이 진짜다고 느낀다. 하나를 더 찾아야 하는데 이건 다시 고민해봐야겠다. 
  

곳곳에 나를 닮은 사람과 물체가 존재하는 모양인데, 그 수가 세 명 또는 세 개를 훌쩍 넘는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다. 세계 어디를 찾아봐도 진짜 나는 하나인 것이다.


  비슷한 나들은 많지만 정작 나라는 인간은 한 명뿐인 것이다. 닮은 것들이 나를 만들어간다. 이 세계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고 좋아라고 느끼면 그만이다. 왜 좋아하고 왜 집착하는지 이유를 물어온다면 담백한 대답을 해줄 수가 없다. 나와 닮은 것들을 찾아가는 여행,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이유들의 대답을 듣는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글과 만화를 읽는 동안 나는 좋아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기쁘다.
  그녀가 좋아하는 달고 예쁜 모양의 디저트를 알아가는 것이 즐겁고 운동화계의 롤스로이스는 무엇인지 확인하고 위시리스트에 담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일기장처럼 가벼운 책, 『그렇게 쓰여 있었다』를 읽으며 마스다 미리의 일상과 시간들을 한국의 독자인 나는 나라와 언어를 초월해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일기를 매일 쓴다. 사소해서 나만이 볼 수 있고 나만이 쓸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고등학교 때 쓴 일기장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가끔 들춰보면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진다.


"'어렸을 적'이라는 말은 아직 쓰고 싶지 않아."
내 일기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 말을 쓰게 되면, 어른의 세계로 밀려날 것 같아 두려웠던 걸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교복 입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체육복을 입고 등교했던 비뚤어진 나. 정문 앞에 계신 선생님을 모른 척할 수 없어 불량한 표정이어도 인사는 열심히 했던 나. 어른의 세계로 먼저 들어 싶어 또래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겉돌기만 했던 나. 일기장에는 그때의 불안과 반항이 쓰여 있었다. 아이의 세계에서 어른의 세계로 밀려나도록 스스로 등을 떠밀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불안정해서 지구의 자전축만큼이나 모나고 기울어진 시간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른이 돼서도 감정의 축은 기울어져 있으나 그때보다는 덜하다. 누군가는 아이의 시간을 추억하기도 하는데 나로서는 어른이 된 지금이 더 소중하다. 알고 있다. 불안하고 어두워도 아이의 시간을 거쳤기 때문에 밝고 환한 어른으로 살게 된 것이라고. 지나고 나면 추억이고 그리운 것이라고. 
  어른의 세계에서 시간은 빠르다. 1월 1일과 12월 31일은 가깝고 나이의 앞자리 수는 금방 변한다. 일기장을 빼곡히 쓰면서 우울을 달랬던 아이는 책을 읽으며 나를 스쳐 갔을지도 모를 고통을 잊어버리는 어른으로 바뀌어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면 됐다고 가난한 나를 위로한다. 


