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와의 대화
로저 파우츠. 스티븐 투겔 밀스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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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래된 질문입니다. 쌓여 있는 시간만큼 많은 대답이 존재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것은 도구였습니다.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하여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죠. 경험칙상 맞기도 했습니다.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은 없었으니까요. 이것은 1960년대 제인 구달이 아프리카에서 침팬지가 인간과 똑같이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함에 따라 비로소 깨어졌습니다. 그러자 다른 하나가 나왔습니다. 바로 '언어'입니다. 동물은 말할 수 없고 말도 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오래지 않아 깨어졌습니다. 오래도록 침팬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관찰한 로저 파우츠가 '워쇼'라는 침팬지를 통해 침팬지가 수화를 통해 언어를 배우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가장 강력한 선 하나가 이렇게 하여 사라졌습니다. 이제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라 연속 상의 한 존재라는 게 밝혀진 것입니다. 이번에 나온 로저 파우츠의 '침팬지와의 대화'는 바로 그것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원래는 아동 심리학을 전공하려 했던 로저 파우츠가 어쩌다 '워쇼'를 통해 동물 행동학에 뛰어들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워쇼와 다른 침팬지를 통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워쇼는 동물이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세상, 또 그러한 생각과 감정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세상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 놀라운 여행에서 나는 다른 침팬지도 수십 마리 만났는데, 다들 워쇼만큼이나 개성 있고 표현을 잘했다. 결국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훨씬 더 많이 배우게 되엇다. 인간 지성의 본질, 인간 언어의 근원에 대해서, 또 우리가 어디까지 연민을 느끼는지, 우리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p. 17)


 진실로 이 책은 그가 워쇼와 다른 침팬지를 통해 배웠다고 고백했던 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그렇게 우리는 워쇼와 함께 한 로저 파우츠의 기록을 따라서 당시까지만 해도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스키너의 '동물의 행동이란 그저 자연 조건에 따라 형성된 것 뿐이다'라는 <조작 형성 이론>과 노엄 촘스키의 '인간의 언어 습득은 뇌 어딘가에 언어 통사론 규칙이 코딩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보편 문법 이론>이 어떻게 차레대로 오류로 드러나는가와 이러한 침팬지의 수화 학습 능력이 자폐아와의 소통과 치료에도 응용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과학계에 널리 퍼져 있는 인류 공영을 위해서라면 동물을 기꺼이 실험의 희생자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로저 파우츠가 워쇼와 함께 했던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있기에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인류와 가장 가까운 혈족인 침팬지에게 그동안 과학과 인류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인간들이 저지른 죄악들을 보며 그런 인간의 하나로서 참회하기도 했습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침팬지에겐 달갑지 않은 운명이 닥쳐왔습니다. 미국이 우주 비행을 소련과 경쟁하던 무렵에는 아프리카에서 포획된 60마리 이상의 침팬지가 비행 훈련을 받았습니다. 작은 종 모양의 캡슐을 타고 우주로 돌진할 경우 어떤 위험이 있을지 아직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기에 인간 대신 침팬지를 보내 알아보려는 속셈으로 말이죠. 네, 침팬지는 옛날에 흔히 광산에서 갱도에 혹시 유독 가스가 나오지 않을까 알기 위하여 유독 가스를 맡으면 바로 죽기 때문에 가져갔던 카나리아와 똑같았습니다. 그런 침팬지를 스키너의 조작 형성 이론에 따라 시키는 대로 하면 바나나가 나오는 보상을 주면서 열심히 훈련 시켰지만 최초로 궤도에 진입하여 지구를 돌았던 침팬지 <에노스>는 기계 고장으로 제대로 조작 했는데도 바나나가 나오기는 커녕 전기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버튼을 잘 눌러서 결국 로켓 결함에도 불구하고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스키너의 이론에 보기좋게 엿을 먹였습니다. 동물이 단순히 조건 반사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에노스>는 비행 1년 후, 비행에 따른 후유증 때문이었을까요? 이질로 죽고맙니다.


 소련과의 우주 경쟁이 끝난 뒤에도 침팬지에게 안식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인간과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침팬지는 인간을 대신하여 다양한 실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죠. 특히 의학 실험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위해 엄마 품에서 강제로 떼어내 연구소로 운반되는 어린 침팬지들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침팬지도 인간만큼 모성이 강한 존재라 그렇게 아이를 잃어버리면 커다란 상처를 받습니다. 그건 강제로 어미와 헤어진 어린 침팬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AIDS가 본격적으로 알려졌던 80년대엔, 인간처럼 감염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침팬지가 치료제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AIDS 바이러스를 투여 받았고 그것으로 죽어갔습니다. 정말 인간의 침팬지에 대한 잔혹한 만행이 끝도 없습니다. 워쇼도 그렇게 실험을 위해 끌려온 침팬지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의학 실험체로 쓰이기 전에 앨런과 비어트리스 가드너 박사 부부가 자신의 연구를 위해 가져옵니다. 원래는 캐시란 이름이었는데 가드너 부부는 연구에 쓸 동물에게 사람 이름을 붙이는 건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여 거리 이름인 '워쇼'를 붙여줍니다. 그만큼 그들에게 워쇼는 그저 동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워쇼'에게 플라톤과 데카르트를 거쳐 오래도록 서양 문명에 굳건히 자리잡아온 '인간 중심주의'를 붕괴시킬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이 바로 로저 파우츠였습니다.

