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생활 풍경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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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을 흐르는 물의 먼 한숨 소리...'

 

 만일 저에게 아모스 오즈의 소설에 대해 한 문장으로 말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내리고 싶군요.

 저에게 아모스 오즈란 광막한 어둠을 홀로 마주하고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 어둠은 광막하기도 하지만 굳건하기도 합니다. 육중한 몸으로 새 날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막고 있는 듯해 보이니까요. 그건 희뿌연 새벽의 날 선 푸른 여명조차 보여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멈추고 빛마저 삼켜버리는 단일한 어둠은 그야말로 변화를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제겐 그 어둠이 바로 아모스 오즈가 마주한 어둠으로 보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내밀어 타자를 껴안을 여지가 전혀 없는 어둠이므로 그것을 마주한 자에겐 오로지 두 개의 길 밖에는 없는 셈입니다. 기꺼이 삼켜져 완전한 하나가 되든가 아니면 달아나 홀로가 되든가...

 

 오즈는 거기서 두 번째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미 그는 그의 나이 열 다섯 살 때, 그제까지의 삶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고 같이 일하고 같이 먹는 운명공동체라 할 수 있는 키부츠로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훗날 왜 텔 아비브에 머무르지 않고 그 곳으로 들어갔냐고 묻자 오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때 텔 아비브는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키부츠는 충분히 급진적이었다."라고. 말하자면 그는 그 때 자신의 이상이었던 시오니즘을 쫓아 과감히 현실을 버린 것이었죠. 그렇게 그는 달아났습니다. 스스로 원래 성인 클라우스너를 버리고 지금의 성인 오즈로까지 바꿔가면서 말이죠. 그는 거기서 무려 25년을 지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장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글을 썼습니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키부츠는 일주일 중 단 하루만 그에게 글쓰기를 허락했습니다. 비록 하루 동안이지만 그는 열심히 글을 썼고 그렇게 해서 아직도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우는 '나의 미카엘'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의 성공으로 그는 일주일 중 삼일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죠. 그 시간동안 그는 열혈한 시오니스트였고 키부츠는 그의 이상이 구현된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키부츠를 떠나게 됩니다. 그 키부츠가 더이상 자신의 이상에 맞는 존재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죠. 말하자면 그는 다시 달아난 자가 된 셈인데 수십년동안 생활하면서 자신의 이상이 구현된 곳이라 여겼던 그 곳에서 그는 왜 또 달아나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건 그 이상이 타협없는 독단이 되어 더 이상 타자를 수용하지 않는 어둠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이 또한 어떠한 비극을 불러오는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게 된 게 바로 오즈가 직접 참전했던 1973년의 제 4차 중동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상이 얼마나 폭력적인 전횡으로 많은 타인들을 고통과 슬픔에 빠뜨렸는지 똑똑히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세계의 종말을 계시를 통해 보았던 요한묵시록의 요한과 같이 그는 자신이 기꺼이 하나가 되었던 그 어둠에 깃들어 있던 진실을 비로소 보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달아난 것입니다. '달아남'이란 거부의 몸짓입니다. 더 큰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저버림입니다. 특히 성경에선 더욱 그렇죠. 믿음의 아버지라는 아브라함을 비롯 야곱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롯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내내 속세의 질서와 욕망으로 부터 달아납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이사야나 요나를 비롯한 선지자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들 역시 신의 음성을 듣고 광야를 헤메이게 되지요. 예수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한 요한도 예수도 달아남의 여정을 똑같이 밟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달아남'이라는 것이 신을 믿는 자가 신이 진실을 계시했을 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행동으로 제시합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마치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가 아니라 '진실이 너희를 달아나게 하리라'와 어쩐지 같지 않나요? 아마도 그래서 진실을 알게 된 자들은 유랑의 운명을 필연적으로 걷게 되나 봅니다. 그러니까 진실이 그를 달아나게 한다면 그 진실을 앎으로 부터 오는 책임이 그를 끊임없이 유랑하도록 하는 것이죠. 맞습니다. 생각해보면 유랑이야 말로 오즈의 모든 것입니다. 키부츠를 나오게 된 까닭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는 '여자를 안다는 것'은 여자들 사이를 유랑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를 삼각관계의 연애담으로 풀어간 '블랙박스' 역시도 욕망과 미련 사이를 끊임없이 유랑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유랑이란 무엇입니까? 머물 수 없는 것. 그렇게 경계를 넘나드는 것. 언제나 다른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끊임없이 맞게 되는 것이겠죠. 그렇게 떠도는 자는 변화의 한 가운데 있으며 쉬임없이 흘러가는 물의 이미지야 말로 그에게 딱 어울리는 이미지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즈의 소설이란 이 글 첫 문장대로 '어둠 속을 흐르는 물'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선지자나 예수에게서 보듯 그저 돌아다니기만 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는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것도 천지가 다 들을 수 있는 커다란 목소리로 울부짖어야 합니다. 그렇게 외침은 그의 일상이요 선포는 그의 의무인 존재입니다. 아모스 오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즈는 4차 중동전쟁을 통해 자신이 디디고 있는 그 땅이 바로 언제 분화할지 모르는 활화산의 비탈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유랑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아는 자는 그것을 알릴 책임 역시 당연히 지게 됩니다. 언제 불타버릴지 모를 사람들을 생각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역시 외쳐야 합니다. 선지자들이 목소리라면 그는 글로써 그것을 해야 했습니다.

 

 근데 왜 문학일까요?

