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죽음의 공포, 암이라는 병에 대한 불안은 가을, 회복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언덕길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아이들이 뛰어가고 시장바구니를 든 주부가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은, 모든 생명, 나뭇잎을 흔들어주는 바람까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들, 진실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고 그것들을 위해 좀 더 일을 했으면 싶었다. 고뇌스러운 희망이었다.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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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백 매를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되는 망상(妄想)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 달리 할 일도 있었으련만,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으련만…… 전신에 엄습해오는 통증과 급격한 시력의 감퇴와 밤낮으로 물고 늘어지는 치통과, 내 작업은 붕괴되어가는 체력과의 맹렬한 투쟁이었다. 정녕 이 육신적 고통에서 도망칠 수는 없을까? 대매출의 상품처럼 이름 석 자를 걸어놓은 창작 행위, 이로 인하여 무자비하게 나를 묶어버린 그 숱한 정신적 속박의 사슬을 물어 끊을 수는 없을까? 자의(自意)로는, 그렇다, 도망칠 수는 없다. 사슬을 물어 끊을 수도 없다. 용기가 없는 때문인지 모른다. 운명에의 저항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시각까지 내 스스로는 포기하지 않으리.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 가시덤불의 길일지라도.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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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없는 작업이었다. 끊임없이 희망을 도려내어 버리고 버리곤 하던 아픔의 연속이 내 삶이었는지 모른다. 배수(背水)의 진을 치듯이 절망을 짊어짐으로써만이 나는 차근히 발을 내밀 수가 있었다. 아무리 좁은 면이라도 희망의 여백(餘白)은 두렵다. 타협이라는 속삭임이, 꿈을 먹는 것 같은 무중력이, 내가 나를 기만하는 교활한 술수가, 기적을 바라는 가엾은 소망이…… 희망은 이같이 흉하게 약화되어 가는 나를, 비천하게 겁을 먹는 나를 문득문득 깨닫게 한다.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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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표면상으로 소설을 썼다. 이 책은 소설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한 인간이 하고많은 분노에 몸을 태우다가 스러지는 순간순간의 잔해(殘骸)다. 잿더미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울부짖음도 통곡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일 따름, 허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내 심장 속 깊은 곳에 유폐되어 영원히 침묵한다는 얘기도 되겠다. 칠팔 년 전에 나는 어느 책에다 언어가 지닌 숙명적인 마성(魔性)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 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전율(戰慄) 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가 없다.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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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토지』 제1부를 쓰던 삼 년 동안의 내 심경이며 그것을 적어본 것이다.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1973년 6월 3일 밤

作者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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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에 의해 1989년 가을부터 나는 인지를 발부하지 않았고 『토지』의 출판은 중단상태로 들어갔다. 문학을 포기할 생각도 해보았고 서점에 『토지』가 꽂혀 있는 것을 보면 심한 혐오감에 빠지기도 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절망감은 꽤 오랫동안 나를 침잠하게 했으며 내 문학이 얼마나 가벼운 존재인가를 깨닫게도 했다. 그리고 독자들도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 하며 출판중단을 비난하는 내 주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고 시간을 응시하며 겨울나무가 바람에 몸을 흔들며 고엽을 떨어뜨리듯 나 역시 새봄을 맞기 위하여 분노의 쓰레기를 떨꾸려고 호미를 들고 텃밭에 나가곤 했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찰나 같은 내 시간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이다.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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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쓰는 것이 두렵다. 할 말을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인내심에는 억압적 속성이 있으며, 부정적 성향에다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늘 현실도피를 꿈꾸고 있기 때문인데 내게는 어떤 것도 합리화할 용기가 없다.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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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그러니까 『토지』를 끝낸 1994년 8월 15일, 그때도 나는 해방감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멍청히 앉아 있었다.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고 막막했던 길 위에서, 폭풍이 몰고 간 세월이 끔찍하여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토지』의 운명도 기구했다. 25년 동안 여러 지면(紙面)을 전전했고 4부까지 출간되었으나 3년 동안 출판정지, 절필한 일이 있었다. 완간이 된 뒤에도 출판계약이 끝나면서 3년간 책을 내지 않고 절판상태를 애써 외면했다. 작품이 나간 이상 독자에게는 읽을 권리가 있고 이미 작가 손에서 떠난 거라며, 꾸지람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대에 속하고 편협한 나로서는 문학작품이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생산되고 소비되는 오늘의 추세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인(商人)과 작가의 차이는 무엇이며 기술자와 작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차이가 없다면 결국 문학은 죽어갈 수밖에 없다. 의미를 상실한 문학, 맹목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삶,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책이 다시 나가게 되니 마음은 석연찮다. 자기연민이랄까, 자조적(自嘲的)이며 투항한 패잔병 같은 비애를 느낀다. 나는 왜 작가가 되었을까.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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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적 현장이라면 악양은 풍요를 약속한 이상향(理想鄕)이다. 두 곳이 맞물린 형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 고난의 역정을 밟고 가는 수없는 무리.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라면 이상향을 꿈꾸고 지향하며 가는 것 또한 우리네 삶의 갈망이다. 그리고 진실이다.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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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지리산뿐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숨어서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가고 있다 한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 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2001년 12월 3일

