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취지에서 음식을 구하고 먹는 과정을 가장 근본적인 수준, 즉먹는 자와 먹히는 자로 이루어진 생물종들의 상호작용으로서 관찰하고자했다. (영국의 작가 윌리엄 랠프 인지는 "자연 전체는 먹다‘ 라는 동사의수동태와 능동태 활용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다.) 나는 이 책에서 음식의문제를 다루기 위해 자연주의자로서 생태학과 인류학의 커다란 렌즈뿐아니라 개인적 경험이라는 보다 친밀하고 일상적인 렌즈를 활용했다. - P21

내가 전제하고 있는 점은, 인간은 지구상의 다른 모든 생물처럼 음식사슬에 참여하고 있고, 음식사슬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우리의 존재를 상당 부분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잡식동물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육체(인간은 잡식동물에 알맞은 다용도의 치아와 턱이 발달해 있다. 그리하여 고기를 찢거나 풀을 갈고 빻는 일을 똑같이 잘할 수 있다.)와 영혼 양 측면에서 우리의 본성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뛰어난 관찰력과 기억력 그리고 자연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실험적 자세는 상당부분 잡식동물이라는 생물학적 사실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다른 생물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을 음식으로 삼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적응해왔다. 사냥 기술이나 불을 이용한 조리법도 그런 식으로 발전했다. 일부 철학자들은 인간의 예절이 잡식성에서 비롯되었다고주장한다. 왜냐하면 무엇이든(특히 다른 인간까지) 먹을 수 있는 피조물에게는 무엇보다 윤리적 규칙, 규범, 의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을먹느냐뿐만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도 우리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 P21

따지고 보면,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유지시키고있는 세 가지 주요 음식사슬에 관한 책이다. 산업적, 전원적(유기적), 수렵·채집 음식사슬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음식사슬은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음식을 통해 우리를 지구의 풍요 그리고 태양 에너지와 연결시켜주기 때문이다. - P22

나는 이 책의 세 부분에서 각각의 주요 음식사슬을 처음부터 끝까지추적했다. 태양광선을 이용하여 칼로리를 합성하는 식물에서부터 음식사슬의 다른 쪽 끝인 식탁 위의 음식까지. 나는 연대기적 순서와는 반대로산업적 음식사슬에 대해 먼저 얘기할 것이다. 산업적 음식사슬이 오늘날우리의 생활과 가장 큰 관련을 맺고 있고 또 우리가 가장 크게 염려하는음식사슬이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적 음식사슬은 가장 거대하고 가장 길다. 단일 재배는 산업적 음식사슬의 주된 특징이므로, 여기서는 지 메이스(Zea Mays)라는 단 하나의 식물을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다. 지 메이스는 우리가 옥수수라고 부르는 키 큰 열대 식물이다. 옥수수는 산업적 음식사슬에서, 그리고 오늘날 일상요리에서도 매우 중요한 곡물이 되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아이오와의 들판에서 생산된 옥수수 상품이 거치는 길고 기이한 여정을 추적할 것이다. - P23

이 책의 2부에서는 산업적 음식사슬과 구분하기 위해 내가 전원적 음식사슬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룬다. 여기서 나는 최근에 등장한 산업식품과 산업농업의 몇 가지 대안을 살펴보고자 했다(유기농, 지역 농업, 생물학적 농업, 초 유기농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 음식사슬은 산업화 이전에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실제로는 산업화 이후에 발달했다. - P23

3부에 나오는 수렵·채집 음식사슬은 일종의 후기 구석기적 음식사슬이다. 이 음식사슬은 캘리포니아 북부의 삼림에서 식탁까지 직접 사냥채집 · 재배한 재료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일부 사냥하거나 채집한 음식들(특히 물고기와 야생 버섯)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이 음식사슬에 관한 나의 관심은 실제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라고 할수 있다. - P24

