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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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언니


  아빠의 편지를 읽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놀라고 놀라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어. 한참을 멍하니 편지만 들여다보았어. 아빠의 글씨가 자꾸 흐려졌어. 언니가 보내온 편지의 잉크가 흐려진 것처럼 글씨들은 차츰 내 눈에서 날아갔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아빠의 편지를 읽고 언니가 보낸 마지막 편지까지 읽고 나자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났구나, 언니와 나의 세계가 이렇게 하나로 합쳐졌구나를 깨달았어. 미안해, 언니. 

  언니와 똑같은 이름을 나에게 지어주고 떠난 언니. 우리가 같은 이름이라면 어디서든 어느 세계에서든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언니의 말은 반쯤은 맞고 반은 틀렸어. 2016년에 살고 있는 내가 쓴 편지를 1982년에 살고 있는 언니가 받은 것, 신기하고 이상하게 여겼지. 우리가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것도 하나의 우연이라 생각했잖아. 

  언니, 언니, 언니. 어떻게 미래와 과거의 시간이 일치해서 우리가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는지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우리의 시간은 언니가 마지막까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바람 때문에 이루어진 거야. '세상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특별한 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거야.' 언니와 나는 특별한 일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거야. 

  과거의 언니와 현재의 엄마의 조언대로 나는 독립을 하지 않기로 했어. 아빠는 점점 웃는 일이 많아지고 나와 함께 하려고 시간을 많이 준비하고 있기도 해. 이제 나도 알아. 그동안 아빠는 나를 보면서 힘들었을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했던 것이라는걸.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아빠가 나에게 무관심하고 미워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어. 과거의 아빠를 알고 있는 언니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지금의 아빠가 싫었어. 생일에 단 한 번도 미역국을 먹은 적도 선물을 사다 준 적도 없는 아빠. 그런 아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던 내가 밉기도 해. 언니는 말했지. '어쩌면 가족이라는 존재는 더 많이, 더 자주 이해해야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르지'라고. 

  가족이기 때문에 무조건 나를 지지해주고 사랑해주어야 한다는 오만이 나에게는 있었어. 내가 먼저 아빠를 이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아빠가 나를 더 많이 이해하기를 바랐던 걸까. 먼저 내가 손 내밀지 않으면서 나를 끌어안고 다독여주길 바란 걸까. 이제 나는 알아, 가족이기에 더 많은 이해와 대화와 사랑을 나눠야 한다는 것을. 2017년의 나는 이제 새로운 가족이 생겼어. 이름은 다정인데 다정하지 못한 일을 하는 새엄마와 함께 나는 잘 지내고 있어. 그동안 나 때문에 운전을 하지 못했던 아빠는 차를 한 대 사서 운전을 시작했어. 웃기지? 자동차 회사에 다니면서 운전도 안 하고 차도 없던 아빠가. 

  중2병이 끝나가고 있어. 그동안 내가 보낸 편지가 언니의 세계에 도착해 언니의 인생을 이상하게 비틀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에 빠져 있었어. 언니가 보내온 편지를 다시 읽으면서 잉크가 희미해진 그 편지들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언니는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어. 미래에서 날아온 나의 편지를 받았고 그런 나 때문에 아빠를 만난거지. 2000년이 시작되는 날 미래의 나는 언니 안으로 들어갔던 거잖아. 더 많이 기쁘고 더 많이 행복해, 지금은. 

 언니, 고마워. 끝까지 아빠를 사랑해주고 나를 지켜주어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나를 손 잡아주고 어깨를 감싸준 언니의 말들을 잊지 않을게. 우리가 사랑했다는 것. 이 세계에서 우리가 한 번은 만났다는 것을 알게 해주어서, 고마워. 여전히 이 세계는 바쁘고 복잡해. 아직 내게 꿈은 없어. 어른이 돼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 그래도 우리는 사랑하고 웃고 울며 이 세계를 지켜나가는 것으로 우리의 한 세계를 건너갈게.


사랑해,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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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
서미애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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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전화받는 것을 주저하는 남자가 있다. 전화가 울리기 전부터 남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벨 소리는 급하게 날아들고 남자는 통화 버튼을 쉽게 누르지 못한다. 한 번 끊어진 전화, 다시 울리고 남자는 천천히 전화기를 귀에 가져간다. 아내의 전화. 말이 없다. 사소한 부탁을 하는 것이겠지라고 생각하지만 평소 아내는 일하고 있는 시각에 전화를 잘 걸지 않는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바람 소리만 들려올 뿐 대답이 없다. 

