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독교에서 숫자 '7'은 '절대' 혹은 '완전'을 뜻한다.  따라서 제목인 '7년의 밤'을 기독교적 의미로 풀이하자면 그냥 7년이 아니라 무한한 세월 내내 지속되는 밤이 된다. 그 밤은 말 그대로 도저히 헤어나올길 없는 '절대'의 밤이다.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완전한 암흑의 밤. 소설의 주인공 '서원'이 보낸 지난 7년의 밤은 정녕 그랬다. 그의 아버지가 일으킨 '세령호의 재앙' 때문에 서원은 7년 동안 늘 쫓겨다니며 정처없이 지내야했고, 어디서든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며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했다. 그 7년은 오롯이 불면의 밤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당하는 기나긴 불면의 밤이라는 고통은 오로지 아버지가 일으킨 사건 때문이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해야 하는, 그렇게 아버지가 던져준 운명이니까. 한 번 읽으면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인상적인 소설의 첫 문장,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는 이런 서원의 마음을 잘 나타낸다.

 하지만 소설은 제목 그대로 7년간 서원이 가졌던 고통의 밤을 담지 않는다. 소설은 과거로 뛰어든다. 서원이 왜 그러한 밤들을 맞게 되었는지, 원인을 추적한다. 과거의 복기. 서원의 아버지가 어쩌다 그만한 사건을 일으켰는지, 그 과정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다. 그 시간은 서원에게 원죄의 순간이다. 성경으로 치자면 창세기다. 인간이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현재도 남자는 노동으로, 여자는 출산의 고통으로 형벌을 치르고 있듯이, 서원 또한 아버지의 죄로 현재의 고통을 치르고 있으니까.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으니, 그가 고통 가득한 불면의 밤을 벗어나기 위한 길은 이제 단 하나밖에 없다. 원죄가 잉태된 시간 속으로 뛰어드는 것. 소설의 복기는 필연적이고, 오직 그 시간만이 서원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

 그렇게 재현된 원죄의 시간 속 세계는 어떠했나?

 편의상, 그 세계를 둘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오영제'의 세계와 '강은주'의 세계로 말이다. 굳이 이 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들이 각자 자신의 세계에서 정점에 서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점이란 그들이 가진 힘을 기준으로 표현한 것이다. 권력은 흔히 타인의 의지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오영제와 강은주는 진정한 권력자다. 그들 모두는 상대방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의로 정하고 그 자리에다 있도록 만들 수 있다. 서원의 원죄는 결국 이들의 권력이 낳은 것이었다. 원죄가 태어난 당일, 오영제는 희생자인 오세령을 바깥으로 내몰았고, 강은주는 남편 최현수를 '세령호'로 내몰았다. 그리하여 세령호의 재앙도 초래했다. 뱀이 하와와 아담에게 죄를 짓게한 것과 똑같이, 그들이야말로 서원의 고통을 가져온 실질적인 장본인이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선 하나의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강은주는 오영제의 고용인이니 사실 권력에 정점에 선 자는 오영제 하나라고 해야하지 않느냐고. 마치 이런 반론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작가는 정점에 서 있는 자들에게 한 가지 특성을 더 부여했다.

 바로 감정 표현에 있어 타인의 눈치를 안 본다는 것으로 말이다. 오영제와 강은주는 소설에서 가장 극렬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은 분노인데, 주로 자신의 권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그러하다. 분노와 폭력으로 휘청거리는 자신의 세계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감정을 쏟아내면서도 타인의 감정을 절대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권력의 정점에 선 자 뿐이다. 그렇기에 강은주도 비록 오영제의 피고용인이나 정점에 서 있는 자인 것이다. 그것은 고용주인 오영제와 대면할 때 드러난다. 자신의 세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강은주는 자주 오영제에게 이런 저런 요구를 하는데, 그런 요구를 함에 있어서 결코 오영제의 눈치를 안 본다. 언제나 당당하게 요구한다. 그로인해 오영제의 분노가 촉발 되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은주는 오영제에게 종속된 존재로 볼 수 없다. 작가는 어쩌면 이 사실을 이름을 통해서도 밝히고 있는 것 같다. 오영제에겐 제왕을 뜻하는 '제'가 들어있고, 강은주에겐 주인을 뜻하는 '주'가 들어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렇게 정점에 서 있다는 그들의 지위는 똑같지만, 그들의 세계 자체는 다른 것을 나타낸다. 한 마디로, 오영제의 세계는 '권력'을, 강은주의 세계는 '돈'을 상징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그것은 바로 권력과 돈의 속성이 오영제와 강은주가 지향하는 목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오영제는 자신의 세계가 늘 자신이 설정한 형태 그대로 유지되길 원한다. 즉 오영제의 세계는 현상유지를 추구한다. 강은주는 늘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길 바란다. 그녀가 어린 시절 늘 꿈꾸었던 것은 쪽방에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보다 넓은 집에서 사는 것을 원했고 그 때문에 그 꿈을 이뤄줄 자본을 뒤쫓았다. 이 현상유지와 확장은 그대로 권력과 돈의 속성과 일치한다. 권력은 현재의 질서가 늘 똑같이 고정되도록 만드는 습성이 있고, 돈은 외부로 끊임없이 증식하는 습성이 있으니까. 이런 의미에서 오영제와 강은주의 세계를 권력과 돈의 세계라 달리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권력과 돈, 이 둘은 지금의 현대인들이 가장 욕망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현대인들은 권력과 돈 사이에 끼여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톱니바퀴 사이에 끼여 있는 존재가 톱니바퀴를 따라 돌 수밖에 없듯이, 그만큼 권력과 돈도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현대인의 영혼을 깊이 지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면, 이제 우리는 가련한 희생자들인 '오세령'과 '최현수'를 달리 해석하게 된다. 바로 우리 현대인들의 서글픈 자화상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오세령과 최현수가 오영제와 강은주에게 당하는 형태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권력은 폭력으로, 돈은 욕망으로 현대인을 지배하고 길들인다. 폭력은 육체로 직접 가해진다. 똑같이 오영제는 오세령을 학대한다. 돈은 무한 증식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남들도 갖도록 만든다. 그것도 스스로 원해서 그러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면서 말이다. 똑같이 최현수는 강은주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알고 기계처럼 강은주의 욕망을 이루며 살아간다. 이렇게 오세령과 최현수는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영제와 오세령, 강은주와 최현수가 이루는 세계는 서로 차별되는 또 다른 특징이 눈에 띈다.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와도 상관있다. 

