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큼 가까운 프랑스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
박단 지음 / 창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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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라고 창비에서 나오는 책이 있다.

 한 나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주는 책인데,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 방면에서 최고의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이 시리즈를 중국 편을 통해 처음 만났다. 중국으로 여행 가게 되어 읽어봤던 것인데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현재 정치 상황을 망라 하면서 쉽고 자세하게 알려주어 중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다. 그래서 시리즈에 신뢰가 생겼는데 이번에 프랑스 편이 나오니 손에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프랑스의 대선은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기존 정당이 하나도 대선 결선 투표에 참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모두 보수 우익만 참가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정황으로 비록 그들의 지지율이 그리 압도적이지 못하였다고는 해도 확실히 프랑스의 정치 지형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어쩌다 이런 프랑스가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그러다 새삼 내가 프랑스에 대해 뭘 알고 있는가에 생각이 미쳤고 이번 기회에 프랑스에 대해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있던 차에 '이만큼 가까운 프랑스'가 나와 준 것이다.



 당장 들여다 보았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노동 역사를 전공으로 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지금은 서강대 사학과 교수로 있는 박단이 책을 썼다. 책은 모두 6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각 장 하나가 프랑스의 사회, 정치, 지리, 정치경제, 문화, 한불관계를 각각 다룬다. 쉽게 한 나라의 모든 부분을 고루 살펴본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중국 편이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 편도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했다. 첫 부분에 나오는 언제나 하나의 공화국을 지향하기 때문에 프랑스에선 다문화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부터 그랬다. 프랑스 하면 톨레랑스라서 다문화 정책이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니 놀라웠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중요한 것은 톨레랑스 보다 연대를 뜻하는 '솔리다디테'라고 한다. 그렇게 자신이 또 하나의 프랑스 자체라고 여기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평등에 대한 생각도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커서 사회 보장 제도가 일찍 자리잡았고 적극적으로 펼쳐졌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인물 하나를 만났는데, 바로 '아베 피에르'다. 2차 대전 때문에 프랑스에 주택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집이 없어 겨울에 얼어죽는 사람이 많았는데, 당시 빈민 운동을 하고 있던 아베 피에르는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것보다 얼어죽을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면서 주인의 허락 없이 빈집에 들어가는 운동을 벌여 프랑스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시리아에는 사람이 없는 빈집이 있으면 누구나 들어가 제 집처럼 살 수 있는데 프랑스에도 그런 것을 추구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게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렇게 솔리다디테가 강했던 프랑스가 여성에겐 어찌된 일인지 야박하게 굴었다. 페미니즘이 프랑스에서 처음 생겨난 말이라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1870년 경에 생겨난 이 말은 원래 여성적 특징을 보이는 남성 환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한 나라답게 여성이 들고 일어난 것도 가장 빨랐다. 프랑스 혁명 때 여성도 남성 못지 않게 봉기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1789년 10월, 파리 시장에 있는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베르사이유 궁까지 걸어가 왕을 접견하기도 했었다. 이런 일들이 당시 프랑스 남성에게 여성을 새로이 보게 만들었으나 여성에 대한 처우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혁명을 주도했던 급진 세력들은 오히려 여성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고 정치를 하지 못하도록 주도했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물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오직 남성만을 위한 것이며 여성에 대한 것은 빠져 있다고 비판하면서 스스로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한 올랭프 드구주는 프랑스 혁명 때 남성 못지 않게 적극적으로 활약한 유명한 혁명가였으나 결국 로베스피에르와 마라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렇게 여성 혁명가의 입을 막은 혁명 세력은 아예 여성에겐 인간이 타고난 권리가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아내는 자기가 번 돈 조차 남편의 허락 없이 쓸 수 없는 등 여성을 철저하게 남성의 소유물로 만들어 버렸다.


 책엔 올 컬러의 사진 자료와 'Q&A'가 있어 더욱 이해를 돕고 부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여기는 들라크루아의 유명한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그림으로 그림 속 여인 마리안이 실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혁명의 상징으로 만든 가상의 인물이란 걸 밝히고 있다. 여성을 그만큼 천시했으면서도 왜 상징은 여성으로 삼은 것일까? 혁명 주도 세력은 당시 공화국 개념이 생소한 민중에게 그들이 세우고자 하는 공화국이 좋은 것이라고 알릴 필요가 있었고 민중의 문맹률이 높았던 상황에서 이미지로 다가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공화국 이미지를 민중에게 친근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프랑스 국가는 여성으로 지칭하는 게 언어 관습이었으므로 혁명의 상징을 여성으로 한 것이라 한다.


