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조경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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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자 세 개가 놓인 책의 표지를 열고 작가 약력을 들여다본다. 5년 만의 신작 소설집이라고 간결하게 적힌 띠지를 벗겨 낸다. 책을 읽을 때 그런 것은 신경이 쓰이므로. 전부 읽었구나. 조경란의 책들을 빠짐없이 읽었다니 새삼 감개가 무량하다. 『식빵 굽는 시간』은 두 권 사서 읽었다. 한 권을 사서 읽고 꽂아 두었는데 잃어버려서. 그런 때였다. 책이란 책은 모조리 나의 책장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살던.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에 실린 소설 「저수하樗樹下에서」의 주인공 '나'는 책장만 열일곱 개를 가졌다. 그 책장을 이고 이사 다닐 집을 구하고 있다. 


  책장 열일곱 개를 가진 마흔여섯의 소설가는 가까운 곳에 산이 있고 재래시장이 있는 이층 집을 마음에 들어 한다. 보증금 8천에 월세 80인데 모자란 보증금 생각은 하지 않고 월세 낼 걱정만 한다. 집을 옮길 때는 턱없이 모자란 집값 생각은 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 안을 꾸밀까 현실도피만 하기도 한다. 곧 그 집에 들어가 살 것처럼 굴기도 한다. 소설가의 모든 책을 사서 읽고 책장에 꽂아두는 것만으로 행복하던 시절에 조경란을 열심히 읽었다. 대화가 거의 없고 문단이 거의 나누어지지 않은 소설의 문장들을 따라갔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쓰인 소설을 묶자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다. 흘러가는 시간을 묶으면 책이 된다.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있기 때문에 소설을 쓴다. 조경란은 기억에 충실한 소설가이다. 서울 거리를 걷다가 외국의 낯선 곳으로 날아가 걷는다. 짐을 풀고 집의 상태를 확인하자 하는 일이 거리의 지형을 익히는 일이다. 야채가 싼 곳이 어디이고 서점과 화장실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 낯선 곳을 가고 걸을 때 필요한 건 물과 화장실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의 인물들은 로마의 거리를 충실히 걷는다. 지치지도 않은 채 일상을 살아온 이들이 내일을 포기하고 선택하는 일은 걷기와 그마저도 힘들어지면 버스를 타는 일이다. 받아올 것이 있다며 어머니의 부탁을 듣고 아들이 하는 첫 번째 일도 버스를 타는 일이다. 외국의 도시에서 유료 화장실을 찾아내는 일을 무리 없이 할 때까지 걷고 버스를 탄다. 


  구립 도서관까지 걸어가서 일을 하고 책을 반납한다. 시장에 들러 반찬거리를 사고 밤에 몰래 고무나무를 보기 위해 내려오는 아이를 만나 산책을 한다. 허리가 아파 다리를 꼬고 앉을 수 없을 때도 걷는 것으로 병증을 이겨낸다. 평지를 걷고 서서 글을 쓰는 일. 여름휴가 열흘 동안 비어 있다시피한 온천에서도 한낮 동안 미술관에 가기 위해 걷는다. 


  조경란 소설의 화자들이 움직이는 공간은 낯설지 않다. 집 주변과 시장 근처, 일로써 떠난 외국의 거리. 그 거리마저도 집의 풍경과 닮아 있다. 난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쓸쓸한 하루를 걱정하는 일도 돌아갈 집이 있다고 해서 덜어지지 않는다. 실 팔찌나 카펫을 사는 일은 쉽다. 외국에서라면 추억이 될 테지라는 감정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사지 않고 그 곁을 지키는 '나'는 조국을 떠나온 그와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시장 좌판에 놓인 양말, 가짜라서 더욱 반짝이는 반지, 빨아서 써도 좋을 에코백. 헐거운 지갑을 가진 이라도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물건이다. 서랍에 신지 않을 양말이 쌓인 모습을 보는 하루. 조경란이 그리는 인물은 하루치의 행복을 사서 서랍에 넣어두는 일로 내일을 기약하는 사람들이다. 서랍이 닫히지 않아도 양말과 천 가방, 손수건을 사서 넣어 둔다. 고민 없이 이층집을 계약하지는 못해도 찬이네 반찬에 가서 미역국을 교보 문고에 가서 『염상섭 문장 전집』을 살 수 있는 하루면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의자 세 개에 앉아 있다. 