  아내는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있다. 나를 왜 이렇게 구차하게 만드냐는 질문을 한다. 남편은 서둘러 집으로 뛰어간다. 말릴새도 없이 아내는 아파트 아래로 몸을 던진다. 식어가는 아내의 몸을 만지며 아내의 마지막 말을 쫓는다. 우리의 딸이 왜 죽어야 했는냐는 물음. 남자는 들려줄 말이 없다. 자신의 눈앞에서 몸을 던진 아내는 결국 목숨을 잃는다. 남편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삼 년 전, 별을 좋아하고 고양이 모양의 도자기 인형을 모으던 딸. 버킷 리스트에 가고 싶은 천문대를 적고 온 가족이 그곳으로 떠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진 딸. 그 딸이 죽고 아내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자, 최우진은 아내의 장례가 끝나고 자신의 양복에서 한 장의 종이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딸과 아내의 뒤를 따라 가려 했다. 그 종이 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진범은 따로 있다' 최우진은 그 문장을 읽자마자 딸의 죽음을 다시 밝혀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내가 마지막에 했던 우리 딸이 왜 죽어야 했는지 궁금하지 않냐는 질문의 답을 스스로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2014년 12월 22일.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그날에 딸 수정은 살해당했다. 

  만약으로 시작되는 가정으로 남자와 아내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살아갔다. 딸이 원하는 망원경을 사주었더라면, 늦은 시간인데 아이를 데리러 갔더라면, 그날 어두운 숲속에서 혼자 죽어갔을 아이를 상상하며 그들은 만약이라는 가정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처벌까지 받은 범인이 아닌 진짜 범인이 따로 있다는 그 말은 삼 년 전 사건의 새로운 진실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소설은 딸을 잃은 한 가장의 내면을 충실히 따라간다. 아내는 그 후에 자책과 후회로 암에 걸렸다.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은 아내는 어느 날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딸이 죽고 범인이 처벌을 받았지만 그 사건에는 숨겨진 것들이 존재했다. 우발적으로 벌인 범행이고 피의자가 청소년이라는 이유들로 그들은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최우진은 그들이 소년원으로 들어간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들은 봉사 활동과 반성문을 채우는 것으로 가볍고 쉽게 죗값을 치른 것이다. 

  이야기는 양파 껍질을 벗기듯 새로운 속살을 드러낸다. 한꺼풀 벗기면 드러나는 사건의 진실들로 독자는 충격에 빠진다. 수명을 다하고 사라진 별의 빛을 보는 것으로 우리는 살아 있음을 증명받는다. 지구에서 바라보는 별은 오래전에 죽었다. 죽음 이후에 반짝이는 그 별의 잔해를 바라보며 우리는 살아야 한다고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2014년에 떠난 아이들이 보내오는 빛을 우리는 오래도록 바라보며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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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걷는사람 세계문학선 1
오야마다 히로코 지음, 한성례 옮김 / 걷는사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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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마다 히로코의 『구멍』은 마스다 미리의 산문집 『그렇게 쓰여 있었다』를 읽으며 알게 된 소설이다. 마스다 미리는 소설 『구멍』을 읽고 있다고 산문집에서 쓰고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가 읽는 소설이라면 당장에 읽고 싶다. 찾아보니 '걷는사람'이라는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선1권으로 나와 있었다. 예스24에서 작은 출판사 응원 프로젝트로 중쇄를 찍게 하자는 이벤트도 한다(http://www.yes24.com/campaign/01_book/2017/1017Publish.aspx?EventNo=4&CategoryNumber=001). 외국 소설의 경우 번역이 되어 있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가 없다. 다행히 이 출판사에서 나온 오야마다 히로코의 『구멍』이 있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소설  『구멍』에는 세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표제작인 「구멍」의 이야기는 기묘하다. 실려 있는 세 편의 이야기들은 기이하고 환상적이다. 「구멍」은 남편의 전근 때문에 시집 근처로 이사를 하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녀는 비정규직으로 직장에서 이름 말고 성인 마쓰우라로 불린다. 정규직과 보너스는 21배 차이가 난다. 촌지라고 쓰인 봉투에 담긴 돈을 가방에 쑤셔 놓고 쓰지도 않은 채 이사를 한다. 일을 그만둔다는 말에 동료 여성은 부럽다고 말한다. 일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생활을 하고 싶다는 동료의 말에 마쓰우라는 일을 하지 않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 선뜻 대꾸를 하지 못한다. 

