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환승 인간 - 좋아하는 마음에서 더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정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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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의 에세이 『환승 인간』의 첫 문장은 '그것이 나의 문제라고들 한다'이다. 이어서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속 이야기를 들려준다. 화장실에서 일주일 동안 숨어서 지낸 시인의. 예전에 읽었던 르포를 떠올리게 했다. 집이 없어 공원 화장실에서 지내던 여성 노숙인의. 전자는 허구이고 후자는 현실이다. 간격과 차이가 있을까.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때 나는 자주 빈번하게 화장실로 도망을 갔다. 일을 하다 숨이 막히고 울 듯한 기분이 들 때마다. 세계에서 가장 편한 곳이 배설을 하는 화장실이었다 게 믿기지 않는다. 그때의 그곳을 지나 이곳으로 나는 도착해 있다. 잘한 일이고 잘하고 있는 걸까 매 순간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요즘의 나는 입속에 '사랑'이라는 말을 넣어 다닌다. 


사랑이 필요해, 사랑이 있을까, 사랑이 있었으면 하는 식으로. 『환승 인간』을 읽으며 더 자주 사랑이라는 말에 매달렸다. 어디에도 사랑이 없는 것 같은 봄이다. 가혹하고 비참하고 서글픈 봄이다. 나와 당신 우리에게 예전의 봄은 다시 찾아오지 않겠지. 화장실에 숨어 시를 외우던 시인은 미친다. 이후에 시인은 아무것도 잊지 못하고 사람들은 그것이 시인의 문제라고 말한다. 


시인의 문제는 나의 문제이다. 아무것도 잊지 못하는 것, 아니 아무것도 잊을 수 없는 것. 잊어버려라고들 쉽게 말하지만 과거의 슬픔과 아픔, 분노, 수치는 잊히지 않는다. 그러다 한정현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린다. 나에게 하는 질문으로 답을 해보자면 무엇을 할 수 없는 게 문학이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는 데 도움도 쓸모도 없는 문학. 자의식 과잉에 겉멋만 들게 하는 문학. 


『환승 인간』의 주제처럼 나는 나에게서 다른 나에게로 환승하고 싶다. 지금보다 말도 잘하며 단호하고 문학을 숙제처럼 여기지 않는 나로. 그리고 도움을 받고 싶다. 누군가 나를 조금이라도 도와줬으면 좋겠다. 나를 버려두지도 방치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한정현은 어린 시절과 어른이 된 지금에 본 영화를 소개해 준다. 소설가가 되기까지 고통의 순간에서 만났던 사람과 문학과 영화는 도움이었다. 


소설을 오래 쓸 거라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영원히 소설을 써야 한다는 생각도 전혀 없고, 소설 외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더욱더 없다. 내 인생의 모토는 '살아만 있자'인데, 사실 이건 책과 인생이 유사하다고 느끼는 지점 때문에 더욱 그렇다. 책이 끝나지만 않으면 다음 장은 분명 예측 불가하지만 흥미로운 일들이 존재하고, 인생도 그렇다고 느낀다. 무조건 '살아 있을 것'이 내 인생의 모토이다. 다만 살아 있을 때 재미있으면 좋으니까, '여러 이름'을 뒤집어쓰고 '여러 존재'로 환승하며 살아보는 거다.

(한정현, 『환승 인간』, 「오래 살아서 더 자주 환승해야지」中에서)


소설가 한정현은 소설을 오래 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너무도 솔직하게 밝힌다. 소설가니까 끝까지 소설을 쓰겠다는 집착과 다짐이 없어서 혹은 욕심이 없어서 놀랐다. 문학을 사명처럼 여기지 않는 산뜻함에 반했다. 그저 살아만 있자는 재미있으면 좋으니까 여러 이름과 여러 존재로 환승하며 살아가자는 소설가라니. 매 순간을 진지하고 무겁게 사는 내가 본받아야 할 자세이다. 


