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쁜 쪽으로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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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의 기록처음엔 그렇게 보였다 나쁜 쪽으로’(동명 제목인  책에서  처음 나오는 단편을 말한다.) ‘천국에서라는 전작에서 천국으로 그려졌던 뉴욕의 일상을 담는다그러나 그곳마저 더는 천국이 아니다작가는 그곳을 마치 천국처럼 묘사한다주인공 여자가 사랑하고 매달리는 남자를  거리가 아무것도 없던 때에 와서 이제는 중심이 된,  마디로 신과 같은 존재로 그리는 것을 보면 그렇다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그와 만날  없다사실 그녀는  남자도천국으로 알았던  거리도 믿지 않는다거리는 내내 그녀에게 구원의 역이 있다고 말하지만그녀는 알고 있다역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지도와 표지판 모두가 쇼윈도에 전시된 화려한 상품들만큼이나 현란한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는 천국이 있다는 믿음 속에서  곳에 닿고자 열심히 걸어가는 사람들과 달리 나침반의 자침과도 같이 천국에 맞춰져 있는, 자신이 지닌 양의 주광성 죽인다스스로 음의 주광성 되려 한다이제 그녀는 ‘ 나쁜 쪽으로’ 걷는다이어지는 이야기는 절망의 심화 과정이자 그것을 낳은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의 추적이기도 하다. 여기서 김사과가 말하는 천국의 의미는 보다 명확해진다이것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다세속적 의미의 천국이다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욕망하는 모든 것의 구현이자 본향(本鄕)으로써의 천국인 것이다그래서 미국이다누가 뭐래도 자본주의 하면 미국이니까 말이다아마도  천국이라는 말은 미국을 가리키는 말이자 비아냥하는 은어이기도  천조국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천국엔 무엇이 있는가? ‘ 나쁜 쪽으로 주인공 여자처럼 오욕뿐이라는  알면서도 매달릴만한 무언가가 과연 존재하는가그것을 알아보는  1부의 이야기다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 나쁜 쪽으로 단편집이다. 2011년과 16 사이에 여러 지면에 발표한 7개의 단편과 2개의 미발표 단편이 실려있다. 1  , 2  , 3 2이렇게 담겨 있다. 1부가 ‘천국 이야기라면, 2부는  하나의 ‘천국 되려 하는 이곳 현실의 이야기다. 3부는  모든  뒤섞여 정확히 어디가 어딘지   없는 곳의 이야기며 결국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를 찾을  없어 유령이 되어버린 자들의 실체 없는 목소리다김사과는 사람을 허망하면서도 이기적인 욕망의 노예로 만들고 서로 진정한 소통과 관계를 단절하여 한낱 수단으로 전락시키고야 마는 자본주의를 꾸준히 공격해왔다그런데  공격의 양상이 달라졌다지금까지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테러가 물리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여기서는 정신적인 것이라   있다무작정 외부에서 치고받기보다는  내부로 들어가서 양파 껍질을 까듯   근원의본질적인 면을 파헤치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1  편의 이야기는 얼른 보면 아무런 연속성이 없어 보인다그러나 단편마다 언급하는 음악과 미술 소재가  단편들이 실은 시간상으로 역순되는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처음  나쁜 쪽으로 70년대에 유행한 펑크라는 음악 장르가 나왔다이어지는 샌프란시스코 60년대를 주름잡았던 히피의 메카이다 단편의 주인공 남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로지 감각할  있는 물질적인 면만 중시했는데 이제  영혼을 헤아리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물질의 집착에서 벗어나 정신 추구했던 히피 그대로다다음의 ‘증기그리고 속도 자본주의의 시원(始原)이라   있는 근대가 창출한 가장 대표적인 변화를 포착한 풍경화다 그림은 기차를 처음   터너의 충격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터너가 받았던 충격과 보았던 기세 그대로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많이 그리고 급격하게 변화시켰다무엇보다 직업이 없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없게 되었다이것이 이전 중세와 가장 많이 다른 점이었다사람의 본질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그의 전부를 좌우했다마치 이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단편은 실업자 등장시키고 돈이 없어 남에게 빌붙을 수밖에 없는 주인공에게 아시아 창녀라는 소리까지 듣게 만든다그녀의 남자 친구가 하필이면 포르투칼 국적인 것도 눈에 띈다. 포르투칼 하면 가장 먼저 유럽이 아닌 다른 대륙에 식민지를 만들어 자본주의를 유포시킨  마디로 근대의 첨병(尖兵) 같은 국가가 아니던가이처럼  단편은 근대의 시간을 슬그머니 끌어들인다그리고 이런 식으로 ‘ 나쁜 쪽으로에서 ‘증기 그리고 속도까지 역순의 역사가 형성된다작가는 착란하는 피난민들 양산하고 있는 자본주의에게 그래도 희망을 걸만한 무언가가 있는지 거슬러 올라가며 탐사하고 있는 것이다애초부터 잘못된 것이기에 오늘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아니면 원래는 좋은 것이었으나 오용의 결과인지 알고자  것이다그렇게까지  결과 확인하게 되는 진실은 지극히 비관적이다근대의 시원이 되는 ‘증기 그리고 속도에서 주인공 여자와 실업자 모두 추방에 추방을 거듭하다 아무런 실체 없는 귀신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목도하니까 말이다.


 나는 궁금했다그들은 누구이며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그들도 묻고 싶은 듯했다너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서 귀신이 되었는가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떠돌고 있는가어떤 희망을 가졌던가?


   마디로 자본주의는 애초부터 유령의 생산 운명지어져 있었다는 것이다마르크스였던가자본주의가 소외의 숙명을 가졌다고 말한 것은소외 바깥으로 내모는  뜻한다정주(定住)하는 존재를 유랑토록 하는 것이 소외다더하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소외를 가장 격렬하게 만든다고 했다방랑의 지속이다자본주의 안에서 살아간다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그리게  궤적이다. 1부의 마지막 단편인 지도와 인간 그것을 보여준다. ‘지도가 있으면 인간이   있다 믿음 속에서 그토록 추방당하고 정처없이 헤매이면서도 지도를 찾을  있다는 희망으로 감내해왔는데 그런 희망은 다만 착란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제는 지도조차 바랄  없게  현실을 그린다.



