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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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누구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휴대전화에 입력된 주소록을 보았다. 통닭집, 고용부, 콜택시, 관리사무소, 피자집, 돈가스, 만둣집이 있었다. 이런. 가게 번호가 아닌 사람의 번호를 보여달란 말이다. 엄마가 생각났다. 살아 있을 때 엄마는 심야에 전화를 걸어왔다. 술에 취해 있을 때가 많았다. 두서없는 이야기 끝에 불쌍한 내 딸,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그래도 내가 너를 많이 생각하고 사랑한다 같은 멀쩡한 정신으로는 하지 못할 말을 하고 끊었다.


딱히 무슨 대답을 듣자고 말하지는 않았으리라. 그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는데 전화기를 꺼내니 목록에 내 이름을 발견했으리라. 그렇게 나는 아무 때나 전화를 걸면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못되고 무심하고 정이 없는 딸의 위치였다. 이제 나도 그러고 싶은데. 통화 버튼만 누르면 신호음이 가고 여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안심하며 대화를 시작하고 싶은데. 못 견디게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운 밤이 내게도 있는데. 엄마는 없다.


김영민 교수의 『공부란 무엇인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책은 사회와 자아의 중간에 있다. 사회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독서에 몰입할 수도 있고, 자아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책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준다. 책의 내용은 언어로 되어 있고, 언어는 사회가 공유하는 것이며, 그 언어를 통해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한다. 사회로부터 도망하기 위해 책을 읽다가 거꾸로 소통을 위한 언어가 풍부해지는 역설이 독서 행위에 있다.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中에서)​


우연인지 몰라도 김영민 교수의 책을 읽는 시점에는 마음이 복잡하고 일이 안 풀릴 때이다. 누가 들으면 대단한 일 하며 사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일 자체가 숭고하고 대단하고 진지한 일 아닌가. 그저 하루를 사는 게 아니다. 하루를 산다는 건 운이 좋으면 내일 아침에도 눈을 뜰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어제는 진지하게 아침도 아닌데(김영민 교수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영향으로) 삶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저녁에는 희망을 생각하자며 의지를 다져 놓고서는.


『공부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새삼 나의 공부 인생을 돌아보았다. 학과 공부를 충실하게 한 건 딱 중학교 때까지였다. 그 후에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하며 살아갔다. 책 읽기도 그중에 하나다. 책에는 많은 인간들의 모습이 담겨 있어 독자의 신분으로 팔짱 끼고 앉아서 뭐 니들이 그렇지 하는 자세로 읽으면 정말 재미있다. 신난다. 나와 비슷한 구질구질함을 책에서 발견하면 놀라기도 하고 뭐 니들도 다르지 않구나 하는 식으로.


『공부란 무엇인가』를 다 읽고 드는 생각은 이 책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로 바꾸어 읽어도 좋겠다는 것이다. 공부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필요하다. 정답을 맞혀서 좋은 대학에 가고 취업에 성공하는 공부에서조차도 인간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한다. 사회가 싫어 도피해 책으로 안착했지만 그 안에서도 여지없이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기괴함으로 뭉친 인간 군상을 만난다. 그러면서 배운다. 사회에서 만나면 이렇게 행동해야지. 수준 낮은 대화와 비판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요령이 『공부란 무엇인가』에 있다.


한동안 리뷰를 쓰고 제목을 달지 않았다. 귀찮아서. 제목의 효용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글의 완성을 짓는 건 제목이라는 말에 서둘러 이 글에도 제목을 달았다. 서평이란 무엇인가. 글은 뜨끔했다. 서평에 기대어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나의 신세 한탄을 늘어놓곤 했는데 서평은 그런 것이 아니란다. 좋은 서평은 그걸 읽고 책을 읽고 싶게끔 만드는 것이라는 말. 그동안 나의 서평 쓰기는 실패였다는 말을 듣는 듯해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럼 제대로 써야지 안 그래?


이 글도 『공부란 무엇인가』를 읽고 쓰는 서평인데 시작부터 힘들다느니 죽은 엄마와 통화하고 싶다느니 누가 들으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만한 말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데 이걸 누가 진지하게 읽을까. 나조차도 긴 글을 웹페이지로 힘들어하는데. 그저 자존감 낮고 시간은 많은 열패감에 찌든 사람이 책을 읽고 어쩔 수 없는 마음에 쓴 글인데. 이걸 읽고 미치도록 읽고 싶다, 당장 사서 봐야지 할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내 마음대로 쓴다.