오늘의 나는 환승에 실패했다. 다만 기회가 된다면 하고 싶은 말을 잊지 않기 위해 적는다. 이렇게 추상적으로밖에 말할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그저 누구라도 나를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나는 사람들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해결하기 힘든 해결하기 싫은 일을 대신해주는 사람이 아닌 문학이 취미인 사람입니다. 자꾸 그러시면 환승 이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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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의 가게
이서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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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수의 신간 장편소설 『마은의 가게』의 표지를 쓰다듬는 저녁이다. 아주 오래전에 모았던 편지지 재질이다. 약간의 오돌토돌함. 약간의 까끌까글함. 미약한 보드라움. 미약한 쓸쓸함. 책을 읽고 나서일까. 표지만 만지고 있는데도 다채로운 기분과 감정이 든다. 지난밤은 책을 읽고 오늘 밤은 책을 어루만진다. 『마은의 가게』속 세계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 책을 홀랑 읽어버린 내가 조금 밉다. 천천히 아껴 읽을걸. 하지만 『마은의 가게』를 읽으면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빨리 자야 하는데도 주인공 마은과 보영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 책을 덮을 수 없었다. 그런 단호함과 결연함이 내게는 없다. 나의 공마은이었다가 우리의 공마은이 되는 이토록 슬프고 다정한 마은의 세계. 연극을 했다가 학원 강사를 했다가 먹고 살 게 없는 서른일곱에 마은은 카페를 연다. 자본금은 이천만 원. 추가 여유 자금은 칠백만 원. 도합 이천칠백만 원으로 자영업자가 되기로 한다. 이게 될까. 의문이 들지만 마은은 해내고야 만다. 


권리금 없는 가게를 찾아냈고 공사비를 아끼는 방향으로. 마은은 잠깐 망설이고 주저하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가게를 연다. 자신의 이름을 딴 '마은의 가게'는 마은에게 일터이자 집이 된다. 나의 원픽 작가 이서수는 계속 계속 나를 울리고 위로한다. 마은이 나 같아서. 나 같은 마은이어서. 아낌없는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혹시 아시는지.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이서수를 검색한다는 것. 시간이 나면 신간 목록을 훑고 시간이 없으면 냅다 이서수를 친다. 그래야 하루가 좋은 쪽으로 완성된다. 이 같은 행위는 제발 오래 소설을 써주세요. 언제든 구매 준비가 되어 있거든요. 기도 의식이다.


'여성 자영업자가 겪는 두려움과 자괴감'을 그리고 싶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힌다. 한동안 마은은 자신의 가게에서도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여자라서 애인이 없어서 집이 없어서 마은은 낯선 이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주눅이 들어서 마은은 꼭 해야 할 말도 하지 못한 채 속앓이를 한다. 『마은의 가게』는 호러와 서스펜스를 넘나든다. 일상 공포란 이런 것이다를 『마은의 가게』는 보여준다. 사람들은 자주 오해한다. 싸우고 얼굴 붉히기 싫어서 참는 건데 그런 나를 쉽고 우습게 본다. 


아무 말 안 하니까 이렇게 해도 되겠지. 선을 넘는다. 음 그럴 땐 일단 참는다. 좀 많이 참는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마은 역시 그렇게 한다. 첫 가게이고 망하게 하고 싶지 않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으이구 바보 같아 할지라도 마은은 참는다. 계속 마은이 참고 인내하고 견뎠으면 진짜 아주 많이 속상했을 것 같다. 현실의 내가 나를 극복하지는 못하지만 소설 속 당신이 이겨내는 모습은 보고 싶거든요. 


마은의 승리는 나의 승리.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것 같은 초반의 마은은 조금씩 자신에게 소화제를 투입한다. 후반부에서 마은은 시원하게 트림을 하며 회심의 멘트를 날린다. 좋았어, 잘하고 있어 공마은! 응원봉을 들고 공마은을 외친다. 나도 그럴 수 있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단숨에 급소를 파고드는 말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내공을 『마은의 가게』에서 얻어 간다. 그런데도 나 오늘 구질구질하게 길고도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의 반복을 했단 말이지. 


괜찮아. 


주눅 들어도 유창하게 말하지 못해도.


너의 언어로 할 말은 하는 너이기에. 