 지도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그것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작정이다.(그렇다고 한다.) 지도가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사람들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묻는 것이 허용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지도를 가질  있는 존재가 유령이 되었기 때문이고 지도와 소통할  있는 말을  믿게  탓이다자본주의는 그동안 사람들에게 지도였다그것은 황무지와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그래도 좋은 쪽으로 가고 있다고 말해왔다언젠가는 히브리 사람들이 그랬듯 가나안으로 가게  것이라고그러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며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모든   거짓이라는 사실이다현재의 착란을 제거해 주리라 믿었던 지도는 오히려 착란을 부풀리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1부의 계보는 착란이 어떻게 가중되는지 보여주는 계보이기도 하다지도는 진실을 보증하지 못했다그것은   역시 진실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마지막 단편에 갑자기 침범하여 자꾸만 늘어나는 영어는 그런 정황을 독자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주려는  아닐까 싶다소통의 가장 근본적인 단위가 되는 말조차 이제 착란의 먼지구름이 되었다착란의 피난민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숙명이었다작가는 그것을 태초의 시간이자 여전한 현재에서 아프게 통감한다.


 3부의 미발표 단편  개는 작가가 여전히 절망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케 한다소설가는 무엇보다 말로 지어 먹고 살아가는데  말을 믿을  없게 되었으니  통렬했던  같다세계의 에선 영어와 우리말이 착란을 일으키듯 뒤섞인 가운데 작가는  불안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각 속에서 기록하는 것을 그만뒀다고 고백하고 마지막 단편에선 차라리 제목처럼 자동  판매 기계 되길 원한다거기의 언어들은 모두 조각나 있고  어떤 것도 일련의 이야기로 묶이지 않는다우리가   있는 것은 발굴 현장의 도자기 파편처럼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말의 더미일 뿐이다이것은 이제 이런 것밖에   없다는 고백인 걸까 아니면 그래도 말을 믿고 다시 소설을 쓰기 위해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말을 배우고 있다는 과정을 드러낸 것일까물론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착란을 정물화로 그린 것만 같은  단편은 속 시원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모호한 가운데 마치 자신의 착란을 내게 감염시키려 하는 느낌마저 든다.


 나름 매끄럽게 말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2부에 대한 말을 빠뜨렸는데앞서도 말했듯여기서는 미국을 모방하여  하나의 천국이 되려고 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2부도 물론 1부처럼 역순의 계보를 이룬다2  단편 ‘박승준씨의 경우 주인공 박승준이 외롭고 초라한 자신의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남의 아파트 재활용 장소에서 몰래 건져  외국 유명 브랜드 정장을 입는데 그것은 미국에 견주어 우리의 고유한 정체성을 비루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방하여  정체성을 우리에게 이식하기에 여념이 없는 씁쓸한 오늘의 현실을 나타낸다 몸에 맞지도 않고 누가 일러주지 않으면 뭔지도 모르는 남의 옷에다 억지로 걸쳐 입고 살아가는  아니냐고뒤이은 카레가 있는 책상 조금  거슬러 올라가 군부 독재의 시절을 은연중에 끌어온다약한 존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시원에서 핍박받다가 살해당하는 조선족은 그런 사건이 바로 자신이 살던 장소에서 일어났는데 아무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는 것에서 전두환이 광주 시민을 학살한 것이나 박정희가 긴급조치로 무고한 시민들을 마구 잡아들였던 것을 연상케 한다단편의 주인공은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감을 남을 혐오하고 남에게서 혐오를 받는 것을 통해 충전시켜 나가는데(그가 즐겨 먹는 카레는  마디로 자존감을 확보하려는 수단이다강하고 널리 퍼지며 피할  없는 카레 냄새로 그는 자기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은 군부 독재가 자신의 허약한 정당성을 오직 증오와 혐오를 통해 이루려 했던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박승준씨의 경우 같은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지 이유를 보여준다빈약한 자존감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없는 용기의 부족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오로지 타인에게 기대어 형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단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침묵하는 고시원처럼 군부 독재의  극단적인 억압과 감시의 경험은 주체가 자립할 힘을 빼앗아 버렸고 공백이 되어버린 내면에서  이상 자기 존립의 근거를 찾지 못하게  사람들은 타인을 통해 충전해야 했다주인공이 마지막에 카레가 되어 누군가의 입에서 으깨어져 그와 완전한 하나가 되기를 소원하는 것처럼.


 마지막 이천칠십X 부르조아 6 암시하는 시간대가   거슬러 올라간다단편이 비록 과거와 현재미래가 마구 뒤썪여 있긴 하나귀족 계급이 존재하고 도포자락이 나오며 말로 왕래할 뿐만 아니라 두루마리로  서찰이 오간다는 점에서 독자로 하여금 분명히 일본에 의해 자본주의가 한창 이식되던 시절의 조선 말기를 떠올리도록 하기에 하는 말이다뭐랄까모방의 시원이 되는 시간대를 담은 느낌이다주인공 민정남은 검시관인데 서울 장충동에 있는  도로에서 발견된  사체 때문에  유력 자본가 가문의 자제인 엘리자베스 수지 윤과  알란 정의 연애에 끼어들게 된다그러나 진심어린 사랑의 밀어인  알았던 서찰은 사실 탐욕에 물든 흉계였고 본의 아니게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민정남 또한 파멸하게 된다그가 그렇게  것은 말이 진실을 보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그가 마지막에 보게 되는 신비한 홀로그램 정원은 진실이 완벽하게 보증되는 세계였다 풍경을 위해 목숨도 바칠  있을 만한하지만 그조차 환영이었다진실한 말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다만 영원한 그리움과 그에 맞먹는 무력감 속에 자리할 뿐이었다있는  다만 그런 말이 있었다는 사체.


 말과 똑같은 음을 가진 말의 사체 바로 그것을 가리키고 있었다우리가 믿을  있는 말은 죽었다는 그런 의미에서 엘리자베스 수지 윤과  알란 정이란 존재는 한편으로 미국이 자신의 위엄을 최초로 알린 해방 정국 시기우리나라를 양분했던 소련과 미국의 이데올로기 동조된 이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이데올로기가 진실된 말을 전하기보다 진실에 상관없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말의 사체에 함유된, 진실한 말의 죽음이라는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고 하겠다.


