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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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잘 다니던 마트가 있었다. 금요일 밤에 주로 갔다. 주말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먹고 놀려고. 어느 날 마트 계산원이 알은체를 했다. 참 건전하게 사신다고. 네? 다른 사람들은 술도 많이 사 가는데 그런 게 없다고. 네에. 하고 이제는 안 간다. 그냥 매주 보니 반갑고 매주 무얼 사나 들여다보니 내적 친밀감이 생겨서 말을 건넨 것일 텐데. 좀 부담스러워져서 안 가고야 말았다.


계산원이 궁금해했던 거. 술. 금요일 밤. 어리바리하게 생긴 이 사람은 술을 사지 않는다. 두부, 어묵, 과자, 햄, 콜라. 가끔 싸게 나왔다 싶은 사과를 사서 나간다. 한때는 술 좀 마셨다. 해지는 거 보고 들어가서 해 뜨는 걸 보고 나와 세수하고 아침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제는 코로나 시국이라 그렇게 하지도 못할뿐더러 술만 마시면 지구의 자전을 온몸으로 느끼느라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냉장고에 술을 일렬종대로 세워 놓은 모습과 텔레비전을 보면서 배달 음식과 술을 마시는 모습이 신기할 뿐이다. 그에 비해 나의 냉장고 안에는 각종 우유와 한 달 전에 사 놓은 빵, 김치가 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마시는 건 진한 초코 우유. 김혼비의 산문집 『아무튼, 술』을 읽다 보면 마트 주류 코너에도 한 번씩 가볼까 고민이 든다. 그땐 그랬지. 어디든 앉기만 하면 술자리가 됐었지. 물처럼 마시면서 엄청 웃어댔지. 그리운 건 절대 아닌 약간의 부끄러움이 깃든 추억이 떠오른다.


요즘 나는 문자를 자주 보낸다. 나이/성별/사는 곳/경력. 슬래시가 섞인 사무적이고 무미건조적인 문자. 대체로 답문은 없다. 전화가 오기도 해서 이력서를 들고 갔다. 잠깐만 앉아 있으라고 해서 앉아 있었는데 20분이 되어 가는데도 나한테 오지를 않았다. 나를 뻔히 보고 있었는데도. 나중에서야 면접 보는 걸 잊었다는 식의 이해 불가한 말을 했다. 평소 자주 가던 매장이었는데 이상한 행태로 단골손님을 잃었네.


김혼비의 『아무튼, 술』에서 내가 책갈피를 하고 오랫동안 들여다본 일화는 「술 마시고 힘을 낸다는 것」이었다. 인생의 암흑기를 건너가던 시기 김혼비는 그래도 즐거운 척 그러다 보니 즐거워지면서 술을 마셨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굳이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힘들어서 마시는데 마시다 보니 즐거운 날. 치과 치료를 했지만 치료한 부위에는 술이 닿지 않게 나 자신 칭찬해 하며 기술적으로 마시고 노래방까지 갔다. 기억은 거기까지.


다음날 아침. 노래방 리모컨이 현관에 떨어져 있고 가방에 지갑은 없다. 김혼비는 드문드문 기억을 꺼낸다. 택시에서 벌인 광란의 질주가 떠오른다. 오락실 운전 게임인 줄 알았는데. 착하고 수다스러운 택시 기사님 덕에 지갑을 찾고 고맙다고 문자를 보냈다. 기사님은 김혼비에게 짧은 문자를 보내온다. '네. 힘내세요.' 김혼비는 기사님의 문자를 친구에게 이야기해주다 운다. 힘내세요 라니.


슬래시 가득한 문자를 보내고 그렇게 보내라고 해서 보냈지만 짧은 인사도 하지 않은 예의를 밥 말아 먹은 것 같은 문자를 보낸 나 자신이 한심하다. 그런 문자에 '네. 힘내세요.'라는 글이 전송되어 오면 나도 김혼비처럼 울까.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20분을 앉혀 놓고 있다니. 내 시간은 묻지도 않고 언제까지 오라는 틀린 하십시오체로 시간 변경을 두 번이나 해놓고 막상 갔더니 불법을 아주 자랑스럽게 한다는 식의 멘트를 뻔뻔하게 날리다니. 코로나로 어려운 건 님만이 아닙니다.


