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김포공항 쏜살 문고
박완서 지음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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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괜찮은 인간이 되고 싶어 평소에는 안 하던 행동을 하고 있다. 바로 아침 일찍 일어나기. 머리맡에 시계를 두고 잔다. 알람은 듣기 싫어 맞춰 놓지 않은 채 눈이 떠지면 틈틈이 시간을 확인한다. 긴장 상태에서 자서 며칠은 피곤했는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괜찮아졌다. 새벽 네시에서 다섯 시 사이 눈을 떠 시간을 확인, 안심하고 다시 잔다. 한두 시간은 더 잘 수 있겠는데. 이러면서. 정확하게 여섯 시에 일어나지는 않지만 그 즈음에 일어난다. 1월이니까. 1월에는 뭐든 계획을 한 번씩 세워 보고 실천하다가 실패도 해보고 그래도 열한 달이나 남았으니까.


박완서의 네 편의 소설이 실린 『이별의 김포공항』을 오전 시간에 읽었다. 브이로그 보면 오전에 일어나 공부를 하거나 요가를 하던데. 작고 귀여운 판형의 쏜살 문고 시리즈라 읽고 있으면 시간이 정말 쏜살처럼 흐른다(이 거지 같은 비유). 사는 게 시시하고 텔레비전 보는 것도 지칠 때. 시간이 많은데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을 때. 젊은 작가의 소설이라더니 나이를 보면 그다지 젊지는 않지만 그래도 출판사에서 미는 작가인 것 같아 책을 사서 읽었는데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나는 몰라 내가 왜 이걸 샀을까. 마케팅에 놀아난 것일까. 자책하는 나에게 박완서의 소설을 건네준다.


얼마 전에 읽은, 차마 제목을 밝힐 수 없는 소설을 읽고 나서 나는 이제 글렀구나. 한국 문학의 첨단에서 멀어졌구나 했다. 첨단에서 멀어지면 다시 그리운 시간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사람 사는 냄새가 풀풀 나는 그곳으로.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꿰뚫는 걸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야기꾼의 품에 안겨본다. 『이별의 김포공항』은 박완서 소설의 정수만을 모아 놓았다. 박완서의 세계에 입문하려는 자가 있다면 이 책을 자신 있게 건넨다. 한 번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다는 박완서 소설.


먼저 표제작인 「이별의 김포공항」은 외국병 그것도 미국병에 걸린 자식들의 사연을 가진 노파가 등장한다. 전쟁이 끝나고 어찌어찌 미군 부대에 빌어서 살아가는 자식들은 하나같이 미국에 가지 못해 안달이다. 한바탕 난리굿을 친 끝에 그들은 각자 미국은 못 가고 브라질, 괌, 서독으로 탈출하듯 이 나라를 떠난다. 그 소동을 기억하는 노파의 손녀. 노파는 딸의 초청으로 미국에 갈 수 있게 되었고 손녀는 떠나기 전 할머니와 추억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추억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지렁이 울음소리」와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안온한 생활에 드리운 불안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남들이 봤을 때 괜찮게 살아가는 두 여자. 「지렁이 울음소리」의 여자는 작은 일탈을 감행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권태의 감옥에서 빠져나오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님을 보여준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속 여자는 세 번 결혼을 한다. 감행한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허풍 앞에서 여자는 부끄러움을 배우고 싶다고 느낀다.


「카메라와 워커」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조카를 키운 여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 너 좋으라고 내 뜻이 네 뜻이 될 수 있게 해주고 싶었지만 실패한 여자의 허무를 그려내는 소설이다. 네 편의 소설에 등장한 여자들의 서사는 과거를 날아와 현재에 도착한다. 흘러간 몇 십 년 전의 과거가 아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반복되고 있는 허무요, 슬픔이다. 나는 비뚤어진 시선으로 인간을 그리는 소설이 좋다.


올바르고 괜찮은 척 점잔을 떠는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전부 집어치워 소리고 지르고 싶어진다. 박완서의 소설은 그런 게 없다. 인간이 가진 속물적인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꼬이고 부정적인 모습을 하나하나 꺼내서 해체하듯 보여준다. 인간의 속이 이렇게 시꺼멓다고. 아울러 악랄한 모습도 숨기고 있다고. 나, 당신, 우리가 위선을 떨고 위악을 부리며 살아간다. 말해준다.


