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마음을 다해 디저트 - 대단할 것 없지만, 위로가 되는 맛
김보통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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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통의 『온 마음을 다해 디저트』에 나오는 식으로 말하면 나는 디저트를 좋아하는 편에 속한다. 달다구리. 달고 상큼하고 촉촉한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예쁜 먹을거리. 커피를 주문할 때도 시럽 많이. 그냥 쿠키보다는 초코 쿠키. 나는 초코쟁이라고 불린다. 빵집에 가서 무얼 고를까를 고민하는 게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순간. 냉장고를 열어보니 초코바, 아이스크림, 과자가 들어 있다. 심심할 때 도저히 힘이 나지 않을 때 하나씩 꺼내 먹는다.

내가 특이한 경우인가. 주변에는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럼에도 꿋꿋이 단 걸 사고 단 걸 먹고 단 게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김보통은 디저트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삶을 꿈꾸었다고 이 책에서 밝힌다.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 때문에. 바라던 대로 그는 디저트를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는 어른이 된 것 같다.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원하는 걸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삶이면 된다고 『온 마음을 다해 디저트』는 말한다.

읽는 내내 그림이 너무 귀여워서 마음이 환해졌다. 디저트 옆에 작게 그려진 보통이. 티라미수 옆에 기대어 있고 찐빵 뒤에 숨어 있다. 핫초코를 젓기도 하고 밀크티를 있는 힘껏 빨아먹는다. 각각의 디저트에 담긴 추억이 맞물려 사랑스럽고 귀엽고 발랄하다. 여행지에서 힘든 순간에 만난 디저트는 애틋하고 가족과 관련한 디저트는 짠했다. 평범한 문장인데 마음이 벅차오른다. 외할머니에게 사다 드린 베지밀. 회사에서 갈굼을 당하고 먹은 팥빙수. 꿈을 펼치고 싶지만 현실의 벽에 좌절한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소라빵.

디저트를 사는 것보다 밥이 되는 걸 사는 게 우선인 시절이 있었다(지금도 별다르진 않지만). 색색의 고운 마카롱을 보기만 하고 국밥보다 비싼(왜 국밥이 기준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무얼 살 때 저 돈이면 국밥이 몇 그릇이야 한다) 아이스크림을 멀리서 지켜보던. 디저트는 사치인 것 같은데 사치가 아니었으면 했다. 구깃구깃 구져진 나의 마음을 펴주기 위해 나에게 디저트를 사주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저 눈 한 번 질끈 감고 바구니에 담아 계산 하기면 되는 건데.

『온 마음을 다해 디저트』에는 위로가 되는 맛들이 잔뜩 있다. 보통의 날들을 사는 보통이가 먹던 디저트.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한 보통이는 세상을 긍정하고 위로해주는 맛을 정확히 알고 있다. 웃겼던 건 다섯 살 동생이 울면서 팬케이크를 만드는 일화였다. 대단한 재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형은 차마 사과의 말을 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 싸우고 울면서 미안하다고 말하진 못했지만 그 마음으로 어른이 되는 거겠지.

어른이 아니어도 어때라고 『온 마음을 다해 디저트』는 말한다. 아이의 맛 어른의 맛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먹으며 살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다. 따뜻한 밥을 먹고 난 뒤. 좋아하는 사람과 음료와 디저트를 먹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 안에서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힘이면 된다. 가난했고 미안한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때를 미워하는 어른이 아니어서 괜찮다. 잊지 못하는 맛이 있다. 여름 날 엄마가 타주던 가루 주스. 주황색 가루를 타서 얼음에 넣어 먹으면 여름도 좋아지는 맛이었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어버린 걸까. 어떤 걸 해도 힘이 나지 않을 땐 『온 마음을 다해 디저트』를 읽고 디저트를 먹으러 가자. 추억의 맛이 있는 디저트를 고르며 불쑥 떠오르는 기억에 다시 하루를 살아갈 힘을 보충해 보는 것이다. 그래도 우린 살아 있잖아. 온 마음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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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일기 -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
김연수 지음 / 레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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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절일기』를 읽는 시절은 시끄럽고 먹먹하다. 확인되지 않은 말이 떠돌고 공인되지 않은 사실을 수긍하는 시절이다. 이제는 왜 살아가야 하는지가 아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물어야 할 때인 것이다. 김연수의 시절은 소설을 쓰고 읽고 그 안에서 삶의 이유를 외롭게 찾아가는 것이었다. 『시절일기』에는 그가 탐독하고 의미를 찾아냈던 책과 영화, 음악의 이야기가 촘촘한 문장으로 실려 있다. 읽으며 그가 아끼는 책의 목록을 들여다보며 나의 시절은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를 물었다.