 계몽 사상의 가장 밝은 빛이던 프랑스 혁명에도 이런 어둔 그늘이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이렇게 온전히 밝지만은 않은, 빛과 어둠 사이를 일렁이는 나라였다. '이만큼 가까운 프랑스'는 바로 그런 면모를 깊게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바로 그 불안한 일렁거림이 오늘의 극우 마리 르펜과 마크롱만의 대선 결선 투표를 자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 편이 그랬듯, 프랑스 편도 프랑스에 대해 전보다 훨씬 깊이 이해하게 만들었다.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진다. 나는 이 책을 가급적 청소년들이 봤으면 좋겠다. 청소년이 읽어도 이해에 전혀 무리가 없게끔 쉬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교과서나 신문 보도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폭 넓고 상세한 내용 때문에 한 나라를 훨씬 깊이 이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누구나 오늘날의 세계를 너나 없이 연결되는 글로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다른 나라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 우리나라에 일어나는 일만큼 관심을 갖는 이는 별로 없고 강 건너 불 구경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한 나라의 일이 마치 나비 효과처럼 다른 나라로 파급 되는 것을 우리는 참 많이 목격한다. 그런 면에서 다른 나라의 일도 나의 일처럼 관심 가질 필요가 있다. 언제 우리 일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일을 이해하는데 있어 아는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무엇보다 그 나라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만큼 좋은 것도 또 없다. 거기에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는 좋은 안내자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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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살아남기 - 우리가 몰랐던 신기한 전쟁의 과학
메리 로취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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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과학 하면 얼른 뭐가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대부분은 확증 파괴대량 살상이 주된 목적인 병기 제작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메리 로치의 책, '전쟁에서 살아남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전쟁 과학의 면모를 보여줍니다적을 무찌르고 승리해서 살아남는  아닌정말로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전쟁 과학의 모습을 말이죠지금까지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했고 접해보지도 못했던 분야를 열어주는 책이라 읽으면서 사실 놀랐습니다. '아니이런 것까지 과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단 말이야그것도 오직 병사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하고 말이죠그야말로  책은 좁은  시야를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오늘의  연구와 실험이 전쟁에서 하나의 목숨이라도  살릴 것이라 믿으며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연구에 매진하는 과학자들을 보면서 세계가  생각보다는  희망찬 곳이라는  믿지 않을 수 없더군요. 이처럼 이 책은 우리가 전혀 몰랐던 전쟁 과학의 분야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것과 연관된 여러 과학적인 지식마저 습득하도록 하며 어느덧 세계와 인류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달리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워싱턴 포스트지가 미국에서 가장 유쾌한 과학 저술가로 평가한 메리 로치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인 것입니다.



 과연 저자에 대한 '워싱턴포스트지의 평가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책은 피부와 온도 그리고 감각과 설사  여러 분야의 과학적 지식을 망라하고 있지만 결코 어렵다거나 지루하지 않습니다작가의 유머러스한 문장들이 곳곳마다 들어차 유쾌하게 읽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 책을 중간에 덮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 같네요. 왜냐하면 책에 담긴 내용이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했던 것들로 가득이라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었거든요. 진정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런 기막히는 연구가 행해지는 것을 몰랐을 것이며 우리가 무심히 여겼던 것들이 의외로 인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겁니다. 그런 것을 수시로 던져주니 아무래도 책에서 눈을 떼기가 어렵더군요. 


 너무 칭찬만 하는  아니냐구요하지만 과장이 아닌  어쩌죠감히 법정에서 선서도   있을만큼 제겐 좋은 책이었습니다올해의 가장 좋은 책으로 뽑을 수도 있을  같습니다.

 

  페이지부터  책은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아 버립니다여러분 대포 존재한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닭을  대포입니다. 물론 죽은 닭이죠. '아니, 그래도 그렇지 불쌍한  가지고 무슨 만행이야?' 하면서 삿대질을 하기 전에, 왜   대포가 필요한지  이유를 얼른 말씀드리도록 할게요혹시 영화 '인디아나 존스' 3 보셨나요 코네리와 해리슨 포드가 부자지간으로 나오는 영화 말이죠거기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인디아나 존스 부자가 해변에서 전투기에게 공격을 받습니다주인공에겐 달리 대항할 수단이 없는 상황   코네리가 우산을 활짝 펼치고는 갈매기 무리에게 달려가 하늘로 날아오르도록 합니다마침 전투기가 다가오는 시점이었습니다갑자기 전투기는 비상한 갈매기 무리에 둘러싸이고 많은 갈매기들이 전투기에 부딪힙니다수많은 갈매기와의 충돌로 결국 전투기는 추락하고 맙니다이건 절대 영화적 과장이 아닙니다실제로 새들에게 부딪혀 비행기가 추락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고 합니다. 전쟁 중에는 더 그렇구요. 그래서 비행기를 새떼들과 부딪혀도 추락하지 않게끔 만들어야 하는데 강도의 실험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  대포인 것입니다몸무게 1.8킬로그램의 닭을 시속  65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쏘아 과연 비행기가 견딜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것이죠하하그런 닭대포라니. '정말 희한한   있구나!'  만하지 않습니까? 세상 어딘가엔 지금도 죽은 닭이 펑펑 날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닭 대포의 실제 모습.


