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룸
김의경 지음 / 민음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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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이다고 울고 싶은데 뺨 때리던 시기가 있었다. 아프다고 소리치는데 그게 다 젊어서 그래, 청춘인데 무슨 엄살이 심해라며. 아프다고 하는데 병원에 데리고 가고 약을 사다 주지는 못할망정. 아프면 청춘이 아닌 환자다. 보살피고 걱정해 주어야 한다. 김의경의 소설집 『쇼룸』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한다. 전작 『청춘 파산』에서 빚 갚느라 봉고차에 실려 전단지 돌리고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청춘을 담았던 김의경은 『쇼룸』에서 더 팍팍해진 청춘의 얼굴을 보여준다. 작가의 경험담을 살린 소설들은 현장감과 깊이가 더해져 읽을수록 짠하고 서글프다. 『쇼룸』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들은 우리가 가질 수 없어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화려한 '쇼룸'의 세계로 데려간다.


가구 공룡 이케아. 광명시에 생기고 고양시에도 생겼다는 이케아에 가본 적은 없다. 김의경은 소설을 쓰기 위해 여러 번 그곳에 다녀왔다. 화려하게 전시되어 있는 가구들을 보면서 소설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처음부터 비싼 가구를 살 수 있는 여력이 없는 이들이 2년에 한 번 꼴로 바꿀 생각으로 이케아에 간다. 조립도 해야 하고 물건도 직접 날라야 하는 불편을 돈으로 주고 사면서도 그들은 가구가 방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며 행복해한다. 이케아에 가는 이들은 적어도 방이 하나씩은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데 우리는 너무 작은 것들에게서 미세해서 현미경으로 들여다 봐야 할 정도로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아니 느껴야만 한다. 그래서 슬프다. 『쇼룸』에 실린 첫 번째 소설 「물건들」에서 '나'는 없는 게 없는 가장 비싼 물건값이 5000원인 다이소에 가는 것을 즐긴다. 1층부터 5층까지 물건으로 빽빽한 그곳에서 필요한 걸 산다. 필요하지 않아도 천 원, 이천 원인 물건들을 가책 없이 고른다. 많이 사도 이만 원이 넘지 않는다. 머그컵과 식기, 청소 도구, 애완용품을 고르며 월급날에 탕진잼을 만끽한다. 그곳에서 '나'는 애인도 만든다. 작지만을 빼고 다시 쓴다. 확실한 행복. 확실한 행복 앞에 붙은 '작지만' 때문에 우리의 세계는 더 작아진다.


「물건들」의 '나'는 다이소에서 사온 물건을 들여놓을 집이라도 있다. 「2층 여자들」의 여자들은 집이 없어 고시원보다 조금 나은 곳에서 의심과 불만을 숨기고 살아간다. 가난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기본적인 예의도 잊게 만든다. 공용 부엌에 놓인 냉장고에서 누군가는 우유를 몰래 먹고 익명으로 게시판에 불만을 늘어놓는 등 소통의 창구마저도 닫아 놓고 살게 한다. 『쇼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쇼케이스」이다. 부부 작가인 그들은 생활에 치여 남편은 정육점에서 일하고 아내는 집에서 소설을 쓴다. 남편이 일하는 것을 모니터로 보면서 그가 가진 꿈의 크기가 오래되어 갈변한 고기의 빛깔처럼 변하지 않을까 아내는 걱정한다.


물론 이런 멋진 방에서 함께 글을 쓰는 것은 현실에선 요원한 일이었다. 설사 이런 방이 주어진다고 해도 집을 살 때까지 글을 쓰지 않겠다는 태환의 말이 사실이라면 희영의 상상 속 방은 희영의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했다. 멋진 방에서 글을 쓴다고 멋진 글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화려한 신혼집에서 행복한 신혼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희영은 머릿속에 환상적인 장면을 그려 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개연성이 없는 결말이라고 합평 시간에 혹독히 까일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원하는 대로 마지막 장면을 쓰곤 했던 습작 시절의 습관처럼.