 워쇼가 수화를 통해 사람과 소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말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전공과 꿈마저 바꿔버렸습니다. 그러나 워쇼가 열어 준 길은 그에게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 길은 학계의 주류와 정면으로 싸워야 하는 길이기도 했으니까요. 특히 노엄 촘스키의 <보편 문법 이론>이 그랬습니다. 언어 통사 문법 자체가 인간의 뇌 어딘가에 코딩되어 있다는 그 이론은 언어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그런 해부학적 구조를 가지지 못한 동물은 언어를 가질 수 없다고 아예 배제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워쇼는 언어란 모방과 학습을 통해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으며 창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렇게 언어 또한 해부학적 구조가 아니라 소통을 위한 몸짓의 발전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로저 파우츠는 자신이 워쇼에게 본 것을 믿고 저널에 발표했고 제인 구달의 도움까지 받아 노엄 촘스키 이론에 짙게 투영된 인간 중심주의를 허물어갔습니다. 당시 유명한 동물 행동학자이던 롬 하레도 원래는 촘스키 이론을 지지했는데 어느 날 워쇼가 잡지를 보며 수화로 혼잣말 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며 바로 그 입장을 철회해 버렸습니다. 워쇼가 로저 파우츠에게 심어준 신념은 침팬지와의 소통이 자폐아와의 소통에도 그대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한층 더 확고해졌습니다.



 사진은 제인구달과 함께 있는 로저 파우츠의 모습. 안고 있는 침팬지는 '타투'로 가드너 부부가 지원금이 끊어지자 더 이상 키우지 않고 동물원에 넘기려고 하는 걸 로저 파우츠가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맡아 키웠습니다. '타투'는 꽤 얌전한 성격으로 별로 말썽을 부리지 않았으며 자기가 갖고 논 장난감은 항상 제자리에 정리했다고 합니다.


 그가 계속해 온 워쇼와의 대화는 외부만 무너뜨린 게 아니었습니다.

 로저 파우츠 자신도 많이 변하게 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동물의 권리에 대해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워쇼를 비롯한 많은 침팬지들이 보여준 인간적인 면모는 로저 파우츠로 하여금 인간과 동물을 그리 다르지 않은 존재로 보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인간>이란 <존재>의 한 형태일 뿐임을, 나에게 나의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은 워쇼였다. 세상에 인간이라는 존재, 침팬지라는 존재, 고양이라는 존재가 있다. 나는 한 때 그러한 존재들 사이에 그었던 선 - 어떤 종은 가두고 어떤 종에게는 실험을 하도록 허락하는 선 - 을 더 이상 도덕적으로 옹호할 수 없었다.(p. 404 ~ 5)


 하여, 로저 파우츠는 제인 구달과 함께 적어도 침팬지만큼은 실험하지 않도록 하는 규약을 마련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류를 위해 동물을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다고 믿는 주류 과학계는 오히려 로저와 제인을 비합리적이라 비난하고 결국 규약 정립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이런 과학자들의 편협과 냉담을 경험했으니, 로저 파우츠가 책에 이렇게 쓰고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는 과학이 항상 객관적 지식을 고결하게 추구하면서 진실을 향해 전진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과학자는 자기 시대의 편견을 체화한다. 그리고 과학자는 무지를 지식인 척 포장할 수 있고 그들이 주장하는 <사실>이 윤리적 경계를 세우고 뒷받침하는 데 쓰일 수 있기 때문에 편협한 일반인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불행히도 역사가 증명하듯 무지와 오만이 결합하면 해당 문화의 윤리적 우주 바깥의 존재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p. 452)

 

 그러므로 우리는 로저 파우츠가 했던 다음과 같은 질문을 아무래도 숙고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인간의 고통이 침팬지의 고통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까? 인간의 생명이 왜 침팬지의 생명보다 더 소중할까? 우리는 윤리적 원칙이 아니라 기껏해야 노골적인 자기 이익 때문에 침팬지를 대상으로 실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내가 이웃의 심장을 꺼내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웃과 나는 다르지만 무척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가 나의 직계 가족은 아니지만 우리는 공동의 선조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사촌이다. 내가 우리 사이에 긋는 유전적 경계는 임의적이며, 나는 이웃을 죽여서 내 아이를 살리고 싶다는 자연적인 생각을 꺽어야 한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침팬지의 심장을 꺼내는 것은 옆집으로 걸어 들어가서 이웃의 심장을 꺼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침팬지가 내 딸만큼 나와 가깝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고통의 조상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침팬지는 내 이웃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촌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원칙을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에게만 적용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개와도 공동의 선조를 가지고 있다. 개들에게까지 권리를 확장해야할까? 쥐는 어떨까? 어디서 멈춰야할까?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중에 <덜 바람직한> 동물들까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윤리적 우주의 빗장을 걸어 잠글 수는 없다. 시간은 계속 전진하고 우리의 윤리적 영역은 계속 확장될 뿐 축소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p. 457 ~ 9)

 

 하나의 빗금은 안과 밖을 나눕니다.

 그러나 빗금이 딱 하나만 그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한 번 빗금을 허용하면 두 번, 세 번도 가능하게 됩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인류와 동물 사이에 놓인 빗금이 흑인에게도 긋게 했으며 제국주의 때는 식민지 백성에게도 긋게 했고 사회주의가 유포될 때는 다른 이념을 가진 자에게 그었으며 우리나라에선 지역마다 빗금을 그었고 지금은 이주자에게 긋고 있듯이 말이죠. 이처럼 하나의 선은 복제되고 확장됩니다. 이것을 통해 빗금이 그어지는 결정적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저 파우츠의 말대로 자기 이익 때문에 그어진다는 것을 말이죠. 보다 많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경쟁자가 보다 많이 줄어들어야 할테니까요. 빗금을 통해 잠재적 경쟁자들을 아예 경쟁자들을 배제해 버리는 것만큼 경쟁에 유리한 것도 또 없고 말이죠. 타자를 고려하고 배려하면 할수록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쾌락은 적어지는 법이니 빗금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달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빗금이 실은 이익보다 고통을 더 많이 가져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그어 놓은 차별과 배제의 빗금은 언젠가 내게도 그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빗장은 이익에 따라 임의로 그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로저 파우츠 말대로 윤리적 영역의 확장은 좋은 일입니다. 물론 그것을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에 대해선 신중한 고민과 많은 논의가 이뤄져야 하겠죠. 그 고민과 논의의 시작을 이 책, '침팬지와의 대화'와 더불어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인식의 전환과 그 필요성을 충분히 느끼게 만드는 책이니까요. 분명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며 그 여운 속에서 동물의 권리와 나 아닌 다른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 정립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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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17-10-27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빗금에 관한글이 인상적입니다

