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그들이 아무 배경 없는 프티 부르주아 출신에 개성 없는 그저 그런 학생 신분으로, 세상에 대해 편협하고 피상적인 생각만을 했다면, 이제 사회에 점점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교양인이란 무엇인지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얻게 된 하나의 깨달음, 엄밀히 단 하나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과거에는 그려보기 어려웠을 자신들의 장래 모습,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모습으로 자신들의 변신에 성공적인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33

어느 도시나 있기 마련인 편안한 바를 찾아내서 새벽 1시까지 위스키와 브랜디, 진 토닉을 앞에 두고 저버린 사랑, 욕망, 여행, 거부와 열정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레퍼토리가 똑같은 것에 대해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처음의 공감에서 그저 그런 관계, 점점 뜸해지는 전화 통화 이상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드물기는 해도 우연한 만남, 서로의 필요에 의한 만남으로부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우정이 자라나기도 했다. 이처럼 해를 거듭하면서 그들의 우정은 서서히 공고해져 갔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35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엑스프레스》의 지지자였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자유, 지성, 유머, 젊음이 언제 어디서나 적절하게 표현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엑스프레스》가 그 역할을 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 이유는 가장 쉬운 방법일 뿐 아니라, 그들이 잡지에 퍼붓는 경멸 역시 자기 합리화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격렬한 반응은 그만큼 그 잡지에 예속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투덜대며 잡지를 뒤적였으며 비난을 하고 멀리 집어 던져버렸다. 때로는 잡지의 형편없음에 대해 끝없는 경탄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엑스프레스》를 읽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거기에 젖어 살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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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난 요즈음/ 먼 길을 정처 없이/ 떠돌다가 고향에 돌아오는 것 같네/ 무엇이 그리 못마땅해/ 늘 밖으로만 뛰쳐나가려 했을까/ 무슨 대단한 꿈을 이루겠다고/ 그렇게 멀리 떠나려고만 했을까/ 그런데 지금은/ 오랜 타향살이에 지쳐 돌아오는/ 나그네처럼/ 어느 해질녘 빈 배낭 하나 둘러메고/ 고향역에 내리고 있는 것 같네/ 마침내 고향집 거울 앞에 와/ 비로소 나를 만나고 있는 것 같네.
이 시는 채희문 선생님의 시 〈빈 배낭〉이다. - <울다가 웃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0109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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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인테리어는 분명 가능했다. 패널 벽을 들어내 죽은 공간이 되어버린 널찍한 구석을 시원하게 넓히고, 지나치게 큰 가구를 적당한 크기로 교체하고 다닥다닥 붙은 벽장을 뜯어낼 수도 있었다. 조금만 칠을 새로 하고 묵은 때를 벗겨 내고 공들여 잘 정돈하면 아파트는 몰라보게 멋질 수 있었다. 창에는 붉은색과 녹색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멋들어진 복사판 해도 아래 한쪽 벽 길이만큼 기다란 벼룩시장에서 산 흔들거리는 오크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군데군데 이가 빠지긴 했지만, 청동으로 테두리를 두른 제2제정 시대의 작은 마호가니 책상도 있었다. 책상을 나누어 왼쪽은 실비, 오른쪽은 제롬이 썼다. 붉은색 압지를 깔고 유리 케이스와 연필꽂이는 함께 썼다. 이것 말고도 구식 주석 상감 유리 램프라든가 휴지통으로 쓰는 10리터들이 합판 곡물통, 모양이 각각인 안락의자 두 개, 짚으로 짠 의자, 투박한 스툴이 있었다. 그들만의 재기 넘치는 분위기로 가득한, 깨끗하게 정돈된 집에서 따뜻한 우정, 함께 살아가며 일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9

임시방편인 상태가 현재를 완전히 지배했다. 기적만 바랄 뿐이었다. 건축가, 인테리어업자, 미장공, 배관공, 카펫업자, 페인트공을 부른 다음 자신들은 유람선 여행을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돌아와서는 완전히 새롭게 정돈되고 변신한 아파트, 믿을 수 없을 만큼 넓어져 이상적으로 변신한 아파트, 꼼꼼하게 신경 쓴 구석구석, 접이식 칸막이, 미닫이문, 눈에 띄지 않게 제작된 효율 좋은 난방 기구, 감쪽같이 감춰진 전기 시설, 고급스러운 가구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달콤하게 빠져드는 부푼 몽상과 달리 실제로 그들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객관적 필요와 재정 상태의 절충을 꾀한 어떤 이성적 계획도 끼어들지 못했다. 무한한 욕망만이 그들을 압도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20

