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평전 - 문익환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 문익환 평전
김형수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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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가능한가. 만나서 이야기 한 번 나누지 못한 사이면 더더욱 알 수 없지 않을까. 시인이면서 소설가이기도 한 김형수에 의해 쓰인 『문익환 평전』을 집어 들면서 든 생각이다.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알고 싶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특별판 『문익환 평전』이 나올 때 한반도는 평화의 물결로 요동쳤다. 세상의 날 선 비판을 가하고 온몸으로 민주화를 끌어안은 그의 호 늦봄에서처럼 우리는 늦봄, 걸어서 두 정상이 만나는 꿈같은 장면을 마주했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 

-문익환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 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 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마음이었거든 

한마음 

그래 그 한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 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면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을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사는 거지 


  신학자, 목회자, 시인, 번역가, 언어학자, 시대의 꿈과 사상을 실천하는 예언자. 늦봄 문익환의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그가 일흔두 살에 쓴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대로 그는 평양에 갔다. 비록 걸어서 가지는 못하고 베이징 공항에서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지만. 그는 갔다. 1989년 3월 25일의 일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그들을 괴뢰, 인민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동무라는 가장 예쁘고 친근한 말로 그들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고 했다. 


  윤동주와 시 공부를 하고 그가 문익환이 쓴 모자를 부러워하자 호떡 몇 개와 바꾼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쓴 시를 윤동주가 그것도 시인가, 말해서 그는 시를 포기했지만 그의 안에 있는 시의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만으로 쉰셋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쉰여섯에 첫 시집 『새삼스러운 하루』를 출간해놓고 순수하게 기뻐하던 모습을 시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늦봄. 히브리어 성서를 번역하고 목회자의 길로 가던 그가 시대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 이후였다.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던 전태일은 노동 현장의 가혹함을 알리고자 온몸에 불을 질렀다. 그가 죽으면서 끝까지 외쳤던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지금 2018년에도 유효하다. 늦봄은 그렇게 더디 시대를 건너왔다.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유신 체제에서 독재의 부당함을 알리는 곳에 그는 늦게 온 봄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남과 북이 하나의 길로 가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던 그는 온밤을 꼬박 새워 시를 쓰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로 그는 시의 운명을 받아들고 걸어갔다. 평양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인간의 명이니 시간의 흐름이니 따지지 않고 그와 함께 2018년의 늦봄을 맞이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걸어서 우리는 만났다. 마주 잡은 손을 흔들고 가슴 설레는 말을 그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생애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의 길을 안내하는 대로 책장을 넘길 뿐이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김형수의 언어로 쓰인 『문익환 평전』은 소중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출생과 죽음 사이의 길을 따라 걷는 작가의 운명 또한 늦봄의 계절과 만나 평화의 길로 안내받는다.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서로를 그리는 마음으로 걸어서 평양으로 신의주로 가는 여정에 늦봄과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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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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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적 이야기 『문맹』은 시작한다. 산문의 제목은 「시작」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학의 원형은 읽는 행위로 출발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네 살 때부터 글을 읽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어머니는 오빠와 그녀가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보낸다. 그곳에서 그녀는 '완전히 우연한 방식으로 독서라는 치유되지 않는 병에 걸린다.'


  매일 읽는 병에 걸린 그녀는 열네 살에 기숙사에 들어간다. 이백여 명의 여자애들과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학습실에서는 절대 침묵이 강요된다. 숙제를 하고 '필독' 도서를 읽는다. 재미없는 책을 읽는 대신 그녀는 쓴다. 일기를 쓰고 비밀 문자를 만들어 쓴다. 읽는 행위에서 쓰는 행위로 전환된 문학이라는 불치병 판정을 받는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中에서)


  아버지는 감옥에 가 있고 어머니는 도시에서 쥐약을 포장한다. 신발 수선을 맡길 때면 학교에 가지 못하는 그녀. 가난함이 습관처럼 베어 있던 시절에도 그녀는 읽고 쓴다. 읽고 울다가 잠든 밤 사이에 태어난 문장을 적는다. 그것은 시가 된다. 시계 수리공 시절에도 그녀는 시를 쓴다. 작업이 단조로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며 기계는 시의 운율에 맞춰 반복된다. 저녁마다 노트에 깨끗이 시를 정리한다.


  스물한 살에 넉 달 된 어린 딸을 업고 그녀는 숲을 건넜다. '월경 안내인'을 따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국경을 넘는 그녀의 손에는 두 개의 가방이 들려 있다. 한 가방 안에는 젖병과 기저귀, 아기에게 갈아입힐 옷이 있고 다른 가방에는 사전들이 있다. 헝가리에는 작문 노트와 처음 쓴 시를 놓고 왔다. 부모님과 남동생, 오빠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도 못했다. 스물한 살의 그녀는 모국어를 잃어버렸다.