 

 종교상에서 세상의 어둠이 가진 진실을 밝히는 일은 모두 다 비슷한 형태를 지닙니다. 선지자도 그렇고 예수도 그러합니다. 모두 비유와 암시인 것이죠. 외침과 선포는 진실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자가 천국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대답하듯이 비유로서의 이야기로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자면 오로지 이야기 속에서만 진실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지고보면 예수는 유대의 세헤라자드인 셈이죠. 사실 모든 세상의 근원을 얘기하는 설화나 전설들 그리고 태초의 세계관들이 담겨있는 신화와 영웅담들 역시도 이야기들입니다. 이렇게 종교적 담론이 이야기의 형태로 제시될 뿐 아니라 모든 담론의 원초적인 바탕 또한 이야기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이야기가 우리가 흔히 여기듯이 한낱 가상의 허구가 아니라 진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다른 방식으로 포장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아마도 그래서 어둠으로 부터 달아나 유랑을 할 수 밖에 없는 오즈는 문학에 의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즈에게 문학이란 들으려는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수 있는 '어둠 속을 흐르는 물의 먼 한숨 소리'였던 것입니다.

 

 

 

 2007년에 나온 '시골생활풍경'은 그러한 오즈 문학의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이스라엘의 한 시골마을 '텔일란'을 중심으로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스케치하듯 보여주지만 그야말로 이제까지 아모스 오즈가 걸어온 문학적 여정을 그대로 집약해 놓은 작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여전히 같은 땅을 디디고 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우리들 각자는 무엇을 해야할지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단편집에는 모두 여덟 개의 단편들이 실려있는데 그 중 첫머리에 있는 '상속자'는 단편집 전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에 대해 알려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내와의 이혼으로 이제 새로운 삶에 적응해야 하는 젤니크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텔일란의 집으로 이사왔지만 여전히 옛 삶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못했음을 암시하듯 이전의 물건들을 광속에 넣어두고 꺼내지 않습니다. 그렇게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미련 속에 서성이다가 문득 부동산의 소유권을 자신들에게 일임해 달라는 한 변호사의 방문을 받게 됩니다. 그는 그 땅의 기원을 말해주는데 이것은 그대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와도 같아서 우리는 그 변호사가 바로 팔레스타인을 암시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옛 삶의 미련으로 변화해야 할 오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젤니크는 그를 꺼려하는데 그는 막무가내로 집안으로 들어오고 결국엔 늘 누워있는 어머니의 침대 위에서 젤니크와 함께 셋이서 누워있는 것으로 소설은 끝납니다. 결국 이 단편을 통해서 오즈는 그렇게 한 침대 위에 누운 것 처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같이 살 수 밖에 없는 동반자적 존재임을 말하며 동시에 자신의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이제 미련을 버리고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골생활풍경'의 전체적인 주제입니다. 두번째 단편 '친척'은 젤니크 처럼 변화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길리 스타이너가 변화를 상징하는 자신의 조카인 기드온을 기다리는 얘기인데 오즈는 여기서 전작 '블랙박스'에서 그 누구보다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던 존재였던 '기드온'의 이름을 다시 반복하면서 기드온을 마치 구원처럼 기다리는 길리 스타이너가 왜 그렇게 아프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되돌아보게 합니다. 즉 이것은 현재 이스라엘인들의 자성을 촉구하는 단편이기도 한 것이죠. 그들이 그렇게 변화에 대해 태도를 결정해야 하는 이유는 세번째 단편 '땅 파기'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한때 이스라엘의 유명한 정치인이었지만 이제는 고집과 의심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퇴락해버린 노인과 그 딸 그리고 한 아랍 청년의 조금은 기묘한 동거 생활을 묘사하는 이 단편은 그들이 왜 난파선의 쥐들 처럼 변화에 민감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분명히 들려오는 어딘가에서 땅이 뒤 흔들리는 소리로 상징되는 세계 자체의 변화때문입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들려오는 그 대지의 울림은 바로 세계 자체가 이제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와도 같습니다. 그 소리를 통해 오즈는 이제 세계 자체가 달라지고 있으니 이스라엘에게 있어 변화란 선택이 아니며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 네 번째 단편 '길을 잃다'에서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인 가운데 이스라엘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이것은 '여자를 안다는 것'과 비슷한 주제라 할 수 있는데 당장 어떤 결론을 내지말고 되도록이면 오래동안 그 비어있음을 음미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둠을 만들어내는 독단이란 언제나 두려움 때문에 성급히 결정해버린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바로 그 성급함이 가져올 수 있는 무모한 위험을 되도록 줄이기 위해서 그는 비어있음을 채우기 보다는 그 열려진 가능성 속에서 보다 많은 사유를 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랑의 태도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그렇게 이 단편은 마치 그의 문학이 가진 유랑의 본성이 그대로 투영된 것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관망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비어있음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은 가급적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함이지 노자의 '무위'를 가져옴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 비어있음을 바라보는데도 하나의 태도가 요구되어집니다.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그리고 마지막 일곱번째의 단편들은 그 때 요구되어지는 태도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그 태도란 바로 타인에 대한 관심이고 그들을 위해 행위로써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즈는 그 태도의 중요성을 바로 다시 한 번 '소리'를 통해 강조합니다. 세번째 '땅파기'에서 들렸던 대지의 진동음이 이제는 하늘의 성가와도 같은 합창소리로 바뀌는 것이죠. 희미한 암시에 불과했던 그 소리가 이제는 구원의 합창이 된 셈입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무도 관심두지 않았던 한 존재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 때 그는 이 합창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니 오즈는 분명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구원은 바로 도움을 필요로 하나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그들을 돌아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있다고. 바로 그것이 비어있음을 오래도록 관망할 때 가져야 할 태도이며 만일 여전히 타인들의 존재와 그들이 가진 고통에 무관심해진다면 결국 닥쳐올 것은 마지막 여덟번째의 단편이 말하는 바와도 같이 지옥이고 그 어둠에 깃들어 나 역시 괴물로 변해갈 뿐이라고 오즈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골생활풍경'은 바로 그러한 변화를 껴안으려는 태도의 중요성 그리고 그 태도가 어디까지나 타인들에 대한 관심과 참여에 기반해야 하는 것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오즈는 이 소설 전체를 통하여 특별히 한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반복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공간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모든 단편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주인공들이 삶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는 그렇게 변화의 계기를 가져다 주는 결정적인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그 공간이란 다름아닌 '벤치'입니다.