 모방의 태초가 되는 시간에 이미 말이 죽어 있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온전히 파악하고 드러낼 고유의 언어를 잃고 남의 시선에 맞춰진 남의 언어로 그런 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애초부터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번역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알고보면 줄곧 소외되고 있었던 것이다이처럼 2 또한 소외의 계보를 역순으로 훑는다우리의 경우엔그렇지 않아도 착란의 계보로 점철된 ‘천국 무분별하게 모방까지 하는 바람에 혼란이  가중되었다이렇게 말하면 3부의 단편이 가진어쩌면 황당하게 보이기도 하는  파격적인 형태가 조금은 이해될지도 모르겠다3부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며 1 그리고 2부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결론이라는  강조하고 싶다.


 나는 앞서 3부에 대해 말하면서 작가가 느낀 절망의 정직한 고백인지 아니면 상황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배우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그러나 여기에 이르러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후자가 맞는  같다리뷰를 통해 생각을 정리하다가 나는 문득 작가가 소설 전체에 걸쳐 계속해서 불확실과 불안정 얘기하고 있다는  깨달았다. ‘ 그랬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그러다 어쩌면 부정 보다는 긍정의 몸짓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단편의 주인공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택했다나를 잃는 것을 받아들이거나(‘샌프란시스코’, ’카레가 있는 책상’, ‘이천칠십X 부르조아 6’) 혼란과 불안 속에 계속 머물렀다.(‘증기 그리고 속도’, ‘박승준씨의 경우’) 그들은 모두 ‘ 나쁜 쪽으로 주인공처럼 안정과 정답을 희구하는 무리의 행렬을 이탈하여  나쁜 쪽으로 걸어갔다스스로의 선택으로.


 이것이 눈에 들어오자 처음 읽었을 때는 무력감의 표현이자 타협과 순응으로만 보였던 모습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혼란과 불안을 기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껴안는그것을 삶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으로 삼는그런 모습을그래서 후자라고 생각한 것이다작가가 혼란과 불안 속으로 뛰어들어 수많은 의심과 질문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고 있다고이런 모습은 솔직히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나는 이와 반대편이기 때문이다살면서 나는 어떻게든 혼돈과 불안을 피하려 했다느닷없이 그것과 마주할 때면  부족함과 무력함을 먼저 탓했다작가가 바라보았던 것과 같이 잃는 것을 통해 새로 얻을 가능성 따위 생각해보지 않았다어떻게 가느냐가 아니라  만큼 왔느냐가 중요한 나였다.


 그런데 소설은 ‘ 나쁜 으로 걸으라 한다작가가 그렇게 말한  아니다그냥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다그런데도  말이 뇌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 내가 뭔가 잘못 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일까 역시 착란의 계보 속에서 아무런 의심과 질문 없이 남들이 정한 해답을 수용한  아닌가 하는 의혹으로   주위를 계속 서성이게 되는 것일까작가가 재현한 착란의 계보가 설득력이 있었기에 그가 암시한 태도 또한 받아들이고 싶어진다그동안 확실하고 굳건한 돌만 디디며 삶이란 징검다리를 건너온 내게 과연 ‘ 나쁜 쪽으로’ 걸어갈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다그래도 앞으로는 혼란과 불안 앞에서 지금까지 꼭꼭 잠궈두기만 했던 마음의 문을 말을 처음 배울  그러하듯이 천천히 열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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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래 인용문에 페이지 숫자를 명기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전자책으로 읽어 그럴 수 없군요. 혹시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알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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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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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랜시스 하딩의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영국 아마존에서 18주 연속 1위를 했다고 하는데, 그럴만해 보인다. 19세기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이지만 단순한 환상 소설은 아니다. 남성 중심 사회가 가하는 억압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숨기고 오직 남성 사회가 원하는 모습을 연기해야만 했던 여성의 모습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야기는 이러하다. 소설이 시작되면 주인공 소녀 페이스의 가족이 베인이란 섬으로 떠나고 있다. 페이스의 아버지 에라스무스 선더리는 목사로 자연 과학자로도 유명한데 특히나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그가 발견한 화석 때문이었다. 그게 보통 화석이 아니라 날개 달린 인간의 화석으로 그러니까 천사의 존재를 입증하는 화석이었기 때문에 높은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그 화석을 발견했던 것이 원래 페이스였기에 그녀 역시 '화석의 소녀'로 짧게 유명해졌다. 그런데 그 화석이 그만 가짜라는 게 들통나고 삽시간에 과학자의 치욕이 된 아버지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피해 달아나듯 베인 섬을 찾았던 것이다. 마침 그 섬의 치안 판사 앤서니 람베트가 초청해 주었다. 아직 본토에서의 일이 섬까지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페이스의 가족은 섬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아버지는 재기를 노리고 다시 연구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섬 사람들도 아버지의 일을 알게 되고 마침내 가족 모두가 혹독한 냉대를 당한다. 


 페이스 모녀가 다가가는 순간 가게들은 일제히 문을 닫아버렸다. 케이크 가게 여자 주인은 프랑스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틀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척했지만 다른 사람들 말은 잘도 알아듣는 것 같았다. 작은 약제상 주인은 너무 바쁜지 페이스 모녀가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p. 121)