다만 기억할 것은 청중과 독자의 반응은 원래의 말과 글에 대해서 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독자나 청중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사실이다. 마치 '악플'이든 '선플'이든 원래 글에 대해서라기보다는 그 '리플'을 단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中에서)


『공부란 무엇인가』는 무슨 책인가. 공부를 잘할 수 있는 비밀을 알려주는 책인가. 책을 읽으면 공부뽕이 올라 당장 인강이라도 끊게 된다는 책인가. 공부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책인가. 읽고는 싶은데 시간은 없어 누군가 쓴 리뷰를 보며 읽은 척하고 싶어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시간 낭비. 제가 쓰는 서평은 서평일 수 없지만 서평인 척하고 싶은 서평입니다. 책에 대한 정보 대신 한 인간의 나약함과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며 자신이라는 존재의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글입니다. 어떤 반응을 보이든 김영민 교수의 저 말처럼 그 반응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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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모드
랜스 울러버 지음, 모드 루이스 그림, 박상현 옮김, 밥 브룩스 사진 / 남해의봄날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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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화 시인의 산문집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를 읽다가 모드 루이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런 순간들이 기쁘다. 책을 읽다가 내가 몰랐던 부분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리하여 나를 다른 책의 세계로 이끌어 갈 때. 기꺼이 나는 그 손을 잡는다. 『내 사랑 모드』는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다. 너무 좋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책이다. 한 인간의 내면에 담긴 예술과 삶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드 루이스는 캐나다의 민속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의 주제가 시골 마을의 풍경 즉 전원생활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단순하게 민속 화가라고 칭하고 싶지는 않다. 그림에 대해 알지 못해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지만 모드 루이스의 그림은 '민속'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하기에는 많은 주제를 품고 있다. 꽤 괜찮은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모드.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하나밖에 없는 오빠와는 인연이 끊겼다.


이모 집에서 살던 모드는 '가정부 구함'이라는 구인 광고를 보고 길을 나선다. 44세의 독신남 에버릿과는 그렇게 해서 만났다. 모드는 요리와 청소를 에버릿은 집과 식료품을 제공하기로 했다. 후에 류머티즘으로 손이 굽은 모드는 집안일을 할 수 없었다. 에버릿은 모드가 그림을 구할 수 있게 재료를 제공해 주는 일을 자신의 몫으로 추가한다. 작은 오두막에서 모드와 에버릿은 살아간다. 『내 사랑 모드』는 모드의 그림을 아끼고 사랑하던 변호사 울러버 씨의 아들인 랜스가 쓴 책이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그가 실제로 모드를 만나며 받았던 인상. 모드가 죽고 나서 그의 집에 소장되어 있던 그림을 통해 랜스는 모드의 생애를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는 작업을 한다. 에버릿은 돈을 지독히 아꼈다. 모드가 그린 크리스마스카드와 그림을 팔아 돈을 벌었음에도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 허름하고 낡은 수도와 전기 시설이 없는 오두막에서 평생을 살았다. 모드의 작업은 작은 창문 옆이었다. 변변한 작업 도구조차 갖추어지지 않은 곳. 밥을 담아 먹는 쟁반에서 모드는 한 손을 받쳐 가며 굽은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어떻게 저럴 수 있어. 돈이 좀 생겼으면 부인이 그림을 편하게 그릴 수 있게 그럴듯한 작업실과 도구를 마련해 주면 좀 좋아.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거둬들였다. 에버릿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한 것이리라. 지독한 가난 때문에 돈에 대한 강박이 있었고 베풀 줄 모르는 성격이 된 것이다. 모드는 그런 에버릿을 싫어하지 않았다. 모드가 에버릿을 떠나지 않고 그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시킨 것이 그 증거이리라. 모드와 에버릿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서로를 사랑했다.


현실은 혹독했을지 몰라도 모드의 작품 속 세계는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풍경이 화폭에 펼쳐졌다. 주어지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줄 아는 모드의 숭고한 삶의 태도를 통해 나는 감동과 위로를 받는다. 에버릿 이외에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모드는 외로워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화목했던 어린 시절을 잊지 않았다. 결코 아름답지 않았던 현실이어도 모드는 자신만의 사랑스러움으로 내면을 다독여 나갔다. 그림을 통해서 말이다.


일상을 예술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단단한 내면을 가진 모드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곁에서 모드를 보살펴 주고 페인트를 얻어다 준 에버릿. 구두쇠 짓이 심하긴 했지만 그만의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했던 에버릿. 때로 사랑은 희생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실현된다. 모드의 그림을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겼던 건 어린 시절 내가 갖지 못했던 평화롭고 귀여운 풍경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의 시선이 소거된 채 살아왔다.