문학이 위로가 될까를 김연수는 의문한다. 소설가 김연수의 시간은 2014년 4월 16일 이전과 이후의 나뉘는 듯하다. 그만이 그럴 것이 아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시간에 빚을 지고 빚을 갚도록 설계되어 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력감이 패배감이 삶의 원동력이라니, 믿을 수 없지만 믿어야 한다. 『시절일기』 안에 소설가의 자아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그 시절에 대한 단상이 있어서 좋았다. 여전히 나는 그가 이야기하는 책의 절반도 읽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충분했다.

『시절일기』에는 소설가란 어떤 사람인가를 묻기도 한다. 한 사람이 있다.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문득 감당할 수 없는 생의 슬픔이 밀려온다. 어떻게 할 것인가. 질문하며 책상에 앉는다. 연필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소설가의 시간이 펼쳐진다. 지금 쓰고 있는 사람. 김연수는 소설가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불타오른다. 첫 번째 소설은 그렇게 쓰인다. 나의 슬픔과 번민, 고독을 말할 수 없을 때 쓴다. 처음은 그렇게 쓰고 이내 불은 꺼진다.

불이 꺼진 자리를 매만지고 재를 바라보는 일. 두 번째 소설을 시작할 때 소설가는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열정은 사그라들고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체력을 길러 문장을 써야 한다. 그렇게 소설가가 된다. 그렇게 문학을 하는 자의 시절로 살아간다. 문학이 위로가 될 수가 있을까. 『시절일기』는 그렇게 물어오는 책이다.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창조해 내고 비밀을 만들어 갈 때 불의와 불합리, 적폐와 거짓이 진실을 가리는 순간에는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 미처 하지 못한 그 말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온기를 담아 말로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문학이 위로가 되고 문학이 쓸모가 될 수 있음을. 『시절일기』 안에는 어른으로 소설가로 사람으로 다하지 못한 위로의 말이 있다. 위로는 사랑으로 완성된다. 사랑이 없으면 위로도 없다. 문학을 읽는 이유는 상처받은 자들에게 사랑을 말하기 위함이라고 『시절일기』를 읽으며 깨닫는다. 어디에도 사랑은 없었다. 그 순간에는. 배가 기울어질 때.

이제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가 문학이라는 세계로 나의 한 시절을 밀어 넣은 이유를.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나라는 쓸모를 찾기 위해서. 문학 안에는 사람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사람과 사람으로 연결되는 단 하나의 가치는 사랑이었다. 여전히 이 세계는 잘못을 반복하고 시끄럽지만. 그래도. 문학이 있다. 잠시 다른 세계의 문을 열어 주는 책과 영화, 음악이 있다. 『시절일기』는 우리가 하지 못한 사랑이라는 말을 읽고 쓰고 보고 듣는 행위로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시절일기』에는 김연수가 읽은 책의 목록이 실려 있다. 소설가의 시절을 따라가는 일이 수월해진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말하는 『시절일기』. 우리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다만 사랑인 것이다. 보내지 못한 편지 안에 담긴 추신의 말은 '사랑해'였다. 삶이 지속되는 한 사랑은 유효하며 사랑의 기한 따위는 없음을 이제 나도 당신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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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마음동호회
윤이형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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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형의 소설집 『작은마음동호회』에는 총 열한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나는 전반부의 이야기가 훨씬 좋았다. 앞쪽에 실린 다섯 개의 소설을 읽으며 나의 작은 마음과 편협함과 무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소설의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보다 좋았던 부분과 오래 눈길이 머물렀던 문장을 옮기다 보면 새벽의 시간은 별 탈 없이 흘러갈 것 같다.