  스위스에서 그녀는 헝가리어로 시를 쓴다. 헝가리 문예에 글을 보내고 희곡 두 편을 완성한다. 라디오에 원고를 보내고 전문 배우들이 그녀의 글로 연기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글로 쓰고 한 편의 글을 완성한다. 큰 딸에게 글의 완성을 알리고 세 군데에 작품을 보낸다. 그중 한 군데에서 출판하고 싶다고 연락이 온다.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中에서)


  스위스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그녀는 프랑스어를 읽고 쓰지 못한 채 살아갔다. 스물여섯이 되어서야 그녀는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다. 초급반에 가서 다른 외국인들과 공부한다. 2년 후,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교육 수료증을 받는다.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기쁨. 아이들이 어떤 단어의 뜻을 물어볼 때 모른다 대신 한번 확인해볼게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노력.


  『어제』, 『아무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으면서 느꼈던 건조한 문장들. 수식어를 배제한 짧은 문장에서 아름다움과 참혹을 경험했다. 세계와 스스로 담을 쌓고 지내는 인물들이 하는 단 하나의 행위는 읽고 쓰는 것이었다. 힘든 노동 후에도 그들은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한 권의 책을 쓰는 작가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희망. 


  헝가리 국경을 넘을 때 가지고 간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유일한 책은 사전이었다. 모국어를 잃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는 난민의 서글픈 운명을 그녀는 예감했으리라. 사 년 동안 그녀는 프랑스어를 읽지도 쓰지도 못한 시간을 가져야 했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문맹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작가가 되기로 스스로의 삶을 결정지은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문맹을 선택한다. 언어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시간 동안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프랑스어로 쓴 짧은 문장 안에는 헝가리어로 쓰지 못한 기억과 사연이 숨어 있다. 전부 쓰지 않고 적어(敵語)에 숨겨둔 비밀은 소설이 되었다. 모국어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서 쓰고 읽어야 했던 한 작가의 담담한 슬픔과 마주할 준비를 한다. 국경을 넘는 순간 우리는 『문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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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문학동네 시인선 102
김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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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김언


서울에서 분노한 사람이 부산에 왔다. 숙소에 짐을 내려 놓고 곧바로 서울로 갔다. 더 많은 짐을 싸가지고 오기 위해서 그는 분노할 것이다. 왜 서울에서 본노하는가? 부산에서는 분노할 것이 없는가?그는 짐을 내려놓고 말했다. 분노가 쌓이면 또 싸가지고 갈 짐을 한가득 내려놓고 말했다. 여기도 사람이 많습니까? 충분히 많지요. 그러니까 떠났겠지요.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옆에 앉은 할머니는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한참을 저의 옆모습을 쳐다보고서요.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는 것. 용기가 필요한 일일까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일일까요. 분주하고 시끄러운 그곳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린이날, 그곳에서 아이들은 울거나 뛰어 다녔습니다. 공짜로 받은 풍선을 들고 가다 터뜨리기도 하고요. 이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골목으로만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만 길을 찾아 다녔습니다. 대도시에서도 우리는 좁은 길을 감각으로 찾아냅니다. 서점을 돌아다니고 책과 노트를 사 모았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아직 그곳에는 착한 이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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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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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직속상관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신체 접촉을 하고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팀장에게 메일로 보고하자 부서를 옮겨 주겠다는 말만 돌아온다. 해당 가해자의 처벌이 쉽지 않다는 이유다. 증거 자료를 모으라는 선배의 말을 듣고 통화를 녹취하고 부당 업무 지시 사항을 작성했다. 인사위원회가 열렸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징계 처분이 내렸다.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사유로. 이후 회사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유부남을 사귀고 두 달 가량 무단결근해 놓고 노동부에 진정을 해서 급여를 챙겼다는. 알고 보니 상관에게 성희롱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처음이 아니었다. 조용히 넘어간 두 번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하여 소진은 매 순간 후회하면서도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지금 이사 온 집은 칠층이다. 전에 살던 곳보다 낡았는데 버스 정류장이 가깝다. 무엇보다 칠층, 칠층이라는 것이 마음에 든다. 지방에서 서울로 독립해 올 때 엄마는 굉장히 서운해했다. 엄마는 혼자 삼 남매를 키우면서 화가 나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 나에게 화풀이를 했다. 안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그런데 하필 왜 엄마의 하소연을 넘어 감정의 분출을 나에게 했는지. 이해가 된다고 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혼자 서울에 살아보니 알겠다. 돈이 없는 건 아쉬운 게 아니라 생존을 위협받는 것이라고. 오백만 원, 천만 원, 이천만 원이 더 있으면 높은 층을 구할 수 있고 공동 현관이 있는 집을 경비원이 있는 집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삼층에 얻은 그 집에서 가스 배관을 타고 집으로 들어오려던 도둑을 맞닥뜨렸고 그날 이후로 불을 켜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는 상태로 변했다.