 현상유지를 향한 권력이 폭력으로 발현되는 오영제, 오세령의 세계는 우리나라의 80년대를 연상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오로지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그것을 향한 욕망만이 가득한 강은주, 최현수의 세계는 IMF 이후, 더욱 거세진 돈에 대한 집착이 거대한 사회적 조류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오늘까지의 우리나라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므로, 오영제와 강은주의 세계는 현재이자, 과거이다. 그것은 중첩되어 있다.

 왜 작가는 여기에 과거의 시간까지 겹치게 만들었는가?

 이 시간적 특성이 내게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여기서 독자가 참여하는 공간이 열리기 때문이다. 오세령과 최현수가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보라. 그렇다면 각각의 시간들, 그러니까 오영제의 80년대와 강은주의 96년 이후가 현재 우리의 고통을 낳은 원죄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소설의 구성과 일치한다. 서원이 현재의 고통을 풀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원죄의 시간을 복기해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 역시도 오늘의 고통에서 제대로 헤어나려면 고통이 발아된 원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 직시(直視)는 정유정 작가가 소설에서 한결같이 추구하는 삶에 현상된 고통에 대한 윤리적 태도이다. 그녀는 어떤 것이든 진정한 대면 없이는 극복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것이 죄로 인한 것이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과거로 데려가는 것이다. 원죄가 태어났던 그 시간 자체로. 그녀는 독자 역시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오영제와 강은주의 시간은 이렇게 과거의 시간적 특성까지 지니게 된 것이다.

 이로써 더욱 분명해진다. 오세령과 최현수가 당했던 고통이 바로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며, 동시에 우리 역시 서원의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말이다. 서원이 가졌던 7년 동안의 불면으로 가득한 밤들은 사실 우리 모두의 밤이었다. 서원처럼 우리 역시 권력과 자본 사이에 끼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었고, 그 때의 원죄가 낳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현재까지도 불가피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7년의 밤'은 결코 소설로 그치지 않는다. 서원의 여정은 그대로 우리가 밤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여정인 것이다. 오영제와 강은주, 두 세계가 수렴된 '세령호'는 그야말로 지금 우리 삶의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구원의 여정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바로 문하영과 최현수 그리고 안승환과 최서원을 통해서다. 물론 그들은 같지 않다. 오히려 정유정 작가가 집요하게 추구하는 테마인 직시(直視)에 대해서라면 정반대다. 한 쪽은 직시를 거부하고 다른 한 쪽은 적극적으로 직시하려 든다.

 직시(直視)를 거부하는 존재들은 세계의 폭력적이고 부조리한 면모를 획책 하지는 않았어도 그 존속에는 일조하는 사람들이다. 오영제의 아내 문하영과 강은주의 남편 최현수(여기서 앞서 말한 부조리란, 강은주의 욕망을 최현수가 자신의 욕망으로 알고 강은주의 욕망에 봉사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가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도피와 방관을 통해 세계의 폭력과 부조리가 지속되는 것에 일조한다. 문하영은 자신의 딸이 오영제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면서도 혼자 도망친다. 더구나 오세령이 남편의 학대 끝에 숨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도피가 그저 자기 혼자만 어떻게든 피하고 보자는 얄팍한 심리의 발현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이렇게 스스로 증명한다. 최현수는 방관한다. 강은주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그리고 그 요구에 맞춰 사는 삶이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늘 묵묵히 감내한다. 엄청난 거구의 몸을 가졌으면서도 그런 태도 때문에 그는 언제나 겁먹은 사슴처럼 행동한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것으로, 때로는 가장의 책임이라는 것으로 불행을 가져오는 원인을 똑바로 직시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내일은 더 나으리라는 막연한 기대에만 의지하여 방관으로 일관한다. 이렇게 문하영과 최현수는 똑같은 존재들이다. 그들 모두 불행의 원천을 직시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피하고 미루기만 하느 것이다. 그 결과, 얼른 단절되어야 하는 세계의 폭력과 부조리가 항구적으로 지속된다.

 결국 하나의 파국과도 같이 오세령이 희생된다. 기이하게도 작가는 오세령의 죽음 장면에서 엄마인 문하영의 이미지와 아빠인 최현수의 이미지를 오세령에게 하나로 통합한다. 즉 오세령은 엄마의 복장을 한 채, 차에 부딪히고 최현수를 아빠라고 부르며 강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오세령은 문하영과 최현수의 교집합 같은 이미지로 희생된다. 이렇게 하여 작가는 그들의 방관이 아무런 구원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도피와 방관은 더 커다란 비극을 부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단적으로 최현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오세령의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 회피만 했었던 최현수는 끝내 마을 전체마저 세령호 아래로 수몰시켜버렸다. 한 사람의 수장이 한 마을의 수몰로 거대해져 버렸다. 이보다 더 어떻게 도피와 방관이 가져오는 것은 단지 더 큰 비극 뿐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물에 가라앉힌다는 것은 방관을 비유하는 행위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게 되면 직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마을의 수장 역시 방관에 해당된다. 서원은 그것으로 인해 7년 동안 가장 끔찍한 형태의 벌을 받았다. 서원은 최현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작가는 이렇게 세령과 마을의 수장 그리고 서원으로 이어지는 연쇄를 통해 방관의 경로가 비극의 확장 밖에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도려낸다.

 이런 그들의 태도가 어딘가 낯이 익다면 그것은 아마도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하영과 최현수는 우리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다. 사실은 우리와 닮은 모습이다. 그것도 '세월호 참사' 이후의 우리 모습을 말이다. 이 소설이 마치 어떤 예언처럼 보이는 것은 '세령호'와 '세월호'가 유사하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거기다 회피와 방관이 비극을 초래했다는 것마저 어찌나 흡사한지.

 '7년의 밤'은 '세월호 참사' 이후, 더욱 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작품이다. 여기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모습의 자화상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어 읽을 때 더욱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소설은 분명하게 경고했다.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대해 직시하고 분명하게 성찰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더 큰 비극이 중첩될 것이라고. 이 소설이 나온 2011년 벽두, 우리는 용산 참사를 겪었다. 우리는 분노했지만 그것은 잠깐에 불과했고 언제나 그랬듯이 곧 잊었다. 내게 닥쳐온 일이 아니었기에. 결국 뒤이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역시나 방관과 무관심 속에 흐지부지 되는 것 같더니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다. 사건은 점점 더 우리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이래도 남의 일처럼 방관할래?' 하는 것처럼.