(김의경, 「쇼케이스」中에서)


「쇼케이스」의 희영은 침대를 사러 이케아에 남편과 간다. 남편은 겨우 시간을 냈고 이케아는 너무 넓다. 너무 물건이 많다. 희영은 옷장에 숨어 있다가 하루만 지내 보자고 한다. 멋지고 근사한 '쇼룸'에서. 남편은 말린다. 희영이 침대 대신 사서 들고 온 건 조명이었다. 환해진 집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남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자신이 일하는 정육점처럼 밝아서. 남편의 말을 듣고 보니 조명은 집 안의 때를 더 잘 보여줄 뿐이었다. 곰팡이와 거미줄, 잡동사니들을 환하게 비추었다. 다음날 희영은 조명을 중고 장터에 올린다.


내게는 가구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책장이 있었는데 처리했다. 책상 하나와 서랍장 하나가 남았다. 가구를 사지 않고 짐을 늘리지 않은 이유는 이곳이 정류장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버스를 기다린다. 이곳은 잠시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곳. 그러니 더 이상의 짐은 안 된다는 생각. 『쇼룸』의 인물들은 집이 없거나 있거나 상관없이 이케아에 가서 쇼룸을 구경하고 예산에 맞춰 가구를 들여온다. 가구가 안되면 소품이라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도 그들에게는 필요하다. 천 원짜리 곰팡이 제거제를 사서 뿌리고 꽃과 잎사귀가 그려진 머그컵에 커피를 마신다. 쇼룸 전체를 사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며 조명을 사고 배송비를 아끼기 위해 헤어진 전남친에게 배송을 부탁한다.


작은 것에 만족하라며 무소유가 곧 소유라는 프레임으로 청춘들의 희망을 파산 시키는 사회에서 소설가 김의경은 말한다. 우리의 인생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반짝일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어야 하는 『쇼룸』이 아니라고. 알지 않는가. 『쇼룸』에는 가구들만 있을 뿐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을. 최종 목표는 서랍장 하나를 없애는 것이다. 책상은. 책상은 필요하다. 허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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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 욥기 43장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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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면은 목양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백승호의 말대로 주변에는 노래방, PC방도 없고 목양교회 담임목사 사모 권미정의 하소연대로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 사 마실 곳도 없는 적막한 곳이다. 주변에는 딸기 비닐하우스에 포도 농장이 있고 하루 종일 사람 보다 닭을 더 많이 만나는 곳이다. 유흥을 즐기려면 시간도 제대로 맞춰서 오지 않는 버스를 타기 위해 20분이고 30분이고 목양 슈퍼 앞에서 기다려야 한다. 농공단지가 세워지긴 했지만 산이나 깎고 공기나 더 나빠졌다. 폐비닐 재활용 공장에 다니는 백승호의 아버지는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하면 자기의 후임으로 쓸 작정이다.


그런 곳이다. 목양면은. 이름대로 양을 치거나 해야 할 것 같은 곳. 하지만 양보다 닭이 더 많은 곳. 그런 농사짓기를 물려 주기 보다 일찍이 공장에 취업해서 돈을 벌라고 부모가 아들에게 말하는 곳. 그곳에도 그곳은 있다. 교회. 중학교 영어 선생을 하던 최근직은 한 날 한 시에 아내와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다. 유조차가 그들이 탄 열차를 들이 받아 그만 겨우 살아남았다. 죽을 작정으로 산에 올랐다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계시를 받고 그는 신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으로 살았다. 그가 지은 목양교회는 목양면의 중심이 되었다. 재혼해서 낳은 아들 최요한이 담임 목사가 되었다. 최요한이 있던 교회 지하에서 불이 났다. 이기호의 소설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욥기 43장』의 간략한 내용이다.