책을 읽으며 누군가의 삶에 감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으로도 나의 현재는 아름다움으로 채워진다. 가질 수 없었던 사랑과 긍정의 기운을 오늘에서야 마련한다. 겨울에도 꽃과 눈이 쌓이지 않은 산을 그리는 모드. 사라지고 없는 것을 상상할 줄 아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나의 공간을 작고 귀여운 것으로 채워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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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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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시간이었다. 2020년 11월 23일부터 27일까지의 5일은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는 날들이었다. 처음으로 타인에게 분노를 표출했고 래퍼처럼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두 시간 내내. 나는 한 직장에서 8년간 일을 했다. 어찌어찌한 사정으로 12월 9일까지 밖에는 일을 못한다. 문을 닫는 것이다.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자 합의라는 말이 나왔다. 최소를 요구했는데 그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유튜브로 동영상을 봤다. 와. 유튜브는 최고다. 알기 쉽게 법 조항을 설명해 준다. 자세하고도 친절하게. 이해가 안 되면 돌려볼 수도 있다.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처음에는 들었다. 나는 잘 듣는 사람이다. 왜 그런지 김영민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 나와 있었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김민정 시인의 질문에 김영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튼 책을 꼭 읽어야 하나요? 물으면 사실 안 읽어도 된다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만, 책은 인류가 발명한, 사람을 경청하게 만드는 정말 많지 않은 매개 중 하나죠. 그렇게 경청하는 순간 우리가 아주 조금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기를 비우고 남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자세요.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中에서)


시작하자마자 헛소리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일단 들었다. 왜냐? 내가 그동안 한 짓이라곤 책을 읽는 것 밖에는 없었으니까. 자나 깨나 읽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자다 일어나서 옆에 놓아둔 전자책을 읽었다. 그러곤 다시 잤다. 일어나면 다른 편에 놓아둔 종이책을 읽는다. 내용이 섞이든 말든. 시간을 보내는 유일무이한 나의 취미 독서. 그러다 보니 나는 김영민 교수가 말하는 대로 경청하는 사람이 되고야 말았다.


23일부터 27일까지 내가 읽은 책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였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내 곁에는 책이 있었다. '추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칼럼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김영민 교수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는 점잖은데 약간의 B급 유머가 곁들인 그의 칼럼과 영화 평론,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다. 전부 이해했다면 거짓말이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 받아들이며 읽었다.


책 바깥의 세계는 치열했고 거짓말과 협잡과 감정싸움, 치졸하게 서로를 공격하는 그야말로 총만 안 들었지 전쟁터 같았으니까. 이런 문장이 남았다. '이 땅에 희망이 있어서 희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기에, 희망을 가진다.' 와우. 뻔한 수사로 쓰였는데 가슴을 후벼판다. 요 며칠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거나 희망 따윈 개나 줘버려 같은 회의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희망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기에 희망을 가진다니.


희망 대신 절망을 한 아름 돌아온 밤에 저 문장을 읽고 깊게 잠들 수 있었다. 다시 가슴에 희망을 품은 채로. 그리고 이런 글.


악이 너무도 뻔뻔할 경우, 그 악의 비판자들은 쉽게 타락하곤 한다. 자신들은 저 정도로 뻔뻔한 악은 아니라는 사실에 쉽게 안도하고, 스스로를 쉽사리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악과 악의 비판자는 일종의 적대적 의존관계에 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때로 악을 요청한다. 상대가 나쁘면 나쁘다고 생각할수록 비판하는 자신은 너무나 쉽게 좋은 사람이 된다.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中에서)


