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읽는 시
김남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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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여권을 꺼낸다. 알고 있다. 내가 가진 여권으로는 어디로든 갈 수 없다는 것을.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구한 기념으로 만든 여권이었다. 나 취직했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기도 애매한 곳에 일자리를 얻고 마음이 허전했다. 생활비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부랴부랴 구한 곳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해야 하는 곳. 교통비가 한 달 집세보다 많이 나왔다. 취업 기념 파티 대신 사진관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시청에 가서 여권을 만들었다. 적금을 부어 여행을 가야지. 가장 긴 유효 기간을 가진 여권을 발급받았다. 

  기간 만료일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십 년 동안 나는 아무 데도 가지 못했다. 가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싶지만 가지 못했다는 것이 맞다.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고도 이불 속에 웅크리고 집 바깥을 나가지 않았다. 현실은 벅찼고 감당해야 할 미래의 일들이 나를 아둔하게 만들었다. 해야 할 말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벽에 붙은 세계 지도를 한동안 쳐다보곤 했다. 여행 가방을 꾸리고 비행기 표와 숙박 시설을 예약하는 나를 상상하기도 했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여행기를 읽었다. 그 책들 안에는 북반구의 오로라가 펼쳐지고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낯선 이방인과 나누는 대화가 실려 있었다. 도둑 맞을까 허벅지에 돈을 숨기고 국경을 지날 때 총을 찬 군인들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던 순간들이 들어 있었다. 초점이 흔들린 풍경들을 바라보며 나는 열패감에 시달렸지만 글자로 그려지는 여행의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일상을 견뎠다. 달은 늘 우리에게 같은 면만 보여준다. 지구인인 우리는 달의 뒷면을 목격할 수 없다. 달은 공전과 자전을 같이한다. 지구라는 별을 바라보며 달은 혼자 하루와 일 년을 돈다. 나는 달이다. 나는 묵묵히 내일을 바라보며 일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며 돌고 있다. 

  일 년을 일하지 않고 집에서만 지낸 적이 있다. 가까운 일본을 가볼까.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유럽으로 떠나볼까. 고민했지만 가지고 있는 돈을 아껴서 쉴 수 있을 때까지 쉬기로 했다. 낯선 곳에 가서 길을 헤맬 용기도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외로움을 맛볼 자신도 없었다. 책상 서랍 속에 숨겨둔 여권의 기한은 줄어들고 여행기는 쌓여 갔다. 국경을 넘는 게 생각보다 쉬웠다고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며 스스로를 반성했다는 여행기의 기록으로 떠나지 못하는 나를 다독였다. 

  여름휴가가 다가오면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 싶어서 그들의 대화에 끼고 싶어서 제주도로 놀러 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꺼낼 때 나는 제주도에 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항공사 사이트에 들어가 회원 가입을 하고 날짜에 맞추어 비행기 시각을 알아봤다. 제주도 지도를 신청했다.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 휴가 계획을 듣고 행선지를 이야기 하는 그 대화 속에서 함께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러 번 일을 옮겨 다니는 동안 나는 말수가 줄어들고 관계라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 내가 한 말들과 행동들이 나를 향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상황들을 반복적으로 겪었다. 그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면서 지냈다. 표정을 숨길 수 없어 화장실에 들어가 오래 앉아 있었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 제주도라도 가자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그 해 여름 집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새로 나온 책들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 책은 그렇게 언제나 내 거짓말을 받아주고 허풍을 들어주었다. 가지 못한 길들이 책 안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며 나는 자유를 느꼈다. 물리적인 거리를 가늠하지 않아도 되고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책 안의 길 위에서 나는 당신과 만날 수 있었다. 