노래방 리모컨을 운전대로 착각할 만큼 술을 마실 사연은 아니지만 암막 커튼을 다시 쳐 놓고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잠시 숨어 있고 싶은 일이다. 며칠 동안의 일. 김혼비는 택시 기사님의 문자를 받고 결심한다. 평소에는 효용성이 떨어져 쓰지 않던 힘내라는 말을 자주 쓰기로. 힘을 내라고 하지만 도저히 그 말로는 힘이 나지 않아 있던 힘도 떨어지게 만드는 힘내라는 말을 매번 해보기로. 암흑기를 지나고 있던 시기에 뒤에 후광을 달고 나타나 잃어버릴 뻔한 지갑까지 찾아주면서 성스러운 멘트를 날린 천사 같은 택시 기사님을 만난 이후로 김혼비는 힘을 낸다.


나의 귀염둥이 펭수는 힘내라는 말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둘 다 좋은 말이다. 매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이다. 『아무튼, 술』에는 주류 이야기와 비주류 이야기가 잘 말은 소맥의 비율처럼 적절히 배합돼 계속 읽어 보고 싶도록 만든다. 글이 들어간다. 쭉쭉쭉. 읽어라. 읽어. 언제까지 어깨 춤을 추게 할 거야. 페리 안에서 술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헐레벌떡 달려와 같이 듣자고 말하는 평생의 동반자가 있는 한 암흑기는 없다는 아니고 있어도 이게 어두운 거 맞아 하면서 지나갈 거다. 그럴 거다. 꼭. 그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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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소감 - 다정이 남긴 작고 소중한 감정들
김혼비 지음 / (주)안온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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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언가에 절실해지면 심지어 맞춤법 책에서까지 위로와 자기합리화의 소스를 기어이 찾아낸다는 교훈을 남긴 이 일화와 정도만 다를 뿐, 소소하게라도 독서라는 행위 안에서 책과 내가 주고받는 상호작용에는 이런 식의 자기 편향성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독서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이유겠지만, 독서량이 결코 지성의 척도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소문난 다독가 중에도 왜곡되고 편협한 시선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이를 일컫는 단어도 표준어로 등재되어야 한다. '쓸책없다' 정도?).

(김혼비, 『다정소감』中에서)



나는 내가 잘 노는 사람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안다. 노는 일에도 체력이 필요하다는걸. 나인 투 식스 생활을 얼마나 했다고 꼴랑 8개월 했는데 어느새 몸이 그걸 기억하고 더 잘 수 있는데도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 휴대전화 시계 한 번 보고 밤 사이 부지런한 유튜버들이 올린 영상을 누워서 보다가 다시 잔다. 아, 좋다 이러면서. 오래 잔 것 같은데도 10시나 11시. 베개 옆 인형을 거치대 삼아 놓은 전자책 리더기의 전원을 누른다.


닥치고 위로. 무조건 위로. 그냥 하는 위로. 영혼 없는 위로. 온갖 위로를 듣고 싶다. 해서 내가 선택한 건 책 읽기. 김혼비의 산문집 『다정소감』에 나오는 말처럼 '사람이 무언가에 절실해지면' 어떤 것에라도 기대게 된다. 저녁 뉴스를 보면서.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올라온 동영상을 보면서. 사놓고 잊어버린 책을 읽으면서. 발화자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닌데도 의미를 찾아가며 위로를 주입한다. "내가 무능력했지 무기력하기까지 할까 봐!"라고 외치는 김혼비의 말에 위로뽕을 맞고 휘청인다.


명절날 여자들이 남의 집 제사에 목숨 걸고 일하는 것에. 축구를 해서 좋아진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집주인과 잘 싸우게 된다는 것에. 사내 정치에 휘말려 이상한 부서에 가서 개고생 한 것에. 동료들이 새벽부터 찾아와 머리 올려주고 화장해 준 일에. 한 마디로 고생 고생하다가 주변인들이 보여준 다정함에 무능력과 무기력을 떨쳐 버린 일화를 읽으며. 비겁하게도 남의 고생담을 읽으며 나는 누워서 힘을 낸다. 일어나 두부와 계란을 부쳐서 밥을 먹는다. 간식도 챙겨 먹는다.


『다정소감』은 그렇게 날 일으켰다, 인생 최대의 고비를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까지는 아니고. 읽는 동안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어렵게 쓰지 않는 문장이, 사랑해 마지않는 말장난이 섞인 문장이, 선을 넘지 않은 농담을 적절하게 구사하며 쓰는 문장이 있어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현실도 벅찬데 읽고 있는 책마저도 어렵고 난해하면 난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 『다정소감』은 독자를 힘들게 하지 않는 책이다.


