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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아랍인 Vol.1 - 중동에서 보낸 어린 시절 (1978~1984)
리아드 사투프 지음, 박언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시리아. 아마도 현재 중동 국가 중 가장 많이 언론에 보도되는 나라가 아닐까 생각된다. 일단 IS가 거기에 있고, 더하여 2011년에 시작된 내전으로 벌써 20만명이 사망하고 인구의 절반이 난민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인정한다. 지옥이 지상에 존재한다면 그 곳은 시리아일 것이라고. 그래서 궁금했다. 이런 저런 경로로 참으로 많이 접하는 이름이나 시리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정작 하나도 없었기에. 도대체 어떤 나라인지 알고 싶었다.


 한 나라를 아는 방법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외재적 접근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내재적 접근 방법이다. 외재적 접근은 한 나라를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아무래도 거리가 있는만큼 시각에 있어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할 수 있으니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객관적이 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그 시각 역시 바라보는 국가가 놓인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근대 이후에 서양의 제국주의에 봉사하느라 동양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시선이 널리 퍼진 것처럼 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것을 두고 단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이라 표현했다. 그래서 이슬람을 믿는 인구가 무려 86%에 달한다는 시리아처럼,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 멀리 타자의 영역에 위치하는 나라일수록 외재적 접근이 줄 수 있는 편견과 왜곡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재적 접근이 필요하게 된다. 내재적 접근이란, 쉽게 말하여 그 나라의 입장이 되어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경제상황을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리아드 사투프의 그래픽 노블, '미래의 아랍인'을 손에 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시리아를 시리아인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리아드 사투프는 1978년 생이다. 그는 시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사내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리아 시골 출신으로, 국가 장학금을 받아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으로 유학와서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마음에 들었던 여자는 원래 어머니가 아니었다. 실은 어머니의 친구를 더 원했지만 친구가 아버지를 떼어내려고 거짓으로 아버지와 데이트 약속을 했는데, 어머니가 하염없이 친구를 기다릴 아버지가 불쌍해 그 사실을 말해주려 약속 장소로 나갔다가 끝내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솔직히 리아드의 아버지는 그리 매력적인 인물은 못된다. 시리아 문화가 가진 가부장주의를 그대로 가지고 있고, 세속적 성공을 누구보다 바라는 속물이다. 중동 정세에 관심이 대단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 관심의 대부분이 프랑스에 살면서 시리아의 시골 출신으로서 가지게 된 자괴감이나 차별 받은 경험이 낳은 보복 감정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로 인해 무지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조국 사람들을 교육으로 그 종교의 미망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가 중동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이유는 그런 신념에 있지 않고 프랑스에서 박사가 된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모습과 자신이 얻은 성공에 대한 과시에 있다. 이슬람 문화에서 차남의 지위가 대개 다 그렇듯이, 그 역시 집안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바로 그것을 현재 성취한 신분과 성공으로 보상하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따자마자 아내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중동 국가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결국 리비아 대학에 자리를 얻은 그는 아내와 아들 리아드를 데리고 리비아로 간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될 리아드를 형상화 한 그림. 그림의 황토색은 나라를 나타낸다. 만화는 나라마다 색깔을 달리 하는데, 황토색은 리비아를, 파란색은 프랑스를, 분홍은 시리아를 나타낸다.


 리아드가 언제 리비아로 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책의 부제는 '중동에서 보낸 어린 시절'로 그 연도를 1978년 부터 1984년까지라고 명기하고 있으나 만화의 표현은 이것과 모순된다. 리아드는 78년생이니 만일 부제에서 표기한 연도대로 리비아로 갔다면 간난 아기로 묘사되어야 한다. 하지만 만화에서는 어엿하게 자기 다리로 걷고 아빠와 제대로 대화도 가능한 아이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실수인지 아니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일부러 모호하게 처리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게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뜻하지 않게 리아드의 아랍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작품은 리비아와 시리아 그리고 프랑스를 오고가는, 마치 방랑자와도 같았던 어린 시절을 담아낸다.


