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이 있어 문학동네 시인선 109
박상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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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왜 말이 없니?


-박상수


피부가 거칠어져서요, 모이스처 리무버로 입술을 닦다가 내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을까 창문을 닫느라 그렇죠, 벙어리장갑을 목에 걸고 거스름돈이 부족해도 말을 안해요, 타이머가 돌아가면 오븐에서 재가 되는 말, 타이어를 맞추기에는 너무 작은 손, 힘이 없어요 당신이 나에게 실망하셨기를 바라요, 두 번 세 번 타자기로 정리해도 입을 열면 사라지네요, 있었다고 믿을 뿐인 나의 이야기, 가끔 내 말소리에 내가 놀라요 후추나무처럼, 수줍은 후추나무처럼, 철 지난 바닷가에서 우둘두툴 조개껍질을 손에 쥐고 난 이불을 덮죠 아무것도 빼앗기기 싫어서 입은 지운 채 앙금을 만들어요 팥앙금, 밤앙금, 허니머스터드와 말린 과일도 넣고(편리하지만 죽어가는 농담도) 졸이고 졸여 멋진 잼을 만들어요 그런 게 내게 있다고 사람들을 속이기로 해요 미니 증기선을 타고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고기를 못 잡아요 산호 보석도 없어요 난 자주 흔들리지만, 살 수 있고, 이제는 너무나 많이 지워졌지만.


난 자주 흔들리지만, 살 수 있고. 난 자주 힘들지만 살 수 없고. 난 멍청하지만 살아가고. 난 잘난척하지만 지쳐가고. 무수히 많은 말을 지껄이다가도 입을 다무는 하루. 왜 그렇게 말이 없니라고 물어봐도 할 말은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수줍어서 말 못 했다는 건 거짓말. 구라. 나의 지난 이야기를 하자면 술보다는 자주 고개 끄덕거림과 한숨이 필요한데. 지금은 너무 많은 말이 우리를 스쳐 간다.



소풍


-박상수



화관을 장식했던 꽃이 머리칼을 떠나고 나는 몇 방울 물방울이 될 때까지 웅크려보기로 했다 엄마는 영 입맛이 돌아오지 않는 밥상, 홀로 상보를 덮었다 들었다 하겠지만 나는 낯선 역을 지날 때마다 기나긴 저녁이 되어갔다 독서등을 켜고 책장 여백에 글자들을 적고 있으면 쌓인 나뭇단 사이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새의 지저귐, 열차가 바오바브나무의 거리를 가로 질러가는 동안 말 없는 눈동자 가득 뿌리내린 뱀풀들이 흔들려 손을 흔들려 주었다 나는 잠결인 듯 뒤채는 소리를 내었다 모종삽으로 잘 파묻어주세요, 무지갯빛 엽서를 꺼내 손바닥 도장을 찍었다


손전등 아래에서도 글을 쓸 수 있었다. 가로등 아래에서도. 그냥 손만 잡고 살았다. 뼈마디를 만지는 나날들. 기차가 가는 풍경을 바라보다 해가 저물자 돌아오는 거리에서도 손만 잡았다. 과자 몇 개와 음료수를 사서 가방 안에 넣었다. 가난한 유년을 가졌는데 어느새 서로를 미워하며 마음 끓이는 시간이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버텨보기도 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새가 날아오면 흔들려 주기로 하자 마음이 날아갔다.



왠지 궁금한 기분 1월


-박상수


입김, 보온병을 껴안고 침대에서 일어나, 어딘지도 모르고 왜인지도 몰라, 그런 아침, 전기가 들어오면 팔레트에 물감을 차고 입김을 녹여 태양을 그릴 텐데, 제자리 뛰기를 해도 심장은 움직일 줄 몰라, 손을 넣으면 열이 나는 장갑은 없을까 경축 아치 밑으로 걸어갔는데 내 수호 동물은 가죽만 걸려 있었어, 미안하며, 자꾸만 여기가 아니래, 입김, 모피를 두르고 썰매 안에 눕지만 제설차는 멈춰 있다 내내 돌아보지만, 빙빙 돌아오지만, 입김, 내겐 아주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건 어디 간 걸까


