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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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지 6일째 되는 날이다, 오늘은. 코로나가 무섭기도 하지만 원래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기도 해서 괜찮다. 짠함은 넣어둬. 그럼 집에서 무얼 하냐고? 정말 할 거 많다. 일어나서 몸무게 재고 물 마시고 청소기 돌린다. 날이 추워도 환기는 필수라서 창문을 전부 열어 놓은 채로. 상쾌한 공기 흡입하고 냉장고를 열어 배를 채운다. 뉴스를 보면서. 매일 확진자 수가 늘어나서 걱정이다.


전날 읽다만 책을 읽고 다 읽으면 리뷰를 쓴다. 책상에 앉아서. 창가 쪽으로 책상을 옮겨 놨는데 들어오는 햇빛의 양이 상당하다. 실내 온도를 높이기 위해 커튼을 열어 둔다. 책을 읽다가 집 안을 둘러본다. 약간의 강박증이 있어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놓아두어야 해서 일어나 물건의 위치를 바로 한다. 다시 책을 읽는다. 집에서 나는 다음의 도약을 위한 에너지를 충전 받는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장편 소설 『빛의 현관』을 하루 종일 읽었다. 햇빛 안에서. 광합성을 하듯. 소설은 건축사 아오세 미노루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건축주에게 의뢰를 받고 돌아오는 아오세. 그는 현재 이혼한 상태로 딸과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거품 경제 시절 건축 사무소에서 활발하게 일을 했다. 아내는 인테리어 전문가로 활약했다. 바쁘다 보니 둘의 시선이 묘하게 일치하지 않게 되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아내 유카리는 이혼을 요구했다. 대학 시절 친구였던 오카지마 밑에서 일을 한다. 아오세는 어느 날 이상한 의뢰를 받는다. 요시노라는 남자가 찾아와 아오세가 살고 싶은 집으로 건축을 해달라고 한 것이다. 자신의 취향이나 요구를 드러내지 않은 채 오직 아오세가 살고 싶은 집으로. 요시노는 그 무렵 획일적으로 설계를 하는 자신에게 지쳐 있었다.


북쪽으로 향해 집을 짓는다. 아오세는 건축에서 금기시되는 북쪽으로 집의 방향을 잡는다. 지붕에 세 개의 빛이 들어오는 굴뚝을 내고 거실로 빛이 모이게 하는 구조. 노스 라이트. Y 주택은 그렇게 탄생한다. 건축주 요시노는 큰 만족감을 드러냈다. 아오세는 자신의 대표작이 될만한 건축을 남겼다는 점에서 역시 만족을 한다. 그러다 연락을 받는다. Y 주택에 감명을 받은 또 다른 의뢰인으로부터.


의뢰인은 Y 주택에 반해 내부를 보러 갔지만 어쩐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오세는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소장 오카지마와 요시노의 집으로 간다. 누군가 침입 흔적이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2층에는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창가 쪽을 향해 놓여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해도 모자랄 만큼 심혈을 기울여 지은 집인데 방치해 놓았다니.


『빛의 현관』은 한 번 잡으면 내려놓을 수 없는 소설이다. 하루 종일 읽을 수 있는 게 가능한 게 이야기의 힘 때문이다.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삶이라는 걸 알아버린 체념이 삶의 정서가 된 한 남자. 그가 마주 보고 이겨내야 할 현실의 막막함을 마구 응원해 주고 싶다. 과거의 잘못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내내 후회로 살아간다. 아내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꿈꾸었지만 그마저도 실패한다.


아오세 미노루. 그가 지은 Y 주택에 숨겨진 비밀이 하나씩 드러날수록 가슴에는 비통함이 흐른다. 시간 여행자가 되어 과거로 돌아가 잘못을 수정할 수 없다. 결과로서 묵묵히 받아들이며 결코 절망으로 다가가지 않도록 나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빛의 현관』은 집이란 무엇일까를 성찰하도록 만든다. 어릴 때는 태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존재하는 줄 알았다. 이사를 거듭할수록 지상에서 지하로 집을 옮겨 갈수록 빛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유년 시절 내내 이사를 다닌 아오세에게 집은 가족이 단란한 식사를 하고 내일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라야 했다.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패했다. 집이란 타인을 절대적으로 의식해서 가꿀 수 없는 곳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빛의 현관』속 인물들은 행복을 찾게 된다. 사랑의 기억으로 혼자 평생 그림만을 그리며 살아간 화가 후지미야 하루코. 망명의 순간에 연인과 함께 하며 쓸쓸함을 달랜 건축가 타우트. 아들에게만은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어 했던 오카지마.