어떤 마음이 있는데 말로 글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무슨 감정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어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힘들어서. 내가 이상한 건가, 이 기분을 설명하지 못하는 나는.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인 책 읽기를 부단히 했는데도. 남은커녕 나를 납득 시킬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다. 뾰족한 방법은 없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다정소감』의 문장들, 김혼비의 논리적인 유머 앞에서 마음이 풀어졌다. 시대가 변했으니 쓰지 말아야 하는 용어를 알려주기도 하는 해박함 앞에서도.


지금의 내 기분을 알아주는 문장을 『다정소감』에서 발견했다. 사람 사는 거 다르지 않구나. 돈 벌어먹고사는 거 나만 어렵게 느끼는 거 아니구나. 욕만 안 했지 비언어적·반어적 표현으로 그동안 나를 괴롭힌…. 끊임없이 나를 자책하게 만들었던…. 뭣 같은 시간을 나만 겪어낸 건 아니구나. 김혼비는 다정한 사람들에 의해 일어날 수 있었다. 친구가 해준 '진짜 미친 사리곰탕면'을 먹고. 7년 동안 반장을 하면서 겉도는 애들이 없는지 신경을 쓰고. 가식이라도 애쓰는 사람들의 행동을 예쁘게 봐주면서.


책은 누워서 읽지만 리뷰는 앉아서 쓴다. 나를 일으켜 주는 책. 자칫 자책과 후회로 지낼 뻔한 시간에 김혼비의 『다정소감』은 있는 다정 없는 다정을 내 곁에 슬쩍 놓아준다. 너한테도 있다. 다정한 사람과 다정한 추억이. 네가 말하지 못한 걸 내가 말해줄 테니, 혼자 울지 마. 축구 잘하는 언니는 위로도 박력 있게 해준다. 「가식에 관하여」는 꼭 읽었으면 한다. 나의 유일한 무기, 친절함, 혹자는 가식이라고 부르는 그거,에 대해 괜찮다고 등을 팡팡 두드려주는 글이다. 모든 게 괜찮고 괜찮다.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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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총총 시리즈
이슬아.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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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보다는 오해가 쉬운 세상에서 이들의 오해는 아름다워 보인다. 이슬아, 남궁인 작가가 서로를 향해 주고받은 편지로 묶인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길에서 읽었다. 별로 친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 둘은 어쩌다 편지를 쓰게 된 걸까. 말로는 하지 못할 이야기를 글로 나눈다. 말이 쉬운가. 글이 쉬운가. 둘 다 어렵다면 차라리 글로 나누는 게 감정적인 소모가 덜 할 거다.


아닌가. 귀가 뜨거울 정도로 전화를 하다가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는 게 더 쉬운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그 둘은 말보다는 컴퓨터 앞에 앉아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쓰고 고치는 걸 선택했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을 이슬아 작가는 마지막에 해소해 주었다. 편지의 목적. 남궁인 작가는 편지란 상대를 궁금해하다가 나를 자세히 알기 위해서 쓰는 글이라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결국 나에 대해 말하고 싶어 쓰는 글. 예의상 초반에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밥은 잘 먹고 있는지 묻다가 현 상황에 처해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한탄으로 바뀌는 글. 편지. 이슬아 작가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상대를 내내 궁금해하는 것. 질문하고 상대의 잘못을 알려주고 선물을 해준다. 편지란 너의 안부를 내가 이렇게 걱정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고.


세상이 점점 좋아질 거라는 믿음은 애초에 없었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는 했다. 나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닐 거야. 어라. 전부 나쁘잖아. 라고 생각하는 일의 반복. 책으로 세상을 배운 자의 말로다. 이게. 사전 투표를 하기 위해 읍사무소로 갔다.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평일인데. 날씨도 좋은데. 공휴일이 아닌데. 대체 어쩌자고 이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하겠다고 줄을 서 있는 건가.


님들. 일 안 하세요? 나만 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만 놀아야 하는데. 인구밀도가 낮기로 유명한 도시에서 30분 넘게 줄을 서서 무언갈하다니. 살다 살다 이런 날도 오네요. 이왕 기다릴 거 책이나 읽자. 혹시 몰라 가지고 간(혹시, 만약에 라는 가정법을 사랑한 나머지 나의 가방은 늘 무겁다.) 전자책 리더기의 전원을 켰다. 아침에도 읽은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나는 앞으로 전진.


