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그 여자의 부엌 - 부엌에서 마주한 사랑과 이별
오다이라 가즈에 지음, 김단비 옮김 / 앨리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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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무엇을 하나. 밥을 한다. 밥을 먹는다. 끝. 오다이라 가즈에의 칼럼을 묶은 책 『그 남자, 그 여자의 부엌』은 그게 다가 아니라고 말한다. 부엌이란 생활의 시작이자 끝이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 요소인 음식을 하는 그곳에서 오다이라 가즈에는 사랑과 이별을 마주한다. 부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책에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부엌의 한 풍경을 만났다. 38세의 회사원이고 1인 가구로 살고 있는 여성의 생활과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 뒤에 미각을 잃었다. 편의점 음식으로 하루를 버텼다. 의무적으로 먹는 음식에 질려버렸다.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기까지 안간힘을 내야 했다.


사는 건 안간힘이다. 먹기 위해서가 아닌 살기 위해 음식을 먹는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녀는 하루하루를 이런 식으로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부엌에 들어간다. 밥과 된장국과 생선구이. 안치고 끓이고 굽기만 하면 되는 건데 그걸 하지 못했다. 남편과의 마지막 날에도 음식을 했다. 그게 상처가 되어 부엌에 들어가지 못했다. 서서히 생활의 감각을 찾기까지 많은 망설임이 있었지만 그녀는 해냈다.


그날그날의 작은 일상을 야무지게 살아간다. 밥을 안치고, 국물을 내고, 된장국을 끓인다. 병원에 가서 특별한 치료를 받거나, 돈을 들여 답답한 마음을 풀러 여행을 가거나, 어려운 책을 읽지 않아도,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 부엌에 서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과 마주하고 잃어버린 시간과 대치했다. 그리고 지나간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다이라 가즈에, 『그 남자, 그 여자의 부엌』中에서)


『그 남자, 그 여자의 부엌』에서 만난 사람들의 일상은 평범했다. 노부부, 4인 가족, 1인 가구, 노숙자 부부, 여성으로 이루어진 가정, 재혼 가정, 2인 가구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다양한 형태의 삶이었지만 공통적인 모습은 부엌이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를 잊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단순히 음식을 하는 공간이 아니다, 부엌은. 오다이라 가즈에는 그들의 부엌에서 삶의 의미를 하나씩 찾아내어 우리에게 보여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미각을 잃은 여성이 음식을 하기까지 그녀가 잃지 않았던 삶의 희망이 보이는 듯해 입술을 깨물었다. 작은 일상이다. 부엌에서 밥을 하고 먹는 시간으로 내일의 일을 견뎌야 한다.


사과 한 알. 두유 하나. 빵이 있다면 빵으로 아침의 허기를 급하게 달랜다. 앉지 않고 서서 꾸역꾸역 삼키고 버스를 타러 간다. 부엌에서 마주하는 나는 하루를 시작할지 말지 결정하지 못하는 불안의 나다. 나를 위해 차린 음식, 혼자 먹어도 근사하게라는 제목이 달린 타인의 식탁을 훔쳐보는 열등감의 나다. 요리할 줄 모르던 나는 반찬을 사 와서 처음 몇 번을 차려 먹다가 이내 잊어버리고 그릇째 버리곤 했었다. 당장의 허기를 잠재우기 위해 인스턴트 음식을 먹고 맵고 짠 음식의 뒷맛을 느끼며 잠이 들곤 했다. 부엌은 수저를 씻고 가끔 물을 끓여 먹는 곳으로 전락했다. 퀴퀴한 냄새가 나서 어느새 문을 열지도 않았다.


정갈한 부엌과 음식 사진이 함께 있는 오다이라 가즈에의 편안한 글을 읽으며 내가 가진 부엌의 기억을 떠올린다. 다행히 지금은 『그 남자, 그 여자의 부엌』에 나오는 깔끔한 부엌은 아니더라도 나만의 부엌을 갖고 있다. 미역을 불리고 양지 살을 사와 간장과 마늘을 넣어 국을 끓인다. 간은 되도록 싱겁게. 김치와 생양파를 썰어 곁들여 먹는다. 한 끼 밥을 먹기 위해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어두운 과거는 조금씩 잊혀 간다. 음식이 썩어서 버리는 일은 거의 없고 계란 몇 알 정도는 늘 구비해 둔다.


