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야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 소스라쳐 달아날 테니까. 야생 칠면조를 관찰하면서 배운 교훈이었다. 포식자처럼 행동하면 상대도 먹잇감답게 행동한다. 그냥 못 본 척, 천천히 가던 길을 가면 된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83

다른 사람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멀찌감치 보이는 배도 한 대 없었다. 그래서 널찍한 어귀로 돌아 들어설 때, 똑같이 낡아빠진 보트를 탄 소년이 습지의 풀밭에 바짝 붙어 낚시하는 광경은 뜻밖이었다. 카야의 진로는 소년과 불과 6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카야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거친 습지 아이처럼 보였다. 산발로 헝클어진 머리, 먼지투성이의 뺨, 바람에 눈이 시어 흘린 눈물 자국.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85

곁눈질로 보니 소년은 몸이 가늘었고 황금빛 고수머리에 빨간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카야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아 보였다. 열한 살, 아니 열두 살쯤 되어 보였다. 다가가는 카야의 표정은 어두웠지만 소년은 따뜻하고 허물없이 웃어보이며 신사가 고운 드레스를 입고 보닛을 쓴 숙녀를 반기듯 모자챙에 손을 대 인사했다. 카야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앞만 보면서 스로틀을 올리고 지나쳤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86

태양의 영토를 빼앗고 있던 구름이 소리 없이 묵직하게 이동하며 맑은 수면에 비친 하늘을 밀어내고 그림자를 질질 끌고 와 덮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86

혼자라 무서웠지만 이제는 그 기억마저 흥분돼 콧노래를 불렀다. 게다가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소년의 차분함. 그렇게 찬찬히 말하고 움직이는 사람을 카야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너무나 확고하면서도 편안한 행동거지였다. 그냥 근처에만 있었는데, 그렇게 가까이 간 것도 아닌데, 딱딱하게 뭉쳐 있던 카야의 응어리가 한결 느슨해졌다. 엄마와 조디가 떠나고 처음으로 숨 쉴 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상처 말고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카야에게는 이 보트와 그 소년이 필요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91

바다를 훑어보며 아버지의 새우잡이 배 체리파이호를 찾던 테이트는 저 멀리 환한 빨간색 페인트와 파도가 높아질 때마다 흔들리는 넓은 그물을 보았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91

스코틀랜드 이민자인 스커퍼의 고조부는 1760년대에 노스캐롤라이나 연안에서 난파한 선박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는 해안까지 헤엄쳐 와서 아우터뱅크스에 상륙했고 아내를 만나 슬하에 자식 13명을 두었다. 족보가 워커 씨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으나 스커퍼와 테이트는 대체로 단둘이서만 지냈다. 테이트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있던 시절과는 달리 치킨 샐러드와 데블드 에그를 펼쳐놓고 즐기는 친척들의 일요일 소풍에도 나가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93

테이트는 사진에서 눈길을 돌리고 토마토를 썰고 베이크 빈을 저었다. 테이트만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둘 다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치킨에 양념을 바르고 캐리언은 비스킷을 잘랐겠지.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94

테이트의 아버지는 진짜 남자란 부끄러움 없이 울고 심장으로 시를 읽고 영혼으로 오페라를 느끼며,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95

방에 들어가 수업 시간에 읽을 시를 살펴보던 테이트는 토머스 무어Thomas Moore의 시 한 편을 발견했다.

……그녀는 암울한 늪의 호수로 갔네
그곳에서 밤새도록 반딧불이 등불을 벗 삼아
하얀 카누를 저었지

머지않아 나는 그녀의 반딧불이 등불을 볼 테고
그녀의 노 젓는 소리를 들을 테고
우리 삶은 길고 사랑으로 충만하리라
죽음의 발걸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나는 그 처녀를 사이프러스 나무에 숨기리

그 단어들이 조디의 동생 카야를 떠올리게 했다. 광활한 습지에서 너무 작고 외로워 보였다. 테이트는 여동생이 습지에서 길을 잃었다는 상상을 했다. 아버지가 옳았다. 시는 무언가 느끼게 만들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96