 이 기록은 어디까지나 리아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정말 살아본 이가 아니었으면 들려줄 수 없는 이야기를 여기서 참 많이 듣게 된다. 초반에 나오는 리비아부터 솔깃하고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다. 특히 집이 그랬다. 독재가 카다피가 리비아를 다스렸을 때, 그는 리비아의 모든 사유주의 재산을 없앴다. 모든 것은 국가가 배급했다. 집도 마찬가지였다. 특이한 것은 리비아 집에 열쇠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집은 리비아 국가가 소유한다는 의미로 집의 모든 문을 잠그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랄 일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리아드 가족이 잠깐 외출을 다녀와 보니 다른 가족이 그 집에 들어와 살고 있었고 이제 자신들의 집이 되었노라 말하는 것이다. 알고 보니, 리비아 법에 아무도 없는 집은 누구나 들어와 살 권리가 있다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리비아에서는 어떤 경우든지 가족 전부가 집을 떠나선 안되고 무조건 한 사람은 남아서 집을 지켜야 한단다. 결국 리아드 가족은 집을 잃었고 이 사실로 인해 리아드의 어머니는 리비아에서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외출하지 못했다.



 아무리 취지가 좋다고 해도 융통성이 없으면 체제가 얼마나 한 개인에게 어처구니 없게 굴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지만 거기에 더하여 외출을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시리아인을 남편으로 둔 여자의 삶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만화에서 그녀의 존재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대부분 실내에 갇혀 있었고 가족들과 외출할 때는 항상 끝에서 조용히 가족들을 따라다녔다. 자신이 먼저 주장하는 법도 없었다. 말하기 보다는 듣는 쪽이었고 남편의 고향 시리아에 갔을 때는 여성의 존재를 하찮게 취급하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관습도 가만히 수용했다. 이 부분에서 내부인의 눈으로 보여준 시리아의 집안 풍경은 정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리아의 여인들은 남자들의 대화에 낄 수 없었고 음식도 남자들이 남긴 것을 먹어야했다. 그냥 여인이라도 참기 힘들 것 같은데 하물며 리아드의 어머니는 여성의 권리가 가장 발달했다는 프랑스 여자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시리아 여인들과 똑같이 받아들였다.


 나는 이런 어머니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물론 리아드의 기억 그대로이긴 하겠지만 리아드가 어머니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것엔 다른 의미도 투영된 것 같았다.


 프랑스에 왔을 때, 리아드의 모습. 이렇게 만화는 부성의 공간과 모성의 공간을 색깔로 구분하고 있으며, 실상 리아드가 경험하는 것도 다르다.


 그것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대비되어 나타나는 시리아인들의 모습 때문이다. 리아드가  처음으로 시리아인 사촌들을 만나자마자 경험한 것은 유태인을 적대하는 모습이었다. 사촌들이 다짜고짜 리아드를 유태인이라 부르며 공격했던 것이다.


 리아드가 시리아에 와서 가장 처음 만났던 모습이 시리아 편의 처음을 연다. 그곳에서 목격하게 될, 차별과 폭력을 한 컷으로 나타내고 있다. 시작을 여는 한 컷이 의미심장하게 보여서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리아드에게 있어 각 나라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마을에서 살게 되었을 때, 리아드는 또래 아이들이 모두 약한 동물들과 아이들에게 유태인이라 부르면서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거기서는 폭력이 예사로 행해졌다. 아이들은 버림받은 강아지를 삼지창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찔렀고 강아지가 신음 소리를 내자 한 어른이 뛰쳐나와선 강아지의 목을 태연하게 날려 버렸다.



