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 - 강지혜 에세이 매일과 영원 2
강지혜 지음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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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없어서 여름휴가 이야기를 꺼냈다. 짧은 휴가를 앞두고 있었을 때였다. 다들 어디 놀러 가시나, 궁금한 것도 있고. 사회성 있는 인간으로 보이고 싶어서. 제주도 이야기가 나왔다. 그 순간 제주도에 꼭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신청해 제주도 관광 지도도 받아 보았다. 게으름뱅이가 그 정도 했으면 큰일 한 거다. 지도를 받아 든 것만으로도 제주도에 가 있는 기분.


딱 거기까지였다. 항공편을 알아보고 숙박 시설을 검색하는데 지쳤다. 하필이면 그때가 성수기였던 것도 있고. 핑계인 거 다 안다. 가고 싶은 마음이었으면 어떻게든 갔을 텐데. 온갖 가기 싫은 이유를 끌어대면서 결국에는 가지 않았다. 아, 제주도. 내게는 너무 먼 곳. 책으로만 만날래. 그래서 강지혜의 에세이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를 집어 들었다.


요즘 시인의 시집은 안 읽고 시인이 쓴 에세이만 읽고 있다. 아무래도 마음이 복잡해서인지 시보다는 생활의 감각이 묻어나는 에세이가 더 와닿는다. 버거운 출퇴근을 하던 시인 강지혜는 어느 날 이렇게는 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대출을 받아 집을 샀지만 그래서 영혼이 바닥난 기분이 든다. 이렇게는 살기 힘들겠다는 남편은 여행을 떠나고 기브 앤 테이크로 시인도 전국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가을의 제주를 만난다.


별명이 강추진만. 한 번 추진하려는 일에는 저돌적으로 밀고 나가는 시인의 별명. 강추진만은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계획을 짠다. 함께 여행을 떠났고 제주도 촌집을 사서 꾸민다. 남편과 동생이 함께 이주를 했다. 시작은 만만치 않았다. 촌집은 촌집이었다. 촌집은 리모델링보다는 허물고 새로 건축을 하는 게 이득이란다.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은 나도 한 번 제주도에 살아볼까 하는 이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당신들이 생각한 것만큼 낭만적인 제주도 살이가 아니라는 것을 웃프게 들려준다. 가족과 함께였지만 가족이어서 서운하고 힘들었던 점 또한 솔직하게 말한다. 어렵게 리모델링을 하고 가게를 열었다. 만만치 않은 자영업자의 삶. 그럼에도 행복이 찾아온다. 강아지 신지와 귀여운 아이 다하. 시인과 엄마, 숙박 업체의 사장으로서 강지혜의 삶이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에세이 끝에는 시가 한 편씩 실려 있다. 시인으로서의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여 뭉클했다. 시 밑에 쓰인 이야기 역시 읽고 나면 마음이 짠해진다. 어떤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눌러썼을지가 상상이 되어서. 사람 일은 모른다지만 내가 제주도에 갈 일이 있을까. 이런 식으로 가다간 제주도를 책으로 배웠어요가 될 것 같다. 누군가의 제주도 살이를 보며 그이가 들려주는 일상의 슬픔과 기쁨을 상상하며 가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인다. 책은 그러라고 읽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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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숨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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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의 소설집 『환한 숨』에서 내가 취할 수 있었던 정서는 사랑을 향한 머뭇거림이었다. 아홉 편의 이야기가 전부 사랑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애써 사랑의 감정을 찾고자 했다. 어떤 이야기는 마음이 시렸고 어떤 이야기는 마음이 아팠다. 조해진이 그려내는 인물에게 자주 감정이 이입되었는데 그건 그들이 너무나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특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보통과 특별의 경계를 조해진은 능숙하게 넘나들었다.


대부분의 인물이 혼자 살거나 가족이 있어도 따로 산다. 부모는 부재하고 형제는 소원한 상태로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인 것처럼 살아가는 그들은 생의 한순간 사랑이라고 부르는 풍경에 다가갔다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멀어진다. 섬과 섬이 만나 육지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단단한 마음이 되어 서로를 밀어낸다. 어쩌다 사랑할 수도 있었지만 그다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멀어진다. 사랑하며 사는 것보다 사랑을 모르는 상태로 살아가는 게 익숙한 사람들, 『환한 숨』에는 그런 이들만 등장한다.