그래서 이슬아, 남궁인 작가는 친해졌을까. 계약 조건에 의해 편지를 주고받고 서로 서로 원고를 얼마나 썼나 세어보고. 일로 만난 사이는 일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이슬아 작가는 쓴다. 우리는 변하고 싶어서 계속 글을 쓰는 것이라고. 어떤 이들은 글을 쓰고 어떤 이들은 좋은 날에 줄을 서서 투표를 한다. 도장을 찍는 손이 떨리고 인주가 말라야 하는데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호호 불지는 못하고 손바람을 일으켜 말리고. 살짝 반으로 접어서 투표함에 넣는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는 오해로 가득한 책이다. 서로를 알기 위해서 쓴 글은 오해를 낳고 오해를 정정하고 그러느라 다시 오해를 한다. 네가 잘 쓰나. 내가 잘 쓰나. 배틀이라도 하는 건가 오해를 하면서 읽었는데 그건 의미 없음으로 결론이 났다. 친절한 사람들이 나누는 오해는 친절하고 싶어 애쓰는 누구라도 읽으면 도움이 될 정도로 그들의 오해는 유익하다. 오해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니까.


살다 보니 오해를 자주 한다. 오해를 풀고 싶은 상대가 있고 에라 모르겠다 손절이다 하면서 지지를 칠 때가 있다. 후자의 경우가 더 많은 듯. 현실에서 그들이 어떻게 오해를 풀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신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의 안에서는 상냥하고 다정하고 일견 쿨한 태도로 서로를 향한 오해를 풀어간다. 현피를 할만한 오해의 양을 쌓은 건 아니라서 몸과 정신의 건강을 걱정해 주면서 마무리를 한다.


실패에 대한 남궁인 작가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일은 사실 실패이며 매번 우리는 실패한다는. 실패란 게 특별하거나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뜻으로 읽었다. 인생은 스포츠 경기와는 달라서 승패가 명확하게 갈리지 않는다. 이겼다, 졌다의 구분이 없다. 맞고 틀리고의 차이가 존재할 뿐. 내 기준에서 맞는 걸 선택하면 된다. 기준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 변하기 위해 글을 쓰고 줄을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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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한 팀이 된 여자들, 피치에 서다
김혼비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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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우울하고(라고 썼지만 우울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다. 그걸 외면하고 싶을 뿐) 누가 우는 것만 봐도 울음이 터져 나온다면 김혼비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망설이지 않고 권할 것이다. 초진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정신건강의학과를 가기 전에 유튜브를 보면서 불안할 때를 검색하기 전에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 들어가 책을 주문해 보기. 걸을 수만 있다면 동네 서점에 가서 바로 책을 사서 보기. 무슨 책?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보자.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2018년 7월 2일에 샀더랬다. 재밌고 괜찮다고 해서 사 놓기는 했는데 제목에 '축구'가 들어가서 읽기를 망설였다. 베이징 올림픽 때 이승엽이 한일전에서 역전 투런홈런을 치는 걸 보고 반해서 야구에 깊이 빠졌다가 나온 적이 있다. 야구 룰을 알기 위해 책도 사서 봤다. 야구 경기를 열심히 보고 집순이 주제에 경기장에도 갔다.


축구는 그런 순간이 없어서 국대 경기가 있어도 그냥 하나보다 한다. 알고 나면 축구 룰은 야구 룰보다는 쉬울 텐데. 괜히 겁을 먹고 축구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어려운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혹시 나 같은 바보가 있을 수도 있으니 미리 말해둔다. 이 책은 어렵고 난해한 축구 룰은 설명하지도 축구의 유구한 역사를 파헤치지도 않는, 호나우두의 경기 장면을 보고서 반해버린 한 여성의 축구 입덕기를 기록한 책이다. 감동과 재미와 눈물은 덤이다.


책에서 김혼비 그녀는 혼자의 시간을 사랑하는 초개인주의자라고 밝힌다. 그런 그녀가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그야말로 사람과 부대끼는 운동인 축구를 시작한다. 축구화와 축구 양말을 사서 태그를 뗄까 말까 망설인다. 가야 하나. 토요일 오전의 늦잠을 반납할 만한 일이 될까. 주저와 망설임의 번뇌를 거쳐 그녀는 축구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야말로 그곳은 환대의 세계.


