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종말 - 탐욕이 부른 국가 이기주의와 불신의 시대
스티븐 D. 킹 지음, 곽동훈 옮김 / 비즈니스맵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오늘 한국은행이 무려 6년 반만에 기준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리뷰가 작성된 시점이 금리 인상한 날이었습니다^^;)

 이는 양적 완화가 더이상 없을 것이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양적 완화'란 중앙 은행이 금리 인하로도 경기 부양이 안 될때 시장에 직접 개입하여 자본의 유동성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금리 인상이란 곧 양적 완화의 종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해가 거듭될수록 경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인데도 국민들이 그것에 대해 어떤 제동 조치를 요구할 때마다 그것으로 이익을 보고 있는 자들이 그 목소리를 무마하기 위해 자주 이용하는 두 가지 이론이 있었다. 하나는 '낙수 효과'요, 다른 하나는 '양적 완화'였다. 낙수 효과는 경제 정책이 오로지 대기업과 가진 자들 위주로 펼쳐지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많이 가진 이들이 더 많이 벌면 넘쳐 흐른 물처럼 아래 사람들이 그 떡고물을 받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양적 완화'는 주로 불경기일 때 돈을 많이 풀면 모두의 주머니로 고루 들어가 쓸 돈이 생겨나니 경기가 살아난다는 논리로 돈을 마구 풀어 집값과 전셋값이 해마다 올라 주거 불안정으로 가뜩이나 심란한 판인데 물가마저 도무지 내려갈 줄 모르니 실질 임금이 자꾸만 하락하는 것으로 인한 대중의 불만을 누그려뜨리는 데 일조했다.

 

 낙수 효과는 거짓이었다는 게 애시당초 판명났지만, '양적완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렸는데 이조차 거짓이었다는 걸 바로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금융 관련 저널리스트이자 현재 영국 하원 재무위원회 특별 자문이기도 한 스티븐 D 킹(호러 소설의 대가로 유명한 '스티븐 킹'과는 혼동하지 말자.)이 집필한 '세계화의 종말'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단언한다. '양적 완화라는 프로그램은 주식이나 국채, 회사채 등의 금융 자산 가치를 높이고 세계의 자산 귀족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설계된 것(p. 253)'이라고 말이다. 이 주장을 그동안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각국의 통화 정책과 국제 자본 흐름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예리하게 분석하면서 말하기에 설득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드디어 '양적 완화'를 거두겠다는 분명한 신호이기도 한 오늘의 금리 인상이 더욱 반가웠고 이 글 첫머리에 언급까지 하고 말았다. 그런 사정으로 이 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이런 통찰을 가져다 준 것에 대한 감사부터  먼저 표하고 싶다. 





 그래서 '세계화의 종말'은 과연 어떤 책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TPP(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 탈퇴와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인 '브렉시트'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한창 가속화되고 있는 '세계화' 붕괴의 현상을 상세하게 관찰하고 이것이 왜 일어났는지 또 이런 추세는 정녕 바람직한지를 과거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두루 고찰하여 상세하게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시사적인 문제들과 돌아가고 있는 경제 상황에 유독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책이 정말 유용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 세계 문제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다양한 동기와 분야로 펼쳐지기에 거기서 어떤 일관된 움직임을 간파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경제 분야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경제가 전 세계 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데다 워낙 자본의 국제적인 이동이 활발하고 무작위적이라 지극히 복잡하여 여기서도 내게 유용한 정보들을 찾아 취합한다는 게 절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은 마냥 엉킨 실타래와 같은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 상황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직접 경험한 것이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의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헤아려 다가올 미래를 제대로 대비하기 위함이다. 스티브 잡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인문학적 통찰'의 요지 또한 그것이 아니었던가? 미래에 대해 제대로 예측하고 올바르게 대처하려면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를 잘 헤아려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이 책이 그렇다. 그런 것을 가능케 한다. 그리하여 다가올 미래를 가늠하고 나름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만든다.


 어떻게 그렇게 만드냐고?

 워낙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라 자세하게 설명하기엔 이 한정된 지면으로 곤란하다. 그러므로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려는 기본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이 기본적 태도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어떤 이념이나 상황을 접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판단이나 행동에 있어서 바람직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태도란, 쉽게 풀이해 말하자면, 이면을 보려는 노력이다. 눈앞에 보이는 부분이 전부라 여기고 자기 생각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의심하고 조사하여 그것이 내 앞에 도래하게 된 과정이나 아래 놓여 있는 동기도 살펴 이면에 감춰진 내막도 헤아리려는 태도. 바로 그것이다. 앞에서 내가 낙수효과나 양적완화를 말했던 것도 이와 관련있다. 그 둘은 이면에 깃든 내막을 짚어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쉽사리 속아 넘어간 대표적인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정말 저자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 주려 한다.

 그러므로 제목인 '세계화의 종말'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 책은 세계화가 종말로 치닫고 있는 상황을 거의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세밀하게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세계화'가 이제 쓸모없는 개념이 되었으니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책이 더욱 주력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화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는 아니었다는 것, 다시 말해 이처럼 왜곡되고 본말이 전도된 세계화 관념을 우리의 뇌리에서 불식(拂拭)하고 보다 올바른 세계화의 관념을 심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우리의 시각 교정이다. 그는 이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이분법적 사고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에 대한 것도 그러하다. 그동안 우리는 '세계화'와 자국의 이익 보호를 위한 보호무역을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하나를 취하면 어느 하나는 버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세계화를 원하는 사람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모든 조치에 대해 무작정 반대했고 국내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계화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두 오직 한 쪽만 보고 생각했기에 나타난 결과였다.


 스티븐 D 킹은 그동안 인류 역사에 있었던 세계화 노력을 설명하면서 그 어떤 국면에서도 이면엔 전혀 다른 것이 존재했다는 것을 소상하게 보여준다. 특히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부분이 그러하다.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인한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44년, 44개국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 모였다. 이 회의 결과 전후 경제와 금융의 세계화를 위한 초석이 될 세 개의 제도가 탄생했다. 바로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그리고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이다. 이는 세계 경제의 일원화로 나아가는 커다란 발걸음이었으나 이를 주도했던 미국의 속셈은 사실 그것에 있지 않았다. 저자에 따르면 그 때 미국이 의욕적으로 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들려했던 이유는 단 하나 다시는 세계에 영국과 같은 제국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데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 패권국가의 출현을 막으려는 자국 이기주의의 발로였다. 이처럼 세계화의 모든 국면엔 사실 국가 이기주의가 있었다.

 

 그것을 저자는 현재 세계화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인 '다보스 포럼'이 열리는 곳이 실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유명한 소설 '마의 산'에 등장하는 다보스의 요양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면서 실은 '다보스 포럼'의 실체가 그 요양원의 다음과 같은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꼬집는다.


