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긴 방 마르틴 베크 시리즈 8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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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여덟 번째 이야기 『잠긴 방』을 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고 우겨도 될까. 아니 우길래. 완벽한 복지를 자랑하지만 실상은 춥고 쓸쓸하고 강력 범죄가 만연한 국가 스웨덴. 그곳에 생각이 깊고 어지간해서는 웃지 않는 형사 마르틴 베크가 있다. 경정으로 승진될 거라는 소문이 있지만 마르틴 베크는 신경 쓰지 않는다. 사건을 수사하다 죽을 뻔했지만 다시 살아났고 현재는 혼자 산다. 


『잠긴 방』은 두 가지 사건을 놓고 이야기를 끌고 간다. 대낮에 은행이 털린 사건. 한 남자가 밀실에서 죽은 사건.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두 이야기는 소설의 끝에 가서야 느닷없는 기분을 느끼게 하면서 만난다. 소설은 한 여자가 비장한 얼굴로 은행에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은행원에게 총을 겨누고 쇼핑백에 돈을 담으라고 말하는 여자. 돈만 들고나가려 했지만 영웅 행세를 하고 싶은 남자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오랜만에 출근한 마르틴 베크를 위해 동료 형사 콜베리는 살인 사건 파일을 환영 선물로 준다. 완벽한 밀실 상태에서 남자가 죽은 사건이었다. 악취 신고를 받고 출동한 두 명의 순경은 잠긴 방 앞에서 고군분투한다. 열쇠공을 불러도 문을 열 수 없었다. 결국 힘으로 나사를 뜯어서 간신히 문을 열었다. 끔찍한 냄새를 풍기는 시체가 있었다. 부패가 심했다. 보고서를 다 읽은 마르틴 베크는 자신도 경찰이지만 경찰이 하는 일처리에 한심함을 느낀다. 


1970년대 스웨덴의 사회상을 가감 없이 『잠긴 방』은 보여준다. 물가는 오르고 일자리가 부족한 상태에서 국민들은 불안과 고통을 일상처럼 느낀다. 소설에서 다루는 두 사건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다.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의 특성상 전모를 밝힐 수는 없지만 은행 강도 사건과 남자의 변사 사건의 진상을 알고 나면 슬픔에 빠진다. 피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았기 때문에 죄를 얻은 인물 때문이다. 


일부러 천천히 엉망진창으로 쓰인 보고서를 읽고 하나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화를 걸고 걷고 낯선 집에 찾아가는 마르틴 베크. 『잠긴 방』을 사랑 이야기라고 우기는 이유는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마르틴 베크가 보인 행동의 특이성 때문이었다.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남자는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무시했다. 그래서 그가 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랑 때문에 사건을 해결하고 사랑 때문에 범인이 되고.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모종의 합의를 한다. 소설의 결말을 의문문으로 남겨두면서 복지 국가 스웨덴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을 세계에 알리기로. 계속 섬세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야기에서 이야기가 아닌. 문장과 문장 사이에 생략된 인물들의 감정을 추측하며. 타인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소설로 배워서 현실 세계로 가져와 대입하는 식으로. 경찰 소설을 읽으며 주제가 사랑이라고 제멋대로 떠들게 만드는 것. 『잠긴 방』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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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
허연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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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내가 뭐하고 지냈냐면.


대니 샤피로의 『계속 쓰기』를 읽다가 말다가. 한 시간 쓰기를 하다가 말다가. 무계획형인 P답게 지냈다.


8월부터는 업무가 바뀌는데 어떤 날에는 두려워하다가 다른 어떤 날에는 그까짓 거 뭐 하면서 요란한 마음을 달래면서. 감정형인 F답게.


허연의 산문집 『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 슬픔, 허무를 시의 언어로 말한다. 시가 되지 못한 글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글이다. 어두운 방에서 하루치의 이상함을 녹여 내기에 충분한 글이었다. 나만 그런 걸까. 하루는 이상하고 알 수 없고 설명하기 힘들다. 안 좋은 머리로 이해해 보려고 해도 인과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인간들이 자신들의 소멸을 그토록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어쩌면 그들이 안도감을 느끼며 자기들의 소멸에 동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허연, 『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中에서)


책에서는 죽음의 기억이 난무한다. 이미 사라져 버린 사람들을 소환한다. 젊은 시절 내내 아팠던 어머니, 화가, 시인 그리고 어쩌면 나. 시인으로서의 자아와 일상인으로서의 자아는 서로 부딪치지 않고 잘 지내왔던 것일까. 사는 일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줄도 모르고 우주의 한 점도 못 되는 지구에서 우리는 다투고 슬퍼하고 헤어진다. 시인은 그걸 안타까워한다.


