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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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다. 내가 불운한 사람이라는 것을. 술을 마셔도 취하게 마시지 않는 건 과하게 나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흔히들 하는 실수. 과거의 불행에 떠들기. 불행 배틀에 참여하기. 어느 순간 아무도 듣지 않는데 나의 고난을 주절주절 이야기해버리는 것. 그런 장면에 나를 넣고 싶지 않아서 취하지 않는다. 


나는 안다. 내가 슬픈 사람이라는 것을. 슬프지 않은 척 일부러 과장되게 웃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내 웃음은 자연스러워졌다. 즐거운 사람의 역할을 꽤나 잘 해내고 있다. 웃다 보니 웃겼다. 웃다 보니 웃지 않을 일이란 게 없었다. 아무 말 대잔치에도 가벼운 말장난에도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잘 웃는 사람이 되었다. 올해의 연기대상은 당연히 나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알게 해준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감사를 표한다. 습관적으로 들어간 알라딘에서 2024 올해의 책 1위라고 해서 그렇다면 꼭 읽어야지 하면서 구매한 소설. 딱딱한 하드커버이지만 그 안에 든 부드럽고 섬세하고 슬픈 이야기,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올해가 가기 전에 읽을 수 있어서 고맙고 기쁘다. 


소설은 단숨에 읽힌다. 석탄상 빌 펄롱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면서 자아내는 슬픔과 경건의 분위기는 독자를 압도한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자란 펄롱의 현재는 그럭저럭 삶을 유지할 만한 동력이 되어주는 것들 때문에 괜찮다. 결혼을 했고 자식이 다섯이고 배달 주문이 끊이지 않으며 바쁜 하루를 보내는 펄롱이다. 


현재를 불안해하지 않으며 안도한 채 살아갈 수 있는데 왜 펄롱은 슬프고 불안할까. 이 행복이 내일도 모레도 유지될 수 있을까. 펄롱은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슬픔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지고 싶었던 걸 받지 못한 기억.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펄롱의 현재는 그러지 않아도 됨에도 서글프다. 과거를 잊지 못해서? 과거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바보라서?


과거 없이 현재를 살 수는 없다. 오래되어 낡고 슬프고 헤진 과거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이 겪은 슬픔과 비애와 분노의 조각을 손에 들고서 현재의 불의와 마주해야 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제목 아래 이처럼 소중하고 거대한 것들이 숨어 있다. 짧은 분량의 소설임에도 내가 간직하고 소중하게 품어야 할 중요한 가치가 들어 있다. 


과장된 웃음을 짓고 행복을 연기하는 건 그만두기로 한다. 나는 안다. 내가 행운아이고 기쁜 사람이라는 것을. 소중하고 매일 웃겨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 나를 걱정해 주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 잘못된 일에는 화를 내고 옳지 않다는 말을 함께해 준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따뜻한 전등 불빛 아래 소박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게 되어 빌 펄롱의 고뇌의 순간에 곁에 있을 수 있어서 2024년의 마지막이 괜찮고 좋았다. 한 인간이 손을 내미는 용기를 목도할 수 있어서 말이다. 그가 내민 손의 온기는 2025년으로 이어질 것이다. 손을 잡고 오늘에 이어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된다. 펄롱이 건네준 외투를 입고 비록 맨발로 걸어가지만 그의 집에 가면 따뜻한 차를 마시고 빵을 먹을 수 있다는 예감으로 행운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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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행금지 서해문집 청소년문학 4
박상률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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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의 밤에 나는 바보였다. 그 밤에 누군가는 국회에 진입하는 군용차를 맨몸으로 막아서고 월담하는 국회의원과 보좌진을 도왔으며 밤새 추위에 떨며 계엄 해제를 부르짖었는데. 사람들의 사소하고 거친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척했고 이내 피곤해져 쓰러져 잤다. 뉴스도 기사도 보지 못했다. 내가 세상을 외면한 사이에 용기가 있든 없든 깨어 있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로 달려나갔다. 