그건 어디 간 걸까, 왜 물어보는 건데. 네가 모르면 나도 몰라. 뻔뻔하게 질문하지 마. 짜증 나. 어떤 창문 밑에서는 태양빛이 굉장해. 빛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 다녀. 등이 뜨거워. 팔이 아파. 잠이 오면 잠을 자. 먹고 싶으면 대충 아무거나 먹어. 참지 말고.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입술을 꽉 깨 물어. 제발 내 앞에서 울지 마. 고개 숙이지도 말고. 그냥 걸어. 앞만 보고.



왜일까. 왜 우리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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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두 살 여자, 혼자 살만합니다 - 도시 여자의 리얼 농촌 적응기
가키야 미우 지음, 이소담 옮김 / 지금이책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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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키야 미우는 최근에 알게 된 작가이다. 국내에 출간된 책은 전부 읽었다. 아니다. 『70세 사망법안, 가결』은 사 놓고 아직 읽지 않았다. 잠시 착각. 그 외에 나머지 작품 『며느리를 그만두는 날』, 『당신의 마음을 정리해 드립니다』, 『노후자금이 없습니다」, 『남편의 그녀』 그리고 방금 『서른두 살 여자, 혼자 살만합니다』까지 읽었다. 가독성이 꽤 높은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기 위해 찾아든 소설 『당신의 마음을 정리해 드립니다』를 시작으로 읽는 재미에 빠져서 한 권씩 찾아서 읽는 중이다. 다행히 최근까지 작품이 번역되고 있다.


『서른두 살 여자, 혼자 살만합니다』의 주인공 미즈사와 구미코는 최악의 하루를 보낸다. 회사에서는 계약이 만료되었고 연인의 감정을 넘어 혈육의 정을 느끼는 남자에게서 애인이 생겼다는 통보를 받는다. 함께 집세를 내고 사는 집에서 나가달라는 정중함과 무례함이 섞인 말도 듣는다. 처음에 구미코는 좌절했다. 일본은 집을 구할 때는 보증인을 세워야 한다. 건실한 직장에 다닌다는 증명서가 필요하고 통장의 잔고도 넉넉해야 한다. 그 모든 사항에 구미코는 해당되지 않는다. 자신보다 어린 여자애와 결혼하겠다는 동거인은 예전에 그녀에게 청혼을 했었다. 구미코는 당시로서는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거절했다. 그걸 지금에서야 후회할 줄이야.


후회해봐도 이미 늦은 일. 구미코는 당장에 길거리로 나앉게 생겼다. 그전에 살 집을 구해야 하는데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텔레비전에서 젊은 나이에 농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다큐를 본다. 일본 농업의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는 당찬 그녀에게서 기운을 얻어 농업 대학교에서 실시하는 농업 연수를 듣는다. 도시에서 힘들다면 농촌으로 가자. 그곳에서 먹을 채소를 재배하고 더 나아가 밭을 경작해서 수입을 올리자. 희망찬 생각을 했더랬다. 현실은 가혹했다. 서른두 살 독신 여성에게 농촌은 냉담했다.


농사 일이라는 게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땅을 빌리는 데 조건이 까다로웠다. 가족이어야 하고(남편이라는 존재는 필수였다!) 자식에게는 농업을 물려줘야 한다. 조건이 충족되었어도 그냥 땅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고 몇 년 정도 농사짓는 것을 보고 정착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면 빌려준단다. 구미코는 대학 시절 시골에 연립이 있다는 선배에게 연락을 해 집을 구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일은 험난하기만 하다. 다큐에 나온 여성은 농사일이 힘들지 않다고 했다. 기계가 발달해 여성 혼자서도 충분히 농사를 짓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녀의 프로필을 찾아보니 이런 그녀는 부모가 농사일을 하고 땅과 집을 이미 갖춘 상태에서 농업에 뛰어든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구미코와는 출발이 달랐다.