아마도 자라온 환경에 영향을 받은 탓일 것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구, 동료, 그들이 몸담은 세상이 전부 그러했다. 그들은 단번에 너무 탐욕스러워진 것이리라. 그들은 지나치게 빨리 가고자 했다. 세상의 물건이란 물건은 모두 그들의 것이어야 했고, 소유의 기호들을 계속 늘려야 했다. 그들은 추구해야만 했다. 차츰 부자가 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부자였던 것처럼 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안락한 가운데 미를 추구하며 살고 싶었다. 그들은 목청을 높이며 감탄하곤 했는데, 이것이 바로 부자가 아니라는 제일 확실한 증거였다. 몸에 배서 너무나 당연한 것, 몸의 행복에 따르기 마련인, 드러나지 않고 내재하는 진정한 즐거움이 그들에게 부족했다. 그들의 즐거움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치라 부르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돈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들은 부(富)의 기호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들은 삶을 사랑하기에 앞서 부를 사랑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22

나이를 들어감에 따라, 경험이 쌓이면서 그들도 과한 열기를 어느 정도 잠재울 줄 알게 되었다. 기다리는 법도, 적응해 가는 법도 배웠다. 취향은 더 확실하고 균형 잡힌 방향으로 서서히 자리 잡혀 갔다. 욕망은 성숙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탐욕은 분노의 성격을 점차 벗었다. 파리 뒷골목을 산책하면서 골동품 가게 앞에 발을 멈춰도 이제는 도자기 세트나 성당 의자, 불룩한 유리 항아리, 구리 샹들리에에 탐닉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상형으로 삼은 집이라든가 완벽한 안락함, 행복한 삶에 대해 간직하고 있는 상(像)에는 여전히 유치하고 자기 만족적인 부분이 많았다. 그들은 당시 유행이 칭송하는 물건에 열을 올렸다. 그들이 좋아하는 에피날 지방의 모사본, 영국식 판화, 마노, 유리 섬유, 새롭게 디자인한 원시풍의 자잘한 물건들, 과학적 발명품 같아 보이는 가전제품들은 자코브 가나 비스콘티 가에 들어서기만 하면 어느 진열대에서든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이것들이 갖고 싶었다. 그들은 유행의 첨단을 걸으면서, 심미안으로 정평이 나고 싶은 당장의 욕구를 충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지나친 흉내 내기는 점차 시들해져 갔다. 자신들이 삶에 대해 품었던 공격적이고 요란하며 종종 유치하기까지 하던 추구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되면서 느긋해졌다. 애지중지하던 요술 거울, 나무 작업대, 형편없는 소형 모빌, 방사계, 형형색색의 돌멩이들, 마티유 식의 사인이 들어간 황마(黃麻) 화판 같은 것들을 불태워버렸다. 점점 자신들의 욕망을 제어하게 되는 듯했다.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은 분명했다. 자신들이 바라는 행복과 자유가 무엇인지 알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23

제롬은 스물넷, 실비는 스물둘이었다. 둘 다 사회심리 조사원이었다. 딱히 직업이라고도 전문 분야라고도 할 수 없는 이 일은 여러 주제를 놓고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신경을 온통 집중해야 하는 까다로운 일이었지만, 재미가 없지는 않았고 비교적 보수가 괜찮은 편인 데다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자유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25

제멋대로 흐르게 놔둔 시큰둥한 성향이 어디로 자신들을 이끌지 알지 못했다. 시간이 그들을 대신해 선택해 주었다. 물론, 그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에 온전히 자신을 바치고 싶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천직이라 부르는 내부의 강력한 이끌림을 느끼며, 그들을 뒤흔들 만한 야망, 충만케 해줄 열정을 느끼며 자신을 쏟아붓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그들은 단 하나만을 알았다. 더 잘살고 싶다, 이 욕망이 그들을 소진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25

