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 심윤경 장편소설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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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에게.

설아, 안녕. 잘 지내고 있니?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에게 편지를 받아 많이 놀랐지? 너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너를 조금은 알고 있단다. 어떻게 알고 있냐고? 바로 심윤경 소설가가 쓴 너의 이야기인 『설이』를 읽었기 때문이지. 감상을 먼저 말하자면 너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마음이 아프다가도 환해지기를 반복했단다. 어떤 장면에서는 책장을 쉽게 넘기지 못하고 책을 들고만 있었단다. 쉽게 할 수 없는 너의 마음속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줘서 정말 고마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너의 말을 듣고 간직하고 있을 거야.

부디 힘내

라는 식상한 말은 하지 않을게.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설이 너는 씩씩하게 이모와 살고 있을 테니까. 통백 식당의 양념 돼지고기와 파김치를 맛있게 먹고 있겠지. 그런 너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즐거워. 새해 첫날 풀잎 보육원 근처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버려진 너를 원장 선생님은 설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지. 네가 간직하는 최초의 기억은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한 것이었어. 너는 있는 힘껏 다해 울음을 터뜨렸지. 세상의 사람들은 너를 불쌍하고 가엽게 여겼지.

괜찮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너를 마음 아파했어. 따가운 시선과 의혹의 눈초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너는 공부를 잘하는 쪽을 선택했어. 사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선택보다는 선택을 당하는 쪽이겠지. 공부란 노력해도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은 법이니까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난 너의 명석함이 부러웠어. 네가 유기아동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어. 너는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줄 아는 아이니까 말이야. 설아, 배경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야. 환경도 마찬가지야. 불우하다고 해서 전부 나쁜 세계에서 살아가는 건 아니야.

그걸 네가 증명해줬잖아. 헝거 게임을 보며 영어 공부를 하고 화장품을 사기 위해 상금이 걸린 각종 경시대회에 나가는 설이. 올림피아드 수학 문제를 너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씩씩한 설이. 그 모든 행동은 너다움을 잃지 않기 위함인 걸 나는 눈치챘단다. 나 역시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사소한 노력을 해가며 살아왔거든. 소설의 끝으로 갈수록 네가 세상에 대해 깨닫고 알아가는 것에 지지와 박수를 보냈어. 너와 나의 삶이 어느 순간 교차되고 비슷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어 너의 목소리에 더욱더 귀를 기울일 수 있었어.

공감과 연대를 보여준 너의 삶에 나는 무한한 존경을 바치며 이 편지를 마무리할게. 세상은 각박하지만 온기로 물들어 있다는 걸 알려줘서 고마워. 네가 자라는 동안 너를 지켜주고 돌봐주는 사람들이 꼭 있을 거야. 힘을 내지 않아도 힘이 나는 하루를 보내기를 바랄게. 우리는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거야. 무한정 밝은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너로 인해 누군가 기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면 해.

사랑한다

는 말을 꾸밈없이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되는 거야, 우리의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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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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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를 그냥 읽었다. 누군가 책에 관한 감상을 물어온다면 그냥 읽었어라고 자주 말하는데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책에 대한 최고의 찬사에 해당하는 표현이다. 두 가지인 것이다. 재미없다 와 그냥 읽었다. 재미없는 편인 아니었고 그냥 읽을만한 정도의 소설과 에세이를 쓰고 있는 하루키. 어쩌면 국내판 제목이 더 근사한 『노르웨이의 숲』을 처음으로 읽었다. 뭐지, 뭔가 하는 감상을 남기고 다음 책으로 쓱싹쓱싹 독서의 세계를 넓혀 나갔다. 에세이를 특히나 즐겁게 읽었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읽었다. 세계적인 작가가 살아가는 일상의 스케치를 만나는 재미가 있었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하루키는 좀 독특한 작가라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는 것이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을 읽다가 든 생각은 이 에세이는 어디서 읽은 것인데라는 것이었다. 분명하다. 나는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 실려 있는 에세이 몇 편을 언젠가 읽었다. 벌거벗고 집안일을 한다는 미국 가정의 주부와 일본 가정주부의 이야기는 전에 읽었다. 예전에는 하루키의 책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집에 한가득 있었는데 정리했다. 이 글을 읽을 리 없겠지만 하루키 씨 죄송합니다. 분명한 건 다 읽고 정리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전자책을 주로 읽고 있는데 다행히 몇 권의 소설이 이북으로 나오고 있어서 그걸 사 모을 예정입니다. 『태엽 감는 새』는 벌써 사놓았지요. 혹시나 이 글을 읽는다면 한국 독자인 저를 위해 전자책으로 작품들을 낼 수 있게 해주실 수 있을는지요. 굽신굽신. 어쨌거나 나의 기억력은 영 쓸모없지는 않았는지 그때의 괴상했던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알몸으로 집안일을 한다는 것.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다. 그것도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니.