 그들은 온종일 먹고, 생각하고, 발코니에 앉아 휴식 치료를 하면서 동료 환자에게 욕정을 느끼고, 기막히게 얇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다른 폐병 환자의 성적인 장난 소리를 듣고, 가끔 흉부 엑스레이를 찍고 기흉에 걸린 허약한 폐로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고, 많은 경우 불가피하게도 마침내 죽음이 다가왔음을 실감한다.(p. 132)


 '세계화'나 '다보스 포럼'이나 모두 우리는 하나라고 소리치며 저마다 이타주의적으로 행동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내면엔 이런 개인주의와 이기적인 면모만 가득했던 것이다.


 이것은 현재도 이뤄지는 공정 무역이라는 미명 하에 강대국이 약소국에 가하는 경제 개방 압력에서도 허다하게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장하준 교수가 '사다리 걷어차기'란 책에서 잘 설명했듯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은 사실 개방을 거부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온갖 정책적인 조치를 취한 데 있었다. 수입품에 많은 관세를 매기는 굳건한 보호무역주의와 외국과의 경쟁에 뒤처진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등 그런 정책들이 오늘의 강대국을 만든 것이었다. 때문에 강대국들은 자기가 경험한 바 약소국들이 어떻게 해야 부강해지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약소국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자신에게 결코 이로울 게 없다. 완전히 개방시키는 것이 자신에게 더 이롭다. 더 많은 자본과 권력 그리고 발달된 기술을 가진 강대국이 약소국과의 경쟁에 있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대국이 공정한 무역을 해야 한다면서 약소국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는 것은 한 마디로 강대국이 이익을 획득하는데 장애가 되는 방해물들을 스스로 제거하라는 요구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한 공정의 진짜 의미는 불공정이었고 그들이 말한 '세계화'란 자기보다 약한 국가가 거기에 속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모든 노력들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교묘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래프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50년부터 2000년까지 전 세계 지니계수를 측정한 그래프다. 지니계수는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며 클수록 불평등 정도가 높다. 세계화는 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심화할수록 세계적인 불평등 정도도 더 심해졌다는 게 그래프로 분명히 확인된다. 세계화는 그것을 찬양하는 사람이 주장하듯 평평하지 못한 운동장을 평평한 곳으로 만드는 게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욱 기울게 했을 뿐이다.


 이렇게 모든 '세계화'의 발자취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의 노래'가 은밀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여기서 굳이 신화적 존재를 언급하는 것은 저자 자신이 국가의 이익을 신화와 역사의 재해석이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와 역사는 하나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으며 설령 그것이 된다고 한들 항구하지도 않는다. 시대가 변하면 신화와 역사의 해석도 달라진다. 그러니 이것이 진리다 하고 내세우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세상에는 영원한 '국제 공동체' 같은 건 없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들은 불확실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자기 이익대로 행동하며,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 몇 주나 몇 달, 몇 년, 때로는 몇십 년까지도 유지하지만, 동맹이란 언젠가는 깨지기 마련이다. 한편, 각 나라의 이익을 규정하는 것은 그 나라의 신화와 역사이며, 또한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신화와 역사의 재해석이다. 20세기가 막 시작될 때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대영 제국은 경이와 자부심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가 시작될 때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대영 제국은 부끄러움의 원천에 가깝다.(p. 146)


 그건 곧 세이렌의 노래에 현혹되는 것과 같다. 그 노래에 무작정 도취되면 남아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세계화'나 '이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눈 앞의 친절한 미소와 들리는 허황된 말만 믿고 무턱대고 뛰어들면 자신을 기다리는 건 끝내 파멸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저자가 국가 이익마저 실은 신화와 역사의 해석에 불과하다며 누군가의 해석을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말고 언제나 그 이면을 살피고 헤아리려 노력하라고 독자에게 누누이 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낱낱이 파헤쳐서 길어낸 소중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훈은 작가가 서문에 제시한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고 싶은 여섯 개의 명제에도 깃들어 있다.


첫째, 지금까지 주류 경제학은 경제적인 진보로 국경이 없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화는 얼마든지 반대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둘째, 세계화를 증진시킨다고 믿었던 과학 기술이 오히려 세계화를 파괴할 수도 있다.

셋째, 경제 성장이 국가 간 불평등을 감소시키는 반면 국가 내 불평등을 증폭시키는 현상은 한 국가가 국제적 생활 수준에 비추어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욕망과 국내의 사회, 경제적 안정 추구 사이의 긴장 또한 필연적으로 고조시킨다.

넷째, 21세기의 거대한 이민 물결이 국내 안정을 해칠 수 있다.

다섯째, 세계화 진전에 기여했던 국제 기구들이 신뢰를 잃어간다. 

여섯째, 세계화엔 한가지 버전만 있는 게 아니다. 냉전 시대가 두 열강이 경쟁하는 시대였다면 21세기는 19세기 제국주의 경쟁 때처럼 다수 열강이 경쟁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p. 12 ~ 13에 나온 것을 개인적으로 정리함.)


 여기서 우리는 이 명제들이 무언가에 대한 반대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명제들이 반대하는 것은 사실 지금까지 세계화를 긍정하고 그 추세가 더욱 심화할 것이라 주장했던 자들이 제시했던 근거들이다. 그렇게 그들은 국가들이 세계화를 통해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국경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세계화 흐름을 과학기술이 통신과 고통을 한껏 발달시켜 가속할 것이라 내다 보았으며 국제적으로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히 국내의 불평등도 해소될 거라며 세계화를 찬양하기 바빴다. 또한, 거센 이민의 물결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한없이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어 새뮤얼 헌팅턴이 예언했던 '문명의 충돌'을 조소 거리로 만들 것이라 여겼고 앞으로는 국제기구가 국가보다 더 강한 힘을 가져서 열강들이 과거처럼 약소국에 큰소리를 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잘 보여주듯 이 모든 것은 현재 하나도 들어맞고 있지 않다.


 그런데 저자가 단순히 그 지지와 근거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핵심 명제들을 만들었다고 보이진 않는다. 여기엔 그보다 훨씬 깊은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저자가 자신의 핵심 명제를 굳이 세계화와 그 심화의 근거들에 대한 반박으로 형성한 것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은 양면을 가지고 있으니 그 이면까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이면을 헤아릴 때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얼마나 달리 해석되는 지는 이 책 곳곳에서 목격하게 되지만 특별히 3부, '21세기의 도전'이 압권이라고 생각된다. 거기서 세계화를 더욱 진전시킬 것이라 여겨졌던, 이민과 테크놀로지 그리고 돈이 실은 거꾸로 점점 더 강하게 세계화를 파괴시킬 것이라는 걸 참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앞에 보는 것을 단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여기저기서 우리를 현혹하고 판단을 착란하게 만드는 가짜 뉴스와 정보들이 횡행하는 요즘엔 더욱 그렇고 말이다.