 이런 것들이 여기엔 잔뜩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 영화에서 전투 중에 위생병이 너무나 당황하여 부상병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가 왕왕 있습니다. 관객들은 그걸 보면서 인지상정을 여길 뿐, 놀랍게도 그런 것을 막는 훈련이 실행되고 있는 것은 모르겠죠. 영화 감독까지 데려와 무대와 각종 특수 효과 장치로 실제에 버금가는 치열한 전투 상황을 연출하여 위생병이 그런 상황에 심적으로 내성을 가지도록 만드는 훈련이 말이죠. 그리고 또 전쟁 과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연구되는 것 중 하나가 인간의 설사라는 것도 알 수 없을테죠. 역사적으로 전쟁 중에 적군의 총알에 맞아 죽는 병사 보다 이질이나 설사로 죽는 병사가 더 많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1848년 멕시코 전쟁 때 미국인 1명이 전투로 사망할 때마다 7명이 병으로 죽었으며, 대부분은 설사 때문에 죽었다. 미국 남북 전쟁 때 설사나 이질로 죽은 병사는 95,000명이었다. 베트남 전쟁 때는 말라리아에 걸려 입원한 군인보다 설사병으로 입원한 군인이 4배가 더 많았다.(p. 178)


 세계보건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연간 220만명이 설사로 사망한다고 합니다. 질질 싸는 것도 허투루 볼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설사 근절에 여념이 없는 한 학자는 오늘도 군대의 점심 시간에 밥을 먹고 있는 병사들의 테이블을 돌며 "왜 설사를 참고 견디나?"고 묻고 다닌다고 합니다. 병사들이 지사제를 사용하면 4~12 시간 정도면 설사가 멈춰 정상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그걸 사용하지 않고 평균 3~5일 동안 설사를 참기 때문이죠. 그럴수록 안 좋은 것도 모르고 말이죠.


 냄새 폭탄은 또 어떻습니까? 2차 대전 때 미국은 일본 장교들에게 사용할 냄새 폭탄을 만드는데 꽤 심혈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일본인은 소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보고 있어도 아무데나 눌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데 유독 대변에서는 그런 걸 많이 느낀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런 대변 냄새가 나는 소형 분무기 같은 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주로 일본 장교에게 뿌려 냄새 때문에 부하들이 장교를 기피하게 만들고 장교 역시 부하들 앞에 나서지 못하게 만들 작정으로 말이죠. 네, 이런 것도 미국은 아주 진지하게 연구했습니다. 그것도 엄중한 기밀 프로젝트로 말이죠. 이름도 있었습니다. <누구, 나?> 폭탄이라는. 


 뭐든 깊이 들어가면 진지함과 개그의 차이 같은 건 없어져버리나 봅니다. 이런 내용들이 연타로 나오니 어떻게 중간에 덮어버릴 수 있겠어요? 거기다 메리 로치는 실제 그 현장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 현장 체험기가 또 재밌습니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의 냄새도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냄새를 잘 판별하여 병사가 스트레스를 받기 전 개입할 것을 목적으로 스트레스 냄새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인데, 여기에 메리 로치도 일조를 했습니다. 자신의 겨드랑이 냄새를 기부한 것이죠. 이러한 생생한 체험기까지 도처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더욱 '큭큭' 하면서 읽었습니다. 


 바야흐로 명절이 코 앞입니다. 선물처럼 한껏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 중이신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해 드립니다. 가진 정보가 남달라서 지식의 범위를 확장시켜 줄 뿐 아니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며 재미도 충만하기 때문에 연휴의 편한 시간을 보내기에 딱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야말로 한 번 거닐어 볼만한 지식의 신세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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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1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5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암막의 게르니카
하라다 마하 지음, 김완 옮김 / 인디페이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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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루소 화가가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작품을 두고 두 큐레이터의 치밀한 머리 싸움을 보여주었던 '낙원의 캠퍼스'의 작가, 하라다 마하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암막의 게르니카'란 작품입니다. '암막'이란 검은 장막을 뜻합니다. '게르니카'는 표지에도 나와있듯이, 파블로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이죠. 



 피카소의 고향인 스페인은 한창 내전 중이었습니다. 군부 프랑코가 1933년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화파 정부의 개혁 정책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벌어진 내전이었죠.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하여 에스파니아의 많은 지식인들은 당연히 공화파 정부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의 무력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국가적인 지원을 유일하게 얻을 수 있었던 곳은 프랑스였지만, 프랑스 역시 섣불리 개입했다가 역으로 독일의 침공을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내전과 되도록 거리를 두려 했기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죠. 그러던 1937년 4월 26일. 공화파 지지자들의 거점이었던 '게르니카'를 독일 공군이 무차별 폭격하여 무려 1,600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나고 맙니다. 이런 사정은 2016년에 발표된 영화 '게르니카'를 보면 잘 나와 있으니, 이것을 보시면 게르니카의 비극을 더욱 잘 아시게 될 듯 합니다.