그들이 추구한 삶의 정서는 기적 같은 사랑이었다. 기억이 남는다. 죽음 이후에는. 사랑하는 이의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갈 때 빛은 그런 나를 보듬어 준다. 오늘 내 손 등을 간질이는 햇빛은 먼저 간 이들의 따뜻한 눈길임을 알아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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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도 있다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북포레스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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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의 산문집 『그런 날도 있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읽었다. 느긋해지기 위해 마스다 미리의 책을 골랐다. 그런 믿음을 주는 작가가 있다. 어떤 장을 펼쳐 읽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현실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위로의 말을 들려주는 작가. 내게는 마스다 미리가 그렇다. 신간이 나오면 꼭 읽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 의미 없이 보내진 않았을까 조바심 나는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의미 없이 보낸 게 아닌 의미를 찾아가는 하루였다고 말한다. 『그런 날도 있다』에 실린 글은 대략 2007년에 쓰였다. 책에서 밝히는 마스다 미리의 나이는 서른여섯. 첫 장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위해 도쿄로 상경한 10년 전에 일을 그리고 있다. 스물여섯에 마스다 미리는 연고도 없는 도쿄에 온다. 퇴직금과 가지고 있는 돈을 가지고서.


평소 성격대로라면 그 돈을 아끼고 아껴서 살아가야겠다고 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단다. '저금이 바닥날 때까지 느긋하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반 년을 지냈다.


그나저나 아무것도 안 했던 그 반년은 뭐였을까? 불현듯 떠오르곤 하는데, 그때마다 유쾌해서 참을 수가 없다. 그 시기는 도쿄라는 대도시에서 상처받지 않을 힘을 비축하기 위한, 나만의 소중한 휴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마스다 미리, 『그런 날도 있다』中에서)


좋다. 이런 글. 온 마음을 다해 내게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조급해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최근에 한국에 번역돼 나온 마스다 미리의 책들 중 『그런 날도 있다』가 가장 좋았다. 무려 13년 전에 쓰인 글인데도. 오래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일상에서 겪어내는 다양한 상황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경스럽다. 불합리한 일이 있으면 용기를 내어 따지기도 한다.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코트와 냄비, 구두를 산다. 친구와 셀럽 모임을 만들어서 유명 식당을 탐방한다. 마사지를 받으러 다니고 피아노를 배운다. 세뱃돈 주는 걸 아까워하는 부분에서는 깊은 공감을 했다. 돈을 주면서도 이 돈으로는 이걸 샀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마스다 미리. 자신을 자책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좋아해 준다.


반성하고 깨우쳐야지 하는 계몽 의식으로 자신을 꾸짖지 않는다. 나마저도 내가 싫을 때가 있다. 그 순간에 왜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잘못했다고 말하면 될걸. 미련한 고집을 부려 타인에게 상처를 준 나. 캄캄한 곳으로 숨고 싶을 때. 종일 누워서 그 일을 되짚어 보는 바보 같은 나에게 『그런 날도 있다』를 건넨다. 기운이 나지 않는다면 목차만이라도 읽어 보라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뒹굴뒹굴 누워 『그런 날도 있다』를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입가에는 미소를 지으면서. 찡그리고 분노하는 내가 아니게 된다. '어마어마한 사치'를 하거나 '포기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으로 돈을 돌려받는 용기를 내거나. 평범한 일상이란 거창한 게 아니라고 말해준다. 카페를 가지 못하면 창가 쪽에 의자를 하나 두고 앉아 있는 일로. 맛있는 디저트 가게가 문을 닫지 않도록 전화를 걸어 주문해 놓고 마스크를 쓰고 디저트를 찾아오는 일로.


우리에게 그런 날도 있었지. 암담한 기억이겠지만 회상해 보면 배시시 웃음 지을 수 있도록 오늘을 기분 좋게 살아내자. 『그런 날도 있다』는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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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공간 - 나를 이루는 작은 세계
유주얼 지음 / 허밍버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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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글이다. 유주얼의 『자기만의 공간』은. 다시 도서관이 열렸다. 코로나19로 달라진 것 중에 하나는 도서관을 갈 수 없다는 거다. 예전에는 휴관일을 빼고는 아무 때나 갈 수 있었다. 여유롭게 가서 책을 고르고 넓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곤 했었다. 지금은 눈치 게임처럼 가야 한다. 거리 두기 단계가 올라가면 휴관. 다시 내려가면 문이 열린다. 도서관 홈페이지를 즐겨찾기 해놨다.



열린다는 공고가 뜨면 얼른 가서 빌려온다. 2층, 3층까지 자유롭게 갈 수는 없지만 신간 코너에서 미리 찜해둔 책을 찾아서 나온다. 『자기만의 공간』은 신간 코너에 얌전히 꽂혀 있었다. 요즘 공간에 꽂혀 있기 때문에 당연히 빌렸다. 집순이인 나는 집이 좋다. 집 꾸미기가 좋다. 유튜브로 오늘의 집을 보는 걸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공간에 살고 있나. 어떻게들 해놓고 사나.