2017-10-31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7-11-0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팬지뿐 아니라 많은 동물을 실험에 이용했죠 그런 걸 처음 할 때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텐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걸 아예 생각하지 않게 된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동물도 권리가 있죠 사람이 마음대로 이용하면 안 될 듯합니다 말도 사람과 다른 말을 쓸 뿐 같은 동물은 서로 말하겠죠 사람보다 간단할지라도... 사람은 그런 것을 알게 되고 신기하게 여기기도 하는군요


희선
 
볼티모어의 서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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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면서 한 번은 하게 마련인 질투. 질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들뢰즈는 질투를 주체가 절대적 한계에 이르렀을 때 가지게 되는 감정이라 말했죠. 자기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질투를 하게 된다고 말이죠. 질투가 사랑에서 많이 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겁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에 달린 일인데, 한 사람의 마음만큼 내 뜻대로 하기에 어려운 것도 또 없으니까요. 한 마디로 질투란 내가 가진 결핍과 그것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자각입니다. 그 결핍과 한계가 우월한 타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쳐오는 것이죠. 거기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즉 결핍과 한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고 어떻게든 내 힘으로 메우려 하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른 결말을 준비합니다. 


 셰익스피어였던가요? 질투가 겸허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 것은. 그렇게 결핍과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면 질투는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결핍을 메우고 한계를 없애는 것에만 집착하면 '오셀로'처럼 자신의 삶마저 깡그리 파괴되겠죠. 조금은 뜬금없게 질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번에 읽은 조엘 디케르의 '볼티모어의 서'가 바로 질투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조엘 디케르는 이미 그의 이름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한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이 있죠. '볼티모어의 서'는 그에 뒤이은 작품으로 '해리 쿼버트'의 주인공 마커스 골드만이 그대로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해리 쿼버트'의 속편인 것은 아닙니다. 주인공만 같을 뿐 실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죠. 전작은 해리 쿼버트 교수와 관련한 사건이었지만 이번 소설은 마커스 골드만 자신과 관계있는 사건이니까요.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새로운 소설을 쓰기 위해 마커스는 플로리다에 있는 보카레이턴으로 갑니다. 거기서 하루는 집 잃은 개를 발견하여 주인을 찾아주는데, 뜻밖에도 예전의 연인이었던 알렉산드라인 겁니다. 8년 전, 마커스는 자신의 사촌인 힐렐 집안에 잇달아 닥쳐온 비극 때문에 알렉산드라를 떠났었죠. 비록 헤어졌지만 그녀에 대한 미련이 언제나 있었던 마커스는 알렉산드라와 재회한 김에 다시 사랑의 불길을 지필 수는 없을까 하여 자신이 찾아준 개를 빌미로 만남을 이어갑니다. 알렉산드라가 이미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알렉산드라를 통해 다시 한 번 그녀와 열렬하게 사랑했던 과거의 시간을 떠올린 마커스는 그 시절 알렉산드라 못지 않게 자신의 인생을 온통 지배했던 '골드만 갱단'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 시절 마커스는 비슷한 또래의 사촌 힐렐과 그의 아버지이자 마커스의 큰 아버지가 되는 사울이 거둬들여 키우게 된 우디와 늘 붙어 다녔는데 모두 형제가 없었던 지라 결속을 다진다는 의미에서 지어붙인 이름이 바로 '골드만 갱단'이었습니다. 거기에 힐렐의 이웃이 된 알렉산드라와 그의 오빠 스콧이 합류합니다. 마커스는 그때부터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사랑을 키워갔는데 힐렐 또한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커스는 '골드만 갱단'을 기준점으로 하여 과거의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풀어갑니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고 가며 전개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보였고 만날 때마다 마커스의 가족을 주눅 들게 만들었던 큰아버지의 가족이 어떻게 점차 무너져 갔던가를 중심으로 해서 말이죠. 그 몰락의 중심에 바로 질투가 있었던 겁니다. 소설은 마커스 아버지와 힐렐의 아버지를 통하여 처음부터 그것을 보여줍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누가 봐도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큰아버지에겐 살갑게 대하고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마커스 아버지는 냉정하게 대하는 것으로 말이죠. 그것을 통해 사회적 성공이야말로 타인의 인정을 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안 마커스는 사울을 자기 인생의 이상적 모델로 여깁니다. 힐렐은 변호사인 아버지와 의사인 어머니를 닮아 뛰어난 머리를 가졌지만, 몸이 왜소해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합니다. 빈센트란 아이가 그것을 주도했는데 정말 엄청난 괴롭힘을 받습니다. 거기서 힐렐을 구해준 것이 우디였습니다. 원래 우디와 힐렐은 아무 관계 없었는데, 소년원에 있는 우디를 힐렐의 아버지 사울이 특별한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에 보답하기 위해 정원 가꾸는 일이라도 하려고 왔다가 빈센트가 힐렐을 구타하려는 것을 보고 달려가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어 힐렐과 우디는 형제보다 더 친하게 지냅니다.