오늘도 고생했어. 내일은 조금만 고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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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우리를 공주 취급해 - 은근한 차별에 맞서는 생각하는 여자들의 속 시원한 반격
타라-루이제 비트베어 지음, 김지유 옮김 / 프런트페이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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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만 온통 신경이 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때보다는 덜 더하다. 괜찮은 사람인 척 보이려고 했던 행동은 집에 돌아와 누우면 이불킥 하기에 좋은 것이었다. 괜히 말했구나. 괜히 그 대화에 끼어들었구나. 스스로 괴로워 미칠 지경이었다. 친절하고 멋진 사람이 된다는 건 누구에 의해서가 아닌 내가 만들어 가야 한다. 


나의 혐오가 쩔던 시절을 지나 어떤 일에도 반응하지 않는 무던한 시간을 살고 있다, 고 꼭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래도 한 번씩 저 인간 왜 저러나 이중성 장난 아니네 생각은 한다. 일을 해서 그렇다. 모든 게 일 때문이다. 내가 분노하고 슬퍼하고 우울해하는 이유는 일 때문이다고 탓을 하면 쉽다. 지금은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 타라-루이제 비트베어의 책 『온 세상이 우리를 공주 취급해』는 어쩔 수 없이 노동하는 나의 손등을 찰싹 때리는 책이다. 


너 그러면 안 된다. 너의 그런 말이 여성혐오인지 몰랐지. 여성인 나도 여성혐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타라는 말해준다. 여성혐오는 선의의 조언이나 칭찬인 양 행세하기도 하는데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다, 가부장제 사고방식과 관념에 길들여져서 그런 것이다고. 정말 정말 몰랐다. 나의 그런 말이 상대의 행동을 추켜세우기 위한 말이 여성혐오였다니. 이래서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한다. 


『온 세상이 우리를 공주 취급해』의 특별함은 쉽게 쓰여서 계속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사례 연구와 논문 인용이 아닌 작가 타라-루이제 비트베어의 인생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사람들 특히 남자들과의 만남에서 있었던 타라의 특별한 경험은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통쾌하다. 책 속 곳곳에 유머가 포진되어 있다. 맞아. 유머와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 여성을 대하는 부정적인 인식과 프레임을 입히는 미디어와 대중문화의 문제점도 유머와 위트로 혼내준다. 


남성이 여성에게 설명과 조언, 가르침이라는 맨스플레인을 겪어본 적 아니 당해본 적이 있는지. 무수히 많겠지. 그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네 네 그렇군요 말한다. 대화를 질문으로 시작하는 방식이 진절머리 난다. 질문했는데 내가 정답을 말하면 갑분싸가 되지만 어쩌냐 나는 답을 알고 있는 것을. 심지어 나는 그 분야를 가르치기도 했단 말이다. 『온 세상이 우리를 공주 취급해』의 세계와 책을 읽는 우리의 세계가 교집합처럼 만난다. 


새로운 용어도 알게 되었다. 픽미 걸, 베이직 걸, 인셀, 알파메일, 전 여친 미친년. 가해자에게 공감해 주는 심리는 어느 나라나 똑같구나. 성별에 따른 임금 격차는 독일도 그렇다면 전 세계가 그렇다는 거다. 일의 특성상이라고 말해버리면 편하겠지만 내가 일하는 곳 역시 남자들의 비율이 우세하다. 그럼에도 도대체 왜 여성들과는 유대나 연대가 되지 않을까. 여적여는 분명 아니다. 여성/남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먼저 생각한다.


성별로 나눠서 바라보는 게 아닌 먼저 인간으로서의 괜찮음을 보게 된다. 핑거프린스와 핑거 프린세스가 도처에서 활약하고 있으니 성실한 바보는 더 많은 일을 한다. 반성한다. 『온 세상이 우리를 공주 취급해』를 읽었으니까 칭찬인양했던 여성혐오의 말은 이제 하지 않기로. 세상에는 여성과 남성이 아닌 인간이 있을 뿐이다. 전 여친 미친년의 신화에서 우리는 해방되어야 한다. 전 남친 미친놈의 신화도 있다면 그것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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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
이사구 지음 / 황금가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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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니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비슷한 말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같은 말이 있겠다. 너에게 기회를 줄게. 그러니 한 번 변해봐. 개과천선의 실사판을 보여줘. 어디 보자 하지만 돌아오는 건 혹시나가 역시나 같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그렇다는 거다. 게으름뱅이에서 부지런한 나로 변신해 보겠어, 결심하고 또 결심. 작심삼일은 개뿔. 하루 정도 다르게 살아보고 안 되겠네 누워 있는 꼴이라니. 