나는 책을 오랫동안 읽었음에도 인간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 몰라 허둥대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관계를 책으로 배웠어요,랄까. 악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악인이 아니라는 것. 나쁜 놈 옆에 더 나쁜 놈이 있다는 것. 악인들의 행태는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한심하고 뻔뻔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옆에 있는 놈을 까대며 헐뜯고 비방하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일까지 꺼내 놓는 악인. 피해자 코스프레에 심취한 나머지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이게 대체 무슨 글이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읽고 쓴 리뷰냐. 리뷰를 가장한 푸념이냐. 하겠지만. 몰라. 나도 모른다. 대체 이 글의 주제와 목적은 무엇인지. 그저 타인에게 내 의견을 처음으로 강한 어조로 피력한 시간에 읽은 책이 하필이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여서 김영민은 교수인데 교수답지 않은 깨 발랄하고 시니컬한 유머를 구사하는 글을 써서 좋다는 것을 밝혀두는 것으로 장황하고 두서없는 글을 마칠까 한다.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 알게 되었다. 집밖에 나가지 않고 책만 읽었던 나의 시간은 축복이었구나. 헛소리와 거짓으로 점철된 서사를 파괴할 수 있었던 건 책 읽기로 단련된 경청의 자세와 문어체로 말하는 능력이었다. 죽음과 함께 하는 게 삶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쉽게 함부로 누군가의 권리를 박탈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리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고 저녁에는 희망을 생각하며 살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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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뒤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아주 보통의 글쓰기 1
김미희 지음 / 글항아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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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과 토요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긴박한 시간이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나는 그동안 무얼 하고 있었나. 대학도 나오고 책도 열심히 읽었는데 모르는 것투성이다. 상관없나? 대학과 책은. 경험의 차이인가. 세세하게 밝힐 수 없지만(어느 정도 일이 끝나고 해결점이 보이면 전부 글로 써서 알리리라.) 복잡해 보이는 일을 겪게 될 것 같다.


머릿속이 복잡할 땐 책을 읽자. 계속 일에 매달리다 보면 불안만 가중되니까. 김미희의 『문 뒤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는 어지러운 마음을 파고들었다. 걱정 마. 당신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해준다. 친엄마와 헤어져 새엄마와 술에 빠진 아빠와 어린 시절을 보낸 그림 작가 김미희. 책은 장례식장에 가져갈 남편의 사진을 고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신장암 3기였던 남편은 항암 치료와 수술을 반복했다.


어린 아들이 있다. 아이를 낳고 1년 뒤에 병이 발견됐다. 수술과 치료, 재활을 하면 나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병이 깊어지면서 그림을 그리던 남편은 내내 누워 있게 된다. 그전에는 기운을 차려서 그림 작업을 하던 남편이었다. 항암을 하면서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은 바다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문 뒤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는 남편이자 친구, 애인, 동료였던 박현수를 기억하며 써 내려간 책이다.


김미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군분투했던 시간을 더듬어 나간다. 그야말로 미치지 않기 위해 쓴 글이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서로를 해치지 않기 위해 소통을 시작한다. 술에 빠져 살며 인생을 낭비한 아버지. 미싱사로 일하며 친자식도 아닌데 자신과 동생을 키워낸 새엄마. 과장된 슬픔과 비애를 표출하지 않은 채 과거의 기억을 들려준다. 이제 좀 살만할 때. 결혼해서 아이 낳고 전세 자금 대출로 집도 마련했는데 덜컥 남편이 아픈 현재.


팔자가 사납다는 말로 한 사람의 삶을 뭉뚱그려 요약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걸 『문 뒤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는 증명한다. 하늘로 떠난 아빠를 그리워하는 아들. 그 아이에게 죽음을 설명하는 건 어렵다. 그저 손을 잡고 살아가는 일로 아이를 지켜주기로 한다. 오늘을 살면 내일이 있음을 알려주면서. 책의 후반부에는 '남편의 수술부터 사별 후 1년까지 쓴 일기'가 실려 있다.


내내 힘들지 않다. 계속된 고통에 휩싸여 살아가지도 않는다. 아픈 이의 머리를 쓸어 주고 반찬을 하고 어떻게든 더 먹이려고 기를 쓰는 시간. 웃을 땐 웃고 울 땐 울면서 소중한 이와 함께 살아갔다.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글쓰기였다. 일기를 썼다. 글을 쓰면서 독을 풀어 냈다고 밝힌다.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던 순간을 글로 썼다. 나를 위로하기 위한 나를 지켜내기 위한, 글쓰기.


쓰겠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야 한다. 쓰면서 상황을 정리하고 버틸 수 있는 힘을 내일로 보내야 한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살아내야 한다. 엉망으로 살지 않았다고 먼저 간 이에게 말하기 위해 쓰겠다. 그렇게 살아가겠다. 어제 운 나를 오늘의 내가 눈물을 닦아주는 일. 쓰는 자는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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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연애소설
이기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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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이란 인물들의 다음을 궁금하게 만드는 소설이 아닐까. 위기에 빠진 그들이 제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는 소설. 허무에 절망에 잠식되지 말고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한 오늘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비는 소설. 소설가가 만들어 놓은 세계라는 걸 알면서도 그 안에서 기어이 나의 현실을 보고야 마는 소설. 그래서 더욱 애틋한 기분이 되어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이.