  김남희의 책 『길 위에서 만나다』는 시가 우리 삶에서 어떤 화학 작용들을 불러오는지 생의 순간들마다 어떤 얼굴로 우리를 길 위로 데리고 가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시를 읽으며 작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길에 오를 때 작가의 여행 가방에는 시집이 들어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시와 편지들을 공책에 적어 보냈다. 지평선 밖에 볼 수 없는 길 위에서 모래바람 밖에는 느낄 수 없는 길 안에서 여행자는 시를 읽으며 이 별에서의 여행을 계속한다. 노래는 시가 되어 사랑이 남긴 이별의 고통을 잊게 해주고 혼자 먹는 밥상을 위로해준다. 내 방 여행자인 나는 상상한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순한 얼굴과 불면으로 뒤척일 지구 반대편에서 여행자가 느꼈을 고독의 무게를. 

  『길 위에서 만나다』는 특별한 여행기이다. 한 편의 시와 여행에서 느낀 생각들이 정갈한 언어로 쓰인 이 여행기는 지구라는 푸른 행성의 반짝임을 활자 속에서 느끼게 해준다. 시집에 밑줄을 긋고 마음에 닿는 문장들이 나오면 여백에 옮겨 적었다.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단어들이 나를 고통과 환희의 골목으로 데려가 주었다. 시를 이해하기 보다 오독했다. 시를 쓰기에 나는 지극히 산문적이고 모자랐다. 직관력 대신 지구력만 좋은 사람이었다. 

  허수경의 시 「혼자 가는 먼 집」을 읽으면 당신 이라는 말 다음에 나오는 킥킥 때문에, 시인의 출생지 진주 남강의 불빛을 걸으며 손을 잡았던 기억 때문에, 나는 환해진다.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어 나는 당신이라는 행성을 꾸준한 주기로 돌고 있다. 나의 앞면은 당신이 볼 수 있는 최대치이다. 그 앞면에 쓰인 나의 이야기를 당신이 읽어주길 바라면서 시를 읽고 습작을 했다. '그러나 킥킥 당신'은 나의 뒷면으로 다가온 유일한 탐사선이다. 뒷면에 쓰인 장황하고 비문으로 얼룩진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준다. '무를 수도 없는 참혹' 앞에 선 우리는 길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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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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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혁의 소설들을 좋아한다. 『펭귄뉴스』부터 시작해서 『가짜 팔로 하는 포옹』까지 출간된 소설들을 모두 사서 읽었다. 산문집은 더 좋아한다. 소설가들의 산문집이란 허구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들려주는 내밀한 수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가 들려주는 생활의 이야기들, 즐겨 듣는 음악과 감명 깊게 읽은 책과 본 영화들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산문집에서 찾고자 한다. 『뭐라도 되겠지』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지은 제목 같기도 해서 좋아한다. 『모든 게 노래』는 제목처럼 책의 빛깔이 노랗다. 세상 모든 게 노래, 그래 어떤 날은 세상이 노랗게만 보일 때가 있다. 

  『좀비들』은 두 번 읽었다. 종이책으로 읽고 전자책으로도 읽었다. 소설 속 인물인 뚱보130을 좋아한다. 한 작가에 대한 글을 쓰면서 좋아한다고 여러 번 쓸 수 있어서 좋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별게 있나.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이 나올 때 서점사에서 주는 파란 공책의 굿즈를 받았다. 글을,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응원이 담긴 파란 공책. 필기도구와 좋아하는 소설들이 소개되어 있었던 공책. 중혁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한 방법들을 몇 가지 아주 조금 제시해 놓고 (더 알면 다친 다는 듯) 이 정도 알려줬으니 당신도 한 번 써보라는 듯 줄 조차 없는 백지들을 남겨 놓았다. 

