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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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쉬었음의 청년들의 비율이 늘고 있다고 한다. 실업의 이유를 묻는 말에 '그냥 쉬었다'라고 답변을 하는 것이다. 새삼 그냥의 뜻을 다시 찾아보았다. 아무리 읽어도 그냥과 쉬었다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냥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가 아닐까. 할 수 없이 그냥이라는 이유를 붙인 거지 알고 보면 어쩔 수 없이 쉬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나 때는 말이야. 우리 때는 말이죠. 맞으면서 일을 배웠다고.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게 무서웠다. 실업급여 신청을 하기 위해 이직확인서를 제출해달라는 말에는 통화를 끊고 실업급여를 없애야 한다는 말도 스스럼없게 하는 것 역시 소름 끼쳤다. 그러니 어서 빨리 탈출해야 한다. 탈출은 지능순이라고 하지 않던가. 


왜 이런 말들을 늘어놓느냐 하면 김혜진의 장편 소설 『경청』 때문이다. 삶은 때론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간다. 나의 노력과 수고를 삶은 가볍게 무시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내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이런 고통과 시련을 가져다줄 수 있냐고 억울하다고 소리치고 싶게 만드는 시간이. 심리 상담사로 일하는 임해수는 자신이 뱉은 말 한마디로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경청』은 쓰다 만 편지 모음집이다. 소설은 해수가 이성목 기자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한다.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클릭수를 노리고 쓴 기사 때문에 자신이 받은 피해를 이야기한다. 편지의 끝은 마무리되지 못한다. 해수는 쓰다만 편지를 가지고 나가서 버린다. 편지를 쓰고 공원을 걷고  편지를 버리고 다시 공원을 걷고 편지를 쓴다. 


그날의 사건으로 해수는 익명성을 보장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런 나날 중에 산책을 하다가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한다. 밥을 주려는 캣맘과 밥을 주지 말라는 이웃 사람의 싸움을 보고 난 뒤였다. 해수는 작고 상처받은 고양이에게 다가간다. 고양이는 해수를 피한다. 다음 산책 때 우유와 닭 가슴살을 사서 고양이 앞에 내민다. 그때 한 아이가 다가와 해수에게 고양이에게 먹이 주는 방법을 알려준다. 


삶의 어느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은 해수는 자신이 뱉은 말 한마디로 타인의 죽음을 경험한다. 해수는 상담 센터에서 해고되었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곁에 있던 사람마저 떠나간다. 실업 급여와 퇴직금과 그동안 모은 예금으로 그 시간을 살아간다. 어쩔 수 없이 쉬었음의 시간으로 말이다. 


도저히 억울함을 풀 길이 없는 해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때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 사실은 다르다고. 밤에 쓴 편지는 낮에 버려진다. 밤의 부끄러움을 낮에는 마주 보기 힘들다. 편지를 버리는 낮에 해수는 고양이 구조를 시작한다. 아이가 지어준 순무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다친 고양이를 구조하는 건 자신을 구하는 길이다. 해수의 일상은 고양이를 구해내겠다는 생의 의지가 생겨 조금씩 굴러 간다. 


소설이 가진 제목의 의미를 고찰한다. 『경청』이라. 심리 상담사 해수는 타인의 어려움을 듣는 일에 익숙하다. 잘 듣는 자로서 살아간다. 그러다 한 번 타인의 고통을 듣지 않고 그에 대해 평가를 해버렸다. 늘 잘 들어주다가 단 한 번 경청하지 않으면서 해수의 인생이 꼬인다. 


꼬인 자신의 인생을 풀기 위해서 해수는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밤새도록 편지를 쓸 만큼 하고 싶었던 말이 많은 해수였다. 극복이기 보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로써 자신을 지킨다. 소설의 마지막은 해수가 다시 오늘과 내일을 살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세상에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다고. 이제 저런 사람들과는 만나지 말아야지. 인생의 교훈을 얻은 셈 치면 손해 본 시간은 아니었다. 


그렇게 책만이 나의 구원이다고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오직 책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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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하는 눈동자 - 양장
이슬아 지음, 이훤 시.사진 / 먼곳프레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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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없으면 계속 없고 있어도 계속 사자지는 돈. 벌어도 벌어도 모이지 않고 벌지 않으면 당장 큰일이 나면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돈. 한 번 크게 돈에게 혼나고 나서는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할지 모르게 만든 돈. 악착같이 모아야 하나. 쓰고 싶은 만큼 써야 하나. 입장 정리가 쉽게 되지 않는다. 