스물여섯에 소설가가 될지 안 될지 미래의 일이란 당장 내일의 일도 알지 못하는 그때에 하루키는 뮤즈라는 샴고양이와 함께 살게 된다. 이래저래 소설가가 되고 외국에도 나가 살면서 뮤즈는 다른 집에도 맡겨지고 이사도 다니면서 장수했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 실린 에세이를 쓰는 동안 함께 했다가 책이 나온 시점인 일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후기에도 밝히고 있지만 이 책을 뮤즈의 영혼에 바친다고 밝히고 있다. 고양이라는 생물과는 밤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 말고는 접촉을 해본 적이 없지만 꽤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인가 보다.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 사건 피해자의 인터뷰집 『언더그라운드』와 시기상 겹치며 쓴 에세이는 작가 하루키의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가 경쾌하게 전개된다. 한 쪽에서는 사건 피해자들과 만나며 이야기를 듣고 옮기고 다른 쪽에서는 그만의 감각으로 전혀 다른 세계의 생활을 들려준다. 여러 얼굴과 감성을 가진 작가인지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가와 에세이스트, 논픽션 작가 그리고 생활인으로서 하루키는 대단하다. 요즘 유행하는 '소확행'이라는 말은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나온 말이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서도 나온다.

말보로맨의 입간판은 뒤쪽에서 보면 쉽게 파악이 안되는 기묘한 상태라 뒤쪽만 보고는 무엇을 광고하는지 알 수 없다. 입간판의 앞을 알아야 뒤만 보고도 '아, 저거 말보로 맨 이지'하고 아는 것이다. 그는 말보로맨의 입간판 뒷면을 몹시 좋아한다. 마이너한 관심사에 취향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소확행'이라고 말한다. 소확행 소확행 하면서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살아라라고 명령하는 듯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무사 태평하고 건강한 유쾌함을 가진 하루키의 이야기라면 달라진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서 만난 '인생의 소확행'들이라면 네, 네 작은 것에 감사하며 오늘도 의미 없는 짓을 하며 살게요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모처럼 양복을 입고 식당에 갔는데 서비스가 만족스럽지 않아 아침나절의 귀중한 시간을 고객 불만 편지 쓰는 일에 힘을 쏟는다. 이상한 이름을 가진 러브호텔에 대해 대담을 나누고 공중 부유하는 꿈을 꾸는 사람들의 사연을 받는다. 달리기를 하는데 준비 운동을 지나치게 한 나머지 정작 본선에는 나가지 못하는 읽고 나면 날아가 버리는 가벼운 하루키 씨의 일상이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 촘촘히 모여 있다. 의미 없는 것이 모여 의미를 이룬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라는 책을 요약하면 이렇다.

여러 번 읽어도 감탄하는 일화가 있다. 재즈 바 사장에서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그 '어느 하루'의 이야기.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도 실려 있다. 그가 밝히는 것처럼 그는 그 하루의 일을 여러 군데에 썼다. 기억력 제로인 나도 기억할 수준이면 꽤나 썼다는 이야기이다. 여러 날과 다르지 않아 무심히 지나갈 수 있는 '어느 하루'는 작가로서의 자아를 발현할 수 있게 해준 시간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읽어보시기를.

(나도 따라 해보는) 소문의 진상 『상실의 시대』를 사서 읽고 정리하고 다시 예쁘게 나온 『노르웨이의 숲』을 샀단 말이죠. 그런데 『노르웨이의 숲』의 전자책이 딱하고 나와 버렸습니다. 사야 할까요라고 물어봤지만 저는 살 것 같습니다. 일본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하루키 씨의 요즘 발언과 작품에 다시 반하기 시작했거든요. 다시 그의 에세이를 읽어보니 그는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답답함과 편협함에 솔직한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작가더군요.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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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 신동엽 50주기 기념 신동엽문학상 역대 수상자 신작소설집
공선옥 외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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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인의 50주기 기념 소설집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에 실린 열 편의 소설을 천천히 읽었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을 쓴 작가들은 신동엽 문학상을 받았다. 상을 받았다고 해서 좋은 작가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어느 소설가의 표현대로 상이란 잘하고 있다는 격려 정도로 생각하면 될 일이다. 오래 읽어서 익숙한 작가도 있고 이름만 들었을 뿐 처음 읽는 작가의 작품도 있었다. 5월이다. 때아닌 폭염이 찾아왔지만 그늘 아래에 서 있으면 가벼운 바람이 불어와 마음이 살랑거리는 5월이다.