여기 있다. 이기호의 『누가 봐도 연애소설』이 그렇다. 한 손에 꼭 쥐고 읽을 수 있는 작고 귀여운 소설. 마음만 먹는다면 그 자리에서 홀라당 읽어 버릴 수 있는 책이다. 읽어야 할 이야기가 줄어드는 게 아쉬워 천천히 읽고야 만다. 회사를 퇴직한 성오 씨가 아내 대신 녹색 어머니회에 나가 대학 때 잠깐 연애한 여인을 재회하는 이야기 「녹색 재회」를 시작으로 『누가 봐도 연애소설』에는 사연 많은 사람들의 짠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국물 떡볶이를 좋아하는 소박한 식성을 가진 이들로부터 연애에 성공해볼까 강아지를 분양받는데 도리어 강아지와 사랑에 빠지는 순수 청년의 이야기까지. 읽다 보면 애틋하고 소중해서 그러니까 허구 속 인물이 겪는 스펙터클한 모험이 아닌 내가 경험한 일들을 늘어놓은 것 같아 가슴이 뜨끔해지고야 마는 것이다. 이윽고 눈에는 눈물이. 뜨이씨. 이기호, 네가 날 알아? 하면서. 어떻게 다 알고 있어. 또 이러면서.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때 산으로 올라가 소리 한 번 질러, 서는 안 되고. 지금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니까. 사람 없다고 마음 놓고 산에 갔다가 도시의 인간들은 죄다 이곳에 모인 거야 하면서 뜨악할 테니까. 산에 가지는 말고 이기호의 『누가 봐도 연애소설』을 읽어 보시기를. 꼭 읽어보시기를. 웬만해선 이렇게 대놓고 책 추천 안 하는데. 책이란 지극히 개인적이고 취향 타는 물건이라서 함부로 권했다간 관계가 어색해져서.


자신 있게 읽으라고 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는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어서이다. 마스크 없이 뛰어놀고 싶은데 여행 가고 싶은데 나로 인해 누군가 아플까 봐 곤란에 처할까 봐 다들 숨죽이고 생계 활동 외에는 집에만 있는 그대들을 알기 때문이다. 이럴 때 『누가 봐도 연애소설』을 읽으며 맞아 나도 저랬어, 에고고 사랑 고백 한 번 폼 없지만 기차게 하네, 감탄과 탄식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게 된다. 웃기고 서글프고 애틋하고 보듬어 주고 싶은 인생을 살아가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나를 돌아본다.


그거 데이트를 가장한 사기야. 말해주고 싶고. 재난지원금은 주거지에서 써야 돈이 차감되는 거야. 알려 주고 싶다. 짧은 소설의 대가는 성석제였는데. 였는데?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거야! 그건 아니고. 최근에 나온 『내 생애 가장 큰 축복』을 아직 안 읽었기 때문에. 그거 조만간 읽어보고 성석제가 여전한지 판단해 보겠다. 아무튼 짧은 소설의 벼락 스타 정도 되겠다, 이기호는.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마지막에는 묘한 여운까지 독자에게 한 아름 안겨줘야 해서 짧은 소설 쓰기는 까다로운데. 이 어려운 걸 이기호의 『누가 봐도 연애소설』은 해낸다.


우리 이웃의 이야기도 아닌 바로 내 이야기라서 지금부터 말을 시작하면 2박 3일 동안은 꼼짝 않고 들어야 할 가슴 아픈 내 인생이 『누가 봐도 연애소설』에 들어 있다. 술 먹고 어른들이 항상 하던 말. 내 인생이 말이야.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이야. 『태백산맥』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하던. 지금은 시대가 변했으니까. 『태백산맥』 말고 『누가 봐도 연애소설』이란 말이야로 바꿀 수 있겠다.


니콜라스 장군님과 함께 한 가족의 여행기. 시골에서 농사하고 닭 키우면서도 넷플릭스로 <킹덤> 보는 성구의 사랑 고백기. 이웃 노인에게 반찬을 전해주기 위해 아픈 다리를 끌며 계단을 오르내리던 어머니의 이야기. 외국인 사위에게 홀딱 반하고야 만 아버지의 사연까지. 어느 편을 읽더라도 눈물을 흘리고야 말지어다.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 마음이 들다가도 함부로 오를 수 없는 경지라는 걸 깨닫는다. 우선 살아내는 게 중요한 임무가 되어 버린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읽는 사람으로 살아가도 좋다는 안도감이 든다, 『누가 봐도 연애소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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