무리 없이 비유를 쓸 줄 아는 조해진의 문장은 『환한 숨』에서 절정을 이룬다. 사회적인 문제도 주저 없이 소설로 끌어온다. 요양보호사, 기간제 교사, 도서관 사서, 시인, 학원 강사, 경력단절 여성 등 『환한 숨』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소설의 주제를 풍성하게 만든다. 직업과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그들이 사랑을 느끼고 연애를 시작했으면 했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사랑에 빠지는 건 아니라는 듯 그들은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편지와 시를 쓴다. 생의 최초의 감각을 기억하며 소설을 쓴다. 모두 쓴다는 행위로 귀결되는 삶이다.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말한다. 글을 쓰겠다는 마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를 묻는 여정으로 『환한 숨』은 쓰였다. 살아가기는 쉽지만 버티기는 어려운 시대. 사랑하며 살기 보다 미움 없이 사는 걸 선택한 인물들의 오늘을 읽으면서 내내 서글픈 마음이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밖에서 노크조차 하지 못하며 서 있는 나의 과거들.


포기하기가 어려워 구질구질하게 과거를 붙들고 살고 있다. 후회를 반복하고 잘못은 모른 체하는 나의 오늘. 환한 미래 따위는 없어도 좋으니 '환한 숨' 정도는 마음껏 쉬고 싶다. 밤중에 치킨 시켜 먹고 커피 한 잔 정도는 생각 없이 사 마시려고 돈 벌러 나간 건데. 죽음이 너무나 많다. 『환한 숨』에는 빈번한 죽음이 가족의 부재가 포기해버린 사랑이 많다. 최선을 다해 살지 않아도 된다고 누군가 일찍 말해주었으면 괜찮았을까. 『환한 숨』은 질문한다.


최선을 다할수록 최선으로 밀려나는 삶에서 사랑은 구원이 될 수 없었음을 『환한 숨』은 보여준다. 단지 사랑의 기억만을 가지고 남은 내일을 살아가라고 말한다.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한 순간을 복기하며 평생을 살아갈 허구의 인물들에게서 절망이 전이된다. 모두에게 안녕하냐고 쉽게 묻지 못하는 오늘날의 처연한 풍경이 소설에 담겨 있다. 슬프고 먹먹하다. 함부로 슬프다고 말하지도 못할 슬픔이 『환한 숨』에 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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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시대 - 문보영 에세이 매일과 영원 1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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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제 나는 리뷰 외에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인간이 되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문보영의 『일기시대』를 읽는 동안. 책에는 시인이 불면의 밤 동안 쓴 다양한 장르의 글이 들어 있다. 대부분 일기 형태이지만. 에세이와 소설의 중간을 넘나드는 글이 간간이 섞여 있다. 책을 읽고 난 후의 흥분된 감정을 잘 추스른 리뷰도 있다. 제목만 『일기시대』일 뿐 재능과 노력이 응축된 다양한 종류의 글이 담겨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 역시 매일 일기를 쓴다. 쓰는 내용이래봐야 하루 일과를 의미 없이 나열해 놓은 형태에 불과하다. 첫 문장과 끝 문장이 어제와 다르지 않은 사건이 생기면 알리바이 증명용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일기를 쓴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누가 이걸 가지고 책으로 만들어 보자고 하면 당장 불태워야 하는 일기. 컴퓨터가 익숙하지 않았을 땐 손으로도 글을 잘 썼다. 자알 쓴 거다. 맘 가는 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한글 자판은 안 보고도 칠 수 있는 정도가 된 지금 컴퓨터를 책으로 배운 지금은 손가락이 키보드가 아니면 길을 잃고야 만다. 손으로 쓴 일기가 형편없는 이유를 찾아낸 것이다. 그럼 컴퓨터로 쓰는 글은 괜찮은가. 그렇지도 않은 게 나중에 내가 쓴 글을 화장실에서 읽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 냄새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걸 글이라고 잘도 써 놓고 전체 공개로 해 놓은 뻔뻔함 때문에.


재능은 없고 노력은 더더욱 하지 않는 잉여 인간은 출세욕이 하늘을 찌른다. 평소에는 잘 숨기고 있다가 누군가들의 성공기를 보다 보면 나에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한다. 『일기시대』를 읽으면서 혹시 누군가 내 블로그에 쓰인 그간의 리뷰를 보고 출간 제의를 하지 않을까 일기도 책이 되는데 리뷰라고 안 될 게 있나 하는 기대 기대. 잠깐. 다시 생각해 보니 일기나 에세이, 리뷰는 일반인이 출판하기에는 벽이 존재한다.