소설을 설명하자면 목양면이 어떤 곳인지부터 밝혀야 할 것 같아서 길게 소개했다. 목양면은 좁고 커피 한 잔 사 마실 데 없는 아이들은 광역시에 나가 놀아야 하는 시골인 것이다. 이기호는 목양 교회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을 밝히기 위해 사건 관련자들을 한자리에 모은다. 소설의 형식은 신앙의 간증처럼 증언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증언이라는 게 듣는 사람만 앞에 있으면 못 할 이야기가 없다. 소설에서 증언하는 사람들도 사건 관련 이야기를 하다가도 엉뚱한 곳으로 빠진다. 담임 목사 최요한이 죽고 건물에 살고 있던 몇 사람이 병원 신세를 진, 목양면이 생긴 이래 최대의 사건을 파헤쳐 가는 소설은 건조하고 이상하게 웃기고 서글프다.


사건을 파헤쳐 갈 의지가 있나 싶은 청자를 앞에 두고 떠들어 대는 증언자들의 이야기 한마당에는 그들이 숨겨 놓고도 말하지 않는 비밀이 있다. 목양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은 화재 사건이 아닌 제목대로 방화 사건이다. 누군가 불을 놓았다. 도대체 왜? 교회와 교회를 둘러싼 주변 권력관계가 있었나. 아니면 교회를 증오하는 원한 범죄 때문이었나.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 위해 만 45세 소설가 이기호는 나이 모름에 직업은 무직인 하나님까지도 증언자로 불러온다. 영화 <밀양>에서 아이를 납치해 죽인 범인이 교도소 안에서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말에 신애는 가슴을 치고 울부짖는다. 하늘을 향해 여기를 보고 있냐고 소리친다. 신이 있다고 믿던 그들에게 신은 어디에도 없으며 너희들이 간절히 불러도 나는 너무 바쁘다는 사실만 알게 된다. <밀양>에서나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욥기 43장』에서나.


죄가 있고 벌이 있다. 용서는 어디에 있나.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욥기 43장』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세속적인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최근직의 진실은 무엇인가. 차분하고 맑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목양교회 담임 목사 최요한의 이면에 감춰진 비밀은 무엇인가.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행동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용서를 구하고 벌을 받아야 하는가. 이기호는 그 답을 모욕으로 들려준다. 신도 신의 대리자도 아닌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치의 형벌은 모욕이라는 말을 소설로 말해준다.


영화 <밀양>은 이청준 소설의 「벌레 이야기가」가 원작이다. 소설의 결말이 더 참혹하다.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욥기 43장』은 인간이 처할 수 있는 불행의 서사를 껄렁한 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소설이다. 만 45세 소설가 이기호는 모욕의 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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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매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8
김금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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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큰 결정을 내렸다. 결정하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결정을 하고 나서는 긴 시간 동안 후회와 불안, 두려움을 안고 지내야 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그때보다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다. 그러니까 김금희의 소설 『나의 사랑, 매기』를 읽고 나서는 만성적인 불안과 걱정을 조금은 떨쳐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유방암을 앓는 엄마를 돌보는 매기가 재훈에게 하는 이런 말 때문에.


"어머니 병세는 좀 어떠셔?"

내가 매기의 말을 기다리다가 안 되겠어서 먼저 물었다. 매기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냥 재훈아, 먹고 싶은 것 먹고, 보고 싶은 사람 보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고만 했다. 들어보면 환자를 돌보는 사람의 특별할 것 없는 대답이었는데 나는 아주 확실히 절망했다. 매기의 대답에는 말의 진기랄까, 온도랄까, 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中에서)


결혼한 매기와 어쩌다가 인연이 다시 닿아 만나는 재훈은 매기의 힘과 온도가 없는 말 때문에 절망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매기의 열기라고는 1도 느껴지지 않는 저 말에서 나는 하루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네 자리의 숫자 중 끝자리가 바뀌는 것으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내년이라는 시간 앞에서 조금은 당당해져도 될 것 같은 기분이 순식간에 든 것이다. 1월 1일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묻는 자리에서 나는 염세적인 성격을 숨기지도 않고 그 해가 그 해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라고 했다가 새해 일출을 보러 갈 것이라는 야심찬 계획을 하는 사람의 기를 죽이고 말았다. 그런 말을 잘도 내뱉고서 나는 다가오는 새해에는 희망이 가득 들어차고 소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질 것이라는 낙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금희의 소설 『나의 사랑, 매기』를 읽고서 말이다. 대학 때 어떤 신념에 휩싸여 플라토닉한 러브로만 일관한 재훈의 연애는 그가 입대하고 나서야 끝이 나고 말았다. 매기의 백 한번 째 편지의 이런 구절로 말이다. "잘 지내, 미래는 현재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긴 현재일 뿐이야." 재훈은 이게 이별의 말인지 미래를 함께 계획하자는 말인지 헛갈린다. 결국 전서구를 자청한 윤 병장이 가져다준 포스터에 매기가 쓴 문장으로 그 말은 단호한 이별의 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재훈은 오랜 밤을 의문과 불안으로 뒤척였다.



