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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거울 - 바로크 미술에 담긴 철학의 초상
유성애 지음 / 미진사 / 2021년 2월
평점 :
자기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철학자의 거울』
이 책은?
이 책 『철학자의 거울』은 < 바로크 미술에 담긴 철학의 초상>을 매개로 하여 엮어내는 철학책이다.
저자는 유성애, <한양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문신저술상, 한국조각평론상 등을 수상했다. 주요 관심사는 예술과 정치철학이다. 관심 분야에서 다양한 글쓰기를 모색 중이다. 15년째 공부모임을 이어오며 예술 관련 주제를 공부 중이다. 대학시절 미술가의 꿈을 품었으나, 지금은 읽고 쓰는 사람으로 예술과 함께한다. 예술의 중립성과 객관성이라는 허상을 뛰어넘어, 현실과 연계된 예술의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최근에는 예술과 감정, 정치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일단 철학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근대 이후의 철학자들은 사진이란 문명의 이기 덕분에 그 얼굴을 알고 있지만, 예컨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 얼굴 어디 생각할 수나 있었나? 헌데 이 책에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화가들이 그려 놓은 덕분이다.
데모크리토스, 헤라클레이토스, 디오게네스(41쪽), 아리스토텔레스 (37쪽),
소크라테스 (95쪽), 아스파시아(226쪽), 플라톤 (325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모습을 그린 화가들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기록, 플루타르코스, 호라티우스의 역사서 등을 참고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223쪽)
디오니게스는 특히 많은 화가들이 즐겨 선택한 철학자다.
디오니게스는 여러 명의 화가들이 그렸는데,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다.
<디오니게스가 있는 풍경> 41쪽
<컵을 버리는 디오니게스> 46쪽
<인간을 찾아다니는 디오니게스> 90쪽
<정직한 인간을 찾아다니는 디오니게스> 95쪽
<참된 인간을 찾아다니는 디오니게스> 281쪽
17세기 바로크 시대
이 책을 관통하는 시대는 바로크 시대다. 17세기의 예술인 바로크.
바로크 작품 속 철학자는 자기 반성적 인간을 상징한다. 특히 거울을 든 철학자 이미지는 17세기 철학자 그림의 핵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거울은 철학자의 도구, 자기 발견의 매개다
거울은 내면을 비추는 은유다. (323쪽)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철학자의 거울』인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그림 속의 철학자는, 가난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철학자는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선택하지만, 가난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진정한 목적은 자유다. 자기를 옭아매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 한다. 소유는 언제나 타인과 연관되어 있다. 더 많이 가지려면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거나, 반대로 그를 제압해야 한다. (61쪽)
철학과 철학자, 저자는 철학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철학자들이 추구한 철학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고 한다. 해서 다음과 같은 발언은 철학의 모습들이다.
철학자의 진리는 타인을 항상 필요로 한다. 타인은 새로운 가능성의 원천인 동시에 취약점이다. (76쪽)
질문과 의심은 철학자의 주요 무기다. 철학자가 던지는 질문은 소통의 도구다. (98쪽)
과거 없이 미래를 모색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인은 시간을 뛰어넘어 기억되는 불멸을 꿈꿨다. 철학자의 지혜는 자기 시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시대마다 재해석되어 기억된다. (162쪽)
그림 몇 개 살펴보자.
<호메로스 두상을 보는 아리스토텔레스> (74쪽)
네델란드 화가 렘브란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렸다. 호메로스의 두상을 바라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한다.
작품 속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유한 귀족 같다. 매끈한 원단에 풍성하게 주름 잡힌 우아한 옷과 화려한 장신구가 돋보인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남자의 표정을 읽기 어렵다. 좋은 추억에 젖은 듯 미소 지은 얼굴에는 문즉 회한이 스친다.
장막 뒤 가득 쌓여 있는 책이 눈에 띈다. 책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다. 글쓴이는 죽어서도 현재의 독자와 함께 살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호메로스라는 과거에 빚을 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두른 금빛 사슬은 그저 장식 요소가 아니다. 『일리아스』의 황금 밧줄 이야기를 암시한다. (…… ) 아리스토텔레스의 금빛 사슬은 흔들리지 않는 정신, 고양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호메로스의 유산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
18세기 신고전주의의 대표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살펴보자.
먼저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소크라테스가 있다. 그는 작품의 중앙에 침대에 앉아, 왼손을 들고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그의 왼쪽에 서 있는 사람, 손에 잔을 들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마셔야 할 독이 든 잔이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저 잔만 건네고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무릎에 손을 얹고 있는 사람은?
크리톤이다.
플라톤이 저술한 『크리톤』의 실제 인물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탈옥과 망명을 권유한 사람이다. 그 과정이 『크리톤』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 그가 이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현장에 같이 있는 것이다.
그밖의 인물은?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니, 그의 추종자 또는 제자로 짐작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그림에서 이상한 모습이 하나 포착이 된다. 이런 장면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 그림의 가장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
그는 누구이며, 왜 그렇게 현장과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것일까?
이 책을 읽다가 그 답을 찾았다. 여기 소개한다.