 소설은 한동은 마커스까지 가세한 '골드만 갱단'의 이런 저런 좋은 추억을 보여주다 무엇보다 아름답고 인자했던 큰어머니의 사고를 기점으로 어두운 색채를 늘려갑니다. 힐렐과 우디 그리고 큰아버지 사울 모두 소설이 진행될수록 가파른 경사의 몰락 아래로 굴러떨어집니다. 그것은 필연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든지 달리 비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락의 골짜기로 떨어져 버린 것은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무엇보다 이상적 모델이라 여기던 힐렐과 우디가 자신보다 이웃 패트릭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자 그 이유가 순전히 자기보다 부유하고 성공한 탓이라 생각하여 패트릭을 질투한 나머지 그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가 아무리 애정을 갈구해도 모른 척 하고 말지요. 똑같은 실수를 마커스 역시 합니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결국 알렉산드라와 결별까지 하게 만들었죠. 이처럼 소설 곳곳엔 질투가 있고 그 질투가 낳은 파국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볼티모어의 서'를 한마디로 정리하라고 하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질투의 대장정'이라고.


 우리 눈앞을 스쳐 가는 소설 속 오셀로의 계승자들을 보노라면 아무래도 새삼 질투의 의미를 되새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결국 무엇 때문에 질투하고 왜 거기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하고 말이죠. 그것이 바로 지독한 자기애의 산물이라는 것을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문득 깨닫습니다. 그들이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의 삶마저 붕괴시키는 어리석은 선택과 행동을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너무 사랑하고 과신한 결과니까요. 질투의 순간은 내 한계를 절감하고 나를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신호였지만 자기애에 깊이 빠져버린 이들에겐 그저 자신에 대한 무시이자 삶이 이유 없이 가한 공격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에 대하여 내려놓기보다는 더 움켜쥐려 했고 그럴수록 자신이 힘껏 움켜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이란 걸 깨달아야 했습니다. '볼티모어의 서'는 알고 보면 그런 '어리석음의 연대기'입니다. 오늘도 질투 때문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분이 어딘가 계시겠죠? 그런 분 머리맡에 살짝 놓아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우리 모두 익히 경험한 바이지만 질투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억울과 분노의 질투는 자신만 더 나쁘게 만들 뿐입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다 좋은 변화의 계기로 삼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일 것입니다. 문득 박찬옥 감독의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이 떠오르네요. 그 영화도 제목처럼 질투를 중심에 놓고 다루는 작품이었죠. 질투가 오로지 부정적인 경험인 것만은 아니며 그것을 타인과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하는 계기로 받아들인다면 더없는 자기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잘 보여주었습니다. 


 '볼티모어의 서' 또한 이런 자각을 어느 순간 가져다줍니다. 648 페이지의 두툼한 분량이지만 일단 잡고 읽으면 그건 별문제가 아닐 겁니다. 몰입시키는 힘이 있으니까요. 질투로 혹독한 속앓이를 해 보신 분이 있으시다면 이 소설을 벗하며 그 질투가 과연 내게 무엇을 남겼나 헤아리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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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11-01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그런 생각해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아서 좋아하겠지 하는... 그게 자기애일까요 자신한테 자신이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자신을 먼저 좋아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누가 어떤지는 마음 쓰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다시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런 건 아니겠습니다 다른 사람 마음은 다른 사람 거다 생각하면 좀 편해지기는 하겠지요


희선
 
성모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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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충격이란 말이 결코 아깝지 않은 작품을 하나 만났습니다. 아, 이런 둔중한 충격은 실로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 이후 처음이네요. 놀라운 반전입니다. 예언 하나 할게요. 분명 두 번 읽게 되실 거고 두 번째 읽으실 때는 처음보다 훨씬 더 눈을 크게 뜨고 읽게 되실 겁니다.


 이런 이런, 충격의 여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탓에 어떤 작품인지 소개도 안 드렸네요.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 뜬금없음을 잠재우기 위해 얼른 소개하도록 할게요. 일본 작가 아키요시 리카코의 '성모'란 작품입니다. 조성모의 성모가 아니구요. 흔히 기독교에서 예수의 어머니를 부를 때 쓰는 말인 성스러운 어머니를 뜻하는 성모(聖母)입니다. 그렇다고 기독교 이야기도 아니에요. 미스터리 소설이랍니다. 그것도 4살 짜리 유아가 목이 졸려 살해되고 성기마저 제거된 채 무참히 버려지는 사건이 등장하는, 끔찍하며 엽기적인 소재의 스릴러 소설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왜 제목이 '성모'냐구요? 주인공이 어머니이기때문 입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하도 생리가 오지 않자 검진을 위해 산부인과를 찾았다가 다낭성 난소 증후군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다낭성 난소 증후군에 걸리면 난포가 여러 개 만들어지고 일정 크기까지 자라지만 결코 배란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하는군요. 네, 아이를 낳기 힘든 몸이었던 겁니다. 그녀는 대학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하는데, 그 남성 또한 외동 아들이라 자손이 귀해 시댁에서 은근히 압박이 들어옵니다. 그녀 역시 어머니가 되는 것을 신성하게 여겼기에 불임 시술도 여러 차례 받고 체외 수정도 시도합니다만 아이는 쉽게 찾아와주지 않습니다. 어렵게 자궁에 안착한 태아조차 두 번이나 유산하고 맙니다. 그토록 험난한 과정을 거쳤으니 간신히 얻게 된 딸 가오루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겠습니까? 주인공 호나미는 가오루 앞에서 여러 차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다는 맹세를 합니다.


