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서머스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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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페인트칠을 하다가 미칠 집에서 배운 게 있다면 이 세상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이렇게 둘로 나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TV를 보며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이 세상은 셋으로 나뉘었다. F.W.S. 멀킨 보안관보가 내게 가르쳤던 것처럼 가끔 참아 가며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들이 세 번째 부류다. 이 세상 사람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하는 회색 인간들이다. 그들은 (최소한 일부러는) 나를 해치지 않지만 나를 돕지도 않는다. 네 마음대로 살되 하나님의 가호가 있길 바란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은 각자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스티븐 킹, 『빌리 서머스』中에서)


대체 스티븐 킹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한계란 게 있긴 한 걸까. 킹의 신작 소설 『빌리 서머스』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경이와 찬탄이 들었고 소설이 끝나갈 때는 슬픔에 빠졌다. 초자연적이고 불가해한 상황을 주요 소재로 쓰며 호러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문학킹, 이야기킹, 서사킹으로 바뀌어야 한다. 대중소설가로 각인되어 있지만 그의 소설 안에는 문학의 아름다움이 한가득이다.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을 위한 마음을 잃지 않는. 


전직 해병대 출신 저격수 빌리는 호텔 로비에 앉아 만화책을 손에 든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만화책은 사람들에게 바보 빌리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고 실제 그는 『테레즈 라캥』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두 남자가 빌리를 태우러 오고 빌리는 닉의 집으로 간다. 닉은 빌리의 나이를 묻고 그가 은퇴하기 전에 한 건을 더 하기를 제안한다. 한 건이란. 청부 살인이다. 


보수가 200만. 50만은 착수금, 나머지는 이후에 지급하는 조건이다. 빌리는 휘파람을 불고 닉에게 상대가 나쁜 놈이냐고 묻는다. 일을 하기 전에 늘 하는 빌리의 질문. 빌리는 나쁜 놈만 처단한다. 킬러에게도 신념이 있다면 그런 것이다. 나쁜 놈만 죽인다. 닉은 설명한다. 타깃은 빌리와 같은 일을 하는 직군. 대신 그는 상대가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가리지 않고 죽인다. 조라고 지칭한 그는 학교에 가던 열다섯 살짜리를 제거한 전적이 있다. 


저격수가 저격수를 저격해야 하는 상황. 빌리는 조의 만행을 더 듣고 일을 착수한다. 그때부터 빌리는 신분 위장을 하고 대기한다. 빌리라는 이름 대신 데이비드 로크리지로 저격수라는 직업 대신 작가로 위장한다. 조를 저격하기 위해 대기하는 장소에서 빌리는 작가 행세를 한다. 처음에는 일을 의뢰한 일당들을 속이기 위해 글을 썼지만 나중에는 글쓰기라는 구원자를 만난다. 문장과 어법을 엉터리로 쓰면서 시작했지만 글을 쓸수록 바보 빌리가 아닌 그냥 빌리를 불러낸다. 


『빌리 서머스』 초반 줄거리의 내용은 이렇다. 어떤가 읽고 싶지 않은가. 킬러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어쩌다가 그가 킬러가 됐는지 궁금하죠. 은퇴 전에 맡은 마지막 일을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이 될 거라고. 엄청난 일들이 닥쳤고 나는 그걸 이겨냈다고. 그런 사람들치고 진짜 글을 쓰는 사람은 없는 거죠. 『빌리 서머스』의 빌리는 해낸다. 조를 쏘기 전까지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작가 행세를 했지만 그는 진정한 작가로 거듭난다. 


작가면 작가지 진정한 작가가 무엇인가. 소설이 끝나면 등장인물들의 내일은 어떻게 될까. 작가가 정해준 결말대로 끝이 나는 건가. 『빌리 서머스』의 빌리는 킹이 정해준 결말대로 살지 않을 것이란 암시가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행복한 결말이 이제는 통용되지 않고 열린 결말로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는 게 트렌드라고 하는 시대에 스티븐 킹 역시 『빌리 서머스』의 결말을 열어준다. 


빌리의 말처럼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면서 나를 해치지도 않지만 도와주지도 않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빌리는 어떤 사람이냐면.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빌리는. 