 오세령의 죽은 모습엔 작가의 숨은 뜻이 하나 더 담겨 있다. 작가가 하필이면 문하영과 최현수를 통합시키면서 오세령을 죽게 한 것은 문하영과 최현수를 가해자로 비난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그들 역시 피해자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작가는 오세령의 죽음을 통해 그들의 피해가 그들의 가해를 정당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영화 '올드보이'에 여기에 딱 맞는 대사가 있다. '절대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야'라고 말하는 오대수에게 유지태가 분한 인물은 이렇게 대답한다. "모래알이나 바위나 물에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다."라고. 똑같이 작가는 오세령의 죽음으로 회피와 방관 역시 가해자들만큼이나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그것에 대한 대가로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들에게 고통을 가차없이 가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안승환과 최서원이다. 앞서 이 소설이 서원이 행하는 과거의 복기라고 말했다. 그대로 이것은 서원이 문하영과 최현수와 달리 자신의 불행을 낳은 근원을 직시하려는 움직임이다. 안승환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공교롭게도 똑같은 직시의 태도를 보여주는 안승환과 최서원을 동일하게 잠수부로 만들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주로 물 아래 가라앉힌 것들을 건져내는 것이다. 안승환은 소설 초반 잠수부로 등장하여 '세령호' 아래 잠긴 마을을 관찰한다. 즉 아무도 보려하지 않던 수몰된 마을을 그는 직시하는 것이다. 최서원은 해류에 떠밀리다 실종된 잠수부 하나를 건져낸다. 이것은 그대로 세령호에 잠긴 오세령과 이어진다. 최현수가 가라앉힌 존재를, 그의 아들인 서원이 건져내는 것이다. 한 쪽엔 가라앉히는 자가 있고, 다른 한 쪽엔 건져내는 자가 있다. 직시를 거부하는 태도가 가라앉히며 적극적인 직시의 태도가 건져낸다. 한 쪽은 죽음을 초래하고 은페시켜 더 큰 비극을 양산했고 다른 한 쪽은 생명을 건져내어 비극을 종결시켰다. 너무나 선명한 대비가 아닐 수 없다. 작가의 대안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있다. 바로 안승환을 작가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안승환은 원죄가 태어났던 날 밤, 세령호에서 정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소설로 쓴다. 진실을 찾기 위하여. 서원의 과거 복기는 바로 그 소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이보다 더 어떻게 직시의 태도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결국 이것을 통해 서원은 그토록 바랐던 구원을 얻는다.

 어떤 소설들은 자신이 상정했던 수명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남는다. 시대가 소설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런 소설은 시대가 가장 시급히 답을 구하는 문제에 대해 응답할 수 있기에 요청받는다. 나는 '7년의 밤'이 그렇다고 본다. 이 소설은 나온 당시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금에 더 널리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지금은 '강남역 묻지마 살인'과 같은 여성 혐오 범죄, '구의역 스크린 도어 기사 사망 사건'과 같은 열악한 노동 계층에 대한 차별 문제, '흑산도 여교사 특수 강간'과 같은 인격 침해 범죄들이 곳곳에서 봇물 터지 듯,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사건과 사고의 원인과 대책에 대한 성실한 직시(直視)없이, 어떻게든 일부에게 일어난 특수한 사건으로 무마시키거나 껍데기 뿐인 대책으로 덮으려고만 한다. 문하영과 최현수가 했던 것과 똑같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더 큰 커다란 비극밖에 없다는 것이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뚜렷하게 밝혀진 바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 바보 놀음을 계속할 것인가? 이제 진지하게 안승환과 최서원의 직시(直視)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정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세월호와 함께 수장된 아이들 시신을 건져올렸던 민간 잠수사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분을 세월호 청문회 자리에서도 보았고, 정청래가 컷오프 된 날 시민들이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필리버스터를 할 때도 보았다. 세월호 진실 규명을 위해 일한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잘랐다며 강하게 성토했다. 박주민 변호사가 선거 운동을 할 때도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던 분이라, 설마 그렇게 돌아가시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차가운 물 속에서 서로 얽혀 있는 아이들 시신을 '엄마 만나러 가야지' 달래면서 건져낸 사람이었다. 세월호가 얼마나 참혹한 참사였는지 정면에서 직시(直視)한 사람이었고 그랬기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한다는 누구보다 확고한 생각으로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한 분이었다. 비록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하셨지만, 직시가 어떤 삶을 살도록 하는지 그분의 생애만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직시하려 했던 이들이 잠수부였기에, 그 분을 보면서 '7년의 밤'이 많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렇게 쓰게 되었다. 사실 이 분의 죽음은 우리 책임이다. 우리의 회피와 방관이 이 분을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회피와 방관이 있는 한, 비극은 이렇게 계속될 것이다. 고통과 불안만이 가득한 불면의 밤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 밤을 응시해야 할 때다. 어둠에 대한 정직한 대면과 적극적인 참여만이 비극의 연쇄를 끊을 수 있다. 이 소설과 한 민간 잠수사의 삶을 보면서 난 진실로 그렇게 믿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6-06-20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을 읽으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손을 놓았던 기억이 있네요.
읽을 수가 없었어요. 맘이 불편했어요. ㅠ

세월호 잠수부가 돌아가셨다는 뉴스, 저도 봤어요. 찹찹하고, 사회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고.
응시해야 할 사건들이 하나가 아닌, 점점 수십 개로, 수백 개로 늘어나는 느낌에, 지치는 느낌도 들어요.
그래도..... 그 밤들을 응시해야겠죠,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ICE-9 2016-06-22 02:44   좋아요 0 | URL
지금 새벽인데 잠이 안 와서 글이나 쓸까 들렀다가 마녀고냥이님 댓글을 이렇게 발견하네요.^^
지금 제가 세상을 보며 느끼는 기분이 마녀고양이님과 비슷한 것 같아요. 선거 이후로 더 실망하고, 요즘은 고인이 되신 분 소식도 있고 해서 제법 우울하네요. 이럴 때는 특히 기독교적 구원관에 매달리곤 합니다. 그것은 세계 때문에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개인 때문에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죠. 한 사람의 선의와 그 지속이 세계 전체를 지탱하는 것이라고. 소돔과 고모라가 단 한 명의 선인이 없어서 파멸 되었듯이. 세월호 잠수부 님도 그 중 한 분이셨을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분들이 부디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텨주시길,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세계가 조금은 더 아나지기를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누구는 그래 봐야 지옥이 더 지속되는 것 뿐 아니냐라고 하겠지만...
 