카야는 소년을 생각했다. 친절하지만 강했어, 조디처럼. 요즘 카야가 말을 섞는 상대는 가끔 아버지 그리고 훨씬 뜸하게 피글리 위글리에서 카운터를 보는 싱글터리 부인밖에 없었다. 싱글터리 부인은 요즘 카야에게 쿼터25센트 동전, 니켈5센트 동전, 다임10센트 동전의 차이를 가르쳐주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페니1센트 동전는 카야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싱글터리 부인은 성가시게 오지랖을 부릴 때가 많았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98

카야는 갈수록 아무하고도 말을 섞지 않고 갈매기한테만 이야기했다. 아버지한테 배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으려면 어떤 거래를 해야 할까 고민이었다. 습지에 나가면 깃털과 조개껍데기를 모으고 가끔은 그 소년을 볼 수도 있을 텐데. 카야는 친구를 가져본 적은 없지만 친구가 왜 필요한지는 알 것 같았다. 매혹적인 이끌림이 느껴졌다. 강어귀도 함께 돌아다니고 소택지를 샅샅이 탐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년은 카야를 그저 꼬마라고 생각할 테지만, 습지를 빠삭하게 꿰고 있으니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쳐줄지도 모른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99

카야는 주방으로 달려가 겨잣잎과 등뼈와 그리츠를 끓여 만든 굴라쉬를 차렸다. 그레이비를 만들 줄 몰라서 텅 빈 잼 단지에 등뼈 육수를 부었다. 하얀 기름이 국물에 둥둥 떠다녔다. 접시는 금이 가고 짝도 맞지 않았지만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포크를 왼쪽에 놓고 오른쪽에 나이프를 놓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자동차에 깔려 납작해진 황새처럼 찬장 냉장고에 딱 붙어 선 채로.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02

두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이런, 이게 다 뭐냐? 쬐끄만 게 갑자기 다 커버린 것 같네. 요리도 하고, 참."
아버지는 웃지 않았지만 차분한 얼굴이었다. 수염을 깎지 않아 텁수룩했고 왼쪽 관자놀이 위로 감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맑은 정신이었다. 카야는 술에 취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을 다 알았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03

카야는 아버지의 접시에 음식을 담으며 배시시 웃었다. 콘브레드로 가까워지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생각해보니 지금 보트를 써도 좋으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카야가 대가를 바라고 요리하고 청소했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렇게 시작한 일이지만 이제는 왠지 다른 기분이 들었다. 카야는 가족처럼 함께 앉아 밥을 먹는 게 좋았다. 누군가와 말하고 싶다는 갈망이 절박해졌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05

하지만 이 보잘것없는 가족의 잔해를 지키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물고기 입장에서는 다른 얘기겠지만, 어쨌든.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08

그날 저녁 아버지는 생선을 튀겨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옥수숫가루와 검은 후추를 듬뿍 묻혀 튀기고 그리츠와 채소를 곁들였다. 밥을 다 먹고 카야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쓰던 낡은 군용 배낭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문간에 서서 의자에 배낭을 아무렇게나 휙 던졌다. 쿵 소리를 내며 배낭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카야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돌아보았다.
"너 깃털이랑 새 둥지랑 뭐 그런 거 수집하는 거, 여기다 넣으면 좋을 것 같더라."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08

카야는 낡은 배낭을 집어들었다. 평생을 써도 닳지 않을 것 같은 튼튼한 캔버스 천으로 만들어진 배낭에는 작은 호주머니들과 비밀 수납공간이 가득했다. 웬만해서는 고장 나지 않을 지퍼. 카야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한 번도 카야에게 무언가를 준 적이 없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09

"여기서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된다." 아버지가 말했다. "숲에는 백인 쓰레기들이 많으니까. 거의 다 약에도 못 쓸 인간들이라고 생각해야 해."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10