  써보라고, 인물을 만들고 줄거리를 생각하고 손에 쥐기만 하면 술술 써질 것 같은 필기도구들을 알려줬다. 그 공책에 이야기를 적었으면 좋았겠지만 한동안 책꽂이에 꽂아두고 다른 책들을 읽고 딴생각에 잠기곤 했다. 파란 공책에서 못다 한 중혁 작가의 창작의 비기와 연장들, 시험을 풀듯 다음 대화를 생각해야 하는 문제들이 담긴 창작서가 나왔다. 역시 제목도 무한 긍정과 초사이언적인 희망이 담겨 있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 한때 거실 곳곳에 걸려 있던 하면 된다 라는 가훈처럼, 뭐라는 거야, 하면 된다니 차라리 라면 된다가 더 웃기겠군 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제목으로 오인받을 수도 있는 제목으로 창작서를 내놓을 수 있는 대체 불가의 당당함을 좋아한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문장들이 거슬린다. 작가는 『무엇이든 쓰게 된다』에서는 한 문장 안에 같은 단어들이 들어간 문장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뿐이다. 이 책은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고 구성과 인물을 만드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 세세하게 나열하지 않는다. 다른 소설 쓰기의 창작서와는 다르게 이 책은 작가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도구들로 시작한다. 연필과 독서대, 모니터, 공책과 메모롤, 사용했던 컴퓨터들의 역사로 출발한다. 근사하다. 나랑 비슷하다. 내 책상 서랍에도 연필과 펜들이 색깔별로 가득 들어 있다. 색이 연하고 곧 품절될 것 같아서 형광펜은 같은 색으로 세 개에서 네 개씩. 펜텔 그래프와 유니 샤프, 누를 때마다 샤프심이 쓰기 좋게 나온다는 구루토가, 스테들러는 당연히 샤프와 연필이 같이 있다. 수첩과 포스트잇, 핸디 테이프, 메모지, 공책은 서랍과 책꽂이를 점령했다.

  쓴다. 쓸 것이다. 언젠가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나는 쓰고 싶은 사람이니 당연히 쓸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글쓰기 연장들을 사서 모았다.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샀다. 읽을 것이다. 샀는데 계속 신간이 나온다. 또 산다. 책이 쌓이고 있다. 어느 순간 책이 쌓여 가는 걸 즐긴다. 머리맡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이 놓여 있다. 겨울이라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쳐도 바람이 들어온다. 도서관 책들은 커튼을 눌러줘서 바람이 들어오는 걸 막아준다. 책의 쓸모를 발견한 순간이다. 쓰고 읽는다. 읽고 쓴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여느 창작서와는 다르다. 일단 재미있다. 작가의 연장들을 구경하는 재미, 글쓰기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작가라는 사람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생각하게 하는 재미, 글쓰기 책인데 실전 그림 그리기라는 부분이 있어 그림을 못 그려도 그려보라고 부추겨서 우스운 그림을 그리게 만드는 재미, 수능 영역처럼 만들어진 대화 완전정복 문제를 풀면서 역시 나는 찍기도 못하구나 답 사이로 막 피해 가는 멍청함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재미. 

  소설을 쓸 것이라고 잘난 척만 해댔지 맞춤법, 비문 없이 문장 쓰기, 문법, 인물 묘사, 구성 짜기, 문단 나누기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게 문제다. 알지 못하면 열심히 배우면 되는데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배우지 않는다.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라고 어물쩍 넘기는 것이다. 대신 나는 많이 읽잖아. 대가들이 그랬어, 무조건 읽으라고. 열심히는 읽는데 머리를 쓰지 않으니 고급 기술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작가들이 쓰는 창작서들을 읽곤 했는데 읽고 나서는 잊어버렸다. 잊고 비문을 써대고 마음대로 문단을 나누고 묘사는 귀찮아서 진술로만 썼다.