 이것은 폭력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된 것이었지만, 그래서 결국 어머니도 참지 못하고 리아드를 위해 프랑스 행을 결정하게 만들었지만, 그런 폭력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 곳엔 폭력이 만연해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때렸고, 남자는 여자를 때렸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적대로 그것을 정당화했다. 폭력은 자신의 뜻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가장 획일적인 방식이다. 거기엔 타인에 대한 고려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만이 존재하는 그 곳에서 타인에 대한 적대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시리아는 이렇게 체제에 저항한 자들을 교수형 시키고 그 시체를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에 걸어 놓는다. 아버지의 대사는 시리아에 만연한 폭력이 정확히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인지 말해준다. 오로지 단 하나인, 자신만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것임을.


 하지만 리아드의 어머니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많이 듣고, 조용히 판단하며 관용으로 타인의 것을 먼저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면서도 리아드를 그런 폭력적 상황에 방치하는 것과 같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나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


 이런 선명한 대비가, 무심히 자신의 자전적 기억만 보여주는 것 같은 이 작품에서 리아드의 어머니처럼 조용하게 하지만 착실히 하나의 의미 지점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여전히 항구적인 이슬람과 서양 문명 사이의 싸움만큼이나 이주노동자와 난민 사태 등으로 내부와 외부의 갈등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는 요즘, 아무래도 과연 상대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가 시대의 화두가 될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것의 모델을 리아드의 어머니를 통하여 그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총 3부작으로, 난 이제 겨우 1부만 보았을 뿐이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좀 섣부른 감이 있다. 그러나 분명 리아드 어머니의 묘사는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리아드가 자신의 어머니를 단순하게 존재감이 엷은 여자로 그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정말 그랬다면 그래픽 노블계의 노벨문학상이라고 평가받는 앙굴렘 대상을 수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자전적이라고 해도 그러한 여성 묘사는 문제가 있으니까 말이다.


 리아드는 경계의 존재다. 그는 아버지인 아랍인과 어머니인 유럽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에겐 두 개의 모델이 존재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 그리고 타자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모델들이.

 아마도 이런 모델로써의 의미를 독자에게 강조하기 위해 리아드가 프랑스와 아랍을 오고가는 형식으로 묘사했는 지도 모른다. 색깔까지 달리 써 가면서 말이다. 더구나 아버지는 리아드에게 자주 아랍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아직 아랍인이 아니다. 그래서 제목도 '미래의 아랍인'일 것이다. 그러나 리아드가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언젠가 미래에 아랍인이 된다고 해도 아버지를 빼다 박은 아랍인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작가는 지속적으로 아버지가 그다지 좋은 모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목이 뜻하는 바는 분명 현재의 아버지가 대표하는, 그렇게 지금의 아랍이 보여주는 적대의 모습이 아닌, 보다 바람직한 아랍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한계가 있는 아버지의 모델 옆에, 그것의 보완으로써 어머니의 모델을 병치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 모델이 유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현재 유럽의 모습은 아니다. 굳이 유럽이라고 해야 한다면 이상화된 유럽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작품에서 어머니가 보여주는 모습이 현재 유럽과 차이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를 위해 낯설기 그지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 데다 자신의 자유마저 구속하는 타인의 문화와 관습까지 묵묵히 감내했다. 관용과 희생이 전부였다. 이런 모습은 오리엔탈리즘을 부르짓는 유럽의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굳이 찾자면 이런 어머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박애의 구현이라 할 수 있으니, 그런 박애의 정신을 세 가지 기본 정신 중 하나로 천명했던 프랑스 혁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가 혁명을 통해 구현하려 했던 박애로 충만한 유럽. 그랬기에 이상화된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리아드의 어머니는 바로 그것을 나타낸다. '미래의 아랍인'은 바로 그 박애가 혼합된, 그래서 어머니처럼 먼저 관용과 희생이 체화된 존재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1권밖에 읽지 않은 나로서는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아주 섣부른 추정이다. 그래서 이런 내 해석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보기 위해서라도 얼른 다음 권을 만나고 싶다. 1권의 마지막은 시리아에서 사는 것을 아주 두려워하는 리아드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시리아로 가는 장면이다. 공항에서 리아드 모습은 곧 다가올 미래 때문에 더없이 곤혹스러운 표정인데 그래서 다시 가 본 시리아에서 리아드에게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더 많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어머니가 어떤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 역시도.