좋은 사람들이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계절이라고 여기기로 한다. 한 번 떠나면 돌아올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좋은 사람으로 내내 우리 곁을 머물고 있다.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반가운 사람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번갈아 나와서 잊기로 했다. 공선옥의 소설 「오후 다섯시의 흰 달」은 이루지 못한 꿈을 한바탕 꾸는 주인공이 나온다. 아들과 부인을 잃고 그에게 남겨진 숙제란 딸을 키우는 일이었다. 그 자신의 방법으로 최선의 방법으로 키운다고 키웠는데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휴게소에 남겨진 그가 부디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함을 공선옥은 애틋하게 남겨 놓았다.

창작을 한다고 가파도에 모인 작가들이 고장 난 자동차 르망을 고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김금희의 소설 「깊이와 기울기」에서 아련한 희망을 발견한다. 「가장 아름다운 마을까지 세시간」은 용서도 체념도 할 수 없는 지금을 살고 있는 청춘과 중년의 시기의 중간을 살고 있는 자들의 연대를 그린다. 김정아의 소설 「잃어버린 소년」은 분노를 넘어선 슬픔으로 응축한 절망을 느끼게 되는 이야기이다. 과거를 정당화하며 살아가는 현재란 지독한 범죄임을 일깨워준다. 「당산뜸 이웃사촌」에서는 김종광 특유의 넉살과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오늘을 만날 수 있다.

「장례식장에서」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김하기는 묻는다. 조해진의 「경계선 사이로」는 비정상의 정상화를 부르짖으며 상식을 외치던 자들의 외침은 무엇이었나를 추측해야 하는 소설이다. 타인이 쏟아낸 악담과 비난은 결국 어디로 흘러들어가는가를 탐구한 최진영의 소설 「그것」은 새로웠다. 상처를 주고받는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상처를 주기만 하고 받지는 않으려고 하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소설을 읽으며 나 자신의 생활과 태도를 점검하게 된다. 그러고 싶어서 소설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와 인물과 대화와 상황을 마주하며 빈곤한 사고력을 살찌운다.

시인은 명령했다. 단호하고도 힘차게. 껍데기는 가라.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주변과 나 자신은 힘들다. 돌파구를 찾으려는 시도로서 소설이 있다. 소설에는 말하고 싶은 것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의 이야기가 있다. 소외와 가난과 멸시와 배척을 이겨내는 힘이 소설에 있다. 알맹이를 찾고 우리가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내기 위한 몸부림이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에 담겨 있다. 너의 빛나는 그 눈에서 나는 오늘을 위로하는 다정함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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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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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고 감추고 싶은 자신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주는 누군가를 만날 때가 적어도 한 번은 있다. 적어도 한 번이라고 했지만 운이 좋으면 두 번, 세 번이 될 수도 있다. 부자거나 자신감에 넘치는 경우가 아니어도 된다. 불 꺼진 인도 쪽으로 걷고 눈을 맞추지 못해 시선이 불안정하고 말을 할 때 끝을 맺지 못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누군가를 만난다. 이름을 불러 이쪽 세계의 빛으로 데리고 오는 누군가를. 앤드루 포어의 단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주인공 헤더가 그러했다. 방정식 문제를 푼 유일한 학생으로 물리학과 종신 교수인 로버트에 의해 빛의 세계로 끌어올려졌다.

방정식의 풀이는커녕 방향조차도 잡지 못한 헤더는 A 학점 대신 로버트가 끓여주는 차를 얻어 마시게 된다. 로버트는 물리학을 헤더는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로버트가 헤더 보다 서른 살이 많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구성이 아니다. 그들은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 테이프를 들으며 주변부를 더듬고 중심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돌입한다. 헤더가 로버트에 로버트가 헤더에게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이후에 헤더는 의대생 콜린을 사귀지만 그에게도 그들이 가지는 만남의 사정을 말하지 못한다.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사건의 현상과 이론의 개념을 밝히는 일을 시시때때로 우리는 할 수 있을까.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묻는다. 당신 자신에 관한 기억을 떠올릴 때 그것은 인과 관계가 완전한 서사인가라는. 똑똑한 동기생 두 명조차 포기한 방정식 문제를 왜 끝까지 풀고 있었으며 평소에는 사적인 대화도 주고받지 않은 교수 옆을 지키고 서 있었는지. 십 년이 지난 지금 헤더는 그때를 기억하면 왜라는 물음만 할 뿐이다. 소설은 헤더 자신이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형식을 취한다.

'로버트가 마침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가을 학기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였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을 시작하는데 이 문장은 헤더의 질문에 답이 될 수 있는 문장이다. 마침내라고 쓰면서 헤더는 로버트와 앞으로 어떤 사건으로 엮일 것을 기대 혹은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이 방정식 문제를 요리조리 답만 피해 가면서 푼 시간 이후가 된 것일 뿐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인생의 우연을 설명하는 뻔한 잡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연은 필연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사건으로 당신 앞에 짠하고 나타나며 삶을 살아갈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준다.