초자연적이고 이해 불가능한 건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현상 아닐까. 스티븐 킹은 그걸 깨달은 듯하다. 어린 시절 무서워하던 존재가 어른이 되어서도 나타나고 불이 저절로 켜지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인간이 있는 일 보다 곤경에 처한 이를 구해주는 일이 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빌리 만세, 스티븐 킹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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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 명함만 없던 여자들의 진짜 '일' 이야기 자기만의 방
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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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처와 전화를 하다가 나를 소개해야 할 때가 있다. 상대는 자신의 명함을 보내줄 테니 나도 명함을 보내 달라고 한다. 나는 명함은 없다고 이름을 말해준다. 전화기에 찍히는 번호로 연락을 주면 된다고. 종이 명함만 봤는데 이미지 명함도 있구나. 명함을 파면 이미지도 주는 걸까. 아직도 이런 걸 모른다. 직함과 회사, 이름, 번호가 있는 명함을 본다. 다들 명함이 있나. 


오랫동안 명함이 필요한 일을 하지 않았다. 어디 가서 나를 소개할 일이 없었다. 직함이 없는 일들을 했다.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에서 지은 책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그렇게 직함과 명함이 없는 일을 한 여성의 노동을 소개한다. 책의 표지에는 두 가지 문장이 쓰여 있다. "명함만 없던 여자들의 진짜 '일' 이야기"와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첫 번째 출근길」을 소개하는 문장은 '잘 봐, 언니들 인생이다.'이다. 책으로 들어가기 전 선전포고 같은 이 문장을 보면서 가슴이 떨렸다. 여성 댄서들의 배틀 장면에서 나온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를 패러디 한 문장은 그해가 지나고도 사람들에 입에 오르락내리락했다. 언니들이 여기에 있다. 언니들이 춤을 춘다. 언니들이 싸운다. 언니들이 살아간다. 오빠들만 난무하던 이 판에 언니들이 등장했다는 결의가 담긴 선언이었다. 


서울 남대문시장 칼국수 골목에서 '훈이네'라는 간판을 달고 20년째 밥을 짓는 손정애 씨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명백히 보이는 곳에서 노동을 했지만 보이지 않는 척을 했던 여성들의 '진짜 일'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양한 연령에서 필수 노동을 하는 여성들은 책의 소개 글처럼 명함만 없을 뿐 자부심과 의지를 가지고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1950년대 이후에 태어난 여성들은 교육의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게 일상적이었다. 여자가 배워서 뭐에 쓰냐는 어느 집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었다. 더 배우고 싶은 갈망이 있었지만 오빠나 남동생을 위해 가난한 집안의 경제를 위해 여자아이들은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공장에 들어가거나 남의 집 살이를 하고 작은 회사의 경리로 들어가 결혼 직전까지 집안의 경제를 책임졌다. 


결혼과 동시에 퇴사는 그 시절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얼굴 몇 번 보지 않은 남자와 결혼을 하고 그 남자의 집안을 또 책임져야 하는 굴레에 갇힌다. 언니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쓰려지지 않았다. 가사 노동을 하면서도 배우고 봉사활동을 했다. 글을 몰랐던 시절의 서러움을 극복하고자 노인대학에 나가 한글을 배운다. 


동일한 일을 하는데도 동일 임금을 받지 못한다. 일을 하고 돌아와도 남자는 그대로 집에서 쉰다. 여자는 가정으로 다시 출근이다. 사회와 구조가 여성 노동의 시스템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오로지 개인이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책에 소개된 여성들은 나이가 먹어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의 오늘에 감사해한다. 내가 벌어서 쓴다는 자부심으로 힘든 노동 현장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임, 과장, 차장이라는 직함이 적힌 명함이 아닌 육아 전문가, 맏언니, 고등학생, 재테크 마스터, 가사노동자가 쓰인 명함이 사람들의 손에 주어질 날을 기다린다. 이게 뭐지가 아닌 당연하게 그렇구나 이 사람의 일은 이렇구나 받아들여질 사회를 위해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첫 발을 내디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집순이, 한국문학 애호가, 라춘러버 정도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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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여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4
이서수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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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몸무게를 잰다. 1차 다이어트 이후 요요가 왔고 다시 2차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몸무게는 더디게 줄어들다가 이제는 빠르게 늘고 있다. 아침에 눈 뜬 것만으로도 힘든데 몸무게 숫자를 보면 더더욱 힘이 나질 않는다. 대체 내가 어제 먹은 게 뭐였더라. 비만도는 정상이지만 저체중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병인 것 같은데. 