[지극히 내성적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9년생 여성 작가의 첫 단편집. 2012년에서 2015년 사이에 발표한, 모두 10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꼬치처럼 모두를 꿰뚫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으니, 바로 불안이다. 불안, 그것은 현대의 페스트다.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도, 그럴 수 있는 곳도 없다. 구조조정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들리고, 경제에 대한 불길한 예언이 연일 쏟아지고 있는 지금, 드리워지고 있는 불안이란 장막은 날마다 더욱 넓어지고  두터워져 간다. 그러므로 '지극히 내성적인' 단편집은 문학이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란 말을 믿는다면 지금 문학이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다.


 여기 단편의 인물들을 비유하자면, 높고 가느다란 막대 위에서 흔들리면서 돌고 있는 10개의 접시라 해야 하리라. 그것은 정말 불안하게 흔들린다. 하지만 소설의 카메라는 돌리고 있는 손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담아내는 피사체는 오로지 위태롭게 돌고 있는 접시 뿐이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불안에 갈팡질팡 하지만 독자들은 정작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불안의 진짜 이유는 마치 제목처럼 '지극히 내성적인' 곳에 꼭꼭 감춰진 듯 하다. 그렇게 소설은 불안의 여파만 훑는다. 우리가 음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엄습한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는가 뿐이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다'고 말한다면, 거기에 대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제목을 살짝 바꿔 '나는 어떻게 근심을 멈추고 불안이란 폭탄을 해체하게 되었나'하고 응수하는 격이다. 그런 면에서 10개의 접시들은 지극히 개성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균형의 경로가 다 적절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비열하고, 어떤 것은 한심하며 또 어떤 것은 자기 파괴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소설은 건조한 묘사 만큼이나 모든 경로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배제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현상학적이라 할 만하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치중하고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는 의미다. 분명 독자는 판단이든, 공감이든 어떤 식으로든 소설에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언젠가의 자기 모습을 보게 될 것이므로.


 두 번째로 나오지만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 있는 '팜비치'는 그녀에게 창비신인소설상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안정된 가정을 이룬 30대의 남자가 주인공인데, 그는 휴가를 맞아 해변에 갔다가 자신의 일상이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마지막에 그는 발가락에 상처를 입는데, 그것은 마치 자신이 가져온 상어 튜브의 이빨에 물린 것 같다. 상어 튜브가 불안을 상징한다. 그는 휴가를 맞아 아이와 해변에서 놀고 있다가 아내의 명령으로 상어 튜브를 가져오기 위해 해변을 벗어난다. 그의 과거 회상에 의하면 어떤 경로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안을 가져왔다. 회사 동료와 같이 걸어가다 우연히 맡게된 음식 냄새 때문에 멈춰 섰을 때, 그는 승진에서 누락하고 동료는 승진해 결국 혼자가 되었다. 해변에서 벗어날 때 그는 물내음을 맡으며, 슬리퍼 한 짝을 잃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상어 튜브를 찾아가는 길은 불안 속으로 점점 빠지는 길이다. 아니나 다를까, 간신히 상어 튜브를 가지고 돌아오니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 눈길이 가 있고 아이는 상어 튜브를 타려 하지 않는다. 아내는 마음을 두고 있는 남자가 진짜 팜비치에 살고 있다고 부러워한다. 그들이 현재 묶고 있는 리조트 이름은 '팜비치'. 그는 발가락의 상처처럼 엄습한 불안을 통해 자신이 진짜라 여겼던 삶이 가짜가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이후에 발표된 '구두', '오가닉 코튼 베이브', '틀니',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타투'는 그렇게 불안을 안게 된 이들이 삶에 매달리기 위해 어떻게 그것을 지워가는 지 보여 준다.


 '구두'는 자신보다 못한 타인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을 확인하는 것으로, '오가닉 코튼 베이브'는 진짜 믿지는 않지만 뭔가 거창하게 느껴지는 이념에 동참하는 것으로, '틀니'와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는 나보다 더 우월한 누군가에 기대는 것으로 그리고 '타투'는 그저 회피하고 해결을 지연하는 것으로 불안을 잠시 잠재운다. 맞다. 잠시다. 결국 그들의 모든 시도는 실패하니까. 작가는 그들의 패배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시도의 실패는 다른 경로를 찾게 만든다. '홍로', 대머리' '파란책' 그리고 '집이 넓어지고 있어'가 그렇다. '홍로'는 거짓을 진짜처럼 믿는 것으로, '대머리'는 끝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으로, '파란책'은 잘 알지도 못하고 성공에 대한 보장도 없지만 무작정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타자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으로 그리고 '집이 넓어지고 있어'는 환상에 대한 믿음을 통해 불안을 관통해 나간다. 혹은 '극복한다'고 말해도 좋다. 사실, 이 경로의 인물들은 성공하니까.


 그렇게 이 단편집은 '팜비치'를 시작으로 하여 불안을 대하는 두 경로가 나와 있으며 하나는 실패로, 다른 하나는 성공으로 귀결된다. 발표된 시점이 두 경로 모두 섞여 있기 때문에 작가가 실패에서 성공으로 나아가게끔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마도 정말은 이 모든 것을 우리들이 흔히 취할 수 있는 태도 중의 하나로 그저 제시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현상학적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내게는 말한 바와 같이, 비관과 낙관으로 나뉘어 보이고, 낙관의 경로에서 은연 중에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작가의 조언을 듣는 것 같다.


 그런데 낙관의 경로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여기에도 뭔가 공통된 것이 보인다. 이 경로에선 '파란책'이 가장 먼저 발표되었고, '집이 넓어지고 있어'가 가장 나중이다. 

 

 '파란책'은 '팜비치'처럼 안정된 일상을 영위하던 중년 여성이 주인공인데, 그녀는 딸의 책상을 자신만의 간이 책장으로 만들었다가 새삼스레 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책이란 특정한 책이 아니라 책 그 자체, 즉 '보편으로서의 책'이다. 이것은 그녀가 결국 책을 사려고 서점에 들리는데 오직 책의 두께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서 드러난다. 책은 그녀에게 전적으로 타자였다. 알지도 못했고 실용적인 목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작정 책의 세계로 빠져든다. 책이 가진 허구 속으로.

 '파란책'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허무주의를 강의하면서 허무주의엔 부정적 허무주의와 긍정적 허무주의가 있다고 이야기했고 니체의 것을 긍정적 허무주의로 보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의 불안은 궁극적으로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고 결국 그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불안의 성격도 달라지게 된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통하여 허무, 즉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꿨다. '죽음 때문에'가 아니라 '죽음이 있기에' 오히려 삶의 긍정적 전망이 열린다고 보았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그녀도 그렇게 된다. 물론 그런 하이데거의 말은 검증할 수 없다. 전적으로 허구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음과 허무를 삶의 끝이자 비관이라 생각하는 것도 허구일 지 모른다. 정직하게 보자면 우리는 두 허구 중의 하나를 선택해 믿는 것이 아닐까?


