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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평점 :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정유정, 『진이, 지니』中에서)
정유정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서사를 이끌어가는 힘 있는 문장에 있다. 거대한 서사를 뒷받침하는 각각의 문장은 독자를 한시도 소설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7년의 밤』을 읽었을 때가 떠오른다. 꽤 두꺼운 책이었는데 앉은 자리에서 전부 읽어버렸다. 다음 이야기. 다음 이야기. 사건은 사건을 부르고 인물이 처한 상황은 참담해서 차마 다음을 상상할 수 없었다. 상상하기 전에 읽어버려야 한다. 그래야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저녁에 읽기 시작했는데 새벽으로 시간이 옮겨 왔다.
『진이, 지니』 역시 그러했다. 인간과 동물이 교감하는 내용인가. 좀 뻔한 것 아닌가 하는 순간에 사건은 이상하게 흘러가면서 책을 덮을 수 없게 만들었다. 오호라. 이래야 정유정이지. 정유정의 소설을 좋아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기묘한 여백이 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특이하고 독특하다.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는 아이. 아이를 치고 은폐하는 남자. 가족 학대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자. 이제는 보노보.
그래 내가 원숭이, 침팬지는 들어봤다. 보노보라니. 『진이, 지니』의 시작 전에 보노보를 간략하게 소개해 놓아 어느 정도 정보는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을 읽는 중간에 찾아본 보노보의 생김새라니. 어린 보노보는 귀여웠고 성인 보노보는 인간이 짓는 표정과 유사해서 근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보노보는 밀렵과 내전으로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는 절멸 동물이다. 인간의 DNA 구조와 99%로 거의 비슷한 동물이다. 연대와 평화를 중시한다는 소개는 놀라웠다. 『진이, 지니』를 읽으면 더 놀라운 세상과 마주할 수 있다.
'한국과학대학교 영장류 연구센터'에서 책임 사육사로 근무하는 진이에게 그날 하루와 오늘 하루는 인생을 다른 궤도에 올려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밀렵으로 잡혀 있던 보노보를 모른 척하고 돌아선 그날 이후 진이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그리고 오늘의 사건. 근처 별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갇혀 있던 보노보가 탈출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오늘은 진이가 연구센터에서 마지막 근무를 하는 날이었다. 스승은 주저 없이 진이를 데리고 사건 현장으로 데리고 간다.
어린 보노보는 별장 우리에서 탈출해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 진이는 직접 나무로 올라가 회유를 시도한다.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그러자 보노보가 반응을 한다. 추위에 떠는 보노보를 데리고 스승이 운전하는 차에 오른다. 고라니 두 마리를 치고 차는 빗길에 미끄러진다. 사고의 순간 진이는 지니라고 이름을 붙인 보노보의 눈을 응시한다. 삶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기에 앞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문인 민주는 사고 현장을 목격한다. 민주와 진이/지니의 만남은 삶과 죽음의 정의를 바꿔 놓기에 이른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기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진이는 사랑도 절망도 한숨도 남기지 않는 선택을 한다. 정유정 다운 결말이다. 삶의 끝에는 달콤하게 속삭이는 행복이나 희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삶에 경배를.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아쉬움을 보이지 않기를. 『진이, 지니』는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소설이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저지르는 온갖 악행을.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진이, 지니』의 서사를 따라가는 시간은 황홀했다. 인간다움을 죽음에 대한 결의를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