어떤 에세이 작가의 데뷔기는 흥미로웠다. 그가 블로그에 쓴 글을 신문사 부장이 우연히 읽고 칼럼 제의를 했다는 것이다. 잘 되는 사람은 어떻게도 기회가 있구나. 유명해질 기회 따위는 없으니 얼마 전 떨어진 시험을 다시 보려면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여 문제나 풀어야지. 공부하다가 남은 시간에 드라마 보다가 남은 시간에 책을 읽고 리뷰를 써야지. 노력으로 밀고 나가는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야 너도 할 수 있어 응원의 말을 굳이 찾아내서 힘을 내야겠다.


『일기시대』는 불면의 밤, 잠이 오는 한낮의 문보영 시인의 생존기를 담고 있다. 글 마지막에 최종 취침 시각이 쓰여 있는데 깜짝 놀랐다. 요즘 나의 취침 시각과 비슷한 게 아닌가. 사람 사는 거 똑같구나. 낮 열두시 정도에 일어난다는 것까지도. 다른 게 뭐냐면 시인은 도서관에 간다는 것. 나는 그대로 누워서 책을 읽는다는 것. 시인은 무엇이든 쓴다는 것. 나는 리뷰만 쓴다는 것.


「편지 광기」에서 소개하는 『아이 러브 딕』은 흥미로웠다. '딕에게'로 시작하는 문장이 아니면 글을 쓸 수 없는 인물의 이야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설픈 광기라도 필요하다. 이상한 계기가 필요하다. 그럼 바꿔볼까. 시를 리뷰처럼 써 보기. 소설을 리뷰처럼 써 보기. 희곡을 리뷰처럼 써 보기. 궤변을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뭐든 다 안되겠네요. 문보영 시인의 유튜브를 보면 어디에서든 큰 노트를 펼쳐놓고 글을 쓰는 그녀를 볼 수 있다.


대체 무얼 쓸까. 궁금했는데 그 순간, 그 공간에서 쓴 글이 『일기시대』가 된 듯하다. 일단 쓴다는 루틴을 가진 시인의 일기는 웬만하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게으름뱅이 독자에게 닿아 꾸준함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요즘은 성공보다 실패가 하고 싶지 않다는. 출세보다 외출이라도 하면 다행이라는. 내일 도서관 가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눈 뜨면 도서관에 간다니, 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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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농담 말들의 흐름 7
편혜영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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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종종 술 마시는 일에 대해 생각을 한다. 그저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떨리는 손을 감추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더 마시려 애쓰고, 술 마시는 걸 자책하고 숨기려다 남몰래 마시며 불안한 안도감을 느끼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술 없이 부끄러움에 맞서기 싫을 때, 세계가 짐짝 같은 무게로 업혀올 때, 오래된 관계를 내가 다 망쳤다 싶을 때, 아무리 달리 보려고 해도 내 마음이 하찮을 때, 가까운 사람에 대한 연민과 실망으로 마음이 그을릴 때, 한마디로 제정신인 걸 참을 수 없을 때 그런 생각을 한다.

(편혜영, 『술과 농담』, 「몰沒」中에서)



소설 가르치는 선생은 수업이 끝나면 일찍 가시는 분이었다. 사는 곳이 멀어서였다. 뒤풀이를 가질 새도 없었다. 소설 창작론 수업이 종강했을 때였다. 그때는 웬일인지 모여서 차를 마시자고 했다. 차를? 술도 아니고 차를? 이해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선생은 한동안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했다. 간간이 수업 시간에 술을 마셨을 때와 끊었을 때의 시절을 토막 내서 들려주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질문은 하지 않았다.


차를 마셨다. 선생은. 그러나 우리는 생맥주를 마셨다. 진정한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술을 마시는 자들 곁에서 참고 마시지 않는 거라고 들었다. 선생은 진정 중독에서 벗어난 듯 차만을 홀짝였다. 우리들 앞에 있는 술잔을 들여다보는 눈이 슬퍼 보이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 술을 마시지 않는 것과 마시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실로 거대했다. 선생은 둘 다였다. 마시지 않으면서 마시지 못하는 것. 뭐가 더 안타까울까 저울질해봤지만 그런 건 없었다. 자업자득인 게 분명했으니까.


술에 관해 말해보라고 하면 별로 할 말이 없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술잔을 바라보던 선생의 표정이 떠오를 뿐이다. 남들은 취미 부자라고 하면서 다종다양한 취미를 섭렵한다던데 나는 그 흔한 혼술의 취미도 없다. 마트에 가면 가지 않는 코너는 주류 코너. 언제부터인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사회생활 초기에는 뭘 몰라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마셨는데 곧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고는 집에만 틀어박혔다. 초코 우유와 탄산음료를 즐겨 마시며 살이 피둥피둥 쪘다.