  정규직이 아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급여 차이는 심각하다. 마쓰우라는 불편한 교통수단이 아니더라도 더 일을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고민을 나눌 동료도 한 사람 밖에 없다. 그마저도 심각한 고민이 아니라 잡담 수준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회사 안에서는 사람들과의 교제조차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눠진다. 일을 하는 여성으로 묘하게 활달한 시어머니가 있고 말이 없는 시아버지, 고령이신 시할아버지가 있는 본가로 들어가면서 마쓰우라의 일상은 전보다 한가해진다. 

  일을 하지 않는 자신의 일상과 맞닥뜨리면서 마쓰우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남편의 월급만 받아서 사는 건 옳은 일인가 생각에 빠진다. 시어머니가 집을 빌려줘서 생활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집세를 내지 않아서 비용은 절약되지만 어쩐지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진다. 시어머니의 부탁으로 편의점에 공과금을 내러 가다가 검은 짐승을 본다. 짐승을 따라가다 구멍에 빠지는 마쓰우라. 그 앞에 옆집 여자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준다. 자신만 본 것만 같은 짐승을 따라 구멍에 빠진 이후 그녀는 이상한 만남들을 가진다.  그녀는 구멍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공장」은 카프카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을 만드는지 모르는 거대한 공장 안에서 일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젊은 작가는 이 세계의 비인간적인 모습들을 세밀하게 나열한다. 정규직으로 알고 면접을 보러 왔지만 일은 이상하게 진행되어 비정규직으로 그것도 문서파쇄실에서 일하는 스물여섯의 여성 우시야마. 대학교수의 추천으로 옥상녹화사업과 이끼 연구회라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업무를 맡은 후루후에.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정리 해고를 당해 공장에서 나오는 모든 서류의 교정 작업을 맡게 된 서른한 살의 남성 우시야마. 

  문서파쇄실에서 일하는 여성과 교정을 보는 우시야마는 남매다. 같은 집에서 살지만 서로 어떤 곳에서 일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오빠는 동생이 비정규직인 게 불안하고 동생은 오빠가 여전히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점심시간에 우연히 오빠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구나 알게 된다. 공장은 거대하다. 각종 편의시설이 있고 버스가 북쪽과 남쪽을 옮겨 다닌다. 출입증의 줄 색깔로 직급을 나눈다. 고토라는 인사 담당자가 이들을 채용하고 업무를 맡기뿐이다. 정확히 그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곳은 거대하고 바쁘고 수시로 사람들이 바뀐다. 

  이끼 연구회라는 일을 추진하는 후루후에는 초등학생이 쓴 공장에서 서식하는 동물 보고서를 받는다. 초등학생은 보고서에 '회색뉴트리아', '세탁기도마뱀', '공장가마우지'의 생태를 자세히 적어 놓았다. 배수구와 세탁기, 공장의 하늘에 사는 그들을 자세히 관찰하는 공장 사람들은 없다. 원래 그것들이 공장에서 살아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할 뿐이다. 

  오빠 여자친구에게 험담을 들은 우시야마는 반차를 쓰고 공장을 산책한다. 걸어서 다리까지 건너간다. 그곳에서 새의 사진을 찍는 후루후에를 만나 점심을 같이 먹는다. 후루후에가 공장에서 하는 일을 듣고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아 질문을 한다. 당신의 일이 공장에서 어떻게 진척이 되고 성과를 보이는지에 대해서. 성과도 보이지 않는 일을 하면서 정규직으로서 비정규직이 누리지 못하는 복지와 혜택을 받고 있는 것에 비난으로 들리는 것 같아 후루후에는 긴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오야마다 히로코가 그리는 세계는 정규직으로 살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암담한 오늘의 세계이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름과 나이를 알려주지 않은 채 몇 살로 보이느냐는 질문을 하고 끝내는 이름과 나이를 말해주지 않는다. 업무를 알려줄 때는 친절한 얼굴을 꾸미지만 그 이후에는 잡담조차 하지 않는다. 일하러 갔는데 잡담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반문도 들지만 알지 않나, 말이 없는 침묵의 시간들을 견디다 보면 일이 아니라 정신이 먼저 지친다는 것을. 말을 걸어 주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에 낄 수 없다. 어쩌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생각과는 다르게 말이 엇나가서 꼬투리를 잡힌다. 그러다 보면 말을 할 수 없다. 점심도 혼자 먹어야 한다. 비싼 점심을 사 먹지 않는 그들은 도시락을 싸와서 먹는다는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문서파쇄실에서 일하는 우시야마는 회식 자리에 참석한다. 고기 대신 내장만을 주문해 먹는 그 자리에서 자신은 그동안 악의에 노출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표정이나 말투에서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 정도는 아는 것이다. 우시야마는 언제까지 종이를 넣고 파쇄하는 그 일을 할지 모르지만 이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님을 안다. 함께 일하는 동료의 이름과 나이를 모르는 그곳에서 보람이나 노동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일을 해야 의미가 있다, 사람은 번듯한 직장을 가져야 한다. 이런 말들이 요즘 시대에는 폭력으로 다가온다. 일본이나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갈수록 심각해진다. 파견 사원, 계약직 사원, 비정규직은 다른 단어처럼 들리지만 그들은 같은 일을 하지만 정규직과는 다른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다. 직원 전용 식당은 들어봤지만 정규직 전용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보너는 21배 차이가 난다. 「구멍」의 마쓰우라도 「공장」의 우시야마들도 비정규직의 구멍에 빠져 결국엔 공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공장 안에서 서식하는 공장 동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마쓰우라가 본 검은 짐승은 공장에서 서식하다 이탈한 공장 동물의 하나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자신이 점점 공장 동물로 변하는 체험을 하는 사람들. 오야마다 히로코의 직장은 쓰무라 기쿠코의 직장보다 더 암담하고 오늘의 오후마저도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는 공포로 가득한 곳이다. 