세상에. 말도 안 돼. 2024년에 계엄령이라니. 계엄의 시대를 살아본 적도 없었지만 그 시절이 얼마나 무섭고 엄혹했는지 책과 영화, 드라마, 영상에서 추체험을 했다. 서울역에서 대학생들이 회군을 한 다음날 광주에서만이 비폭력 시위가 있었다. 광주를 진압하러 공수부대가 들어왔고 그들은 작전명을 '화려한 휴가'라고 이름 짓고 얼마 전에는 충정 훈련을 했다. 


같은 나라 국민을 향해 곤봉을 휘두르고 대검을 찌르고 총을 발사했다. 앉아쏴 자세. 조준사격. 헬기 사격. 광주는 고립되었고 그 와중에도 강도나 폭행 사건이 없었다. 다친 사람들을 위해 헌혈을 했고 밥을 나누며 고립의 시간을 견뎠다. 전남도청에서의 마지막 날에도 어린 소년은 집에 가지 않았다. 엄마가 난중에 밥 먹으러 오라고 할 때 알겠다고 어여 가라고 한 소년이 거기 아직 있다. 소년은 오고 있는 중이다. 그 밤과 낮의 시간이 다시 찾아오는 것일까.


박상률의 청소년 소설 『통행금지』는 우리의 2024년 12월 3일을 지켜냈던 1980년 5월 18일을 다룬다. 현재가 과거를 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바꿔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을까라고 했을 때 그렇다고 단박에 말할 수 있었던 건 1980년 5월의 광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광주를 혼자 두었다. 광주를 오해했다. 광주를 감췄다. 문학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외친다. 광주를 환한 빛으로 꽃 핀 쪽으로 데리고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통행금지』는 광주 외곽에서 딸기 농사를 하는 광민이네 가족의 봄을 그린다. 쥐를 기가 막히게 잡아내는 진돗개 찐돌이와 광민이네 가족의 봄의 이야기. 창고에 쌓인 곡식을 쥐로부터 지키기 위한 찐돌이의 아침마다의 사투를 시작으로 소박하지만 화목한 광민이네 가족은 1980년 5월의 봄에도 그렇게 내내 살수 있을 줄 알았다. 광민이는 중학생이고 농구공을 갖고 싶어 한다. 아버지는 광민이의 그런 마음을 알아채고 서둘러 딸기를 수확한다. 


늦은 봄에 귀하게 나온 딸기는 시장에서 다 팔리고 아버지는 광민이를 위해 농구공을 사서 돌아간다. 광민이는 아버지와 농구공을 반가워하고 찐돌이와 농구를 한다. 딸기가 짓무르기 전에 따서 서둘러 팔아야 한다. 아버지는 광주 시내에서 난리가 난 줄도 모르고 그저 봄이니까 잠깐 시끄럽겠지 하면서 딸기를 팔러 광주로 들어간다. 그 밤 광주 밖으로는 모든 출입이 통제되었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는 다시 광주 시내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스포일러이기에 『통행금지』를 읽어갈수록 제발 아무 일 없기를 아버지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총을 쏜 사람들은 있는데 총을 쏘라고 지시한 자는 없다니.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는데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니. 전시 상황도 아닌데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해놓고 뻔뻔하게 자신의 잘못이 없다고 말하다니. 


세상이 너무 어두워 집에서 가장 밝은 걸 들고나왔다는 말에 울컥했다. 어려운 시절에 우리는 유머와 해학을 잃지 않는 민족이므로 깃발에 적힌 재미있는 문구와 함께 1980년 5월 광주의 어둠과 빛으로 지금을 이겨낸다. 문학은 그래서 힘이 있다. 『통행금지』는 그래서 소중한 빛이다. 걱정은 조금만 하고 검소하게 살아내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주는 책이다. 