매기는 재연 드라마의 배우로 제주도에서 남편과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부주의한 성격의 친구를 둔 탓에 매기와 재회한 후 이상한 연애를 재훈은 하고 있다. 얼굴이 알려진 특성상 그리고 매기가 유부녀라는 사회적 제도의 특성상 그들은 레이디 치킨을 1층에 둔 집에서 만나거나 멀찌감치 떨어진 채 걷는 것이 데이트의 전부인 연애를 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온 현재든 현재로 이어진 미래든 그들에게는 현재라는 실감이 없는 상태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밤을 함께 보내고 맞이한 이른 아침의 끼니를 위해 찾아든 순대국밥집에서 유일하게 그들을 예쁘게 보아준 아줌마가 부르는 노래에서 그녀의 애칭을 따 매기라고 지은 시점에서 연애는 애초에도 그랬지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잘못된 길로 가는데도 그저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다.


김금희가 그리는 연애는 인물들의 대화나 행동에서 느껴지듯 열정이나 열기, 온기, 따뜻함 같은 발화점 이상의 온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낯설고 이상한 세계다. 그럼에도 그들의 아슬아슬한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는 없는 현재를 들여다보고 있는 나는 기이한 길의 삶의 방향을 지시받고 있다. 걱정은 단단히 붙들어 메고 파이팅 하자는 명랑만화의 주인공도 안 할 것 같은 대사를 나 스스로에게 하고 있다.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것 있으면 하고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보라는 『좋은 생각』의 글 속 마지막 문장의 말 같은 말에도 힘이 불끈 나는 괴이한 경험.


재훈의 목적 없고 미래는 전혀 보이지 않는 연애의 결말에서 삶의 무게란 야채를 고르고 그걸 들고 갈 수 있냐 없냐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선택한 야채니까 들고 가서 먹으면 된다. 누가 골라서 가방에 넣어준 것이 아니다. 무거워서 애초에 들고 가지 못할 것 같았으면 고르지 않아야 한다. 선택해서 넣었으니 들고 가야 한다. 재훈도 그렇고 매기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누가 선택해 준 것이 아닌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불안도 걱정도 두려움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고른 것이다.


나에게든 타인에게든 거절의 의사를 보이고 싶어 손목에 X자 문신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세상은 그렇게 거부의 의사를 명확히 밝혀야 진정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새해라고 별거 있겠냐라고 무신경하게 말해서 미안하다. 떠오르는 새해를 보고 이제는 달라지자 하는 마음의 정리 의식이 필요해서 그 일을 하겠다고 한 것일 텐데. 뻔뻔하게도 『나의 사랑, 매기』를 읽고 나는 내년에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걱정도 불안도 불만도 덜 한 사람으로 살 것이라고 다짐했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니 책에서 배우고 느끼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결국에는. '그의 사랑, 매기'는 잘 지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재훈도. 피해망상 쩌는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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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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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이토의 소설 속 『마리카의 장갑』의 배경은 루프마이제공화국입니다. 실제 하지 않는 작가가 만들어낸 곳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평등과 정의의 원칙이 우선시 됩니다. 크리스마스에도 트리를 꾸미기 위한 가문비나무는 어느 집이든 한 그루씩만 벨 수 있습니다.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숲의 정령이 산다고 믿습니다. 아이들이 열두 살이 되면 모두 수공예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여자아이는 실을 잣고 장갑을 떠야 하는 시험을 치려야 합니다. 남자아이는 접시를 만들고 바구니를 엮고 못을 박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나라에서는 자신들이 입고 먹고 살아갈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북위도 지방이라 겨울이 길고 춥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흑빵을 굽고 시마코프카라는 축하의 독주를 마십니다.