 낙관의 경로는 허구의 믿음을 선택한 자들의 것이다. '파란책'의 주인공은 하이데거의 말을 전혀 모르는 남편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이미 하나의 강을 건너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p. 228)


 강, 그것은 현실과 허구 사이에 놓인 강이었고 그녀는 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듯이 허구의 영토로 강을 건너고 말았다. 순전히 자의로. 바로 이것이 공통점이다. '파란책'에 나오는 남편과 같이, '홍로', '대머리, '집이 넓어지고 있어' 모두에서 우리는 주인공과 대립하고 있는 현실 세력들을 볼 수 있다.


 '홍로'에서는 여자의 남편이(진짜 남편은 아니고 주인공에게 월급을 주면서 아내로 고용한 사람이다. 즉 여자의 세계는 허구였다. 그녀는 아내를 연기하고 있었고 그 사실에서 늘 커다란 불안을 느꼈다. 그런데 오히려 그 허구를 껴안자, 스스로 진짜 아내라는 거짓말을 믿고 그렇게 행동하자 삶이 안정되기 시작한다.), '대머리'에선 암투병 때문에 벗겨진 머리를 가발로 가리고 있는, 주인공이 결혼하려는 여자의 언니가, '집이 넓어지고 있어'는 그녀를 둘러싼 물리적 세계 자체가 그러하다. 대립하는 현실 세력 모두 패배한다. '홍로'에선 자신은 아직 벗어던져지 못한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허물을 허구를 믿은 여자가 마침내 벗어던진 것을 보며(p. 126), '대머리'에선 '구두'처럼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과 '가발'이라는 위장으로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던 현실이 주인공에게 가발이 벗겨져 대머리라는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꾸며 결혼하려 하고 있었다. 사실 여자가 가발을 쓰고 주인공을 경멸한 것도, 주인공이 그 가발을 벗겼던 것도 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인공의 자존심이 진짜 상처 받았던 것은 자신이 결혼하려는 여자가 원래 패배자에게 잘 끌리는 성향으로 실은 그녀를 유혹할 때 전혀 거짓말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결국 그는 허구로 지탱해 온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꿈꾸던 결혼이 끝장날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가발을 벗겼고, 거꾸로 그로 인해 현실의 한없이 약하고 초라한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는 그것을 보며 격한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집이 넓어지고 있어'에선 불가사의한 이유로 자꾸만 넒어지는 집이, 이미 그것만으로도 허구가 현실에게 이기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만, 자기 집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집까지 넓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현실 세계는 패배하고 허구를 믿었던 이들은 승리한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허구를 믿었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는 아무런 보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믿음을 통해 이전엔 결코 알 수도, 볼 수도 없었던 삶이 가지고 있었던 긍정적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을 작가의 조언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일단 한 번 강을 건너 보라며 그녀가 손짓하고 있다고. 어쩌면 이런 조언은 그녀가 소설가이기에 나온 것일 수도 있다. 허구에 대한 강한 믿음 없이 어떻게 허구를 생산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요즘 아주 인기 있다는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란 책에서 호모 사피엔스 자체가 허구의 생산에 있어서도, 허구의 믿음에 있어서도 유달리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끝내 그 때문에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허구를 짓고, 허구를 먹었다. 허구가 여기까지 우리를 끌고 왔다. 사실이 이렇다면 작가의 조언을 망상이라며 내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허구에 대한 믿음은 '지극히 내성적인' 망상이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믿음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 부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정원의 대선용 여론 몰이를 위한 댓글 선동 공작이 계기가 되어 쓰여졌다는 장강명의 '댓글부대'는 정작 그 사건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는 않고 에둘러 돌아가선 그저 댓글 조작의 위험성만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실망스럽긴 했어도 장강명 작가의 소설답게 이번에도 역시 빠르게 술술 잘 읽혔다. 흡인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줘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소설이 꼭 재미만이 아니라 동시대에 뭔가 의미있는 목소리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댓글부대'가 꽤나 아쉬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장강명 작가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추구했던 것일까? 댓글이 어떻게 조작되고 대중을 선동하는 지를 여과없이 담아내자는 정도였을까? 사실 소설은 딱 그 정도만 보여준다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댓글 선동에 뛰어든 팀-알렙의 시작과 성공 과정이 이야기의 전부니까 말이다. 겨우 세 명으로만 이루어진 팀-알렙이 인터넷으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한 것을 그 중 한 멤버가 기자에게 내부고발 하는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국정원의 뉘앙스를 풍기는 인물이 둘 정도 나와 그들과 얽히고 나름 반전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야기가 풍부한 것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경마장의 말처럼 한 라인만 직선으로 돌파하는 소설이다. 그래서일까? 이야기가 한없이 얄팍하게 느껴진다.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갈등인데, 이 소설엔 아무런 갈등이 없다. 팀-알렙은 한 몸의 유기체처럼 잘 통일되어 움직이고 별다른 고난도 없이 하는 일마다 척척 성공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뭔가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도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그들에게 접근해 오고 성공의 달콤한 향기를 맡게 하더니 정치와 여론 조작이라는 더 큰 판으로 끌어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전체를 이끌어 가는 인터뷰는 얼른 보면 그들의 패망 같지만 실은 그들 성공의 정점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인물의 깊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종잇장처럼 한없이 얇게만 보인다. 때문에 소설은 다큐멘터리 보다는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 후속편에 가깝다. 인물과 이야기가 아무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니 소설이 들려주고자 하는 목소리가 마음에 채 와닿기도 전에 그저 영상만 현란하게 스쳐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설은 독자를 대화 상대자가 아니라 아이-쇼핑 하는 이로 만든다. 공감이 차단 당한 쇼윈도 안의 진열품을 눈으로 훑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인물들이 편하게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이 가진 최대의 약점 같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그저 장기말 이상의 존재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그러니 당하는 자들은 마냥 바보 같고 덕분에 댓글 공작은 그 위험성이 원래보다 더 과잉되어 보인다. 그리고 그 과잉된 위험은 독자로 하여금 설마 댓글이나 이런 저열한 조작이 그 정도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냉철하게 생각해 보기도 전에 마치 그게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한다. 하지만 '댓글부대'는 그런 영향력을 경고하고 스스로 먼저 그것의 진리치를 독립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성찰할 것을 고취하자는 목적에서 나왔다. 이건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소설은 원래 자신이 가진 목적과 정반대를 독자에게 행하고 있다. 자기 모순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실패작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은 실패작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미 출발부터 작가가 우월적 시선에서 작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한다면, 이 소설은 위험하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유명한 대사, '대중들은 개, 돼지 입니다. 조금 짖어대다가 조용해 질 겁니다' 처럼 대중에 대한 경멸을 은근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잡한 조작에도 이토록 쉽게 흔들리는 대중이라니! 이런 작가의 조소가 팀-알렙이 인터넷으로 뭔가 저지를 때마다 은연중 느껴지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감정을 성급히 일반화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립적으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중을 소설 속 인물들만큼이나 얄팍하게 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나라가 망해도 여전히 여당을 지지하는 35%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소설의 주제를 강조하다 보니 조금 무리를 해버렸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런 우월의 시선은 날 불편하게 만든다. 결국 여기엔 이 현실이 아무리 문제가 있다고 해도 이런 대중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가 있을 뿐, 이 현실을 타개하고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자발적 노력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내 생각일 뿐이지만, 좋은 소설은 독자를 홀로 유폐시키지 않고 타인과 연대하게 만든다. 우리가 유포되는 흑색선전에 휘둘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제대로 성찰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연대를 강고히 만들기 위함이다. 하지만 소설은 나 아닌 타자를 그저 의심하거나 경멸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니 위험하다. 이 소설은 달콤하다. 그렇다고 해서 단번에 삼키면 독약이 된다. 이런 설정이 설득력이 있는가, 이런 태도에 문제는 없는가 천천히 따져보며 삼켜야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2-27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28 0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억과 윤리.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읽고 얼른 떠올리게 된 두 단어다. 니체 덕분이다. 그는 이 둘이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행위 할 때 언제나 우리가 가진 기억의 한 단면만을 사용한다고 한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는 충분히 수긍이 간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우리는 필요한 기억을 제외한 대부분의 것들은 망각하니까. 행위는 망각이 선행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들로 가득 차서 오히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망각은 어디까지나 선택과 배제로 인한 결과다. 그런 면에서 비윤리적이다. 필요에 따라선 타인마저도 쉽게 망각할 수 있다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도덕은 이러한 부당한 망각에 저항하여 단면이 아니라 전체를 기억하려 애쓰는 양심을 만들었다고 니체는 말했다. 내게 '그믐'의 주인공 남자는 바로 그런 니체의 양심이 구현된 존재로 보였다. 사춘기 시절에 동급생을 칼로 찔러 죽인 그는 후일 병원에서 그믐달이 뜬 어느 날 '우주 알'이란 존재를 영접하고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건 다름 아닌 전체 기억을 볼 수 있는 힘이었다. 소설에서는 이를 패턴이라 부른다. 그것은 표면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전체적인 흐름을 볼 수 있는 창구와 같다. 그런 점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된 기억을 대등하게 복원하려는 니체의 양심과 닮아 있다. 그런데 소설엔 그렇지 않은 이들이 나와 남자와 대비를 이룬다. 이들은 남자를 둘러싼 여자들로 하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고 다른 하나는 남자가 죽인 아이의 엄마다. 둘은 모두 과거의 아픔에 사로잡혀 니체가 비윤리적이라 칭했던 행위 중심의 부분적인 기억들을 가지고 남자를 찾아와선 고백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어려움과 고통만 토로할 줄 알았지 정작 남자의 삶은 어떤지, 그 내면엔 무엇이 움트고 있는지 전혀 묻지 않는다. 한 마디로 두 여자는 자기중심인 것이다. 반면 전체를 기억하는 남자는 언제나 더 많이 들으려 애쓰고 그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맞춰주기도 한다. 그녀들에게 기억이란 지금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만 남자에겐 자기변호를 위한 기억의 수집 보단 타인의 행복을 창출하는 기억의 창조가 더 중요하다. 즉 남자는 타인중심이다. 소설은 이렇게 자기중심과 타인중심으로 선명하게 나눠진다. 물론 소설은 후자를 지향한다. 단적으로 소설이 타인을 없애는 흉기로 지극히 자기중심 적인 로 시작해서 오로지 상대를 드러내야만 자신을 보일 수 있기에 타인중심이라 할 만한 으로 끝난다는 점과 여주인공이 남자의 궁극적인 희생 후, 비로소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라는 질문을 시작한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치 소설에서 여자가 작두로 원고를 잘못 잘라 모든 게 뒤섞여 버린 것 같은 형태를 취한 소설의 형식이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여자가 이야기를 잇기 위해 원고를 최대한 집중해서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듯이 소설도 이런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타인중심을 더욱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단면을 만드는 작두가 줄 수 있는 '확실한 앎' 보다는 여자의 머리를 뒤덮는 스카프에 간직된 '모호성'으로 우리를 더 열려고 하며 그 개방을 통해 입체로서의 타인을 응시케 하여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그믐달이 되도록 이끈다. 그믐달은 아침에 떠서 해가 지기 전에 사라져 버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존재지만 그 달엔 다음과 같은 힘이 있다.