죽은 자가 산자를 구했다. 이제는 산자가 산자를 위해 그 밤에 달려 나갔다. 두려움 없이 차를 막아 서고 '전국누워있기연합-"제발 그냥 누워있게 해줘라 우리가 집에서 나와서 일어나야겠냐"'라는 구호를 적어 깃발을 만들어 집회에 참석했다. 유머가 세상을 구한다. 귀여움과 다정함 더해서. 그 어떤 시각에도 우리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어야 한다. 광민이 아버지가 농사지은 딸기를 사러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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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 형제의 모험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장편동화 재미있다! 세계명작 4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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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크게 아팠을 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울 바에야 차라리. 단순 감기 몸살인 줄 알았는데 입원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감기약만 먹고 버틴 내가 바보 같았습니다. 그렇게 크게 아픈 적이 없었기에 나의 몸 상태에 무지했습니다. 고열이 나야 하는 게 맞는데 감기약을 많이 먹어 열은 나지 않고 통증만 심했습니다. 의사도 의아해하면서 어떻게 참았는지 내처 물었습니다.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주사와 항생제를 번갈아 맞으며 열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다인실의 밤은 불편했습니다. 이불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아야 할 만큼 조용했고 어떤 이는 코를 골면서도 잘 잤습니다. 그 밤에 나는 죽은 이들을 떠올렸습니다. 죽음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릅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아픈 소년 스코르판이 자신의 형을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칼이라는 이름이 있는 데도 형 요나탄은 자신의 동생을 '딱딱하게 구운 과자'라는 뜻의 스코르판으로 부릅니다. 그만큼 요나탄은 칼을 귀여워해하지요. 칼은 아파서 매일 부엌의 낡은 침대 의자에 누워 시간을 보냅니다. 학교도 밖으로도 나가지 못한 채로요. 다정한 형 요나탄은 그런 동생을 위해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죽음이 두려운 칼에게 요나탄은 죽으면 땅속에 묻히는 게 아닌 이 우주 어딘가에 있는 낭기열라로 떠나게 된다고 말해줍니다. 그곳에 가면 모닥불을 피우고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살수 있다고 칼을 달래줍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시작하자마자 죽음에 대해 들려줍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 다들 한 번씩은 아픈 적이 있었지요. 학교에도 가지 못한 채 방에 누워서 앓았던 적이요. 그때 병원에 가도 특별한 병명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도 없었지요. 


지금도 그렇게 아팠지만 어른이 되었기에 정확한 병명이 있고 치료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시절 느꼈던 죽음의 공포는 여전합니다. 대체 죽은 사람들은 어디에 가 있는 걸까. 고통 속에서 벗어났으니 그걸로 만족한 걸까. 아니야. 지구에서의 삶이 너무 힘들고 아팠으니 다른 세계로 가서 행복하게 지내면 어떨까.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그런 바람을 실현해 주는 책입니다. 


아파서 내내 누워 있는 동생에게 형은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잊게 해줍니다. 우주 어딘가에 있는 낭기열라로 가서 만나자고.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왜 이제야 읽게 된 것일까요. 건강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는 제게 낭기열라라든지 낭길리마, 텡일, 소피아 아주머니, 마티아스 할아버지 그리고 칼과 요나탄의 이야기가 있었으면 죽음의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요.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특별한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형제애로 가득한 이야기이면서 죽음을 이겨내고 새로운 세계에서 악당을 물리치는 모험은 아이도 어른에게도 필요합니다. 상실을 경험한 후에야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항상 곁에 있었기에 고마움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커다란 공백이 생겨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합니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채울 수 없다는 마음입니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의 세계관이라면 그들은 우리만 남겨둔 채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낭기열라라는 우주 어딘가의 평화롭고 고요한 그러나 악당이 있는 그곳에서 다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들도 나도 언젠가 낭기열라에서 만나게 될 테니까요. 죽으면 끝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사자왕 형제의 모험』입니다. 아프고 힘들고 어려웠던 지구에서의 삶은 놓아두고 모험과 재미와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동시에 공존하는 낭기열라에서 만나요. 낭기열라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계가 또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너무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잠시 기다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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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생 3 - 언제나 그 자리에 오늘의 인생 3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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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나는 사 먹지 않을 딸기 두 개(두 다라이? 두 대야?)를 사주었다. 커피도 두 번씩이나 그리고 아이스크림케이크까지. 오래 만나지 않았고 당분간은 만날 기약이 없으므로. 그런 인생. 나의 먹거리에는 돈을 아끼면서 누군가에게는 호기롭게 사주는 어느 하루. 대신 나는 사과를 샀다지요. 집으로 돌아와서는 한 페이지에 한 컷의 그림과 문장이 있는 동화책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름을 알고 싶어』)