 물론 이 책이 당부하는 세계화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그대로 그 반대에 있는 국가의 이기주의적 면모를 대할 때도 당연히 가져야 하는 태도다.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섣불리 응원 또는 비난을 하기 전에 그 근저에 가로 놓여 있는 동기와 목적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 구체적 모습을 이루었는지 부터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선동으로 장차 어떠한 위험을 초래할지도 모르고 무작정 '브렉시트'를 찬성한 영국 민중처럼 나중에 더 뼈아픈 후회를 남길테니까 말이다.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정책 결정자들은 돈이 한 나라의 경제적 부담을 다른 나라로 떠넘길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짓을 자꾸 할수록 세상은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분열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승자 독식의 양상을 더욱 인식할수록 점점 더 세계화를 뒤로 돌리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p. 258)


 세계화이든,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든, 어느 것을 대하더라도 섣부른 예단으로 낙관이나 비관을 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쉽게 굴하지 않고 그나마 잔존하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활용하여 최대한 바람직한 대안을 찾거나 만들어가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가 '세계화의 종말'을 쓴 궁극적인 동기도 바로 그런 사유와 실천의 움직임에 대한 희구에서 나왔을 것이다. 미래란 저절로 떨어지는 감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형성하고 있는 것에서 발아되고 결국 그것이 모이고 쌓여 구현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오늘의 현명한 생각과 행동이 현명한 미래를 낳는다. 분명 '세계화의 종말'은 그런 미래를 출산하는데 좋은 산파가 되어줄 것이다.


 어떤 이에게 공정이 다른 이에겐 불공정이었듯, 누군가에게 종말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시작일 것이다. 다가올 세상이 부디 많은 이들에게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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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의 임무
할 클레멘트 지음, 안정희 옮김 / 아작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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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SF 작가  클레멘트 1952 4월부터 7월까지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 연재한 '중력의 임무' 제게 오래도록 전설의 작품이었습니다일단 어디서 역사상 가장 좋은 SF 베스트 10 꼽을  항상 들어가는 작품이었고 그토록 공인된 걸작이라서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에 번역 소개   있지만 SF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상황  많은 관심을 받진 못하고  절판되어 이후 참으로 만나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뭐든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굉장히 유명한 작품은 실체와 만나고 싶은 갈망이 무럭무럭 생기는 법입니다저도 그랬습니다아주 오랫동안 얼마나  책을 읽게 되길 바랐는지 모릅니다그래서 다시 나온  책이 정말 반가웠습니다오랜 기다림이 결실을 맺어 전설을 확인할 기회가 드디어 제게 주어진 것이죠.




  '중력의 임무' 흔히 하드 SF 대표작으로 불립니다. SF  독특한 문학입니다. '과학'이라는 요소와 '이야기'라는 요소가 결합된 것이니까요무조건  둘이 함께 있어야 사이언스 픽션 SF 됩니다여기서 어떤 SF 과학이라는 요소를  중요하게 대하고  어떤 SF 이야기를  중요하게 대할  있습니다 , '과학'  작품의 초점을 맞추는 SF '하드 SF'라고 하고 반대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소프트 SF'라고 합니다쉽게 정리하자면 그렇습니다그러니까 '중력의 임무' '하드 SF'라는 것은 과학에  중심을 두었다는 뜻이겠죠과연  소설은 그러합니다그렇다고 이야기가 재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어쨌든 작품의 중심점을 보다 과학적인 것에 두고 있습니다.

 

  소설의 중심은 '메스클린'이라는 행성입니다태양계 너머  우주 어디엔가 있는 별입니다 행성은 참으로 독특합니다중력이 어마어마하게 크기 때문입니다극지방의 중력은 무려 지구의 거의 700 입니다 중력 때문에  별은 좁고  타원형으로 납작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54년에 나온 초판본은 이렇게 기묘한 형태의 행성 모습을 표지로 삼았습니다.

 토성처럼 고리가 있고 납작한 타원형의 별이 메스클린인 것이죠.


 이런 기묘한 모습 때문에 행여나 우주에서 만나면 시선을 떼기가 어려울  같습니다보통 사람의 몸무게가 중력의 크기입니다우리가 지구 중력의 6분의 1 달로 가면 우리 몸무게 또한 6분의 1 줄어들지요반대로 지구 보다 중력이 6배인 별로 가면 몸무게가 6배나 늘어나구요그렇게나 몸무게가 늘어나면 엄청난 비만의 몸을 가진 것처럼 아무래도 행동하는  어려울 것입니다그런데 중력이 6배도 아니고  백배나  곳이라면 어떨까요과연 생물이 살아갈  있을까요?

 

  클레멘트는 아무런 문학적 상상력 없이 오로지 천문학적 지식과 수학적인 계산만으로 '메스클린행성을 설계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분명하게 보여줍니다그러한 중력이 생명과 삶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말이죠.



 그림에 나와 있듯 메스클린의 중력은 위도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예로 자전축이 기울어진 이 행성에서 궤도가 지나가는 곳의 중력은 지구의 212배라고 나와 있네요.

 아래 3이라고 쓰인 곳이 바로 적도 입니다. 인류는 거기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메스클린'에도 생물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인간과 언어 소통이 가능한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말이죠그런데 어마어마한 중력 때문에 그들은 인간과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집니다몸은 납작하고 다지류이며 중력으로부터 장기들을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껍질을 둘러싼 존재로 말이죠우리가 갯벌에서 흔히   있는 갑각류인 것입니다그것도 가재만큼 아주 작은.



이것이 바로 그 생물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플라이어'라고 부르는 인류는 중력이 지구의 3 밖에 안되는 적도에만 간신히 있을  있어서 행성 전체를 탐사할 수는 없습니다어쩔  없이 메스클린에 살고 있는 생명체의 도움을 빌려야 하는데그렇게 해서 '발리넌'이라고 부르는 생명체와 거래를 하게 됩니다발리넌은 '브리호'라는 배의 선장으로  배로 인류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정보를 모아 가져다 주는 대신 그들이 필요한 물품을 인류에게서 조달받는 거래인 것이죠.



 앞에 뗏목 같은 게 보이시나요? 그것이 바로 발리넌이 지휘하는 배 '브리 호' 입니다.

 배 위에는 발리넌의 지휘에 따라 열심히 일하고 있는 메스클린의 종족들이 보이네요.