인과 관계나 계기도 없이 사람이 변한다? 지랄맞은 성격 대신 온화한 표정으로 세상만사에 달관한 자세로 착해졌다? 드라마 《악귀》와 이사구의 연작 소설집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의 세계관에 입각하면 그이는 귀신이 들린 거다. 것도 지독한 악귀에 빙의 된 것이다.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어른들은 말하지. 왜 저러지? 죽을 때가 된 건가?


맞다. 맞아. 죽은 귀신이 들러붙었는데 그게 살아 있는 건가. 죽은 자나 다름없다. 그러니 조심하자. 어제까지만 해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인간이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을 걸어온다면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를 교본 삼아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 하나. 직장에서 사내연애가 빈번한 이유는 죄다 미친 인간인데 그중에 한 명이 나에게 정상적으로 대해준다? 그러면 바로 사빠 되는 거지.(사랑에 빠지는 거.)


그저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을 뿐인데. 몇 번을 물어봐도 화를 내지 않았을 뿐인데. 인류애가 충전된다.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는 직장인의 슬픔을 오컬트적인 요소로 풀어낸다. IT 기업의 디자이너 김하용이 주인공이다. 벽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미치기 일보 직전의 하용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유튜브에서 부적 쓰는 법을 검색한다. 디자이너의 재능을 부적 그리기에 낭비하는 하용에게 판타스틱 어드벤처 호러 무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직장 상사가 이상하다'로 시작하는 표제작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는 슬프고 웃기고 짠하고 기괴하다. 소설 한 편에 이토록 다채로운 인간의 감정을 욱여 놓다니.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네 그려. 첫 문장을 읽고 어찌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뻔한 문장인데. 이상하지 않은 직장 상사가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하용의 직장 상사는 이상해졌다. 디자인팀 팀장인데 디자인을 못하는 한 팀장이 요즘 착해지고 순하게 행동한다. 


어렸을 때 읽은 전래동화에는 도깨비, 여인으로 둔갑한 구렁이, 억울하게 죽은 처녀 귀신들이 등장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했다가 정체를 드러내는 귀신들. 주로 산이나 빈 집, 어두운 밤길에 등장해 인간을 놀래켰다. 바쁘다 바쁜 현대 사회에는 직장에 출몰한다. 귀신들이. 것도 진짜 인간의 모습을 하고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귀신인지 아닌지 모를 감쪽같은 모습으로 일도 하고 점심도 먹고 월급도 받아 간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그만큼 직장이란 곳이 힘들고 무서운 장소가 되었다. 귀신들과 일을 하고 있다니. 그러면 이해가 된다. 저 이의 미친 짓거리가. 귀신도 보통 귀신이 아닌 악귀가 들려서 저러니 퇴마 의식을 해야겠지.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에 등장하는 또 다른 주인공 무당언니에게 의뢰를 해야 한다. 웃긴 이야기 하나 할까. 귀신을 본다는 사람이 있다. 부엌 싱크대에서 자기를 보고 욕을 하고 자고 있으면 옆에 와서 또 욕을 한단다, 귀신이. 


어디까지 진지하게 받아줘야 할지. 대꾸는 해야겠고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이게 다 일을 해서 그래. 내가 때려치우고 개인 사업자든 뭐든 해야겠는데 흑흑. 잠깐 눈물 좀 닦고. 미친 소리를 들어도 진짜 미친 게 아닐까 의심되는 인간들과 지내야 하는 게 내가 배운 게 이것뿐이라.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를 쓰기까지 소설가 이사구의 직장 생활이 어떠했을지 안 봐도 소설. 하용과 명일(무당언니의 본명)의 악귀 퇴마기는 이사구의 직장 생활이 계속되는 한 시리즈물로 이어질 것 같은 속상하지만 기쁜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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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말할 용기 - 목숨 걸지도 때려치우지도 않고, 일과 나 사이에 바로 서기
황선우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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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좋아하고 아끼는 감정은 이제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대뜸 단박에 기습적으로 미움이 생겨버린다. 미워할 구실을 만들어 내지도 않는데 밉고 또 밉다. 미움은 대체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아무래도 이 미움은 일을 하기 때문에 발생된다는 과학적 추측이 가능하다. 일이 아니면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농담을 주고받으며 좋은 사람인 척 굴 수 있을 텐데. 