  KTX 해고 승무원으로 살아가면서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기만 하면 아기를 들쳐 안고 화장실로 숨는다. 어린 딸을 안으면서 소리 내면 안돼라고 말하는 엄마다, 나는.  고작 택배였는데 문을 열어주지 못했다. 2008년에 시작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1심과 2심에서 승소했다. 밀린 임금 8640만 원도 받았다.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혔고 받은 임금을 다시 돌려주어야 했다. 매달 이자만 백만 원이 넘게 붙었다. 일억 원을 갚아야 했다. 갚을 능력도 안되지만 갚는 순간 코레일 노동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규직으로 전환,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지상의 꽃'이라고 했다. 코레일이 아닌 자회사 소속으로 이 년을 일했다. 정규직으로 바뀌지 않아 투쟁했고 해고되었다. 350명에서 서른 세 명이 남았다. 어린 딸을 남편에게 맡기고 토크 콘서트에 참여했다. 서울 시장이 나와서 대법원 판결은 있을 수 없는 판결이라고 말해주었다. 눈물이 났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진숙의 꿈은 24평 아파트에 사는 것이라고 했다. 반지하 보다 더 내려가는 지하에 사는 진숙은 건물과 옆집 담 사이에 속옷을 널어 놓는데 자꾸 자신의 것만 없어진다고 했다. 새 거는 안 가져가고 입던 것만 가져가더란다. 방에 널거나 드라이기로 말리는데 곰팡이균이 생겨 없어지지도 않는단다. 도서부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집에 가기 싫은데 밖에 돌아다니면 돈이 드니 도서실에 있겠단다. 공부하라고 한 마디 해줬다니 자기에게 그런 말하는 어른은 처음이라고 웃었다. 진숙이 일중일 동안 무단결석했다. 집 전화도 핸드폰도 없는 아이였다. 머뭇거리며 무단결석의 이유를 말하는 진숙이. 그날이었단다. 그날인데 생리대가 떨어졌다고. 아빠한테 생리대 산다고 말은 못하고 문제집 사야 된다고 말했는데 아빠도 돈이 없다고 했단다. 안 떨어지게 신경을 쓴다고 쓰는데 가끔 계산을 잘못 해서 생리대 없이 보내야 하는 날이 있다고 했다. 그럴 땐 집에서 면 티를 잘라 쓴다고 했다. 흡수도 잘 안되고 새서 학교에서는 쓸 수 없고 집에서나 쓸 수 있단다. 낮에는 세면장 하수구에 벌거벗고 앉아 피를 흘려보냈단다. 보건실 가서 얻지 그랬냐고 했더니 이름 쓰고 하나 빌렸다가 다시 채워 놓아야 한단다. 중학교 졸업하고 취직하겠다는 진숙이를 설득해 입학금과 첫 등록금을 대신 내주고 고등학교에 보냈다.


  상관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삼층 집에 도둑이 가스 배관을 타고 들어오고 해고 승무원으로 살아가고 생리대 없이 집에서 지내야 하는 이 모든 이야기는 조남주의 소설집 『그녀 이름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소설이다. 소설이니까 적당한 허구를 넣어서 만든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을 수도 있다. 짤막짤막한 이야기는 모여서 한 권의 묵직한 소설집으로 만들어졌고 세상에 나왔다. 전작 『82년생 김지영』으로 우리 사회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끌어낸 조남주는 아홉 살 어린이부터 예순아홉 할머니까지 육십 명의 목소리들을 토대로 『그녀 이름은』을 썼다. 다들 별일 아닌 데로 시작하는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별일 아니지만 별일인 이야기가 모여  『그녀 이름은』이 되었다. 소설 속에서 그녀들은 이름이 있다. 누구 엄마, 누구 딸, 누구 아내가 아닌 소진, 진숙 그리고 나로 호명된다. 가장 친절하고 내밀한 속 사정을 아는 '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국회에서 청소 노동자로 살아온 이야기로부터(재계약이 안되자 맞춤법 틀려가며 '20년을 일했읍니다'를 쓰고 사무총장이 재계약 중재를 해주었다.) 동생의 결혼식 날 이혼을 한 언니의 이야기 (각각 이혼일기, 결혼일기, 엄마일기로 소설이 이어진다.) 전교회장에 출마한 당찬 열세 살 은서의 이야기까지 소설집은 그녀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다들 계약금으로 당장 이천만 원씩을 낼 수 있는 집이 이렇게 많구나를 실감하는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젊은 부부는 좌절하기 보다 운수가 너무 좋았다로 그 하루를 넘긴다. 조남주는 아득히 멀고 체감할 수 없는 공간에서 이야기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옆집, 앞집, 뒷집, 윗집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조각들을 모아 소설집 한 권을 꾸렸다. 과소비를 하는 것도 아닌데 서울에서 살기 힘들고 일을 하면서 초등학교 입학한 아이를 따라다니는 일이 벅차다. 딸 손주 아들 손주를 방학 동안 맡아 기르는 할머니는 허리가 요즘 안 좋다. 