 그 때, 파리에서 만국 박람회 때 발표할 작품에 매진하고 있던 파블로 피카소는 언론을 통해 그 소식을 접하고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조국에서 그토록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으니 당연했겠지요. 자신의 예술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게 될까봐, 아직 공공연히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지 않은 피카소였습니다만, '게르니카 사태'를 계기로 드디어 자신의 생각을 작품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게르니카' 입니다. 세로 약 350cm, 가로 약 780cm의 크기에 모노크롬으로 그려진 게르니카는 스페인관 맨 앞자리에 전시되어 만국박람회를 찾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게르니카의 비극을 생생하게 알리는 동시에 인류가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웅변했습니다. 여기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지요. 하루는 독일군 장교가 게르니카 그림을 보러 와서는 피카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당신이요?" 그러자 피카소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당신들이요." 이 소설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게르니카'는 그렇게 태어났고 이후 내내 폭력과 전쟁을 고발하고 자유와 평화를 염원하는 목소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만국 박람회 전시가 끝난 뒤, 그림의 거처를 두고 파블로 피카소가 한 선택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게르니카'가 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이나 독일 나치의 손아귀로 들어가 그림이 지닌 반전의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도록 아예 그림을 그로부터 절대 안전할 수 있는 미국에다 맡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습니다. '스페인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돌아올 때 돌려달라'고. 바로 이 선택과 당부 때문에 '게르니카'가 가지는 반전과 평화의 상징은 보다 더 확고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다시 한 번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2003년, 콜린 파월이 UN에서 이라크 공습을 개시하며 기자 회견을 연 때였습니다. 콜린 파월은 그 기자 회견을 UN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에서 했는데, 거기엔 '게르니카'가 가진 평화의 목소리를 기리기 위해 '게르니카'의 태피스트리가 원본과 똑같은 규격으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월이 방송이나 보도 사진으로 그 그림이 보이지 않도록 장막으로 가려버린 것입니다. '암막의 게르니카'라는 소설 제목은 바로 이 사건에서 나온 것이죠. 아무래도 전쟁을 선포하는 자리에 강한 반전 메시지가 담긴 그림이 같이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게 좀 꺼림칙했던 모양입니다만 오히려 그로인해 더 큰 논란을 일으키고 더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게르니카'는 다시 한 번 사람들의 뇌리 속으로 들어왔고 자신이 지닌 반전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되새기게 했습니다.


UN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 전경입니다. 원래는 이렇게 보이는 게르니카를 장막으로 가려버린 것이죠. 현재는 없습니다.

 2009년, UN이 건물 보수를 할 때 영국에 이송한 후로 내내 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하라다 마하의 '암막의 게르니카'는 이 두 사건, 그러니까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는 것'과 '파월이 기자 회견 당시 게르니카 태피스트리를 가린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피카소가 직접 등장하는 과거의 사건과 9. 11 이후의 현재가 서로 교차하면서 진행하는 구성인 것이죠. 과거와 현재 이야기 모두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 인물이 있습니다. 모두 여성입니다. 과거에선 실제 피카소의 연인이자 게르니카 작업 모두를 촬영했던 '도라 마르'라는 여성이 중심이고, 현재에선 어릴 때 게르니카를 실제로 보고 그림에 매혹된 뒤로 평생 피카소를 연구했고 9.11 때 사랑하는 남편을 테러로 잃은 후, 더욱 '게르니카'가 가진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뉴욕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요코'라는 여성이 중심입니다. 


 도라 마르는 '우는 여인'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 옆에 있는 그림은 소설에서 언급되는 도라 마르의 초상화 입니다.


 하라다 마하는 도라 마르와 요코를 주축으로 과거와 현재의 게르니카 이야기를 번갈아 전개시키면서 '게르니카'에 얽힌 기구한 사연과 어둔 시대일수록 더욱 잃지말아야 할 예술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스릴러 형식을 취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런 요소는 다소 부족한 편입니다. 그러나 그림 '게르니카'에 관심이 많고 거기에 얽힌 사연들이 궁금하다면, 이 소설은 정말 좋은 벗이 되어줄 듯 합니다. 아마도 하나의 그림이 가지는 의미와 역할이란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는 것만큼은 분명 느끼시지 않을까 합니다.


 거기다 하라다 마하가 왜 하필 지금에 와서 이 소설을 썼는지 생각해보면 더욱 읽어야 할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이 소설은 2016년에 발표되었습니다. 그 때의 일본을 생각하신다면, 하라다 마하가 왜 게르니카를 소재로 소설을 썼는지 그 동기가 어느 정도 짐작되실 것 같습니다. 그 때의 일본은, 물론 지금의 일본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베 정권에 의해 한창 전쟁 가능 국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전쟁 포기가 핵심인, 흔히 말하는 평화헌번 9조를 개정하려고 엄청 노력했었죠. 군비 증강을 통한 일본 재무장이 여기저기서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하라다 마하는 바로 그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분명한 경고를 보내고 아베 정부의 선동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력화시키기 위해 '암막의 게르니카'를 쓴 것입니다. 하라다 마하에겐 지금의 일본이 바로 전쟁 선호를 위해 게르니카를 가려버린 암막이었던 것이죠. 그러니 소설의 내용 어느 하나 무심히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역시 김정은와 트럼프의 자존심 싸움 때문에 평화가 위협받고 있으니까요. 이런 미치광이 놀음에 현혹되어 섣불리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암막의 게르니카'를 통해 '게르니카' 그림이 가진 의미를 다시금 깊이 돌아봐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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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이유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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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밝은 것은 가장 어둔 그늘을 만들기 마련이다. 한 여름에 불현듯 찾아오는 태풍처럼.