 아버지의 좌절은 심화하고 페이스가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모습을 점점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러다 아버지가 자신을 도와 달라는 말에 단둘이 밤바다를 헤쳐 나가 한 동굴로 가게 된다. 그 동굴에 아버지가 몰래 숨겨 놓은 '거짓말 먹는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실제로 거짓말을 먹고 산다. 나무에 대고 거짓말을 하면 나무가 마치 포자를 퍼뜨리듯 마을로 퍼져나가 사람들 사이에 소문으로 떠돌게 된다. 나무가 거짓말을 먹으면 열매 하나가 생기는데, 그 열매는 먹는 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진실을 보게 만들어 준다. 뭐랄까? 거짓을 먹어 진실로 승화시키는 나무 같다. 어쨌든, 그렇게 거짓말 먹는 나무를 보고 온 다음 날 아버지가 절벽 중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아버지와 함께 집까지 돌아온 페이스는 왜 아버지가 다시 바다의 절벽으로 가서 죽었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죽음의 정황상 자살이 추정되지만 페이스의 엄마 머틀은 자신의 미모를 사용하여 관련자들을 유혹, 남편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사고사로 만들려 애쓴다. 그런데 페이스는 아버지가 죽은 현장 부근에 손수레 하나를 발견한다. 분명히 그 날 밤에 아버지와 함께 집까지 끌고 와서 온실 옆에 놓아둔 손수레였다. 그것이 어떻게 다시 아버지가 죽은 곳에 있게 된 것일까? 페이스는 직감한다. 아버지가 집에서 살해당했으며 아버지를 살해한 누군가가 손수레에 아버지 시체를 옮겨와서 절벽에서 떨어뜨린 것임을. 이제 페이스는 그동안 착한 소녀 연기 하느라 마음 속에 꼭꼭 억눌려 왔던 또 하나의 자아, '마녀 하피'를 해방시키려 한다. 


 페이스는 마음속에 수많은 의문을 안고 있었고, 그 의문은 나무상자 속의 뱀처럼 똬리를 튼 채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 페이스의 마음속에서 그것은 이름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에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이유는 그러면 그것이 그녀에게 더많은 힘을 휘두르게 될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것은 중독이었다. 페이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페이스는 항상 그걸 포기했지만 진정으로 그런 적은 없었다. 그것은 세상이 아는 페이스와는 정반대였다. 착한 페이스, 든든한 페이스, 믿음직스럽고 따분한 페이스(p. 21)


그녀는 더이상 착한 소녀가 아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사회와 싸우는 투사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거짓말 먹는 나무'의 힘을 적극 이용하려 한다. 아버지가 유령이 되어 마을을 떠돌고 있다는 거짓말을 비롯, 필요한 거짓말들을 마을에 퍼뜨린다. 그런데 아버지의 연구 자료를 노리는 이들이 있다. 믿었던 삼촌이 그들과 협력하여 페이스가 숨겨 놓은 아버지의 비밀 노트를 찾아서 가져가려 한다. 그들은 왜 아버지가 감춰둔 자료를 노리는 것일까? 그 이유와 사람들의 정체는 놀라운 반전 속에서 펼쳐진다.



 '거짓말 먹는 나무'는 이런 이야기다. 줄거리는 이렇지만 속을 더 뜯어 들여다 보면 이 이야기는 19세기 남성 중심 사회에 포박된 여성들이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걸고 힘껏 싸우는 분투기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페이스만이 아닌 것이다. 소설 처음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는, 그래서 더없이 속물적으로 보였던 페이스의 어머니 머틀이나 아버지를 파멸로 몰아간 최후의 흑막이 되는 존재 또한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여성으로써 최선을 다해 버티고 싸우고 있었다는 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정말은 여성 스스로 독립과 자존을 쟁취하려는 투쟁의 서사이다.


 소설에서 거짓말은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여성들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생존과 지속을 위하여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숨기고 남자들이 바라는 모습을 연기하고 위장하는 것으로의 거짓말이다. 다른 하나는 그런 여성들이 싸워야 할, 여성을 억압하고 남성에게 순종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 진리처럼 위장하여 유포하는 남자들의 거짓말이다. 소설엔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여성이 차별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정당화 한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그것들이 모두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남성의 옹졸한 자존심 때문에 나온 거짓 서사라는 게 밝혀진다. 압권은 페이스의 아빠다. 페이스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신뢰한다. 비록 화석이 가짜라는 게 밝혀졌어도 페이스는 아버지를 믿고 세상이 오해하는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렇게 믿었던 아버지는 페이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네가 아들이라면 언젠가는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고 가족의 재산을 늘려서 그 은혜에 보답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딸은 절대 그러지 못해. 넌 절대로 명예롭게 군대에 복무할 수도 없고, 과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을 수도 없고, 성직이나 의회에서 명성을 얻을 수도 없고, 일을 해서 잘 살 수도 없어.

 어차피 넌 평생 내 지갑을 털어가는 짐밖에 안 돼. 네가 결혼한다고 해도 지참금 때문에 우리 집 재산이 크게 축날 거다. 넌 하워드를 그렇게 깔보면서 말하지만 네가 시집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하워드가 널 거둬주길 빌든가 집도 절도 없이 쫓겨날 거야. (p. 147)


 이것이 세상의 진실이었다. 페이스는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거짓말에 그동안 속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죽음은 그동안 페이스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거짓말이 죽는 것이기도 하다. 그 죽음과 더불어 '거짓말을 먹는 나무'가 페이스의 것이 된다는 게 의미심장 하다. 왜냐하면 그 나무는 남성 중심 사회가 철저하게 감추는 진실을 페이스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이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스포일러가 되기에 설명하는 건 생략하기로 한다.) 


 페이스는 힘이 세지 않았지만 전에는 누구도 그 점을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위협이 항상 존재했다는 걸 알았다. 그녀와 같은 여자들에게 보이는 미소, 정중한 인사, 친절한 배려에는 그 위협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걸 가리고 있던 베일이 찢겨지고 진실의 추악한 면이 유감없이 드러난 것이다.(p. 430)


 페이스는 소설 후반에서 그 나무가 혹여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나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선악과 나무가 아담이 하자는 대로 반려 동물처럼 따르기만 했었던 이브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립의 존재로 각성시킨 것처럼 여성에게 독립적인 의지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브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뱀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그렇게 거짓말은 남성의 권위만 존재하던 세계를 붕괴시키고 여성과 남성이 대등한 동반자가 되는 세계를 창출시켰다. 그런 뱀을 페이스는 반려동물로 기르고 애지중지 한다. 이런 페이스의 모습은 그녀가 이브의 계승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새롭게 밝혀지는 또 하나의 진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페이스의 엄마 머틀에 관한 것이다. 소설 내내 내세울 것이라고는 오직 미모 밖에 없는 지극히 속물적인 인간으로 나오는 머틀은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는 게 남편의 죽음 뒤에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여긴 전쟁터야, 페이스! 남자들만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야. 세상은 우리에게 무기도 주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고 하지. 하지만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이대로 죽게 될 거야.(p. 434)


 그러니까 그동안 머틀이 보여준 모든 행태는 사실 그녀만의 방식대로 치른 전투였던 것이다. 머틀은 페이스보다 더 일찍 남성 중심 사회의 거짓을 보았고 거기에 대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해 대처해 온 것이었다. 그렇게 머틀이 닦아 온 길을 페이스도 이제 걷게 될 것이다.