 그 맹세가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엽기적이고 끔찍한 유아 살해가 바로 호나미가 사는 동네에서 벌어졌기 때문이죠. 살해 대상이 가오루와 비슷한 나이인지라 호나미의 공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찰이 열심히 수사를 하지만 그렇다고 호나미의 불안이 가셔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기껏 목격한 수상한 남자조차 별 혐의 없다고 풀어주는 경찰을 보면서 호나미는 자신이 직접 범인을 잡아야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이 호나미의 반대편에 마코토란 고등학생이 있습니다. 그는 검도부로 학교에선 1학년인 검도부원들을 가르치는 한편, 봉사의 의미로 학교 밖에서도 아이들에게 검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의 바르고 성적도 발군이며 외모 또한 아주 수려한지라 자기 학교 여학생 뿐만 아니라 이웃 학교 여학생에게마저 동경의 시선과 애정 고백을 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마코토의 그런 모습이 소설 초반부터 나오는데, 읽는데 '뭐, 이런 부러운 녀석이 다 있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그러나 신은 공평합니다.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마코토이지만 그 모든 장점을 아무 소용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크고 통제할 수 없는 어둠의 충동을 주었으니까요. 그 충동이 무엇인지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문맥상 능히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소설은 전반부부터 대결 구도를 명확하게 깔아 놓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자, 호나미와 억누를 수 없는 충동 때문에 아이를 없애고자 하는 자, 마코토의 대결 구도인 것이죠. 거기에 살인범을 수사하는 다나자키와 사카구치 혼성 형사 콤비까지 비슷한 분량을 차지하며 끼어들기에 삼파전을 하듯 이야기가 더욱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끝까지 내내 읽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게 뒤집힙니다. 

 반전이 가져온 격동 속에서 손은 결말이 아니라 앞 페이지를 향해 재빨리 움직입니다. 내가 뭘 착각했고 뭘 놓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런 종류의 소설은 제법 읽어왔고 그래서 더이상 충격 받을 일도 없다고 자부했는데, 웬걸 그 자부가 얄팍한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마에 얼음을 대듯 선명하게 확인하게 되네요. 정녕 놀랍습니다. 아직도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있다니.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두 번 읽었습니다. 더하여 제목처럼 모성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지켜준다'는 것의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도. 분명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 될 것입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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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에 걸린 소녀 밀레니엄 (문학동네) 4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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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이게 꿈이야 생시야? 

 갑자기 내 앞에 출현한 책을 보고 볼부터 일단 꼬집었습니다. 얼얼한 통증 속에서도 책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맙소사! 진짜였던 것입니다. 정말 계속된 것입니다. 저자의 죽음으로 3부로 끝나버려 너무나 아쉬웠던, 그래서 3부를 읽을 땐 되도록 천천히 읽어 결별의 시간을 하염없이 지연시켜야 했던 그 <밀레니엄> 시리즈가 돌아온 것입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밀레니엄 시리즈가 돌아온 것은 의미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돌아와야 밀레니엄 시리즈의 귀한 역시 의미 있는 것입니다. 밀레니엄 시리즈에 있어서 붕어빵의 앙꼬라 할 수 있는 바로 그 사람. 네, 맞습니다. 구태여 이름까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부르겠습니다.


 리스베트 살란데르!

 3부작을 끝으로 이제 영영 못 만나나 했던 그녀가 이렇게 떡하니 다시 찾아 온 것입니다. 그것도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하지만 3부작에서 계속된 그녀 과거의 이야기와 여전히 이어진 채로! 그것도 3부작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간절히 제가 바랐던 것, 그러나 이뤄질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과거 이야기가 완전히 결말 짓는 것을 보고싶다는 갈망을 충족시키는 형태로! 이러니 제가 어떻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환영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밀레니엄 시리즈의 4편인 '거미줄에 걸린 소녀'를 말이죠. 비록 저자가 원작자인 스티그 라르손이 아니라 해도.



 네, 저자가 다른 사람입니다.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라고 하는군요. 스티그 라르손과 똑같이 스웨덴 출신에다 관록 있는 범죄 전문 기자 출신 작가로 스웨덴에선 꽤나 유명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 소개된 '앨런 튜링 최후의 방정식'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저도 아직 이 책은 못 읽어봤는데, '거미줄에 걸린 소녀'가 밀레니엄의 팬으로서 제법 높고 깐깐하다고 자부하는 제 눈에 너무나 마음에 들었으므로 그 책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거미줄에 걸린 소녀'는 천재 해커인 리스베트의 면모가 한껏 살아난 작품으로 해킹과 보안의 세계가 수학과 맞물려 본격적으로 펼쳐지는데 '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과 연관 있어 보입니다. 무엇보다 소설 초반에 등장하여 미스터리를 낳는 존재가 되는, 인공지능의 세계적 권위자 프란스 발데르가 아무래도 앨런 튜링을 모델로 쓴 것 같거든요.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자신의 연구에만 매진하며 그것을 위해 인간관계까지 기꺼이 희생한다는 점에서 앨런 튜링의 그림자가 엿보이네요. 실제 튜링은 동성애자로 결혼을 한 적도, 아버지가 된 적도 없지만 프란스 발데르는 분명 튜링이 결혼을 하여 아버지까지 된다면 과연 어떨까 하는 상상에서 태어난 것 같아요. 물론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맞다고 확인해주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튜링이라 생각하고 읽으니 더 재밌더군요. 그래서 프란스의 최후가 더욱 안타깝기도 했지만 말이죠.


 스웨덴 판도 표지에 삼부작과 통일성을 주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커버이기도 합니다.


