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은유 지음, 임진실 사진 / 돌베개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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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오락거리가 많은 이 시대에 나는 왜 책을 읽는 것일까. 다른 취미 활동을 가져볼 만도 한데 말이다. 노래를 부르거나 물건을 모으거나 미래를 위해 공부를 좀 해두거나 해도 될 텐데. 아침과 저녁 시간에 주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읽기로 마음먹은 책은 끝까지 읽으려고 한다. 주로 읽는 책의 분야는 문학. 어려운 내용과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은 부족하다. 허구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읽으며 안도와 위로를 찾으려고 한다.

책은 나를 '알 수 없음'의 상태에서 '알 수 있음'의 단계로 나아가게 해준다. 뛰어난 머리는 아니지만 책을 읽으며 세계의 슬픔을 이해해 보려고 한다. 알지 못했지만 알 수 있는 나를 만들어 가고 싶다. 은유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외면하고 모른 척했던 고통과 슬픔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알지 못한다고 해서 어떤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게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해도 사건은 일어났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왜 일을 하면서 사고를 당해 우리 곁을 떠나는지 알았으면 한다. 더 이상 아이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알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서는 안된다. 은유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2014년 초봄에 한 아이의 죽음을 듣게 된다. 현장실습생으로 CJ제일제당에서 일하던 고3 김동준은 "너무 두렵습니다. 내일 난 제정신으로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라고 트위터에 글을 남기고 죽음을 택한다.

강압적인 회사 분위기와 선임의 폭행이 이유였다. 김동준은 프로그래머가 꿈이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동아마이스터고에 들어간 이유는 꿈 때문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램 기술을 배워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고3이 되어 현장실습을 나가게 되었지만 동준이가 배운 적성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되었다. 햄과 소시지를 만드는 진천 육가공 공장으로 실습을 나가게 된 것이다. 일이 힘들고 폭행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발설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는 두려움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스무 살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였다.

꿈을 가지고 공부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선량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아이들이 고통스럽게 사고를 당하고 죽어갈 때 어른은 없었다. 잔업과 야근을 시키고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폭행까지 했다. 사업장에서 일어난 재해이지만 회사는 돈을 주고 가족들을 입막음하기 바빴다. 제주도 생수 공장에서 일하며 기계에 몸이 끼여 중환자실에서 열흘을 살다가 하늘로 떠난 이민호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돈 없는 사람은 절대 애를 낳지 말아야 한다고.

자기 아픔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 씩씩하다. 자기 불행을 마주하는 내면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존재와 마주하는 것 자체가 내게 힘이 됐다. 누군가 나를 믿고 자신의 아픔을 내어주는 일은 나를 숙연하고 의젓하게 만들었다. 다 잃은 (것 같은) 절망에서만 삶이 내어주는 진실이 있기에 타인의 아픔을 듣는 일은 삶의 중핵에 다가는 귀한 체험이기도 했다. "삶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삶을 저버릴 수 있을 뿐이지요. 어떤 유형의 삶이든 우리에게 뭔가를 가져다줍니다."라는 중국 소설가 위화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은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中에서)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 아픔과 견딤 그리고 나아감을 말하는 책이다. 남부러울 것 없이 키운 아이들이 일을 하다 죽었다. 남은 부모는 어떻게 살아갈까. 그들의 상처는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은유는 아픈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이가 죽었고 시간은 흘러간다. 버틴다는 마음으로 견뎌낸다. 자신들이 겪은 일을 말하고 연대한다. 은유는 김동준 군의 어머니의 말을 듣고 이민호 군의 부모님을 만난다. 특성화고에서 일하는 선생님, 노무사, 학생,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 위원장의 목소리를 담는다.

책을 읽기 전에는 알 수 없음의 상태였다. 친구들 만나서 밥 먹고 부모님께 용돈 드리고 저축하고 싶은 작은 소망으로 일을 하던 아이들이 어떻게 쓰러져 갔는지. 그렇게 되기까지 어른들은 무얼 하고 무얼 하지 않았는지. 이제 알 수 있음의 시간으로 나아간다. 대한민국에서 돈 없으면 아이를 낳지 말라는 부모님의 절규에 가슴이 사무쳤다. 집안에 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일찍 철이 든 착한 아이들이었다. 왜 그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나.