도통 알 수 없는 주저함과 애매한 침묵, 은근한 암시 중 그들이 탐색해야 할 길을 분별할 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만국 공통의 ‘흠’이 의미하는 숨은 뜻을 간파하고, 인터뷰 상대의 말에 추임새를 넣어 신임을 얻고,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면서 이야기를 독려하고 답을 유도하며, 심지어 은근한 압력까지 넣는 진정한 의미의 마술 같은 인터뷰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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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의 삶은 편하고 간단할 것이다. 사는 데 필요한 모든 성가신 의무와 문제가 자연스레 풀릴 것이다. 아침이면 일하는 사람이 올 것이다. 보름마다 포도주, 올리브유, 설탕이 배달될 것이다. 문장(紋章)이 찍힌 파란 타일이 깔린 널찍하고 환한 부엌에는 황금빛 아라베스크풍 자기 접시들이 반짝이고, 사방에는 붙박이 찬장들이 있고 중앙에는 근사한 흰색 나무 식탁, 등받이 없는 의자, 긴 의자가 놓여 있을 것이다. 아침마다 샤워를 끝내고 옷을 대충 걸친 채 이곳에 와서 앉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식탁에는 도기로 된 커다란 버터 그릇, 마멀레이드 단지, 꿀단지, 토스트, 반으로 자른 자몽이 놓일 것이다. 이른 아침, 5월의 긴 하루를 여는 시작일 것이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4

그들은 우편물을 뜯어보고 신문을 펼칠 것이다. 첫 담배에 불을 붙일 것이다. 나갈 것이다. 아침 일은 고작 몇 시간이면 끝날 것이다. 그들은 점심때 만나 마음 내키는 대로 샌드위치나 그릴 요리를 들 것이다.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집은 정돈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오히려 제멋대로인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들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살아가는 모습이니까. 그들은 이 같은 안락함을 당연한 것, 애초에 있었던 것, 자신들의 천성처럼 여길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펼쳐 보는 책, 쓰고 있는 글, 듣는 음반, 매일 나누는 대화에 신경을 쓸 것이다. 그들은 오래 일한 후, 저녁을 들거나 아니면 외식을 하러 나갈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고, 함께 산책할 것이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5

책으로 둘러싸인 벽들 사이에서, 오로지 그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사물들에 둘러싸여, 멋지고 단순하며 감미롭게 빛나는 사물들 사이에서, 삶이 언제까지나 조화롭게 흘러가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삶에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다. 홀연히 모험을 찾아 나서기도 할 것이다. 어떤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원한이나 쓰라림, 질투를 맛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소유와 욕망은 언제나 모든 지점에서 일치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균형을 행복이라 부를 것이고, 얽매이지 않으면서 현명하고 고상하게 행복을 지키고, 그들이 나누는 삶의 매 순간 이를 발견할 줄 알 것이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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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문은 서재로 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아래까지 책과 잡지로 도배를 한 것 같은 사방 벽에는 장정한 책과 가제본한 책들의 단조로움을 깨기라도 하듯 여기저기 판화, 데생, 사진들이 선반의 붙박이 나무 게시판에 붙어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성(聖) 제롬」, 「성 조지의 승리」, 피라네시의 「감옥」, 앵그르의 초상화, 클레가 그린 풍경화 소품, 콜레주 드 프랑스3) 연구실에서 찍은 르낭의 갈색 사진, 스타인버그가 그린 백화점 삽화, 크라나흐가 그린 멜란히톤4)도 있다. 창문 왼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놓인 로렌풍의 기다란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붉은색 압지가 깔려 있을 것이다. 넓적한 나무 그릇, 긴 필통, 갖가지 통에 펜, 클립, 스테이플러 심, 종이 끼우개 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유리 케이스가 재떨이 대용으로 쓰일 것이다. 고급스러운 금장식이 달린 아라비아풍의 둥근 검정 가죽 케이스에는 담배가 가득 들어 있을 것이다. 방향을 돌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 챙 모양의 초록빛 반투명 유리 갓이 달린 낡은 램프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을 것이다. 테이블 양옆으로 등받이가 높은 가죽 안락의자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을 것이다. 벽을 따라 왼쪽으로 조금 더 가다 보면 작은 테이블에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많은 책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을 것이다. 짙은 녹색 가죽 안락의자를 향해 회색 철제 정리함과 밝은색 목제 서류함이 놓여 있을 것이다. 방금 지나친 테이블보다 더 작은 테이블에 스웨덴제 램프와 방수포 덮개가 씌워진 타자기가 놓여 있을 것이다. 구석에는 좁은 파란색 벨벳 침대에 갖가지 색깔의 쿠션이 놓여 있을 것이다. 방 중앙에 놓인 나무 삼각 탁자 위에는 양은과 두꺼운 종이로 만든, 오래되어 보이도록 서툴게 꾸민 지구본이 놓여 있을 것이다. 책상 뒤로는 붉은 커튼에 반쯤 가려진 칠이 잘된 서재용 나무 사다리가 레일을 따라 방을 한 바퀴 돌 수 있게 되어 있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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