  '창작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마음과 창작의 비밀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 사이의 에너지가 글을 쓰려는 동력이 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라는 문장을 읽고 감동했다. 소설 작법서들을 읽으며 알고 싶었던 창작의 비밀을 무식한 나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소설을 못 쓰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 따윈 몰라도 된다, 쓰고 싶은 대로 쓰는 현실이 절망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무엇이든 쓰게 된다』에서 확인했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의 예언은 맞았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를 읽고 나는 나만 즐거운 이 글을 썼다. 남들이 읽어주지 않아도 전기 낭비를 하고 있어도 차라리 이러고 있을 시간에 인기 드라마라도 보지 그래라는 핀잔을 들어도 쓰고 싶은 문장들이 있는 것이다. 문장들은 대책 없는 낙관적인 나의 미래에 주문을 걸어온다. 뭐라도 되겠지 그러니까 무엇이든 쓰게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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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설레는 일, 그런 거 없습니다
쓰무라 기쿠코 지음, 박정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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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가 지금인가' 하고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한 킨크스의 곡에 집중하며 눈을 감는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던 걸까. 운동선수였을지도 만화가였을지도 모르고 파일럿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샐러리맨이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항의 전화를 받기도 하고, 얌전히 있으면 계속해서 일을 떠맡기도 하고 무엇보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것이 괴롭지만 그래도 그렇게 나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을 먹을 수 있고, 제법 좋은 추억도 있고, 새해 연휴에 만날 친구도 있다. 그런 거야 어렸을 때와 거의 똑같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게 뭐가 나쁜가.