시간을 되돌려 어제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정리를 하고 누워서 마스다 미리의 신작 만화 『오늘의 인생 3』을 읽었다. 책을 펼치니 귀여운 책갈피가 끼워져 있었다. 책이 잘못 온 건가. 나한테만 준 건가. 착각했지만 초판 한정 부록이란다. 아아 신나게 가져야지. 코로나로 마스크를 쓰면서 겪는 일상의 불편함과 소중함 그리고 다정함이 『오늘의 인생 3』에 있다. 


붉은 전등 아래에서 『오늘의 인생 3』을 읽는 금요일 밤이란 이불을 덮지 않는 어깨는 시려웠지만 전기장판 위의 등은 따뜻해서 적정의 온도가 유지된다. 곧 다가올 성탄절에는 아이스크림케이크를 사서 파먹을 것이고 일출 보러 가는 건 혼잡할 것 때문에 빠른 포기를 하고 대신 일몰을 보러 가볼까 계획하는 금요일 오늘의 인생. 


고민하지 않고 트레이에 빵을 담고 잘 샀다는 소비에 대한 칭찬을 받아서 이 기분은 무얼일까 잠시 고민한 목요일 오늘의 인생도 있었다. 하루하루는 소중해. 오늘은 어제 죽어간 자가 그토록 바라던 인생이다. 그러니 살아 있음에 감사해. 라고 들어서 의무처럼 하루를 소중하고 감사히 여겨야 하지만 슬픔과 절망이 간헐적으로 몰려올 때면 그마저도 잊어버린다. 그저 오늘을 지금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지. 


『오늘의 인생 3』 속 오늘의 인생의 한 컷들, 카페에 앉아 음료를 먹고 지나가는 강아지를 귀여워하고 저녁에 먹을 디저트를 사러 가는 오늘의 인생을 보고 있으면 하루치의 고단함이 문을 열고 떠난다. 충전하느라 핸드폰을 옆에 두지 않은 채 『오늘의 인생 3』을 읽었는데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와서 반가웠다. 핸드폰이 없는 단 몇 시간이어도 불안하지 않은 오늘의 인생이 되면 좋겠다. 


다양한 양말을 신자라고 결심하고 앉아서 양말을 접고 무겁거나 불편한 옷을 정리하고 냄새나는 반찬통 역시 비웠다. 『오늘의 인생 3』을 읽고 나서. 옷과 옷 사이에 틈이 있는 걸 보는 즐거움을 같이 얻고 싶었다. 아직도 욕심과 미련이 많아서 모으고 쌓아 놓는다. 바깥은 춥지만 햇빛이 들어와 집을 데워주는 아침이 있어서 책을 읽다가 다시 잠들었다. 일어났는데 몸이 쑤신 오늘의 인생. 


점심 지출을 줄이고 싶어 실리콘 도시락을 사서 밥과 고기, 만두를 꽉꽉 채워 놓은 어제의 인생. 기대도 절망도 없이 살면서 복권 당첨금으로 바나나 케이크를 먹는 누군가의 오늘의 인생에서 힌트를 얻는다. 지키고 가꾸어야 할 나만의 오늘의 인생. 성과 없는 하루를 보냈다고 우울해하지 말고 쉬는 날에는 청소기를 두 번 돌리고 맘에 드는 겨울 바지를 사서 좋아하면 되는 하루를 가진다. 


실수해도 나를 위한 약간의 욕심을 부려도 괜찮은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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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고백들
이서수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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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갈아입다 보면 발견되는 몸의 상처들. 멍이 들어 있기도 하고 생채기가 나 있기도 하다. 허둥지둥 몸을 움직여야 했을 때 몸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면서 생긴 상처이겠거니 한다. 언제 어느 장소에서 얻어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멍과 생채기는 천천히 사라진다. 복사물을 가지러 가거나 도장을 찍어주러 갈 때 차분하지 못한 성격으로 급하게 뛰어가면서 매일의 상처를 얻어온다. 