 달빛에는 이상한 힘이 생겨 잘라진 것을 붙이고, 끊어진 것을 잇게 되지. 그리고 고통을 멈추게 해 줘.(p. 140)

 여기엔 타인중심의 이해로 서로 연결될 때, 우리의 고통은 비로소 끝날 것이라는 작가의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오직 한 가지, 나 자신이 그믐달처럼 사라져야 한다. 이것은 나의 기억으로 타인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자세를 필요로 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나오는 여자 모습처럼 타인에 대한 단정이 아닌 무수한 질문으로 나를 채우는 것이야 말로 소설이 도래시키고 싶어 하는 그믐의 상황이다. 이야기 속의 아내가 스카프로 자신의 시야를 모두 가렸을 때 홀연히 자기가 정말 원하는 곳에 있게 된 것처럼 바로 그 그믐에서 우리 역시 그토록 원하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 소설은 약속한다. 그러고 보니 버지니아 울프도 무언가를 규정하기 힘든 밤이야 말로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라고 말했었다. 진정한 사랑은 오히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을 통해 타인중심이 무엇이며,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가득 경험한 지금, 버지니아 울프의 말도 있고 하니 나는 더욱 소설의 약속을 믿고 싶어진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9-20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0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1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2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2 0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6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6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6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30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5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엔 하나의 열망이 있다. 시간을 붙잡고 싶어 한다. 김중혁 작가의 단편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이 작가 말대로 연애 소설이라면 여기엔 오로지 단 하나의 연애만 존재하는 셈이다. 바로 시간과의 연애다. 생각해 보면 시간이란 연인과 같다. 내 사람이 아닐 땐 빨리 내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하고, 내 사람이 되어도 행여나 내게 이 많은 행복을 주는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곧잘 불안에 빠진다. '뱀들이 있어'의 정민철이 짝사랑하는 류영선에게 그랬듯이, 혹은 '요요'의 차선재의 삶에서 불현듯 사라진 장수영처럼 말이다. 손아귀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것일수록 단단히 잡고 싶은 법이라서 그런지 시간이든 연인이든 불안할수록 더욱 움켜쥐게 된다. 소설엔 바로 그런 시간의 포획을 향한 갈망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시간일까?