  비어 있는 의자를 바라본다. 누구든 걷다가 지치면 앉을 수 있는 의자 세 개를 가진 사람으로 살고 싶은 이들을 그린 소설집을 5년 만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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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돼가? 무엇이든 -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이경미 첫 번째 에세이
이경미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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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소설가 위화가 라디오 방송에 나왔을 때의 일이다. 진행자가 당신의 성공 비결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단숨에 운이 좋아서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통역사도 진행자도 함께 웃었다. 열심히 했다, 좋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뻔한 말이 들려올 줄 알았다. 위화는 그저 운이 좋아서라며 담백하게 말했다. 진행자도 손뼉을 치면서 맞다,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내용은 다 믿을 수 없다. 성공하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며 크게 웃었다. 원래 좋아하던 작가였는데 그때 이후로 더 좋아져서 책을 찾아 읽었다. 


  원래는 치과 의사였다. 공산주의 국가라 수입은 시원치 않았다. 맨날 썩은 이를 들여다봐야 했다. 당에 속한 작가들은 놀러 다니면서 창작 활동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부러워서 글을 썼다. 계속 썼는데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진 못했다. 두 번째 장편 소설 『살아간다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후에 장이머우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유명세를 떨쳤다. 


  어쩌다가로 시작한다. 하늘의 기운, 우주가 도와줘서라는 허황된 소리 말고 운이 좋아, 어쩌다가 성공한다. 성공의 정의도 주관적이라서 그저 잘 데 있고 하루 세끼 따뜻한 밥 먹을 수 있을 정도여도 성공으로 여긴다. 더러 자기 계발서를 읽기도 한다. 성공하는 자의 습관이라고 읽어보면 나와는 거리가 멀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메모 열심히 하고 항상 긍정적인 사고를 하라고 한다. 반대다. 늦게 일어나고 일기도 겨우 쓰고 매사 부정적인 생각으로 하루를 보낸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고(7월에 쓴 전기의 양을 계산하면서 얼마 나올지 고민하고 의료보험은 왜 아직까지 안 나오나 연체되면 돈 더 내야 하는데 같은 비루한 걱정들) 타인의 표정을 살피며 나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건가 멍청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아랫집≫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이경미 감독의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을 읽으며 이거 내 얘기임? 내가 쓴 거 아니야?라는 공감이 마구 들었다. 이십 대 시절 첫 직장에서 겪은 일들이며 때려치우고 영화 학교에 들어가 안 되는 시나리오를 쓰기까지 어찌어찌 영화는 만들었는데 흥행이 안돼서 절망에 빠진 최근의 일까지 담담하고 솔직하게 그려 냈다. 영화를 보기만 했지 영화를 만드는 세계를 알지도 못하는 한국 영화 애호가인 나는 이런 이야기가 좋다. 짤막하게 쓰인 일기의 문구들이 마음에 와닿는다. 쓰레기를 쓰겠어라고 다짐하니 쓰레기가 써진다는 일기. 


  여신 이영애가 처음으로 단편 영화에 출연한다는 기사를 봤는데 이경미 감독의 작품이었다. 영화 ≪아랫집≫의 모티브는 감독의 실제 이야기였다. 제발 베란다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의 글을 절절히 썼는데 아랫집 남자는 감독을 뻔뻔함으로 쩔쩔매게 만들었다. 여자 혼자 살면 다 그러진 않겠지만 무서운 일이다. 전화번호 알아내서 매일 금연 일지를 보내고 밥 먹자고 연락하다니. 세상 끔찍하다.


  홍조 띤 얼굴로 열연하던 공효진의 분신은 감독 이경미였다. 딸의 행방을 찾으며 가위를 손등에 쑤셔 박고 갈비뼈가 부러지면서도 뛰어다니던 손예진은 이경미 감독의 일부였다. 이영애가 헬스 기구를 타며 아랫집을 공격하는 장면은 윗집 여자 이경미의 소심한 복수를 영화화 한 것이었다. '방구석 1열'에 나와 자신의 영화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하던 감독 이경미는 불면증을 달고 살 때 엄마가 보내준 문자를 지우지 않고 아직도 읽는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비밀은 없다≫이야기를 했으니 ≪미쓰 홍당무≫를 한 번 더 소개해 달라며 웃는 이경미는 고기를 좋아한다. 


  성공했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8년 동안 쓰고 준비한 영화가 잘 안돼서 절망에 빠져 있었다. 집 안에 틀어박힌 감독을 임필성 감독이 데리고 나갔다. 고깃집에서 ≪비밀은 없다≫를 좋아한다던 영화 기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결혼도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이런 상투적인 고사성어까지는 안 쓰려고 했지만 딱히 비유할 말이 없다. 감독이 밝힌 대로 300만 명을 잃고 한 명을 얻었다. 나쁜 일 뒤엔 좋은 일. 좋은 일 뒤에는 좋은 일이 있으면 좋겠지만 고사의 이야기처럼은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인생이란 게. 