  가만가만한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이어지는 소설을 읽다 보니 어느새 책을 다 읽어버렸다. 가독성이 좋은 건지 몰입을 한 건지 모르지만 소설은 차분하고 건조한 서술로 잘 읽힌다. 소설 속 그녀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불러주는 일로 독자의 역할은 끝이 났다. 온전한 '나'로 살아내기를 다짐하고 사회의 법이 편견이 이름 지우기를 강요한다면 틀린 맞춤법이라도 써서 내가 이곳에 살아가고 있다고 알려야 함을 말하는 소설  『그녀 이름은』. 여성과 남성,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로 나누며 둘로 쪼개지기를 원하는 사회에서 소설의 임무는 우리가 가진 목소리로 내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듣고 문장으로 쓴다. 말은 사라지지만 언어는 남는다는 것을 아는 소설가 조남주는 오늘도 쓴다. 


  이 글을 쓰다 참외를 깎아 먹었다. 선명하고 붉은 성주참외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은 참외 두 알에서 경북 성주 소성리에 살고 있는 성례 할머니를 떠올린다. 할매는 서울에 가서 법원에 들어가고 나올 때 미대사관에 들렀을 때 카메라를 만났다.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지금 소성리의 상태나 참외 농사를 놔두고 이곳에 온 심정을. 손녀에게 전화가 걸려와 대박 났다고 말해도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할매가 뉴스에 나왔다는 것이다. 애들한테 자랑하고 할매 대박 멋있다고 말해주어 성례 할매는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다고 다짐한다.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현실인가. 경계는 없다. 우리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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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 창비시선 420
박철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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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줄

-박철


건너 아파트에 불빛이 하나 남아 있다

하늘도 잠시 쉬는 시간,

예서 제로 마음의 빨랫줄 늘이니

누구든 날아와

쉬었다 가라


건너에는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건너라는 말에서 나의 마음은 그곳으로 날아갑니다. 건너 건너 당도할 마음은 아이들이 밥을 먹고 뛰어다니는 풍경을 보기만 해도 평온합니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적요한 학교에서 나오는 불빛, 건너 아파트에서 흘러 나오는 온기. 지친 몸은 불빛과 온기로 뜨거워집니다. 



끝 간 데

-박철


누구나 사랑을 한다

그건 집에 문이 있는 것과 같이

사랑이라는 말에는 

누구나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사랑을 한다

누구나에는 어디든이 자리하고

어디든은 언제나의 제 모습이다

제 모습에 

왜냐고는 없다

누구나

사랑을 한다

그건 사랑이라는 말에 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일 뿐이라

너와 나의 송두리라

왜인가 묻지 말고 차라리

죽음이라 불러다오

누구나

사랑을 한다

노을도 사랑을 한다

그러나 누구나에는 그러나가 있다

내 송두리 당신 앞에 선

아이처럼

아이 앞에 선

작은 문처럼


손을 잡아 길 안 쪽으로 안내해주고 깻잎 김치를 떼기 좋게 잡아주고 라면 물이 적을까 염려하는 마음. 사랑의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누구나 사랑을 합니다. 누구나의 사랑속에 당연시되는 마음을 부러 모른 척 하기도 합니다. 나의 사랑은 끝 간 데 없고 앞으로의 시간에서 내일과 모레도 함께 할 것이라는 다짐을 합니다. 



화학반응

-박철


딱히 말할 곳이 없어서

그래도 꼭 한 마디 하고 싶어서,

지나가는 아이 반짝이는 뒤통수에다

사랑해-속으로 말했다 그러자

아이가 쓱쓱 자라며 골목 끝으로 사라진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신발 주머니를 끌고 가는 아이를 볼 때마다 너도 사는 게 지치지 속으로 물어보곤 합니다. 밥을 많이 먹어도 용돈을 두둑히 받은 날에도 집으로 향하는 아이의 뒷모습은 외로워 보입니다. 아이의 시간을 건너 어른의 세계에 도착해도 여전히 세계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옵니다. 하늘은 어둡고 맑을 날을 기대해도 구름 낀 시간에서 아이의 키는 자라고 마음을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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