좌절하지 않는다. 소설은 내내 명랑하고 밝다. 여성 혼자 살아가기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처럼 마냥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지 않다고 말해준다. 집과 일을 구해 자립하는 것으로 기본적인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구미코의 좌충우돌 체험기를 통해 보여준다. 구미코가 농사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후지에가 결혼 미팅 프로그램에 참가할 것을 제안한다. 구미코는 마다하지 않고 가서 코미디처럼 진행되는 남녀 짝짓기 현장을 체험하기도 한다. 도전해 본다. 일단 해본다. 구미코 주변의 여성이 결혼으로 안락함을 보장받으려 했다면 구미코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혼자서는 할 수 없다. 그녀가 힘을 낼 수 있도록 주변에서 도움을 준다.


서른두 살. 각자의 기준을 들이대자면 젊다면 젊고 나이가 들었다고 한다면 들었다는 나이. 일 년이 지나 서른세 살이 된 구미코는 과연 혼자 살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남의 행복을 축복해주는 사람은 자신의 상황 역시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남의 행복을 질투한다. 자신이 불행할 때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불행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성격이 특별하게 비뚤어진 것은 아니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가키야 미우, 『서른두 살 여자, 혼자 살만합니다』中에서)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의 행복 앞에서 불행이나 불안을 연출하는 사람으로 살 수는 없다. 누구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 아닌 자신으로 행복해지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어 책 읽기의 진도가 나아가지 않는다면 가키야 미우의 소설들을 추천한다. 초긍정 바이러스가 온몸에 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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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52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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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것 이후에


-이제니


흰 집 건너 흰 집이 있어 살아가는 냄새를 희미하게 풍기고 있다. 거룩한 말은 이 종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나 자신도 읽지 못하도록 흘려서 쓴다. 하늘은 어둡고. 바닥은 무겁고. 나는 다시는 오지 않는 사람을 가지게 되었고. 너는 말 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읽히지 않는 문장이 되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문득 울음을 터뜨리는 얼굴로. 마음과 물질 사이에서 서성이는 눈빛으로. 인간 저 너머의 음역으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돌보는 말과 돌아보는 말 사이에서

밀리는 마음과 밀어내는 마음 사이에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 하나하나 감정을 잃어버리듯이. 한 밤의 고양이와 친해진 것은 어느 결에 사람을 저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사람이라는 말. 그저 사랑이라는 말.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울어라.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네 자신으로 존재하여라. 두드리면 비춰 볼 수 있는 물처럼. 물은 단단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남겨진 것 이후를 비추고 있었다.



시가 되지 않는 밤에는 종이 위에 아무 말이나 써 놓고 엎드려 울었다. 조금 더 고민하고 문장을 쓰고 싶었는데 그대로 잠들었다. 손에 연필을 꼭 쥔 채로. 꿈 속에서 시를 썼다. 굉장한 문장으로 시인으로 살아가는 꿈이었다. 꿈에서 깨보면 공책에는 흘려 쓴 글씨가 번져 있었다. 모두 떠나갔는데 단 한 사람만이 남은 시절의 기억이다. 꿈이었으므로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지붕 위에 집을 마련한 고양이를 멀리멀리 보내버리고 싶었지만 그 녀석들의 우는 소리를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그런 날이었다.