  쓰무라 기쿠코의 소설 『설레는 일, 그런 거 없습니다』의 풍경들은 소설의 제목처럼 설레는 일들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 만큼 평범한 모습이다. 아침 알람을 1분 간격으로 맞춰 놓고도 제때 일어나지 못해서 밥을 챙겨 먹지 못하고 출근하는 모습, 업무 미팅이 끝나고도 일찍 회사에 들어가기 싫어 카레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는 모습. 어제까지 친하게 지냈던 직장 동료가 오늘은 냉담하게 변한 얼굴로 이야기마다 태클을 걸어오는 걸 견뎌야 하는 일들에 설레는 일이 어디에 있을까. 오히려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으로 심장이 두근대는 일들뿐이다.
  디자인 회사에서 근무하는 나카코는 자신의 업무가 아닌 일이 맡겨질 때에도 아무 말없이 일을 해낸다. 두 달 전에는 십 년 가까이 사귄 애인과 헤어졌다. 프리랜서로 맛집 소개나 최신 영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서른한 살, 그녀는 자신의 일상을 둘러싼 일들이 버겁게 느껴진다. 회사 동료들 셋과는 점심을 함께 먹는다. 최근 동료들 중 한 명이 유독 자신의 말이나 행동에 시비를 거는 느낌이 들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막막하다.
  사토는 나카세가와 건축회사의 도쿄 지점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오사카 출신이지만 회사를 도쿄에서 다니고 있다. 혼자 생활하고 있으며 회사에서 그는 업무를 충실히 하고 남이 하기 싫은 일도 묵묵히 해내는 타입이다. 부장의 지시로 결원이 생긴 오사카 지점으로 항의 없이 내려가기도 한다. 혼자 사는 엄마의 집에 이삿짐을 부려 놓고 몇 달 째 풀지 않고 있다.
  나카코와 사토는 업무 미팅 때문에 만난다. 사토의 회사 안내서를 나카코가 대신 만들고 있다. 몇 가지 수정 사항들을 체크하고 두 사람은 이내 나이와 성이 같다는 것과 생일 역시 같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업무 때문에 만난 것이라 그 정도만 확인하고 헤어진다. 바로 회사에 들어가기 싫은 나카코는 카레집에 들러 점심을 먹는다. 그곳에서 방금 만난 사토를 우연처럼 다시 한 번 만나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주고받는다.
  소설은 이 두 남녀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도쿄에서 근무하는 사토가 할 수 없이 나카코가 있는 오사카로 내려오면서 이들의 만남이 성사되지는 않을까 가슴이 졸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하루를 견뎌낸다. 실제 쓰무라 기쿠코는 힘들게 취업을 해서 회사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다. 그곳에서 상사의 괴롭힘으로 10개월 정도를 일하고 그만두었다고 작가 소개에 쓰여 있다. 다시 재취업을 위해 교육을 받고 십 년 넘게 회사에 근무했다. 아쿠타가와상을 받고도 작가는 회사에서 일했다. 회사 내에서 견뎌야 하는 수모와 압박을 생생하게 알고 있는 작가답게 소설 『설레는 일, 그런 거 없습니다』에서 그려내는 인물들의 모습은 현실적이다.
  두 남녀가 회사에서 겪어내는 생활의 모습과 감정들을 꼼꼼하고 세밀하게 담아냈다. 사토는 자신이 맡고 있는 건축 현장에서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항의 전화를 받는다. 항의 그 자체를 즐기는 듯한 남자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고 이야기한다. 나카코는 프리스쿨의 신입생 모집 팸플릿 작업을 의뢰받아 일을 하면서 계속되는 수정 사항 요구에 지쳐간다. 수정 사항에 맞춰서 다시 보내면 장문의 요구 사항이 덧붙어서 메일이 온다. 감정들을 다스릴 때까지 라커룸에 들어가 음악을 듣는다. 여자 친구들을 대부분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나카코 자신의 일을 비하하는 분위기의 말을 하는 친구의 대화 때문에 집에 돌아와 마음이 울적해지기도 한다.
  『설레는 일, 그런 거 없습니다』에는 한 편의 소설이 더 실려 있다. 지하 공사 현장에서 한 달 넘게 일하면서 우울증에 걸릴 것 같은 사카마키가 등장하는 「오노우에 씨의 부재」, 이 소설은 한 회사에서 근무하는 오노우에 씨의 갑작스러운 부재의 이유를 그다지 친하지 않은 동료들이 모여 궁금해하고 추측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회사에서는 필요한 인간과 필요하지 않아 해고의 명단에 올려야 하는 인간의 두 부류로 나뉜다. 오노우에 씨는 고졸 학력이지만 회사에서 자신만의 기준으로 실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그가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있어 해고 명단에 오른 것인가 과연 회사는 대졸 그것도 유명한 대학 출신들을 승진 시켜 오노우에 씨를 내 보낼 것인가 사카마키와 동료들은 걱정을 한다. 그들의 걱정과 불안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인가.
  회사의 반대말은 퇴사가 아닐까 할 정도로 퇴사에 관련된 소설과 에세이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 소설은 결국 회사를 다니는 우리들은 꿈을 포기한 자들이 아닌 우연한 만남이 쌓여 기분 좋은 인연을 시작하고 후배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알려주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행복한 하루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위로를 주고 있다. 어렸을 적 꿈들의 자리에 비록 샐러리맨이 없었어도 지금의 나는 상사가 주는 일을 떠맡기도 하고 항의 전화와 수정 사항이 담긴 장문의 메일을 보내 그 속에 담긴 숨은 뜻을 짐작해내야 하지만 ‘지금까지 먹어본 기억이 없어도, 입에 넣는 순간 몸속에 지나온 역사가 새겨지는 맛’을 찾아내어 그 혹은 그녀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설레는 일은 그것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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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말더듬이 선생님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수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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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이다,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시게마츠 기요시의 『말더듬이 선생님』을 읽고 든 생각이었다. 표지에 자리 잡은 책 소개 문구도 '다행이다'이다. 이 책은 십 대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도 읽으면서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마음을 다독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서쪽으로만 향해 있는 칠판을 일제히 바라보면서 공부하라는 말에 의문조차 품지 않았던 시간. 모두를 위해서 나를 숨겨야 했던 교실의 분위기들. 모두와 다른 것이 이상한 것이라 여겨져 은밀한 추방을 당해야 했던 순간들이 『말더듬이 선생님』에 담겨 있다.