아이들이 들어야 할 꼭 필요한 수업이 있다. 노동인권 수업. 근로계약서와 표준 계약서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직장 안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많은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말을 하는데 그보다 민주노총의 노무사에게 상담을 받는 것이 빠른 해결책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신분은 학생이라고 하면서 일의 강도는 어른 이상의 것을 요구할 때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미안하다. 너희들의 꿈과 희망을 알지 못해서. 너희들이 좌절과 분노로 슬퍼할 때 모른 척해서. 힘들 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어른으로 살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 나를 부끄럽고 쓸쓸하게 만들었다. 공부 잘하고 좋은 데 취직해서 사는 것보다 그저 곁에 있으면서 밥 먹고 웃어주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하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슬픔을 눌러두는 대신 '겸손한 목격자'로서 쓰인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서 나는 불행을 이겨낸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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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생이 온다 - 간단함, 병맛, 솔직함으로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임홍택 지음 / 웨일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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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인 인도법 반대로 홍콩에서는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시위의 주역...홍콩에도 90년 대생이 온다'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홍콩 시위대를 구성하는 연령 중에 10~20대가 절반을 넘는다는 내용이었다. 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가 시위를 이끌면서 변화의 바람을 이끌어 내고 있다는 내용을 읽으며 뭉클했다. 기존의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바라는 열망이 그곳에 모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하려고 했었고 성공 했었던 시도였다. 멀리서나마 응원과 지지의 마음을 보낸다. 임홍택의 『90년생이 온다』에서도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90년 생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90년생이 가지는 사고방식과 생활 패턴을 쉬운 언어로 분석한다. 그들이 쓰는 언어와 기존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 소비 세대로서 호갱이 되지 않으려는 모습이 담겨 있다.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모험 보다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려는 것으로 보이는 그들의 속내를 탐구한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에 저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와 모바일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었다. 생각도 간단하게 그러나 유머는 잃지 않으면서 영리하게 살아가기를 꿈꾼다. 어른들이 물려주지 못한 안정됨을 꿈꾸기보다 스스로 안정을 찾기를 원한다. 드립력을 가지면서 병맛 문화를 추구하며 팍팍한 현실을 살아간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소비 세대로서 90년 생들의 활약이다.

호갱이 되지 않기 위해 인터넷의 바다에서 정보를 찾고 윤리적인 기업의 물건을 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일방적인 주체가 아닌 정보를 생산하고 공유하는 능동적인 소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기업은 90년생을 직원으로 받아들일 때와 소비자로서의 면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밝힌다. 회사에 충성하며 헌신하며 헌신이 되어가는 세대가 아니다. 광고를 보고 현혹되어 그것만을 사는 충성 고객의 세대도 아니다, 90년생은.

『90년생이 온다』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시대의 흐름을 이끌어 가야 할 90년생의 마음의 지형이 어떤 모습인지 알려준다. 우리가 함께 이룩해낸 새 시대는 어리다고 꼰대처럼 가르치려던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책에도 나오지만 우리는 모두 꼰대이거나 미래의 꼰대이다(꼰대 테스트라는 것이 있는데 몇몇 항목에 예를 해버렸다). '얘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라는 마음으로 쓴 책은 '얘네 이런 생각을 하네'라는 공감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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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19 소설 보다
우다영.이민진.정영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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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여름 2019』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은 '시간'을 연결어로 읽을 수 있다. 과거를 들여다보며 이곳의 시간이 현재인지를 가늠해 보는 소설 우다영의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을 시작으로 「RE:」에서 이민진은 소설을 쓰려는 미래를 계획해 본다. 정영수의 「내일의 연인들」은 과거의 연인과 지금의 연인들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애를 쓴다.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도 문득 이곳의 나는 실제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나는 죽은 상태로 과거에서 온 시간 여행자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소설은 현실이라는 세계를 떠도는 유령들의 말잔치 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의 나는 죽었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환생을 꿈꾸며 사라진 고대의 언어로 문장을 적어 가는 것이다. 소설은 이제 아무도 읽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누가 소설을 읽나. 죽은 몸으로 시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그들만이 남아 이 세계를 기억하려 한다.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은 삶은 사는 것이 아닌 꿈이었을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과거를 떠올리며 여행하는 화자를 통해 이 세계는 다른 동굴로 잘못 들어와 버린 다른 세계라고 말한다.