"저기, 립스틱을 사러 왔는데요. 좀 골라주실래요?"
밝게, 그리고 정중하게 말한다. 상대방이 친절하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타인에게는 과하게 친절하다. 모르는 사람일수록 더욱 친절하게 말한다. 굽신거린다고 비아냥을 듣기도 하지만 마스다 미리의 말처럼 상대방이 친절하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다. 백화점 매장에 가서 옷이 아닌 화장품을 사기로 한 그녀는 점원의 친절한 응대에 화장품 세트를 사버리고 만다. 물건을 팔기 위한 친절이지만 상대가 나에게 진심을 다하고 있구나 생각하면 수고로움까지 생각해 나 역시 물건을 모두 사버린다, 적정한 가격에 한해서라면. '어른다운 쇼핑'을 한 그녀는 '요즘 스타일'의 화장을 한 얼굴로 집에 간다. 
  대도시의 큰 백화점에 간 적이 있다. 사람들과 물건들로 빼곡한 그곳에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너무 광활하고 넓어서 내가 과연 물건을 골라 살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압도당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반짝이는 물건과 향기와 열심히 들여다봐야 헤아릴 수 있는 가격에 대해. '어른다운 쇼핑'은 하지 못하고 아이보다는 큰 청소년다운 쇼핑을 했다. 전부 사 버리기엔 돌아갈 길이 걱정이기도 했고 계획하지 않은 지출을 하기엔 지갑의 상태는 어른답지 못했다. 친절한 응대에 사야 할 것들은 샀다. 집으로 돌아와 정리를 하고 집 앞 마트에 가서 익숙한 배치에 놓인 물건들을 보며 편안함을 느꼈다. 
  마스다 미리의 작업실에는 두 개의 책상이 놓여 있다. 『그렇게 쓰여 있었다』의 에필로그에 그렇게 쓰여 있다. 남쪽에는 글을 쓰는 책상, 북쪽에는 만화를 그리는 책상. 두 개의 책상에서 왔다 갔다 하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하루를 상상한다. 우리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는 닮은 점들이 놓여 있다. 나에게도 서랍이 세 개 달린 가로 1800짜리 책상이 있다. 그림 실력이 형편없는 나는 주로 이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바닥에는 언제든 누워 잠들 수 있는 이불이 깔려 있다. 나와 닮은 것 중의 마지막 하나는 마스다 미리의 글과 일상이다. 그녀의 일상과 나의 일상이 만나 세계는 우리와 닮은 것들로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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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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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다. 한국 소설을 읽으면서 읽고 나면 책이 언제 출판되었는지 확인을 한다. 출판된 날과 책이 쓰이고 있는 시기는 다르겠지만 확인을 하고 나면 위로가 된다. 예전에는 그냥 읽었다. 읽고 잠깐 생각하거나 아무 생각 없었다. 뭐 그런 날들이었다. 뉴스는 잘 보지 않았다. 정신 건강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 살고 있었다. 현실의 이야기는 들여다보지 않았으며 허구 속 세상으로 도피했다. 소설을 읽고 인물들의 생각과 상황들로 잠깐 현실의 나의 지금을 대입해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세상은 너무 빠르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멍한 얼굴로 길을 걷고 있으면 남녀 둘이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곤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두 여자가 나에게 팸플릿을 건네곤 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쉽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좋은 곳이 있으니 같이 가서 말씀을 듣자는 것이었다. 지친 영혼을 달래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좋은 곳이 있으면 댁들이나 가시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으로 거절의 뜻을 대신했다.
  나는 남을 잘 믿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길을 걷는데 누군가 다가오면 무섭다. 길을 물어보는 사소한 일인데도 긴장을 한다. 여건이 된다면 누워서 밖에 나가지 않고 책 읽고 낮잠 자다가 일어나 밥 먹고 다시 자고 싶다. 택배 받느라 간간이 문이 열리고 바깥공기 잠깐 집으로 들여보내면 좋겠다. 나의 세계에는 심심하고 무료해서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영향을 끼칠 일이 없다, 고 믿는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신나게 읽었다. 읽다가 이런 문장을 만났다. 
 
  그날 보충수업이 있었던 아이들, 특히 옥상에 있었던 아이들은 뭔가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음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인표는 학부모들이 항의해 올 경우, 강바람을 타고 강 건너 공간에서 환각 유발 물질이 날아온 것 같다고 변명할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학생들부터 잘도 믿어 주었다. 고등학생이면 벌써 다 큰 것 같지만 그래도 비이성적인 상황에서 어른들을 그만큼 잘 믿기도 힘들다. 믿지 말아야 할 어른들까지 철석같이 믿어 버린다. 아직 남아 있는 순수한 표정과 열려있는 눈동자가 선생님들을 버텨 내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