작품에서 플라톤의 배치가 특이하다. 등을 돌린 플라톤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마치 등 뒤의 소란과 아무 상관없다는 듯, 그는 다른 인물과 전혀 섞이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보면 왜곡된 묘사다.
소크라테스의 형 집행 당시, 20대 청년이던 플라톤은 현장에 없었다.
다비드는 왜 부재했던 플라톤의 자리를 만들고 그를 중년으로 묘사했을까?
플라톤 밑에 놓인 종이와 잉크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에는 다중의 시간과 해석이 겹쳐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시간에 있다. 그는 스승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플라톤 뒤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의 머릿속에서 재현된 과거이다.
그는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글로 썼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실화를 바탕으로 플라톤이 구성하고 의미 부여한 이야기다. 플라톤이 아니었다면 소크라테스의 사유와 선택은 지금처럼 이해되지 못했을 것이다.
(152쪽)

베르나르도 스트로치의 <운명의 세 여신 >The Three Fates
헤시오도스가 쓴 『신들의 계보』에 의하면, 운명의 여신은 이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밤은 또 운명의 여신들과 무자비하게 응징하는 죽음의 여신들을 낳으니,
이 여신들은 인간들과 신들의 범법을 추척하되
죄지은 자들을 응징하기 전에는 무서운 노여움을
결코 풀지 않는다.
운명의 여신이란,
[인간들이 태어날 때 그들에게 행운과 불행을 정해주는
클로토와 라케시스와 아트로포스를] 말한다.
(『신들의 계보』, 헤시오도스, 천병희 역, 47쪽)
이에 대하여 역자는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아놓았다.
운명의 여신들(Morai 라/ Fata 또는 Parcae) 은 ‘각자가 맡은 몫’이란 뜻의 morai(Moirai의 단수형)가 신격화된 것으로, 호메로스 이후에는 클로토(Klotho, 실 잣는 여자), 라케시스(Lachesis, 할당하는 여자), 아트로포스(Atropos, 되돌릴 수 없는 여자, 가차없는 여자) 세 자매인데, 한 명이 실을 자으면, 다른 한 명은 이를 감고, 나머지 한 명은 명(命)이 다하면 이를 끊음으로써 각자의 수명을 조절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그 세 여신을 이미지로 살펴보자.
17세기 회화에서 운은 주로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운의 여신 형상을 활용해서 그려진다. 운의 여신이라고 다 같지 않다. 운명 (fate)과 운(fortune)은 구분된다.
운명의 여신은 인생 행로의 필연성을 강조한다.
베르나르도 스트로치의 작품 속 세 여인은 그리스 신화에서 운명을 관장하는 여신, 모이라이(Moirai)다.
이들의 상징은 실타래다. 바구니에 실타래가 가득하다. 실은 인생을 뜻한다.
왼편에서 실을 뽑는 여인은 클로토(Clotho), 옆의 백발 여인은 라케시스(Lachesis), 실을 자르려는 노파는 아트로포스(Atropos)다.
이들은 각각 인간의 시간을 대표하기도 한다. 실을 뽑는 클로토는 생이 진행되는 현재, 실의 길이를 재고 있는 라케시스는 과거, 생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아트로포스는 미래를 가리킨다.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조합이다.
라케시스의 역할이 특히 눈에 띈다. 실의 재료인 솜뭉치가 라케시스의 머리에 닿아서, 마치 클로토의 왼손이 라케시스의 머리카락 끝을 쥐고 있는 듯하다.
한편 라케시스는 아트로포스의 뒤에 있어, 라케시스가 이미 골라낸 실은 아트로포스의 가위가 닿지 않는다.
세 여인의 위치와 행동은 인간 시간의 독특한 관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현재는 과거가 녹아들어 있다. 과거는 미래와 그리 멀지 않지만, 서로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모든 실의 시작과 끝은 세 여신의 손에 달려 있다.
(189쪽)

밑줄 긋고 새겨볼 말들
조르다노가 그린 플라톤은 자기와 투쟁하는 인간이다.
작은 탁자에는 『법률』의 한 구절이 적혀 있다.
“최고의 승리는 자기 자신에게 이기는 것.” (325쪽)
‘자기 자신에게 이겨야 한다’는 말의 원조가 바로 플라톤이라는 것, 이제 알게 된다.
다시, 이 책은?
저자는 왜 철학자를 17세기를 나타내는 인물들로 뽑은 것일까?
저자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철학자는 17 세기 화가들이 세운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다. 그는 일상인도, 그렇다고 영웅도 아니다. 인간 능력의 한도 내에서 자기 삶을 의미 짓고 책임지려는 사람이다. (219쪽)
그래서 자기 삶을 책임 지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철학자, 그들은 비록 누더기를 걸쳤다 하더라도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인간 삶을 의미 지우는 가치다. 거지 철학자의 누더기는 언제 보아도 예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성실한 믿음으로 고통과 시련을 인내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은 부정될 수 없다. (73쪽)
철학은 반드시 철학자만 하는 게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은 철학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 보여주는 초상화를 자기 자신의 얼굴로 대신해보면, 어떨까?
자화상이 철학하는 자로 보인다면, 내면도 외면을 따라 철학자가 될지 모른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