 단순한 판타지 소설이 아니었다. 남성과 여성, 서로 다르게 쓰이는 거짓의 중의적 의미를 차용하여 독립과 자존으로 나아가는 여성의 성장을 판타지의 설정과 절묘하게 배합하여 성공적으로 재현한 작품이었다. 이야기도 꽤 몰입감이 있어 작가의 이야기 끌어가는 솜씨 역시 만만치 않았다. 프랜시스 하딩은 처음 만나는 작가인데, 이 정도의 내공을 목격하고 보니 그녀의 다른 작품 역시 만나고 싶어진다. 그녀의 데뷔작 '깊은 밤을 날아서'는 다행히 벌써 번역되어 있었다. 일단 그것부터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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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2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너무 평범해서 큰 흥미가 없었는데 리뷰 내용을 보니 이 제목 외에 다른 걸 붙이기도 어려웠겠다 싶고 그러네요.

ICE-9 2017-09-26 20: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분명 다른 제목을 붙이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판타지 소설로만 알고 읽었는데 페미니즘적 메시지가 의외로 강해 좀 놀랐더랬습니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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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만이다. 그러고 보니 리베카 솔닛의 책은 꼭 2년 주기로 만났던 것 같다. 그녀의 이름을 처음 뇌리에 각인시켰던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를 읽은 2년 뒤에 우리나라에서 정말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킨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만났고 또 그 2년 후에 이렇게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와 해후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리베카 솔닛의 책이 그것만 나왔던 것은 아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가 나오기 전에도 창비에서 '어둠 속의 희망'이 나와 있었고 민음사에선 '걷기의 역사'(이 책은 계속 절판이었다가 리베카 솔닛이 인기를 얻자 '걷기의 인문학'으로 제목을 바꿔 재간되었다.)가 나와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책들은 리베카 솔닛의 이름을 결정적으로 널리 알린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결이 참 달랐다. 넓게 보자면 모두 환경에 대한 책으로 지금 우리가 그녀의 이름을 대표적으로 인식하는 '페미니즘'은 아니었던 것이다. 원래 이 환경 분야가 리베카 솔닛이 전력을 기울이는 쪽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가 왜 지금은 페미니즘 투사가 되었을까?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는 바로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준다.



 2014년 5월 23일. 미국 아일라비스타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22세의 남성 엘리엇 로저가 칼과 총 그리고 차량으로 모두 6명을 살해하고 13명을 부상입힌 것이다. 저지른 짓도 저지른 짓이었지만 그 동기가 더욱 충격이었다.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여성들과 그 여자들과 즐거이 어울리는 남자들에 대한 적개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대학 여학생 사교 모임 회원들을 대량 살인할 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여의치 않자 제 앞에 나타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것이었다. 한 마디로 동기의 핵심엔 '여성 혐오'가 있었다. 많은 주류 언론은 그러한 동기를 무시하고 그저 한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정리해버렸지만 개인들, 특히 여성들은 그럴 수 없었다. 적의와 살해의 대상이 바로 자신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동안 억눌려 있었던 목소리들을 분출시켰다. 주류 언론의 한결같은 침묵이 그 목소리들을 더욱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발달된 SNS를 통하여 '#yesallwomen(여자들은 다 겪는다)'이란 해시태그와 함께 그것은 거세게 흘러나왔다. 저마다 여성으로 살면서 당했던 고통, 가졌던 불안과 공포를 고백하는 물줄기였다. 


 여자들은 자신이 겪은 희롱, 위협, 폭력, 두려움을 말하기 시작했고, 서로의 목소리를 보강했다.(p. 130)


 계기가 우리나라와 참 비슷하다. 우리나라 역시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벌어진 한 살인 사건이 다시금 페미니즘에 주목하도록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물줄기가 아일라비스타에서 일어난 비극이 결코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며 실은 여성이 처한 현실의 적나라한 진실이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라는 걸 사방에 외쳤다. 봉기의 함성 그대로였다. 리베카 솔닛은 말했다. '2014년은 남성의 폭력에 항거하는 페미니즘 봉기의 해(p. 120)'라고. 


 이것이 환경 쪽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발걸음을 바꾸었다. 환경을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에 대한 열정과 똑같은 크기로 페미니즘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 순간을 몇십년이나 기다리고 있었고(p.124) 마침내 타오른 그 불길을 언제까지나 타오르게 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이번에 나온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는 그런 마음의 산물이었다. 보다 인문학적이었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달리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더 많이 다룬다. 앞의 책이 총론이라면 이번 책은 각론 같은 느낌이랄까?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는 1부, '침묵이 깨어지다'와 2부, '이야기를 깨뜨리다'로 이뤄져 있는데, 제목 그대로 1부는 2014년을 기점으로 여성들의 침묵이 깨어진 것과 관련한 부분들을 다루고 있고 2부는 그동안 여성 위에 군림하고 있었던 남성의 이야기에 맞서 2014년에 출현하여 이제 하나의 점이 된 여성의 목소리를 어떻게 남성의 이야기 못지 않은 이야기로 만들어 갈 것인가를 보다 구체적인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에 오직 이 책을 위해 리베카 솔닛이 쓴 '모든 질문의 어머니'가 서문 격으로 나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가 무엇인지 부각시켜 준다.


 아무래도 이 책의 중핵이라 할 부분은 '모든 질문의 어머니'와 1부 맨 처음에 나오는 '침묵의 짧은 역사'가 될 듯 하다. '침묵의 짧은 역사'에서는 그동안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에게 가해 온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며 왜 여성들이 그 침묵을 적극적으로 깨뜨려야 하는지 알려준다.