아버지는 매가 초원을 알고 있듯 습지를 샅샅이 알고 있었다. 사냥하는 법, 숨는 법, 침입자들에게 겁을 주는 법도 잘 알았다. 아버지는 카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던지는 질문들에 신이 나서 거위 사냥철, 물고기들의 습성, 구름과 파도의 이안류를 보고 날씨를 읽는 법 등을 설명해주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10

한참 후에는 포치 잠자리에 누워 소나무 숲 소리를 들었다. 눈을 감았다가 문득 커다랗게 떴다. 아버지가 틀림없이 ‘아가’라고 불렀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13

소금물 습지는 시멘트 덩어리라도 아침 식사로 꿀꺽 잡아 잡순다는 말이 있다. 벙커 같은 보안관 집무실도 갯비린내를 막진 못했다. 언저리에 소금 결정이 들러붙은 물 찬 자국들이 벽을 따라 낮게 물결 모양으로 번져 있고 검은 곰팡이가 천장을 향해 핏줄처럼 퍼져 있었다. 아주 작은 까만 버섯들이 모퉁이마다 옹송그리고 자라났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15

"내가 제때 봤어요. 고마워요, 제니. 저런 사람들은 마을 출입을 못 하게 하면 좋겠네요. 저 계집애 좀 봐요. 더러워 죽겠어. 못 배워먹어서 고약하잖아요. 요즘 장염이 돈다던데 내 생각엔 틀림없이 저런 사람들한테서 옮겨온 거 같아요. 작년에는 홍역도 옮겼잖아요. 심각한 문제라니까." 테리사는 아이를 꼭 움켜쥐고는 가버렸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27

엄마가 한 말도 또렷했다. "이제 오슨 웰스 씨의 방송을 잘 들어봐. 정말 신사답게 말한단 말이야. ain’t(ain‘t는 인칭을 구분하지 않고 쓰는 남부 사투리다.)라는 말은 절대 쓰지 말고. 영어에 그런 말은 없거든."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29

아버지는 다시는 카야와 낚시하러 가지 않았다. 따스했던 날들은 덤으로 주어진 계절이었다. 낮은 구름이 갈라져 밝은 햇살이 카야의 세상을 잠시 환하게 비추는가 싶더니 곧 어둠이 굳게 아물려 움켜쥔 주먹처럼 단단하게 죄어들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33

남들한테 뒤지지 않으려고 카야는 촛불이나 달빛에 의지해 깊은 밤에 홍합을 땄다. 은은히 빛나는 모래밭에서 카야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홍합뿐 아니라 굴도 따고, 첫 새벽이 밝자마자 일착으로 점핑에게 가려고 골짜기 근처에서 노숙을 하기도 했다. 홍합 판 돈이 월요일 돈보다 훨씬 더 꾸준히 들어왔고, 카야는 대체로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44

그렇게 누워서 엄마는 말했다. "다들 엄마 말 잘 들어. 이건 진짜 인생에 있어 중요한 교훈이야. 그래, 우리 배는 좌초돼서 꼼짝도 못 했어. 하지만 우리 여자들이 어떻게 했지? 재밋거리로 만들었잖아. 깔깔 웃으며 좋아했잖아. 자매랑 여자 친구들은 그래서 좋은 거야. 아무리 진흙탕이라도 함께 꼭 붙어 있어야 하는 거야, 특히나 진창에서는 같이 구르는 거야."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77

부드러운 은빛 깃털, 나이트 헤론이었다. 습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다. 다음에 카야는 우유갑 안을 들여다보았다. 꼭꼭 싸서 쑤셔 넣은 몇 종류의 씨앗—순무, 당근, 그린 빈—아래, 카야의 보트 엔진에 맞는 스파크 플러그가 갈색 봉투 속에 들어 있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78

"그게 다가 아니야." 카야의 말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단어가 이렇게 많은 의미를 품을 수 있는지 몰랐어. 문장이 이렇게 충만한 건지 몰랐어."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90

카야 자신의 이름이 맨 아래 적혀 있고 옆에 생일이 쓰여 있었다.미스 캐서린 대니엘 클라크, 1945년 10월 10일. 명단 맨 위로 돌아가 오빠와 언니들의 진짜 이름을 읽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93