소설을 읽기에 세계는 늘 논쟁 중이고 뜨겁고 첨예하다. 소설이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 십상이다. 싸워야 하고 싸워서 지켜야 하며 지키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도 이 작은 책 안에는 우리가 놓쳐 버리고 지나가 버리면 안 되는 '마음'이 있다. 집회에 나가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많은 엄마들이 온라인에서 만든 모임을 그린 「작은마음동호회」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마음이 작다.' 마음의 크기와 넓이를 가늠할 수 있을까.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함부로 꺼내 보이기 힘든 마음.

마음을 내 보이면 쉽게 상처받을까 봐 꼭꼭 숨기곤 했다. 그러지 않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는 뭉클했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글을 쓰는 나 자신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승혜와 미오」는 여성 커플의 불안한 현재에 관한 소설이다. 소수자와 다수자로 나눌 수밖에 없는 이분법의 서글픔을 그렸다. 「마흔셋」의 이야기 역시 소수자로 불리는 인물의 풍경을 보여준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자가 되려는 동생의 몸을 보며 죽은 엄마에게 이별을 고한다.

「피클」은 작고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마음에 대한 소설이다. 사내 성폭력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그 일이 타자가 아닌 나라는 주체를 주변으로 일어날 때 취해야 할 태도를 집요하게 묻는다. 「이웃의 선한 사람」에서는 선의로서 세계를 대할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전반부의 이야기에서 윤이형은 한국 사회가 가지는 편견과 혐오, 소수를 향한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후반부의 이야기는 이곳과는 다른 세계에서 펼쳐진다.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각각의 소설은 우리가 사는 논쟁과 경쟁으로 가득한 여기를 그린다. 작은 마음들이 모인 소설을 읽으며 큰마음에 대해 상상한다.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지 않도록 잘못을 덮고 용서를 말할 수 있는 마음이면 좋겠다. 『작은마음동호회』는 상처받은 마음이 있다면 숨기지 말라고 말하는 책이다. 울고 싶은 땐 울고 화를 내야 할 때는 화를 낼 수 있는 우리를 만들어 가자고 하는 것이다.

오늘 나의 마음은 어땠나를 물어오는 소설이 있어 내일을 기대할 수 있겠다. 부서진 마음을 모아 서로의 이름을 불러 주는 일. 『작은마음동호회』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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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선물할게 창비청소년문학 91
김이설 외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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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음이 많은 사람이다. 별일 아닌 일에도 웃고 별일이어서 웃고 별일일까 의심하면서 웃는다. 못생겼으니 웃기라도 하자. 설마 웃는 얼굴에 침 뱉을까. 침을 뱉으면 어때. 그래도 웃어버리지 하며 웃는다. 사회에 나와보니 의외로 사람들은 많이 웃지 않았다. 무표정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원래 안 웃는 건가. 사회에 나오니 웃지 않게 된 건가. 웃으면 복이 온다는데 좀 웃지. 아닌가. 웃으면 복이 오는 게 아니라 복이 와서 웃는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까지 내가 버티며 살아온 이유 중에 하나는 끊임없이 웃었기 때문이다.

웃음을 주제로 열 편의 소설이 담겨 있는 『웃음을 선물할게』에서 과거의 나를 발견한다. 박상영의 「망나뇽의 눈물」에는 나와 비슷한 아이가 나온다. 포켓몬 빵을 먹으며 스티커를 모으고 자신 없는 외모를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아이. 망나뇽 스티커만 일찍 나왔어도 살이 찌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며 단 한 명의 친구를 찾고 싶어 했던 아이. 『웃음을 선물할게』에는 웃고 싶은 아이, 웃을 수 없는 아이, 웃고 싶지만 웃는 방법을 모르는 아이들이 나온다.