 바로  브리호의 여정 '중력의 임무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여정을 통해 어마어마한 중력을 가진 행성의 모습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경험시키죠전설의 확인인 지라 경외하는 마음으로 읽은 것도 있지만 그게 아니었어도 정말 재밌게 읽었을 겁니다무엇보다 한치의 빈틈도 없이 정교하게 설계된 행성의 묘사를 보는 것만 해도 놀라웠으니까요도대체 이런 상상  천체를 어떻게 이토록 생생하게   있을까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그런데 그럴만한 까닭이 있더군요   편에 있는 저자  클레멘트의 후기로   있었습니다그는 여기서 소설에 나와 있는 행성 묘사가 단순히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정확한 이론에 기반한 정교한 계산의 결과라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그는 정말로 있을  있는 모든 자연 조건의 변수를  생각했고 그것을 실제 자연 법칙에 따라 가능한 모습을 계산했더군요그러니 오히려 행성 묘사가 실감나지 않는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과정까지 합하여과연  책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SF 공상을 좋아하는 아이만 읽는 것이라는 편견이 있습니다하지만 '중력의 임무' SF 그런 것이 아니라 실은 아주 흥미로운 과학적 가설의 실험장이기도 하다는 것을 훌륭하게 증명했습니다그래서 더욱 SF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 권해드리고 싶네요또한 과학을 아직도 어려워하는 분들에게도 그러고 싶습니다소설과 저자의 후기를 읽으면 분명 없던 과학에 대한 흥미도 용솟음   같으니까요정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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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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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는 미국에 이민 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월마트에서 모욕적인 인종차별을 받고는 속상한 마음에 머나먼 곳에 있는 나에게까지 전화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면 꼭 한 번은 심한 향수병에 걸린다고 하는데 정말인 것 같다면서 요즘은 어쩐지 뿌리가 잘려나간 나무가 된 기분이다.'라며 울컥하는 어조로 그는 말했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가즈오 이시구로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탔다.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 있고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상이니만큼 나 또한 수상 작가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세계를 순서대로 제대로 한 번 파봐야겠다고 생각했고 데뷔작,인 '창백한 언덕 풍경'부터 일단 손에 잡았다. 그 소설을 읽다가 문득 친구가 생각났던 것이다. 소설에 나온 주인공이 실은 그 친구와 그리 다르지 않은 내면의 풍경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믿고 변화를 찾아 떠났지만 그건 또한 자신이 안전하게 거하고 있던 껍질이 깨어지는 것과 같아서 전보다 더 많은 타격에 당황하는 모습을 말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말과 같다.


 알은 세계이다. 새롭게 태어나려 하는 자는 누구든 이전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바로 변화에 따른 파열과 통증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고향이기도 한 일본 나가사키에서 50년대에 살다가 지금은 두 번째 남편인 영국인을 따라 영국에 와서 살고 있는 에츠코라는 여인이다. 남편도 죽고, 첫 번째 남편과 낳았던 첫째 딸인 게이코도 자살한 지금, 그녀에겐 영국인 남편과 낳은 둘째 딸, 니키밖엔 없다. 그녀는 과거 일본의 기억을 잊기 위해 영국 이름을 지어주길 원했지만 남편이 일본식 이름을 고집하는 바람에 영국 이름도 아니고 일본 이름도 아닌 니키가 되어버렸다. 이름에서 나타나듯 니키는 경계의 존재다. 영원히 거주하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방랑하는 것도 아닌, 한 마디로 얼레에 아주 느슨하게 연결된 연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런 니키가 첫째 딸 게이코의 자살로 상심해 있는 에츠코를 위로차 찾아오고 게이코 때문에 에츠코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나가사키에서 만났던 사치코와 그녀의 어린 딸, 마리코를 떠올린다.


 때는 1950년대.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의 패전을 딛고 한국 전쟁을 기회로 한창 재건과 부흥의 기치를 올리고 있었다. 소설의 주된 배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고형이기도 한 나가사키. 올해 상영한 영화 '군함도'로 더욱 유명해진 이곳은 아시다시피 2차 대전 때 원자 폭탄이 떨어진 도시다. 절망과 죽음만이 가득했던 폐허. 하지만 현재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소설은 주인공 에츠코가 사치코와 한 '케이블카' 탑승과 그녀의 시아버지인 오가타 상과의 '평화 공원' 외출을 통해 두 번이나 나가사키가 과거와 완전 다른 곳이 되고 있다는 것 강조한다. 시대는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과거의 질서나 가치관 그리고 상처는 빠르게 유물이 되었고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에츠코는 사치코 옆에서 완전히 변모한 나가사키를 내려다보며 오늘부터 낙관주의자가 되어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겠다고 결심한다. 사치코는 그런 변화를 아주 적극적으로 껴안으려는 인물이었다. 창공 높이 한없이 오르기만 하는 연처럼 그녀는 새로운 삶을 손에 쥐기 위해 미국인 남자를 사귀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안정된 현실과 딸 마리코의 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가려한다. 내 친구가 그랬듯.


 소설엔 이렇게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 

 사치코가 그렇고, 변하는 나가사키를 보며 과거의 상처에 얽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에츠코도 그러하며 나가사키에서 누구나 알아주는 고귀한 신분이었다가 전쟁으로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여 이제는 작은 국숫집을 운영하는 후지와라 부인도 그러하다. 후지와라 부인의 과거 위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에츠코의 시아버지 오가타 상은 몰락한 그녀의 처지를 더없이 슬퍼하며 그러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걱정하지만 정작 후지와라 부인 본인은 화려한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는 변한 현실을 오롯이 받아들인다.


 반면 시대가 그렇게 변했는데도 그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오가타 상이다. 그는 과거의 질서와 가치관에 연연한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 때, 군부와 결탁하여 올바른 목소리를 낸 교사들을 함부로 해직시키고 체포당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과오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은 시대의 희생자였을 뿐이라며 스스로 정당화하고 그런 과오를 언급하며 자신을 공격한, 아들의 친구였던 시게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찾아가 따지려 한다. 그런 오가타 상이 에츠코에게 자주하는 말은 '그래도 옛 것이 좋다.'다. 영국으로 와서 완전히 달라져 버린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을 결행한 게이코도 여기에 속한다.


 이렇게 보자면 오가타 상과 에츠코 그리고 사치코를 변화 앞에서 과거를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하나의 선으로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오가타 상은 변화된 현실을 거부하고 과거만 존속시키려 하고 사치코는 그와 정반대로 변화를 위해 과거를 깡그리 지우려 한다. 이런 태도를 작가는 사치코가 전쟁 때 폐허가 된 도쿄에서 본, 자신의 아기를 두 손으로 물속에서 익사시키려 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형상화 한다. 사치코 역시 소설의 마지막에서 자신과 함께 미국으로 가려 하지 않는 마리코가 애지중지하는 새끼 고양이들을 강물 속에 익사시킨다. '데미안'에 나왔듯,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해 이전의 껍질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에츠코에 있어서 게이코의 자살 역시 이와 비슷한 의미라고 보인다. 니키에게 영국 이름을 고집했던 에츠코의 모습이 마리코의 새끼 고양이들을 죽이는 사치코와 은연중 닮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가사키의 에츠코는 그 중간에 있다.