공감 가는 글이 많았다. 최소주의 생활에 입문하게 된 계기부터. 이웃을 이해하는 방법. 친구와 절교 후에 느꼈던 당혹감.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를 찾아가는 『자기만의 공간』의 글은 편안했다. 자신의 불행을 전시하지 않고 과한 수사 없이 마치 자신에게 건네는 듯한 무심한 위로의 말이 들어 있었다.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이곤 한다. 유주얼은 단정한 사람일 듯하다.


생활을 꾸리는 형태로 보나 세계를 이해하는 건강한 시선으로 보나. 그동안의 집 주소가 적힌 초본을 떼어 볼 때. 나 역시 많은 곳을 다니며 한곳에 정착하기를 꿈꾸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에 내 이름과 주소를 남겼다. 변기가 막혀 심야에 사람을 불러야 했을 때. 어떤 의도도 담기지 않은 "여기 혼자 사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유주얼은 당황한다. 좋은 일이란 무엇인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라는 의미로 묻는 좋은 일에 대해. 그 좋은 일은 없지만 다른 좋은 일은 많다고 외친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어렵다. 실패에 관해서는 더더욱. 누군가를 미워하지만 그 일에 대해 쓰는 건 조심스럽다. 상처를 주었지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일에는 서툴다. 『자기만의 공간』을 읽으며 미움과 질투라는 감정에 차분히 생각을 해보았다.


자기만의 공간에 산다는 건 그 모든 감정을 껴안고 나를 미워하지 않아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드라마 정주행을 시작하고 문을 열어 환기를 하는 일. 소박한 오늘 하루의 투 두 리스트이다. 창고를 비우는 일이 추가되어야 하는데. 그 일은 내일로. 그래야 내일이 기다려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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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의 주둥아리는 도무지 쉴 줄을 모른다 - 장래희망이 인기 유튜버인 중년 디자이너의 일상 탐구기
이지원 지음 / 지콜론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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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관점과 생각을 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신나는 일이기도 하다. 단 누군가와는 만나서는 안된다. 이게 무슨 말? 만나서 대화를 해야 관점과 생각을 알지. 노노노. 요즘엔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카페라도 가고 싶은데 포장만 되니 여의치 않다. 코로나19가 아니어도 사람 만나서 웃고 떠드는 건 질색이었다. 억지로 고개를 끄덕여야 하고 간간이 눈도 마주쳐야 한다. 개피곤.


그래도 알고 싶다. 이 사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대들의 신선하고 날 것의 이야기를 들려다오. 이왕이면 가식 없이 냉소와 비꼼이 한가득 담긴 시선에서. 이지원 교수의 『교수님의 주둥아리는 도무지 쉴 줄을 모른다』를 읽어볼까. 전작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를 재미있게 읽었더랬다. 이번에 나온 신간의 부제는 '장래희망이 인기 유튜버인 중년 디자이너의 일상 탐구기'이다. 프로필을 보니 '내일은 옵치왕'이라는 닉네임으로 유튜버로도 활동 중이다.


고등학생 셋이 찾아와 진로에 대해 물을 때 이지원 교수는 고민한다. 내가 과연 그걸 알면 이 자리에 있을까. 시각 디자인의 암울한 미래를 들려주자니 청소년의 꿈을 짓밟는 것 같기도 해서. 평범한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뒷맛이 개운치는 않다. 게임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에서 지금까지. 게임과 함께 했던 유구한 자신의 역사를 들려줄 때는 신이 난다. 지나친 스마트폰 중독에 관해서도 신랄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책이니까 내 면전에 침이 안 튀니까 즐겁게 들어줄 수 있을 정도의 사회 현상 일반에 대한 장황함이 『교수님의 주둥아리는 도무지 쉴 줄을 모른다』에 들어 있다. 제목 그대로 이지원 교수님의 주둥아리는 쉼이 없다. 일상인으로서 교수로서 게임 유튜버로서의 자아가 혼재된 책. 과연 휴일에 뭐 할까. 이 사람은. 알고 싶지 않지만 들려주니 들었는데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은데 웃음이 있다.


어떤 이가 고맙다는 말을 하면 어떻게 대꾸해야 할까. 가만히 있자니 건방져 보이고 웃자니 이것 또한 건방져 보이고. 이럴 때 어떤 말을 해야 그나마 사회화된 인간으로 보일지 교수님의 주둥아리는 도무지 쉴 줄을 모른다』에 나와 있다. 책을 읽어 보시면 아실 거다. 과연 그 말이 적절하겠군 할 거다. 일상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멀리 피해 갈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 사람을 모르고서 하는 행동이겠고. 책을 읽어가다 보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고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인간들이 있지 하며 웃어 줄 수는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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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돈독하게 -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김얀 지음 / 미디어창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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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2020년 12월 11일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매달 11일은 중요한 날이다. 바로 11번가에서 대대적으로 티 멤버십을 껴서 할인을 해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루의 낙을 쇼핑으로 풀던 시절 나는 그야말로 온라인 쇼핑몰의 노예였다.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 대신 휴대전화 소액 결제를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한도 내에 썼다. 결제는. 다음 달에 내가 할 거야 하는 심정으로. 그런데 진짜 다음 달에 내가 한다.