 1권은 2015년 2월 15일에 나왔는데, 1년 하고도 4개월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까지 2권이 아직 안 나오고 있다. 그래서 끝을 이런 말로 끝내고 싶다. '2권과 3권, 빨리 출간해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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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양이 1 - 팥알이와 콩알이
네코마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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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 집사로 3년차이다 보니 고양이가 마냥 귀엽지만은 않다. 고양이와 개의 차이점에 대한 이런 농담이 있다. 주인이 밥을 줄 때, 개는 자신이 먹을 양식을 매일 풍족하게 주니까 주인을 신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반면 고양이는 그걸 주인의 공양 같은 것이라 생각해서 자신을 신으로 생각한다. 듣고 무릎을 쳤다. 그동안 내가 가까이서 관찰한 바 고양이는 정말 그랬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고양이의 모토란 이렇다고 한다.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딱 이대로다. 밥이 필요할 때 말고는 애교도 없고 자기가 심심하다고 손이나 발을 꽉 무는 게 낙인 녀석. 이것이 다만 불운한 뽑기 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네코마키의 ‘콩 고양이’에 나오는 고양이도 그랬기 때문에.


‘콩 고양이’는 네코마키의 만화다. 팥알이와 콩알이란 이름의 고양이 커플이 주인공인 만화다. 분위기는 마쓰다 마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팥알이와 콩알이는 그들이 동거하게 되는 가족의 장녀가 친구에게서 얻어 온 고양이다. 팥알은 암컷, 콩알은 수컷이다. 팥알은 까다롭고, 호기심이 많으며 매사에 적극적이고 콩알은 무던해서 먹을 것과 잠만 많이 잘 수 있다면 어디에 있든 고향처럼 여길 수 있으며 팥알에 비해 진중한 성격이다. 자연히 관계는 적극적인 팥알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콩 고양이’는 이런 고양이들이 새롭게 낯선 이들과 가족을 이루어 살면서 차츰 적응해 나가는 것을 에피소드로 엮어 보여주는 만화다.



 작가인 네코마키는 물론 일본 사람이다.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냥코’와 동거중인 부부 일러스트레이터 작가라고 책날개에 소개되어 있다. 책 날개엔 고양이 사진이 하나 나와 있는데 아마도 ‘냥코’인 것 같다. 눈매가 딱 보니 성깔있게 생겼다.(어쩌면 졸았을 때 찍었는 지도 모른다.) 아마도 팥알의 모델은 바로 이 녀석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고양이에 대한 묘사가 정말 사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공감한 묘사가 많다. 내가 키우는 고양이도 암컷이라 특히 팥알에게 더 깊이 공감했다.


 예를 들면 이런 묘사들.





 정말 뜬금없이 온 집안을 두다다다 뛰어 다니고 갑자기 손이나 발을 물며 공격하는 일이 많았다. 그것도 특히 밤에. 책상이나 장롱 위를 닌자처럼 휙휙 뛰어다녔다. 처음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암컷이니 발정기를 특별히 민감하게 타는 것은 아닐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저 여기의 팥알처럼 갑자기 떠오른 충동의 결과일 뿐이었다. 하니, 갑자기 고양이가 왕성하게 활동적이 되거나 공격적이 된다고 해서 너무 겁먹지 마시길. 그냥 일시적 신내림이 내렸던 거라고 여기면 편할 것 같다.