 낙관주의자가 되기로 했다는 에츠코의 말은 '과거는 과거고, 미래는 미래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 에츠코는 그 어느 하나도 섣불리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이른바 '절충주의'다. 이런 점에서 나는 특히 소설에서 두 장면에 눈길이 갔다. 소설 후반에 강변 언덕의 어둠 속에서 에츠코와 마리코가 만나는 장면과 마지막에 미키와 기차역에서 헤어지는 장면이다. 마리코도, 미키도 딸의 위치에 있고 모두 에츠코와 마지막 장면이라는 점에서 둘은 상당히 닮아있는데 연출 또한 그랬다. 마리코와 미키 모두 기묘한 충격 속에서 에츠코를 보는 것이다. 마리코는 공포 속에서 에츠코를 본다. 마리코가 내내 두려워했던, 자신을 강 건너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무서운 여인의 모습을 에츠코에서 봤기 때문이다. 미키는 충격이다. 자기처럼 변화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은 어딘가에 강하게 매여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마리코는 과거를 고수하려 하고, 미키는 과거를 거부하려 한다. 이렇게 둘의 입장은 정반대다 하지만 그 순간, 에츠코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꽤 닮아있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다. 에츠코가 절충주의이기 때문이다. 에츠코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다. 마리코와 미키 모두 자신과 상반되는 에츠코의 얼굴을 보고서 놀란 것이다. 에츠코는 둘 모두에게 전혀 다른 가능성을 말하는 존재다. 그러나 섣불리 취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그리스 신화 속 세이렌의 노래처럼 자칫하다간 파멸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자신이 언제까지나 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세계의 껍질이 산산이 깨어지는.


 그런데 이러한 절충주의적인 태도는 사실 가즈오 이시구로가 부모님을 따라 처음 영국에 왔을 때 가졌던 것이기도 하다. 그는 9살에 영국에 와서 이방인이 되었다. 이방인에겐 오직 하나의 운명만이 있을 뿐이다.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면 변화된 현실에 무조건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거부가 허용되지 않는 강요다. 가즈오 이시구로도 그랬다. 전범 국가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당한 인종차별, 자주 느꼈던 고향과 친구들에 대한 향수로 그는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자각을 지녀야 했고 그때마다 일본은, 우리 또한 그러하듯이, 자신의 상상 속에서 한없이 이상화된 모습으로 구현되어 달콤한 유혹으로 찾아왔다. 그건 지금 있는 현실에 대한 거부와 변화에 대한 부정을 꼬드기는 속삭임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귀 기울일 수는 없었다. 적응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이시구로에게 그 속삭임에 대한 반응은 아무래도 마리코처럼 달아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응하는 것에 기를 쓰고 열을 올릴수록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자신에게 힘겨움과 피로를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애써도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 또한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절망도 했을 것이다. 이방인은 다른 사람보다 현실의 중력을 더 많이 느낀다. 자연히 그 중력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도 클 수밖에 없다. 미키는 그런 저자의 열망이 형상화된 존재일 것이다. 마리코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마음을 대변하는 존재였을 것이고.


 그렇게 마리코와 미키 모두 실은 작가의 분신이며, 그 둘을 아우르며 그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늘 모색하는 존재로서 에츠코가 빚어졌을 것이다. 변화 앞에서 과거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특히나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정체성과 현실이 끝없이 유동하는 현대 사회인 것을 감안하면, 오가타 상이든 사치코든 누구의 손도 섣불리 들어줄 수 없으며 모든 것에 자신을 열어놓고 환경과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입장을 적절히 취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주디스 버틀러의 말마따나 우리의 정체성이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먹고 행위를 한 것으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에츠코의 모습에 과거의 잘못은 전혀 반성하지 않은 채 무작정 이제 미래만 바라보자면서 화해를 요구하는 현재 일본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져 작가의 진심을 이해하면서도 순순히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특히나 이번 트럼프 방문 때 독도 새우에 대해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오만하게 비난만 해대는 행태를 보노라면 말이다. 이런 것을 적절히 걸러서 듣는다면, 무엇보다 저자가 살아온 경험이 눅진하게 배여있는 조언이기에 한 번 찬찬히 헤아려볼만한 가치는 있는 것 같다.


 문득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 이런 말이 나왔던 게 생각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치통을 과소평가하는 지식인의 말이다. (...) 나의 자아는 사유에 의해 당신의 자아와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사람은 많으나 생각은 적다. (...) 만약 누군가 나의 발을 밟는다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이다. 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 즉 제 감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인 것이다.


알고 보면 '창백한 언덕 풍경'은 무엇보다 이런 감정의 풍경이며 그것도 변화로 인한 파열이라는 치통을 먼저 그리고 깊이 앓은 자가 그때의 심경을 짙게 투영하여 그려간 풍경화다. 딱히 사건이라고 말할만한 게 일어나지 않고 전개 또한 별다른 충격 없이 담담히 진행되기에 내게는 더욱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라기보다 그저 보통의 한 사람으로서 갑자기 닥쳐온 변화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한 것을 담백하게 풀어낸 기록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친구가 생각난 김에 다음에 만나면 바로 이 책을 선물할 생각이다. 여기, 너와 비슷한 고통과 고민을 가졌던 한 사람이 있다고. 부디 조금의 위안과 치유를 얻게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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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스
앤디 위어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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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뷔작 '마션'으로 단번에 가장 유명한 SF 작가 중 하나가 된 앤디 위어의 신작이 나왔습니다.

 제목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 이름인 '아르테미스'. 제목 그대로 이번엔 화성이 아니라 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마션'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션'의 마크 와트니처럼 아무도 없는 황량한 달에서 로빈슨크루소처럼 살아남는 이야기라는 말은 아니에요. 이야기 속의 달은 이미 인류에게 개발 될대로 개발되어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살고 있기 때문이죠. 구체적인 연대가 소설에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대략 70년 후 쯤으로 추정됩니다(2080년 쯤. 앤디 위어는 한 인터뷰에서 인류가 2060년에 달에 도시를 만들기 시작할 것이라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인공이 마크처럼 힘들다고 하냐고요? 그건 이 달이 아무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철저하게 가진 돈에 따라서 생활 수준이 확연하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의 삶이 더 극단적으로 되어버린 곳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곳이 바로 '아르테미스'의 십대에다 아랍계(국적은 '사우디 아라비아'. 아버지는 용접공인데 지금 한창 메카를 향해 제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자전축까지 고려해 정확하게 기도할 방향을 잡아주는 기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여주인공 재즈가 살아가는 곳입니다.


