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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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철의 『독의 꽃』은 한 번 읽으면 멈출 수 없는 소설이다. 곰팡이 낀 음식을 먹고 식중독 증세를 보인 '나'는 병원 입원실에서 기이한 환자 '조몽구'와 만나게 된다. 온몸에 발진과 진물이 흐르는 상태에서 의식을 잃은 조몽구는 밤이 되면 깨어나 세헤라자데처럼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곰팡이 독과 싸우면서 나는 조몽구의 인생 이야기를 기록으로 재구성한다. 소설은 독으로 시작해서 독으로 끝난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조몽구의 이야기는 소설 속 나를 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며 아득한 슬픔으로 끌고 간다.

소설에서도 나오지만 사람을 죽이는 독살의 유형 중 가장 끔찍한 것은 책장에 독을 묻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야기를 탐닉하는 자들에게만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독의 꽃』은 소설가 자신이 우리를 이야기의 심연으로 추락시키기 위해 책의 한 장 한 장에 독을 발라 놓았다. 절대 멈출 수가 없는 방식으로 말이다. 조몽구의 태생은 원치 않는 임신의 결과였다. 그로 인해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세상에의 거부라는 독과 싸워야 했다. 비염과 알레르기 증세, 두통은 조몽구를 안전한 유년의 세계에서 멀어지도록 만들었다.

『독의 꽃』에서 끊임없이 발화되는 독은 상징과 은유를 뛰어넘는다. 인간에게 독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이다. 『독의 꽃』은 생명을 유지하고자 독을 탐닉하는 자와 독을 멀리하는 자의 대결을 보여준다. 소설은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의 인생 전체를 복습하는 자리에 우리 모두를 불러 놓고 한바탕 굿을 펼친다. 이야기에 중독 당한 우리는 끝이 난 소설 앞에서 다시 처음부터 이야기의 시작이라는 문장을 만나면서 혼란에 빠진다. 알 수 없는 독의 병증으로 아픔을 호소하는 조몽구의 삶은 우리의 모습이었음을 깨닫는다.

아름다움과 추함, 어둠과 빛, 선과 악은 독과 약의 존재를 말하기 위해서 내놓는 『독의 꽃』의 대립어이다. 조몽구를 둘러싼 세계에는 중간이 없었다. 그는 늘 아픔과 치유라는 극단의 선택에서 머물러야 했다. 소설은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을 수밖에 없는 추리와 진술의 기법으로 쓰였다. 지루할 틈이 없이 펼쳐지는 사건 속에서 살고자 하는 한 인간의 처절함을 긴박한 서술로 그렸다. 독에서 피어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꽃이었다. 그것은 한순간 피어나 사라질지언정 모두가 간절히 바란 구원의 상징인 것이다.

독에서 태어나 독으로 죽는 인간은 절대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독의 모습을 드러내느냐 숨기느냐를 선택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인 것이다. 출생을 선택할 수 없었지만 삶의 모습은 바꿀 수 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독의 꽃』은 묻는다. 사랑이 있었나. 독에서 피어난 사랑을 가지고 죽음으로 회귀하는 인간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치명적인 『독의 꽃』의 다음 장을 넘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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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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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합평할 때의 일이었다. 어떤 선배가 써 간 소설을 읽고 소설가 선생께서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하루키는 하루키 스타일이 있는 거니까. 그걸 따라 하는 게 무의미해. 하루키가 아니면 쓸 수 없다니까. 그 선배는 하루키를 좋아해 하루키만 읽었고 생활 스타일도 그대로 따라 했다. 술자리 같은데 가면 남들은 먹지 못하는 비싼 맥주를 시켰다. 부엌 천장에 하루키 소설을 꽂아 두고 읽었다. 전부 기억은 안 나는데 그 소설에는 하루키 아류의 문장들이 가득했다. 온갖 상표를 나열했고 여자와 맥주가 나오는 장면이 나왔다. 분위기조차 흉내 내지 못한 그 소설은 수업 시간 내내 까였다.