아래는 더욱 진심으로 공감했던 에피소드. 아, 지금 생각해도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진다.(그렇다고 이 주먹을 고양이에게 쓰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길.) 공간에 비해 책이 많은 고로 집 곳곳에 책탑이 있다. 문제는 우리집 냥이가 이 책탑을 자기 발톱 가는 곳으로 애용한다는 사실이다. 전용 발톱 가는 판때기를 사 주었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책탑만 주구장창 무지막지 할퀴어댔다. 덕분에 책들은 가장자리마다 모두 너덜너덜. 특별히 선물 받은 'GO'의 브라질 원서가 냥이의 공격으로 상처를 받았을 땐 정말 내게 분노의 광기가 신내림 하기도 했다. 이런 기억이 있어 이 에피소드 만큼은 고양이가 아니라 아줌마에게 공감했다. 하지만 팥알과 콩알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오타쿠적으로 피규어를 수집하는 장남의 소장품들도 잠입하여 박살낸다. 내 레고들도 냥이의 느닷업는 '두다다다~'에 본래의 제 모습으로 돌아갔던 아픈 기억이...




 자, 나처럼 집사가 되어 아낌없이 양식과 감정을 착취 당하는 가족들의 소개다.



 나처럼 늘 '악연이다 악연이야!'라고 외치면서도 불현듯 애정이 치솟는 것을 어찌할 수 없는 아줌마와 집에서의 존재감이 없어 거의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아버지. 참치회로 팥알이와 콩알이에게 미식의 신세계를 열어주셨으나 초창기엔 가발로 공포감을 안겨주기도 했던 할아버지. 집안에 팥알이와 콩알이란 원흉을 가져왔으나 정작 본인은 뒤치닥거리를 거의 하지 않는 명목상의 주인일뿐인 장녀에 과연 연애는 할 수 있을까 싶은(무려 35살!) 오빠가 팥알이와 콩알이의 새로운 가족이자 등장인물들이다.


아무튼 꽤나 재미있고 유쾌한 만화였다. 고양이를 키운다면 나처럼 재미나게 읽지 않을까 싶다.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가 생각나 뜬금없이 웃음이 터져 나올 때도 있다. 이걸 보니 나도 문득 고양이에 대한 만화가 그리고 싶어졌다. 꼭 묘사하고 싶은 장면이 하나 있다. 뭔가 내게 요구할 게 있을 때마다 애교를 부리듯 엉덩이를 내 쪽으로 들이미는 것인데, 이 때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탁탁 쳐주면 얌전히 있는다. 이유는 모른다. 상황이 좀 웃긴다. 거기다 이 때 냥이기 짓는 표정도 묘한 것이 꽤 재밌다. 요걸 그대로 드러나게 그릴 수 있으면 좋을텐데. 몇 번이나 도전했는데 원하는 표정이 안 나와서 포기했다. 네코마키는 팥알과 콩알이 가지는 고양이로서의 개성을 잘 포착해 묘사했는데 덕분에 아주 그들의 존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요런 재능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놓쳐버리는 냥이의 표정, 몸짓, 일상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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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존재 1 - 담박한 그림맛, 찰진 글맛 / 삶과 욕망이 어우러진 매콤한 이야기 한 사발
들개이빨 지음 / 애니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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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큐 딸리는 머리로 생각해봤다.

삶의 비참함에 대해...

아마도 그건 살기 위해서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허기를 채운다는 게 충분조건이 아니라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필수조건이 되어버렸기에...


이 빌어먹을 허기!

그건 나의 삶을 대한민국에 허다한 그렇고 그런 삶들 중의 하나로 얽매었고

끝도 없는 타협과 불합리한 권위와 어리석은 맹목 앞에서의 굴종을 낳았으며

결국 내 두 날개를 모두 잘라 작고 소심한 키위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으로 존재한다면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심정이다.


나도 예전에 생각했다.

육두 문자를 오프닝으로 가볍게 읊조린 다음 왜 우리는 식물처럼 광합성을 못할까 하고.

설마 바로 그 말을 이 만화에서 보게 될 줄이야!