완전 최애 작가들의 글 모음집 『술과 농담』은 술에 관한 각자의 기억 혹은 약간의 허구를 가미한 서사가 들어 있다. 처음에는 에세이로 읽었다가 중간에는 소설로 읽고 나중에는 시로 읽어 버리는 『술과 농담』. 편혜영의 글에서 술과 불화한 듯한 낌새를 눈치채기도 하고 조해진은 다양한 술의 종류를 빌려와 술의 나날을 펼쳐 놓는다. 조해진의 산문을 읽어본 적 없어서 『술과 농담』 속 조해진의 글을 흡수하듯 읽어버렸다. 내내 술을 마시며 소설을 쓴다니.


김나영은 육아 퇴근 후 마시는 맥주를 끊었다고 한다. 배가 나와서. 이주란의 글을 읽을 때 나는 소설로 읽었다. 그러다 '주란'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진짜 이주란 이야기를 이주란이 쓴 건가 의심하다가 그런가 보다 하고 읽게 된다. 그런가 보다, 가 중요하다. 이주란의 글은. 어떤 일상은 마음이 아파서 사실로써 대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주란은 그런 순간을 쓴다. 그래서 진짜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소설로 읽는다.


한유주의 「단 한 번 본」을 읽고 이제는 한유주를 읽어도 괜찮겠다는 안심을 한다. 이장욱의 시 같은 글을 끝으로 『술과 농담』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술도 못 마시고 농담은커녕 농담 비슷한 걸 시도했다가 분위기만 싸하게 만드는 나란 인간은 술과 농담을 글로 배우고 있다. 술에 취한 기분이 싫고 술이 깬 다음날은 더더욱 기분이 더러워져 술을 마시지 않는다. 유쾌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 농담을 시도했다가 상대가 정색을 하는 바람에 울면서 집에 온 적도 있다. 술과 농담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서 하고 싶지 않다. 그리하여 그것에 관해서는 읽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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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4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달까지 가자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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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일어나자마자 치킨집에 전화를 걸었다. 보통 배달 앱으로 주문하는데 생각해 보니 치킨집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배달비도 좀 아까운 마음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해놓고 가져가기로 했다. 메뉴를 집중해서 보면서(문제를 이렇게 집중해서 보란 말이다. 그랬으면 벌써 합격하고 남았겠다.) 배달비 아끼니까 사이드 메뉴 시켜도 되겠지,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뿌링클 한 마리랑 치즈볼 오천 원짜리로 포장해 주세요 말했다.


진짜 집이랑 가까운 곳에 치킨집이 있었다. 아직 오후인데도 매장에는 술 손님들이 있었다. 맞다. 지금은 코로나 시국이지. 늦게까지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오후에 모이는 거구나.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네. 천국의 향기가 이런 걸까 하는 냄새를 풍기는 치킨을 소중히 받아들고 마트에도 갔다. 아무래도 콜라 한 캔으로는 탄산이 부족하니까. 탄산음료를 세 개 사고 바로 옆에 있는 커피집에 가서 커피도 샀다. 어른의 삶이란 이런 걸까. 하는 기분에 취해 집으로 올라와 치킨을 뜯었다.


망설이는 마음 없이 물건을 살 때만 느끼는 어른의 기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비애 같아서 서글프지만 그래도 좋고 행복하다.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지만 굳이 가지 않는 게으름뱅이의 하루는 이렇게 먹고 자고 읽으며 지나간다. 장류진의 장편 소설 『달까지 가자』를 읽으며 지금의 나의 삶도 나쁘지 않구나 용기를 얻는다. 나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라 문화·트렌드에 약한 편이다. 유행하는 게 있어도 모르고 유행이 지나도 모르며 살아간다.


남들이 좋다고 재미있다고 여기는 걸 뒤늦게 알고 뒤늦게 즐긴다. 드라마, 영화, 투자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런 편이다. 단 한 가지, 책은 제외한다. 신간이 나오면 바로 사서 읽는 걸 좋아한다. 예전에는 책 사면 주는 굿즈에 미쳐서 책을 사 나르는 바람에 책장이 포화 상태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책을 읽으며 요즘 유행에 대해 실감한다. 『달까지 가자』는 마론 제과에 다니는 여성 3인방이 등장한다. 공채가 아닌 루트로 들어온 '비공채 출신 3인방'의 가상화폐 투자기를 그리고 있다.


나이, 출신, 학력도 다른 그들이 그 어렵다는 회사 내에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서로가 서로를 보자마자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교사, 공무원 출신이 집안에 없고 재산을 상속받아 임대 수익을 올리며 살아가리라는 기대가 없는 사람들. 다해, 은상, 지송은 단채 채팅방을 만들고 일주일에 두어 번은 점심시간에 콩나물국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하루하루 성실한 듯 살아간다. 어느 날 은상 언니의 표정이 이상하게 달뜨고 미친 걸까 싶게 기뻐 보였다.