한 가지는, 적어도 현재의 상태에서는 자연의 논리와 산업의 논리사이에 근본적인 긴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음식을 생산하는 인간의 능력은 놀라울 정도이지만, 여러 측면에서 인간의 기술은 자연의 방식과 충돌을 일으킨다.
예컨대 우리는 엄청난 규모의 단일 재배 또는 단일 사육을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하지만 자연은 언제나 타당한 이유에서 다양성을 추구한다.
우리의 음식 시스템으로 인해 야기되는 수많은건강 문제와 환경 문제는 재배와 사육 그리고 식사라는 음식사슬의 양끝에서 자연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려는 시도 때문에 생긴다고 할수 있다.
음식사슬의 양끝에는 생물계(한 조각의 땅과 인간의 몸)가 있고,
말 그대로 한쪽의 건강은 다른 한쪽의 건강과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봉착해 있는 건강과 영양에 관한 많은 문제들은 농장에서 일어난 일들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배경에는정부 정책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에 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 P25

탄소는 우리 몸에서, 그리고 사실상 지구상의 모든 생물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원소이다. 말하자면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탄소의 생명 형태이다. (어떤 과학자가 언급했듯이 탄소는 생명의 양적인 측면을 담당한다. 왜냐하면 탄소는 생명체 구조의 주요 원소이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탄소 원자는 이산화탄소 분자의 일부로대기 중을 떠돌고 있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분자들(탄수화물, 아미노산, 단백질, 지질)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탄소 원자들을 흡수해야하는데,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 바로 광합성이다. 식물의 녹색 세포는태양광을 촉매로 하여 대기 중에서 얻은 탄소 원자를 물 그리고 땅에서흡수한 원소와 결합시켜 단순 유기 화합물을 생성한다. 이런 유기 화합물이 모든 음식사슬의 바탕이 된다. 희박한 대기로부터 식물이 생명을 창조한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 P37

하지만 옥수수는 다른 대부분의 식물과 비교해보았을 때 광합성 과정이 조금 다르다. 옥수수는 광합성 과정이 다른 식물보다 훨씬 더 효율적일 뿐 아니라 자신이 흡수하는 탄소 원자의 동일성을 보존한다. 심지어이온음료나 초콜릿케이크나 햄버거로 변하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다. 이런 음식들을 먹고 사는 인간의 몸은 말할 것도 없다. 대부분의 식물이 광합성을 하는 동안 탄소 원자가 세 개인 화합물을 생성하는 반면, 옥수수는 탄소 원자가 네 개인 화합물을 만들어낸다. C-4는 이런 선택받은 식물집단에 붙여진 이름이다. C-4는 197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존재가 확인되었다. - P37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이야기는 가능한 한 많은 에너지를 획득 · 저장하기 위한 종들 간의 경쟁에 관한 이야기다. 식물의 경우는 태양으로부터 직접 에너지를 획득 · 저장하고, 동물은 식물이나 초식 동물을잡아먹음으로써 에너지를 얻는다. 에너지는 탄소 분자의 형태로 저장되고, 칼로리로 측정된다. 우리가 먹는 칼로리는 옥수수 이삭이든 스테이크이든 식물이 획득했던 에너지를 나타낸다. C-4 전략은 이런 경쟁에서 어떻게 옥수수 식물이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 설명해준다. 똑같은 양의 태양광과 물과 기본 요소에서 옥수수만큼 많은 유기물과 칼로리를 생산할수 있는 식물은 거의 없다. (옥수수 식물을 이루는 성분은 97퍼센트는 공기에서, 3퍼센트는 땅에서 생성된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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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인류학자들은 인간의 뇌가그토록 크고 복잡하게 발달한 것이 바로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해결하기위해서라고 믿고 있다. - P18

국가적 섭식장애는 격세 유전적 원한을 품고 다시 찾아온 잡식동물의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 P19

다시 모습을 드러낸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현대 식품 산업에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뿌리는 옥수수가 재배되고 있는 아이오와의들판에까지 뻗어 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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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문헌은 지금도 희귀서적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6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젊은 나이였지만(아버지는 스물다섯 살, 어머니는 겨우 스무 살),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부모는 항상 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서른 살 때 이미 쉰 살처럼 보였다. 노동으로 인해 몸이 구부정해진 아버지는 아무 희망 없는 눈으로 식구들을 근근이 먹여 살리는 척박한 땅을 지그시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눈은 색이 연하고 흐릿했으며, 뒤로 똑바로 빗어 넘겨 틀어 올린 가느다란 반백의 머리카락 때문에 눈 주위의 잔주름이 한층 도드라져 보였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7