 

 '벤치'란 어떤 장소입니까. 한 마디로 영원히 정주할 수 없는 공간이죠. 잠시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는 임시 거처. 그것이 바로 벤치입니다.  오즈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바로 이 '벤치'와 같은 곳으로 여기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치 유랑자에게 있어 주막과도 같이 언제 다시 훌쩍 떠날지 모르는 찰라의 장소가 되어  내가 어디에 있든 내 땅의 정체성이 곧 나의 정체성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래서 벤치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의 집이라는 침범 불가능한 장소에 홀로 틀어박혀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벤치에 같이 앉아 삶을 잠시 나누는 동반자로 여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불현듯 찾아온 '시골생활풍경'은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의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을 다루고 있는듯 보이지만 사실은 이런 이야기를 멀리서 들리는 물의 한숨 소리 처럼 은밀히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소설은 알레고리가 아니라 자신이 늘 꾸는 악몽을 좀 상세히 풀어놓은 것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악몽이란 바로 여덟번째 단편일 것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런 세계가 오기를 두려워하며 그 세계가 오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독자들이 충분히 자신의 일로 느낄 수 있도록 앞의 일곱편의 단편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사실 청맹과니들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똑똑히 드러났지요. 모두 자기 몸 하나밖에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우리는 나를 넘어 다른 사람을 그리고 다른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종일관 답답하고 더러는 분노하는 세상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여덟번째의 단편을 읽으면서 거기서 그리는 세계가 바로 오늘의 한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랑하는 자에게 있어 지금 존재하는 현상은 어디까지나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이 될 뿐입니다. 보다 크고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그 모든 것을 자기 일 처럼 여기는 것. 그것이야 말로 좀 더 우리를 이런 숨막힘 속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오즈를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결국 구원이란 나를 먼저 허물고 내어주는 순간에 오는 것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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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왕 미스터리 소년추격전 1
한상운 지음 / 톨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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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얘기할게요.

 재밌습니다. 몰입도도 상당하구요.

하지만 결말이 조금 맥빠집니다. 띠지에 나와있는 것 처럼

'비정한 어른들의 세계에 얽힌 세 소년의 통쾌한 한판 승부!'가 되기엔 2% 정도 부족해 보여요.

문구는 뭔가 박력있는 활극이나 엄청난 반전 같은 것을 기대하게 하는데 그런 게 없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주인공 태식이 좀 어정쩡하게 끝난다는 느낌입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데 아쉬움이 좀 많이 남네요.

 

 결말까지 치달아가는 동안 이야기가 정말 재밌었기 때문에 더욱 그래요.

 하긴 '성적은 밑바닥이고 싸움은 못하고 얼굴도 그저 그런, 선생님에게 무시당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 주눅 들고 껌좀 씹고 침 좀 뱉는 아이들이 부탁하면 빵과 우유를 사다 줘야 하는' 어쩌면 그저 이 땅의 90% 중의 하나인 평범한 고등학생에 불과한 주인공이 세상과 아무리 맞짱 뜬다고 해도 얼마나 바꿀 수 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철저하게 현실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네, 그게 이 책을 읽은 수확이라면 수확이었습니다.

 저는 온라인 게임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 세계를 잘 몰랐는데 이 소설을 통해 온라인 게임이 가진 적나라한 모습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까요. 아, 참 이 소설은 리니지 같은 온라인 게임을 주 소재로 하고 있어요. 간혹 언론을 통해 리니지 같은 온라인 게임이 어떤 폐해를 가지고 있는지 보거나 듣긴 했지만 소설에서 묘사하는 대로 그만큼이나 집요한 인간의 욕망들로 범벅이 된 곳인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소설을 읽으니 거꾸로 왜 게임을 하다가 죽는 사람이 생기는지 혹은 간혹 게임을 하느라 아기를 방치한 끝에 죽게 만드는 부부들도 생기는지 이해하게 되었달까요. 새삼 돈이란 게 정말 무섭구나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은이가 온라인 게임을 이렇게 소설의 주 무대로 가져온 이유는 분명했어요. 그 온라인 게임이라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들의 삶의 적나라한 모습을 나타낸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이를테면 태식이 느꼈던 바로 이런 세상이라는 것을 말이죠.

 

 이건 인생이구나.

 잘나야 대접받고, 위로 올라가려면 싸워야 하고, 다치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하는 진짜 인생.