이서수의 소설 『몸과 여자들』의 주인공 1983년생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마른 몸 때문에 주위의 불편한 시선을 견뎌야 했다. 엄마와 함께 다닐 때면 친구들이 다가와 몸에 대해 한 마디씩 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반에서 제일 작다는 이유로 또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마르다는 이유로 관계에서 배제 당한 채 지냈다. 


그랬구나. 마르다는 것도 괴롭힘의 이유가 될 수 있었구나. 내가 그토록 동경한 마른 몸도 누군가에게는 콤플렉스로 작용했구나. 나의 보편은 일방적인 사유였다. 다이어트를 시작한 건 단순한 이유였다. 살이 자꾸 찌니 무릎이 아팠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러다 앞자리 숫자가 바뀌자 집착이 생겼다. 더 말랐으면 좋겠다. 


몸무게 강박이 생겼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타인이 내게 다이어트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내 몸에 대해 판단을 하거나 조언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나 스스로가 나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었다. 『몸과 여자들』에서 '나'는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몸에 대해 재고한다. 타인의 시선을 거두자 나의 시선이 남았다. 사회와 제도가 요구하는 여성 몸에 대한 조건들을 해체한다. 


소설은 1983년생 '나'와 그의 엄마 1959년생 '미복'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된다. 엄마와 딸이 들려주는 자신의 몸 이야기는 처절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원하지 않는 행위의 강요들이 딸과 엄마의 인생을 지배한다. 나의 몸은 나의 것이다는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시행착오가 『몸과 여자들』에 나열된다. 시선 폭력으로부터 혹은 진짜 폭력으로부터 나의 몸을 지켜가는 여정은 고통에 가깝다. 


접힌 배를 들킬까 봐 큰 옷을 입고 다녔다. 살이 어느 정도 빠진 지금도 여전하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데 나만이 나를 엄격하게 바라본다. 어제 보다 몸무게가 늘었단 말이지. 이거 이거 안 되겠는데. 나를 몸으로만 바라보는 강박을 『몸과 여자들』은 버리라고 말해준다. 나는 몸이 아닌 그냥 나라는 존재로 긍정해야 한다고도. 살이 찌거나 빠지거나 상관없이 나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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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가 결혼을 안 해서요
가키야 미우 지음, 서라미 옮김 / 흐름출판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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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키야 미우의 소설 『우리 애가 결혼을 안 해서요』를 소개하는 문구는 '부모들의 대리 맞선 서바이벌'이었다. 이것만 보고 나는 이 소설이 근미래의 어느 시간을 다룬 이야기인 줄 알았다. 현실적인 소재로 소설을 쓰는 이 작가가 이제는 SF 소설도 쓰는구나 했다. 아니었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보니 생각났다. 중국의 공원 풍경이. 자식의 신상을 적은 소개서를 부모들이 교환하던 장면이. 


예능프로그램 《알쓸인잡》에서 결혼은 이제 중산층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출연자들의 대화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1시간 남짓 치러지는 예식을 위해 결혼식장에 줘야 하는 비용을 듣고서는 이번 생에서는 혹은 다음 생에서라도 결혼은 안 되겠구나 했다. 어찌어찌 비용을 감당하겠지만 그런 비용을 주고서라도 결혼이란 걸 해야 하는지 나를 납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포기가 많은 세대가 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소설 『우리 애가 결혼을 안 해서요』는 딸 도모미를 위해 부모들의 대리 맞선 모임에 참가하는 엄마 지카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스물여덟 살, 의류매장에서 일을 하는 딸 도모미는 애인이 없는 상태이다. 엄마와 아빠는 그런 딸을 위해 결혼 활동에 뛰어들었다. 지카코 친구들의 자녀들은 결혼을 했거나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보내오고 있다. 