스토너는 9개월 동안 숙식을 해결하는 조건으로 가축들과 돼지에게 먹이와 물을 주고, 달걀을 가져오고, 소젖을 짜고, 장작을 팼다. 그밖에 밭도 갈고, 그루터기도 파냈으며(겨울에는 3인치 두께로 얼어붙은 땅을 파야 했다), 푸트 부인이 버터를 만들 때 우유를 젓는 일도 했다. 목제 교유기가 우유 속에서 첨벙첨벙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푸트 부인은 엄격한 표정으로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를 지켜보았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4

그에게 배정된 2층 방은 예전에 창고로 쓰던 곳이었다. 가구라고는 힘을 잃고 늘어진 틀 위에 얄팍한 깃털 매트리스가 놓인 검은색 철제 침대, 등유 램프를 놓아둔 망가진 탁자 하나, 수평이 잘 맞지 않는 딱딱한 의자 하나, 책상 역할을 하는 커다란 상자 하나가 고작이었다. 겨울에는 바닥을 통해 조금씩 올라오는 아래층의 온기가 전부라서 그는 해진 퀼트 이불과 담요로 몸을 감싸고 자칫 책장이 찢어지지 않게 곱은 손을 후후 불어가며 책장을 넘겼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5

2학년이 된 그는 캠퍼스에서 친숙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계절과 상관없이 그의 옷차림은 언제나 똑같은 검은색 브로드클로스 양복, 하얀 셔츠, 스트링타이였다. 재킷 소매가 짧아서 손목이 불쑥 튀어나와 있고, 바지 자락도 어색하게 겉돌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제복을 빌려다 입은 것 같은 몰골이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5

2학년 1학기 때 그는 기초교양 강의를 두 개 들었는데, 하나는 농과대학의 토양화학 강의였고 다른 하나는 모든 학생의 형식적인 필수과목인 영문학 개론 강의였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6

하지만 필수과목인 영문학 개론은 그에게 생전 처음 느끼는 고민과 고뇌를 안겨주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6

강의를 맡은 아처 슬론 교수는 50대 초반의 중년남자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얕보고 경멸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너무 커서 그 간격을 좁히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싫어했으며, 그는 학생들과 거리를 두고 비꼬면서 즐거워하는 듯한 태도로 응수했다. 키는 평균이었고, 길쭉한 얼굴에는 주름이 깊이 패어 있었으며, 수염은 항상 깨끗이 깎았다. 그리고 갑갑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반백의 곱슬머리를 빗어 넘기는 습관이 있었다. 목소리는 단조롭고 건조했는데, 그는 표정도 억양도 없이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말하곤 했다. 하지만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움직임에는 우아함과 확신이 배어 있어서, 그의 말에 목소리 대신 어떤 형태를 부여해 주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7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이파리들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는 계절
얼마 전 예쁜 새들이 노래했으나 살풍경한 폐허가 된 성가대석을
내게서 그대 그날의 황혼을 보리.
석양이 서쪽에서 희미해졌을 때처럼
머지않아 암흑의 밤이 가져갈 황혼
모든 것을 안식에 봉인하는 죽음의 두 번째 자아
그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내게서 그대 그렇게 타는 불꽃의 빛을 보리.
양분이 되었던 것과 함께 소진되어
반드시 목숨을 다해야 할 죽음의 침상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인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0

때로는 안뜰 한복판에 서서 밤이 내려앉은 서늘한 잔디밭에서 불쑥 솟아오른 제시 홀 앞의 거대한 다섯 기둥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는 이 기둥들이 원래 대학의 주요 건물이었던 곳의 잔해임을 알고 있었다. 그 건물은 오래전 화재로 무너졌다. 달빛 속에서 알몸을 드러낸 채 회색을 띤 은빛으로 빛나는 그 순수한 기둥들은 신전이 신을 상징하듯, 스토너 자신이 받아들인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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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않아도 초생달 같은 눈의 서금돌이 앞장서서 놀고 있을 것이다. 오십 고개를 바라보는 주름살을 잊고 이팔청춘으로 돌아간 듯이, 몸은 늙었지만 가락에 겨워 굽이굽이 넘어가는 그 구성진 목청만은 늙지 않았으니까. 웃기고 울리는 천성의 광대기는 여전히 구경꾼들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리. 아직도 구슬픈 가락에 반하여 추파 던지는 과부가 있는지도 모른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29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태곳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는지. 서늘한 달이 산마루에 걸리면 자잔한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소복 단장한 청상의 과부는 밤길을 홀로 가는데― 팔월 한가위는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默示)하는 축제나 아닐는지. 우주 만물 그 중에서도 가난한 영혼들에게는.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31