  『말더듬이 선생님』에는 총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중학교 교실이 배경으로 비상근 선생님으로 근무하는 무라우치 선생님이 주인공이다. 아니다. 주인공은 무라우치 선생님이 곁에 있어주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진로를 찾으려 하고 모두 똑같은 선택에 대해 반감을 가지면서 세상을 향한 고요한 목소리를 낸다. 그 목소리는 작고 희미해서 모두에게 들리지 않는다. 무라우치 선생님만이 아이들의 고요한 외침에 응답한다. 무라우치 선생님은 말을 심하게 더듬는다. 말을 더듬는 사람이 어떻게 선생님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지만 그 자신은 언제부터 말을 더듬었는지 기억에 없다.
  처음 만난 아이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말을 심하게 더듬는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말을 더듬기 때문에 자신은 중요한 말만을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대놓고 선생님을 무시하는 표정을 짓지만 선생님은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진로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 자전거 사고를 당한 친구를 도와주기 위해 벽보를 붙이는 아이, 교실에서만 말을 하지 못해 손수건을 꼭 쥐고 있는 아이, 반 아이를 괴롭혀 그 자신이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곁으로 다가간다. 아이들과 대화할 때도 말을 심하게 더듬지만 ‘중요한 말’을 할 때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이야기를 한다.
  성이 아니라 이름을 부르면서도 말을 더듬지만 이름이 불린 아이는 어른이 돼서도 무라우치 선생님을 잊지 않는다. 무라우치 선생님은 학교에 임시직으로 짧은 기간 동안 수업을 하지만 만나는 아이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선생님이다. 말을 더듬기 때문에 판서 글씨를 똑바로 쓰고 잘 정리된 프린트 물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중에는 입시 성적 때문에 무라우치 선생님의 수업이 피해가 된다는 학생이 있어 다음날 학교를 떠나기도 하지만 선생님은 자신의 수업에 최선을 다한다. ‘중요한 것, 곁에 있어주는 것, 외톨이가 아닌 것’이라는 말을 칠판에 쓰고 선생님을 존경하는 아이가 내는 그리운 소리를 들으며 교실을 떠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학생이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거짓말은 나쁜 게 아니라 쓸쓸한 것이라는 말로 거짓말을 하는 학생의 슬픔을 알아준다. 무라우치 선생님이 쓸쓸하다는 단어를 말할 때  말을 더듬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란한 개인기 같은 수업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의 말을 들어주며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무라우치 선생님은 학교를 옮길 때마다 만난 아이들에게 근사한 말을 장황하게 하는 대신 더듬거리는 말로 시집을 읽어보라는 것과 책임을 가지고 잘못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말들을 들려준다. 방황하는 학생의 곁에 앉아서 학생이 질문을 던지거나 이야기를 할 때까지 곁에 있어준다.
  연하장을 보내온 학생에게는 교실 칠판이 어느 쪽에 있을까는 황당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학생이 새로운 답을 찾으면 즐거워한다. 모두 똑같을 필요는 없다고 말을 잘하지 못해도 자신의 생각을 말로써 완벽하게 담아낼 수 없다고 해도 그건 나쁜 일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외톨이가 둘 있으면 그건 이미 외톨이가 아니라고도 이야기한다. 외톨이를 알아보고 말을 걸고 곁에 있어주는 것, 무라우치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유다. 말을 심하게 더듬어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아이들 곁에서 문제를 알아봐 주고 함께 고민해 준다.
  나 역시 말을 더듬는다. 발음이 희미해서 하려는 말과는 다른 말이 되어 사람들을 웃기거나 당황하게 한다. 중요한 말이 있어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래도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은 안다. 어떤 마음을 담아 말을 했는지. 우리는 모두 웃을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말의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무라우치 선생님도 중요한 말은 칠판에 써서 아이들에게 진심을 보여주었다. 시게마츠 기요시를 알아서 다행이다. 그의 작품들이 한국에 번역되어 있어서 다행이다. 아이와 어른의 세계는 다르지 않다. 한 세계를 살아내면서 겪는 고민과 아픔들을 말이 아닌 글로써 치유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오늘 찾아낸 다행한 일들이 내일과 모레를 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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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김동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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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순간들을 압축적으로 정리하면 김동영의 신작 에세이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의 목차처럼 '살아간다, 떠난다, 돌아온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살고 떠나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돌아오고 떠나고 살아간다로 순환된다. 삶의 모습은 세 가지의 말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지만 그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내면은 단순하지 않다. 매 순간 치열하고 복잡한 감정으로 생의 순간들을 마주 봐야 한다. 관계는 엉뚱한 곳에서 뒤틀리기도 하고 불안은 수시로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힌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내다가 긴장으로 묶인 끈이 풀리면 떠난다. 서랍에 넣어둔 여권을 챙기고 그동안 부었던 적금을 미련 없이 해약한다. 책상 앞에 붙여둔 세계지도를 물끄러미 보다가 비행기 표를 예약한다. 열어둔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햇살이 우리를 등 떠밀 때 떠나온다.