이러다 파산하는 거 아냐. 할 때쯤 쇼핑몰 앱을 지우고 11번가 하나만 남겨 두었다. 귀찮음 때문이었다. 최저가 비교하고 쿠폰 받고 무료 배송 때문에 뭘 하나 끼어 넣고 하는 일이 번거로웠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 그리하여 최종 안착지는 11번가.(이거 홍보하는 거 아닌데. 그냥 어쩌다가 내가 쓰는 통신사의 멤버십 할인이 된다는 걸 알고 11번가에 뼈를 묻은 건데.) 그래봐야 사는 건 커피, 쌀, 김치, 화장지, 물걸레 등등.


10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밤. 심장이 두근 반 세근 반. 심장아 나대지 마라. 12시가 되자마자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던 물건들을 결제한다. 이것저것 뿌려주는 쿠폰을 먹이고 먹여서. 1원까지 남김없이 포인트를 끌어모아서. 결제. 이런 풍경은 11월까지였다. 어제는 달랐다. 왜냐. 나는 한 권의 책을 읽고 있었다. 김얀의 『오늘부터 돈독하게』라는 책. 나는 귀가 얇아서 누구의 말도 잘 듣기 때문에 시키는 건 잘한다.


김얀은 집을 구하기 위해 은행에 간다. 대출 상담을 받으러 간 건데. 거기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연소득 480만 원으로는 대출의 대자도 꺼내지 못한다는 거. 그리하여 김얀은 꿈을 수정한다. 대문호에서 대부호로. 『오늘부터 돈독하게』는 여타의 부자 되기 책과는 다른 지점이 있다.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으로 승부를 보려는 자가 어느 날 부자가 되겠다는 계시 아래 하나씩 자신의 습관을 바꿔가며 돈을 모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무슨 돈을 밝혀. 돈 이야기는 좀 그렇네. 할 수 있나. 당장 내일 먹어야 할 쌀이 없는데. 공과금 고지서가 책상 위에서 나를 째려보고 있는데. 요즘 최애 프로그램 싱어게인에서 미니 데이트를 부른 윤영아 가수는 이런 말을 했다. "내일도 출근해야 한다. 아티스트 좋은데 우리는 또 살아내야 하지 않냐." 그녀는 마트에서 캐셔 일을 한다고 했다. 그 말에 반해 윤영아를 응원하기로 했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가수도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일을 한다.


『오늘부터 돈독하게』에는 돈이라고는 쓸 줄만 알았지 버는 것에는 1도 관심 없던 김얀의 돈 공부에 관한 이야기가 솔직 발랄하게 담겨 있다.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치기공과를 나온 김얀. 치과에서 일을 하다 문득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에세이, 드라마 대본, 소설을 쓴다. 결과는. 음. 별로 좋지 않았다. 나름 잘 나간다는 연애 칼럼니스트였지만 책도 냈지만 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행에서 대출 거절이라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 닥치는 대로 부동산, 경제, 돈에 관한 책을 읽어 나간다. 어머니의 종잣돈을 빌리고 다시 치과에서 일을 해서 부천에 작은 빌라를 산다. 방 두 칸을 세내어 주고 자신은 파티션을 쳐서 거실에서 지낸다. 돈을 모으고 싶다면 일단 아끼는 것에서 출발하라는 만고 진리 불변의 말.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 게 쓰는 건 쉽지만 아끼는 건 어렵다. 그렇기에 쉬운 선택으로 아끼지 않고 쓰기만 해서 신용 카드와 대출의 노예가 된다.


『오늘부터 돈독하게』를 읽고 있지 않았다면 11일인 어제 나는 많은 품목들을 쓸어 담아 결제했겠지. 할인을 더 받기 위해 얼마 이상을 채워 넣으며. 아침에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는 습관으로 시작한 김얀의 돈 모으기 프로젝트. 물 한 잔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불을 개고 세수를 하고 팔 굽혀 펴기를 한다. 직장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자질구레한 물건을 사는 게 아닌 그 물건을 파는 회사의 주식을 사고 아껴서 모은 티끌 같은 돈이 조금씩 커진 티끌이 되는 걸 확인했을 때의 희열로 살아가기.


확실한 건 책을 읽으며 나의 건강하지 못한 습관 하나씩을 버릴 수 있다는 거다. 그리하여 어제는 무엇을 샀느냐. 현미쌀 10Kg. 딱 그거 하나 주문했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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