  몸에 좋다는 약을 때려 먹고 박찬욱 감독의 마늘 액기스도 훔쳐 먹는다. 전세 난민이 되어 우울해 있다가도 거금 4만 4천 원을 들여 장을 본다. 『잘돼가? 무엇이든』은 성공한 감독의 성공기가 아니다, 절대. 절대라는 부정은 이경미 감독이 성공을 안 했다는 것이 아니고(긁적긁적) 내가 이만큼 되기까지 이런 좌절을 겪고 이겨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되지도 않는 감정 과잉의 기록이 아니란 소리다. 오해하지 마시라. 


  이 책은 사회성이 떨어지고 영양제 폭식을 일삼고 내 테이블에만 물을 가져다주지 않아 분노가 나려다 이게 아닌가 다시 소심해지는 한 사람의 괴랄한 기록이다. 인생의 낭비가 있다면 지나온 시절을 함부로 쓰고 방치하고 내버려둔 청춘을 보낸 기억이다. 박민규의 수필 「푸를 청 봄 춘」에 나오는 구절처럼 아직 우리에게 청춘은 오지 않았다. 청춘을 허무맹랑하게 보낸 자들이 청춘을 살 준비가 되어 있다. 쓰레기라도 쓰고 싶은 심정으로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를 준비하는 청춘의 시절은 끝나지 않았다. 여기, 무엇이든 잘 돼가고 있는 청춘들에게 보내는 책이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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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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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질지 선택할 권리가 없거든."

핼로런 씨가 내게 했던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맞는 말이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다. 충동이다. 이제는 알겠다. 하지만 가끔은 선택해야 하는 때가 있을지 모른다. 최소한 사랑에 빠지지 않는 쪽을 선택해야 하는 때가. 저항하고, 거기서 멀어져야 하는 때가. 핼로런 씨가 댄싱 걸을 사랑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C.J 튜더, 『초크맨』中에서)


  C.J 튜더의 데뷔작은 『초크맨』은 놀랍다. 여름을 맞이하여 영국에서 날아온 스릴러 한 편이 더위를 잊게 만든다. 잘 짜인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소설은 성장 소설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 뻔한 성장 소설이 아니어서 이야기를 주무르는 솜씨가 만만치 않아서 놀랍다. 신인 작가이지만 대가의 능수능란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야기를 많이 쓰고 읽은 자의 소설이다. 어느 지점에서 독자의 호흡을 멎게 하고 다시 숨을 쉬게 할지를 알고 있다. 


  소설은 앤더버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열두 살을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애드워드 애덤스이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에디라고 불리는 '나'와 뚱뚱이 개브, 메탈 미키(교정기를 끼고 있어서), 호포와 니키는 한동네에서 나고 자라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며 어울려 다닌다. 자전거를 타고 숲속 주변을 떠돌고 뚱뚱이 개브의 생일날이면 어떤 선물을 줘야 개브가 좋아하지를 고민하는 아이들이다. 


  축제 때 아름다운 댄싱 걸의 사고 현장을 에디는 바로 앞에서 목격한다. 댄싱 휠의 축에 달린 회전 링이 부러지면서 댄싱 걸의 얼굴과 다리를 자르고 지나갔다. 에디는 숨이 막혀 도망가려고 한다. 바로 옆에 쓰려진 댄싱 걸이 에디에게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때 얼굴이 하얀 남자가 나타나 다친 아가씨를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을 차리고 에디는 남자의 말대로 댄싱 걸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응급 처리를 잘한 덕분에 댄싱 걸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을 살리고 다리를 접합했다. 신문에서는 하얀 남자와 에디를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얼굴이 하얀 남자는 핼로런이라는 이름의 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는 마을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먼저 들어와 있다가 사고를 목격하고 댄싱 걸을 구했다. 그녀의 이름은 일라이저였다. 끔찍한 사고였지만 일라이저는 살았고 관심도 줄어들었다. 에디와 친구들의 열두 살의 시간을 천천히 흘러갔다. 뚱뚱이 개브의 생일날 누가 준지도 모를 분필 여러 통을 받기 전까지 아이들은 장난과 악의 섞인 농담을 반복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여러 색깔의 분필로 무얼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각자를 나타내는 색깔로 암호와 분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놀이터로 와, 숲속으로 라든지를 표시하는 기호와 초크맨을. 소설의 시간은 에디와 친구들이 열두 살인 1986년과 삼십 년이 흐른 2016년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초크맨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마을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먼저 에디가 메탈 미키의 형에 의해 폭행을 당했다. 에디는 메탈 미키의 형을 피해 다녔는데 초크맨을 보고 미키가 부른 줄 알고 놀이터에 갔다. 추잡한 짓을 당하고 있을 때 핼로런 선생님이 와서 구해 주었다. 