그런가. 소설의 스타일을 흉내 낼 정도로 그가 그렇게 좋은가. 누구라도 읽을 수 있는 간결하고 경쾌한 문체로 소설을 써서 좋다는 느낌만 있었다. 읽는 건 쉬운데 읽고 나서가 문제인 것이다, 하루키 소설은. 하루키 월드에 입성한 독자들은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것처럼 소설의 상징과 비유를 해석한다. 하루키에 열광하고 환호한다. 심지어 한때 한국에는 하루키 스타일의 분위기를 묘하게 베낀 소설들이 출몰했다가 사라졌었다. 읽을 때 기분 좋으면 그만인 것이다. 소설은. 과잉으로 해석할 필요도 추종할 이유도 없다.

에세이만은 다르게 읽는다. 소설을 가볍게 읽고 의미를 찾아내는 것에 무의미를 느낀다면 에세이는 다르다. 국내에 번역된 하루키의 에세이는 거의 구해서 읽었다. 절판된 책도 몇 권 있어서 중고책으로 읽기도 했다. 소설과는 다르게(소설과는 다르지. 물론.) 에세이에서는 생활인 하루키의 모습을 마음껏 만날 수 있었다. 고양이를 기르고 음반을 모으고 달리기를 꾸준히 하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가한 동네 아저씨 같은 생활을 볼 수 있다. 열성으로 가르치고 깨우침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고 원고를 쓰고 식사를 해 먹는다. 신문을 구독해 읽지는 않고 신문이 있으면 읽기는 한다. 오페라를 좋아하고 염소자리와 천칭자리 별자리를 가진 부부 생활의 비애를 들려준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은 다소 늦게 도착한 에세이다. 1983년부터 1988까지 쓰인 에세이를 모은 책으로 젊은 시절의 하루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오래전 이야기라고 해서 고리타분하고 식상하다고 여기면 안된다. 그점에서 하루키 팬들이라면 좋아할 책이다. 여자 쌍둥이와 파티에 참석하고 싶다는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을 이야기한다. 헛된 망상이니까 공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쌍둥이와 데이트할 때 좋은 점과 안타까운 점을 들려준다.

세상에는 갖가지 사람이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좋은 점도 있거니와 나쁜 점도 있다. 잘하는 것도 있거니와 못하는 것도 있다. 여자를 꼬드기는 데 유능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요일에 집안일을 척척해내는 사람도 있다. 외판이 특기인 사람도 있거니와 묵묵히 소설 쓰는 일에 적합한 사람도 있다.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인간이 될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中에서)

외국인에게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영어 공부하는 일에 불필요를 이야기하면서 들려주는 저 말에 나는 감동했다. 본인은 번역을 하는 일을 하는데도 영어 회화를 능숙하게 잘하지 못한다고 밝힌다. 일본어로 말하는 것도 힘든데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라고 하는 겸손에서 용기를 얻는 것이다. 목적 없이 영어를 공부하려고 했었다. 나중에 도움이 될까 봐 혹은 현대인으로서 영어는 필수라는 광고성 발언에 현혹되었거나 해서 영어 책을 사서 앞장만 들쳐 보고 던지기를 반복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고 말은 통하는데 묘하게 마음이 맞지 않는 외국에서의 경험을 들려주며 나다운 나를 강조하는 담백함이라니. 주말에 읽는 하루키의 에세이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은 위로가 되어 편안한 낮잠에 빠지게 한다. 80년대 중반에 쓰인 에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던하고 엘레강스하고 스무스하고 나이브하다. 더 쓰고 싶은데 한계다. 일본과 외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던 경험으로 일본에서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들려준다. 시간을 건너와 2019년에 읽어도 어색하지 않는 나이스한 하루키를 만날 수 있다.(그나저나 영어 회화도 못하면서 기초 중학 영단어로 가득한 문장을 남발하고 있네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하루키의 표현대로 일요일에 집안일을 척척, 까지는 아니고 그런대로 해 내는 사람이다. 옷장 정리를 하고 싱크대를 닦고 책을 읽는다. 로렌스 블록의 번역되지 않은 책을 읽으려고 영어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번역된 다른 작가의 책도 재미있는 게 많잖아 하면서 스티븐 킹의 책을 읽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나약한 나 자신이 못나 보여서 괴로웠는데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의 이야기 대로 이것도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으로 주말 오후에 집안일을 마치고 충실하게 번역된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는 기쁨을 만끽한다. 제목 때문일까. 읽다가 낮잠을 때려 자고 다시 일어나 나머지를 읽었다.