 당신이 여자로서 어떤 노선을 취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분야로 진출한 경우 괴롭힘은 어차피 따라붙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한 내용이 아니라 당신이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괴롭힘을 끌어들인다.(p. 90)


 이런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거부하고 꾸준히 목소리를 내었던 여성들이 있었기에 그래도 지금은 과거에 말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고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하는 등 변화를 일으켜 왔다. 특히 여성과 관련하여 오늘의 세상이 진전한 게 있다면 모두 그 목소리들이 만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 힘 닿는 데까지 진실을 말하는 일,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지를 아는 일, 특히 과거에 침묵당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 수많은 이야기가 서로 들어맞거나 갈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혹시 우리가 가진 특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서 특권을 없애거나 그 범위를 넓히는 일. 이 모든 일이 우리가 각자 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만든다.(p. 117)


 그리고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것을 당당하게 할 수 있도록 필요한 태도를 '모든 질문의 어머니'는 말해준다. 그것은 현재 상태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상식으로 굳어진 것도 진리는 아니며 아직은 잠정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여진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베카 솔닛은 행복도 달리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행복은 무엇보다 질문이 없는 상태인 까닭이다.


 요즘 우리의 행복에 대한 집착은 이런 다른 질문들을 던지지 않으려는 방편일 지도 모른다. 우리 삶이 얼마나 광활할 수 있는지, 우리 노력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 우리 사랑이 얼마나 넓을 수 있는지를 모른 척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p. 27)


 그렇지 않아도 원래 낙원이라는 단어의 어원 또한 산크리스트어로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정원이라고 한다. 이렇게 행복이든, 낙원이든 실은 누군가 '여기까지다' 하고 한계를 지어놓은 것 안에서의 안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동물들 처럼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이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라서 하는 말인데 여기서 질문은 이중적 지위를 갖는다. 하나는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사실 낙원의 벽과 같다. 질문 받는 여성에게 자기만의 고유한 주체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 여성을 사회가 규정한 규격화된 정체성에 채집한 곤충처럼 고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성이 흔히 받는 질문으로 들고 있는 '아이는?'  못지않게 여성이 반복적으로 받는 질문이 또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일을 하면서 육아는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이다. 그런데 남편에게는 누구도 묻지 않는다. 이 질문은 오직 여성에게만 행해진다. 왜 남자는 그런 질문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되고 또 그런 것이 당연시 되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기엔 합당한 이유가 없다. 당연히 의심을 하고 질문이 되어야 하는 사항인 것이다. 이렇게 질문은 다르게 사용된다. 여성이 받는 질문은 간접적인 정체성의 강요인 경우가 많지만 여성 스스로 제기하는 질문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벽을 초월하려는 탈주인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이러한 의심과 질문을 소중히 한다. 모두 여성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을 형성하며 지속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2부에 나오는 소설 '롤리타'와 영화 '자이언트'에 대한 글은 그 의심과 질문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모습이기도 하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는 읽어보면 바로 느낄 터인데,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후속작 느낌이 강하다. 그 책과 똑같이 여러 지면에 발표한 글들의 모음이며 페미니즘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책이 아나 떼레스 페르난데스의 그림들을 실었듯이 여기에도 리베카 솔닛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빠스 데 라 깔사다의 그림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그러니 아직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을 읽지 않았다면 이 참에 둘을 같이 묶어서 읽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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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12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에서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는 서양의 세계 제패의 힘은 ˝질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건 매우 의미심장한 말인데 우리는 흔히 퉁쳐 ˝이성˝의 힘을 강조하지만 좋은 질문, 의문을 갖고 제시하고 행동에 담지 않는다면 이성도 고약한 똥덩어리일 수밖에 없다는 걸 공감하게 되죠.

ICE-9 2017-09-13 20:53   좋아요 0 | URL
앗, AgalmA 님도 그 책 읽으셨군요. 저도 읽었답니다.^^ 전 알쓸신잡이 한창 방송할 때 읽어서 그런지 책에서 자꾸 알쓸신잡이 연상되더라구요. 아무튼 꽤 재밌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질문과 의문에 대해 하신 말씀, 적극 공감합니다. 살아가면서 더욱 정답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핑루의 새로운 작품이 이렇게 나오다니, 반가웠다.

 작가로서의 경력만 벌써 30년이고 대만에서 아주 유명한 작가이지만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그녀의 작품을 보기가 힘들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나온 그녀의 작품은 단 두 편. 하나는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데뷔작 '옥수수 밭에서의 죽음'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고 다른 하나는 쑨원의 아내인 쑹칭링의 삶을 그린 '걸어서 하늘 끝까지'이다. 둘 다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기에 '핑루'라는 이름을 뇌리에 새겨둘 수밖에 없다.


 나도 그랬다. 작가에게 매력을 느껴 그녀의 더 많은 작품을 보고 싶었지만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 이렇게 2015년에 나온 '검은 강'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으랴! '검은 강'은 그리 늦지 않게 우리에게 소개되어 더욱 기뻤다. 지금까지 나온 핑루의 소설들은 늦어도 너무 늦게 우리에게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옥수수 밭에서의 죽음'은 원래 83년에 나왔다. 그리고 '걸어서 하늘 끝까지'는 95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2013년과 2014년에서여 소개되었다. 늦어도 너무 늦은 것이다. 그것도 '걸어서 하늘 끝까지'가 먼저 소개되어 어느 정도 반향을 얻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옥수수 밭에서의 죽음'마저 만나지 못 할 뻔했다. 자꾸 이렇게 책과 상관없는 사설을 늘어놓은 것은 '검은 강'을 읽고나니 더욱 그녀의 작품에 대한 허기를 느끼게 되는 탓이다. 이제 또 한동안 볼 수 없을테니, 왜 이렇게 핑루의 작품이 많이 나오지 않는 거냐고 이 자리를 빌어서나마 하소연 할 밖에.


 사실 '검은 강'의 스타일은 '옥수수밭에서의 죽음'과 '걸어서 하늘 끝까지'와 많이 닮았다.