가을의 대지에는 열매를 맺어놓고 쓰러진 잔해가 굴러 있다. 여기저기 얼마든지 굴러 있다. 쓸쓸하고 안쓰럽고 엄숙한 잔해 위를 검시(檢屍)하듯 맴돌던 찬 바람은 어느 서슬엔가 사람들 마음에 부딪쳐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絃)을 건드려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하고많은 이별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흉년에 초근목피를 감당 못하고 죽어간 늙은 부모를, 돌림병에 약 한 첩을 써보지 못하고 죽인 자식을 거적에 말아서 묻은 동산을, 민란 때 관가에 끌려가서 원통하게 맞아 죽은 남편을, 지금은 흙 속에서 잠이 들어버린 그 숱한 이웃들을,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을 가만가만 흔들어준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31

그 채마밭을 질러서 머슴 구천이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냉담한 귀녀의 눈이 구천이의 옆모습을 따라가다가 눈길을 거두며 실뱀이 꼬리를 치는 것 같은 미미한 웃음을 머금는다. 귀녀는 신발을 신고 치맛자락을 걷으며 안채를 향해 돌아나간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34

달은 산마루에서 떨어져나왔다. 아직은 붉지만 머지않아 창백해질 것이다. 희번덕이는 섬진강 저켠은 전라도 땅, 이켠은 경상도 땅, 너그럽게 그어진 능선은 확실한 윤곽을 드러낸다.

난간에 걸터앉아 달 뜨는 광경을 지켜보는 구천이의 눈이 번득하고 빛을 낸다. 달빛이었는지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참담한 소망이었는지 모른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36

"봉순아 흐흐흐…… 흐, 나 여기이 있다아!"

볏섬을 져 나르는 구천의 다리 뒤에 숨어서 살금살금 걸어오던 자그마한 계집아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앙증스럽고 건강해 보이는 아이의 나이는 다섯 살. 장차는 어찌 될지, 현재로서는 최치수의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서희는 어머니인 별당아씨를 닮았다고들 했으며 할머니 모습도 있다 했다. 안존하지 못한 것은 나이 탓이라 하고 기상이 강한 것은 할머니 편의 기질이라 했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38

봉순이 울상을 지었으나 날갯짓을 배우기 시작한 새 새끼처럼 서희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며 좀체 봉순이에게 잡히려 하지 않는다. 유록빛에 꽃 자주의 선을 두른 조그마한 꽃신은 퍽으나 날렵하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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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죽음의 공포, 암이라는 병에 대한 불안은 가을, 회복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언덕길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아이들이 뛰어가고 시장바구니를 든 주부가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은, 모든 생명, 나뭇잎을 흔들어주는 바람까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들, 진실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고 그것들을 위해 좀 더 일을 했으면 싶었다. 고뇌스러운 희망이었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11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백 매를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되는 망상(妄想)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 달리 할 일도 있었으련만,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으련만…… 전신에 엄습해오는 통증과 급격한 시력의 감퇴와 밤낮으로 물고 늘어지는 치통과, 내 작업은 붕괴되어가는 체력과의 맹렬한 투쟁이었다. 정녕 이 육신적 고통에서 도망칠 수는 없을까? 대매출의 상품처럼 이름 석 자를 걸어놓은 창작 행위, 이로 인하여 무자비하게 나를 묶어버린 그 숱한 정신적 속박의 사슬을 물어 끊을 수는 없을까? 자의(自意)로는, 그렇다, 도망칠 수는 없다. 사슬을 물어 끊을 수도 없다. 용기가 없는 때문인지 모른다. 운명에의 저항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시각까지 내 스스로는 포기하지 않으리.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 가시덤불의 길일지라도.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12