이슬아의 신간 에세이 『갈등하는 눈동자』가 나왔을 때 바로 장바구니에 담았다. 결제의 순간에야 가격을 확인했다. 19,800원. 인터넷 서점에서 사면 10%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으니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체크카드인지라 결제가 될까. 잔고를 들여다봤다. 작고 귀엽고 소중한 금액이 거기 있었다. 괜찮다. 


약 20,000원이 안되는 책 값. 누군가는 싸다고 누군가는 비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는 전자였다가 후자가 되었다. 왜 이렇게 사람이 쪼잔해졌지. 겨우 책 한 권인데. 책을 쓰고 만든 사람의 노고를 생각해야지. 아슬아슬하게 결제를 마치고 책이 오기를 기다렸다. 내 손에 들어온 두툼한 『갈등하는 눈동자』를 오래 가지고 다녔다. 책에도 기운이 있는지 제목처럼 나는 갈등하는 시간을 갖는다. 


『갈등하는 눈동자』에서 소개한 애니메이션을 봤다.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이슬아의 그 글은 지금 나의 상황을 잘 정돈된 문장으로써 표현해 주었다. 두둥 언제나 심장을 바운스 바운스 만드는 넷플릭스의 상징적인 소리를 들으며 애니메이션을 정주행했다. 소감은 꼭 보시라이다. 2026년이 가기 전에 말이다. 


소행성 충돌이 얼마 남지 않은 도시에 살아가는 캐럴은 나를 사찰해서 만든 인물이 아닐까 하는 정도였다. 신기하게도 종말의 시대에 회사는 돌아가고 있었다. (종말이어도 출근을 해야 한다는 상징이겠지.) 행정 사무 보조로 뽑힌 캐럴의 책상 위에는 서류가 잔뜩 쌓인다. 묵묵히 일을 해내는 캐럴. 직원 명부를 보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책꾸(책상 꾸미기)를 하면서 사무실의 풍경은 달라진다. 


이슬아 자신이 보았던 애니메이션(《장송의 프리렌》도 꼭 보겠음다.) 과 읽었던 책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갈등하는 눈동자』는 채워진다. 그러면서 책이 조금 비싼 거 아닌가 하는 나의 쪼잔한 생각을 날려주었다. 시각장애인 교사 김성은을 인터뷰하면서 만든 QR과 근사한 사진과 설명은 19,800원으로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멍청 비용이 있다.(다른 말로는 시발 비용. 홧김 비용도.) 내가 멍청해서 쓰는 비용. 그러다 화가 나서 쓰는 시발 비용과 홧김 비용. 그런 바보 같고 욕이 나면서 화가 나는 비용들을 아끼면 타인의 노고에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데에 망설이지 않을 수 있다. 정당 비용으로서 말이다. (어떠신지. 방금 내가 만들어낸 말이다.) 『갈등하는 눈동자』는 출판사 '먼곳프레스'의 첫 책이다. 부디 정당 비용을 지불하는 독자로 인해 판매량이 많았으면 한다. 


책과 글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를 가진 자로서는 대한민국에서 이슬아를 따라갈 자가 없다. 그런 진심과 열의와 성의의 자세를 『갈등하는 눈동자』를 통해 배운다. 기분 나쁘다는 글이 될 수 없지만 한 번 설명해 줬는데 이해 못 하고 응용도 할 줄 몰라서 어디 가서 일을 하겠냐는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가라앉았다는 글이 된다. 


그때 비로소 나는 갈등하는 눈동자에서 결심하는 눈동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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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컨시어지
쓰무라 기쿠코 지음, 이정민 옮김 / 리드비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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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종말을 꿈꾸며 새로 나온 책을 훑어보던 중이었다. 어머 이건 사야 해라는 작가의 책이 있다. 쓰무라 기쿠코도 그중 한 명이다. 옴마마. 신간이 언제 나왔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잠깐 기분이 반짝였다. 장바구니에 담고 야금야금 모아 놓은 쿠폰을 써서 구매 완료. 돈 쓸 때만 활기가 돈다. (으이구. 일할 때 그랬으면. 슬퍼서 뒤의 말은 쓰지 않겠다.)


쓰무라 기쿠코의 신작 『거짓말 컨시어지』를 읽기를 고대했다. 쉬는 날에 읽어야지 했지만 쉬는 날에 밥 먹고 누워만 있었다. 그래도 책을 읽을 거라고 집 안에서 책을 들고만 다닌 나. 귀여운 캐릭터가 한가득 있는 표지를 보면서 읽어야지 마음으로만 되뇐 나. 책의 띠지에 "그렇게 우리는 잠깐의 거짓말로 하루를 건넌다."라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 나. 