 이미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소설이 시작하여 그 이유에 대해 탐문해 나가는 건, '옥수수밭에서의 죽음'과 닮았다. 그리고 사건에 관계되는 자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두 사람을 택해 서로 번갈아가며 화자 역할을 하는 것은 '걸어서 하늘 끝까지'와 유사하다. 이처럼 '검은 강'은 스타일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핑루의 서술 스타일이 이미 데뷔 때부터 완성되었으며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이들은 핑루를 말할 때 꼭 여성 작가라는 것을 밝히기도 한다. 그것은 그녀의 글 쓰는 스타일 때문으로 핑루는 자신의 글에서 철저하게 여성적인 면모를 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글이 어떤 성별로 다가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글쓰기 근간을 이루는 것은 저널리즘이다. 그것은 그녀가 오래도록 저널리스트로 일한 것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또한 그가 작품을 형성하는 중요한 뼈대가 되기도 한다. 핑루는 언제나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나 존재했던 인물에 대해 작품을 쓴다. 실제 사건 그대로 다루지는 않지만 그래도 출발은 어디까지나 정말로 발생한 사건이며 실존 인물이다.



 '검은 강' 역시 그러하다.

 이 소설은 대만의 신베이시에서 실제로 일어난 '마마하우스 커피점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커피점의 여자 점장이 단골이었던 노인과 그의 아내를 먼저 커피에 약을 타 마시게 하여 의식을 잃게 한 뒤 강으로 끌고 가 칼로 살해한 사건으로 범인이 여성이라는 점과 범행의 잔혹함 때문에 대만 사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그 사건을 두고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다. 소설가는 보통 이렇게 중요한 논란거리가 되어버린 사건에 더더군다나 자신의 작품으로는 발을 담그지 않으려 한다. 이런 논쟁에 뛰어드는 경우, 그것이 아무리 소설이라 하여도 작품을 통해 아무래도 특정 태도를 보이게 마련이니 어떻게든 논쟁의 불길이 자신에게 옮겨붙기 때문이다. 작가로선 얻는 것은 적고 잃을 것은 많은 행위이다. 그러나 핑루는 과감하게 뛰어든다. 이 사건의 2심 판결이 2014년 9월에 났으니, 핑루는 소설로 논쟁에 거의 현재형으로 참여한 것이다. 그것도 모두가 괴물로 손가락질하는 자의 내면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말이다. 찬찬히 그리고 깊게. 이런 식의 재현이 많은 원성과 비난을 부를 것을 능히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핑루는 그토록 대담하다. 그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문학적 신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여론은 때로 언론의 부추김을 입어 감정적이 되어 편향된 시야를 가지기 쉽다. 고루 다 들여다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단정 지어 버리는 어리석음으로 한 인간 또는 가족의 삶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 달리 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주고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였다면 지켜질 수도 있는 삶이었다. 특히나 대만은 오래도록 독재국가였다. 거기다 장제스에 의해 원래 그 땅에서 살았던 원주민이 가혹한 차별을 당했다. 누군가의 자의적 판단으로 사람들의 소중한 삶이 무참히 짓밟히는 게 허다하게 일어났다. 핑루는 그것을 목격했다. 그러니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그 삶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달리 볼 수 있는 시야를 자신이 열어주어야겠다고. 여기 당신들이 쉽게 짓밟는 발 아래 그 자체로 존중되고 헤아림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어야 겠다고.

 바로 그런 신념의 체화(體化)가 핑루의 소설이다.


 그러므로 핑루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쫓는다.

 그녀가 언제나 결과보다 이유에 천착하는 것도 사람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기 위해서다. 그는 묻는다. '왜 그녀는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가? 어째서 그들은 그녀의 희생자가 되어버렸는가?'. 핑루의 탐침은 나침반의 자침이 언제나 북극을 가리키듯 거기서 떠날 줄을 모른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그녀는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담아내려 한다 '걸어서 하늘 끝까지'에서 쑨원과 쑹칭링의 삶을 여과없이 그렸던 것과 마찬가지다. 핑루의 작품은 언제나 전기(傳記)의 성격을 지닌다. 자신이 아는 것과 원하는 것에 비추어 자신이 담고자 하는 타인의 삶을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 것이다. 핑루는 자신이 그리는 인물을 독자가 가급적 투명하게 만나길 원한다. 작가의 시선이 독자의 시선이 되지 않도록 그는 그저 단순한 매개자로만 남으려 한다. 혹시 독자들이 자신의 시선에 오염될까봐 독자가 여러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실제에서 그대로 가져온 정보들을 병기하기도 한다. '검은 강'도 그러하다. 우리는 여기서 챕터가 하나 끝날 때마다 그와 관련된 실제 사건에서의 목소리들을 보게 된다. 피고인이나 피해자 혹은 그들의 지인 또는 언론 보도나 댓글에서 나왔던 말들을 말이다. 그런 식으로 핑루는 비록 자신의 손 끝에서 창조된 인물이지만 그 진정한 초상은 독자 스스로 구현하도록 이끈다. 그리하여 그 인물의 삶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도 작가가 아니라 독자가 할 수 있도록.

 이런 식으로 핑루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한다.


 우리의 문화는 인성이라는 의제와 감추어진 동기에 깊이 파고드는 것에 흥미가 없습니다. '악한 사람'의 동기를 파헤치는 것을 시간 낭비로 치부하죠. 살인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일찌감치 대중에게 공개 처형당해 일벌백계의 본보기가 되거나,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만으로 '선한 사람'이라는 보루 안에 안전하게 숨길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검은 강'은 비록 소설이지만 '악한 사람'을 변호하는 것, 또는 죽은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게 만들어 불필요한 상해를 입히는 것으로 오인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소설이 사건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하고, 인성이라는 문제에 회색 지대를 남겨 출구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p. 290 ~291)


 제목의 '검은 강'은 부부가 살해된 단수이허 기슭에 있는 강을 뜻하지만, 제목의 의미는 거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검은 강'은 핑루가 바라보는 사회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그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타인의 삶을 자신의 삶만큼이나 중하게 여기지 않기에 타인의 삶을 편향되게 바라보는 것도, 섣불리 단죄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사회이다. 그래서 '검은 강'이다. 그 어떤 삶도 자신만의 고유한 빛을 온전히 지니지 못한 채, 사람들의 무시와 단정 속에 그들의 검은 빛으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검은빛은 모든 빛을 자신의 색깔로 빨아들인다. 그들의 규정이 곧 진실이 되는 것이다. 핑루는 그 검은 강에 빛의 너울을 자아내려 한다. 모두의 삶에 저마다 지니고 있는 빛을 되찾아 주는 것이다.