빨리 읽을 수가 없는 책이다. 『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는. 한 페이지를 읽고 다음 장을 넘길 수가 없어서 그대로 다시 잠든 하루가 여러 날이었다. 그래도 사랑이 있었다. 허무해서 슬퍼서 일어나기 힘들어도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괜찮아졌다. 온갖 사랑을 경험해 놓고 마치 사랑이 생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굴지 않았던가. 살아있는 자로서의 슬픔을 말하다가도 사랑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글에서는 용기가 솟아오른다.


사랑하는 이가 괴물이 되어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Eldon의 Monster를 반복 재생해서 듣고 있다. 가사의 시작은 "왜 나를 사랑해? 난 괴물인데"이다. 영화 《살아있다》에서는 좀비가 되어 버린 아내를 밖으로 보내지 못하고 집에 놓아둔 채 산 사람을 기다리는 남자가 나온다. 사람을 물어뜯는 괴물이 되었다고 해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허연은 놓쳐버린 두 개의 사랑을 들려준다.


어쩌면 우리는 상대가 괴물인 줄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괴물의 어떤 면을 인식하면서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시가 있다. 사랑 뒤에는 시의 자리가 마련된다. 허연의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읽으며 나는 연필로 기분을 적었다. 폭우가 예상되는 날씨 속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는 기억만으로 힘이 되는 날이 있다. 그런 힘으로라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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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하는 자세 - ‘첫 책 지원 공모’ 선정작
이태승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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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강도는 낮아졌는데 집에 돌아오면 눕기 바빴다. 바깥의 먼지는 털어내야 하니까 씻고 누웠다. 한 손에는 리모컨을 손에 든 채. 넷플릭스와 웨이브, 티빙, 유튜브를 왔다 갔다 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왜 이리 재밌는 게 많은지. 영상 하나만 보고 책 읽어야지. 리뷰 써야지. 일기 써야지. 마음속에 생각만 할 뿐 현실은 계속 드러누워 있었다. 나도 내가 곧 정신을 차릴 줄 알았다. 며칠만 그러다 말겠지. 이후 몇 달 동안 나는 그동안 보지 못한 드라마를 쉼 없이 봤다.


한 달에 많이 읽어야 다섯 권이 최대 독서량이 되어 버렸다. 예전의 나는. 근심 걱정을 모르던 시절에는 읽고 또 읽었는데. 열 권도 넘게 읽었는데. 한 번 세상의 쓴맛을 보고 나서는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생각하기가 싫었던 것 같다. 문장을 읽으면 상상을 하고 이해를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버거웠다. 뭐 어떡하든 되겠지. 차츰 좋아지겠지. 무너진 정신의 복구는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산 사람은 살아가니까. 그러다.


불현듯 정신을 차린 건 아니고. 1%씩 현실 감각이 돌아오는 중이다. 돈을 써야 한다. 책을 사고 키보드를 사고. 자본주의는 돈은 우울과 불안을 치유하는데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도움이 되었다. 책을 샀으니 읽어야지. 키보드를 샀으니 뭐라도 써야지. 책상에 앉았다. 이태승의 소설집 『근로하는 자세』를 주중에 꾸준히 읽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내내 누워서 리모컨만 누르고 있었는데 이제는 전자책의 리모컨을 누르고 있다. 책 샀으니까. 단순한 이유에서.


첫 소설은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로 공무원의 세계를 밀도 있게 그린다. 선출직 시장의 패기로 제안된 사업에 실무를 담당한 '나'는 골치 아픈 일을 처리해야 한다. 남은 사업 예산으로 보도블록을 까는 대신 전시 행정의 일환으로 천리북을 만들게 되었다.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로 큰 북을. 거기까지는 좋았다. 밤마다 누군가 천리북을 쳐대서 민원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북이 있으니까 쳐보고 싶은 건 인지상정. '나'는 후배와 범인을 잡으려고 잠복근무를 한다. 동시에 시장은 최고의 직원과 최악의 직원을 뽑자는 황당한 제안을 한다.