올바른 인간으로 살아볼까. 새벽에 일어나 이것저것 하는 척하는데. 이 짓도 얼마 안 갈지 모른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는 일찍이 글렀는데. 다만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다.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우는 「이별의 김포공항」 속 노파는 자신의 삶을 뿌리가 뽑혔다고 생각한다. 뿌리가 뽑힌들 어떠랴. 자유롭게 돌아다니다 단단한 땅이 있으면 내 자리인 척 비비는 것도 좋을 터이다. 각자의 자리는 없다. 자리가 있다고 믿으며 살아갈 뿐이다. 더 나아지리라는 믿음 대신 더는 나빠질 수 없다는 오기로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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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걷는사람 에세이 7
김봄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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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어른들은 말씀하셨지. 술자리에 가서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맨정신으로도 하기 힘든 주제. 하긴 맨정신으로 못 하니까 술의 힘을 빌려라도 이야기하는 건가. 정치에 정, 종교에 종자만 나오기 시작하면 젓가락이 날아가 벽에 꽂히고 찌개에 있는 김치가 상대방 면상으로 날아간다. 그야말로 술자리는 난장판이 되고 만다. 난장판만 되면 좋게. 나중에는 절교. 너와는 끝이야. 요즘 말로 손절.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앞뒤가 꽉 막혀 있네. 이러면서. 남의 생각을 바꿔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건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 공자, 맹자가 와도 못한다. 그냥 자네가 믿는 걸 계속 믿게. 손을 털고 나가겠지.(나가는 김에 계산도 해주십쇼. 꾸벅.) 그냥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을 얼른 파악해서 친해지는 수밖에. 친해지면 남의 편을 욕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예전에 일했던 직장에서는 다행히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이들이 있어 뉴스, 라기보다는 의견에 가까운 소식에 신나게 이바구를 나눴다.

지금은 노니까. 책을 읽는다.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라고 하니까. 대놓고 정치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는 거구나. 읽었다. 사실 이 책은 제목 때문에 나 같은 오해가 생겨 읽는 사람이 꽤 있으리라 생각이 든다.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는 정치 이야기를 빙자한 가족 썰을 푸는 책이다. 재미와 감동은 덤이다. 재미 쪽의 지분이 더 많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에세이를 이런 형식으로도 쓸 수 있구나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글을 읽으며 한 편이 끝날 때마다 아쉽고 뭐야, 이렇게 끝나는 거야, 빨리 다음 이야기를 들려줘 하며 읽었다. 소설가 김봄은 김 작가로 지칭되고 어머니는 손 여사로 불린다. 처음은 프랑스에 갈 일이 생겨 손 여사에게 고양이를 부탁하려는 김 작가의 치밀한 계획으로 시작된다. 치밀한 계획이라고 해봐야 손 여사에게 저녁을 사 먹이는 일이다. 눈치 빠른 손 여사는 딸의 수를 알아챈다. 네가 부탁할게 있어서 이러는 거구나.

딸과 엄마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자식을 다섯이나 낳은 손 여사. 그 자식이 자식을 낳아 돌봄을 부탁할 때 손 여사는 솔직하게 놉이라고 말한다. '손 여사는 자기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좋은 것은 분명하게 의사 표시를 했고, 싫은 것은 더욱더 확실하게 싫은 티를 냈다.' 김 작가가 바라보는 손 여사의 성격은 내가 갖추지 못한 화끈함이 있었다. 한 번뿐인 인생,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는 손 여사. 부럽다.




어째 손 여사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상하다. 성 소수자들에 대한 관점이 분명하고 소위 가짜 뉴스를 진짜처럼 믿고 있었다. 급기야 딸인 김 작가에게 빨갱이, 좌파라며 큰일이라고 말한다. 고양이를 부탁해라고 했더니 '빨갱이 좌파 고양이는 안 봐줘." 통첩을 날린다. 여기서 물러날 김 작가가 아니다. 정치 성향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자식 같은 고양이를 한 달 동안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십만 원 더 얹어서 이십만 원을 부른다. 오케이 콜. 좌파든 빨갱이든 딸이 주는 돈은 황홀하니까.