 그건 바로 시간이 코스모스(cosmos) 세계의 상징이기에 그렇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어김없이 정해진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그러기에 예측도 쉽다. 아침 조례 시간의 교실 모습과도 같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반듯이 돌아가는 세계. 시간은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의 지그소 퍼즐이나 '종이 위의 욕조'에 나오는 박물관 전시 회장도 다 시간이다. 퍼즐은 자기 자리가 정해져 있고 박물관 전시 회장 역시 큐레이터가 계획한 대로 관객의 동선이 다 정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보트가 가는 곳'의 비행물체 또한 마찬가지다. 그 역시 박물관 전시 회장과 똑같이 사람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몰아가지 않았던가. 이런 시간을 장악하려는 열망이 8개의 단편 곳곳에 배여있다. 때로 그것은 '상황과 비율'에서의 차양준이나 '힘과 가속도의 법칙'에서의 현수처럼 상황 통제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의문은 계속된다. 하나 같이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편 '가짜 팔로 하는 포옹'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삶이 조그만 바람에도 쉬이 날아가는 땅콩 껍질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을.

 규호의 입으로 전해지는 인물인 '피존'은 그것을 더욱 명확하게 한다. 그는 알콜중독자인데 술에 취하면 자기를 비롯하여 주위의 열려 있는 모든 것을 채우거나 닫는 버릇이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문을 모조리 '잠근다'고 말한다. 그가 그러는 것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을 지 모르기 때문이다. '힘과 가속도의 법칙'에 나오는 현수와 똑같이 그는 자신을 파괴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열린 모든 것을 잠그는 그의 행위는 기실 자신을 살리려는 노력에 다름아니다. 


 저는 위스키를 마실 때마다 창문을 꼭 걸어 잠급니다. 술에 취해서 저도 모르게 뛰어내릴까봐서요. 제가 비집고 나갈 수 없을만큼 작은 창문인데도 매번 창문을 잠갔습니다. 비겁한 제가 부끄러웠고, 소심한 제가 창피했습니다.(p. 125)


 이런 그의 고백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는 스스로를 땅콩 껍질만큼 한없이 엷은 존재로 여긴다. 아니나 다를까 술을 마시면 언제나 몸이 붕 뜨고, 무중력 상태를 체험하는 것 같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앞의 세상은 무정하기만 하다. 자신 속에서 아무리 고통의 뱀들이 날뛰어도 세상의 시간은 그저 무심히 흐를 뿐인 것이다. 마치 먼저 이별을 통보하는 연인의 모습과 같다. 실연을 겪어본 이들은 잘 알 것이다. 이별을 결심한 상대의 마음이란 어찌나 냉담으로 단단한지 그대로 두꺼운 얼음과 같다는 것을. '보트가 가는 곳'에서 정화가 말하는 얼음 그대로다.


 "카메라가 얼음 아래에서 얼음 위로 올려다보는데, 사람들이 다 보여요.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들도 먹먹하게 들려요. 다 보이고, 다 들리는데 그 사이를 엄청나게 두꺼운 얼음이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끔찍하죠?"(P. 257)


 차갑게 뒤돌아선 연인에게 지금 내가 너로 인해 얼마나 아픈지 말하는 나는 두꺼운 얼음 아래에서 소리를 내지르는 사람과 같다. 상대에게 전혀 가 닿지 못하는 것이다. 김중혁이 '피존'의 이야기를 이미 헤어진 연인 사이인 규호와 정윤과 엮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규호가 아무리 아파도 정해진 시간이 되자 정윤은 술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린다. 피존과 규호 모두에게 정윤은 세상의 가면인 것이다. 세상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결코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작가 역시 규호(7시)와 정윤의 시간(11시)이 서로 다르게 엇갈린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피존은 이렇게 토로하는 것이다.


 맺힌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십니까? 자, 여기 술잔을 잡아 봅시다.(...)

 여기에 왜 맺히는지 압니까? 이것은 온도 차이 때문입니다. 나는 차가운데, 바깥은 차갑지 않아서. 나는 아픈데, 바깥은 하나도 아프질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맺히는 겁니다.(p. 133)


 여기서 내 존재의 엷어짐이 실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 작가는 은연 중에 내비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내 시간의 소외에서 온다는 것을.

 세상의 시간이 두터운 벽으로 가리워져 내 인지와 의지의 시야와 정도를 한없이 벗어나기에 나란 존재는 점점 작아져만 가는 것이다. 그런 내게 세상의 시간이란 온전히 예측불허다. '뱀들이 있다'에서 일어난 대지진, '보트가 가는 곳'에서의 검은 구멍과 같다. 언제 내 발 밑에 불쑥 나타나서 나를 삼킬 지 모른다. 그러기에 나란 존재는 더 쪼그라들고 장악의 갈망은 더욱 커진다.


 그런데 그 갈망이란 알고 보면 신이 되고픈 욕망이기도 하다.