부엌. 밥을 하고 밥을 먹는 곳. 그게 끝이라고 말한다면 더 할 말이 없지만 『그 남자, 그 여자의 부엌』은 한 끼 식사를 하기 위해 나와 당신이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집이 없어도 깨끗함을 유지하고 편견과 냉대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고 오래된 주택에서 살며 이웃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것, 이 모든 것이 부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의 부엌에 책을 놓아두었다. 서랍장에는 그릇과 책, 공책, 일기장, 사진첩이 들어 있다. 참기름을 꺼내야 하는데 책을 꺼내 그 자리에서 한두 장 넘겨 보다 그대로 독서 시간을 갖기도 하는 곳. 부엌은 우리가 그리운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머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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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 지혜의 시대
변영주 지음 / 창비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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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나 때문이든. 당신 때문이든 간에 말이다. 세상은 바뀌지 않고 나만 바뀐다. 긍정적이고 발전적으로 바뀔 수 있거나 부정적이고 퇴행적으로 바뀔 수 있는 건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달려있다. 이사카 코타로의 어느 소설 중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바뀔 수 없지만 나는 바뀔 수 있다. 바뀐 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라도 바꿔야 한다는 주인공의 말을 늘 생각한다. 게으르고 무책임한 나. 책임이 싫어 복잡한 일은 피하는 나. 긍정보다는 불안을 먼저 내세우는 나. 진짜 바꿀 수 있을까.


영화감독 변영주의 강의를 담은 '지혜의 시대' 시리즈 『영화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는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도전하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우r게 하는 책이다. <방구석 1열>에서 쉽고 친절한 언어로 영화와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는 변영주는 이 책에서도 청중을 향한 자신만의 확실한 영화 철학을 들려준다. 영화뿐만이 아니라 모든 꿈이 사라져 가고 있는 시대에 청춘들에게 삶을 향한 조언과 유머 섞인 이야기를 말한다. 책이 짧다는 게 이토록 아쉬울 수가. 다큐멘터리의 정의부터 한국 영화가 처한 현실과 바람을 가감 없이 이야기한다.


제가 본 소설이나 영화 중에 좋았던 것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대개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억울하잖아요. 저는 수십수백 편의 그저 그런 작품들을 보고 그중에서 한두 개를 발견한 건데 그걸 알려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당황스럽고 억울하지요. 저는 여러분도 재미없는 작품들을 보고 견디는 지루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 명작을 찾아낼 의무와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변영주, 『영화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中에서)


영화를 만들든 만들지 않는 사람이든 간에 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변영주 감독에서 청중은 '특히 좋아하거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다른 소설 혹은 영화는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한다. 변영주 감독은 '재미없는 작품들을 보고 견디는 지루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 명작을 찾아'내라고 말한다. 씩씩하고 거침없는 화법이 음성 지원이 되는 듯해 읽다가 웃음이 났다. 죽어라 읽어서 재미있는 작품을 찾아내는 것인데 그걸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뼈 때리는 대답인 것이다.


쉽지 않다. 살아가기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조차 몸이 피곤하고 힘들어서 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저 프로그램 명령이 입력된 기계처럼 하루를 버티는 것이 전부인 삶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만드는 변영주는 자신이 만든 영화가 낮은 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연대하는 삶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잃지 않는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상업 영화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기까지 감독 변영주는 연대라는 책임을 끝까지 가져간다.


제가 만드는 영화가 세상을 더 좋아지게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영화를 본 사람들이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아주 다른 거거든요. 제 영화는 그런 일을 할 힘이 없지만, 제가 제 호수 안에 있던 어떤 물고기를 잡아먹고 만들어낸 한 문장 하나가 여러분에게 세상과 싸우겠다고 결심할 마음의 휴식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러면 저 스스로는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분들이 자신만의 호수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변영주, 『영화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中에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뒷걸음질 치기보다 한 걸음 나아가는 선택을 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있고 그가 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누군가가 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 일이 세상을 조금씩 움직이게 한다. 내 안의 호수의 깊이를 가늠해본다. 그 안에 뛰어놀고 있을 나의 다정한 마음들을 바라보며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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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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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박준


