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와인잔을 잠시 내려놓고 지유의 발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 그 어느 곳에도 발자국을 남긴 적 없는 발, 동시에 어디에까지 다다를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발…… 지유의 발바닥에서 얼굴을 뗀 뒤엔 작고 둥근 배에 살짝 손을 올려보기도 했다. 부드러웠고, 부서질 듯 연약했다. 이토록 부드럽고 연약한 살결 아래로 피가 흐르고 있으며 유기적으로 연결된 세포들이 부지런히 증식중이라는 사실이 승준은 매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속에 번지던 그 작고 뜨거운 경이는 지유에게 예정된 좌절과 패배, 상실과 이별 같은 것을 상기한 순간 갑자기 식어버렸고, 대신 납 한 덩어리를 삼킨 듯 온몸이 무거워졌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2

오늘밤 권은이 칠 년 전처럼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모습으로 머릿속에서 재생된 건 이 아이 때문일 수도 있다고…… 어쩌면 지유가 세상에 온 순간부터 자신은 지유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친구가 자신에게 있었다고, 카메라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며 빛을 좇던 친구가 있었다고 말이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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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이 멈추면 빛과 멜로디가 사라지고 눈도 그치겠죠."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7

그녀는 빛이 피사체를 감싸는 순간의 온기가 좋아 사진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했는데, 그 말은 승준의 마음 어딘가로 흘러와 고요하게 폭발하기도 했다.

-알라딘 eBook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중에서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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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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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 역사를 관통하는 타임 슬립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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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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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참의 줄타기, 삶

성년이 얼마 남지 않은 같은 또래 청소년 셋 - 지우, 채운, 소리 - 이 각자 화자가 되어 이런 저런 조합으로 서로 연결되어 이야기가 전개 되는 방식이라 여느 성장 소설의 패턴처럼 아주 낯설진 않습니다. 근데 나름 흡입력이 있습니다.

화자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지우는 어릴적 저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내향적인 그는 그림그리기에서 해방감과 동시에 위안을 얻습니다.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고, 직접 말했을 때보다 그림으로 그렸을 때 훼손되는 부분이 적은 어떤 마음을. 그러다보면 자신도 그 과정에서 뭔가 답을 알게 될 것 같았다. 혹은 다른 질문을 발견하거나.“ (77쪽, 전자책)
- <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우는 만화 속 ‘칸’이 때로 자신을 보호해주는 네모난 울타리처럼 여겨졌다. 둥글고 무분별한 포옹이 아닌 절제된 직각의 수용.” (111쪽, 같은 책)

지우가 제겐 주인공 셋 중 가장 비중이 커 보였고 무엇보다 아마도 그의 고통과 상실감의 깊이가 그를 그렇게 보이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신은 지상에 박힌 압정처럼 하나의 점으로 가까스로 존재하는데, ‘서사 그래프’에 나오는 그 약동하는 선을 가진 이들이 부러웠다.” (203쪽, 같은 책)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작은 사건이 큰 재난이 되는 것. 복구가 잘 안 되는 것……’“ (209쪽, 같은 책)

존재의 상실이든 아니든 그들의 부모들처럼 주위 인물들의 역할이 제겐 더 생동감이 있었어요. 마찬가지로 지우에게 용식(도마뱀)이, 채운에게 뭉치(반려견)가 그런 존재였죠. 부모와 반려동물 모두 그들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설정도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 중 지우의 보호자, 선호아저씨의 존재감은 그 비중에 비해 단연 압도적이네요. 그의 존재가 아이들과는 달리 이미 스스로 참과 거짓의 경계를 넘어선 듯합니다. 사실보다 중요한 게 ’당위‘, 즉 ’마땅이 그러한 것‘ 임을 알죠. 멋진 어른입니다.

“—그러니 부탁인데 지우야.
—……
—나를 떠나지 말고, 나를 버려라.” (215쪽, 같은 책)

참과 거짓이 존재를 구성하는 빛과 그림자일 수도 있겠다. 그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운 무언가일 수도 있겠구나. 그게 삶이구나. 짧지만 긴호흡 같은 기시감을 주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교실속에서 ‘이중 하나는 거짓말’게임으로 주인공들을 소개하는 설정처럼 스스로 이 게임에 참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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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emember being scared that something must, surely, go wrong, if we were this happy, her and me, in the early days, when our love was settling into the shape of our lives like cake mixture reaching the corners of the tin as it swells and bakes.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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