 그렇게 영국에서 팔리는 범죄 소설 중 1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존 리버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 '치명적 이유'는 시작부터 명백하게 대비되는 두 개의 시간을 보여준다. 누군가 죽음으로 가는 시간과 동시에 에든버러의 연중 최고 행사인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모두가 하나되어 웃고 떠드는 동안에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처형당하고 있었다. 머리, 팔꿈치, 무릎, 발목에 한 발씩, 그렇게 여섯 발의 총알을 맞아. 존 리버스는 시체를 보자마자 알아차린다. IRA가 주로 배신자를 처형하는 방식인 '식스팩'이라는 것을.

 누군가 그것을 모방해 자신의 조직을 배반한 이를 처단한 것이다.


 그 처형 방식을 알아보았다는 이유로 존 리버스는 테러 조직 수사를 전담하는 팀으로 차출된다. 자신을 별로 환영하지 않는 그 곳에서 그는 수사해야 한다. 한 편, 그는 리어리 신부에게서 개인적인 부탁을 하나 받는다. 에든버러에서 가장 거칠고 위험한 동네인 '가르-비'에 그 곳 청소년을 선도하기 위해 센터 하나를 만들었는데, 최근 그 센터 운영 방식이 이상해졌다고 한다. '가르-비'는 카톨릭인 구교와 개신교인 신교의 갈등이 극심한 지역으로 적어도 청소년만은 종교적 갈등에서 자유롭도록 만들기 위해 센터를 지었는데 요즘 카톨릭 아이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러니 어찌 된 사정인지 알아보고 이대로 카톨릭 아이들이 센터로 올 가능성이 계속 없다면 운영자에게 폐쇄토록 하라고 리버스에게 당부한다. 그러나 이 일 역시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거친 동네에 사는 아이들답게 아이들이 리더인 데이비 수터를 중심으로 완강히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다. 처형 당한 남자의 신원이 밝혀졌는데, 놀랍게도 전작에서 리버스가 감옥으로 보낸, 리버스에겐 배트맨의 조커라고 해도 무방할 악당 캐퍼티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캐퍼티는 즉시 부하들을 보내, 아들을 죽인 범인의 정보를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자신이 직접 복수하겠다고 말이다.


 이러한 삼중고 속에서 리버스는 사건 해결에 나선다. 그러면서 목도한다. 스코틀랜드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것도 아주 치열한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적 갈등을.

 그 갈등은 리버스를 군대에 가도록 만든 1969년에 처음 일어났던 모습 그대로였다.


 어둠 속에서 불붙은 유리병들이 날아다녔다. 넝마조각으로 만든 심지에서는 휘발유가 튀었다. 화염병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증오는 웅덩이가 되어 번져나갔다. 사적 감정이 담긴 공격은 아니었다. 대의명분을 위한 행위였을 뿐.

 다 자신들의 명분이 키운 소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나름의 보호 방식, 검은 택시들, 총기 밀반입, 이상과는 많이 동떨어진 사건들. 그 모든 것이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p. 117)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라졌다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건 그저 축제의 환한 빛에 잠시 가려졌을 뿐이었다.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어쩌면 축제야말로 기만이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축제의 빛에 현혹되어 실존하는 갈등을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그렇게 해서 뭐가 남았나? 아무 것도 없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증오도 그대로였고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도 그대로였다. 균열은 그런 기만의 축제로 메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증거가 바로 식스팩 처형을 당한 남자의 시신이었다. 이제 존 리버스는 그것이 지금까지 항존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작가가 소설 속 수사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다. 혐오와 증오로 상대방을 죽음까지 몰고 가는, '치명적 이유'를.


 "우리가 여기 온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죠?" 그가 물었다.

리어리 신부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 세상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그마한 어떤 변화라도 이끌어내기에는 우릭 너무 미약해요."

"지금 주머니에 폭탄을 숨기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요. 우리 모두는 이곳에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어요."

"폭탄 테러범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를 막을 방법을 얘기하는 거예요."

"경찰로 살아가는 것 말이죠?"