그곳의 아이들은 

한 번 울기 시작하면


제 몸통보다 더 큰 

울음을 낸다고 했습니다


사내들은 

아침부터 취해 있고


평상과 학교와 

공장과 광장에도

빛이 내려 


이어진 길마다 

검다고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엽서를 모으던 때가 있었다 한 장에 백 원 천 원을 들고 열 장을 사서 돌아나오는 길에는 세상의 모든 그리움의 말을 적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펜을 들고 이름을 쓰려다 망설이다 엽서를 책 속에 끼어 놓았다 아무말이나 적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때 적지 못한 말은 지금의 슬픔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다짐은 우리는 혼자일 것이라는 예언이다



낮과 밤

-박준


강변의 새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떠나는 일이었다


낮에 궁금해한 일들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답으로 돌아왔다


동네 공터에도 

늦은 눈이 내린다


한숨 자야 하루를 보냈다는 실감인 날이었다 오전에 일을 잊기위해서라도 낮에서 밤으로 바뀐 걸 보고야 잠이 드는 시간 흐린 하늘을 날아 새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눈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새들이 날아간 그곳에는 낮과 밤이 존재할까 모든 의문을 묻은 채 잠이 든다



입춘 일기

-박준


비가 더 쏟기 전에 약국에 다녀왔습니다 큰 길에는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제 시내는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凄然이 가까워졌다면 기억은 멀어졌다"라는 메모를 해두었습니다 비를 맞듯, 달갑거나 반가울 것 하나 없이 새달을 맞고 있었습니다


거리에는 불빛보다 사람보다 문 닫은 상점이 더 많았습니다 임대와 폐업을 알리는 현수막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습니다 1월을 걸어 2월 지나 3월에는 봄을 만날 것이라 예감합니다 봄이 먼저 와 있을 것이라는 편지가 도착하기 전까지 달려가겠습니다 아득한 오늘에서 선명한 내일의 일로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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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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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막연히 '너'라고 명명하는 것은 꼭 하나의 대상만이 아니다. '너'는 나일 수 있고 연인일 수도 있고 오지 않을 것 같은 소망일 수도 있고 풀리지 않는 물음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푸른 그늘을 걸으면서 우리는 '너'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찾을 수 있을지도. 그러나 '너'에게로 가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쉽지 않다. 마치 그베르더의 시처럼 말이다.

(허수경, 『너 없이 걸었다』中에서)


허수경의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를 읽는 시간은 내내 밤이었다. 쉽게 밝아오지 않는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시인과 함께 뮌스터 거리를 걸었다. 시 한 편에 산문 하나씩. 잠이 들었다가도 새벽 두시, 세시에 깼다. 왜 이럴까. 의문을 하기도 전에 이제는 세상에 없는 허수경의 손을 잡고 성당과 역사, 박물관을 순례했다. '너'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허수경은 한국에 두고 온 그리움을 절절하게 풀어 놓는다. 서울의 바쁜 일상과 고향 진주의 느린 저녁을 떠올린다. 시인은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뮌스터 거리를 걷고 또 걸었던 듯하다. '너 없이'.


시인이 아프다고 했다. 읽을 힘이 남아 있을까. 병을 겪으면서도 문장을 읽고 또 읽었을 시인. 아낀 힘으로 시어 하나를 떠올렸을 시인. 살아있다는 착각에 빠진 우리는 그저 '이곳'에서 시인이 남긴 글을 읽는다. 다른 별로 시집과 그토록 사고 싶어 했던 화가의 화집을 들고 살러 들어간 뒤 아직 잘 있다는 소식이 없다. 별이 너무 작아 해가 뜨고 지는 풍경을 의자 위치를 바꾸어 가며 보기를 바랄 뿐이다. 뮌스터의 가을과 겨울 그리고 서울의 봄을 우리는 기억하겠다. 늘 생각하지만 애도는 힘이 든다. 떠난 그이의 빈자리를 어루만져도 빈자리는 실감 나지 않는다. 비어 있는데도 말이다.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아마도 손을 잡아주는 일이 아닐까. 손을 잡는 순간이 끝나면 그때야 오열이 터져 나온다.

(허수경, 『너 없이 걸었다』中에서)


손을 잡지 못하면 이별한 것이다. 언제든 잡을 수 있는 손이었는데. 마디가 툭툭 불거지고 주름이 자글자글 잡힌 손이었다. 한 번씩 쥐고 있으면 너무 작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 손. 그 손을 이제 잡을 수 없다. 죽음은 손을 잡지 못하는 것. 시인과 뮌스터 시내를 걷는 동안 사라져 간 손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거닐었는데 기억만 존재할 뿐, '여기'에는 아무도 없다.