박경리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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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라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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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오크 나무 그늘에 주차된 태비의 빨간색 폭스바겐 비틀 뒤에 차를 댔다. 차에서 내린 태비는 보라색 닥터마틴 부츠, 찢어진 청반바지, 조의 오래된 주황색 일리노이대학교 로고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코에는 자수정 피어싱을 하고 갈색 머리에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하이라이트 염색을 했지만 조가 거의 보지 못한 얌전한 차림이었다.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155

"사람. 줄리엣과 햄릿한테 나쁜 일들이 생기기 전에, 마법의 숲에서 만나게 할 거야. 그러면서 운명이 바뀌는 거지. 희극이고 마지막에 누구나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이야."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195

"전 아무 말 안 할게요. 적합한 말이 가장 필요한 상황에서 말실수를 하게 마련이거든요."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된 적 없어요."

"알아요.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도의 수단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린 여전히 소통하고 싶은 생각들은 뇌 속에 가둬 두고, 꿀꿀대는 거로만 표현하는 유인원에 불과하죠."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206

"당신의 인생이 있다는 걸 누나에게 보여 줘요. 어머니도 아셔야 해요. 어머니는 당신이 좀 쉴 수 있게 세인트루이스에서 누나와 지내시면 안 되나요? 아니면 어머니를 도와줄 사람을 고용하면 되잖아요. 누가 당신이 평생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고 정했나요? 그런 짐을 짊어지기에는 너무 젊다고요."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216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얼사 옆에 놓인 책을 들어보았다.

"『제5도살장』이로군요."

그가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양장본은 처음 봤어요. 얼마나 오래된 거예요?"

"책이 출간된 1969년 판이에요."

그가 놀란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본 표지에다가요? 값어치가 상당하겠는데요."

"상태가 별로 좋지 못하지만, 대단히 귀중한 책이에요. 할아버지부터 아빠, 동생, 그리고 저한테로 대물림되었거든요. 엄마도 이 책을 적어도 한 번 이상 읽으셨고요."

그녀가 얼사 몸 위로 손을 뻗어 그에게 책을 받아서, 양반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이 책이 화젯거리로 자주 올라왔었죠."

조가 표지를 손으로 쓸며 말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제일 좋아한 책이에요."

"우리 아빠가 좋아했을 것 같네요."

"무엇을요?"

"책을 매개로 부모님과 이어지는 거요."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244

조는 불현듯 느껴지는 놀라운 감각에 먹는 것을 잠시 중단했다. 그것은 그녀가 이성에게 매력을 느꼈을 때 몸 안에서 느껴지던 따뜻한 기운과 비슷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여전히 이러한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어쩌면 몸이 아니라 대체 호르몬인지도 모르지만.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257

"죽음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와 난 모든 것을 공유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사랑했어요. 결국에는 내 일부가 엄마와 함께 죽어 버렸죠. 지금까지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난 엄마와 함께 어둠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스스로 선택 한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 후회한다고 말해요.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혹은 더 사랑할 걸, 하고 말이죠. 전 일말의 후회도 없어요. 정말로요."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284

"과연 그럴까요? 여기서 머물던 마지막 날, 당신 누나는 당신에게서 행복을 전부 빼앗아 가는 데 성공했어요. 오늘 아침 얼사와 내가 당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고요. 이런 일,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을 두려워한다면 결국 누나처럼 모질게 변할 거고, 그게 바로 당신 누나가 원하는 일이에요."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286

얼사도 물론 찾아야 하겠지만 두 사람도 얼사만큼 길을 잃은 게 아닐까? 어쩌면 얼사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그들 자신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먼저 풀어야 할지도 몰랐다.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306

"당신이 말한 그 느낌 기억해요? ‘영혼에 가해지는 끔찍한 인간성의 말살’ 말이에요. 그건 어쩌면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면 그들로 인해 상처 받을 것이 두렵다는 거와 일맥상통하지 않을까요."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306

7월 첫째 주가 지나가면서 조는 완전한 환상의 세계로 진입했다. 그리고 얼사의 소용돌이, 그러니까 게이브가 ‘무한 둥지’라고 이름 붙인 영원한 별들의 회전에 결국 항복하게 되었다. 끝없는 사랑의 소용돌이에서 세 사람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과거도. 그들의 미래도. 조는 실종 아동 찾기 홈페이지를 배회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게이브도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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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조는 겁에 질렸었다. 아마도 수술 후 처음으로 이성과 교감을 나누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만 뒤죽박죽된 신호를 보내면서 가여운 그 남자를 혼란에 빠뜨렸고, 설상가상으로 그는 자신의 우울증 고백으로 그녀가 자신을 거부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그녀가 이성에게 암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했는데 그가 갑자기 거절했다면 그녀 또한 상처 입었을 터였다. 그녀가 낮게 신음했다.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149

"얼사, 내일 내가 살던 곳에 가봐야 해."