죽은 자의 메일함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고 과거를 회상하는 이민진의 「RE:」의 시간은 이질적이다. 우리가 보낸 시절은 존재하는가. 『소설 보다 여름 2019』에 실린 소설을 읽고 나면 의문과 추측으로 시작하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소설의 임무는 기존의 질서에 길들여진 우리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정영수의 소설 「내일의 연인들」의 마지막은 쓸쓸하다. 이혼한 아는 누나의 집에 한동안 살면서 현재의 연인 관계를 유지하려 하지만 그마저도 불안하다.

현실은 고통으로 들어차 있지만 내일은 좀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낙관으로 소설은 쓰인다. 다행히 우리는 죽지 않았음을 소설로써 확인받는다. 계절별로 나오는 『소설 보다』 시리즈를 읽고 나면 이 계절을 열심히 살아냈구나, 안심이 된다. 살아 있고 살아가리라는 다짐을 해본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났고 나만 남아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여름, 이 계절의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보내온 편지 같은 소설을 읽으며 가능하지 않은 미래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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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의 내 삶은 형편없었다
임승훈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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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엔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가끔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게 그것 말고도 생각할 게 많기 때문이다.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것들. 돌아오는 날짜에 맞춰 준비해야 하는 것. 이것저것 빼고 더하고 해도 늘 0이 되고야 마는 절댓값이 찍히는 통장을 보고 있으면 한숨 내지는 두 숨, 세 숨 그러다 심호흡. 이렇게 쓰고 보니까 나는 하루를 온전히 그것만 생각하는 것 같아 우울해지다가도 이러면 안 돼 다시 명랑해져야지 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척하고야 만다.

황정은의 단편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는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가 나오는 소설을 쓰겠다는 주인공이 나온다. 그이의 심정을 이해할만한 것이 소설도 그렇고 현실에도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기에 자주 침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고를 당하고 병에 걸리고 황당한 일에 휘말려 결국에는 죽음으로 간다. 죽으면 끝이야라는 체념과 죽으면 죽은 이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고 의문을 가져보기도 한다.

임승훈은 「이서진을 닮은 탐정-새가 된 아내」에서 죽음의 상징을 '새'로 보여준다. 소설가의 이름과도 같은 주인공 승훈은 자신이 이서진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만나는 이들에게 이서진을 닮았다고 한 번씩 말할 정도이다. 당신 누구를 닮았는데 하면 네 맞습니다, 저는 이서진을 닮았습니다 하는 식으로. 이서진을 닮은 탐정 승훈에게 한 사내가 찾아온다. 새로 변신한 아내를 찾아달라는 황당한 의뢰를 한다. 아내는 아내인데 그 아내가 새로 변신해서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온갖 사람들이 찾아와 이상한 의뢰를 하고 그걸 받아들이는 게 일이기에 승훈은 새를 찾는 일에 착수한다.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답게 의뢰 비용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사내의 집에 방문해 사진과 아내로 추정되는 새의 깃털을 가지고 나온다. 마지막으로 아내를 그러니까 새를 목격한 이웃의 집을 사내는 알려준다. 승훈은 골목과 골목 사이를 돌아 새를 목격한 이들을 찾아 나선다. 그곳에서 사내와 아내와 새에 관한 진실의 조각을 모은다. 「이서진을 닮은 탐정-새가 된 아내」는 쓸쓸한 소설이다.

사건을 따라가다 만나는 진실의 무게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야 만다. 사내의 폭행에 시달리는 아내는 죽어 버렸다. 그녀는 죽어서도 이곳에 남고 싶어 했다. 파랑새가 되어 생전에 자신에게 친밀하게 대했던 이들에게 나타난다. 결국 죽어서까지 아내를 놓지 못한 남편에게 잡힌다. 임승훈은 무엇이든 찾아내는 게 직업인 탐정을 등장시켜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가치를 찾아내는 임무를 부여한다. 찾아냈다고 하지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진실이었다. 슬픔이었다.

