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의 그림을 거기서처음으로 봤다. 생각해보면 인쇄된 책이 아니라 맨눈으로 처음 본서양 유화 그림이었다. 한국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높은 천장, 그 자체로 이국적일 수밖에 없는 공간에 적당한 햇볕이 창을통해 들어왔다. 인쇄된 그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색채로 보이는 캔버스의 표면 등 모든 것이 황홀한 경험이었다. 관람객도 많지 않았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독일어에 지친 한동양 남자를 위로하기 위해 마련된 것 같았다. 베를린에서 한번도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이 다가왔다. 그 편안함이 나를 안아줬고,
나는 편안함의 품에 안겨 그림을 보았다. 비록 셋집이더라도 거주할 집 Has은 있었지만 나에게는 결여되었던 편안함Zuhause 속에 있노라니 독일어 텍스트를 읽을 때의 불안감과 두통이 생기지 않았다. 그림은 독일어 텍스트처럼 나를 위협하지 않았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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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내가 유일하게 나누지 못한 것은 서로의 과거 이야기. 그것은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나눌 수 없는 불문율처럼 그와 나 사이에 봉인된 채 놓여 있었다.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285

한마디로 사람 구실을 하게 됐고 냉동인간의 뇌처럼 얼어 있던 그곳에 열선이 깔리는 게 느껴졌다. 기억과 현실 사이에 놓인 빙벽이 녹아내리고 있었고, 서서히 빙하 속 매머드 같은 덩어리들이 목격되기 시작했다. 내 기억의 시체들, 그것들이 좀비처럼 일어나 나를 덮치고 있었다. 나는 좀비들에게 뜯기면서도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려 애썼고, 그건 그것대로 견딜 만한 일이었다.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290

역지사지. 나 역시 궤도에서 이탈하고 나서야 깨우치게 된 단어다. 내 삶은 대체로 일방통행이었다. 내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고, 남의 감정보다는 내 감정이 우선이었으며,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내치면 그만이었다. 가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비로소 얼마 전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소통 불가라고 내게 말한 사람은 딸이었다. 딸의 얼굴이 기억나려 한다. 눈물이 나려는 걸 참는다. 소통 불가에 일방통행인 나를 아내는 받아줬다. 오랜 시간. 나는 아내가 내 말에 수긍하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라 아내는 나를 견뎌주었을 뿐이었다.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299

시간이 지나 고통 속에서 기억을 잃고 겨우 세상에 눈을 뜨고 나서야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연민의 시선을 가질 수 있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법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소통할 사람을 찾기엔 이미 늦은 듯했다. 그러나 힘을 내야 했다.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301

마스크로 가린 얼굴과 손소독제의 알코올 향이, 라텍스 장갑의 익숙한 감촉과 자연스러운 느낌이 과거의 나를 일깨워주고 있었다.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302

내 머릿속에서도 전염병이 돌듯 하나의 생각만이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전염병 같은 기억들이 내게 진짜 삶을 선택해야 할 때라고 외치고 있었다. 신기했다. 죽음이 창궐하자 삶이 보였다. 나는 마지막 삶이어도 좋을 그 삶을 찾으러 가야 했다.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306

편의점이란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는 곳이고 손님이나 점원이나 예외 없이 머물다 가는 공간이란 걸, 물건이든 돈이든 충전을 하고 떠나는 인간들의 주유소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주유소에서 나는 기름만 넣은 것이 아니라 아예 차를 고쳤다. 고쳤으면 떠나야지. 다시 길을 가야지. 그녀가 그렇게 내게 말하는 듯했다.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307

따지고 보면 가족도 인생이란 여정에서 만난 서로의 손님 아닌가? 귀빈이건 불청객이건 손님으로만 대해도 서로 상처 주는 일은 없을 터였다. 불쑥 내뱉은 말이지만 그에게 답이 되었다니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내게도 답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감히 손님이라도 될 수 있을까?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318

결국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달았다. 지난가을과 겨울을 보낸 ALWAYS편의점에서, 아니 그 전 몇 해를 보내야 했던 서울역의 날들에서, 나는 서서히 배우고 조금씩 익혔다. 가족을 배웅하는 가족들, 연인을 기다리는 연인들, 부모와 동행하던 자녀들, 친구와 어울려 떠나던 친구들……. 나는 그곳에서 꼼짝없이 주저앉은 채 그들을 보며 혼잣말하며 서성였고 괴로워했으며, 간신히 무언가를 깨우친 것이다.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319