"그래, 저기 어디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 가서 꼭꼭 숨어야겠네. 누군지 몰라도 카야를 데리고 가서 키워야 되는 사람들 참 안됐다." 테이트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202

"무슨 말이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니? 엄마도 그런 말을 했었어." 엄마는 언제나 습지를 탐험해보라고 독려하며 말했다.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가봐. 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203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자연의 경이와 실제 삶의 지식, 누구나 알아야 하는데, 버젓이 주위에 노출되어 있는데 씨앗처럼 은밀하게 숨어 있는 진실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207

"우리 두뇌는 아무리 써도 도저히 꽉 채울 수 없거든. 우리 인간은 마치 기다란 목이 있으면서도 그걸 안 써서 높은 곳에 있는 잎사귀를 따먹지 못하는 기린 같은 존재야."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237

그래서 테이트는 조개들을 그린 부드러운 색조의 수채화와 그레이트 블루 헤론을 골랐다. 철 따라 바뀌는 새의 모습을 그린 카야의 상세한 스케치와 휘어진 눈썹 깃털의 섬세한 유화 때문이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55

테이트는 깃털 그림을 집어들었다. 수백 회의 얇디얇은 붓질로 풍부한 색채들이 화려하게 어우러지다 심도 깊은 검정으로 절정을 이루고, 햇빛이 캔버스를 어루만지듯 빛을 반사했다. 줄기가 살짝 찢어진 디테일은 너무나 독특했기에 테이트와 카야는 동시에 깨달아버렸다. 이건 테이트가 숲속에서 처음으로 카야에게 선물했던 그 깃털 그림이라는 걸.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55

거절로 점철된 삶이 슬펐다. 머리 위에서 씨름하는 하늘과 구름에 대고 카야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인생은 혼자 살아내야 하는 거라지. 하지만 난 알고 있었어. 사람들은 결코 내 곁에 머무르지 않을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야."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74

카야는 엄마와 똑같은 덫에 걸려들었다. ‘음흉한 바람둥이 섹스 도둑들.’ 아버지는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을까. 얼마나 비싼 레스토랑에 데리고 다녔을까.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자 자신의 진짜 영역으로, 늪지의 판잣집으로 데리고 와버렸다. 사랑이란 차라리 씨도 뿌리지 않고 그냥 두는 게 나은 휴경지인지도 모른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75

외로움을 아는 이가 있다면 달뿐이었다.
예측 가능한 올챙이들의 순환고리와 반딧불이의 춤 속으로 돌아온 카야는 언어가 없는 야생의 세계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한창 냇물을 건너는데 발밑에서 허망하게 쑥 빠져버리는 징검돌처럼 누구도 못 믿을 세상에서 자연만큼은 한결같았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78

캐서린 대니엘 클라크가 지은 『동부 연안의 바닷조개』 가제본이 나왔다. 카야는 숨을 들이쉬었다. 이걸 보여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80

그 후로 책을 아주 많이 읽었어. 대자연에, 저기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서는 이렇게 잔인무도해보이는 행위 덕분에 실제로 어미가 평생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를 늘리고, 힘들 때 새끼를 버리는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져. 그렇게 계속 끝없이 이어지는 거야. 인간도 그래. 지금 우리한테 가혹해보이는 일 덕분에 늪에 살던 태초의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거라고.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 없을 거야. 아직도 우리는 그런 유전자와 본능을 갖고 있어서 특정한 상황이 닥치면 발현되지. 우리의 일부는 언제까지나 과거의 그 모습 그대로일 거야. 생존하기 위해 해야만 했던 일들, 까마득하게 오랜 옛날에도 말이야.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18

1969년 7월의 오후, 조디가 찾아온 후 7개월도 넘는 시간이 흐른 뒤 캐서린 대니엘 클라크의 두 번째 저서 『동부 해안의 새들』이 우체통에 모습을 드러냈다. 카야는 눈에 번쩍 띄는 표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재갈매기를 그린 그녀의 그림이었다. 미소 지으며 카야는 말을 걸었다. "안녕, 빅 레드, 표지에도 나오고 출세했구나."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34