이런 나의 마음이 모여 『거짓말 컨시어지』를 읽게 만들었다. 지구 종말은 아직인 것 같으니 책을 읽으며 오늘을 건너가보자. 상실한 인류애를 책으로 보충한다. 볼거리가 그득그득했지만 『거짓말 컨시어지』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계속 읽고 싶어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읽었다. 쓰무라 기쿠코는 일하는 사람의 감각을 탁월하게 그려낸다. 


일하느라 예민한 상황에서 느끼는 기분을(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을) 봐봐 이런 느낌이었지 하는 말투로 설명해 준다. 맞아맞아. 정말 그랬다니까. 『거짓말 컨시어지』에 실린 열한 편의 단편은 일하며 일로써 만난 사람들이 등장한다. 키워드로 『거짓말 컨시어지』를 설명한다면 #직장 #스트레스 #인간관계 #거짓말 #오늘도 인류애 상실 #나 빼고 다, 어때요? 읽고 싶죠?


업무 휴식 시간에 나와 접시를 깨는 직원. 처음으로 자신의 생일을 챙기는 카페 직원. 투잡을 하고 돌아와 만화를 그리는 병원 수납 직원. 거짓말을 해달라는 의뢰를 받는 직원. 이런 직원들 때문에 『거짓말 컨시어지』를 읽으며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못 하지만 당신들은 해줄 수 있죠의 기분이다. 타인의 눈을 신경 쓰지 않으며 꿋꿋이 나의 오늘을 살아내는 인물들의 응원은 덤이다. 


이 정도의 나이를 먹었으면 지혜롭고 현명해질 줄 알았다. 하루하루 살아보니 쓸데없이 나이만 먹은 한심하고 부끄러운 어른이 되었다. 어디 가서 이 나이라고 하기에 창피할 정도로 매일 실수투성이다. 『거짓말 컨시어지』는 실수투성이 어른이라도 오늘을 사는 나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지구 종말의 소원은 속으로만 생각하기. 소설 속 인물이 튀어나와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일 그게 뭐라고. 일 그거 좀 잘한다고 사람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냐. 농담이라고 던진 말에 개구리는 맞아서 죽습니다. 반말할 건지 존댓말 할 건지. 반말했다가 존댓말 했다가. 단어 뜻을 물어보며 갈구는데 내가 국어사전이냐. 무시하는 것도 가지가지다, 증말.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거짓말 컨시어지』랑 무슨 상관관계가 있겠냐고 하실 테지만 아주 약간의 관계성이 존재하거든요. 『거짓말 컨시어지』를 읽어보면 알 수도 있답니다. 읽어봐도 모르겠다고요? 무릇 책이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말할 수 있는 대나무숲이란 말입죠. 나의 억울함과 슬픔을 책에 대고 하소연하는 거랍니다. 


내가 오늘 진짜 어이가 털려서 말이야.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끝을 보기 위해서 거짓말하겠지. 거기 계단 조심하세요라고. 실은. 계단에서 너를...


거짓말이 필요한 이유다.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 『거짓말 컨시어지』 만만세. (이 맥락 없는 끝은 뭘까.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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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구직자 - 그리고 소설가 정수정의 화요일 다소 시리즈 5
정수정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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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기분이나 살아감이 그지 같을 땐(거지보다는 그지가 어울린다, 이 삶은) 돈을 좀 써야 한다. 내일이 돌아오는 것이 소름 끼치게 싫어서 내일을 기대할 무언갈 찾기 위해 쇼핑몰로 향했다. 설마 산이나 바다로 갔을 거라 기대한 건 아니겠지. 차가 없는 뚜벅이에게 허용된 기분 전환의 장소란 쇼핑몰이 전부이다. 새로 문을 열었다는 올리브 영을 기웃댔다. 딱히 살 것이 없는데 구경하다 보니 필요가 생겼다. 


딱 올리브 영에서 제품 두세 개 살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이 전부. 그렇게 소비로써 마음을 추스르는 건 좋지 않다고들 하지만(누가?) 어쨌든 돈을 좀 쓰니 가라앉은 기분의 깊이가 1 정도 올라왔다. 살 마음에도 없는 청바지를 입어본 건 이걸 사면 내일 입고 갈 생각에 마음이 괜찮아지겠지 해서. 밑단 수선을 기다리는 동안 서점에 갔다. 그럴 때가 있다. 내가 책을 선택한다기보다 책이 나를 선택하는 순간. 