표지 디자인은 아무래도 전에 나온 '마션'과 통일성을 주려고 한 것 같습니다.


 '아르테미스'란 달에 만들어진 최초이자 유일한 도시의 이름입니다. 다섯 개의 반구로 된 돔으로 형성된 도시인데 그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지요. 그 도시는 가지고 있는 돈에 따라 엄격하게 위계적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여기에 대해서 앤디 위어는 달 이주와 거주가 국가 주도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요즘 한창 떠오르는 민간 우주산업처럼 상업적인 이익을 바라는 기업 주도로 이뤄질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로 달에 만들어진 도시 사회는 자본 중심으로 가게 될 거라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재즈는 가장 밑바닥 계층으로 흙수저 중에서도 발로 밟아 짓이기까지 한 흙수저라 할 수 있습니다. 흙수저들이 그나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사다리라고 할 만한  길드조차 들어가지 못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부자들이 원하는 밀수나 중개해 가면서 근근히 먹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 오늘만 바라보고 살고 있으니 '마션'의 마크와 별 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생존률이 희박한 무인도는 저 바다 건너편에만 있지 않습니다. 내일 살아남을 길이 막막한 곳이라면 어디나 무인도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세상이라면 그런 무인도를 가급적 줄여줘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세상도, 이야기 속의 아르테미스도 그런 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까 하는 것에만 골몰할 뿐.


'아르테미스'의 모습입니다.


 어쨌든 재즈는 늘 자신에게 밀수를 의뢰하는 최우수 고객이자 '아르테미스'의 최상위 부유층 트론이 한 가지 제안을 받습니다. 자신이 알루미늄 사업에 진출하려 하는데 기존 기업이 도시에 산소를 공급하는 대가로 전기를 공짜로 무한정 쓰고 있어 경쟁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산소 공급을 중단시키기 위해 알루미늄을 채취하는 기계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는데 그 일을 재즈가 해줬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불법적인 일을 하다 걸리면 지구로 바로 추방되기 때문에 하지 않으려 했지만 평생의 목표인 4만 슬러그(달에서 통용되는 화폐 단위입니다. 이 돈으로 어느 정도의 무게를 지구에서 달로 가져올 수 있는 지를 나타낸다고 합니다.)를 훨씬 뛰어넘는 백만 슬러그를 준다고 하니 돈 없어서 쩔쩔매는 재즈는 결국 수락하고 맙니다.


 이렇게 '마션'이 서바이벌에 치중하고 있다면, '아르테미스'는 케이퍼 장르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케이퍼 장르가 대부분 그렇듯이, 사건이 결코 훔치고 망가뜨리는 것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죠. 보통은 주인공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음모와 연결되기 마련입니다. 물론 '아르테미스'도 그러합니다. 제의 받은 것을 완전하게 완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약속한 돈을 받기 위해 의뢰한 트론을 찾아갔는데, 거기서 그만 재즈는 트론이 무참하게 살해된 것을 본 것입니다. 재즈는 그렇게 받아야 할 돈을 날린데다 수확기를 부순 것이 자신이라는 걸 눈치챈 경찰에게서 추적까지 받게 됩니다. 10년간 고군분투 하면서 간신히 지탱하면서 쌓아올라왔던 자신의 삶이 하루 아침에 깡그리 붕괴될 지도 모를 위기에 봉착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알고 보니 트론은 암살된 것이었고 그것도 재즈가 했던 일 때문에 죽은 것이었습니다.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그 살의는 재즈를 향합니다. 지구 중력의 6분의 1 밖에 안되어 누구나 지구보다 가볍게 살 수 있는 그 곳에서 오히려 지구보다 60배 무거운 중력의 삶을 혼자서 버텨가야 하는 재즈는 과연 이 위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마크가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듯이.


 재밌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앤디 위어의 소설적인 재미는 이야기보다 행성이 가진 아주 현실적인 자연 조건과 실제하는 온갖 물리법칙과 과학적인 지식이나 기술들이 하나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융합되는지 지켜보는 데 있는 것이 더 크죠. SF의 매력이란 바로 그런 것이죠. 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이 작품, '아르테미스'는 그런 재미를 충분히 느끼게 해주었다고 말하고 싶네요. 물론 '마션'만큼은 아니었습니다만. 뭐, 이야기 자체가 '마션'과 완전히 다른 방향이라 그런 건 감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하드SF 적인 면모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저는 작가가 재즈에게 도시를 벗어나 화성처럼 황량한 달의 벌판에서 활약할 기회를 주는 케이퍼 장르를 취한 게 아닐까 생각되네요. 아무래도 하드SF의 특성인 아주 현실적인 자연 조건과 물리 법칙을 리얼하게 구현하고 그것을 이야기 속에 무리없이 섞어 놓으려면 케이퍼 장르처럼 무언가를 노리고 덤벼드는 것만큼 좋은 것도 또 없으니까요. '미션 임파서블'이나 '오션스 일레븐'처럼 말이죠. 이 작품을 읽다가 문득 생각했는데, 앤디 위어는 아무래도 주어진 조건 속에서 그 조건의 제약을 최대한 받으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듯 합니다. '마션'도, '아르테미스'도 결국은 그런 이야기이니까요. 그래서 지금 앤디 위어의 이야기가 널리 환영받으며 읽히는지도 모르겠네요. 무인도로 가득한 대양처럼 세계 어디든 '헬조선'인 요즘이니까요. 밑바닥도 모자라 지하까지 내려가는 척박한 환경 속의 삶이지만 그래도 삶이 야박하지 않아서 뚫고 나올 구멍 하나 정도는 슬쩍 감춰놓았으니 포기하지마라는 응원일까요? 뭔가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이토록 무인도가 많은 세상, 자신의 작품이라도 뗏목이 되어서 그걸 줄여주고 싶다는. 네, 너무 수사적인 거 인정합니다. 요즘 제 상황이 어느 정도는 무인도의 피로를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제 말과 아무 상관없이 '아르테미스'는 앤디 위어의 전작을 좋아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즐기고 싶다면 손에 들어도 좋을 작품입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문득 '그래비티'의 스릴러 버전 스타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하찮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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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이야기 11 - 초한쟁패, 엇갈린 영웅의 꿈 춘추전국이야기 11
공원국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대학 다닐 때, 중국 역사 강의를 들었다. 그 때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게 기억난다. 춘추 전국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들의 삶을 잘 살피면 앞으로 살아가는 데 많이 도움이 될 거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춘추 전국 시대가 두 가지 점에서 오늘날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저마다 생존과 정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무한 경쟁 시대라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타고난 태생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능력이 모든 것을 좌우했던 시대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춘추 전국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잘 살피고 헤아리면 분명 그와 비슷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꽤 많은 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당시 나는 춘추 전국 시대를 그저 공자가 유세를 하던 때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의 그런 말씀은 꽤나 흥미로웠고 그 때부터 춘추 전국 시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기란 어려웠다. 교수님은 사마천의 '사기'를 훌륭한 텍스트로 추천해 주셨지만 '사기'를 읽어본 분은 아시겠지만, 특히 열전은 인물 별로 나열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지라 얼른 명쾌하게 정리하기가 다소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춘추 전국 시대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은 바람은 못 다 이룬 꿈으로만 남았다. 그러다 사는 게 바빠 그 미련조차 깡그리 잊고 있을 무렵, 불현듯 인터넷 서점 광고로 한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공원국 작가 '춘추 전국 이야기'였다. 