하루키 선생님, 고마워요. 영어 공부해서 원서 읽겠다는 욕심을 깨끗이 날려줘서. 한국의 번역가들이 세계 최고임을 다시 환기시켜줘서. 그분들의 노고에 힘입어 저는 편하게 독서를 할 수 있어요. 아직까지 한국어로 쓰고 읽는 데는 문제가 없거든요. 최근에 『문예춘추』에 기고한 글 「고양이를 버리다-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말하는 이야기」도 조만간 한국어로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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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 - 제22회 스바루 소설 신인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1
아사이 료 지음, 이수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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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줄 알았다. 아사이 료의 소설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에는 기리시마가 나오지 않는다. 기리시마가 나오지도 않는데 제목에 떡하니 이름을 붙여 놓았다. 아사이 료는 첫 소설을 신인 작가의 패기로 똘똘 뭉쳐 놓았다. 제목에서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놓고 정작 소설에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묵비권의 수법을 쓴다. 소설은 열일곱 살의 나이를 가진 동아리 부원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촘촘하게 그려 놓았다. 그 가운데 요주의 인물 기리시마가 있다.

배구부 주장인 것 까지는 밝혀 두었다, 기리시마의 정체를. 어느 날 갑자기 기리시마가 동아리를 그만두고 일어난 일을 감각적인 필치로 청춘 영화의 장면들처럼 아사이 료는 펼쳐 놓는다. 실제 아사이 료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쓴 소설로 그 나이만이 쓸 수 있는 감수성이 가득한 소설이다. 아이의 세계를 이제 막 통과한 사람만이 기억해서 쓸 수 있는 감정이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다. 시골 고등학교에 동아리를 중심으로 고민과 걱정, 미래의 불안을 솔직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야구부, 배구부, 브라스 밴드, 영화부, 소프트볼부, 배드민턴부에서 활동하는 아이들은 학교 안에서 '위'와 '아래'를 생각하기도 하고 각자 속해 있는 동아리에서 위치를 걱정하기도 한다.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나의 고등학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입시 위주의 정책인 학교라 동아리가 활발하지 않았다. 독서부라는 다소 지루지루한 부서에 들어가 책을 읽다가 자다가 돌아오는 활동을 일주일에 한 번 했었다. 일본과 한국은 조금 다르구나를 체감했다. 운동부는 특별한 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애들은 수업 시간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고 시험도 치러 오지 않았다. 합숙을 하고 말이 거칠었던 것이 기억난다. 다른 공간에서 십 대를 보냈지만 고민은 비슷했을 것이다.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 속의 등장인물들이 겪는 성장통은 국적이 다르다고 해서 그 빛깔이 달라지지 않는다. 무채색이거나 희고 핑크빛이거나 시간이 지나면 밝은 푸른색으로 바뀔 것이다.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되거나 상상했던 자신의 모습에서 멀어져 있거나. 아사이 료는 예민한 시기를 지나는 아이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학교가 전부는 아니었다.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는 다른 세계의 세상이 있음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썼을 소설이다. 아이들이 하는 고민과 불안을 전부 이해한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다.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들의 내면은 단단하다. 부서지더라도 희망과 용기라는 접착제를 스스로 구해 다시 붙인다. 동아리를 나가는 것이 이상하고 대단한 사건이 아님을 내 친구 기리시마는 알았던 것이다. 배구부 주장이 아니어도 기리시마는 내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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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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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미숙』의 추천사를 쓴 황정은 소설가의 말대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속상했다. 이런 일도 있구나가 아닌 이런 일이 있었지 하는 마음 때문에 울고 싶었다. 미숙이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시간은 내가 보낸 그 시절과 맞닿아 있다. 같은 시절을 보낸 미숙의 이야기는 잊었으나 결코 잊지 못할 것 같은 과거를 불러온다. 장미숙이라는 이름 때문에 미숙아라고 불리는 미숙의 가난한 하루들을 천천히 넘긴다. 여분의 교복이 없어 하루 입고 모기향 피우는 방에 말리고 꿈보다는 현실을 먼저 생각하는 미숙.