정수정의 『연쇄 구직자』의 경우가 그랬다. 무얼 살까. 매대를 돌아보던 중 다산책방의 '다소 시리즈'가 있었다. 전에 송지현의 책을 구매해서 읽었는데 이 시리즈가 꾸준히 나오고 있었구나. 반가웠다. 그러다 『연쇄 구직자』를 보는 순간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딱 정확히 지금의 내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제목으로서. 어디 점이라도 보러 가서 이 사나운 팔자의 해석을 맡겨야 하나 싶었는데. 그렇게 책은 나를 이상하게 위로한다. 


충동적인 건 아니었다. 그동안 참을 만큼 참고 견딜 만큼 견뎠다. 이제는 못 하겠다. 참고 견디는 건. 『연쇄 구직자』에서 말하는 나다움을 나는 이곳에서 잃어가고 있었다. 그만하겠다 이야기하고 나는 다시 구직자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대놓고 무례한 사람과 숨 쉬듯이 무례한 사람. 일을 해도 일을 안 해도. 물어봐도 물어보지 않아도. 뒤의 말은 생략할까 하다가. 써본다. 지랄. 


『연쇄 구직자』를 틈틈이 읽으며 이력서를 전송했다. 연락은 간간이 왔고 하루의 시간을 내서 세 군데에 면접을 봤다. 왜 다들 그렇게 운전을 할 줄 아냐고 물어보는 건지. 순간 헷갈렸다. 내가 운전원에 지원을 했던가. 처음 면접을 본 곳에서는 차가 없지만 차를 구해서 출퇴근을 해보겠다는(이 무슨 허황된 쌉소리를 나는 맨정신으로 했단 말인가. 그만큼 취업이 간절했던 모양이지. 나 자신을 이해해 보려 한다.) 말을 했고 곧 후회했다. 이곳은 연휴가 끝나면 전화를 해야 한다. 죄송하지만 차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출근이 어렵겠다는. 


내가 『연쇄 구직자』를 읽으면서 마음이 울렁거렸던 건 지수의 구직 활동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나와 비슷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 더 큰 거. 지수의 기분. 지수가 느끼는 감정 상태. 정확히 내가 느꼈지만 표현하기 힘들어서 주저했던 마음의 상태를 지수가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수는 팀장의 (와 진짜. 팀장이란 인간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뭣 같을까.) 애착 인형이 되기를 포기하면서 직장을 그만둔다. 이후에 결혼을 한 여성으로서 구직활동을 끝없이 시도한다. 


점심값 4,000원을 지원해 주겠다며 생색을 내는 대표. 전화 면접에서 결혼 여부와 출산 계획을 묻고는 연락이 오지 않는 회사. 임금 단가를 후려치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줄 모르는 팀장.(명함을 카드 주듯이 밀어서 준다니. 현실 고증이겠지만 이런 인간이랑은 마주치기 싫네.) 지수가 구직 활동에서 만난 다양한 회사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이렇다고가 아닌 진짜 그렇지 하면서 울적해진다. 더한 걸 겪으면서 구직 활동을 하고 있는지라. 


그럼에도(그럼에도 라는 접속사가 꼭 필요하다. 나는 이 접속사가 좋다. 뒤에 올 말이 기대되니까. 그럼에도. 그럼에도.) 지수는 구직 활동을 한다. 지쳤지만 포기하고 싶지만. 거장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를 이 그지 같은 삶의 모토로 삼아야겠다. 연쇄 구직자로서의 지수는 그간에 내가 겪은 상황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나 역시 지쳤고 포기하고 싶었지만 구직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는 곳마다. 눈물.


나를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면서 이쪽 일에 경험이 있는지(아. 눈새인 나도 느꼈다. 텃세의 기운이.) 묻고. 물 한 잔 주지 않고.(집으로 가는데 목이 너무 말랐다.) 압박 면접을 하려고 밑도 끝도 없는 상황극과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피해 금액을 물어야 하는데 얼마나 낼 수 있는지. 그걸 왜 내가. 하는 기분으로. 되는대로 말했다. 아마 연락 안 오겠지.) 정말 가지가지 한다. 한 달에 세금 공제하고 200만 원도 안 줄 거면서. 제일 중요한 급여 먼저 말해달라. 달라. 달라. 


지수의 구직 활동은 어떻게 될까. 나는 이제 지쳐서 알바천국도 열심히 기웃거린다. (지쳤는데 열심히 기웃거린다니 나란 사람은 모순 덩어리다.) 아직도 얼굴 피부병이 낫질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말해 뭐해. 가족 같은 회사에서 아들이라는 작자가 실장이라는 직함으로 내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는 겁나 스트레스 받으면서 일하니까 그런 거겠지. 피부과 약을 거진 두 달 넘게 먹는데도 차도가 없는 내 얼굴을 본 의사는 의아해했다. 이 정도면 나아야 하는데 하면서 레이저 치료 예약을 잡아 주었다. (이제 새벽부터 나가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이걸 좋아하는 게 맞나. 그래도 좋다.) 