 사회 생활에 연륜이 쌓이고 인간 경험이 깊어지면 어느 순간 득도하게 될 때가 있다.

한 눈에 보기만 해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감히 잡히는 때가 말이다.

물론 그 감이 100%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웬만큼은 들어 맞는다.

때로 그 혜안은 작품에도 적용되는데

이 작품이 그랬다.

이 장면으로 이 만화는 지극히 내 취향의 만화일 것임을 직감했고

결국 더없이 정확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바로 이 장면으로!



나도 고수를 생으로 씹는다.

왜 고수를 꼭 빼달라고 하는지 이해 안되는 사람이 나다.


그러니 안면몰수하고 누군가는 '주접 떨고 있네'할만큼 이 작품에 찬사를 늘어놓아 보자.

이제와 경고하자면,

그만큼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똘끼 충만한 편견 가득한 리뷰다.

메롱, 속았지?

하지만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게 뭐가 나빠? 



 '먹는 존재'는 올해 읽은 그 어떤 작품보다 내가 가장 많이 공감한 작품이다.

 솔직히 나는 반했다.



거침없이 작렬하는 육두문자를 BGM으로 흘러나오는 그녀의 직설에 마조히즘을 느끼면서 반했고


상사에 대한 쉬발리얼리스틱한 저항에는 설레었으며


기존 만화의 음식 맛에 대한 표현을 모조리 작파하고 19금 애로의 경지로 승화시킨 것에는 경탄하였다.


 그럼에도 가볍지 않았고 직설로 무장한 분명 사회 밑바닥 삶에 대한 관심과 이해에서 길어진 그녀의 통찰은 열 권의 인문서보다 더 뇌리에 둔중한 충격을 주었으며 아픔과 분노에는 나도 모르게 덮고 있는 요를 꽉 쥘만큼 공감하게 만들었다. 하여 생각했다. '쉬르발! 이런 게 진짜 만화고 우리 인생사 아냐?'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좋은 작품은 효자손 같은 거라고.

그냥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는 게 아니다. 알지만 표현의 능력이 모자라 말로 되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우리를 대신해 적당한 표현을 찾아주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서 답답할 때가 참 많지 않은가? 누군가 그 말을 딱 찾아 일러준다면 가려운 등을 효자손으로 긁은 것처럼 시원해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효자손이다.


 나는 그런 걸 주는 것을 좋은 작품이라고 여긴다. 알맞은 표현은 중요하다. 그건 어떤 구체성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더라도 막연하다면 그건 나의 선택에, 행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적합한 표현의 말로 구체화 되어야만 우리는 그것을 정초로 사유와 행위의 누각을 지을 수 있다.


 구약에서 신은 모세가 말을 잘 못해서 걱정이라고 하자 그를 대신해 말을 잘 할 수 있는 아론을 주었다. 나는 좋은 작품은 이런 아론이라 생각한다. 곰곰히 생각하면서도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흐지부지 사라져버렸던 사유에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고 잘하면 실천까지도 나아가게 하는 존재.


말이 되는 지, 과연 이해 될런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진심이다.


 다른 거 없다.

 "앗! 이거야! 이런 말을 하고 싶었어!"할만한 것들을 많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작품.

 그것이 내겐 정말 좋은 작품이다.


'먹는 존재'가 그랬다.

나의 '아론'


작가에 대한 애정으로 스토킹을 했다. 

그러다 찾아낸 작가의 블로그.

거기에 이게 있었다. 큭큭큭...


공자가 말하길 인생사 꼭 필요한 건 '음식남녀'라,

즉 '식'과 '성'이라고 했는데

실수겠지만 그걸 절묘하게 표현한 것 같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말할 건가요?


후후...