로버트와 헤더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인간이 나눌 수 있는 가장 사소한 인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이로 되어가는 우연에 처했다. 헤더는 그 시간을 소중히 받아들이며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물리학, 영화, 가족, 친구, 아내, 별거라는 주제로 어둠에 묻힌 나들을 지상으로 끌어올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인간적인 거리감을 유지한 채.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이 두 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중요한 나의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었다.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中에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나라는 서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그 누구도 아닌 나라고 말하는 소설이다. 빛이 물질에 닿을 때 반사하거나 통과하는 이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화학 작용이 일어났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마주하며 발견한 이론의 명제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풀이의 해석과 답을 구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 충돌할 때 어떤 마음은 비껴가고 어떤 마음은 그대로 관통한다. 관통당한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주일에 단 하루의 기억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그 시간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쓰인 시험지를 보고 헤더는 사랑이었습니다고 풀이를 작성한다. 익숙하고 아름답게 느꼈던 존재의 실체를 깨닫는 순간 로버트는 차 한 잔을 마실 이유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로버트는 나이가 들면 도전이 아닌 피로감이 든다고 말한다. 늙어가는 물리학자는 자기 너머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을 갖게 된다면서. 로버트는 방정식의 답을 쓰는 사람이 아닌 풀이를 구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헤더는 삶을 살아가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헤더를 발견함으로써 로버트는 인생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실체를 찾을 수 있었다. 살아왔고 살아갈 난제의 답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비어있는 마음을 향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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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 보이스 문지 푸른 문학
황선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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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도 먹지 않아도 사람 사귀는 일은 어렵다. 학교 다닐 때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아 만남이 쉽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어렵고 막막했다. 새 학기가 되는 첫날 긴장 상태로 들어갔다. 빨리 파악해야 한다.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기존에 친한 아이들이 모인다. 중심을 파고 들어가는 것은 어려웠다. 전학이라도 다니면 한동안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내야 했다. 누군가 와서 말을 걸어주는 일은 흔치 않았다. 적응하기. 학교 다닐 때의 기억은 애틋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황선미의 소설 『틈새 보이스』는 학교가 아니어도 친구를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학교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인기 있는 그룹에 끼지 않아도 친구를 만나고 사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열일곱 아이들의 방황과 꿈을 향한 용기를 경쾌하게 그려 나간다. 성은 김이고 이름은 무인 '나'가 만난 아이들의 시간을 그리며 절망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다독인다. 무는 엄마와 살아가는 소년이다. 어느 날 엄마가 텔레비전에 나온 의사를 보고 괴로워한다. 무는 직감적으로 그가 자신의 아버지일 수도 있음을 알아차린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병원 근처의 분식집에서 기다린다. 제일 분식이라는 버젓한 이름이 있지만 건물과 건물 사이의 비좁은 틈새에 겨우 자리 잡고 있어 무는 그곳을 틈새라고 부른다. 밖을 잘 보기 위해서 앉은 원탁에서 도진, 윤, 기하, 해리와 만난다. 아버지라고 추측되는 남자에게 접근하려고 화실 비용을 엄마 몰래 피트니스센터에 냈다. 무는 자신을 세상에 내보내고 모른척한 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무는 어두운 과거를 마주 보고 몸과 마음에 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무를 응원하며 소설을 읽어 나갔다.

단문과 명사형으로 반복되는 문장으로 쓰인 소설은 읽는 재미가 있다. 무의 일상에 찾아온 모험을 따라가면서 부디 틈새에서 만난 친구들이 각자의 꿈을 간직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도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는 것은 힘들다고 인생의 스포일러를 남발하고 싶지만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것 또한 가치가 있는 일임을 알기에 힘내라고 외친다. 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며 나의 오늘을 안심하기 위함이다. 우리 모두 힘들게 어제를 지나왔다. 투렛 증후군을 앓는 윤과 유학 생활에 실패한 도진, 비밀스러운 일에 몸담고 있는 기하, 극복하기 힘든 유년을 보낸 해리. 자신이라는 존재의 근원을 찾기 시작한 무.

그들에게 보내는 작가 황선미의 온기가 『틈새 보이스』에 가득하다. 번듯한 어느 건물이 아니었다. 좁은 틈새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두 아름다운 내일이라는 자격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스팔트의 작은 틈으로도 고개를 내미는 민들레의 강인한 생명력은 우리에게 봄의 시간을 선사했다. 틈새에서 만나 싸우고 화해하고 격려한다.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희망을 품어 보는 것이다. 규율과 원칙, 타인의 시선을 강요하는 교실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보자. 일단 들이받고 깨져보는 것이다. 『틈새 보이스』는 친구가 없어서 외롭고 우울하다고 느껴지는 너에게 바치는 소설이다. 친구는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지 않은 우리가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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