보수 부모님을 둔 김 작가. 여기에서 말하는 보수는 우리가 아는 그 보수. 손 여사는 시도 때도 없이 우주의 기운을 찾던 그 사람을 뽑고 아버지는 토론회에서 남자답다는 이유로 강성 노조 운운하며 진주 의료원을 폐업 시킨 그이에게 표를 준다. 딸인 김 작가는? 제가 소개하려는 책의 제목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소설을 쓰겠다고 한예종에 들어갔는데 김 작가가 끔찍이 싫어하는 쥐를 닮은 작자가 대통령이 되면서 학교가 이상해졌다. 그때부터 김 작가는 정치적 각성을 한다.



살면서. 한 번은. 머리가 빡 돈다. 뇌에 이상이 생겨 관성에 젖어 바라보던 세계의 현상이 다르게 보인다. 지금까지 내가 헛살았구나. 나만 좋자고 호의호식까지는 아니지만 잘 먹고 잘 살았구나.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으며 나이만 먹었네. 깨달음이 급행열차처럼 찾아온다. 정치라는 열차가 도착했어. 얼른 타라고. 안 타면 출발한다. 알았어. 나 탈게. 이러면서.



가족이 나와 다른 정치와 종교 성향을 가지면 어떻게 하나.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는 그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날카로워서 베일 정도는 아니고 웃음이 나와 즐겁고 한편으로는 짠해서 콧물이 흘러내린다. 김 작가의 필력에 반해서 지금까지 민음사에서 나온 한 권의 유일무이한 소설집 『아오리를 먹는 오후』를 주문할 예정이다. 읽으면서 즐겁고 심장이 두근대는 책을 만나면 행복하다. 글과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배우면서 읽었다,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는.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지 말고 핵심만 간단하게.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해야 한다. 이렇게 썼지만 어려운 일이다.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지 않지. 가족주의를 넘어 가족이기주의가 쩐 한국 사회에서 가족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것도 정치와 종교 성향이 다른 가족을. 김 작가는 좌파 고양이를 부탁하면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 생각은 한 권의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땅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엄마와 딸에 대한 자부심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아빠. 그들이 좌파든 우파든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신 분들이라는 걸 잊지 않으면 된다. 올해 읽은 책 중에 쵝오!(그래봐야 1월 3일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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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은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까? - 선명하고 바르고 오해받지 않는 글쓰기
김은경 지음 / 호우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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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에도 새벽에 일어나기는 계속된다. 그래봐야 하루 일어났다. 시작이 반이니까. 작심삼일이어도 3일이 6일 되고 6일이 9일 되면서 습관이 만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김은경의 『내 문장은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까?』를 펼쳤다. 잠이 오는 듯해 필기를 하면서 읽었다. 문장 쓰기를 고민하면서 읽었다. 시작부터 문법을 설명하면 어쩌지 두려웠다. 능동, 피동, 주동, 사동.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 지끈. 이게 안 나오는 게 아니지만 이 책은 잘못 쓰인 예문을 보여주고 자상한 글쓰기 교사처럼 무엇이 잘못 된 건지 독자에게 알려준다.


현실에서는 설명했는데 똑같은 걸 물으면 한숨이 나오지만. 책이니까 이해가 안 되면 같은 페이지를 들여다보면 된다. 사실. 『내 문장은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까?』를 읽고 리뷰를 쓰는데. 신나게 자판을 두드리지 못하고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되는대로 쓴다. 문어체와 구어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기술은 고사하고 어느 것 하나도 성공적으로 쓰지 못하고 있다. 비문이 가득한 글을 써 놓고 종종 성취감에 빠지기까지 한다.


게을러서 고쳐쓰기도 안 한다. 일상에서 자존감은 낮은 편인데 내가 써 놓은 글에서는 묘한 자부심을 느껴 누군가 글에 대한 비판을 할라치면 귀를 막고 안 들리는 척한다. 이만하면 잘 썼다. 고생했다고 나 스스로를 다독인다. 지나치게 생략하지 말고 반복은 피하라고 『내 문장은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까?』는 말한다. 내 글은 지나치게 많은 생략과 반복을 하고 있는데.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알았으면 고쳐야지.