표제작 「근로하는 자세」는 더 가관이다. 환경부 차관을 모시고 장관회의를 떠난 사무관의 짠한 회상기는 결말에 가면 소소한 반전이 숨어 있다. 그렇게 되면서까지 일을 하는 자세라니. 누가 월급 좀 올려줘라. 안 되나. 공무원이라 급여 체계가 있나. 『근로하는 자세』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은 잘 읽히는 장점이 있다. 각종 영상물에 중독된 나를 검은 글자만이 가득한 소설의 세계에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심심하고 단조로운 책의 배경. 검은 건 글자요 흰 건 여백이라.


소설가는 행정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단다. 매일 소설을 썼으리라. 등단을 하고도 청탁이 없는데도 썼단다. 매일 쓰는 자를 누가 당할까. 사유는 부족한듯싶지만 가독성은 있어서 어려움 없이 읽었다. 일. 일하는 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심각하고 어렵고 잘 못하면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우습게 굴었다. 『근로하는 자세』에 나오는 인물들의 직업은 대부분 공무원으로 설정되어 있다. 회의만 드는 회의. 보고하고 계획서 작성하고 다시 반려돼서 쓰고 또 쓰고. 일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게 전부는 아닌. 일의 세계.


「아침이 있는 삶」에 모자 관계는 이상적이다. 아들은 늦은 나이까지 꿈을 버리지 않고 글을 쓰다가 부모가 대신 내준 이력서로 취업을 한다. 국립묘지 안장원인 아들은 아침밥 먹기가 어렵다. 그런 아들을 위해 엄마는 주말이면 반찬을 해서 아들에게 준다. 온갖 재료가 섞인 반찬을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아들. 솔직하게 엄마 반찬의 문제점을 말한다. 엄마는 쿨하게 받아들이고. 내가 싸준 반찬 먹는 대신 너는 시나리오를 가져오라고 한다. 주말이면 반찬과 시나리오가 교환된다.


소설은 지나치게 심각하지도 유머가 있지도 않다. 평범한 이야기인데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 있을 뿐이다. 인물들이 일에서 겪는 어려움, 어이없음과 안타까움의 감정을 느끼며 다시 현실의 살벌함으로 돌아온다. 일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일하는 자세가 어디 있냐.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하지. 생각보다 인성이 덜 된 인간들이 그렇지 않은 척 잘만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집에 돌아와 누워 있어도 죄책감 갖지 말아야지. 오늘 하루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토닥토닥. 리모컨 손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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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속의 겨울
문진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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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이틀을 누워서만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일요일 오후에 컴퓨터를 켰다. 되도록이면 금요일에는 야근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늦게까지 일한 여파는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나타났다. 이불을 빨고 청소를 해야지 했던 계획은 날아가고 내내 누워만 있었다. 거실에서 방에서. 밥을 먹고 자고. 좀 움직이다가 다시 자고. 안 되지. 안 돼. 이러면 안 되는 거지. 오후만 남은 일요일에 책상에 앉았다.


예스24에서 만드는 채널예스 웹진을 종종 본다. 관심사라고는 책과 영화뿐이라서. 최근에는 하나 더 늘었다. 드라마. 한동안 클리셰 범벅인 드라마는 질색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드라마에 발을 들였다. 「미조의 시대」 이후에 좋아하게 된 이서수 작가의 글이 있었다. 「신간을 기다립니다 문진영 소설가에게-이서수 작가」. 어렴풋이 문진영의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을 읽은 기억이 났다.


최애 작가가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니. 그러면서 소설집 한 권을 소개해 줬다. 열 편의 소설이 실린 『눈 속의 겨울』을 전자책으로 구매해 일요일 저녁에 찬찬히 읽어 갔다. 직장을 옮긴 뒤로 월요병은 괜찮아졌다. 정말 다행이다. 그때 그만두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눈 속의 겨울』은 일요일 저녁과 주중의 저녁에 읽기 좋은 소설이라는 걸 다 읽고서야 깨달았다.


심각한 일은 이미 일어났고 앞으로 일어난다 해도 이보다 심각해질 수는 없다고 열 편의 소설은 말하는 듯해서.