 아, 이런 기쁜 마음에 주저리 주저리 떠들었더니 아직 줄거리조차 소개하지 않았네요. 당신의 이마에 내 천자(川)가 그려지기 전에 얼른 말하도록 할게요. 소설은 한 남자의 회심으로 시작합니다. 그가 바로 프란스 발데르입니다. 그는 늘 자신을 형편없는 아버지로 여겨왔어요. 연구를 핑계대고 가족을 소홀히 한 까닭이죠. 더구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은 여덟 살이 되었는데도 말 한 마디 못하며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폐아인데도 말이죠. 아내와 이혼하고 자식마저 버리고 미국으로 떠났다가 몇 년이 지나 그는 이제껏 못했던 아버지 역할을 다하기 위해 스웨덴으로 돌아와 다른 남자와 결혼한 아내에게서 아들 아우구스트를 데려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아우구스트에게 놀라운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눈으로 본 것을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똑같이 그리는 능력이죠. 그것을 통해 프란스는 아우구스트가 '서번트'(자폐아 열 명 중 한 명은 '서번트'라고 합니다.)라는 것을 알게되고 자신이 연구하고 있던 인공지능 개발까지 중단하고는 아들의 서번트 능력을 개발하는데 주력합니다. 놀랍게도 아우구스트의 서번트 능력은 그림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처럼 수학에도 엄청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원래 서번트는 하나의 능력만 가질 수 있는데 아우구스트는 두 가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것까지 보게 되자 프란스는 아우구스트의 천부적인 능력을 증진시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오직 아들의 양육에만 심혈을 기울입니다.


더스트 커버를 벗긴 모습입니다. 은근히 분위기가 있네요.


 한편, 밀레니엄 시리즈 또 하나의 주인공이자 '밀레니엄' 지의 대표 기자인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는 퇴출될 위기에 처합니다. 재정난 때문에 노르웨이의 미디어 그룹인 세르네르의 투자를 받아들인 적이 있는데 그것을 주도한 장본인이자 미카엘이 신출내기 기자이던 시절 동료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오베가 그룹 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자 그 위기를 빠져나갈 목적으로 '밀레니엄'의 근본 편집 방침에 간섭을 해 온 것입니다. '밀레니엄'이 전적으로 거부했던 친 기업적인 기사나 가쉽 거리를 쓰라고 말이죠. 여기에 미카엘이 반발하자 그를 쫓아내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기에 봉착한 미카엘에게 리누스란 남자가 찾아옵니다. 미카엘이 프란스 발데르를 꼭 만나봐야 한다면서 말이죠. 네, 여기서 미카엘과 프란스의 접점이 생깁니다. 리누스는 프란스가 미국에서 돌아온 것은 모종의 이유가 있는데 그건 '솔리폰'이란 회사가 자신의 기술을 도둑질한 증거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쩌면 그것은 거대한 비리일지 모르니 프란스 발데르를 만나봐야 한다고 말이죠. 반신반의하는 미카엘에게 리누스는 프란스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말해줍니다. 그것을 도와준 한 여성 천재 해커가 있었다고 말이죠. 미카엘은 그가 누군지 바로 짐작합니다. 여기서 드디어 등장합니다. 그토록 재회하고 싶었던 우리의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말입니다. 그렇게 미카엘은 2부에 했던 방법을 다시 사용하여 몇 년만에 리스베트와 연락을 시도합니다.


표지를 넘기면 이렇게 저자의 사인과 스웨덴과 스톡홀롬 시내 지도가 있습니다. 뒷면에도 스톡홀롬 근교와 군도 지도가 있습니다.


 그런 리스베트는 3부에 뒤이어 여전히 개인적인 추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 살란데르가 남긴 어두운 유산을 말이죠. 리스베트는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아버지가 건설한 범죄조직이 사라졌다고 믿지 않습니다. 하나를 잘라내면 두 개의 머리가 자라는 히드라처럼 아직도 이 세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버지의 유산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유산을 찾아내 깡그리 파괴할 때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복수도 완성된다고 믿는 리스베트는 해커로서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해킹의 난공불락 요새였던 국토안보부까지 무너뜨리며 드디어 유산의 꼬리를 찾아냅니다. 바로 '더 스파이더'라는 이름의 조직을 말이죠. 네, 제목에 나와있는 거미줄은 바로 그 조직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거미줄에 걸린 소녀'란 두말 할 것도 없이 그 조직과 소녀, 리스베트의 대결에 대한 암시였던 셈이죠. 제목처럼 정말로 조직과 리스베트 간의 한 판 승부가 펼쳐집니다. 상세한 소개는 읽으며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위해 생략하도록 할게요. 다만 리스베트 혈육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 하나가 밝혀진다는 것만 말하겠습니다. 리스베트의 혈육과 관련하여 2부와 3부에 걸쳐서 그렇게나 지속적으로 말해왔는데 아직도 남아 있는 게 있다니! 궁금하시죠? 그렇다면 얼른 4권을 읽으세요? 분명 저처럼 5권과 얼른 만나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조직의 이름이 '스파이더'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조직의 수장이 거미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죠. 거미처럼 자신의 존재감이란 거미줄로 타인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제 멋대로 조종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그는 언제나 중심입니다. 늘 아웃사이더로 다른 이들과 잘 못 섞이며 배척 받는 것도 당연했던 리스베트와는 그야말로 정반대인 것이죠. 때문에 둘의 대결이 더욱 흥미롭습니다. 더하여 여기엔 리스베트가 <밀레니엄> 시리즈 내내 이어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하게 되었고 해킹의 세계로 빠져들었는지에 대한 것도 나옵니다. 그만큼 리스베트의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리스베트가 그 때 얼마나 이해했고 나중엔 어느 정도나 알게 됐는지는 전혀 모르네. 어쨌든 살라첸코가 자기 엄마만 괴롭힌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야. 이자가 다른 여자들의 삶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어. 바로 그 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리스베트가 태어났다고 할 수 있네. 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을...

 "증오하는 여자."