미숙의 아버지는 시인이고 엄마는 식당 일을 한다. 첫 시집을 낸 아버지는 이후의 일이 풀리지 않는다. 그 화풀이를 엄마에게 한다. 비교 대상이 없어 김재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가난한지도 몰랐던 미숙이었다. 학교에서도 아무도 자신에게 살갑게 말 걸어주는 친구가 없었다. 글을 잘 쓰고 공부도 곧잘 해 반장까지 하고 있지만 계산 빠른 아이들은 미숙이와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미숙아라고 불리는 게 죽도록 싫다. 영악한 애들은 이름을 가지고 미숙이의 정체성을 만들려 한다. 『올해의 미숙』은 대사가 많지 않은 만화다. 미숙이가 느끼는 감정을 표정과 행동으로 추측해야 한다.

상황을 주고 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불쾌함과 절망감이 『올해의 미숙』을 끌고 가는 서사로 작용한다. 미숙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어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미숙아라고 불리는 교실에서 새로 전학 온 김재이를 만나고 그들만의 우주를 꾸려간다. 그러다 헤어지고 고등학교 때 다시 만난다. 『올해의 미숙』은 한 번쯤 경험했을 좌절의 순간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만남과 이별. 아픔과 치유. 희망과 절망. 반의 관계의 단어들로 『올해의 미숙』은 꾸려진다. 미숙이 끝내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다정하게 이름이 불려본 적 없는 미숙이 세상을 향해 건네는 건 반항이 아닌 화해의 악수다. 비뚤어지지 않으며 자신을 지켜나가는 미숙의 용기를 칭찬해 주고 싶다. 환경 탓을 하지 않는다. 나약한 얼굴로 살아가지 않는다. 미숙은 올해도 지지 않고 자신을 파괴하려 달려드는 생의 불우함에 맞선다. 어떤 사람은 『올해의 미숙』이 어둡게 느껴질 것이다.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이름 때문에 만들어진 별명으로 불리는 미숙이의 하루가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 미숙은 욕망하는 법보다 체념을 먼저 배우고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내내 눈치를 본다.

그런 미숙의 모습에서 예전의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처럼. 만화의 공간적 배경이 익숙하고 교실에 감도는 은따의 분위기를 안다. 누군가 손을 먼저 내밀어 주길 바라지만 막상 친해지기 겁이 나서 한발 물러섰다. 특별한 사건도 활발하고 명랑한 인물도 없는 만화를 끝까지 읽게 만드는 『올해의 미숙』의 힘은 부끄러워서 숨겨 놓은 일기장을 다시 꺼내 읽는 듯한 익숙함이다. 누군가의 과거와 현재는 나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올해의 미숙』은 보여준다. 미숙과 절미가 걸어가는 길 위로 응원의 구호를 외친다. 장미숙 힘내. 나도 힘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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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노동 찾기 - 당신이 매일 만나는 야간 노동자 이야기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38
신정임.정윤영.최규화 지음, 윤성희 사진, 김영선 / 오월의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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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즐겨보는 드라마는 《특별근로감독관조장풍》이다. 전직 체육 교사인 조장풍으로 불리는 조진갑이 근로감독관으로 맹활약을 선보인다. 저런 근로감독관이 어디 있겠어라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낀다. 야간 근무에 시달리는 IT 업체에서 일하다 뇌출혈로 쓰러진 은미 씨를 도와주는 조진갑. 직장에서는 조주사로 불리는 그는 근로기준법을 예로 들며 악덕 사장과 더 나아가 거대 악인 TS 기업의 비리를 밝히고 있다. 드라마가 진행 중이어서 어떤 결말로 끝날지 모르겠지만 부디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먼 나라 미국에서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영웅들이 이곳까지 찾아와 복수를 해주는데 우리 곁엔 조장풍만이 있을 뿐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 한 명이 있었으면 했던 게 소원이었다. 읽기 어려운 근로기준법을 해석해주고 법 조항이 타당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야기해줄 대학생 친구. 결국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죽었다. 그가 떠나도 우리 사회는 근로기준법이 있는데도 그걸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노동자를 부리며 살아가고 있다. 식당에서 일하던 한 노동자가 퇴직금을 달라고 하자 기분이 나쁘다며 700만 원의 돈을 천 원짜리로 바꾸어 세어 가라고 했던 사건이 있었다. 원래 퇴직금을 주지 않는 건데 달라고 했다고. 그 일을 노동청에 신고해서 감정이 상했다고. 그분은 두 시간 넘게 식당에서 천 원을 세어야 했다.