 신의 속성은 흔히 전지와 전능으로 일컬어진다. 전지와 전능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게 바로 예측 불허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은 결코 자신이 모르는 것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지 않는다. 예측 불허는 완벽한 계산 속에서 설 자리를 잃고 모든 우연마저 필연의 부분이 된다. 똑같이 코스모스의 세계를 염원하는 것이다. 이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소설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바 '상황과 비율'의 차양준이 대표적이다. 그는 포르노를 만드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겐 정사 보다 상황이 더 중요하다. 그에겐 수십 개의 상황이 미리 계획되어 있고 포르노는 정확히 그 계획대로 연출되어야 한다. 그는 신처럼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상대의 마음을 몰라 불안하기만한 연인이 가장 되고픈 모습을 바로 그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곳에는 상대방이 설 자리가 없다. 신적인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이 소설이 하필이면 포르노 세계를 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헤겔은 남녀간의 정사를 타자를 상호 인정하는 가장 개인적이며 친밀한 행위로 꼽은 바 있다. 하지만 포르노는 서로를 도구로 이용할 뿐이다. 타인의 존재 가치는 거의 제로에 가까울만큼 엷어진다. 일례로 여배우 송미는 정사를 나누며 언덕을 굴러가다 누군가에 짓밟히는 탁구공을 상상한다. '피존'과 현수에게서 보았던 자기 파열의 열망을 송미 역시 드러내는 것이다. 신을 향한 열망은 점점 엷어져만 가는 자신을 구원하려는 소망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제 그 열망은 자신이 가졌던 통증의 시간에다 타인마저 빠뜨린다. 공교롭게도 소설엔 차양준과 같이 '신'이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인물이 나온다. 바로 '뱀들이 있어'의 정민철이다. 그는 게임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현한다. 그런데 차양준과 비슷하게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향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 사상자가 무려 200명이 넘고 가장 친한 친구마저 생사 불명인데도 그는 걱정과 위로가 아니라 마치 불구경을 가듯 '이상한 호기심과 설명할 수 없는 쾌감 때문에(p.167)' 고향을 찾는 것이다.


 정민철은 타인의 슬픔을 잘 느낄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자주 되묻곤 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언제나 관찰할 뿐 공감하지는 못했다.(p. 168)


 신이라 할만한, 다른 의미에서 시간을 포획했다고 보여지는 이들이 왜 한결 같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마지막 단편인 '요요'를 읽다보면 이것이 바로 시계를 발명한 근대의 패배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요요'의 주인공 차선재는 시계 제작자다. 그는 '사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계를 만든 적이 있다. 그런데 '사계'는 대표적인 중세의 시간이었다. 중세의 시간은 하나의 흐름이었고 유일하게 외계의 변화에 따라서만 분절되었다. 하지만 근대의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와 만들어진 시침과 분침 그리고 초침은 외계의 변화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본위로만 흘렀다. 외계가 전적으로 거기에 맞춰야 했다.


 그렇게 시간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이것을 근대의 가장 커다란 패착이라고 보았다. 진정한 시간이란 그저 물처럼 흐르는 것인데 근대는 그것을 인위적으로 구분하여 공간화시켜서는 가짜 시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건 통제와 배제로 이루어졌고 타자를 고려하려는 맥락은 손쉽게 무시되었다. 결국 이 시간이 타자를 지배하거나 제거하는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낳았다고 그는 보았다. 작가가 소설에서 그리는 과정이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마치 이것을 드러내듯 갈망을 가진 소설 속 인물 대부분은 시간 포획에 실패한다.


 여기서 우리는 제목의 가짜 팔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눈치챌 수 있을 듯 하다. 그것은 마네킹의 팔이 아니라 사실은 지금 우리의 삶을 포옹하고 있는 근대의 발명품인 시침과 분침이라는 두 팔로 이루어진 시계 바늘이라는 것을 말이다. 즉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이 가리키는 것은 규호가 꿈에서 본 것처럼 자기 구원을 위해 잡았으나 끝내 자기 파멸로 이끄는 자기 본위적인 팔들인 시간 자체인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 차원까지 고려해 생각한다면소설에 투영된 작가의 내심은 보다 분명해지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다음과 같지 않을까? 불안이 갈망을 낳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갈망에만 빠져 있어서는 안된다. 그럴수록 타인 역시 나만큼 불안하며 나처럼 거기서 빠져 나오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헤아려야 한다. '지진이 날 때 뱀들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내가 안은 몸에서 나처럼 '작은 생명이 그 품 안에서 팔딱이는' 걸 알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움켜쥐려 내미는 자기 본위의 팔에서 상대의 손을 맞잡기 위해 내미는 타인본위의 팔로 나아가기 위한 생각 혹은 시야의 전환.

 그것은 '요요'에서 다음과 같은 장수영의 말로 구체화 된다.


 '네가 만들어준 시계를 들여다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시침과 분침이 겹쳐다가 떨어지는 순간, 그건 멀어지는 걸까, 아니면 다시 가까워지는 중인 걸까. 난 생각했어. 나쁘지 않아. 그래, 나쁘지 않아.'(p. 336 ~ 337)     


 가까이서 보면 멀어지기만 하는 시침과 분침. 그러나 보다 멀리에서 보면 그것은 오히려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보다 먼 시야를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가까이에 있는 근대가 조밀하게 공간화시킨 가짜 시간만 소유하려 애써온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작아지고 구속된 나만 느끼게 될 뿐이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자유는(존재감이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의 자유가 수반되는 것이므로) 보다 먼 시야로 진짜 시간을 바라보고 그 너나없는 흐름에 온전히 나를 내어줄 때 찾아올 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네델란드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시간이란 바로 타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진짜 시간'에게 나를 맡김은 타인에게 나를 내어줌과 같은 행위인 것이다. 그렇게 시간의 진짜 의미와 타인은 겹쳐지고 이제 우리는 왜 '요요'에서 차선재가 장수영에게 주기 위해 만든 'Station'('머뭄'을 뜻하는 제목 자체가 시간의 포획을 상징하고 있다. 차선재는 유일하게 시간 포획에 성공한 사람이다. 그것도 가짜 시간이 아닌 진짜 시간을)'이란 시계를 미완성인 채로 봉인하는 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발 아래에서 유유히 흐르는 보다 더 거대한 시간에 맡기는 것이며, 그 자체로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의미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때, 차선재는 드디어 '요요'로 형상화 되는 참된 시간 속에다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게 된다.


 삶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지나친 갈망은 감옥이 되기 쉽다. 프랑스의 사르트르는 문학의 주제는 자유에 있으며 작품은 그것을 위한 작가의 기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우리 모두의 자유를 위한 김중혁 작가의 기도인 셈이다. 기도라고 하니 '뱀들이 있다'에서 정민철이 류영선의 기도를 들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 때 정민철은 류영선의 눈빛에 '다른 세상이 담겨 있으며 어디 먼 곳을 다녀온 여행자의 눈빛(P. 163)'인 걸 본다. 류영선도 정민철의 눈 속에 뭔가를 찾아내기 위해 깊이 들여다 본다. 여기엔 팔의 포옹이 아니라 시선의 포옹이 있다. 나를 내려놓고 타인을 더 깊이 헤아리려는 시선들이 서로 얼싸 안는 것. 이런 시선이야말로 작가가 바라는 '진짜 팔'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도 어서 그런 시선을 가지고 싶다. 먼저 누군가를 힘껏 안아줄 수 있도록.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9-22 0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2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