도모미가 서른이 되기 전 결혼을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족회의가 열리고 참가비를 내고 지카코는 대리 맞선 활동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겪는 에피소드를 통해 결혼이라는 제도의 부당함과 불합리함이 소설 속에 무겁지 않게 녹아 있다. 여자는 결혼을 하지 않으면 패배자가 되는가. 부부가 똑같이 맞벌이를 해도 왜 여자만 가사 노동에 뛰어들어야 하는가. 결혼 시장에서 여자는 나이와 외모를 남자는 재력과 능력을 따지는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인생의 목표가 결혼이라도 된다는 듯 하나같이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를 집요하게 묻는다. 엄마 지카코는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해도 직장에 다닌다. 나이가 있는 여성이 직장에서 겪는 고충도 『우리 애가 결혼을 안 해서요』에 짧게 등장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가키야 미우의 소설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어렵지 않게 쓰인 문장으로 일상의 문제를 파고든다. 


소설은 결혼하지 않는 세대 아니 결혼하지 못하는 세대의 모습을 통해 어른의 역할을 이야기한다. 부모 세대가 반성하고 고쳐나가야 할 점을 엄마 지카코의 입을 빌려 말해준다. 항상 예의를 차리려고 노력하는 엄마 지카코도 딸의 결혼 활동을 대신하면서 분노와 부끄러움이 쌓인다. 첫 부모 대리 맞선을 마치고 시끄러운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카페에 간다. 할 일을 담담하게 해 나가는 지카코의 성격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나이 많은 여성의 전형성을 깨뜨리는 장면들이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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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마중 마음산책 짧은 소설
문진영 지음, 박정은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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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영의 짧은 소설집 『햇빛 마중』을 다 읽고 목차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너무 좋은 사람〉, 〈한낱 사람으로 우두커니〉, 〈계절은 우리와 관계없이〉, 〈우리는 우리의 궤도를 따라〉라는 큰 제목 아래 짧은 소설이 모여 있다. 단순히 제목만 놓고 보자면 〈계절은 우리와 관계없이〉라는 말의 어감이 좋았다. 시간이란 한 방향으로 흐른다고만 생각했다. 일직선상에 과거, 현재, 미래가 순서대로 놓여 있어 착실하게 각자 할 일을 다한다고. 


과거라고 생각되었던 시절은 과거가 아니게 되는 순간을 여러 번 맞이하게 되었을 때 시간의 흐름은 일방적이지 않다고 깨닫게 되었다. 현재는 과거가 되기도 미래는 현재가 되기도 하는 뒤죽박죽된 세계라는 걸 받아들이면 편안해진다. 지금은 겨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봄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계절은 우리와 관계없이' 흘러가고 잊힐 것이다.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말이 있었다. 건물의 앞이 아닌 뒤에서 고등학교 1학년을 보냈다. 앞 건물에 가려져 그 교실에서는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추운 곳이었는데 체육복 바지를 입어도 다리가 시렸다. 쉬는 시간은 짧아서 구름다리를 건너 앞 건물에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끔 햇빛이 쏟아지는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아이들의 등을 보는 것으로 따듯함을 대신 전해 받았다. 


『햇빛 마중』에는 사람, 동물, 오후, 계절, 장소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다. 처음 만난 이와 쉽게 가까워지지는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연락처를 물어보기도 하고 엄마와 여행을 떠나 웃지 않아도 괜찮은 사진을 찍기도 한다. 우는 이유를 몰라 묻고 싶지만 그러지 않기로 하고 위로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고 전한다. 고맙고 미안한데 단순한 말로 전할 마음이 아니라서 묵어 두었던 그 말들을 하기 위해 쓰인 것 같은 『햇빛 마중』이다. 


기억이나 회환이 몰려올 때 소설가 문진영은 소설을 쓰고 집안을 정리 정돈하는 것으로 버티며 이겨내는 것 같다. 상처 입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인물을 만들어 추억의 장소로 데리고 간다. 손을 잡고 햇빛이 있는 쪽으로 걷는다. 나의 온기를 네게 전해주는 것으로 불안하고 불순했던 과거를 다른 세계로 옮겨주고 싶다는 마음이 소설 곳곳에 놓여 있다. 


오랫동안 어둠 안에 갇힌 자들이 있었다. 태양이 남중해 있는 정오에 만나자. 『햇빛 마중』을 읽으며 두 시간 후를 기다리자. 오후 두 시에는 태양이 지표를 달구느라 가장 따듯해져 있을 테니까. 햇빛과 소설이 나눠준 온기를 기억하며 언젠가의 계절로 넘어가자. 어둠 속을 탈출하기 위한 작은 손전등 같은 책 『햇빛 마중』을 들고 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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