혼자서 보낸 수백만 분의 시간으로 수련한 카야는 자기가 외로움을 안다고 생각했다. 낡은 부엌 식탁을, 텅 빈 침실 안을, 끝없이 망망하게 펼쳐진 바다와 수풀을 바라보며 보낸 한평생. 새로 발견한 깃털이나 완성한 수채화의 기쁨을 함께 나눌 이 하나 없는 삶. 갈매기들에게 시를 읊어주던 나날.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601

카야는 조수간만처럼 확실한 이런 자연적 과정의 일환으로 살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만큼 이 지구라는 별과 그 속의 생명체들과 끈끈하게 유착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흙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대지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서.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635

죽음의 발걸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나는 그 처녀를 사이프러스 나무에 숨기리라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637

반딧불

그를 꼬드겨내는 건
밸런타인의 불빛을 깜박이듯 쉬웠지
하지만 숙녀 반딧불처럼
그 불빛들에는 죽음의 은밀한 부름이 담겨 있네

마지막 터치,
끝이 아니야
마지막 발자국, 덫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네
그 눈이 내 눈을 꼭 붙들다
끝내는 다른 세상을 보지

그 눈이 달라지는 걸 봤어
처음에는 질문
다음에는 해답
마침내 끝

그리고 사랑 그 자체가 스쳐지나
그게 무엇이었든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가네

A. H.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642

밤이 내리자 테이트는 다시 판잣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호소에 다다랐을 때는 높은 캐노피 밑에서 발길을 멈추고 습지의 어두운 비원으로 손짓해 부르는 수백 마리의 반딧불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깊은 곳,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으로.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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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상처가 나면 꼭 소금물에 담그고 여러 가지 고약을 섞은 진흙을 발라주었다. 부엌에 소금이 다 떨어져서 카야는 다리를 절며 숲으로 가 썰물 때면 염도가 높아지는 후류後流에 발을 담갔다. 냇가에는 소금 결정이 들러붙어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카야는 습지의 소금물에 발을 담그고 땅에 주저앉아서 끊임없이 입을 달싹거리며 중얼거렸다. 열려라, 닫혀라, 열려라, 닫혀라, 하품하는 시늉을 했다가, 씹는 동작을 했다가, 입이 딱딱하게 굳어버리지 않도록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한 시간가량 지나자 검은 진흙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팔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빠졌다. 카야는 비단처럼 부드러운 흙에 살며시 발을 쑤셔 넣었다. 이곳의 공기는 서늘했고 독수리 울음소리를 들으니 힘이 났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67

카야는 일주일 내내 하루에 두 번씩 웅덩이를 찾았고, 크래커와 쇼트닝으로 연명했다. 그동안 아빠는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여드레째가 되자 발목을 돌려도 뻣뻣하지 않았고 통증도 가라앉았다. 발을 조심하면서 살짝 지그 춤을 추어보았다. 그리고 꺅꺅 환호성을 올렸다. "내가 해냈어, 해냈어!"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69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때가 오자 심장의 아픔이 모래에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스르르 스며들었다.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깊은 데로 파고들었다. 카야는 숨을 쉬는 촉촉한 흙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그러자 습지가 카야의 어머니가 되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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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둘러싼 소택지의 짭짤한 아지랑이가 메인스트리트 너머 크게 파도치는 바다 안개와 뒤섞였다. 습지와 바다가 손잡고 마을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켰다. 바깥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은 금이 간 시멘트에 구멍이 뿡뿡 뚫린 일차선 도로뿐이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9

피글리 위글리 식료품점 옆에 있는 술집인 도그곤 비어홀에서는 종이를 배 모양으로 접어 구운 핫도그, 매운 칠리, 튀긴 새우를 담아 팔았다. 점잖은 여자나 아이들은 술집 안에 발도 들여놓지 못했지만 포장판매 창이 따로 나 있어 길에서 핫도그와 네히콜라(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에서는 백인 일행은 코카콜라를, 그들과 멀리 떨어진 흑인 일행은 네히콜라를 마시는 것으로 묘사된다.)를 주문할 수 있었다. 유색인은 정문 출입은 물론, 창밖에서도 음식을 살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0