 학교에서는 성적과 주먹으로 서열이 결정된다면 게임에선 레벨과 아이템으로 결정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p.39)

 

 소설은 주인공인 고교생 '태식', 온라인 게임의 사장 '중경' 그리고 온라인 게임의 최고 강자지만 게임을 단지 게임이 아니라 알바나 길드원들을 부려 돈을 버는 사업으로 하고 있는 '인투더레인'  이렇게 세 명이 돌아가며 자기 이야기를 펼쳐놓는 가운데 진행이 되는데 아무리 온라인 게임속 최고강자라 해도 또한 아무리 그 온라인 게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창조주라 해도 그들이 느끼는 인생이란 게 태식이 느끼는 인생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지은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든 결국 가지게 되는 삶의 모습은 똑같다고 말입니다. 지은이에게는 그렇게 생각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보이는 세계가 화려할 수록 기반은 허약하고 몰락은 거대하기 때문이죠(p.20)

 

 한 마디로 이 세상은 거센 파도를 바로 눈 앞에 둔 모래성과도 같으니 어디에 서 있든 다들 위태위태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 소설의 진짜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군요. 발 밑으로 소리없이 모래가 쓸려 나가는 그 위에 우리가 서 있음을 알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여행을 위한 소설입니다.

 결말이 말처럼 제대로 통쾌함을 주었다면 정말 만족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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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1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하, 헤르메스님 이 책을 읽으셨군요. 전에 한 번 봐두고는 재밌겠다, 입맛다시고는 '일단 꼭 읽고 싶은 책만 사자'하는 저의 가난한 마음으로 치워버린 작품이어요. 헤르메스님의 서재는 도서관 수준이겠습니다... 후후

ICE-9 2012-04-18 21:57   좋아요 0 | URL
하하! 늘 책에 치여살긴 합니다.^ ^
굳이 사지 않더라도 도서관 같은 곳에 신청해서 빌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소이진님 또래의 얘기라서 읽으면 저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던데... 아무튼 이런 소설 읽을 때 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정말 암울한 현실 밖에는 물려주지 못한 우리 기성세대가 참으로 미안해집니다.
 
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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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똥이다. 이번 선거의 최종 결과를 보았을 때 바로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악취가 난다는 뜻이 아니다. 토악질이 난다는 뜻도 아니다. 그저 굳건하다는 의미다. 참으로 변하지 않는구나 하는 낙담이다. 선거일. 종일토록 성석제의 '위풍당당'을 읽었다. 성석제를 좋아한다. 때로 그런 작가가 있지 않은가? 마치 자기를 위해 태어난 듯 자기 취향에 딱 들어맞는 작가가. 성석제는 내게 그런 작가다. 제목도 근사했다. 안 그래도 기죽고 왜소해지는 스스로를 늘 느껴왔던 나날이었다. 앞뒤좌우로 꽉 막힌 사무실을 벗어나 한 번쯤 가슴 죽 펴고 대로를 그렇게 걸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가요로도 넘쳐나는 실연으로 질질 짜는 이야기도 아니고 휘몰아쳐 오는 세상의 채찍질에 넋 놓고 쓰러지는 이야기도 아닌 결연히 일어나 피하려들지 않고 노려보며 온 몸으로 맞서 싸우는 그런 얘기가 정말 읽고 싶었다. '위풍당당'은 그런 내 소원에 응답한 것과도 같은 소설이었다.

 

  소설은 강으로 시작했다. 우리 집 앞으로도 강이 흐른다. 그 날의 강은 오후의 햇살이 나른히 몸을 뻗은 아래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선거일이라서 그런지 왠지 지금 세상도 그렇게 강처럼 눈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조용히 변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오늘밤 변화된 세상을 승리의 환호와 더불어 제대로 목격하리라 생각했다. 제목처럼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배경음으로 들으면서 말이다. 이야기는 굉장했고 마치 키스를 조르는 여자 아이를 눈앞에 둔 것처럼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내가 원하는 이야기였고 내가 원하는 결말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결말은 달랐다. 변했을 것이라 여겼던 세상은 누군가 싸놓고 치우지 않은 똥처럼 여전했고 '위풍당당'에서 여산이 정욱을 물리쳤을 때 느꼈던 쾌감은 그대로 통한의 눈물로 변하고 말았다. 우울했다. 이야기는 정말 아무런 힘이 없었다. 연약한 갈대처럼 세상의 힘찬 손짓 하나에 그대로 꺾이고 마는 존재였다. 그토록 날 채우고 뜨겁게 만들던 이야기가 세상이 보인 더러운 진실 앞에서 이토록이나 힘없이 주저앉고 마는데 도대체 이야기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과연 이런 이야기가 단비가 되어 굳어진 똥 같은 세상을 조금이나마 허물어뜨릴 수 있을까? 그렇게 저 강으로 흘러가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는 왜 이야기를 읽을까? 성석제의 '위풍당당'은 그 날의 비관적인 결말과 더불어 나에게 이런 질문을 가지게 했다. 새삼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은 늘 책을 배반한다. 세상이 책 대로라고 생각하고 살다보면 상처 받는다. 그러니까 그 날 느꼈던 아픔도 사실은 별 것 아니었다. 늘 반복적으로 겪었던 아픔을 단순히 한 번 더 느낀 것 일뿐. 그런데도 책을 찾는다. 매저키스트도 아닌데 무기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다가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성석제의 이야기가 주는 승리의 감각이 결국은 몽정 끝에 하는 자위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계속 들으려 한다. 여전히 성석제의 소설로부터 위안을 얻길 바란다. 왜 그럴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위풍당당이라는 말은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에서 나온 말이라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엘가의 위풍당당은 또 세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나온 말임을 알고 있다. 오셀로 하니 그것에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오셀로 게임'이 생각난다. 일본 작가 온다 리쿠는 오셀로 게임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셀로 게임은 동그란 알 하나가 다른 하나를 계속 설득해 나가는 게임 같다고. 이제 와 생각하면 내가 책을 통해, 이야기를 통해 정말 바랐던 게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문학이 예전처럼 세상을 뒤엎을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은 진작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비록 거창한 변화는 가져오지 못할망정 '오셀로 게임'처럼 조금씩 하나씩 나를 설득해나가고 있기에, 그렇게 이야기가 주는 단 '한 발자국'의 위안과 희망 때문에 나는 계속 이야기 즉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이처럼 세상에 거센 비가 내릴 때 나 하나 깃들 우산을 난 소설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어두움에 젖지 않고 내가 가진 세상에 대한 믿음 그리고 신념을 지켜갈 수 있도록 어떤 응원과도 같은 우산을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오늘날 소설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또한 아닐까? 물론 성석제가 '위풍당당'에서 보여준 낙관이 현실적인 눈으로 보자면 한낱 몽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의 직시 보다 긍정과 희망으로 엮어진 꿈이 사람들을 보다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려 마음먹게 만든다는 걸 우리는 또한 자주 보아왔다. 대표적으로 '꿈은 이루어진다'로 상징되는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도 있지 않은가! 갓 잡은 활어처럼 생생한 기운으로 여지없이 충만한 이 소설의 진심은 바로 거기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가 소제목으로도 사용한 그룹 '비지스'의 노랫말이 내겐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나는 농담을 시작 했어요.  세상이 모두 울기 시작했을 때...' 그에게 소설이란 바로 이런 농담이 아닐까?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그 변화에 대한 꿈부터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되는 농담. 그래서 나는 그의 농담에 기꺼이 웃을 준비가 되어 있고 계속 그의 다음 농담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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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16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성석제라는 작가 한 명에서 셰익스피어, 오셀로게임으로, 문학과 소설로 뻗어나갈수도 있군요.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그 변화에 대한 꿈부터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되는 농담... 저도 그 농담을 한 번 겪어봤으면 좋겠어요.