 "정확하네.(...)" (p. 427)


 팬으로서 작가가 바뀌면 아무리 똑같은 캐릭터가 나온다고 해도 뭔가 튀거나 어색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당연히 걱정하게 마련입니다. 실은 저도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돌아오는 것만으로 기쁘긴 했지만 혹시 이상한 모습을 보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건 기우로 끝났습니다. 스티그 라르손의 리스베트 그대로더군요. 개성과 매력은 한결같으면서 능력만 좀 업그레이드한 느낌이었습니다. 어쨌든 변함 없어 좋았습니다. 덕분에 아무런 어색함 없이 다시 찾아온 밀레니엄 시리즈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습니다. 작가가 전작을 많이 연구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도 스티그 라르손의 리스베트와 무리없이 어울리는 것을 보면 말이죠. 그래서 리스베트가 본격적으로 활약할 5부가 더욱 기대되는군요. 4권을 다 읽은 지금,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어서 5권을 읽고 싶다'는 것. 기다리다 현기증으로 쓰러지기 전에 얼른 나와 주세요.


 스웨덴에서 만든 영화 <밀레니엄> 시리즈. 누미 라파스가 리스베트를 연기했었죠. 이 역할로 '에이리언 프로메테우스'의 주연까지 되었구요. 갈수록 여전사가 되는 리스베트의 모습을 누미 라파스가 잘 소화했기에 전 리스베트 하면 누미 라파스 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너무 지나서(삼부작은 2009년에 나왔습니다.) 4편이 영화로 만들어져도 다시 리스베트 연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야속한 세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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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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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바인. 이 이름을 잊기란 어렵다. 아직도 1999년 4월 20일에 일어난 그 사건을 TV에서 보도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때의 기억이 조금도 퇴색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사실이 내게 매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대량 살상이 다른 데도 아닌, 그것과 거리가 너무나 멀어 보이는 고등학교에서 발생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런 학살을 자행한 범인이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말 그대로 내 이성을 뒤흔들었다. 그 바로 얼마 전에 나는 고등학생이 연쇄 살인마로 나오는 웨스 크레이븐의 영화 '스크림'을 봤었다. 그걸 볼 때만 해도 고등학생이 사람을 무차별로 죽이고 다니는 것은 그저 영화 속에나 등장하는 일로만 알았다. 그랬는데, 그게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가진 상식으로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치 우리 세계가 또 다른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느낌이었다.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고 그 어디도 안전할 수 없는 시대로 말이다.


 때는 곧 밀레니엄이었고 종말에 대한 요한계시록과 노스트라마무스의 불길한 예언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내게 콜럼바인의 학살은 밀레니엄 버그(Y2K로도 알려진)만큼이나 그런 예언이 실현될지 모른다는 전조로 다가와 불안을 더욱 가중했다. 다행히 역사는 그 모든 걸 비껴갔지만 콜럼바인 사건이 우리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의 신호라는 것만은 옳은 것으로 밝혀졌다. 2001년에는 세계무역센터에 여객기가 일부러 부딪치는,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났고 미국은 생화학 무기가 있다고 날조하여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처럼 바야흐로 폭력과 살육이 난무하는 시대가 열렸으니까 말이다. 그건 IS의 온갖 소프트 타깃 테러와 더불어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바로 최근만 해도 명절 연휴의 기분을 삽시간에 암울하게 만들어 버린 라스베이거스 학살 사건이 있지 않았던가. 한 노인의 총기 난사에 무려 58명이 희생당했다. 


 그 기원에 바로 콜럼바인이 있었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꼭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 비극이 어떻게 하여 일어났으며 무엇을 남겼는가를. 상세하게. 하지만 알기 어려웠다. 콜럼바인 사건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말고는 만나기 힘들었다. 그 역시도 콜럼바인의 전과 후를 다 밝혀 총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사건이 발생한 당일의 모습만 담거나 총기 규제와 관련한 하나의 문제의식으로만 접근하고 있어 전모를 알기에는 엄연히 한계가 존재했다. 결국 단편적인 정보들을 가지고 자의적으로 소화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데이브 컬런의 '콜럼바인'을 말이다. 10년 동안 사건을 취재하고 집필한 책이었다. 사건에 대한 것을 책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고 사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 또한 늘 미진하다고 느꼈기에 당장 손에 잡았다. 읽어보니 사건의 전후뿐 아니라 범인과 희생자 그리고 가족까지 포함하여 일어났던 일과 그들의 말을 정확하게(책의 마지막에 실린 주(註)는 책에 인용된 관계자들의 말과 그들에 대한 기록이 모두 실제의 것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기록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책이었다. 솔직하게 여태껏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한 기분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콜럼바인 사건이란 코끼리를 온전히 들여다본 것 같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 책이 '콜럼바인 사건' 이후에 그것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도 아주 비중있게 다룬 점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특히 다시 일어나선 안 될 비극적인 사건의 경우 그것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 이후를 살펴보는 것도 그 못지 않게 필요하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똑같은 비극을 겪었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결코 같지 않았다. 그건 범죄로 피해를 입은 자나 그 때 범죄 현장에 있었던 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유독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진실을 알기 보단 자신이 믿고 싶은 쪽으로만 믿으려 했으며 그것에 위배되면 아무리 진실된 증언이라 해도 묵살하는 모습이었다. 죽음의 진실과 상관없이 순교자로 미화되어 신앙의 영웅이 되어버린 캐시 버넬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비극은 저마다 가진 자의적 목적에 맞춰 멋대로 규정되었다.