마음속 소리를 나도 모르게 내지 않는 게 중요하다. 속으로 온갖 욕과 조언과 충고를 가장한 잔소리를 하고 있어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앙 입을 다물고 귀여운 걸 떠올려야 한다. 열에 아홉은 참고 있다가도 진짜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를 내뱉고 마는데 대나무숲이 절실해진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너 진짜 이딴 식으로 할 거냐. 가마니는 아니지만 가마니가 되고 싶기에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도 예전에 그딴 식으로 굴었다. 거울 치료 당하고 있는 거지 뭐. 


반성에 반성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오늘 제일 잘한 일은 도시락으로 싸갈 김치볶음밥을 만든 거다. 몇 년째 책상에 앉아 점심으로 김치볶음밥을 먹고 있다. 고행 내지는 수행 같은 거라고 나 자신을 설득한다. 이렇게 몇 년만 수련을 하면 세상을 구할 비기를 터득할 수 있다는. 오늘 점심도 김볶을 먹었냐고 해서 넵 했더니 사장이 참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비아냥인지 감탄인지 모를 허나 1초만 생각해도 당연히 전자이겠지만) 하더다.  


진짜 정말 완전 회사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맛있는 건 집에서 나 혼자 예능 보면서 먹고 싶다고. 무얼 먹으러 가자 거나 함께 먹자고(동어반복인가. 아무튼 나를 잊어주세요. 점심시간에는.) 권하지 마. 황선우의 에세이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는 일하면서 느껴야 했던 정체불명의 감정들에 이름을 달아준다. 일하다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거나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한숨을 쉬거나 부탁무새로서 넵과 넵넵과 앗넵과 네로 다양한 네의 변형으로 상황을 돌려 막는 바보 인간의 나를 안아준다. 


그나마 내가 쫓겨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를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통해서 알았다. '구단의 목표를 구상할 때 강두기의 실력은 변수가 아닌 상수로 취급받는다. 그가 15승은 거둔다는 가정하에 다른 전략들이 논의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있으니 이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단단한 신뢰를 받으며 일한다는 것, 떠날 때 빈자리를 모두가 큰 상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는 더 이상 이불 찰 일만 안 만들기를 바란다.' 내가 실력이 있다는 건 아니고 나의 능력은 상수로서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꾸준하다는 능력. 어떨 땐 잘하고 어떨 땐 못하는 게 아닌 꾸준히 그럭저럭 다른 이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군말 없이 하는 능력. 내가 그만둔다고 하면 청소일 같은 업무를 해낼 사람이 없어 상실로 다가오겠지. 청소부 한 명을 잃어버렸구나.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황선우는 '너무 크고 뾰족하고 울퉁불퉁한 사람들에게' 바친다. 그러니까 나에게 말이다. 자주 미움이 생겨나 가시 돋친 말을 생각하다가 결국엔 해버리고야 마는 한심한 두심한 나에게. 


열심히만 하고 잘하지 못하는 그래도 열심히 하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일못러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는 큰언니의 얼굴로 다가온다. 목숨 걸지 말고 때려치우지도 말자고. 제일 중요한 건 아프지 말아야 해. 몇 년째 김볶을 먹지도 않은 큰언니 황선우는 어떻게 세상이 아닌 나를 구할 비기를 알아냈을까.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 평생 김볶만을 먹어야 한다. 좋은 걸 떠올려본다. 떠, 올, 려, 본, 다. 생, 각, 이, 잘. 아, 월급! 무조건 사랑한다고 말해야겠네. 용기 따위 내지 않아도 사랑해, 월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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