파랑새를 찾아다니는 이서진을 닮은 탐정 승훈은 진실을 알아갈수록 진실은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찾아다니는 진실이란 한낱 종잇조각에 적어 놓은 메모에 불과한 것이었다. 낱말과 낱말 사이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사건은 벌어졌고 누군가는 죽었다. 살아 있는 자는 죽음의 의미를 캐고 단서를 찾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보내줘야 하는 것이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마음 아픈 의문 따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임승훈은 승훈을 빌어 「이서진을 닮은 탐정-새가 된 아내」에서 한 사람의 죽음 뒤에 남겨진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다. 삶에서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 용서, 만남, 기쁨의 순간에 가질 수 있는 '마음'을 생각하면서. 좁은 빌라에 갇혀 살다시피 한 사내의 아내는 '그녀'가 되어 떠나간다. 자주 돈에 대해만 생각하다가도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흐름 때문에 죽음을 떠올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죽을 수 없는 나라가 있다면 어떨까 하다가도 그건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임을 상기한다.

죽음이 있어서 겸손해지고 가끔 마음이 아플 수도 있다. 죽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읽으며 지구에서의 삶이 그럭저럭 괜찮은 것임을 우주로 돌아간 이들에게 쏘아 보낸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곧 알게 될거면서.
그런가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아직 읽어야 할 책이 많아서 나중에 갈게요. 「이서진을 닮은 탐정-새가 된 아내」를 읽고나니 『지구에서의 내 삶은 형편없었다』의 다른 이야기가 궁금해졌어요.
그러든지, 알아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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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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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의 소설은 문단을 잘 나누지 않는 형태이다. 대화도 문장 안으로 집어넣는다. 책을 펼치면 빽빽하다. 그럼에도 읽기 어렵지 않다. 술술 읽어 나갈 수 있는 이야기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사연을 넣어서 쓴 소설은 작위적이지 않으며 억지로 슬픔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이번에 나온 장편 소설 『상냥한 사람』을 꼭 읽어보시라. 실패와 좌절, 죽음의 이야기가 뭉쳐 있지만 살아갈 수 있다는 작은 용기가 솟아오른다.

어린 시절 엄마 가게에 찾아온 드라마 프로듀서의 눈에 띄어 아역 배우가 된 형민이 주인공이다. 드라마 속 이름인 진구로 한동안 살았다. 드라마가 끝나도 사람들은 형민이라는 이름 대신에 진구라고 불렀다. 그게 싫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진구라고 더 이상 불리지 않게 될 때는 서운하기까지 했다. 자신을 잊어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상냥한 사람』의 줄거리를 옮기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소설 안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 즉 사연들이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연이 모여 소설을 이룬다.

주로 사고와 죽음의 순간을 이야기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가지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사고의 순간에는 어쩌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 때가 있다. 어떻게 이겨 내야 할까. 『상냥한 사람』의 인물들은 주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때 어떻게 했더라면으로 시작하는 무수한 가정법을 실행하지 않는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기도 하지만 이제는 다 잊었다는 듯이 살아간다. 살아가는 동안 선택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상냥한 사람』은 선택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소설이다.

형민이라는 이름 대신 진구로 살아간 그때를 회상하며 시작하는 소설은 이야기와 이야기를 무수히 나열해 놓는다. 《인간극장》에 등장하는 우리 이웃이 경험했을 과거를 풀어 놓는다. 세상에 무슨 그런 일이 있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그 이야기 안에는 언젠가 내가 겪었을 시절이 담겨 있어 책을 읽다 말고 과거 속으로 역행해 들어간다. 사람에게는 한 번의 삶 밖에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야박하게 느껴진다. 『상냥한 사람』은 나에게 두 번의 삶이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상냥한 사람』은 인물의 이름에 대한 사연을 많이 소개한다. 마치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존재하기도 하는 것처럼. 사고를 당하고 불운이 닥치는 것이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남은 생을 쉽게 버틸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것이다. 누구를 탓해야 하나. 나에게 닥친 슬픔의 원인을 찾다가 이름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그렇게라도 해야 타인에게 '상냥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 상실을 경험한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소설 『상냥한 사람』.

소설을 읽을 때 천천히 읽었다. 기구한 자신의 삶을 담담히 말하는 것이 애써 슬픔을 눌러 보려는 움직임이 너무 빨리 지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들어주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살다 보니 의외로 사람들은 상냥하지 않았다. 상냥한 척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상냥함이란 대놓고 드러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 이름을 자주 불러주며 살아가는 것. 이 세계가 내게 부여한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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