얼사가 돌멩이를 줍는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섐페인–어배너라는 데?"

"맞아."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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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 본질적인 대책 없이 자신을 방치해놓는다. 마음이 힘들다고 웅크리고 주저앉으면 약하게 보일까 봐, 감정 조절도 못 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자신의 마음을 꼭꼭 숨긴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뚜렷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남의 눈이 아닌 나의 눈으로 나를 살펴보는 치유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 <은둔의 즐거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1105 - P48

은둔을 통해 고독을 채운다는 것은 은선 씨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적 가면을 써야 하는 무대에서 내려와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며 그 시간 속에서 휴식과 질서와 희망을 찾는 것을 말한다. 그 과정에서 찾아오는 고독함은 나를 힘들게 하는 부정의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나로서 깨어 있게 하는 긍정의 감정이 된다. - <은둔의 즐거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1105 - P48

‘자발적인 은둔’이 좋은 점은 시간과 공간을 내가 임의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잠시 잠깐의 은둔’에서부터 ‘평생의 은둔’까지 자유롭게 시간을 정할 수 있고, 집에서부터 깊은 산속의 오두막까지 내가 원하는 장소를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누리는 은둔의 자유로움은 ‘고독의 그릇’을 채우기 위한 ‘고독 할부’를 가능하게 해준다. 고독 할부는 값비싼 물건을 수개월 동안 나눠서 결제하는 것처럼 짧은 시간을 반복해 고독의 양을 채워가는 것을 말한다. - <은둔의 즐거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1105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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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요정이 버리고 간 아이일지도 모른다. 파리한 얼굴, 헐렁한 후드 티와 바지를 입은 모습이 노을 진 숲으로 희미하게 번져갔다. 발은 맨발이었다. 아이는 한쪽 팔을 히코리 나무 몸통에 감고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차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자갈로 된 진입로 끝까지 들어와 몇 미터 앞에서 멈춰 섰는데도 꼼짝하지 않았다.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6

부엌 형광등에 아이의 볼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요정이 버리고 간 아이로 되돌아간 것처럼. 수도꼭지가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잠겼다.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24

그녀는 깜깜한 침실로 들어가서 낡은 『제5도살장』을 집어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소파 끝, 아이의 발 옆에 자리 잡았다. 외계인이 물었다.

"무슨 책이야?"

"『제5도살장』이라는 책이야. 외계인이 등장해."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50

손을 씻으면서 거울에 다가가 건강한 빛을 발하는 피부와 햇빛에 살짝 바랜 머리카락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얼굴은 전보다 핼쑥했고 머리는 아직 뒤로 묶을 만큼 자라지 않았지만 거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거의……. 거울 속 녹갈색 눈이 비웃었다. 거울 속에 비친 건 옛날의 조일까, 아니면 거의 조에 가까운 다른 인물일까? 그녀는 세면대를 잡고 머리를 숙여서 시커먼 배수구를 응시했다. 아마 앞으로도 지금처럼 두 개의 자아가 한 몸에 공존할 것이다. 스위치를 내리자 거울 속 여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58

휴대전화 연락처에서 태비의 얼굴을 불러왔다. 장난스럽게 줄무늬가 그려진 고양이 귀를 착용하고 플라스틱 금붕어를 마치 담배처럼 입술에 대고 있는 사진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실험 파트너로 만난 이래, 태비는 조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으며 조와 마찬가지로 일리노이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었다. 알아주는 수의과대학원에 들어가서도, 종종 옥수수와 대두 밭보다 나은 환경이 있는 학교로 옮기지 않은 것을 한탄하곤 했다. 전화벨이 울린 지 세 번 만에 태비가 받았다.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64

"어이, 조조."

"소시지 동네는 잘 있는가?"

태비는 일리노이 시골 도시 이름이 ‘비엔나’인 게 너무 웃긴다며 오스트리아 수도보다 비엔나라는 이름을 쓰는 소시지와 더 연관이 있을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었다. 조가 말했다.

"내가 비엔나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64

아이는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할 때까지 흐느꼈다. 조는 뒷좌석 문을 열고 안전띠를 풀어서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녀의 평평한 가슴에 처음으로 누군가의 머리가 닿았다. 하지만 아이는 거기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구슬피 울어댔다.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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