책을 읽으면서 스물여덟 개의 문장 쓰기 주의 사항을 필기했다. 그중에 아하, 무릎을 탁 쳤던 부분 하나. 100%와 10장, 100퍼센트와 열 장을 쓰는 경우는 어떻게 다른가. 전자는 숫자의 가독성을 높여야 하니 경제 경영서, 자기 계발서, 실용서에 해당하고 후자는 문장의 가독성을 줘야 하니 문학에 쓰면 된단다. 또 하나는 습관적으로 쓰고 있던 번역투의 표현을 알게 되었다. '-데 있어, -에 있어, -에 대해, -에 관해'를 줄이면 문장은 간결해진다.


2021년에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글을 잘 쓰고 싶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잘 쓰지 않았어라는 자뻑 대신 누가 봐도 비문은 없네, 문장은 괜찮게 쓰네라는 말을 좀 듣고 싶다. 『내 문장은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까?』가 본질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이것이다.


'쓸데없는 것을 모두 삭제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 문장은 글쓰기와 삶에 모두 적용되는 말이다. 컴퓨터 공부를 하다 보니 알겠다. 문학의 언어는 얼마나 말랑말랑한가. 상처받은 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문학의 언어. 문학을 읽고 감상을 쓰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글을 써야 한다는 마음으로 책상에 앉는 게 두려울 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기계 용어들로 가득한 문제집을 펼치고 동영상을 듣기 위해 컴퓨터를 켜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내 머리는 얼마나 나쁜지. 방금 설명 들은 부분을 돌아서면 까먹는 바보. 삶의 균형을 맞추고 싶어 틈틈이 책을 읽는다. 2021년의 첫 책으로 『내 문장은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까?』를 고른 이유는 단순하다. 나 지금 잘못하고 있잖아. 그럼 고쳐볼까. 지금 내 글의 첫 문장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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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0 소설 보다
서장원.신종원.우다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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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눈이 내렸다. 고무 재질의 신발을 신고 가느라 조심조심. 미끄러지면 큰일이니까. 눈이 쌓였다가 오후가 되니 녹아 있었다. 바람은 차갑지만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오후. 요즘에는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에 일어난다. 그전에는 12시가 돼갈 때쯤 일어나 허기진 배를 채우고 집을 정리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 꾸준하게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걸 하고 있는 게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로 저녁형 인간이었다. 오전에 일어나니 하루가 길다. 시간을 알차게 쓰고 있다는 착각까지 생길 정도이다.


어제오늘. 6시 30분에 일어나 문지에서 나오는 소설 보다 시리즈 중 『소설 보다 가을 2020』을 읽었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지 않고 집중해서 읽었다. 대신 휴대전화에 타이머를 설정해 두고 알람이 울리면 책을 덮었다. 아침을 챙겨 먹고 버스를 타러 가야 하니까. 눈이 오는 겨울이 되어서야 '가을의 소설'을 읽는다. 지나간 계절을 실감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가을이 있었구나. 우리가 가을을 살아냈구나. 안도.


얼마 전에 뉴스에서 단편 소설이 인기라는 기사를 보았다. 문지에서 나오는 소설 보다 시리즈를 기획한 이의 인터뷰도. 바쁜 사람들이 길이가 짧은 소설을 찾아 읽는다고. 손에 쥐기 가벼운 판형의 소설책들이 인기란다. 팬데믹 시절에도 소설은 읽힌다. 먹고 사느라 힘든데도 무언갈 찾아서 읽는다. 대단하고 대견하다. 그중에 으뜸은 나! ㅎㅎ


2021학년도 수능 만점자 중에 한 학생은 매일 아침 한 시간의 독서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학업 스트레스를 받으면 시를 썼다고 한다. 이런 야무지고 똘똘한 학생이 있다니. 따라 해보려고 아침 독서 시간을 가진다. 세 편의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새벽에서 아침으로 시간의 변화 역시 느낄 수 있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더니. 비유가 아니었어 하는.


서장원의 「이 인용 게임」은 아들을 잃은 두 어머니의 현재를 병치해서 보여준다. 기억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죽은 아들의 기억만은 선명한 어머니. 아들의 과거가 담긴 일기장을 찾기 위해 애쓰는 어머니. 둘의 세계에 가닿지 못한 나머지 아이들의 현재는 무엇이 되는지를 묻는 소설이다. 「멜로디 웹 텍스처」는 이해하지 못했다. 한숨. 내가 바보라서 그렇다.