맨발에다 어느새 짧아진 멜빵바지를 입고 선 카야는 습지의 오솔길이 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섰다. 입술을 깨물며 집으로 달음질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사람들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장 보고 돈 계산하는 법도 몰랐다. 하지만 허기에 등을 떼밀려 메인스트리트로 올라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피글리 위글리 식료품점을 향해 걸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1

피글리 위글리 안으로 들어간 카야는 다양한 그리츠들을 살펴보다 거칠게 갈린 노란색 가루 한 봉지를 집어들었다. ‘이 주의 특선상품’이라는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였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3

카야는 가게에서 뛰쳐나와 최대한 빨리 습지 오솔길 쪽으로 걸었다. 엄마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 "마을에서는 절대로 뛰면 안 돼. 네가 뭘 훔쳤다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카야는 모랫길에 닿자마자 너끈히 1킬로미터를 내리달았고 나머지는 빨리 걸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4

며칠 지나자 그리츠를 만들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저어도 덩어리가 생겼다. 그다음 주에는 등뼈를 사서—빨간 딱지가 붙은 걸로—그리츠와 무청을 함께 넣고 끓였는데 맛이 좋았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5

아버지와 카야는 같은 판잣집에서 각자의 삶을 살았고, 며칠씩 얼굴을 못 보는 날도 많았다. 웬만해서는 말도 하지 않았다. 카야는 꼬마 살림꾼이 되어 제 몸을 건사하고 아버지의 저지레를 치웠다. 아버지의 식사를 차려줄 만큼의 요리 솜씨는 꿈도 꾸지 못했지만—어차피 아버지는 밥때 맞춰 들어오지도 않았고—잠자리를 정리하고 쓰레기를 줍고 바닥을 쓸고 설거지를 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엄마가 돌아올 때 깔끔한 판잣집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5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가을의 달은 카야의 생일을 위해서 빛난다고. 그래서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어느 날 못 위로 둥실 떠오른 탐스러운 황금빛 보름달을 보고 혼잣말을 했다. "나 이제 일곱 살이 됐나봐." 아버지는 생일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케이크 따위는 턱도 없었다. 학교에 보내주겠다는 얘기도 일언반구 없었다. 실제로 아는 게 별로 없었던 카야는 무서워서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6

수렁을 밟고 우뚝 선 버려진 소방망루의 썩은 다리를 타고 안개가 촉수처럼 피어올랐다. 깍깍 울어대는 까마귀 소리뿐 숨 막히게 조용한 숲에 기대감이 감돌았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8

이건 또 다른 얘기였다. 카야는 몹시 배가 고팠다. 아침 식사로는 그리츠를 끓여서 다 떨어진 소금 대신 소다크래커를 부숴 넣어 먹었다. 카야가 이미 터득한 인생의 진실은 소금 없이는 그리츠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치킨 파이는 살면서 몇 번 먹어보지 못했지만 겉은 바삭바삭하고 안은 부드러운 황금빛 파이 껍질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동그란 원처럼 충만한 그레이비 맛도 입 안 가득 느껴졌다. 위장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바람에 카야는 자기도 모르게 팔메토 잎사귀 사이에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57

버스 앞쪽에서 아이들이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듯 읊조렸다. "미스 캐서린 대니엘 클라크!" 점심 때 본 여자애들, 키큰말라깽이금발과 동그랗고통통한얼굴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디 숨어 살았니, 습지 암탉아? 모자는 어디에다 두고 왔니, 늪 시궁쥐야?"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63

카야는 살면서 단 하루도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가리를 관찰하고 조가비를 모으는 생활만으로도 배움은 충분했다. "나는 벌써 비둘기처럼 우는 법을 아는걸." 카야는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그 애들보다 훨씬 잘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무리 좋은 구두를 신고 다니면 뭐 한담."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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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7