  자전거를 아끼던 메탈 미키의 형이 물속에 처박힌 자전거를 구하려다 사고를 당했다. 자전거가 너무 무거웠다. 미키의 형이 죽은 곳에 초크맨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니키의 아빠 마틴 목사가 폭행을 당했다. 그 옆에도 초크맨 그림이 잔뜩 있었다. 사고가 날 때마다 초크맨이 그 옆을 지켰다. 숲속에서 일라이저의 토막 난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이 있는 곳까지 초크맨이 안내했다. 


  2016년의 에디에게도 초크맨 그림과 분필이 날아왔다. 치매로 기억을 잃어 죽어간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단어와 싸우는 에디는 어른이 된 미키의 방문을 받는다. 미키는 삼십 년 전에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에디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다. 그리고 일라이저를 죽인 범인을 안다고도 말했다.


  스릴러의 겹을 쓴 성장 소설인 『초크맨』은 어른이 될 수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나이를 먹고 배가 나오고 머리가 벗어지고 기억력이 가물 해져도 어른이 될 수 없는 아이들이 나온다.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 결과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영원히 아이를 살고 있다. 함부로 예단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미화한다.  『초크맨』은 아이들의 세계는 명랑하고 밝은 기운으로 가득해야 한다는 관념을 집어넣는 어른에게 날리는 강력한 한 방이 담긴 소설이다. 우리는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의 악마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고민하면서 나이를 먹어간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 쪽을 선택한 사람만이 어른의 세계로 넘어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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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 : 태조 - 혁명의 대업을 이루다 조선왕조실록 1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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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역사를 어떻게 배웠느냐하면 노래 테이프로 시작했다. 그 테이프에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가 담겨 있었다. 1절부터 4절까지 따라 부르고 외웠다. 노래에는 태정태세문단세라는 구절이 있다. 이해력은 떨어지는 아이였는데 어찌 된 게 암기는 잘했다. 노래를 4절까지 외워 부르고 태정태세문단세 다음을 찾아서 외웠다. 후에 그것이 조선의 27명의 왕이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으로 산 책은 유관순. 학급 문고에서 위인전만 골라 읽었다. 이래서 중요하다. 어렸을 때의 교육이. 국사 시간이 되자 신이 났다. 그때는 교과서 종류가 하나였다. 흑백 교과서에 색깔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공부했다. 선생님은 필기를 좋아하시는 선생님이어서 괄호, 쉼표, 번호 같은 걸 일일이 불러주면서 공부 시켰다. 비변사, 대동법 같은 용어가 기억에 남았다. 


  진단 평가를 봤는데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고 원나라 말기에 개혁 정치를 한 왕을 쓰는 문제였다. 분명 작년에 배웠는데 기억이 안 났다. 철종이라고 간신히 썼다. 당연히 틀렸다. 답은 공민왕. 선생님은 애들이 쓴 답지를 가져와 해괴망측한 답을 불러주면서 웃었다. 어떤 아이는 그 답에 아수라 백작을 써서 다 같이 웃었다. 내가 쓴 답을 이야기하면서 철종은 한참 후에 나온다라고 웃으셨다. 


  국사를 좋아했는데 백 점을 맞지는 못했다. 한두 문제가 아니라 여러 문제를 어렵게 꼬아서 내셨다. 그래도 좋았다. 그때 당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이 인기였다. 책을 사서 밑줄을 치며 읽었다. 이번에 다산북스에서 나온 이덕일의 『조선왕조실록』은 총 열 권으로 기획되었다. 그중에 태조 편인 1권과 정종·태종 편인 2권이 먼저 나왔다. 


  고려 말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백성의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 나왔다. 정몽주, 이색은 고려의 틀 안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온건 개혁파였다. 그에 반해 정도전, 조준은 왕의 성을 바꾸자는 목소리를 내는 급진 개혁파로 신흥 무인 세력으로 성장한 이성계와 손을 잡는다. 최영과 우왕은 명나라 정벌을 주장했다. 이성계는 4불가지론을 들어 정벌을 반대한다. 최영과 우왕은 완강했다. 이성계는 군대를 끌고 요동 정벌에 나섰다. 압록강을 건너기 전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다. 이것이 유명한 사건 위화도 회군이다. 왕명을 어기겠다는 것은 반역자의 길로 들어서겠다는 결심이었다. 