『연쇄 구직자』의 주인공의 이름은 최지수인데 내 이름을 붙여 가면서 읽었다. 바느질을 배우면서 칭찬을 받아 기뻐하는 지수. 돈도 들지 않는 칭찬의 말을 사람들은 알뜰하게 아낀다. 뭐든지 열심히 하는 지수. 어떻게든 살아나가려는 지수. 연쇄 구직자 지수. 널 많이 아끼고 사랑해, 지수. 뭐가 되려고 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자, 지수. 


2026년이 끝나지 않았지만 2026년에 읽은 책 중 최고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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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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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피부과 대기실에서 읽은 두 번째 책은 김혜진의 『오직 그녀의 것』이다.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청소부는 이번엔 과자 하나를 내게 주었다. 옆 병원의 청소부가 일을 끝내고 수다에 참여했다. 새벽잠을 포기하고 일을 하는 청소부들의 수다 속에서 묵묵히 편집자 일을 하는 주인공 홍석주의 이야기가 내 안에서 퍼져 나갔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일을 하는 건 이제는 대단하고 경이롭다는 단어로도 치켜세우기 힘들다는 감정을 느낀다. 


그만큼 일은 어렵고 슬프고 화가 나는 것이라서. 


얼굴은 여전히 붉고 가렵고 거울이라는 사물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많이 좋아졌다는 의사의 말을 믿지 않는다. (여전히 내 얼굴은.) 원인이 뭘까 찾아가다가 일을 하고 있어서 인가하는 엉뚱한 답에 도달했다. 아이러니. 일을 하지 못할 때는 일하고 싶고 일하고 있을 때는 일하기 싫어서 어리석은 질문과 답을 해대는.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이 된 게 아니듯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노동자가 아니다. (그냥 견디는 사람.)


『오직 그녀의 것』을 청소부들 사이에서 틈틈이 읽다가 진료를 보기 위해 모여든 환자들 사이에서 대놓고 읽다가 점점 주인공 홍석주의 이야기에 몰입했다. 지방대학 사학과에 다니던 홍석주는 '새벽'이라는 동아리에 가입해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감상을 나눈다. 정작 자신의 글은 발표하지 않는다. 국문과 모임에 사학과인 자신의 글이 형편없이 느껴질까 봐. 그러다 한 선배로부터 국문과 강의를 들어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때부터 홍석주는 문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청강생이 되어 국문과 수업을 듣는다. 선생님이 되라는 부모의 기대를 버린 채 반백수 생활 끝에 교한서가에 교열자로 취직했다. 새삼 소설의 제목 『오직 그녀의 것』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교열자에서 편집자로 홍석주는 자리를 옮긴다. 출판사를 옮기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다시 편집자 일을 한다.


홍석주를 수식하는 단어를 찾다가 '묵묵함'을 그 옆에 놓아준다. 일이 서투르다는 것 때문에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까지 남아서 낮의 실수를 지식으로 채운다. 그런 열의는 자신이 하는 일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아끼면나온다. 제목의 의미는 그 일은 오직 그녀의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만큼 홍석주는 책을 좋아한다. 경애의 마음을 넘어선다.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을 홍석주는 오랜 시간 해낸다. 


홍석주는 첫 직장의 면접에서 들었던 말을 면접관이 되어서 질문한다. 노력에 비해 성과는 더디고 보람만 있는 이 일을 하려면 그것을 좋아해야 한다는 걸 홍석주는 깨닫게 되었다. 책을 감싼 띠지는 책을 읽는 내내 책갈피가 되었다가 책을 다 읽은 후엔 모으지 않고 버린다. 어쩐지 차마 『오직 그녀의 것』의 띠지는 버릴 수 없어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그 질문이 있어서. 


그 질문에 답을 매일 해보고 싶어서. 


누군가를 이해하기보다는 나를 이해하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는 느낌이다. 원래는 이해되지 않는 세상이나 타인을 이해하고 싶어서였는데. 지금은 바뀌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나의 내면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하다. 쉽게 도움을 답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의 나를 알아봐 주는 용도로 쓰고 싶다. 나의 머뭇거림과 나의 불안을 나의 상황을 『오직 그녀의 것』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슬픈 세계에서 책을 만난다. 오직 나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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