나무 식별하기

-이제니


그 나무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무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평생 제 뿌리를 보지 못하는 나무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 눈과 그 귀와 그 입에 대해서.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에도 나무는 자라고 있었다. 나무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밤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있다. 나는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너도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그늘과 그늘 사이로 밤이 스며들고 있었다. 너는 너와 내가 나아갈 길이 다르다고 말했다. 잎과 잎이 다르듯이. 줄기와 줄기가 다르듯이. 보이지 않는 너와 보이지 않는 내가 마주 보고 있었다.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꿈에서 본 작은 나뭇잎이었다. 내가 나로 사라진다면 나는 바스락거리는 작은 나뭇잎이라고 생각했다. 참나무와 호두나무 사이에서. 전나무와 가문비나무 사이에서. 가지는 점점 휘어지고 있었다. 나무는 점점 내려앉고 있었다. 밤은 어두워 뿌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침묵과 침묵 사이에서. 어스름과 어스름 사이에서. 너도밤나무의 이름은 참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밤의 나무 아래. 너도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밤. 어둠 속에서 나무들은 서로를 어떻게 부르고 있을까. 한 자리에 오래도록 붙박혀 있는 삶에 대해 감히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바람이 불면 잎사귀 몇 개 떨어뜨려 보내 주고 온 몸을 비벼 잘 있다는 신호를 보내주는 것 밖에 상대에게 해 줄 수 없을 때, 나무는 쓸쓸해진다. 나무의 비어있음. 나무의 허무. 나무의 서글픔. 나와 너의 거리를 확인하는 것만이 사랑을 할 수 있는 일들이 나무에게는 있었다. 밤에 스탠드 불빛 아래 앉아 시를 베끼는 일이 내게는 그런 일들이었다.



한 자락


-이제니


사랑과 비밀을 바꾸어 울고 있었다. 휘감긴 것은 꿈 속의 말이었다.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사라지는 것은 모두 어디로 가는가. 사라지는 것이 골목과 골목을 만들고 있었다. 골목과 골목이 벽과 벽을 만들고 있었다. 벽과 벽이 과거와 과거를 바꾸고 있었다. 무수한 과거 속에서 무수한 얼굴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제는 오늘 다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래에 가까워지고 있씁니다.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기쁩니다 기뻐요. 그러니까 너와 나는 멀어지면서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벌어지면서 좁혀지고 있는 것이다. 휘날리는 휘장과 휘장 사이에서. 한 자락 한 자락 휘날리는 얼굴이 되어. 다시 만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보이고 있는 것이다. 너의 발목에는 이국의 낱말 하나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잊지 않으려고 잃지 않으려고 문장을 새겨 넣었습니다. 가까운 듯 멀리서 한 자락 노래가 드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음과 음이 몸과 몸으로 만나고 있다. 머릿속으로 공명하는 소리. 마음으로 마음으로만 우는 소리.


미래

혹은 미레.




나는 나의 운명도 모르면서 시의 운명이나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쓰지 않은 시. 내가 써야 할 시. 누군가 쓴 시. 누군가가 쓰지 않았으면 하는 시. 긴 밤의 미래는 다가 올 새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절망하는 밤의 시간. 시를 쓰는 사람의 운명이란 빈 종이와 마주하는 아침의 참담함. 예언은 널려 있었고 소원은 기약 없이 대기한다. 시가 되지 못한 언어는 노래가 되기도 한다던데. 소문일 뿐이었다.



시를 쓰겠다고 공책을 샀다. 시를 쓰겠다고 책상에 앉았다. 쓰다만 시는 쓰레기가 되었다. 쓰레기가 되어도 좋았다. 연필을 잡은 손이 아프면 유통기한이 지난 파스를 붙였다. 밤에 음악을 듣지 않은지 오래. 이제니의 끝날 것 같지 않은 긴 시를 읽으며 사라진 노래를 이어 부른다. 미를 치다가 미치고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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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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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줄은 모르지만 정말 하고 싶은 간절한 순간에, 그 마음 그대로 오래오래 앉아 있기만 해도 저절로 하게 되는 기적의 순간이 온다는걸, 예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다. 시를 쓰는 일도 그렇게 시작을 했더랬다. 정말 쓰고 싶어 빈 종이 앞에 밤새워 앉아 있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연필을 들었다.

(김소연, 『나를 뺀 세상의 전부』中에서)


김소연의 산문집 『나를 뺀 세상의 전부』 겨울 이야기 첫 편은 '간절한 순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타가 가지고 싶다는 시인의 말에 다정한 친구는 집에 남는 기타를 선물로 주었다. 그 기타를 들고 아는 코드 몇 개로 노래를 지어 부른다. 노래가 되다가 노래가 안 되다가. 시인의 겨울은 기타를 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기타를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기타를 쳐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잊지 않고 불러내어 가장자리를 쓰다듬는다. 나의 꿈이 바래어지지 않도록. 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할 수 없는 이유를 먼저 생각해 낸다. 어렵고 힘들고 막막하다는 이유로 하고 싶은 순간을 지워 버린다.


