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이 책은
?
영매 테레사 카푸토의
이야기이다.
테레사가
영매가 되기까지,
그리고
영매 일을 하면서 보고 듣고 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There’s
More to Life Than This.......>이니,
‘이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
정도가
되겠다.
곧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의
이야기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어 번역본은 제목을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라고
했을까?
이 세상이 끝이
아니고,
저
세상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에 안녕(good
bye) 이라고
말하지 마라,
고
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편견 없이 읽으려 했으나
기독교인인 관계로 이런 종류의 책을
접할 때,
우선은
편견없이 읽으려고 애를 쓴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게 제대로 되진 않았지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식스
센스>와
<사랑과
영혼>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떠오르는 이미지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영매 역을 맡은 우피 골드버그가 떠올랐다.
그 것은 저자가 그 영화를
언급했기에 그렇다.
(116쪽)
또한 저자가 언급한 영화
<식스
센스>도
오버랩 된다.
죽은 사람을 보는 소년이 등장하는
영화에서처럼,
저자는
죽은 사람을 느끼는 것.
저자는 느낄
뿐인데도,
이미지는
마치 영화 속의 그 소년이 죽은 사람을 보는 것처럼,
또
<사랑과
영혼>에서
죽은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 같은 그러한 상상을 하면서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 얻은 것들
그 중
하나는,
죽은
자들에게 죄책감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주변에도,
또한
전해들은 것 중에 ‘자기가
뭔가 잘 못해서 그 사람을 죽게 했다’면서
평생을 죄책감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으로부터
반복해서 나오는 한가지 메시지는 당신이 그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당신이
두려움이나 자책감을 지지 않고 삶을 껴안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68쪽)
그러니,
‘내가
그 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죽지 않았을 것인데’
라는
자책은 쓸모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두려움을
대하는 자세’에
관한 부분이다.
이런
말,
새겨들을
만하다.
“삶에서
우성인자로 믿음과 두려움을 둘 다 가지고 있을 순 없다.”
(112쪽).
“그
둘은 서로를 반박한다.
그
둘은 서로 대항하는 힘이다.”
그러니,
믿음과
두려움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니,
믿음이
있다면 두려워 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이것을
뒤집어 말한다면 두려워한다면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두려움을 버리고 믿음을 껴안아야 한다.”
이런 말은
기독교인에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에도
적용이 될 것이기에,
이
부분을 ‘기독교적인
견지’에서
읽어 보았다.
“두려움을
믿음으로 바꾸는 것은 삶의 어떤 국면에서도 정말 따를만한 규칙이다.”(112쪽)
“두려움은
부정적 성향을 끌어들이고 키운다.”
(113쪽)
옥의 티
(혹은 혹의
티)
저자인 영매 테레사 카푸토는
자신에게 영매의 능력이 있는 것을 결혼하고 나서 아이를 낳은 다음에 알게 되어 그제사 영매의 길로
들어섰다.
아이 둘을
낳았는데,
첫째는
아들 래리 주니어(23쪽)이고,
둘째는
딸, 이름은 빅토리아(24쪽)이다.
그런데 약간 모순된 진술이
등장한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스물 세 살이었다.”(23쪽)
“딸
빅토리아를 임신 했을 때 .....
스물
일곱 살에 빅토리아를 낳았고....”(24쪽)
“1999년
12월
나는 이유없이 죽을 것처럼 아팠다.
......나는
2주
동안 병원에 누워있었다.
아들
래리 주니어가 아홉 살이고 빅토리아가 다섯 살이었기에 힘들었다.”(24쪽)
그리고 영매의 스승이 되는 팻
롱고를 만난 때가 스물여덟살 되는 해였다,
(26- 28쪽)
“5년
동안 팻의 수업을 들으며 ....“(38쪽)
이 모든 것을 감안해서 계산해
본다면 아들,
딸을
모두 낳고, 아들이 아홉 살,
딸이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저자는 아직 영매로서의 인식이나 그 일을 하지 않을 때이다.
그런데 이런 기록이
보인다.
<내가
할머니를 커다란 파리라고 설정한 이래로 특히 중요한 시기마다 할머니는 나를 돕기 위해 나타난다.
이에
대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내가 딸 빅토리아를 출산한 뒤 일어났다.
새벽
1시였다.
나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간호사가 내 방으로 머리를 내밀며 뭘 좀 먹을 것건지 물었다.......
(간호사가
가져온)
샐러드
위에 뚱뚱한 파리가 앉아있었다.
그것은
역겨웠지만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할머니는
손녀가 태어나는 동안,
그리고
내가 아파 누워있는 동안,
자신이
나와 함께 있다는 걸 내가 알기를 원한 것이다.“(124-
125쪽)
딸 빅토리아를 출산한 시기에는 아직
영매로서의 인식을 하지 않았을 때이고,
특히
영혼이 신호를 보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때인데,
저자는
그렇게 거꾸로 시간을 거술러 올라가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모순된 이야기,
잘못된
발언이 아닌가?
다양한 것들을 한 자리에
저자는 가톨릭 신자라
한다.
“나는
로마 가톨릭 신자로 자랐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 종교를 따른다.”(11쪽)
그래서 성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심지어
그 성인에게 부탁을 하기도 한다.
“영혼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나는 차분히 앉아서 마음을 편안히 갖고 유실물의 수호성인인 성 안토니오에게 그 물건을 놓아둔 곳으로 나를 인도해 달라고
기도한다.”(155쪽)
모르겠다.
가톨릭에서
성인을 그렇게 이용하라고 가르치는지?
저자는 가톨릭인이라면서 전생을
인정한다.
다른 사항들을 모두 고려해
본다면,
저자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채널링
–
영혼과
교감하는 일-
에
유익하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각하는
것은 이 책은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고 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것이 어떤 진리나 진실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