생각해 보면 그 일들은 지나가는 일에 불과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고 멈추면 되는 일이었다. 표제작 「눈 속의 겨울」의 주인공 나는 7년 사귄 애인과 결별하고 호주로 유학을 떠난다. 계획은 없고 무작정. 청소 일을 하다가 현지인 집에 들어가 아이를 봐주는 일을 하고 있다. 주희지만 주이라고 불리면서. 미아라는 아이를 돌본다. 눈이 없는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며 주희는 영원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건 멈췄던 시계가 다시 움직인다는 뜻.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


「방공호」는 출장 때문에 집을 비운 X의 집에 머무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임시 고양이 집사를 자청하며 X의 집에 머무는 나는 그곳에서 자꾸만 비밀번호를 입력하며 집으로 들어오는 사람들과 만난다. 모르는 사람들과도 밥을 먹으며 침묵을 공유할 수 있는 X의 집에 가고 싶다. 「남쪽의 남쪽」은 취업 대신 카페에서 일하는 두 청춘의 일상이 담겨 있다. 소설을 읽으며 자꾸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도 카페에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하나의 서사도 이어가지 못하고 문장과 문장으로만 끝나는 소설은 질색이다. 이건 취향 차이니까 어쩔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돈 벌러 나가는 활동 밖에는 하지 않는 내가 원하는 건 간접적으로라도 다양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비슷한 고민이 있지만 쉽게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좌절하고 실망해도 다시 뚫고 나가는 서사를 원한다. 그런 면에서 문진영의 『눈 속의 겨울』은 오래 기억에 남을만한 소설이었다.


정상이라고 불리는 가족의 형태는 간단히 무시한다. 누구와도 가족이 될 수 있으면 기존 가족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말한다. 각자의 방을 가지고 안전하게 살아가는 일이 계속되기를 기도하듯 소설은 쓰였다. 알 수 없는 불안과 이유를 생각하기도 싫은 우울로 지쳐 있다면 『눈 속의 겨울』을 읽었으면 좋겠다. 이서수 소설가의 말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 소설 속 모습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같이 살아내고 있구나. 나만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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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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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말을 하라고 했다. 글쎄.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이 나왔다. 미안하고 사랑해. 그렇게 한 사람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화장을 해서인지 죽은 것 같지 않았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스티븐 킹식으로 해석하면 다른 세계에서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슬프고. 김중혁식으로 삶도 죽음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자문하며 의미 없음에 의미를 두면서 슬퍼지지 않으려 애쓰면 되고.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기에 책을 많이 읽었다.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죽은 사람에 대해 자주 말하면 누가 좋아할까. 이야기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책을 읽었다. 소설은 삶보다는 죽음을 자주 다루고 있었다. 몰랐다. 내가 겪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었다. 비로소 경험하고서야 겪어 내고서야 알 수 있었다. 모든 건 그랬다. 공감이란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네 상처. 네 억울함. 네 분노. 그것에 대해 쉽게 동조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김영하의 『작별인사』는 자신을 인간이라 믿는 소년이 나온다. 이름은 철이.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연구소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 학교에는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한다. 배경은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어느 미래 시대. 사람들은 상점에서 원하는 기능의 로봇을 자유롭게 산다. 샀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집 한 쪽에 넣어두거나 폐기한다. 아버지는 철이에게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한다. 아버지를 마중 갔다가 철이는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용소로 보내진다.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었던 철이는 수용소에서 진실을 마주한다. 소설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시종일관 묻는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수용소에서 만난 친구들과 철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고민한다. 로봇과 인간이 함께 사는 미래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이미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고 있는 시점에 인간다움은 무엇으로 증명해야 하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작별인사』에서 기계의 죽음은 전원 코드를 빼는 것, 전기가 없어 더 이상 충전할 수 없는 상태라고 표현한다.


기계에도 감정이 있다면. 전원이 나간다고 해서 감정과 지능까지 없어지는 걸까. 소설은 철이가 몸을 여러 번 바꾸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나약함을 고발한다. 인간의 죽음은 육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육체가 사라지고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걸까. 철이가 보여준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이곳저곳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면. 작별인사는 왜 한 걸까. 마지막이 아니고 단지 우리가 느낄 수 없을 뿐 죽은 자는 여기에 있는데.


『작별인사』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있었다. 그걸 나는 소설로 신문으로 누군가의 경험담으로 듣기만 했다. 오만하게도 극복, 담담함, 받아들임이라고 첨언했다. 죽음이라는 건 극복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고통은 쉽게 이겨낼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다. 떨쳐내려고 할수록 기억은 짙어진다. 해마 안에 잘 묻어두었다가 뛰쳐나오면 그러려니 해야 한다. 숨을 크게 내쉬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거라고 이야기해줘야 한다.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매일의 안부를 묻는 일. 작별 인사가 될 수도 있는 말이니 나의 일상의 언어를 다듬어야지. 날카로운 말은 둥글게 둥글게. 김영하식으로 죽음이란 영혼의 유영이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그래서 그 말은 마지막 인사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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