이 언니가 세상에 '케이크를 인당 하나씩' 시키라는 거 아닌가. 처음엔 남자가 생겼나 했는데 은상 언니는 진지하게 가상 화폐 이야기를 한다. 블록체인 어쩌고 암호화폐 어쩌고 하면서 외계어 같은 말을 하면서 자신이 지금 '이더리움'을 발목에 사서 투자 중이라고. 이더리움 한 개 가격이 13,950인데 이게 100만 원, 200만 원까지 오를 수 있다고. 다해, 지송은 은상 언니의 말을 믿지 못한다. 가상화폐 그거 잘못해서 패가망신 한 사람의 이야기를 건너 건너 들어 알고 있는데.


다해는 고민한다. 돈에 관해 밝은 은상 언니 아니던가. 회사에서 '강은상회'라는 잡화점을 열어 소소한 이윤을 올리던 은상 언니. 번 돈으로 아이패드 사고 학자금 대출 갚는 모습을 보니 다해는 적금을 부어 이더리움에 투자한다. 끝까지 버티던 지송 역시 코인 열차에 탑승한다. 『달까지 가자』는 대한민국의 현실, 세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흙수저 3인방이 펼치는 가상화폐 투자기를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슬픔을 약간의 유머와 한숨을 버무려 포착해낸다.


끝까지 회사에 다닐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얼마나 사치인 시대인지. 그런 고민은 회사에 들어가야 할 수 있는 고민인 것을. 회사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매일매일을 자존감 깎아 먹으며 버티는 청년들-나 포함해서-은 무엇에 기대야 할까. 『달까지 가자』의 3인방은 코인에 기대를 건다. 남들이 카카오 주식, 가상 화폐 이야기할 때는 나는 카카오 프렌즈 최고의 인기쟁이 캐릭터 라이언 굿즈 사 모으기 바빴고 채굴이란 게 진짜 어디 가서 캐야 하는 건가 의문했다.


다해가 끝까지 회사에 남기로 한 결말이 마음에 든다. 우스갯소리로 로또 1등 되면 어떻게 할까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도 나는 과거에 다니던 곳에 계속 다닌다고 했었다. 1등 수령금은 적금 통장에 넣어둔 채 이자 받아 가며 '먹고 싶은 케이크가 두 개일 때는 다 시켜서 먹는 삶' 정도로 만족하면서. 아직까지 로또 한 장 사 본 적 없는 주제에 그런 이야기를 잘도 했다. '돈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간다는 속성'을 은상은 깨닫는다. 과연 그럴까.


『달까지 가자』를 읽고 투자 쉽네. 나도 한 번 벌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소설은 소설일 뿐. 오해하지 말자. 투자 성공기를 그리는 소설이 아니다. 마론 제과 비공채 3인방이 코인 열차에 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비꼬고 나름 투자 수익을 올렸지만 회사의 거대 비밀인 제빙기가 8층에만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으로 기뻐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겠다고 다짐하는 인물의 현실성을 악착같이 그려낸 소설이다.


당신은 그 정도로 만족해라는 말을 들으면 심술을 부리는 은상. 0.5도 아니고 0.2 정도의 방 크기가 넓어진 것에 만족하는 다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에 무한 행복을 느끼는 지송. 이런 그들에게 좌절이 아닌 기쁨을 주는 소설가가 고마울 지경의 소설 『달까지 가자』. 나 소설 읽으면서 쫄렸다. 그들이 빚까지 내서 투자한 이더리움이 떡락할까봐. 이런 투자는 해롭습니다, 여러분. 열심히 일해서 돈 버세요,라는 수기 체험기 마지막 단락 같은 교훈 주면 책 던져버리려고 했다.(말만 그래요, 도서관 책을 어떻게 던지겠습니까. 비유입니다.)


빚 안 지고 수익 내서 퇴사하고 사업하고 집 옮기는 결말이라서 그래도 회사는 다닌다는 현실적인 결말이라서 『달까지 가자』는 꼭 읽어봤으면 하는 소설이 됐다. 치킨 시킬 때 사이드 메뉴 추가할 수 있고 300원 비싼 커피 시키고 세일할 때 사는 거지만 작고 소중한 사이즈의 케이크를 세 개씩이나 살 수 있어서 통장 잔고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지만 누군가들의 성공기를 읽는 시간이 있어서 나의 소소한 실패가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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