ICE-9 2012-04-16 23:46   좋아요 0 | URL
정말 지금 제게 간절히 필요한 것도 뭔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 언젠가는 원하는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으로 가득한 농담입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침 내가 왜 성석제의 이야기를 이토록 즐기는가 생각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내가 원하는 문학의 모습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렇게 쓰게 되었네요. 문학에서 받는 위안이 비록 차 한잔의 따스함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그 조금의 꿈꿀 수 있음 때문에 전 아직도 소설을 사랑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
 
주말여행 컨설팅북 - 당일.1박 2일.2박 3일 여행 코스 올가이드 컨설팅북 시리즈
이민학.유은영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4월
품절



봄 기운이 어느새 참으로 만연해졌다.
거리마다 벗꽃들이 흐드러져 피어있고 모퉁이마다 마주치는 하얀 목련 역시도 싱그럽기 그지 없다.

귀밑머리 스치는 봄 바람 마저 꽃내음이 물씬 담겨 발걸음 조차 왠지 가벼워지는 요즘 그야말로 그 바람따라 멀리 멀리 나아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여행은, 그것이 국내 여행이라 하더라도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일단 무엇보다 막상 떠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정보의 부족.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좋은지 알 길이 없으니 늘 가던 곳이나 왕복하고 그러니 본디 여행이란 이국적 풍경 속에서 삶의 중력을 느슨코자 함인데 늘 익숙한 풍경이나 마주하게 되니 늘상 걷는 거리를 또 걷는 것 처럼 별다른 흥미는 느끼지 못하고 피로와 바가지로 인한 불쾌감만 더해 돌아올 뿐이었다.


그럴 때일수록 국내 여행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 줄 수 있는 책이 있었으면 했고 이왕이면 한 권에 집약되어 핸드북 처럼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으면 했다. 물론 요즘은 뭐든지 인터넷으로 가능한 시대라 여행 정보 역시 노력만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나 역시 그랬는데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일단 가고자 하는 지역을 내가 알고 있어야 정보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지역은 그저 모르는 지역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사실 여행이 가져다 줄 가장 큰 재미 중의 하나인 새로운 곳을 만나는 기쁨은 별로 느껴볼 수 없었다. 내게 필요한 또 한가지는 이렇게 바로 낯선 곳, 내가 완전히 모르는 곳을 알려 줄 수 있는 가이드 책이었다. 아마도 사실 이건 나만의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잘 모르지만 어딘가 있을 좋은 곳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건 대한민국의 알려지지 않은 좋은 곳을 알려준다는 취지로 시작된 1박 2일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가 그렇게 높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바람을 누군가 헤아리기도 했다는 듯이 거기에 맞춤한 책이 나왔음을 발견했다.



'여행 코스 짜는 게 어렵고 귀찮은 당신' 이게 딱 나다. 그래서 이 문구를 발견했을 때 그야말로 바로 나를 위한 책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아예 제목 자체가 '컨설팅북'이다. 마치 나 같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고 작정하고 나왔다고 외치는 것 같다.

하하하!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스스로 국내의 주말여행의 코스를 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책이다.

국내의 모든 여행지를 544페이지에 이르는 단 한 권에 다 수록하고 있는데 그것을 지역별, 계절별 그리고 테마별로 나누어 여행을 하려는 개인의 다양한 목적을 다 수용하려한 배려가 돋보인다. 그야말로 이 책은 내가 바랐던 여행 가이드 책의 두 가지 점을 제대로 충족하고 있는데 단권화되어 어디든 휴대가 간편하다는 것이 그 하나요 두번째는 내가 모르는 여행지들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특히나 언젠가 한 번 가보려고 했었던 울릉도의 경우가 그 대표적이라 할 만한데 그 곳을 가지고 이 책이 어떤 식으로 구성을 취하고 있는지 살펴볼까 한다.