 제목을 보자마자 예전의 열망이 삽시간에 환기되면서 그 책을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요모조모 살펴보니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갔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집필한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내가 찾고 있었던 바로 그 책이었다. 2010년에 첫 선을 보인 이 책은 시리즈로 계속 나오다 어느덧 8년의 세월이 흘러 드디어 올해 11권으로 대단원의 막까지 내린 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어떻게 이 책의 존재를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가진 바람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던 관심을 타박하면서 난 얼른 이 책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11권, 그러니까 마지막 권이다. 부제는 '초한쟁패'로 진이 망할 무렵에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중국의 패자를 두고 자웅을 겨루었던 때를 담고 있다. 나는 '초한지'를 언젠가 꼭 한 번 읽어봐야지 마음 먹고 있을 정도로 항우와 유방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목구멍 아니 호기심이 포도청이라 이 책부터 만나기로 했다. 


 사실 11권이 담고 있는 시간은 엄밀히 말해 '춘추 전국'이 아니다. 춘추 전국 시대는 진나라의 통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대해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으리라. 저자도 그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듯 하다. 책 머리에 왜 이 책을 써야만 했는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원래는 진나라의 통일로 춘추 전국 이야기가 끝났어야 하지만 굳이 이처럼 한 권의 책을 더 더하면서 그것도 진나라가 갈가리 쪼개지고 유방에 의해 다시 한으로 통일되는 시대의 이야기를 하게 된 연유엔 사실 한 인물이 있었다. 첫 권의 주인공인 관중에 필적할만한 인물이 이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하는데, 작가는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인물이야 말로 자신이 왜 춘추 전국 이야기를 썼는지, 그 주제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춘추 전국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보이고 싶었던 이상적인 군주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고 그가 세운 나라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그나마 가장 바람직한 체제의 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야 그는 꼭 그 이야기를 하여야만 하였다. 그 인물이 바로 유방이다. 본디 결말이란 작가의 주제가 한껏 드러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권에서 이렇게 유방과 한 나라를 통하여 8년 간 계속해온 춘추 전국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는지 전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라 할만 하며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가진 영웅과 체제 그리고 역사에 대한 시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사마천의 '사기'와 함께 보면 더 좋을 것 같아 찍어 본 사진입니다.

 '춘추전국이야기'를 읽고 '사기'를 읽었는데 '사기'의 내용을 훨씬 더 쉽고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책은 진시황의 둘째 아들 2세가 이사와 조고의 음모로 장자인 형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진나라 말기의 시간으로 시작의 문을 연다. 나라는 하늘이 정해주지 않은 자가 간사한 무리의 협잡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인지 국운은 쇠퇴하여 당장 내일 멸망한다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되어 있다. 무릇 나라가 이렇게 되는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사해서 따지고 보면 결국 그 자리에 있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온갖 간사한 꾀와 아첨하는 세치 혀로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조고가 그랬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왕위의 정당한 후계자를 죽음으로 몰았으며 덜 떨어지고 조고만큼 자기밖에 모르는 2세를 왕위에 앉혔다. 위가 그러니 아래 또한 어떻게 바르겠는가? 똥에 똥파리가 꼬이듯 대저 꾀와 아첨으로 흥한 자 곁에는 그와 비슷한 무리가 모이게 마련이다. '회남자'에게 이르기를 나라가 망하기 가장 손쉬운 길은 상 받을 자가 벌을 받고 벌 받을 자가 상을 받으면 된다고 했는데, 이 때의 진나라가 그와 같았다. 이러한 나라는 백성의 신뢰를 금방 잃게 되니 곧 진승과 오광 같은 자들이 나왔다.


 진승과 오광. 그들은 정말 가진 것 하나 없는 무지렁이 백성이었다. 죄마저 지어 진나라 수도로 압송되어 가던 도중, 진승과 오광은 어차피 죽을 거 이름이나 남겨 보자면서 사람을 모아 난을 일으켰다.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자가 아무런 준비 없이 일으킨 봉기 임에도 불구하고 삽시간에 많은 사람이 호응하여 그 아래로 모인 것을 보면 나라가 백성에게 얼마나 신망을 잃었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진승이 사람을 불러 모은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이 말을 우리들 대부분은 국사 교과서를 통해 고려시대 노비 만적이 난을 일으키며 했던 것으로 알고 있을 테지만 실은 그 말의 원래 저작권은 진승의 것이었다. 진승의 난은 결국 성공하여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진에게 커다란 위기를 안긴다. 그러나 옛 초나라 사람들이 진승을 왕으로 추대하자 그는 그만 안주하고 더이상 전쟁 선봉에 나서지 않는다. 저자는 그것을 진승의 대단한 패착으로 평가한다. 신념이 아니라 더이상 이대로 못살겠다고 일어난 난이요 사람들이 모인 이상 그 마음이 변질되지 않고 바라는 세상이 올 때까지 지속되기 위해선 흔들리지 않게 잡아줄 구심점이 필요한데 그래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의 불씨가 되어준 진승은 전장의 선봉이 되어야 했다. 사람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따를 수 있도록. 하지만 큰 눈으로 천하를 도모하기 보다 자기 잇속에 빠져버렸고 그 때문에 모처럼 평범한 백성에 의해 타올랐던 혁명의 불길 또한 중원 모두를 불태우진 못했다. 진승이 자기 잇속만 챙기자 그를 따르던 이들 역시 진승의 명을 받아 정벌하러 나갔던 무신이 진여와 장의의 간계로 진승의 명을 어기고 조나라 왕이 되었듯 자기 잇속만 챙겼던 것이다.