"솔직히 저도 제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p. 34 ~ 35)


 개인적인 느낌으론, 지금까지 나온 존 리버스 시리즈 중에 가장 사건의 규모가 크고 스릴이 넘치는 것 같다. 처음부터 폭발하는 장면이 나오더니 후반에 가면 이야기가 아예 질주한다. 이 시리즈의 첫 작품은 한없이 우울하고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한 마디로 꽤나 정적이었다. 그러나 '치명적 이유'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완전히 역동적이다. 존 리버스만 해도 그렇다. 우울에 젖을 겨를도 없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부서를 옮기고 도시를 오고가며 다른 여자도 만난다. 죽는 사람도 너무 많다. 살해 방식도 몹시 잔인하다. 여기저기서 갈등이 터져 나온다. 리버스는 지금 사귀는 여자 친구와 갈등을 일으키고, 경찰 내 외부도 갈등이 일어나며, 캐퍼티까지 가세해 치열의 강도를 높인다. 차갑다는 것은 분자의 움직임이 적다는 뜻이다. 뜨겁다는 것은 분자의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것이다. 너무나 움직임이 많기에 당연히 이 소설은 뜨겁다. 나로썬, 이토록 뜨거운 존 리버스는 처음이었다. 마치 영화 'LA 컨피덴셜'을 보는 기분이었다. 새로웠고 그래서 좋았다. 어쩌면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뜨거운 갈등인 종교 갈등을 다루고 있기에 소설마저 그 갈등의 온도를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존 리버스는 과연 치명적 이유를 찾는가? 찾는다. 그러나 스포일러가 되기에 세세하게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이유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존 리버스의 말로 대신할까 한다.


 "난 당신 같은 사람들이 무서워요." 리버스가 냉담한 톤으로 말했다. 진심이었다. 콜록거리는 다드 수터는 열 명의 캐퍼티보다도 훨씬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바뀌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는 타입. 누구도 그의 정신을 건드릴 수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운영진이 모두 퇴근해버린 가게나 다름없었다.(p. 368)


 이 소설에서 존 리버스는 이런 자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죽어버린 것을 뜯어먹는 하이에나처럼, 이미 전쟁은 끝났는데 여전히 전쟁이 있다고 믿으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나라에서도 어버이 연합 노인들이나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혹은 안철수와 같이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오로지 자기만 옳다는 생각에 타인을 위해 자신이 변할 생각은 조금도 않고 무작정 이기려고만 드는 사람들. 내가 입히는 상처와 아픔은 보지 못하고 애오라지 자기가 입은 것만 보는 청맹과니들.

 그것이 바로 죽음을 양산하는 '치명적 이유'라는 것을 화염의 온도 속에서 존 리버스는 깨닫는다. 그건 그대로 리버스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특히 연인 페이션스와의 관계에서.


 이언 랜킨은 재밌게도 리버스와 페이션스의 관계를 통해 여전히 뜨거운 종교 갈등의 본질적인 이유와 그것을 해결하는 대안을 넌지시 암시한다. 소설 초반에서 리버스는 자신의 취향을 자꾸만 바꾸려고 하는 페이션스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 그런데 리버스 자신의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만 소중하며 그걸 곧장 드러내는 변호사 캐롤라인 때문에 아주 난처해진다. 그것을 통해 깨닫게 된다. 사랑이란 자신을 조금씩 더 덜어내고, 타인에게 더 맞춰주는 노력이자 과정이라는 것을. 종교 갈등을 해결하는 게, 본질적인 면에 있어 이 사랑과 그리 다르지 않다. 때문에 소설의 마지막이 페이션스와 함께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뭐, 그건 바로 전작 '검은 수첩'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쩌면 페이션스가 등장한 뒤로, 사실 존 리버스의 이야기의 알맹이란 잠시 그녀를 떠났다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이유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여러 이유로 결별하고 또 재회하니까. 다만 그 사랑을 끝장내는 치명적 이유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적어도 늘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맞춰준다면 거기에 이르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이 소설이 무슨 연애학 개론 같네. 하기사 그렇게 읽어도 상관 없을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읽든 '치명적 이유'는 속이 든든한 느낌을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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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21 2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글에서도 뜨거움과 흥분이 뚝뚝 느껴져서 뭐지, 뭐야 하면서 따라 읽었네요^^

ICE-9 2017-09-26 20:42   좋아요 0 | URL
하하, 제 열기에 감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뜨거움과 거리가 먼 일상인지라 글로나마 한 번 가져보고 싶었어요^^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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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독서란 언제나 의문에서 비롯된다'82년생 김지영' 그랬다지금까지 여성이 당하고 있는 차별과 억압의 현실을 그린 작품은 많았다그런데도 ‘82 김지영 마치 인제야 그런 현실에 처한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작품이 나온 것만 같은 반응을 받고 있었다 책을 읽었던 주위의 많은 여성이 ‘맞아맞아 연발했고 남자도  읽어봐야 한다면서 앞다투어 내게 권했다노회찬 의원이  책을 영부인에게 선물하고 금태섭 의원은 200권을 사서 동료 의원들에게 돌렸다는 보도도 접했다온라인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의 가장 높은 곳을 오래도록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어째서이런 소설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궁금했다아무래도 ‘82년생 김지영만이 가지고 있는 뭔가 새로운 게 있나 보다 생각되었다그것도 압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김지영과 만나야 했다흡사 소설 마지막에 나오는 남성 정신과 의사처럼 그녀의 삶을 읽어나갔다.