신입이라고 함부로 하지 않고 이상한 텃세를 부리지도 않는다. 대신 입단한지 1시간 10분 만에 연습 경기에 출전한다. 축구 경력 40분인 김혼비는 6번 할아버지를 마크하는 역할이 주어진다. 보자마자 반말로 말을 거는 6번 할아버지와 경기를 뛴다. 반말. 외모 품평. 화내기. 6번 할아버지는 김혼비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서로를 딸과 아버지라 부르는 난데없으나 호쾌한 일들이 벌어지는 첫 경기를 마친다.


저질 체력의 앞으로도 평생 이불과 한 몸이길 원하는 내가 축구를 할 일은 없다.(고 쓰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 좋아하는 일에는 없던 사회성도 발현되려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읽으면서 내가 취한 감동은 이런 거였다. 주중에는 열심히 일을 한다. 직업인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고. 토요일이 되면 가방을 싼다. 수건과 양말과 선가드와 축구화를 넣는다. 산책 나온 개도 조용히 짖는 운동장으로 모인다.


시작한다. 운동장을 뛰고 볼 연습을 하고 이상한 비유를 갖다 대면서 파이팅을 외치는 감독의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흘린 땀방울인지 상대가 흘린 땀방울인지 모를 땀으로 범벅이 된 유니폼을 갈아입기도 전에 서로의 경기에 대해 설전을 나눈다. 누구의 엄마, 딸, 부인이 아닌 등 번호와 이름으로 불리면서. 순수하게 노력으로 얻은 칭찬의 말을 듣고 나면 다음 단계가 펼쳐진다. 김혼비가 골을 넣기 위해 애쓰다 자책골을 넣는 장면에서 갈빗집에서 서빙을 하다 '얼결에' 축구팀에 입단하는 미숙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동안 나를 갉아먹었던 두려움과 공포의 실체는 무엇이었던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젠장,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애초에 없던 걸 네가 만들어 냈던 거야 말해주었다. 우린 어차피 다 죽을 텐데. 까짓것 해보고 싶은 거 있으면 하고 하기 싫은 건 죽어도 하지 마,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한 건 아니고 김혼비가 호나우두의 발재간에 반해서 축구에 입덕하고 여자들이 어쩌다 축구하게 된 썰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거였다.


'무언가를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상상도 못하고 살아오다가 그 현실태를 눈앞에서 본 순간, '나도 하고 싶다.'를 넘어서 '내가 이걸 오랫동안 기다려 왔었구나.'를 깨닫게 될 때 어떤 감정이 밀려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어제 진상 손님들 두 테이블이나 있어서 진짜 힘들었는데 오늘 아침에 축구 올 생각하니까 왜 짜증도 별로 안 나냐. 하하하. 왜 그런 거 있잖아? '야, 너희 내가 그냥 보통 식당 이모인 줄 알겠지만 알고 보면 나 축구하는 여자다 이거야!'라고 속으로 생각하면 괜히 어깨도 쫙 펴지고!"라는 호탕한 답이 돌아왔다.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中에서)


일을 하면서 모욕의 순간이 올 때 나 틈틈이 책도 읽고 글도 쓰는 여자야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없을 만큼 기분이 더러웠기 때문이다. 축구는 그게 가능한 거구나 미숙 언니의 말을 들으면 혹하기도 한다. 나 축구해볼까. 자책과 후회의 감정이 들 수도 없게 운동장을 달리고 땀을 흘려볼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 아직 죽기는 싫으니까 나 대신 축구하면서 성장의 서사를 써 내려간 김혼비의 웃기고 유쾌한 이야기를 이불 속에서 읽는 것으로 축구 한 기분을 낸다.


타인에게 가 아닌 나 자신에게 당당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내본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의 마지막 문단을 읽으면서 뻥 아니고 눈물이 났다. 작금의 내 상황을 김혼비는 알고 있었던가. 김혼비는 알고 있을까. 자기가 축구 한 이야기를 읽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있을 줄을. 달 같은 축구공을 뻥 차고 날렸는데 가슴으로 받은 그 공 안에는 호쾌한 위로가 있어 꽁꽁 숨겨 두었던 상처를 찾아 터뜨려 주었단 걸. 김혼비가 알았으면 좋겠다. 누구도 내게 실패했고 못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잘했다고 괜찮다고 고생했다고 다독여준다.