마리카는 루프마이제공화국의 나이가 같습니다. 마리카가 태어날 때 루프마이제공화국도 생겨났거든요. 가족의 축복 아래서 태어난 마리카는 나이 차이가 나는 오빠들과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지냅니다. 열두 살이 되어 치르는 수공예 시험을 간신히 치릅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루프마이제공화국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어 마리카는 힘들게 할머니에게 엄지장갑 뜨는 법을 배웁니다. 겨울이 긴 그곳 사람들에게 엄지장갑은 필수입니다. 여자들은 결혼할 때 엄지 장갑을 만들어 상자 안에 가득 넣어 가야 합니다.


엄지장갑은 털실로 쓴 편지 같은 것.

좋아하는 마음도 말이나 글 대신 엄지장갑의 색깔이나 무늬로 표현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좋아하는 마음'이 형상화되는 것입니다.

(오가와 이토, 『마리카의 장갑』中에서)


열다섯 살이 된 마리카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자신과 함께 춤을 추는 야니스. 마리카는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싫어하는 엄지장갑을 뜹니다. 야니스에게 어울릴만한 털실 색깔을 고르고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엄지장갑을 뜹니다. 루프마이제공화국에는 '예스'를 의미하는 말이 없습니다. 마리카에게 엄지장갑 고백을 받은 야니스는 장갑을 자신의 손에 끼는 것으로 마음을 받았습니다.


『마리카의 장갑』을 읽으면 온몸에 온기가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곳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루프마이제공화국 사람들과 함께라면 이 겨울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가 함께 떠난 나라의 여행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쁘게 채색한 그림의 여행기에서 루프마이제공화국이 라트비아를 모델로 한 배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발트 연안에 위치한 라트비아. 손으로 물건 만들기를 좋아하고 여행자에게는 웃음과 딸기를 건네는 소박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언젠가는 『마리카의 장갑』을 들고 라트비아를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장갑을 사고 파란 하늘을 배경을 사진을 찍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마리카는 슬픔에 빠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주로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엄지장갑을 만들며 사람들의 언 마음이 녹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마리카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하기 힘든 말을 합니다. 고마워. 그녀가 우리에게 건네는 온기까지도 함께 짜인 장갑을 받아듭니다. 장갑을 손에 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맑은 하늘을 보며 걷습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지요. 고마워! 한 번 더.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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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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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는 좋다. 신인 작가의 소설을 읽는다. 읽다 보니 나의 정서와 맞는다. 딱 내 취향이다. 작가의 새 책을 기다린다. 읽는다. 팬이 되는 것이다. 정세랑. 처음부터 이 작가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만큼 가까이』를 읽고 어머 이건 내 이야기인데,라는 생각. 다른 책도 찾아 읽었다. 절판된 책도 읽었다. 그리하여 나는 정세랑이라는 작가를 발견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이제는 그가 쓴 책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책 『보건교사 안은영』이 드라마로도 제작이 되는 등 유명한 작가가 되어 버렸다. 나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어 더욱 기쁘다. 장편 소설만 읽었는데 단편집이 나왔다. 사랑스러운 제목을 달고서. 『옥상에서 만나요』.


옥상이라니. 방과 후 옥상을 떠올리면 무서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은 그런 게 아니다. 밝고 명랑하고 다정하고 따뜻하다. 나는 대체로 긴 묘사로 시작하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읽고 보지만 처음부터 장황하게 시작하면 기가 빨린다. 정세랑의 소설은 타자 앞에서 속력을 줄이거나 휘어지는 등의 묘기를 부르는 변화구가 아닌 포수의 미트에 바로 꽂히는 직구 같은 스타일이다. 첫 시작부터 독자의 가슴에 직구를 때려 박는다. 『옥상에서 만나요』 속 아홉 편의 소설들은 대체로 발랄하고 튀고 명랑하다. 어두운 이야기도 정세랑의 손끝에서는 웃기고 우습게 된다. 사는 게 뭐 그리 어렵냐, 그냥 대충 살자 식의 낙관보다는 그래도 이상한 것들을 좋아하면서 살아보자라고 말해준다.