소설가들은 자신만의 웃음 철학을 소설 안에 풀어 놓는다. 좋아하는 아이를 따라 춤을 추며 그 아이가 웃어 주기를 바라고(「저스트 댄스」) 부모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이 순간을 끝까지 간직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배꼽」). 보건실에서 만나 친구가 된 순간의 기억과(「보건실의 화성인」) 성적보다 중요한 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간다(「마음을 함께해 준다면」).

누구나 목덜미에 야옹야옹 거리는 고양이 한 마리씩은 둘러메고 있지 않나고 말하며(「여름의 고양이」) 젊은 사자의 일탈을 사랑스럽게 보아준다(「정글이 빙글빙글」). 자퇴하기 직전 숙려 기간에 웃기는 의자를 만들며 높은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기도 한다(「웃기는 의자들」). '피해자 다움'을 요구하는 폭력에 맞서 연대하며 살아가고(「웃어도 괜찮아」) 선생님과 우리는 다르지 않으며 다들 웃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끝」).

열 편의 이야기 안에는 각기 다른 열 개의 웃음이 있다. 청소년 소설로 그 안에는 아이들을 대하는 사랑스러움과 다정함이 듬뿍 담겨 있다. 공부 잘하는 방법이나 싸움에서 이기는 법이 아닌 웃음을 주겠다는 세상의 어른들의 따뜻함이 『웃음을 선물할게』 안에 있다. 알고 보면 기막힌 사실 하나. 아이들이 더 웃지 않는다. 피곤과 스트레스에 찌든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웃음 치료사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 웃음 치료사 열 명이 모여 만든 책이 있다. 할머니가 하는 슈퍼에서 라면을 먹고 광화문 천막 농성에 가져갈 케이크를 사는 아이들을 위한. 나는 다행히 책을 읽으며 자랄 수 있었다.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세상을 긍정할 용기를 얻었다. 욕을 해도 인상을 써도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남들 눈에 바보 같고 만만하게 보여도 웃었다. 그 힘을 책에서 받았다. 『웃음을 선물할게』를 읽어도 웃음이 안 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읽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얘들아 웃자. 그리고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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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일본산고(日本散考)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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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11년간을 서울에서 살았고 진짜 콜론(식민자)의 아들이었다고 말하는 다나카 씨는 그 시절에 대한 짙은 향수를 토로하고 있는데, 특히 독립운동가, 그 시대의 독립정신에 대해서는 감탄과 외경의 염(念)까지 느꼈다고 했는데, 일본 특유의 그런 감상은 상당히 메스껍다.
그는 말했다. 그 시절이 좋았다고, 그 시절의 민족정신은 고귀하고 긴장되고 아름다웠다고. 한데 지금은 뭐냐, 그렇게 그는 말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도 그 시절의 비극을 가슴 아프게 아름다운 것으로 회상한다. 그러나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은 것은 "천만의 말씀!"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현재 반일(反日) 하는 것이며,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반일하는 것이며, 다나카 씨 같은 일본인이 있기 때문에 반일하는 것이다.
(박경리, 『일본산고』中에서)