  급진파와 손을 잡고 신진사대부의 기반으로 나라를 세웠다. 조선이라 이름 짓고 이성계는 태조가 되었다. 불교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다. 유교를 근본이념으로 삼고 큰 나라 주변 정세를 살피는 교린과 사대주의를 함께 가져갔다. 태조가 왕위에 올라 정사를 펼친 건 6년 남짓이었다. 왕의 대를 잇기 위해 싸우는 자식들의 난을 지켜봐야 했던 쓸쓸한 말년이 남았다. 


그렇게 태조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혁명적 토지 개혁을 단행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랑과 고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 짊어질 수 있는 극도의 증오를 동시에 받으면서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가는 저승에는 함께 이 왕국을 만들었으나 먼저 왕국을 떠난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래는 언제나 그랬듯 살아남은 사람들이 몫이었다.

(이덕일, 『조선왕조실록 1』中에서)


  이덕일의 『조선왕조실록 1』은 조선이 세워지기 이전부터의 시간부터 위화도 회군 이후 숨 가쁘게 진행된 개국의 시간을 다룬다. 충분한 사료와 간결한 문체로 구성된 이 책은 우리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바로 볼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역사라는 깜깜한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 밝히는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올 이 책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성찰할 수 있게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다.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길은 역사를 아는 것으로 행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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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 : 고대 가요.향가.고려 가요 편 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
하태준 지음 / 다산에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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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울며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얼굴에 주름살이 지려 하는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만나 뵙게 되고자

낭이여, 그리운 마음이 가는 길에

다복쑥 마을에 잘 밤 있으리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득오)


  국어를 좋아했다. 시험 점수는 잘 나오지 못했다. 사회나 국사 점수가 더 높았다. 한 번도 국어는 백 점을 맞지 못했다. 한두 개씩 문제를 틀리곤 했다. 깊게 생각하면서 푼 문제를 틀리곤 했다. 이런 뜻이겠지 하고 풀었는데 오답이었다. 교과서를 받으면 시와 소설, 희곡, 수필을 먼저 읽었다. 읽을거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꼼꼼하게 읽었다. 그때는 국어 교과서가 하나였다. 지금은 출판사가 다양해서 교과서마다 다른 작품이 실린다. 출판사별로 어떤 작품이 실렸는지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는 그림과 친절한 설명으로 문학 작품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배웠는데 기억이 가물 해진 고대 가요와 향가, 고려 가요를 현재로 불러온다. 교과서에 색깔 볼펜으로 밑줄을 긋고 선생님 설명을 적으면서 공부한 고대 시에 숨겨진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읽으면 시의 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점수를 잘 맞기 위해 시의 갈래, 성격, 주제를 외우며 암기 과목처럼 국어를 공부한 어른이 읽어도 새로운 책이다. '제망매가'속에는 지은이 월명사의 어린 누이를 향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담겨 있다. '서동요'는 서동이 선화 공주를 얻기 위한 꾀와 발칙함을 만날 수 있다. 백수광부와 그의 처의 안타까운 사연이 담긴 '공무도하가'는 사실적인 삽화와 함께 책의 시작을 알린다. 


  이간질 때문에 부산성으로 좌천된 낭도 득오를 위해 화랑 죽지랑은 낭도 137명을 데리고 득오를 찾아간다. 돈을 모아 득오에게 줄 음식과 술을 사간 그들은 욕심 많은 익선이 요구한 뇌물을 줄 수 없었다. 그때 사연을 들은 간진이 조 서른 가마와 말안장을 선물로 주어 그들은 사흘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서라벌과 신라 궁궐에 전해지고 왕은 익선을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익선은 도망 가고 대신 그의 아들을 겨울 강에 목욕을 하게 했다. 간진은 높은 벼슬로 치하했다. 


  시간이 지나 죽지랑이 죽고 득오와 낭도들은 화랑도 복장을 입고 장례식에 참가했다. 그를 추모하며 지은 시 모죽지랑가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나 몰라라 하지 않았던 죽지랑을 향한 애달픈 마음이 담겨 있다. 간봄을 그리워하며 모든 것이 울며 시름한다는 구절은 떠난 죽지랑이 없는 자리마다 슬픔이 녹아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아프고 서글프다. 


  시는 봄이고 여름 지나 가을 그리고 겨울이다.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자들을 위한 위로이다. 그림과 따뜻한 해석으로 지나간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책 『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를 읽으며 여름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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