시인에게도 시 쓰기는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 정말 쓰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채.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올 때쯤 제목을 쓰고 하나의 단어를 종이에 옮기는 순간 시의 운명이 찾아온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는 시인보다는 시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김소연의 하루의 아침과 저녁 그리고 보통의 날을 보여준다. 겨울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봄, 여름, 가을을 거쳐 다시 겨울에서 끝난다. 보통의 날들. 계절에서 만나는 일상의 장면을 소곤소곤 말해준다.


시 쓰는 사람의 자의식보다는 생활인 김소연의 내면을 풍부하게 그린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에서 만나는 모습은 놀랄 만큼 다양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는데 내 이야기를 덜어내자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부부. 혼자 외국 여행을 하는 할머니. 해녀들에게 욕 먹은 이야기. '해야 돼'라는 말에서 느껴졌던 자유분방함.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와 담근 첫 김장. 이야기 안에는 '나'가 있지만 풍경으로 보자면 구석에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어색하거나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중심에 있었더라면 몰랐을 사유를 포착해 낸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불 켜진 문구점을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가 연필과 공책을 들여다보던 시간이. 표지가 예쁘고 줄이 없다는 이유로 공책을 사고 캐릭터가 있어서 같은 종류의 샤프를 샀다. 물건을 사서 기뻐야 하는데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내일은 써야지 다짐했던 지난날. 내가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는 헛소리는 믿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한다. 마주한 공책을 보며 연필을 들고 써야 한다. 손가락을 움직여야 한다. 그럴 때 내 마음속 나는 나에게 해도 돼가 아닌 '해야 해'라고 외친다.


김소연 시인은 산문도 시처럼 쓴다. 산문집의 마지막 '다시 겨울 이야기'는 소곤소곤하던 시인의 목소리가 조곤조곤으로 바뀌는 부분이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이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어른은 이제 필요 없다. 시 쓰는 어른으로서 그녀는 세상에 외치고 싶은 이야기를 마지막에 가서야 들려준다. 내가 할 수 없다면 누군가는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도 근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점 주인이 될 수 없다면 일일 직원으로 사전만 파는 가게를 꿈꾸는 것으로 살아가는 일. 선물을 주기가 힘들 때 그림책을 골라 주는 요령도 하나 배워간다.


낭비한 인생이었다고 말해도 괜찮다. 실수도 내가 해봐야 실수라는 것을 안다. 곧장 달려가 해보는 것도 호흡을 고르고 천천히 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중요한 건 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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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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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아쓰코의 에세이 『밀라노, 안개의 풍경』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아스라한 풍경의 자리를 더듬어 간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얼마 후 그녀는 닛폰유센의 화객선을 타고 제노바에 도착한다. 승객이 고작 네 명이었다. 배가 정박할 때쯤 폭풍우가 몰아쳤다. 하선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했다. 조금 있자 하늘이 맑게 개었다. 비에 씻긴 거리를 걸으며 처음 만난 유럽의 신기한 얼굴을 마주했다. 가을에서 겨울, 파리 대학에서 강의를 듣기 위해 프랑스어 말고도 두 개 이상의 언어를 공부해야 했다. 말이 통하지 않은 동양에서 온 작은 여인은 문학에 몸을 맡기기로 한다. 8월 10일이라는 날짜에 의미를 부여하곤 하는데 그날은 스가 아쓰코가 이탈리아에 첫 발을 디딘 날이었다.

『밀라노, 안개의 풍경』은 그녀가 밀라노에서 만난 안개의 추억으로 시작한다. 추억은 힘이 세다고 했던가. 이 책을 관통하는 정조는 그리움과 추억이다. 문학을 공부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이별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한 어조로 술회하는 『밀라노, 안개의 풍경』에서 나는 슬픔을 마주한다. 슬퍼서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이십 대 후반에서 마흔까지의 시간을 그녀는 이탈리아라는 타국에서 살았다. 이방인의 얼굴로. 낯설어서 이제는 낯선 느낌까지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시절을 상상한다. 문학이 없었더라면 견디지 못했을 시간들이었다. 낯선 언어를 공부하고 친구가 보내온 흘려쓴 글자로 쓴 편지를 읽지 못해 남편에게 읽어달라고 했던 빈곤의 시간들.