이 책은 하나의 지역에 하나의 섹션을 할당하고 있기에 울릉도 섹션을 찾아보면 저 위의 빨간 동그라미로 쳐 놓은 부분이 눈에 띈다.



보통 주말 여행의 경우 스케줄 때문에 무박일수도 있고 1박일수도 있으며 2박 일수도 있다. 대부분 코스 계획에 있어 어려움은 마음먹고 간 여행인지라 이 모든 시간들을 그 누구보다 알차게 보내고 싶다는 욕망에 부응하도록 짜기가 어렵다는데 있다. 아마도 이 책을 찾게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그 알찬 코스 짜기를 위해 선택할 터인데 더구나 이것은 인터넷 검색으로는 상당히 충족되기 어려운 정보이기도 해서 만일 거기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정말로 주말 여행에 있어 제대로 된 가이드 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책은 바로 거기에 제대로 된 도움을 준다. 그러니까 개인의 다양한 사정상 고무줄 처럼 늘어났다 줄어났다 하는 여정 모두에 있어서 맞춤 코스 계획을 짤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저 부분은 그러니까 지금 가고자 하는 지역이 어느 정도 일정이면 제대로 돌아볼 수 있는지 알려주는데 대부분 그 일정의 최적화는 아래 파트너의 있고 없고 여부를 기준으로 결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울릉도를 2박 3일에 제대로 다 여행하려면 혼자라야 가능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개인적으로 저 일정은 수도권 거주자들을 기준으로 정해진 것 같다. 지방 거주자들의 경우 더 길거나 짧을 수 있는데 특별히 많이 걸리거나 짧게 걸리는 지방 거주달의 경우는 특별히 언급해서 좀 더 친절하게 설명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든다.) 이를테면 이 책의 유저는 저런 식의 정보를 보고 내가 지금 가용한 일정에 이 지역을 여행하기가 적당한지 아닌지를 가늠하고 이런 식으로 보다 제대로 된 코스를 짜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울릉도 여행이 가능하다면 바로 뒷 페이지에서 일정에 맞추어 제대로 여행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에 대한 추천 코스가 나온다.




여행지와 식사할 곳 그리고 숙박지까지 모두 망라한 코스다. 물론 추천 코스이므로 이것은 하나의 기준점일 뿐이다. 옆에는 울릉도 여행에 있어서의 팁 같은 것들이 나와 있는데 '울릉도 옆의 죽도에서 나는 더덕은 산나물과 약초로 유명한 울릉도 주민들 조차 최고로 친다는 더덕이니 꼭 챙겨오라'는 등의 여행에서 가질 수 있는 잔재미들까지 있어서 유용할 뿐만 아니라 더욱 여행에 대한 기대감 마저 가지게 한다.


다음으로 넘겨보면 추천 코스에 나왔던 대표적인 둘러볼 곳들과 식사할 곳 그리고 숙박할 곳에 대한 정보들이 나와있다. 바로 여기가 특히나 우리나라에 모르는 곳이 너무도 많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많이 되는데 이를테면 울릉도의 경우엔 죽도가 그랬다.



위 사진이 바로 죽도에 대한 소개다. 죽도는 일본이 독도를 부를 때 쓰는 이름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울릉도 바로 옆에 사진처럼 아름다운 죽도란 섬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대나무가 많아서 죽도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죽도에 저 오른쪽 사진 처럼 바다를 옆에 끼고 도는 산책로가 있었다. 근사하다. 죽도란 섬을 알게 된 것도 수확이지만 저런 산책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내겐 큰 수확이다. 정말 사진만으로도 그 곳으로 마구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리고 TV의 기행프로에서 보았던 울릉도 한 바퀴를 걸어서 돌 수 있다는 산책로 역시 세세한 정보를 알 수 있어 좋았다.



이런 식으로 주말여행 컨설팅 북은 주말 여행에 대해 마음만 먹고 있던 사람들에게 정말 용기를 가지고 떠날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 일정별로 맞춤 코스를 짤 수있도록 해 준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거기다 '죽도' 처럼 평소에는 몰랐던 곳을 알게 해주는 것역시 이 책에 대한 매력도를 증가시킨다.



사실 여행 가이드 북은 여행에 진짜 도움이 되려는 실용서이긴 하지만 책의 목적이 거기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이를테면 이 책과 같이 우리나라의 대부분을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나에게 전혀 알지 못했으나 아주 매력적인 곳들을 무진장 알려서 "알겠니? 네가 그토록 우리나라에 심드렁했던 건 네가 단지 우물안 개구리여서 그랬던거란 걸."하면서 제대로 카운터 펀치를 먹일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의 식상함이 바로 우리의 무지함에서 나온다는 걸 이 책을 벗하며 더욱 깨닫게 되었다. 이 책 덕분에 아직도 미지의 좋은 곳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란 걸 실감했다. 아마도 앞으로의 내 여행은 초등학교 시절 보물찾기 같을 것 같다. 마치 바위 아래 어딘가 숨겨져 있는 보물이 적힌 쪽지를 찾아내듯 그동안 알지 못했던 곳들을 새로이 만나보는 그런 여행이. 그렇게 이 책은 우리나라를 발로써 가슴으로써 좀더 가까이 보듬어 안도록 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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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15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헤르메스님... 겨우 나흘만인데 그 나흘이라는 시간이 마치 한 달과도 같이 긴 시간으로 느껴졌습니다. 오늘이 신간평가단 신청 마감일이던데 하셨나요... 저는 써놓은 리뷰가 없어서 못하겠습니다. ㅠㅠㅠ 그래서 지금 <채홍>열심히 쓰고 있는데 도저히 제가 무슨 말을 쓰고 있는건지 모르겠어요. 아 그냥 머릿속에서 나오는 말을 그냥 막 써내고 있는데... 제가 읽어도 참 한심합니다 ㅠ.ㅠ