승리 없는 작업이었다. 끊임없이 희망을 도려내어 버리고 버리곤 하던 아픔의 연속이 내 삶이었는지 모른다. 배수(背水)의 진을 치듯이 절망을 짊어짐으로써만이 나는 차근히 발을 내밀 수가 있었다. 아무리 좁은 면이라도 희망의 여백(餘白)은 두렵다. 타협이라는 속삭임이, 꿈을 먹는 것 같은 무중력이, 내가 나를 기만하는 교활한 술수가, 기적을 바라는 가엾은 소망이…… 희망은 이같이 흉하게 약화되어 가는 나를, 비천하게 겁을 먹는 나를 문득문득 깨닫게 한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13

나는 표면상으로 소설을 썼다. 이 책은 소설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한 인간이 하고많은 분노에 몸을 태우다가 스러지는 순간순간의 잔해(殘骸)다. 잿더미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울부짖음도 통곡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일 따름, 허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내 심장 속 깊은 곳에 유폐되어 영원히 침묵한다는 얘기도 되겠다. 칠팔 년 전에 나는 어느 책에다 언어가 지닌 숙명적인 마성(魔性)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 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전율(戰慄) 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가 없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14

이상이 『토지』 제1부를 쓰던 삼 년 동안의 내 심경이며 그것을 적어본 것이다.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1973년 6월 3일 밤

作者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15

사정에 의해 1989년 가을부터 나는 인지를 발부하지 않았고 『토지』의 출판은 중단상태로 들어갔다. 문학을 포기할 생각도 해보았고 서점에 『토지』가 꽂혀 있는 것을 보면 심한 혐오감에 빠지기도 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절망감은 꽤 오랫동안 나를 침잠하게 했으며 내 문학이 얼마나 가벼운 존재인가를 깨닫게도 했다. 그리고 독자들도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 하며 출판중단을 비난하는 내 주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고 시간을 응시하며 겨울나무가 바람에 몸을 흔들며 고엽을 떨어뜨리듯 나 역시 새봄을 맞기 위하여 분노의 쓰레기를 떨꾸려고 호미를 들고 텃밭에 나가곤 했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찰나 같은 내 시간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이다.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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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쓰는 것이 두렵다. 할 말을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인내심에는 억압적 속성이 있으며, 부정적 성향에다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늘 현실도피를 꿈꾸고 있기 때문인데 내게는 어떤 것도 합리화할 용기가 없다.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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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그러니까 『토지』를 끝낸 1994년 8월 15일, 그때도 나는 해방감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멍청히 앉아 있었다.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고 막막했던 길 위에서, 폭풍이 몰고 간 세월이 끔찍하여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토지』의 운명도 기구했다. 25년 동안 여러 지면(紙面)을 전전했고 4부까지 출간되었으나 3년 동안 출판정지, 절필한 일이 있었다. 완간이 된 뒤에도 출판계약이 끝나면서 3년간 책을 내지 않고 절판상태를 애써 외면했다. 작품이 나간 이상 독자에게는 읽을 권리가 있고 이미 작가 손에서 떠난 거라며, 꾸지람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대에 속하고 편협한 나로서는 문학작품이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생산되고 소비되는 오늘의 추세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인(商人)과 작가의 차이는 무엇이며 기술자와 작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차이가 없다면 결국 문학은 죽어갈 수밖에 없다. 의미를 상실한 문학, 맹목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삶,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책이 다시 나가게 되니 마음은 석연찮다. 자기연민이랄까, 자조적(自嘲的)이며 투항한 패잔병 같은 비애를 느낀다. 나는 왜 작가가 되었을까.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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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적 현장이라면 악양은 풍요를 약속한 이상향(理想鄕)이다. 두 곳이 맞물린 형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 고난의 역정을 밟고 가는 수없는 무리.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라면 이상향을 꿈꾸고 지향하며 가는 것 또한 우리네 삶의 갈망이다. 그리고 진실이다.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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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지리산뿐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숨어서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가고 있다 한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 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2001년 12월 3일

박경리 - <토지 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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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라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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