무스타키 대신 레너드 코언을 건네주던 가티, 남편을 잃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던 나에게 수면제를 먹을 게 아니라 상실의 시간을 인간답고 성실하게 슬퍼하며 살아야 한다고 엄하게 꾸짖던 가티는 이제 거기 없었다. 그의 한없는 밝음에, 더는 나를 짜증 나게 하지 않는 가티의 모습에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스가 아쓰코, 『밀라노, 안개의 풍경』中에서)

문학이 없었더라면 견디지 못했을 시간들이라고 짐작하여 썼지만 스가 아쓰코의 젊은 날을 지탱해 준 건 사람들이었다. 낯선 이방인을 환대하기도 때론 마음을 나눠주기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전쟁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가 있었다. 번역 일을 맡기면서 단순히 일로 만난 사람으로 대하지도 않던 사람이 있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고 여행지에 함께 데려가 있는 힘껏 풍경을 마주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아끼지 않던 누군가들. 『밀라노, 안개의 풍경』에 실린 추억의 이야기 열두 편은 사람을 향한 연정의 기록이다. 삶이 힘들었던 건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지나온 시간을 앞에 두고 돌이켜 봤을 때 어떤 이의 마음속에는 애타는 그리움이 차오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두고 먼저 먼 곳으로 떠나갔다.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나와야 할까.

스가 아쓰코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남겨진 자로 타국에서 슬픔의 견뎌야 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그녀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이탈리아에서 겪었던 일을 글로 쓰기 시작한다. 버겁던 아픔이 문장으로 쓰이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녀는 기꺼이 자리를 내어준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잊혔지만 도시의 안개와 무심함을 가장한 풍경이 떠오른다. 상실을 겪어 낸 이가 불러오는 과거는 상실을 겪어야 할 이의 현재에 도착한다. 모두 슬퍼서 아무도 슬프지 않은 내일에 바쳐진다.

사바는 시에 관한 한은 '빵이나 포도주처럼' 진지하며 본질적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희구 혹은 결의를 지병처럼 짊어진 채 평생 고수해온 시인이다. 여기서 '시에 관한 한은'이라는 부분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사바에게 그것은 윤리나 인생을 논하며 다진 결의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시'에 대한 결의였다고 나는 해석한다.
(스가 아쓰코, 『밀라노, 안개의 풍경』中에서)

그리고 시가 있었다. 그리운 모국의 언어가 아닌 이방의 언어로 읽어야 했던 시가. 사랑하는 이와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서로에게 들려주던 밤이 있었다. 삶의 순간에 필요한 결의를 시에서 찾아야 했던 순간을 잊지 않았다. 모든 밤의 슬픔이 내게로 찾아올 때 읽어야 했던 시를 떠올린다. 『밀라노, 안개의 풍경』에 추억하는 그리움의 순간에는 사람과 시와 풍경이 존재한다. 누구를 떠올리고 누구를 떠올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때를 살았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삶으로부터 단 한순간도 도망치지 못했다. 아니 도망쳐 왔다고 생각했지만 늘 그 자리였다. 같은 곳에서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비탄에 빠져있었다. 내내 아프고 여전히 비겁했다.

책에도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스가 아쓰코의 전집은 여덟 권이다. 그중에 세 권이 국내에 번역되었다. 『밀라노, 안개의 풍경』을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던 이유에 대해 짐작하기 위해 서둘러 나머지 두 권의 에세이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베네치아의 종소리』를 챙겨 넣는다. 자신이 겪은 불행을 비감의 문장이 아닌 환희의 시간으로 돌려놓을 줄 아는 스가 아쓰코의 글에 존경을 표한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보낸 그 시간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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