여자들이 축구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여자들이 서로를 격렬하게 긍정하고 걱정해 주는 감동 실화를 다룬 책이다. 그러니 어서들 사 보시게. 뭐라구요? 나만 아직 안 읽은거라구요?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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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최정화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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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악스트는 글씨가 작으려나. 악스트가 처음 나왔을 때 놀랐던 건 가격이었다. 2,900원. 썩은 비유지만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얼마나 흥분했던지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은 친구에게 악스트를 사서 보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안부 인사조차 생략한 채 싼값의 문예지가 나왔으니 사서 보라는 연락을 받고 당황했겠지. 그 후로 그 애가 책을 샀는지 안 샀는지는 모른다. 나는 구독을 했고 가격이 오른다는 편지를 받고 구독을 해지했다.


또 썩은 비유인데 카페 가서 커피 한 잔 덜먹으면 구독해서 볼 수도 있는데 해지했다. 처음에는 열심히 읽었다. 글씨가 작아도 이 값에 이게 어디야 하면서. 구겨져도 상관없었다. 서평에서 소개한 책을 찾아 읽고 감각적인 사진 옆에 실린 글은 근사해 보여서 필사도 했다. 그때 읽은 최정화의 「도트」가 있었다. 무오. 어딘지 이곳의 느낌이 실리지 않은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했다.


원래 책은 사 놓고 잊어버리는 맛이 있다. 눈은 떴는데 일어나기는 싫어서 전자책 리더기를 켰다. 리더기는 넷플릭스 같다. 그 안에 볼 건 많은데 막상 보려고 하면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앞부분만 열어 보다가 꺼버린다. 무얼 읽을까 고민하다가 시간이 간다. 시간 내서 꼭 읽어야지 하면서 잠자고 있던 책들을 불러왔다. 최정화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무오.


악스트에서 연재되었던 소설 「도트」는 『없는 사람』으로 새롭게 나왔다. 나는 그게 그건 줄도 모르고 최정화의 신간이 나왔네 하면서 사놓고. 잊어버리고. 무오는 탈취제를 사 오는 길이었다. 이부의 심부름이었다. 나는 수업하다가 불려 나와 잔돈을 바꿔 오라는 원장의 심부름을 종종 했다. 같이 일했던 선생은 그걸 왜 본인이 하지 않고 나한테 시키는지 모를 일이었다고 했다. 원장의 친구였으면서. 그럼 그 순간에 말을 하지. 네가 하라고.


노진에서 택배 상하차 일을 하던 무오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바뀌는 일이었다. 힘들어서 힘들고 죽을 것 같이 힘들어서 사람들은 자주 바뀌었다. 그 일을 무오는 이 년 동안 하고 있었다. 껄렁껄렁하게 말하는 이부가 무오를 찾아왔다. 딱 봐도 이런 곳에서 일을 할 사람 같지 않았다, 이부는. 자신과 일을 하자고 고수부지에 데려갔다. 물이 어느 쪽으로 흐르는지 이상한 질문을 하고 사이다를 사줬다. 처음으로 무오에게 관심을 가져주었다.


무오의 일은 단순했다. 도트라고 명명된 자를 따라다니면서 위치를 확인해 주는 일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단순한 이유. 자아실현이니 사회성 확립이니 일의 의미를 떠들어대지만 그런 건 소용이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일을 한다. 하다 보니 열심히가 된다. 일이 익숙해지고 할만할 때쯤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나가란다. 외국 회사에 회사를 넘기겠단다. 안 된다. 우리 기술만 빼가고 먹튀할거다. 해고 철회를 해라. 해고자들을 복직시켜라.


노조원들은 시위를 한다. 무오는 노조원으로 위장해 시위를 불법으로 만들고 무력화하는 일에 투입된다. 도트는 지부장. 그가 방심한 틈을 타서 틈이 보이면 동영상을 찍어 배포하는 일도 한다. 틈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없는 사람』이라는 제목이 훨씬 좋았다. 무오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제목이라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실에는 꽤 존재한다. 일은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


무오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에 빠진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단순한 이유로 설명되는 걸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칠십일에 달하는 시간을 노조원들과 먹고 자면서 무오에게는 자신의 삶을 생각할 기회가 생긴다. 나는 어떻게 살아온 존재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오후 두 시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전언은 잘못되었다. 늘 그렇게 잘못 살고 후회한다. 후회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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