이 나라에선 사람을 죽이거나 성범죄를 저질러도 의사 면허가 취소되지 않는다. ‘불사조 면허’라고 한다. 왜 그러냐고? 의료 기술자들이 법 기술자들과 친하기 때문이다. 그걸 믿고 우리는 그런 짓들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그런 끔찍한 특권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다 보니 스스로를 전지전능한 신으로 착각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집도한 환자 하나가 연예인으로 성공한 뒤 사람들은 그녀가 ‘의느님’의 손을 빌렸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인간에 불과했다. 그것도 나뿐인 인간, 나쁜 인간, 오직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존재.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332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살기로 했다. 죄스러움을 지니고 있기로 했다. 도울 것을 돕고 나눌 것을 나누고 내 몫의 욕심을 가지지 않겠다. 나만 살리려던 기술로 남을 살리기 위해 애쓸 것이다. 사죄하기 위해 가족을 찾을 것이다. 만나길 원하지 않는다면 사죄의 마음을 다지며 돌아설 것이다. 삶이란 어떻게든 의미를 지니고 계속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겨우 살아가야겠다.

기차가 강을 건넜다. 눈물이 멈췄다.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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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이 직원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직원도 손님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요식업으로 일가를 이룬 부모님 아래서 자란 시현이 귀가 따갑게 들은 말이다. 가게도 결국 사람 장사다. 손님을 귀하게 대하지 않는 가게와 직원을 귀하게 대하지 않는 사장은 같은 결과를 얻게 된다. 망한다는 말이다.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65

오늘 밤은 ‘참참참’이다. 지난 몇 개월간 선택해온 경만의 최적의 조합이 바로 이것이었다. 참깨라면과 참치김밥에 참이슬. 이것이 경만의 1선발이자 절대 후회하지 않을 하루의 마감이고 빈자의 혼술상 최고 가성비가 아닐 수 없었다.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140

"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어린 밥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175

그녀는 쉬지 않고 타이핑을 했다. 어떤 글쓰기는 타이핑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오랜 시간 궁리하고 고민해왔다면, 그것에 대해 툭 건드리기만 해도 튀어나올 만큼 생각의 덩어리를 키웠다면, 이제 할 일은 타자수가 되어 열심히 자판을 누르는 게 작가의 남은 본분이다. 생각의 속도를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면 당신은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인경은 연기하듯 대사를 발음하며 동시에 타이핑을 했다. 그녀의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녀는 그동안 봉인됐던 필력이 풀린 듯 쉼 없이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저녁에 시작된 작업은 어느덧 자정을 넘겼고, 겨울 밤하늘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녀의 글도 밀도를 더해갔다.

그 새벽, 동네에 유일하게 불이 켜진 곳은 독고 씨의 편의점과 그녀의 작업실뿐이었다.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205

무슨 도마 같은 나무판에 구멍들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마다 소주잔보다 조금 큰 잔들이 박혀 있었으며, 잔 안에는 각각 진한 호박색과 검정색의 액체가 담겨 있었다. 간장색 액체는 흑맥주로 보이는데 호박색은 맥주라기보다는 코냑을 연상케 했다.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214