겨울이라 옷 안에 있는 몸은 건조해서 자주 가렵다는 신호를 보낸다. 로션을 낭비 없이 쓰기 위해 거의 다 쓴 로션 병을 거꾸로 해놓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몸에 발라준다. 조금만 더 버텨줘.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단다. 2024년의 12월 둘째 주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개인적인 일마저 더해져서 어떻게 해결했는지 모를정도의 정신없음으로. 그래도 그럭저럭 어찌어찌 무사히 지나갔음에 안심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도무지 모르겠다. 선의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는데 악의 먼저 내밀다니. 그 악의에 악의로 대응하기보다는 선의도 아닌 인간의 마음으로 맞섰다. 남기고 갈 게 없다는 사실에 도리어 마음이 차분해진다. 어제는 탄핵이 아슬아슬하게 가결되었고 종일 뉴스를 틀어 놓은 채(음소거로 해 놓은 채) 이서수의 소설집 『몸과 고백들』을 읽었다. 


토요일 오후의 햇빛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했고 작은 사이즈의 전기장판을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내내 누워서 『몸과 고백들』을 읽어 갔다. 질서 있게 모여서 다만세를 부르고 핫팩을 나눠 가지고 선결제를 인증하며 추운 날씨에 굶지 말고 싸우라는 그 마음을 옆에 두고서 말이다. 우리는 위기에 강한 민족이라는 것을 먹을 것에 진심이라는 것에 뿌듯해하며. 


나는 내 몸이 어떤 일에도 쓰이지 않길 바란다는 최초의 고백들로 『몸과 고백들』에는 다섯 개의 이채로운 고백이 있다. 나의 몸. 먹으면 먹는 대로 살이 찌는 몸. 다리와 팔이 짧아 옷 핏이 살지 않는 몸. 조금만 무리해도 아프다고 징징대는 몸. 이제는 나이가 먹을 대로 먹어 생명을 쉽게 기대할 수 없는 몸. 미래 따위는 개나 줘버려 하는 몸. 이서수는 '집'에 이어서 '몸'에 관한 뜨거운 고백들로 나의 우둔한 정신을 깨운다. 


태어났을 때부터 너는 여성 혹은 남성이라고 정해진 몸으로 살아간다. 여자아이는 분홍색. 남자아이는 파란색.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도 정해준다. 여자아이가 로봇을 가지고 놀면 그건 아니야 하면서 공주 인형을 손에 쥐여 준다. 그렇게 성별 정체성을 확립한 채 살아간다. 단 한 번의 의문도 없이 여성으로 남성으로 말이다. 그러다 불시에 깨달을 수도 있다. 내가 여성인가, 남성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성인가. 


『몸과 고백들』은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정체성과 아무 성에도 들고 싶지 않은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고백이 있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성으로 살아가면 안 되나. 그런 몸으로 사랑을 하고 돈을 벌고 아이를 가지면 안 되나. 고백으로써 혼란함을 표출한다. 여성이기에 당위로 수행해야 하는 역할을 버리고자 한다. 여성이기에 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를 고백하면서 발랄함을 가장한다. 


나의 몸을 사회에 맡기라고 한다. 나의 몸을 남자에게 맡기라고 한다. 그렇게 쉽고 당연하게 나의 몸을 쉽게 주고 의탁할 수 없다. 할머니가 되는 게 소원이 되었지만 그전에 병에 걸리든 사고로든 죽을 수 있는 알 수 없는 미래만이 확실하기에 고백을 가장한 선언을 하고자 한다. 『몸과 고백들』에 나오는 여성들은. 나의 성별은 내가 정할 수 있고 나의 몸은 도구로 쓰이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나인 채로 살아가려 한다. 


처음엔 부끄러워 속삭이다가 나중에는 열렬하게 나를 말하는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몸은 우리의 몸이 될 수 없다.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고백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여기 이 간절하게 말해지는 고백에서 내일이 아닌 오늘의 희망을 본다. 낙관하며 노력하는 쉬운 일보다 비관하며 노력하는 어려운 일로 오늘의 불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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