ICE-9 2012-04-16 23:48   좋아요 0 | URL
앗! 저는 했는데... 소이진님 못 하셨나요?
아아... 그래도 하셨길 바라요. 저는 몰라도 그동안 소이진님 리뷰라면 꼭 될 것 같았는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나쓰메 소세키의 '문'은 한 마디로 툇마루의 소설이다. 소설 자체가 툇마루에서 시작되어 툇마루로 끝난다. 그래서 마치 소설이 가지는 전 우주가 오로지 툇마루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툇마루란 어떤 공간인가? 

 완전 집안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바깥도 아닌... 경계의 공간이다.

소세키의 소설 '문'은 마치 그 위에 걸쳐 앉은 듯한 소설이다.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나갈 것인지 알 수 없는 어정쩡한 자세로... 소세키는 결단을 주지 않는다. 마치 그 툇마루가 전부인 양 애써 그 곳에 그저 머무르려 할 뿐이다. 연못 속의 겨울잠을 자는 잉어들 처럼 한없이 낮고 조용하게... 그는 왜 이런 식의 문학적 태도를 취하면서 경계의 공간에 일부러 머무르려 하는 것일까?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개인적 이유 다른 하나는 시대적 이유이다.

 

 먼저, 개인적 이유. 소설 '문'이 연재되던 당시 1910년. 그 전에 한국과 만주 등지를 돌아보고와서(초반의 이토 히로부미 이야기는 이 여행의 체험이 은연중 배여난 것이기도 하다.) 새로이 연재를 시작하려던 그에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진 그가 위궤양으로 병원에 입원한 일이었다. 그는 두 달간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치료를 받았고 결국 그 해 8월 슈젠지 온천으로 요양을 가게 된다. 거기엔 슈젠사란 절이 있는데 바로 이 절이 소설 '문'에서 소스케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최후로 찾았던 산문의 모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보듯이 사실 '문'의 이야기는 나쓰메 소세키 자신의 삶이 그 자체로 많이 반영된 소설인 것이다. 바로 이 병으로 쓰러진 일과 슈젠지에서의 요양이 그의 삶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 느낀 것을 소세키는 하나는 에세이로 다른 하나는 소설로 나타내었는데 그 에세이가 바로 '회상'이며 소설은 '문'이다. '회상'을 읽어보면 그 때의 체험이 얼마나 소세키로 하여금 인생을 달리 보게 만들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는데 무엇보다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자신을 치료하던 의사가 그 치료중에 숨진 일이다. 소세키는 그 에세이에서 치료를 하던 이는 죽고 정작 치료를 받던 자신은 더 오래 살게된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서 말한다. 묘하게도 의사가 숨졌을 때 또 하나 소세키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가 바로 소세키 자신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던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이며 우리들에게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으로 유명한 게다가 헨리 제임스의 형이기도 한 윌리엄 제임스이다. 소세키는 말한다. 의사는 자신의 몸에다 빛을 준 사람이었고 제임스는 자신의 의식에 빛을 준 사람이었다고... 그렇게 빛을 주었던 사람들은 죽고 그 빛을 받았던 자신은 살았다고... 그 아이러니할 정도의 삶이 가진 예측불가성 앞에서 소세키는 하루 하루 그 때 그 때의 일을 기억할 결심을 한다. 그것이 바로 에세이 '회상'이 되었고 '문'에서의 인상적인 그 마지막 대사 장면으로 대표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지배적인 시각이 되어 결국 '문'을 지배하는 조용하고 낮게 웅크린 삶으로 형상화 되었다.

 

소스케는 튓마루로 나가 앉아 길게 자란 손톱을 자르며 "응, 그렇지만 또 겨울이 올거야"라고 대답하고 머리를 숙인 채 가위를 움직였다.(P. 277)

 

 삶의 예측불가성은 소세키에게 더없이 조용하고 한적한 삶이야 말로 가장 최상의 삶임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슈젠지에서의 요양을 그 가장 행복한 시기로 기억하는데 무엇보다 별 뜻없이 그냥 한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이 소설을 읽게 되었을 경우 가장 불만스런 부분이 무엇일지 나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주인공 소스케일 것이다. 소스케는 현대인이 보기에 정말 한심할 정도로 무르다. 매사에 적극성이 없고 그 어떤 곤란한 사건을 만나도 그저 알아서 지나가 주기만을 바란다. 그저 드러나지 않고 조용한 생활을 하는 것이 모토이기도 하다.  늘 '적극적이 되라' '자기 것을 잘 챙겨라'하는 말만을 들어온 우리들로서는 이 같은 심해의 아귀 처럼 웅크린 소스케의 삶이 쉽게 이해되지도 않고 어떤 땐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소설 중반을 넘어서면 소스케가 왜 그러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알고보니 젊은 시절의 소스케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자신의 앞길을 착실히 개척해나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사랑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절친한 친구가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거기에 대한 죄의식으로 현재와 같은 삶을 살게 된 것이었다. 소설만 읽으면 이것은 그저 문학적 형상화 같지만 당시의 소세키의 삶을 알고 읽으면 이것은 그야말로 요양중인 소세키를 그대로 담아낸 모습이 된다. 상상해보라. 병을 가지고 있는 자의 일상이 어떨지? 소세키의 병이 바로 소스케에 있어서는 죄의식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한 때 죽음 가까이 갔던 사람은 속세인들이 삶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보지 않을까? 그리고 그 경험이 가져다 준 적극성의 무용함에 대한 인식 때문에 조용하고 한적한 삶이야 말로 가장 의미있는 삶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소설 '문'에서 한 편으론 낯설게도 느껴지는 조용한 은둔의 삶은 그야말로 소세키의 이상적 삶의 형태였던 것이다.