언젠가부터 나의 여행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이고, 조금 과장되게 의미를 부여한다면, 나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는 '돋보기'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통해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여행은 나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충실하게 살아가기를 이행한 우리는 여행을 떠나면서 돋보기를 얻는다. 여행이 피난이든 도피로 불리든 우리는 그곳에서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가진다. 처음에는 많은 곳들을 돌아다닌다. 여행자의 모습으로 박물관과 미술관을 간다. 사람으로 가득한 곳에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언뜻 보기도 하면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담고 얻으려고 한다. 카메라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그 안에 담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찍은 사진들 때문에 강도에게 맞서기도 하는 무모함을 여행지에서 보인다.
  어느 순간, 카메라로만 보던 풍경을 실제 눈으로 오래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서 무거운 카메라를 내려놓는다. 유명 관광지를 찾아가는 여행이 아닌 한 곳에 머무르면서 그곳의 풍경과 하나가 되어 있기로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 여행자이지만 어느 여행자의 카메라 안에서 우리는 풍경이 된다. 카페에 들어가 말하지 않아도 매일 먹는 메뉴를 가져다주는 호사를 누리고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한다.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 마한 질문을 던졌다가 이 여행이 끝나는 순간 생각해보겠다는 아름다운 대답을 듣기도 한다.
  나로부터 벗어나는 여행이 시작된다. 일상의 나와 여행에서의 나는 다르지 않다. 똑같은 모습의 나는 낯선 풍경이 주는 편안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뿐이다. 버스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나가야 하는 조급함이 사라진 세계에서 햇살과 햇빛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날 위해 울어줄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들을 볼 때마다 늘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들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까지는 잘 살아온 것 같아 마음 한구석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아이슬란드의 화산 폭발에 갇히고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과 변하지 않는 풍경으로 이어지는 길의 모습에서 돌아온 우리가 마주하는 건 다시 시작되는 살아가기다. 관계를 만들어가거나 이어가고 돌아온 집을 정리한다.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 최종 도착지가 있다는 것에 안도를 느낀다. 고양이들은 여전히 시큰둥하지만 산책길에서 혼자 앉아 있다가 마주한 녀석들은 돌아온 나를 반겨주는 것 같은 얼굴이다.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거야』 라는 책에서 시작한 십 년의 여행과 방황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생선 작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괜찮아라고. 그 자신이 무엇이 되기를 열망했고 좌절했던 순간들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응원의 말을 해줄 수 있었다. 작가의 꿈을 이루고 타인이 보기에 자유로운 사람으로 보이는 자신이 서먹해지는 순간을 이야기한다. 십 년 전에 떠났던 미국의 그 길 위로 그는 다시 떠났고 돌아왔다.
  내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울어줄 누군가를 생각하는 일상을 사는 것으로 이 별에서의 여행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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