더 나열할 것도 없다. 법은 있는데 멀고 똑똑한 자들이 자신들 편의를 위해 이용한다. 『달빛 노동 찾기』를 읽다보며 든 생각은 우리 곁에 조장풍 같은 사람이 현실에서도 꼭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안다. 조장풍은 없다. 우리 스스로가 조장풍이 되어야 한다. 야간 노동자의 이야기를 르포로 기록한 『달빛 노동 찾기』에는 스스로가 조장풍이 되려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도로공사에서 일하는데 직원이 아니란다. 병원에서 근무하는데 직원 진료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모두 원청이 아닌 하청에 속한 용역 근로자이기 때문이다.

"3D 업종이라는 말 있잖아요. 우리는 4D야. 드림리스(dreamless). 갈 데도 없고 꿈도 없는 거지. 일하는 사람 30퍼센트가 혼자 살아요. 아니면 남편이 장애가 있거나 병원에 있어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와요. 생계가 절박하니까 이런 일을 하는 거지. 우리 하는 일이 비인간적이라고 봐요. 매일 여기서 사긴까 혼자 사는 사람들이 오래 남아요. 가정이 있어도 남남처럼 살고."
(『달빛 노동 찾기』, 「비행기에 저당 잡힌 혁명가」中에서)

이 책에는 자동차 구내식당 조리원, 대학에서 근무하는 시설관리직, 교도관, 병원 지원직, 지하철 역무원과 신호직, 방송 작가, 우정 실무원, 공항 관리직, 고속도로 순찰원의 노동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밤에 일한다는 것이다. 주야간 교대 근무자로서 겪는 어려움을 취재하고 있다. '야간 근무는 2급 발암물질'이라는 말이 잊히질 않는다. 그들은 낮과 밤이 바뀐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명과 근골격계 질환, 수면 장애, 공황 장애,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야간에 근무한다고 해서 수당이 높은 것도 아니다. 그들은 비정규직으로 정규직과 다른 임금 체계에 따라 기본 수당에서 조금 더 받는 수준이다. 월급을 더 받기 위해 야간 근무를 할 수밖에 없는데도 주간에 일하는 정규직보다 임금이 훨씬 낮다.

야간 근무 다음에 바로 오전 근무에 투입되었다. 회사에서 연락이 오면 집에 있다가도 가야 한다. 방송 작가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다. 전화를 꼭 쥐고 있어야 하고 개인 생활은 쉽지 않았다. 막내 혹은 내 커피라고 불리는 수모도 견뎌야 했다. PD의 말이 절대적이며 그들은 작가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야간 근무조를 2인에서 1인으로 바꿔 휴게 시간조차 없어졌다. 고속도로 순찰원의 경우 사고가 나면 한국도로공사에서 보험 처리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비로 해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망자의 보험금을 유족이 아닌 사장이 대신 가로챈 경우도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가만히 있지 않았다. 노조를 만들고 사람들을 모았다. 관련 법을 찾아 잃어버린 권리를 찾기 시작했다. 야간 근무를 하고 오전 근무에 투입되는 걸 바꿨다. 받지 못했던 수당을 받고자 소송을 했다. 외국인이 와서 가장 놀란 건 한국의 24시간 문화였다. 새벽에도 밥을 시켜 먹을 수 있는 곳. 편의점이 골목마다 불을 밝히고 있는 곳. 우리가 자는 사이에도 누군가는 땀 흘리며 일 하고 있다. 그들의 달빛 노동이 어두움에 가려지지 않길 바란다. 달은 언제나 빛나고 있다. 밤이 되면 비로소 보이는 달의 존재처럼 그들은 내내 빛나고 있음을 잊지 않겠다. 그들과 우리가 조장풍이 되어 사람 사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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