 이는 큰일을 도모할 때 자신이 언제 나아가고 언제 물러가야 하는지에 대한 소중한 교훈이 된다. 항우와 유방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항우와 유방은 진승과 달리 자신의 전쟁에서 항상 선봉에 섰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잘 알듯, 항우는 졌고 유방은 이겼다. 전쟁에서 승패란 모두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과연 무엇이 승패를 갈랐던 것일까? 항우와 유방은 태생부터 많이 달랐다. 쉽게 말해 항우는 고귀한 신분에 기골 장대한 육체하며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유방은 미천한 신분에 가진 것도 거의 없었다. 항우는 일찌기 장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유방은 건달로 지내다가 겨우 말석의 벼슬 하나 얻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천하는 끝내 유방의 차지가 되었으니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항우는 결코 하지 못했던 보다 더 큰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기 것을 희생하는 마음가짐이었다. 항우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오만했고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인정하지 않았던 반면, 유방은 늘 자신의 장점 보다 결점을 더 많이 생각했고 사람에 대해 항상 겸손하게 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것은 챙기려 하지 않았고 언제나 득실을 따져야 할 때마다 이해 관계 보다 대의를 중시했다. 결국 나 보다 더 큰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유방으로 하여금 천하를 손에 쥐게 했던 것이다.


 이는 진나라의 재상 이사를 봐도 알 수 있다. 이사는 진시황을 도와 춘추 전국을 끝내고 통일한 뛰어난 재상이다. 원래 그는 장량만큼 현명한 책사였지만 진나라가 통일하고 높은 벼슬 자리에 오르자 그만 거기에 깊이 안주한 나머지 조고의 세치 혀에 어리석게 놀아나 결국 진나라도 패망하고 자신과 가문 또한 멸문 당하게 만든다. 진승도 그랬고, 항우도 그랬듯 모두 자신이라는 따스한 이불속을 절대 벗어나려 하지 않은 결과였다.


 오로지 유방만이 유일하게 이불 속을 박차고 뛰쳐 나갔다. 그래서 비록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세상이라 하여도 더 가까이 보듬어 안으려 노력했다. 궁극적으로 그런 자세가 유방을 천하의 제왕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지략과 무예 모두 유방을 월등하게 앞섰지만 결국 유방에게 배신당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한신 또한 이불 속이 주는 온기에 취해버린 자였다. 그만한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헛되이 삶을 잃어버리고 만 것은 괴철의 충고를 깊이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철은 그런 일이 있기 훨씬 전에 한신에게 '토사구팽'을 이야기 하며 너무 뛰어난 사람은 바로 그 뛰어남이 군주에게 위험이 되어 시대가 평안하게 되면 살아남지 못하게 되니 지금 한신의 나라로 항우와 유방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하는 쪽으로 나아가라고 권했지만 새겨듣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과 현재 상황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모험 보다 안주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보자면 결국 자신을 얼마나 던질 수 있느냐가 승패를 좌우하는 것 같다.

 '11권'의 역사는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신을 내려놓고 더 멀리 볼 수록 승리의 여신에게 안길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아마도 이런 유방의 면모가 저자로 하여금 유방을 관중과 같은 뛰어난 존재로 평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진과 한의 싸움은 인간의 복합성을 재정의 하는 싸움이었고 한과 초의 씨움은 제왕이 되고자 하는 이와 패자로 만족하고자 하는 이의 싸움이었다.(p. 16)


 '춘추 전국 이야기'의 마지막 권은 역사란 궁극적으로 자신을 얼마나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잘 알려주는 책이었다.

 아무리 커다란 나라를 다스리고 또 아무리 천하의 대권을 두고 다퉈도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늘 일상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을 대할 때 취하는 태도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보다 큰 것을 위해 자신을 얼마나 잘 통제할 수 있느냐가 성공 여부를 좌우했던 것이다. 나의 것을 많이 내려놓고 더 많은 사람과 더 큰 세계를 품에 안을수록 성공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것은 마치 손을 쥐고 펴는 것과 같았다. 내 것을 지키려 움켜쥐는 손은 주먹 안의 협소한 공간밖에 가지지 못하지만 내주려 손을 활짝 벌리면 하늘 전체를 받칠 수 있듯이 말이다. 이제야 왜 대학 교수님이 오늘을 살아가는데 정말 필요한 지혜는 춘추 전국 시대에서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지 잘 알겠다. 앞에 한 말을 그냥 들었다면 난 전혀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승과 항우, 이사와 한신 그리고 유방의 구체적 삶을 통해 여실히 느끼고 나니 마음에 깊이 와 닿지 않을 수 없다. 유방은 큰일을 본격적으로 도모하기 직전 도망자의 몸이 된 적이 있는데 그 때 자신의 길을 가로막은 뱀을 칼로 베어버렸다고 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장차 그가 진을 멸망시킬 계시라 여겼으나 지금 드는 생각으론 유방이 베었던 뱀은 바로 자신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욕망, 이해 관계, 이기심 같은 것들. 진승과 항우 그리고 이사와 한신을 보니 결국 자신의 길을 가로 막았던 뱀은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게도 그런 뱀이 있다. 지금까진 그 뱀을 못 본척 하고 비켜가거나 살살 달래기만 했는데 유방의 이야기를 한껏 겪은 지금 이제는 베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미루는 것도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것 역시 책을 통해 똑똑히 보았으니.


 무협지를 읽는 것만큼 재밌고 흥미진진한 역사서였다. 그러나 항우와 유방이 활약했던 시대보다 더 많은 알게 된 건 바로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역사가 무엇보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을 알고 싶다면 '춘추 전국 이야기'를 벗해보시라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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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1-28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타고난 태생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이 모든 걸 좌우하던 시대˝가 잠깐 왔다가 끝나버려서 춘추전국시대가 난감해졌겠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ICE-9 2017-11-28 17:56   좋아요 1 | URL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도 한나라까지는 이어졌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으셨을지도 모르겠네요^^
끝나도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어떤 시대든 좋은 것들은 자취를 남겨 뒤에 오는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는 것 같습니다. 길이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걸어갔기에 길이 되었다는 루쉰의 말처럼.^^

양철나무꾼 2017-11-28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11권까지 다 구해놓고는,
지금 앞부분 어디에서 잠깐 멈춤입니다.
제가 이쪽에 대해서 지식이 워낙 얄팍하다보니,
군데 군데 숨은 복병처럼 막혀버립니다.

일단 팟캐스트 방송 들으며 워밍업하고,
다시 내달려야 겠습니다.^^

저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ICE-9 2017-11-28 18:00   좋아요 0 | URL
앗! 양철나무꾼님 너무 반갑습니다. 말씀도 감사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막혀버리는 게 양철나무꾼님의 지식이 아니라 문장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제게도 좀 편한 문장들은 아니었거든요. 어쨌든 이렇게 말씀 남겨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기쁘네요. 양철나무꾼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