아론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얼른 나와서 갑갑증을 좀 뚫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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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분 씨네 채소 가게 - 채소 장수 일과 사람 13
정지혜 지음 / 사계절 / 2013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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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어릴 때, 할머니는 동네 시장에 나가 좌판을 벌여놓고 채소를 파셨다. 이제는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 단지가 되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집에서 한참 걸어가면 나오는 고개턱에 할머니가 매일 같이 나가서 알뜰살뜰 가꾸시던 채소밭이 있었다. 거기서 배추랑 무, 쪽파며 오이나 상추 같은 것들을 함지박 가득 담아다가 머리에 이고 오셔서는 파시는 것이었다. 사정이 있어 부모님과 떨어져 있었던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게 싫어서 습관처럼 할머니를 밭으로 시장으로 따라 나섰다.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그 곳들은 내게 놀이터와도 같았다.

 

 

 '순분씨네 채소가게'를 처음 보았을 때 한동안 눈길이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불현듯 그 때 시장에서 할머니 옆에 앉아서 종종 사주시는 과자나 아이스크림(대개는 '쭈쭈바'였다.)을 먹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다리 바라보기를 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록 좌판이었지만 '채소가게'는 그렇게 내 유년의 추억이 진하게 어려 있는 곳이다. 아직도 생생히 들려오는 듯하다. 여기저기서 흥정하는 소리. 손님 모으느라 고함치는 소리. 여름날에 늘 나를 꾸벅꾸벅 졸게 만들었던 자장가 소리와도 같았던 시장 끝 동사무소 안마당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에서 맴맴 들려오는 매미소리 같은 것들이. 하여 읽었다. 그건 내게 그 유년의 기억들이 다시금 3D 입체영화로 상영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때부터 알았다. 시장이 단순히 물건만 사고파는 곳만은 아니라는 걸. 할머니가 좌판을 하고 계시면 참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를 붙였다 가곤했다. 물론 그 모두가 손님은 아니었다. 사실 채소를 사러 온 이들보다 안부나 묻고 일없이 잡담이나 나누러 온 이들이 훨씬 많았다. 거기서 귀동냥을 하고 있으면 가만히 앉아서도 마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 있었다. 과자 먹는 것보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더 맛났다.

 그 맛 때문이었을까? 할머니께서도 채소 파는 걸 딱히 신경 쓰시지 않는 듯 했다. 그저 아는 얼굴 만나고 안부나 나누고 이런 말 저런 말 두런두런 나누시는 게 더 좋으신 것 같았다. 나는 나대로 좋았다. 들렀다 가는 어른들 때문에 별로 지루하지도 않았지만 언제나 그냥 가지 않고 내게 덕담을 해 주거나 더러 용돈도 주곤 했기 때문이다.

 

 시장이야말로 그 어느 곳 보다 진솔한 소통의 장이라는 걸 듬뿍 느꼈다. 주고받는 건 말 뿐이 아니었다. 그만큼 정 역시도 더운 김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양푼 가득 담긴 칼국수 마냥 오고가는 곳이었다. 그렇게 시장은 사람살이의 냄새가 숯불에 구운 갈치만큼이나 진하고 구수한 곳이었고 그건 오고가는 말과 정에 의해 더욱 멀리 멀리 퍼져나갔다. 바로 그 먹음직스런 향기에 취해 사람들은 시장으로 모여들었다.

타임머신처럼 날 유년으로 다시 데려다 준 '순분씨네 채소가게'에 나오는 시장도 그랬다. 이 책은 채소장수의 하루를 보여주지만 그보다 더 맛깔스럽게 그려내는 것은 정감 넘치고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시장의 모습이다. 꼭 흥정이 아니어도 손님과 가게 주인 사이에 일없는 잡담이 가능하며 기분 좋으면 '옛다!' 하고 푹 더 얹어주는 덤이 있다. 사람이 계산서에 찍히는 가격 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이다. 오래도록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이 어디 꼭 물건이나 가격 때문에 오는 것이던가? 그동안 쌓인 도타운 정에 이끌려 그걸 또 한 번 더 나누어 받겠다고 찾아오는 법이듯이.