 

 일단 김지영의 삶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그녀가 겪은 차별소외부당함두려움외로움우울은 그녀만의 것은 아니었다이런저런 풍문이나 소설 혹은 드라마와 영화로 많이 접해본 것이었다우리나라 여성  누구라도 김지영이   있었다지영의 엄마와 정신과 의사 아내의 삶이 김지영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듯이소설 자신도 그것을 암시하고 있었다간간이 인용하는 통계가 그러했다유독 김지영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그녀의 삶은 사실 우리나라 여성의 삶이 가진 보편적인 양태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그러나 솔직히 고백하건대 역시도, 너무나 낯익은 풍경이어서 따분했어야  텐데도  이국의 땅에 처음  관광객처럼  모든 광경이 아주 새롭게 다가왔다그런  반응이 나조차 낯설었다 그래도 페미니즘 책을  읽은 편이라고 자부하지 않았던가그런데도  이리 처음 들여다보는 것만 같은 기분일까이처럼 소설에 대한 의문은 나에 대한 의문으로 전이되었고 결국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소설은 지금까지 나온 비슷한 주제의 소설과 다른 층위를 재현하기 있기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이 달랐다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위해 거창한 서사를 담지 않았다여성 차별을 이야기하는 소설들은 흔히 남성 중심 사회와의 갈등이나 대립을 전면에 내세웠다그러다 보니 소설은 자연히 일상보다는 사건 중심으로 돌아갔고 그러한 갈등과 대립이 있어야만 보이는 여성 차별의 거시적인 면만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런 위치에 있는 여성만이   있는 특수한 경험이었다그러다 보니 그것과 별로 연관이 없는 대다수 여성은 구경꾼이 되기에 십상이었고 더욱이 그런 위치에 있어야 공감할  있는 갈등과 대립이었기에 자신의 삶과 유리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공감보다는 흥미연대보다는 선망을 낳았다작품 세계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현실을 돌아다 보면 여성이 받는 부당한 차별은 온데간데없고 그런 여성이 되지 못한 자신의 못나고 부족함만 곱씹게 했다.


 그러나  소설은 반대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흔한 일상으로 들어갔다삶의 가장 낮은 층위에 재현의 시선을 갖다 대어 날마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부각했다일상이었고 보편이었기에 우리나라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었고 그래서 누구도 구경꾼으로 있을  없었다모두 억압과 차별을 받는 당사자가 되었다김지영만의 일이 아니라 바로  일이 되었다. 자연히 자신의 못남과 부족함을 되새기도록 하는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응시하도록 만들었다 시선 속에서 그동안 당하면서도 그러 줄조차 몰랐 일들이아픔을 막연히 느낄지언정 미처 언어로 자아낼 수는 없었던 것들이 마침내 얼굴을 찾고 목소리를 가졌다자기의 삶으로 경험한 일이었기에 다른 누구의 말에 기댈 필요도 없었다자신의 언어로 충분히  일을 규명하고 아픔의 연유 또한 구술할  있었다나는 이 소설에 대한 많은 여성의 공감이 바로 여기서 연유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른 누구의 언어도 아닌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통찰하고 증언할  있게 되었다는 것이 공감의 진정한 초상이라고.


 여성이야 그렇다 치고 나는 왜 이 이야기를 새롭다고 느낀 것일까? 그건 지금까지 내가 너무 거시적 차원에만 경도되어 있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흔하게 범하는 생각의 오류가 하나 있다. 바로 거시적 차원의 문제가 해결되면 미시적 차원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오류다. 진실은 오히려 반대다. 미시적 차원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거시적 차원의 문제도 비로소 해결된다. 자신의 삶 속에서, 일상 속에서 내 생각과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거시적 차원 역시 바뀌지 않는 것이다. 억지로 바꾼다 해도 일상적 차원에서 태도 변화와 실천으로 뒷받침 하지 않으면 언제고 다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사회를 바라보면서 어떤 것이 정말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나부터 바꾸어야 한다. 개인, 그가 영유하는 일상이 아무리 작고 사소하더라도 거대한 변화의 파문을 일으킬 소중한 첫 동심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저마다의 삶이 도미노의 첫 조각이다.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을 잊고 있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의 삶, 일상이라는 것을.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작가 역시 그것을 알기에 이처럼 보통의 삶, 일상이라는 미시적 차원으로 들어간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제야 그것을 보았고 여기에 대하여 사실은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영의 할머니나 아버지까진 아니더라도, 나도 지영의 남편만큼은 여자들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도. 나는 그렇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별생각도 없이 얼마나 쉽고 태연하게 남발해 왔던가? 소설 속 어떤 순간은 내가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적도 있어서 더 남모를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그런데도 여태껏 잘못한 것을 몰랐다니. 진짜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런 사소한 편견,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차별, 습관처럼 내뱉는 말들, 잘못이라는 걸 모르기에 무한정 쌓이기만 하는 이것들이 결국 여성에게 불필요하고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는 가부장제 질서를 떠받치는 토대가 되니까 말이다.