운하 길을 걷다가 늦은 시간임에도 불이 켜진 도서관의 불빛을 볼 때마다 설레는 마음은 분명 돈과 명예로 가려는 마음은 아닐 것이다. 정신을 단련시키는 동안 통장은 비어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늘어간다. 문학이나 미학이나 철학을 공부랍시고 할 게 아니었다는 자괴감도 커져간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소리 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책들을 향한 열망을 버릴 수는 없다.

(허수경, 『너 없이 걸었다』中에서)


가난한 독일 유학생이었던 시인은 책 욕심만은 어쩌지를 못했다. 책을 사지는 못해도 자주 구경하러 가던 서점 주인과 친해졌다. 시인이 말하지 않아도 주인은 책을 추천해주었다. 시와 고고학. 사라져가는 것들을 향한 열망이 담긴 학문. 시인은 땅속에 묻힌 역사를 발굴해내듯 시를 썼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땅속에는 많은 것들이 묻혀 있었다. 그들의 한숨, 기쁨, 해지는 풍경, 저녁의 밥상, 아침의 반가움들. 새벽은 느리게 찾아왔다. 그리고 시인이 남긴 거리의 기록은 끝이 났다. 삶은 이어지고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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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녹는 온도
정이현 지음 / 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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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편의 소설과 열 편의 산문. 정이현의 『우리가 녹는 온도』는 독특한 구성 방식의 이야기책이다. 이야기 하나에 산문 하나가 실려 있다. 『우리가 녹는 온도』의 부제는 '그들은 나는 우리는'이다. '그들은'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허구다. 짧은 소설로 반려동물, 짧았던 첫사랑의 추억, 제주에서 만난 인연, 여행 계획의 온도차, 방 하나를 얻기 위한 가난한 연인의 하루, 우정과 사랑 사이, 커피의 취향,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훈련, 딸과 엄마, 일상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소재로 이야기를 꾸려 나간다. '나는'이라고 시작하는 산문은 소설가 정이현의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다. 소설 한 편을 쓰기까지의 과정, 이야기를 만드는 어려움, 삶의 고비를 넘기는 그만의 치유 방식이 들어 있다.


일요일 오전에 읽은 『우리가 녹는 온도』는 훌렁훌렁 잘도 넘어갔다. 암막 커튼을 치고 햇빛을 모른척하고 누워서 읽었다.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는데 좋은 책이었다. 따뜻한 이불과 좋아하는 인형들 사이에서 열 편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아니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 나이를 훌쩍 먹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장되지 않은 문장과 담담한 일상을 말하는 글에서 나의 하루를 위로받고 있었다.


사라진 것들은 한때 우리 곁에 있었다.

녹을 줄 알면서도, 아니 어쩌면 녹아버리기 때문에 사람은 눈으로 '사람'을 만든다. 언젠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사는 것처럼.

곧 녹아버릴 눈덩이에게 기어코 모자와 목도리를 씌워주는 그 마음에 대하여, 연민에 대하여 나는 다만 여기 작게 기록해둔다.

(정이현, 『우리가 녹는 온도』中에서)


바람만 불지 않는다면 완벽한 일요일. 나의 마음은 얼어 있다가 잠시 녹았다. 다시 얼겠지만 문장과 행간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소설가의 진심 어린 위로 덕분에 녹았다.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든 적이 있었다. 내일 아침 부신 햇빛에 다시 녹겠지만 긴 밤이 외롭지 말라고 장갑과 모자를 씌워 주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일은 그런 것이었다. 장갑을 끼워주고 목도리를 둘러 주는 일. 곧 죽을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저 내일 아침까지 견딜 수 있도록 지켜보아 주는 일.


익숙하지 않아 위로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소설가 정이현. 위로를 받기 보다 위로를 하는 쪽이 낫다고말한다. 그는 한 권의 책을 쓰는 것으로 얼어붙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위로의 방법을 택한다. 『우리가 녹는 온도』를 읽는 동안 반가운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왔고 얼른 위험한 이불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미세한 온기에도 녹아버리는 눈+사람. 다정한 한 마디를 들으면 눈물을 줄줄 흘리는 사람. 어차피 죽을 거란 걸 아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사라짐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요일 오전 위로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으로 시작하는 글을 쓰기 좋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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