우다영의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에서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각성자들의 세상을 그린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무엇이었을까. 과거의 기억을 떠안고 살아간다면 어떤 심정일까로 시작한 소설은 쓸쓸한 현재를 보여주며 끝이 난다. 각성자들을 인터뷰하는 화자 역시 과거를 기억해 낸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세상은 나아갈 수도 후퇴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제 나는 『소설 보다 겨울 2020』을 읽는다. 며칠 전에 주문한 책이 어제 도착해 있다. 겨울 지나고 봄이 오면 세상은 나아질 거야. 이런 믿음으로.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서사가 풍부한 소설을 좋아한다. 겨울에는 그랬으면 좋겠다. 전구 불빛 아래에서 책을 읽어나가면서 아무래도 좋은 심정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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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좀 빌려줄래? - 멈출 수 없는 책 읽기의 즐거움
그랜트 스나이더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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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욕심이 많아서(어찌 책 욕심뿐일까. 모든 것에 있어서 욕심쟁이.) 누가 책을 빌려 달라고 하면 없다고 말한다. 꼼쟁이, 얌체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다. 몇 번 책을 빌려주었다가 되돌려 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왜. 왜. 도대체 왜? 책을 빌려 가서는 돌려주지 않는 건가. 시리즈 물일 경우 1권이 빠져 있다든지. 중간에 권 수가 빠져 있는 걸 도저히 눈 뜨고는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다시는 결코 누구에게도 책을 빌려 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던데. 정리 강박증이 있다든지. 문학 애호가라든지. 인문학 덕후라든지. 평소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알 수 있겠다. 그랜트 스나이더의 카툰 에세이 『책 좀 빌려줄래?』에 나오는 한 장면은 즐겁고 웃겼다. 다른 사람 집에 가서 책장을 훑어보는 장면이다.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 책장 앞을 서성인다. 취향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전자책 리더기가 있는 컷이 유난히 웃겼다.


『책 좀 빌려줄래?』는 책 좀 읽는다는 모든 이에게 주저 없이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확실하게 말한다. 『책 좀 빌려줄래?』를 읽고 다들 재미있다고 유익했다고 할걸. 다음 장이 넘어가는 게 아쉬워서 한 페이지를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을걸. 나만 알기에는 아까운 책이다. 그러니 다들 2020년이 가기 전까지 읽어보시길. (얼마 안 남았군요. 서두르세요.) 세상에는 즐거운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할 일도 많은데.


왜 책을 읽고 계시는지. 화려한 조명 대신 책 읽기 좋은 색온도 조절 조명 아래 앉아 책을 읽고 계시는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영화를 보고 넷플릭스를 켜는 대신 책을 읽는지. 모르겠네요. 아니, 모르지 않습니다. 책을 펼친다는 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현실의 스위치를 꺼두고 환상의 세계로 나를 밀어 넣는 일이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듯.


책을 아끼고 사랑한다. 책을 읽는다. 읽다 보니 이건 나도 쓰겠다. 하는 마음이 생긴다. 『책 좀 빌려줄래?』에서 작가와 작가 지망생의 차이를 단 두 컷으로 비교해 놓았다. 쓰려고 앉아 있는 자는 작가 지망생. 쓰려고 앉아 쓰는 자는 작가. 온갖 글쓰기 책에서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구구절절이 늘어놓았지만 이 만화를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작가의 하루 편도 보고 있으면 즐겁고 사랑스럽다.


책의 증식을 막기 위해 종이책을 줄이고 전자책으로 책 읽기를 하는 요즘이다. 『책 좀 빌려줄래?』를 전자책으로 읽었다. 찾아보니 올 컬러였다. 종이책으로 보면 화려한 색감과 더불어 책덕후들은 기분이 마구마구 좋아질 듯. 안 봐도 비디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 세계를 압축해 놓은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책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책은 어떤 의미인가. 이 사랑스러운 책이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도서관에 가고 싶다. 읽고 싶은 책을 마구 골라 오고 싶다. 다 읽지 못해도 최대 대출 권수인 10권을 빌려 나오고 싶다. 그러지 못하는 요즘 책을 사랑하는 이가 그리고 쓴 『책 좀 빌려줄래?』를 읽는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어 생각하는 것이다. 책덕후들은 다들 특이하고 이상하지. 좋은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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