 하루는 심야 상영을 보고 밤늦게 걸어서 집으로 왔다. 버스마저 끊긴 시간이라 도로는 조용했고 당연히 인적마저 드물었다. 분주한 일상에만 있다가 고요하고 한적한 길을 걸으니 기분이 참 좋았다. 걸으며 콧노래마저 흥얼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만일 내가 여자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즐기면서 걸었을까? 아닐 것이다. 김지영이 고등학생일 때 같은 학원 다니는 남학생에게 당할 뻔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앞에 놓인 거리는 오로지 불안과 공포만 가득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같은 모임 여성분이 이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집에 혼자 살면 시켜 먹는 것도 무섭다고. 더구나 배달하는 남자들이 자기들끼리 여자 혼자 사는 집 정보까지 공유한다고 하니 너무 무서워서 시켜먹는 것은 생각도 못 한다고 했다. 세상에 음식 배달시키는 것을 무서워하는 남자는 없다. 남자라면 당연히 하는 일이 여자에겐 불안과 공포가 되어, 할 수 없는 일이 되다니. 이런 상황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난 아무래도 차별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것은 누가 주었는가? 남자다. 더 엄밀히 말하면 문화라 할 것이다. 그런 짓을 저질러도 엄중한 처벌이 내려지지도 않고 피해자만 불쌍하게 된다는 믿음이 사회에 널리 퍼져있어서 그리된 것이니 말이다. 그런 믿음을 주는 문화를 바꿔야 하고 그 문화의 변화를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과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 한 사회의 문화란 알고 보면 그에 속한 개인이 가진 생각과 태도의 총합과도 같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변화라고 했지만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 향방이 명확해야 들을만한 말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소설에서 들을 수 있다. 소설 후반에 나오는, 김지영의 삶을 오롯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를 통해 절절하게 경험까지 했는데도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전혀 변하지 않는 정신과 의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의 시선이 변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타자의 처지보다 더 우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을 볼 때, 칸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목적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모든 것을 자신을 중심에 놓고 보기에 시선의 변화 역시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영이 차별과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다 비슷했다. 모두가 자신의 마음, 욕망만 고려했다. 명절날에 지영이 시어머니가 그러했고, 보육은 부부가 함께 져야 할 책임인데도 자신이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있던 지영의 남편도 그러했으며, 지영이를 겁탈할 뻔 했던 고등학교 때의 남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카페에서 지영을 두고 '맘충'이라 비아냥거렸던 남자 회사원들도 그러했다. 물론 이 리스트는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영이 다니던 회사에서 발생한 몰래 카메라 사건에 연루된 동료 남자 사원들을 비롯하여 손자만 위했던 지영이 할머니도, 딸을 낳으면 어쩌나 하는 지영이 엄마의 말에 "말이 씨가 된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라고 했던 지영이 아빠도, 남자라고 집안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 지영이 남동생도, 지영이 엄마가 자신을 위해 꿈을 희생한 것을 알면서도 정작 도움은 남동생에게만 줘 버렸던 지영이 외삼촌들도 있다. 모두가 나보다 상대를 중심에 놓고 생각했다면 소설에 새겨진 고통의 길이는 훨씬 줄어들었을 터였다.


 그러고 보면 소설 초반에 나오는 빙의된 것만 같은 지영의 모습이야말로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진정한 대안의 형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거기에는 타자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주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은 타자에게 결코 자신을 내어줄 리 없는 이들에겐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해 본 적도 없고 가능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던 모습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보는 이들의 생각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 틈을 통하여 비로소 지영의 참된 모습을 바라보게 했다. 소설의 순서는 그러한 지영의 모습이 없었다면 그녀의 생애 또한 듣지 못했을 것이라는 걸 암시하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하나의 태도가 변하면 그것은 여파를 만든다는 것을 내용과 형식 양면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이러니 '대안의 형상'이라는 표현이 그리 무리 있어 보이지 않는다. 소설 역시 그것이 되고자 하는 것 같다. 빙의가 존재의 전적인 겹침인 것을 고려한다면 지영의 전 생애를 한 폭의 두루마리처럼 쫙 펼쳐서 삶 전부를 바라보게 한 것도 어쩌면 독자 또한 지영의 존재에 빙의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가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경험이 되도록 말이다. 그것이 무엇보다 문화를 바꾸는 소중한 첫 걸음이기에. 내 솔직한 소감이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고 헤아리지 못한 것을 헤아리게 되었다. 타자의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면 체득할 수 없는 것들이라 생각되기에 그리 말했다. 이 책으로 내디딘 첫 발걸음을 단단히 기억해두려 한다. 읽으면서 느꼈던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다시는 갖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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