 

하루 종일 텅 빈 방에 누워서

잠자코 큰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변함 없네

종일토록 그 자세로 하루를 보냈네

 

 (당시 소세키가 적은 시, 에세이'회상'에서 인용)

 

 

 하지만 소세키가 그러한 삶을 전면적으로 내세웠던 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소세키의 문학은 '사소설'을 탄생시킨 장본인이지만 소세키 자신은 문학을 개인적 영역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당시 근대에 의해 소생된 소설이 다 그랬듯이 소세키에게 있어서도 소설이란 어디까지나 시대와 교감하는 장(FIELD)이었다. 그렇게 이 소설엔 시대적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소설이 그랬듯이 근대화된 일본을 좋게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서구의 근대 자체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건 영국에서의 체류 덕분이었다. 그 때 영국에 머무르면서 소세키는 근대화가 가져오는 장점만큼 단점 역시도 보게되었으며 가장 불안스럽게 바라보았던 것이 속도였다. 교통기관의 빠른 속도, 놀라운 변화의 속도 그리고 한없는 분주함. 바로 그런 것들이 소세키에겐 염려의 근거였고 과연 이런 것들이 일본에게 긍정적인 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한 비판의 씨앗이었다. 때문에 소세키는 이렇게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으로서는 전혀 용납되지 않을 정반대의 삶을 하나의 모델로서 내어놓는 것이다. 왜 서구의 근대는 마치 소스케가 사는 집 툇마루 앞에 우뚝 선 절벽과 같아서 언제 파묻힐지 모르는 위험을 간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세키는 '회상'이라는 에세이에서 실제 그런 집에 살고 있던 사촌이 절벽이 무너져 죽었음을 밝힌다. 그런 면에서 장밋빛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는 서구 근대의 외침은 소세키에게 의심스러운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삶의 예측불가능성 앞에서 그러한 장밋빛 미래란 의미없는 공약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완성된 삶이며 무엇보다 그 어떤 목적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한적함이야 말로 이데아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목적이든 일단 그것이 개입되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이유로 소세키는 소스케가 외부로 부터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모든 시도를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문'을 전혀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지금은 정형화 되어버린 서구 자본주의적 일상을 전혀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시각으로써 말이다. 말하자면 소설 '문'은 이제는 우리가 그 옳고 그름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에르 부르디외식으로 말하자면 아비투스화 되어버린 이 일상이 과연 제대로 된 일상인지 아닌지 가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참조점인 것이다. 허먼 멜빌이 '필경사 바틀비'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인간형의 하나로서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해낸 것과 똑같은 일을 소세키는 소설 '문'을 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스스로 병을 안고 살아가는 가운데 체득한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바로 그 한계지워 진 삶이 오히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여 그는 삶이 아무런 한계를 가지지 않는 것 보다는 그러한 한계가 있는 것이 삶엔 더 낫다고 본다. 소스케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바로 그 한계의 상징과도 같다. 바로 그 한계 덕분에 소스케 역시도 소설 마지막 대사 처럼 삶에 대해 더 깊이있는 시선을 가지게 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소세키는 완전한 내부도 아니고 완전한 바깥도 아닌 툇마루라는 경계에 기꺼이 머무르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 경계라는 한계에 일부러 거주하면서 세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려는 태도가 한 마디로 소설 '문'이 자리잡은 '툇마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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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2-04-1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세키의 인생과 관련해서 아주 깊이 있게 읽으셨네요. 그런데 <문>이 새롭게 번역되었나 봐요? 제가 읽은 건 저렇게 고급스러운 양장본이 아니었거든요.
글 중에 인용하신 <회상>은 어디에 실려있나요? 소세키 책은 다 가지고 있는데 어디에 실려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요.

ICE-9 2012-04-13 22:56   좋아요 0 | URL
아, 반딧불이님 제가 너무 답글이 늦었네요. 선거결과가 너무 실망스러워서 이제야 서재에 들르는 바람에 그만 이렇게 되었네요. 말씀 감사합니다.^ ^ 제가 읽은 것은 이번에 비채에서 새로이 번역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회상'은 하늘연못에서 나온 '몽십야'에 실려있습니다. 책은 소설이라고 해 놓았는데 사실은 에세이랍니다. 빨리 알려드렸으면 좋았을텐데 이렇게 늦게 알려드리게 되어 죄송하네요. 아무튼 들러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반딧불이 2012-04-14 13:57   좋아요 0 | URL
밑줄 그어놓을 것을 보니 분명 읽었던 모양인데....어디가서 소세키를 좋아한다거나 완독했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덕분에 <회상>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소세키 소설의 단초가 되었을법한 내용들이 참 많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