 이런 왜곡된 정보가 마구 유포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했다. 콜럼바인 사건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높은 관심을 받았지만 그 관심에 걸맞을 정도의 비극이 지닌 의미와 교훈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 보려는 움직임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콜럼바인 사건을 일으킨 에릭 딜런의 삶을 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오래도록 끈질기게 추적했던 수사관 퓨질리어처럼 긴 시간을 들여 자세히 살펴보고 찬찬히 음미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러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저 빠르고 편한 대답만을 원했다. 사이코패스로 밝혀진 에릭은 그렇다 치고 딜런 토마스라는 시인의 이름을 이어받았고 교양 있는 부모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란 딜런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아이로 그런 아이가 아무런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 학우와 선생님을 날려버리려 폭탄을 설치하고 거침없이 총격을 가하는 존재가 되었으면 분명 자신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마땅히 진실에 대한 깊은 관심과 비극의 반복을 방지하기 위한 자성(自省)이 이뤄져야 할 텐데도 그저 '괴물'이란 딱지를 붙여 저만치 던져두고선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간주하는 것을 택했다. 그건 어떤 특정한 시간대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비극일 뿐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어쩌겠냐? 산 사람은 살아야지...'. 타인의 비극 앞에서 우리도 곧잘 가지는 마음을 그들도 가졌던 것이다. 


 한 언론인이 정상으로 돌아간 학교 모습을 취재하려고 들렀을 때 아이들은 당혹해했다. 따분한 학교에 왜 관심을 갖는 거지? 그들은 정말 몰랐다. 그가 도시에서 왔다고 하자 아이들 표정이 밝아졌다. 거기 클럽은 어때요? 콜팩스 거리에 가봤어요? 정말 스트립 클럽이랑 술꾼이랑 창녀들이 있나요? 아이들은 물론 비극을 기억했다. 그 끔찍한 날을 어떻게 잊겠는가. 초등학교가 전부 폐쇄되고 다들 두려움에 떤 그날을. 당시 형 누나가 고등학교에 갇혀 있었던 아이들도 있었다. 부모들은 몇 달 동안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덴버는 어때요? (p. 594~5)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비정(非情)을 보여주는 그 마음을 말이다. 아마도 우리가 그런 냉혹한 가면을 쓰는 것은 정말로 냉혹해서라기 보다는 비록 개인적으로 연루되진 않았어도 그래도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뭔가 그런 비극이 일어나도록 방치한 것만 같은 죄책감과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더하여 당한 이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부끄러움을 얼른 털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 대부분은 비겁하기에 비정해진다. 윤성희 작가의 단편, '가볍게 하는 말'에서 주인공의 고모는 주인공의 아버지 칠순 잔치에서 세 오빠가 서로 얼싸 안으며 지금까지 잘 살았다면서 자화자찬하는 것을 보고 못 참겠다는 듯 일어나 이렇게 일갈한다. "부끄러운 게 뭔지도 몰라, 오빠들은." 고모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는 나중에 가서 이렇게 밝혀진다.


 장례식장에서 고모는 넋을 놓고 우는 친구의 아들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냐, 그래도 기운내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고모가 손자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말해선 안된다는 걸 그때는 이 할미가 몰랐단다. 그건 부끄러운 말이란다. 그건 예의가 없는 말이란다."(윤성희, '베개를 베다'(p. 29))


 맞다. 우리의 이러한 태도는 비극을 당한 자에게 예의가 없는 일이다. 진정 우리가 그들에게 예의를 다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만 침묵하고 그 비극으로 들어가야 한다. 비극에 처한 자들의 말들로 온전히 우리를 채우고 그걸 단단히 기억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걸맞은 예우란 오직 둘 뿐이다. 바로 용기와 기억다.


 그러고 보니 미국 드라마 '파고'에서 이런 장면이 있던 게 생각난다. 연쇄살인마가 조금 전에 살인을 하고 남의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 경찰에게 검문을 당한다. 경찰이 다가와 신분증과 차량등록증을 요구하자 연쇄살인마는 보여주는 것을 당당하게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경관, 길 중엔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어요. 옛날 지도에는 그런 길을 여기 용이 있다고 적어 놓았었죠.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경찰은 상대가 그렇지 않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그런 말까지 하자 두려움을 느끼고 그냥 보내준다. 용이 있는 길을 들어가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그 선택이 더 큰 비극을 가져온 것을 알고는 엄청난 괴로움에 빠지고 결코 그 밤에 비겁했던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안락을 위해 잠시 비겁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얼른 망각을 선택하지만 바로 그 비겁이 족쇄가 되어 끝내 자신을 영원히 부끄러움 속에 결빙시킬 것이라는 건 예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결빙이 언젠가 비극의 반복을 초래하리라는 것도. 저자는 에릭의 과거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지 않았던가? 어제의 작은 방관과 망각이 오늘의 비극을 낳았다는 것을. 그러므로 내 삶에 콜럼바인 사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면 용기를 내야 한다. 바로 지금 용이 사는 곳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피한다고 해서 용은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번식을 통해 용이 있는 길만 많아질 뿐이다. 뛰어들어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 비극 또한 그와 같다. 반복의 사슬을 끊는 것은 동참의 용기와 기억의 칼을 늘 벼려 두는 것뿐이다. 데이브 컬런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믿는다. 그 생각이 콜럼바인의 비극으로 뛰어드는 것과 자그마치 10년 동안이나 그 비극 속에 머무를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거기에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그가 기록한 콜럼바인의 전모를 오롯이 기억하는 것으로.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고 말했다지만 거대한 비극의 모습 또한 고만고만하지 않나 생각된다. 총을 맞은 콜럼바인의 교사 데이브 샌더스 실은 살 수 있었으나 경찰이 알고도 세 시간이나 방치하는 바람에 사망한 것에서 세월호 참사가 겹쳐지듯 말이다. 궁극적으로 비극에는 소유격이 없다. 모든 비극에 대해 우리가 예의를 갖춰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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