하루 24시간씩 일주일 아니, 언제나 한 가지 생각에만 빠져 있다면? 그 한 가지 생각이 고통으로 점철된 기억이라면? 고통에 흠뻑 잠긴 뇌는 점점 무거워지는데 떨쳐버리지 못한 채 그대로 망망대해에 빠지게 된다면, 뇌는 커다란 추가 되어 거대한 심연 속으로 당신을 끌고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당신은 다른 방식으로 숨 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야 만다. 코도 입도 아가미도 아닌 것으로 숨을 쉬며 사람이라고 우기지만 사람 아닌 존재로 살 뿐이다. 고통의 기억을 잊으려 허기조차 잊고 술로 뇌를 씻어보려 하지만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기억을 휘발시켜버리고 이제 내가 누구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다. -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13691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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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하버의 발명이 이루어진 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생태계는 큰 변화를 겪었다. 이제는 세계에 공급되는 활용 가능한 질소의반 이상이 인공적으로 생산된 것이다. (유기농 음식을 먹고 자라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몸속에 있는 대부분의 질소는 아마 하버-보슈 공정에 의해 고정된 것이리라.) 스밀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전 지구적인 질소 순환을 교란시켰다. 그 점에서는 다른 어떤 원소도, 심지어 탄소의 경우도비할 바가 못 된다." 그 영향은 탄소 순환을 방해하여 일어난 지구 온난화의 영향보다 예측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만큼 중대할 것이 분명하다.
홍수처럼 범람하는 합성 질소는 농장의 들판뿐만 아니라 숲과 대양에까지 뿌려졌다. 합성 질소는 일부 생물종에게는 이로움을 주었지만(옥수수와 조류藻類가 대표적인 수혜자들이다), 수많은 다른 생물종들에게는 해를 끼쳤다. 조지 네일러가 아이오와에 있는 자신의 옥수수 농장에 뿌린질산 비료는 미시시피 강을 따라 멕시코 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여기서질산의 독성이 해양 생태계를 파괴한다. 질소는 조류의 성장을 촉진시키고, 조류는 뉴저지 주만큼 큰(현재도 여전히 커져가는) 산소 고갈 지역,
즉 데드존을 형성하여 어류를 질식시킨다. 우리는 세계에다 비료를 뿌림으로써 지구 생물종의 구성을 뒤바꾸고 생물학적 다양성을 위축시키고있는 것이다. - P69

대공황 때 미국의 농업 정책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달리배고픈 나라를 위해 농부들이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도록 장려하기 위해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너무 많은 식량을 생산하게 되는 끔직한 결과로부터 농부들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 P71

이 그래프는 네일러 곡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네일러 곡선은기본적으로 농산물 가격이 떨어질 때 왜 농부들이 모든 합리적인 경제 행위를 무시하고 생산량을 늘리는지 보여준다. - P77

우리는 옥수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옥수수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면, 이 모든 부조리함과 커다란 행운에 분명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옥수수는 일반적인 자연과 경제학의 법칙에서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과 경제학의 법칙에는 무절제한 증식을 억제하는 냉정한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자연에서 한 종의 개체 수는먹이 공급량이 소진될 때까지 증가한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급격히 줄어든다. 시장에서는 상품이 과잉 공급되면 가격이 하락하여 잉여분이 완전히 소비되거나 아니면 더 이상 그 상품을 생산하는 게 무의미한 일이되어버린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제약에서 옥수수를 완전히 해방시켰다.
그것이 옥수수를 재배하다 파산하거나 또는 가능한 한 옥수수를 신속하게 소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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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질소를 고정시키는 하버-보슈 공정(카를 보슈는 하버의 아이디어를 상업화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명이었다는 스밀의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스밀은 프리츠 하버의 발명이없었다면 오늘날 지구상의 다섯 명 중 두 명은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컴퓨터나 전기 없는 세계는 쉽게 상상할 수있지만 화학 비료가 없다면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엄청난 숫자가 암시하고 있듯이, 프리츠 하버가 우리에게 질소를 고정시키는 능력을 주었을 때 인간은 자연과 파우스트적 거래를 한것인지도 모른다. - P64

인간이 질소를 고정시키는 능력을 얻으면서 토양의 생산력은 태양 에너지가 아니라 화석 연료에 의존하게 되었다.
하버-보슈 공정에서는 촉매와 함께 엄청난 열과 압력으로 질소와 수소를 결합시킨다. 열과 압력은엄청난 양의 전기를 통해 공급되고, 수소는 기름, 석탄, 아니면 오늘날 가장 흔히 사용되는 천연 가스(화석 연료)에 의해 공급된다. 물론 이런 화석연료는 수십억 년 전 어느 때인가 태양에 의해 생성되었다. 하지만 화석연료는 재생되지 않으며, 이 점에서 태양광선을 받고 자란 콩과는 다르다. (이런 질소는 사실 콩 뿌리에 사는 박테리아에 의해 고정된다. 박테리아는 콩이 필요로 하는 질소와 소량의 당분을 교환한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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