1969년 10월 30일 아침 체이스 앤드루스의 시체가 늪에 누워 있었다. 자칫하면 소리 없는 늪이 삼켜버려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으리라. 죽음을 속속들이 아는 늪으로서는 비극도 죄도 아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날 아침 마을 소년 둘이 자전거를 타고 낡은 망루를 찾았고 세 번째 스위치백 선로에서 체이스의 청재킷을 발견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8

계단에 올라가 기다리려고 돌아선 순간 카야의 가슴에 검고 고운 진흙 덩어리처럼 묵직한 슬픔이 얹혔다.
카야는 다섯 아이 중 막내였고 언니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나중엔 언니 오빠들 나이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에 갇힌 토끼들처럼 비좁고 조잡한 판잣집에 바글바글 끼어 살았다. 참나무 밑 판잣집 차양문은 부릅뜨고 노려보는 눈알 같았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21

육지다운 육지를 찾는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쳐 계속 항해했고, 악명 높은 습지는 반란 선원, 조난자, 빚쟁이, 전쟁이나 세금이나 법을 피해 도망친 떨거지들을 그물처럼 건져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24

카야는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계단에 앉아 오솔길만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나이에 비해 키가 크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한 카야는 갈까마귀 날개처럼 새까맣고 숱 많은 생머리에 까맣게 탄 피부를 가진 아이였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26

엄마가 떠나고 몇 주에 걸쳐서 큰오빠와 언니 둘도 모범이라도 보이듯 홀연히 떠나버렸다.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다 도망가버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버지는 처음에는 고함을 지르다가 주먹으로 때리고 결국은 제 분을 못 이겨 손등으로 철썩철썩 갈겼다. 그렇게 언니들과 오빠는 한 사람씩 사라졌다. 카야는 훗날 언니 오빠의 나이도 잊고 진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생각나는 건 미시, 머프, 맨디라는 애칭뿐이었다. 포치의 매트리스에는 언니들이 두고 간 양말들이 쌓여 있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1

"카야, 조심해, 꼭. 누가 와도 절대 집 안에 들어가지 마. 널 잡아갈 수도 있어. 습지 깊은 데로 도망가서 덤불에 꼭꼭 숨어. 발자국 지우는 거 잊지 말고. 오빠가 가르쳐줬잖아. 너도 아버지를 피해서 숨을 수 있어."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3

초승달이 발한 빛이 판잣집에 닿자 카야는 포치에 있는 잠자리로 기어들어 갔다. 울퉁불퉁한 매트리스에는 엄마가 알뜰시장에서 사준 파란 꽃무늬 홑청이 덮여 있었다. 평생 처음 혼자 맞는 밤이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5

카야는 쓰러지듯 계단에 주저앉아 습지를 그린 엄마의 수채화들이 시커멓게 불타 잿더미로 변하는 걸 지켜보았다. 해 질 녘까지 앉아 있는 사이 단추들이 호박처럼 노랗게 빛났고, 엄마와 지르박을 추던 추억들도 불길 속에서 녹아 사라졌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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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자체는 뉴잉글랜드 전체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 하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과는 달리 실제로 기름이 흐르는 땅이다. 또한 옥수수와 포도주의 땅이기도 하다. 길거리에 우유가 흐르지도 않고 봄철에 거리가 신선한 달걀로 뒤덮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미국 전역에서 뉴베드퍼드보다 더 귀족적인 저택과 초목이 무성한 공원과 화려한 정원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없다. 그것은 어디서 왔는가? 한때는 화산암 찌꺼기로 뒤덮인 척박한 불모지였던 이곳에 그런 초목이 어떻게 자리를 잡았을까?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898084 - P136

유일한 예외는 세일럼이다.
그곳 아가씨들은 숨결에서 사향냄새가 나기 때문에, 그들의 애인인 선원들은 세일럼으로 돌아올 때면 청교도가 사는 해변 대신 향기로운 몰루카로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해안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898084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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