한 벌의 웨딩드레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 「웨딩드레스 44」를 시작으로 정세랑은 그만의 명랑한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기괴한 남자를 만나 인터넷에 자신의 신상이 공개되어도 흔한 이름을 가진 덕에 자신이 누군인지 몰라서 다행이라는 소설 「효진」. 나는 '효진'에게 무한한 자신감을 공급받으며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알다시피, 은열」은 역사 속에서 꼭 은열 같은 여자 두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표제작이기도 한 「옥상에서 만나요」이다. 일할 때 울고 싶으면 딱히 갈 때가 없었다. 혼자 화장실에 앉아 있었다. 「옥상에서 만나요」의 화자는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하면 옥상에 올라간다. 에어컨 실외기 쪽에서 서서 하늘을 본다.


그나마 '나'를 버티게 하는 건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세 명의 언니들이다. 그 언니들이 한꺼번에 결혼을 하면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는 궁금하다. 비슷한 시기에 어떻게 그렇게 한꺼번에 결혼들을 하는지. 언니들이 털어놓는 비결은 이랬다.


"우리가 비결을 말해주면, 다른 데 안 말할 자신 있어?"

의자 깊이 기대어 있던 소연 언니가 물었어.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할 수 있는 한 가장 순진하고 믿음직한 얼굴을 했고.

그러자 예진 언니가 뭔가 얄팍하고 누리끼리한 노트 같은 걸 하나 내밀었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주문서야."

"고려대에 뭘 주문한다고요?"

"이 바보 자식, 똑바로 들어. 오더(order) 말고 스펠(spell)이라고!"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 中에서)


웃기다. 나는 이런 말장난이. 고려대에 뭘 주문하는 게 아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비기를 받아들고 어쨌든 '나'도 결혼에 성공한다. 결혼을 하긴 하는데 남편을 만나긴 만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결혼과 남편이 아닌 게 문제다. 정세랑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대책 없는 명랑함이다. 지구인 아닌 생물체가 출현하고 뱀파이어 비슷한 게 나오고 귀를 잃었는데 귀에서 과자가 자란다. 정세랑은 명랑함과 기발함을 더해서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간다. 세랑 의 세계로.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일찍이 세랑의 세계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혼을 하는 친구 집에 가서 물건을 잔뜩 사가지고 오는 이야기 「이혼 세일」 . 갑자기 죽은 언니를 기억하기 위해 돌연사. net를 만드는 소설 「보늬」. 소식국과 대식국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전쟁 그리고 먹는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그린 「이마와 모래」 . 소설집은 어느 편을 골라 읽어도 흡족한 웃음을 지을 만큼 포근하고 발랄하다. 우중충하고 심각하고 우울한데 정세랑은 그만의 온기로 덮인 소설을 비정한 세상으로 내보낸다. 옥상에서 만나자면서 말이다. 준비가 되어 있다. 언제든지 옥상으로 튀어 올라갈 준비가.


결혼과 이혼. 취업과 해고. 탄생과 죽음. 우리는 늘 반대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다. 결혼을 하면 행복하고 이혼을 하면 불행하다. 취업을 하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해고를 당하면 죽어야 할 것 같다. 태어나면 축복이고 죽으면 슬프다. 이 모든 이분법적인 공식을 정세랑은 깨뜨린다. 그래서 좋다. 해보고 후회하라지만 나는 안다. 그런 일들은 굳이 하지 않아도 후회할 것임을. 세랑의 세계에서 우리는 마음껏 웃으며 낄낄거리고 옥상에서 만나 에어컨 실외기 밑에 붙어 있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비기를 얻을 것이다. 그곳에 '어느 자리에서든 유머와 재치를 잃지 않는 대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들어 있는 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지도 모르니 우리 모두 옥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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