  '검은 강'은 그런 마음으로 가득하다.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태도로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든 타인에게 강요하려 드는 이런 선동의 시대에선 더욱 소중해질 수밖에 없는 마음이다. 핑루의 마음이 여전히 거기에 머물러 있어 반갑다. 그 마음을 더 많이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현대문학이 그렇게 해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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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9-01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핑루 작가의 다른 책들도 번역이 돼서
나왔으면 싶네요.

아마 잘 팔리진 않겠지만.

ICE-9 2017-09-02 02:04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로또라도 당첨된다면 마구 구입해 시장 좀 만들어 줄 텐데요.. ㅠ ㅠ
 
절망 독서 - 마음이 바닥에 떨어질 때, 곁에 다가온 문장들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가시라기 히로키의 '절망 독서'는 고정관념을 허무는 책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독서란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라 여길 겁니다. 당연히 절망처럼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독서도 불가능하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가시라키 히로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절망하고 있을 때야말로  독서를 통해 견뎌나가야 한다고 말이죠.


 '인생 각본'이란 용어가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 용어라고 하는군요.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무의식중에 자신의 미래 삶에 대한 각본을 쓰고 있다는 이론을 뜻하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살 거야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바로 '인생 각본'이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스스로 설정하는 자신의 인생 전체에 대한 비전 같은 거죠. 그러나 우리네 삶이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무수한 변수로 넘쳐나는 이상, 부득불 그 인생 각본을 수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자의로 수정하기도 하지만, 외부의 강요로 수정해야만 할 때도 있지요. 



 그런 순간을 맞이할 때, 우리는 무엇의 도움을 얻어 각본을 고칠까요?

 물론 스스로 잘 해낼 때도 있습니다만 어떻게 수정해야 할 지 도무지 막막하여 아무 것도 못할 때도 반드시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나 하고 타인의 각본을 들여다 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그러한 우리의 성향을 두고 '모델론'을 펼친 바 있죠.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삶을 보여준 인물이 있다면 그것을 모델로 하여 그를 닮아 살아가는 것으로 닿고자 한다고 말이죠. 기독교의 예수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처럼 우리도 인생 각본을 어떻게 고쳐야 할 지 모를 때 타인의 각본을 모델로 하기 마련입니다. 그 때 어떤 타인의 각본을 보고 어떻게 수정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다 현명하게 타인의 각본을 참조해야 하는데, 저자는 그것이 절망이라면 그 절망을 제대로 보여주는 독서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제목도 '절망 독서'입니다. 왜냐하면 공감이야 말로 가장 커다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그 자체만으로 큰 구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p. 55)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자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가시라기 히로키는 좀 특별한 저자입니다. 왜냐하면 더없이 창창한 나이인 스무 살 때 의사로부터 평생 낳지 않는 병이란 말을 들은 난치병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이 계획한 모든 미래가 사라졌습니다. 그야말로 난치병이라는 외부 요인 때문에 인생 각본을 급격히 수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자신에게 이롭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다정하게 격려를 하면 오히려 이제 자신에게 없는 그의 건강함만 더 부각되어 그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그가 위안을 얻은 곳은 오로지 같은 아픔을 겪고 같은 고뇌를 토로하는 쪽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똑같은 아픔에서 비롯된 경험들이 오늘의 자신을 인정하고 내일에 지속될 수 있는 힘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처럼 공감의 힘은 그가 몸소 느낀, 누적된 삶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알고 나면 아무래도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 설득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망했을 때는 그 기분에 다가와주는 음악이나 이야기와의 만남이 우리를 구해줍니다. 우선은 마주하고 있는 절망적인 기분에 푹 빠질 것. 빠질 때는 바닥까지 가라앉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극복을 위해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p. 61)


 독서가 그것을 도와줍니다.

 '절망 독서'가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절망이 곧바로 극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모두에게는 저마다 치유에 드는 시간들이 다르기 때문이죠. 아주 짧은 사람도, 아주 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길이를 미리 알 수는 없습니다. 한 개인에게 다가온 절망 역시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절망 속에서 적절한 치유의 시간을 아는 것은 단 하나, 억지로 치유하려 들지 않고 그냥 자신을 맡기는 것 뿐입니다. 바다 위의 표류물이 천천히 떠다니다 언젠가 해변에 닿듯이, 그렇게 언젠가 갈림길이 나타나 서로에게 작별을 고할 때까지 절망과 동행해야 합니다. 천천히, 산보 하듯이. 저자에 따르면 절망은 완만한 경사의 고원을 천천히 걷는 것처럼 극복해야 한다는군요. 그래서 독서입니다. 읽는 것은 무엇보다 느리고 꾸준한 행위니까요. 한없이 느리게 흐르면서 뚜렷한 변화도 없는 절망의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느리면서 서서히 사유 속으로 침잠하게 만드는 독서만큼 어울리는 것도, 기댈만한 것도 없습니다. 하여 저자는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죠. '절망의 시간일수록 책을 벗하라!'고.


 당신도 절망의 시간을 보내시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절망 독서'의 문을 한 번 두드려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차분하게 진행되는 꽤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 속에서 뜻밖의 치유 방법을 얻게 될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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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07 0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설의 팡세>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에밀 시오랑의 글들이 제 절망을 대신 말해주고 있어서 많이 의지가 됐었죠. 책은 배움보다 제게 그런 의미가 더 컸어요. 지금은 배울 게 너무 많아 절망스러움요ㅎ;;;

ICE-9 2017-09-06 14:42   좋아요 1 | URL
배울게 많아 절망스럽다는 말엔 저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아, 알면 알수록 더 깊어지는 앎에 대한 허기라니. ㅠ ㅠ 그래서 식자우환이라고 하는 걸까요^^;
말씀하신 에밀 시오랑의 책은 아직 접해보지 못했는데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네요.^^

ICE-9 2017-09-06 14:42   좋아요 0 | URL
배울게 많아 절망스럽다는 말엔 저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아, 알면 알수록 더 깊어지는 앎에 대한 허기라니. ㅠ ㅠ 그래서 식자우환이라고 하는 걸까요^^;
말씀하신 에밀 시오랑의 책은 아직 접해보지 못했는데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