 시장은 돈 냄새, 물건 냄새 보다 맞부딪히는 살 냄새가 더욱 가득한 곳이었다. '순분씨네 채소가게'는 어느 페이지를 들춰봐도 살 냄새가 한껏 느껴진다. 그 모든 자락마다 늘 얼굴을 맞대고 이빨이 드러나도록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꼭 있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들이다. 하기도 힘들다. 시장에서 그렇게 말을 나누고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피해 가지만 마트에서 그렇게 하면 좁은 통로에서 뭐하는 것이냐며 힐난 받기 쉽다. 시장은 사람이 가격 위에 있을 수 있지만 마트에선 절대 그렇지 못하다. 오고가는 흥정은 '삑'하는 바코드로 대체되고 '얼마입니다.' '일시불로 하실래요?' 외에는 별달리 나누는 말도 없다. 시장은 소통의 공간이지만 대형마트는 그냥 소비를 위한 공간에 불과하다. 시장은 말과 정의 나눔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 가치 또한 높일 수 있지만 대형마트에서 우리는 그저 물건 사는 단순한 소비자에 불과하다. 자판기에서 음료수 캔을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개인적으로 이 그림은 일과 사람 시리즈 첫 권인 '짜장면 더 주세요'에서 나왔던 신흥반점의 아저씨가 카메오로 나와서 더 좋았다.)


 그런 시장이 대형마트에 밀려 점점 사라지고 있다니 정말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순분씨네 채소가게'에서 다시금 시장의 매력을 듬뿍 느끼게 된 지금은 더욱 그렇다. '순분씨네 채소가게'는 '일과 사람' 시리즈 중의 하나다. '일과 사람' 시리즈는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직업들이 있으며 그 직업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는 걸 아이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나오고 있다. 그 직업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건 모든 직업이 그 나름대로 타인과 사회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모두가 그만의 고유하고도 소중한 경험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시장이 소중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대형마트에서 우리는 오로지 물건을 사는 경험만 할 뿐이지만 시장에서는 그것뿐 만이 아니라 다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이라든지 사람과 사람이 서로 나누는 교감 등등 참으로 이런저런 풍성한 경험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물건 밖에는 없지만 시장에서는 사람을 본다. 모두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함께 우리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말이다.

 시장이 없어진다는 건 그런 소중한 경험을 가져다 줄 장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위 그림에 나오는 많은 목장갑들이 왜 우리가 시장을 보호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저 수 많은 목장갑 하나마다 깃들어 있을 사연과 추억을 생각한다면 시장이란 그야말로 이야기의 보고가 아닌가 싶다. 시장이란 그런 이야기를 듣거나 우리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곳이다. 지금의 내가 그렇듯이, 언젠가 미래에 문득 떠올리게 된다면 내가 정말 많은 이들과 추억을 쌓아왔구나 느껴져서 문득 누군가 아궁이에 불이라도 지핀 것처럼 마음의 아랫목이 따스해지는.

그런 시장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 목장갑의 몇 백배나 되는 이야기가 쌓일 수 있도록 아주 오랫동안 존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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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7-2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군요
사람과 사람이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곳, 사라져가고 있다니 안타깝습니다
모두 없어지지 않으면 좋겠네요
사람들이 안부도 물을 수 있는 곳이라니, 그런 경험은 해 본 적이 없네요
헤르메스 님은 어렸을 때 좋은 경험하셨네요


희선

ICE-9 2013-07-23 23:46   좋아요 0 | URL
예전 어릴때 느꼈던 시장과 지금의 마트를 비교해보면 우리네 인간관계가 얼마나 삭막해져버렸는가를 단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리뷰에도 쓰려다가 빼버렸는데 요즘 아이들이 날이 갈수록 감정이 메말라가는 것도 이런 식으로 친밀한 교류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해요. 좀 더 이런 것을 줄 수 있는 공간으로 시장을 살려나가는 것은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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