  매일 구멍에 빠졌다가 동물로 변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지상 위로 올라온다. 마쓰우라는 다시 비정규직인 편의점에 일을 한다. 도처에 널려 있는 비정규직이라는 구멍을 피할 수 없다. 그 구멍에 빠지게 되면 공장으로 이어지는 길로 안내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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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창비시선 4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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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古代))에 가면

-장석남


말 타고 가다가

순한 돌처럼 가라앉을래요


사랑을 면제받는 기도를

하늘빛 어느 소(沼)에 가서는 매일매일 씻기겠어요


말 길러 말 타고 가다가

열매를 면제받은 꽃으로 가벼이 떠내려갈래요


말 타고 가다가

물의 빛으로 갈아타겠어요


  그 마을은 기차도 차도 다니지 않을 것이다.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아서 걸어가거나 말을 타고 가야 할 것이다. 먼지는 날리고 가도가도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 곳. 문득 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했나 의심이 들 때 마을은 나타난다. 물을 얻어 마시고 연못에 들어가 발을 씻고 더러워진 나의 얼굴을 마주본다. 한없이 가라앉는 마음을 그곳에 버려두고 다시 길을 떠나온다. 순한 돌로 열매를 면제받은 꽃으로 물의 빛으로 나의 시간은 탈색된다. 


입춘 부근

-장석남


끓인 밥을 

창가 식탁에 퍼다놓고

커튼을 내리고

달그락거리니

침침해진 벽

문득 다가서며

밥 먹는가,

앉아 쉬던 기러기들 쫓는다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발이 땋에 닿아야만 하니까


  2월인데 아직도 왜 이렇게 추울까. 한 줌 볕이라도 더 들어오게 하려고 창문을 열어두었다. 내일이 입춘이라는데 기상 예보는 역대급 입춘 한파라고 알려온다. 오는 봄, 와야 할 봄. 그 봄에서 시인은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나는 한낱 휴일과 휴일 사이의 일들을 가늠하느라 어지럽기만 한데. 발이 땋에 닿아야 살 수 있으니까. 그 길을 걷고 무심코 꽃이라도 밟는 날에는 마음이 내려앉을 일을 걱정하는 시인의 언어를 나는 조심히 옮겨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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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어비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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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진의 소설집 『어비』는 잘 읽힌다. 아홉 편의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그 이야기는 하나같이 나의 어느 하루를 옮겨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소설의 문장은 단문으로 끊어지다가도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난해한 묘사와 서술은 없다. 인물들의 뒤를 착실히 따라가는 문장은 나를 광화문이나 대한문 근처로 데리고 간다. 단 한 번 가본 그곳은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데도 천막이 들어차 있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서명을 하고 모금함에 작은 돈을 넣었다. 기억은 자꾸만 흐려졌지만 김혜진이 부려 놓은 소설의 풍경은 현실의 일들과 맞물린다. 