  산 사람이 풍기는 에로 에너지를 감지하고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보건교사 안은영의 신기한 능력을 다룬 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읽다가 멈추었다. 멈추고 언제 책이 출판되었는지 봤다. 2015년 12월 7일. 숫자 몇 개가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스스로 신이 나서 썼는지 고행하면서 썼는지 예측이 될 때가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전자에 해당한다. 죽은 사람을 보고 산 사람에게 붙은 이상한 영혼을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으로 해치우는 안은영, 별명은 아는 형. 기괴한 것들을 본다고 해서 우울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산 사람들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죽은 영혼들을 장난감 칼로 흩뜨려 놓는다. 원어민 교사 메켄지가 학교에 들어와 정체불명의 씨앗을 심고 한문 선생 홍인표의 강력한 보호 기운을 가져가려고 하자 맨발로 뛰어와 그를 무찌른다.
  놀이터에 가면 머리에 피가 고인 아이가 맨 먼저 달려와 안은영을 반긴다. 아이들은 서로를 재빠르게 파악해 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도 은영은 혼잣말을 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아이로 통했다. 머리에 피가 고인 아이는 죽은 아이이고 은영이 다 커서도 아파트 놀이터에 가면 그 자리에 있다. 과자를 사서 그 아이가 먹게 한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혼자 지냈다. 김강선은 혼자 지내는 안은영과 짝꿍이다. 각자 문제적 시간을 지내면서 재수 없는 것들이 계속 앉으면서 서로의 결핍을 파악해 간다. 영혼 퇴치를 위해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이라는 그럴듯한 연장을 쥐여준 것도 김강선이었다. 아무 무기도 없이 앉아 있는 아이의 등을 털어내는 것보다 날아오는 불온한 영혼 덩어리 때문에 다치는 것보다 도구를 쓰면서 코믹 발랄로 장르를 바꾸라고 조언해 주는 것도 김강선이었다. 
  사립 학교 보건 선생으로 자리 잡은 뒤 학교에 굴러들어오는 불온한 영혼 덩어리를 퇴치하면서 한문 선생 홍인표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코믹 발랄 로맨스로 바뀐다. 짝사랑을 이어준다던가 전학생 혜민이 옴 잡이로 살지 않고 매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환생을 경험하지 않게 해준다. 학교 지하실에 묻혀 있는 짝사랑에 실패한 영혼을 풀어주고 인표가 잘못 만난 여자가 묻어둔 사악한 기운을 몰아낸다. 학교를 지켜주는 보건교사 안은영은 학교 아이들을 지켜주는 -아는 사람만 아는 그 아는 사람은 한문 선생 홍인표 뿐이지만- 아는 형으로 활약을 한다.
  학교는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으로 이루어져있다. 언제가 떠나는 아이들은 잠깐 머물려 있는 장소로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긋지긋해 하기도 하고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여기며 모험을 감행하는 아이들도 있다. 교실에서 자는 아이들도 교실에서 혼자 있는 아이들도 보건교사 아는 형의 눈에는 지켜줘야 할 아이들이다. 
  작가의 말을 읽고 내 예상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정세랑은 이 소설을 오로지 자신의 쾌감을 위해 썼다고 한다. 작가가 신나게 쓰면 읽는 독자도 신난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재밌다. 한문 선생 홍인표의 보호막을 슬쩍 훔쳐 오고 싶고 영혼과 싸우는 안은영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허리 디스크를 때려주는 안은영. 나의 그 사람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에너지를 풍기며 옆에 지내는지 바스러져 사라져 갔는지 물어 싶은 아는 형.
  작가는 학교에서 어둡거나 복도 끝에 있는 보건실에서 약을 처방해주거나 아이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보건교사의 존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는 추측을 해본다. 아는 형이라 불리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안은영 선생이 그 아이들에게 붙어 있던 죽음의 기운들을 비비탄 총으로 없애버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 배를 타기 전 홍인표 선생의 손을 잡고 빵 빵 총을 쏘면서 안개를 걷히고 불꽃놀이를 보며 좋아했을 뒷이야기를 숨겨 놓았을 것이라고 추리를 한다. 아이들은 그런 상황에서 방송에서 나오는 어른들의 말을 믿었다. 말 잘 듣고 착하다는 이유 때문에 돌아오지 못했다. 아는 형의 활약이 필요했고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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