박경리의 『일본산고』의 저 부분이 요즘을 대변하는 시대의 말이다. 왜 우리가 독립운동은 하지 못해도 불매 운동을 해야 하는지 박경리는 철저하게 가르쳐 준다. 강단 있는 언어로 일본을 뼈 때리는 『일본산고』에는 밑줄을 긋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맞아 맞아하며 읽어야 할 문장이 너무나 많다. 나는 멍청이였다.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나는 이제 멍청이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멍청이었음을 알고 멍청이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현실에 대해. 소외와 불의에 대해. 알지 못했고 알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는 아니다. 조금씩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고군분투 중이다. 뉴스를 챙겨 보기 시작했으며 잘 이해가 안 되더라도 문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책도 읽고 있다. 박경리의 『일본산고』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이 되기까지 제국주의 역사에서 살아간 작가의 일본론이다. 박경리는 일제 강점기를 온몸으로 겪었으며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생각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견해를 읽으며 우리는 어떤 자세로 지금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먼저 일본 역사의 허상으로 시작한다. 신국(神國)이라 칭하면서 가지는 일본이라는 정체성의 오류를 밝혀낸다. 신(神)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일본이 원폭의 피해자임을 강조하면서 은근슬쩍 전쟁과 식민의 잘못을 가리려는 가해자의 만행까지도. 소설가답게 일본 문학이 가지는 탐미주의와 죽음의 대한 선망 역시 엽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섬나라라는 지형학적 위치 때문에 그러려니 하는 것이라 해도 그들은 잘못을 감추고 피해 사실만 드러내는 왜곡과 반성을 모르는 민족이라고 말한다.

2019년을 사는 우리에게 날아든 한 편의 예언서인 『일본산고』는 한국인이 가져야 할 태도를 일러준다. 다나카가 쓴 "한국인의 '통속민족주의에 실망합니다'라고 쓴 편지를 읽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그 편지에 적힌 말이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그 편지를 받고 박경리는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구구절절 옳은 소리로 일관하는 답장을 날린다. 이쯤 되면 그가 살아 있어서 쓰려고 했던 '일본론'이 베스트셀러로 올라와 반일하는 우리들의 목소리를 대신했을 것 같은데. 무척이나 아쉽다. 안타깝다.

다나카 씨는 일본에 유학 온 각국 학생들의 예비 코스인 일어학교 교사로부터 들은 얘기부터 풀어놨다. 한국인이 싫다는 내용의 중국인 학생 작문에 관한 것인데 그 입김이 대단히 나약했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너를 그렇게 생각지 않는데 아무개가 너를 싫어하더라" 투가 그랬다. 이것은 고자질이다.
'내가 싫다 하기는 좀 거북하고 아무개가 싫다더라 해야지.'

몇 해 전의 일이다. 일본의 어느 잡지사 편집장이 내 집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일본이 이웃에 폐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것이면 민족주의도 필요 없게 된다."
(박경리, 『일본산고』中에서)

나도 싫은데 내가 싫다고 하는 것은 그러니 누가 너 싫다더라 하는 식의 이간질로 역사 왜곡과 반성 없는 일본의 야비한 속성을 박경리는 간파한다. 지식인이라고 한 자의 역사 인식이 저 정도인데 역사 교육을 받지 않고 제국주의의 화려한 시절만 학습한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더할 것인가. 일본을 이웃으로 둔 불운함이 우리에게 있을 뿐이었다. 위안부 문제에 앞장선 활동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일본은 사과할 기회를 스스로 날리고 있는 것이라고. 박경리는 말한다. "일본인에게는 예(禮)를 차리지 말라. 아첨하는 약자로 오해받기 쉽고 그러면 밟으려 든다. 일본인에게는 곰배상을 차리지 말라. 그들에게는 곰배상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상대의 성의를 받아들이기 보다 자신의 힘을 상차림에서 저울질한다."

반일과 친일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책을 읽은 자와 읽지 않은 자의 차이로 규정한다. 역사에 빚을 지지 않은 세대. 역사에 객관을 유지한 채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세대. 우리. 박경리는 일본 문학지의 편집장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자신을 "철두철미 반일(反日) 작가다"라고 소개했다. 그 말을 듣고 그들은 놀랐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그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용서라는 거룩한 마음으로 일본을 대해야 한다고 뻔뻔하게 여기는 마음. 용서라는 것은 사과를 하고 반성해야지 따라오는 수순 아니던가. 『일본산고』는 지켜볼 것이다. 이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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