  인터넷 서점의 물류 창고에서 일하는 '나'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가 나중에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에서 자신의 닉네임을 어비라고 지은 것을 보고 그렇게 부를 뿐이다. 어비는 물류 창고 앞마당에 부려 놓은 개의 이름이기도 했다. 「어비」에서 '나'는 그의 이름을 끝내 부르지 못한다. 사는 곳과 일상의 일들을 질문했으나 그는 단 한마디도 돌려주지 않는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어비는 열심히 일하지만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때문에 근면함이 가려지는 사람이다. 먼지를 먹고 짧은 휴식을 가지며 사람들과 불필요한 대화를 이어가는 일들을 하다 보면 조장이 되기도 하고 팀장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좀 더 일 다운 일을 찾으려 그만둔다. 어비는, 음식을 먹고 불 꺼진 창고가 우주 센터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상한 방송을 진행한다. 그 일은 그래도 되는 건가, 그렇게 돈을 벌어도 되는 건가 의심이 드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20년 동안 일한 직장에서 해고된 엄마를 도우는 「아웃포커스」의 '나' 역시 잠깐 머물다 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의점에서 일한다. 1인 시위를 하는 엄마를 위해 박스로 핸드폰을 만든다. 할머니의 묏자리 문제로 가족 모임에 대신 나가려고 편의점 사장에게 무수한 양해를 구한다. 양해를 구하다가 결국엔 나오지 말라는 연락을 한낮의 거리에서 듣는다. 철거 용역으로 일을 나섰다가 반대 시위를 하는 여자를 해결하라는 말에 산에 올라가 여자에게 겁을 주는 이야기, 「한밤의 산행」. 치킨 배달을 갔다가 원룸에 사는 사내의 자살을 도와주는 배달원의 실패기를 담은 「치킨 런」. 

  김혜진의 소설속 인물들은 남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단기 알바를 하거나 편의점, 철거 용역, 배달원, 백수, 취업 준비생으로 불확실한 미래만을 소유한 자들이다. 그들은 생판 모르는 남에게 일다운 일을 하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그저 산책을 다닐 뿐인데 무슨 일이냐는 질문을 받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사람들이다. 모국어로도 영어로도 대화할 수 없는 그들은 대화를 하다 정작 몇 개의 단어로도 소통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닫힌 문을 열기 위해 어려운 어휘와 문법이 필요 없음을 알지만 만남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지하철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런 날에는 그녀도 줄넘기에 몰두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골목 귀퉁이에서 묵묵히 줄을 돌리는 그녀를 상상했다. 지구를 벗어났다 되돌아오는 그녀의 실루엣은 고독했고 그때야 나는 우리가 고독을 나눠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둘은 한때 우리였다가 이제 우리를 벗어나는 중이었으므로. 우리가 나눠 가진 고독의 무게 또한 비등할 것이었다. 한 번에 하나,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이단 뛰기가 가능해지고 삼단뛰기도 능숙해지지 않을까. 하나, 하나, 하나. 줄은 공중에서, 바닥에서, 수시로 정지했다. 

(줄넘기 中에서)


  「줄넘기」의 '나'는 삼 년 동안 만난 그녀에게 지겹지 않냐는 질문을 끝으로 헤어짐을 통보받는다. 그가 하는 일이란 밤의 공원에 나가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둘러보는 것이다. 한밤중에 선글라스를 끼고 줄넘기를 하던 노인이 말을 걸어온다. 10년째 줄넘기를 하고 있다는 노인은 그에게 줄넘기를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다. 700개를 뛰고 노인과 대화를 하면서도 '나'는 노인이 왜 선글라스를 끼는지 눈치채지 못한다. 

  사람들의 표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대화를 할 때 상대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데 어떤 사람의 눈은 쉽게 쳐다볼 수가 없다. 눈을 보고 표정을 살피는 대신 딴 곳을 응시하고 고개만 기계적으로 끄덕인다. 김혜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상대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한다. 그들의 대화는 어긋나고 어떤 순간에는 해야 할 말조차 하지 못하는 지점에 다다르기도 한다. 바로 앞 상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게 만드는 그들이 가진 생활의 우울과 피로들을 상상한다. 

  한 번에 하나,  「줄넘기」의 노인은 '나'에게 줄넘기 넘는 요령을 그렇게 알려준다. 노인이 왜 선글라스를 끼고 한 밤에 줄넘기를 하는지 노인의 동호회 회원들을 만나고 나서 알게 된다. 헤어진 연인의 집 앞에 가서 우편함에 들어있는 고지서를 확인하는 '나'. 그 요금들을 다 내주면 더 좋겠다는 연인. 세상의 비밀과 놀랄만한 이치를 한꺼번에 알 수 없다. 줄넘기를 돌리다 보면 줄넘기를 돌리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세상의 뒷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뒷면 같은 김혜진의 소설들.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내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사람들의 오늘이 소설의 뒷장에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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